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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지금까지 미디어스에서 작성했던 기사 중, 최근 동향을 파악하는 데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글을 다시 게시한다.
이 글은 '이번에는 박근혜가 옳다는 '프레시안', 동의하지만…' 제하의 기사로 2013년 2월 6일 미디어스에 게재되었다.

정부조직법 개정안 중 통상교섭기능을 어느 부처가 가져갈 것인지에 대한 논란이 뜨겁다. 외교통상부 체계로 하는지, 산업통상자원부 체계로 하는지, 독립기구로 하는 지에 대한 말이 너무나 많다. 한쪽에서는 정무적·외교적 관점에만 치중했던 외교통상부의 통상교섭기능을 개별 산업 차원의 이해관계를 더 반영하기 위해 산업통상자원부로 개편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또 한쪽에서는 지식경제부가 통상교섭업무를 사실상 감당하기 힘들다는 주장을 편다. 또 다른 한 쪽에서는 외교통상부는 한미FTA라는 비극을 초래했고 산업통상자원부는 개발연대를 연상케하는 구시대적 발상이니 아예 통상교섭기능만 따로 떼서 독립기구로 만들자는 얘기가 나온다.

이런 상황에서 프레시안이 데스크 칼럼을 통해 인수위 측 구상에 일부 힘을 실어줬다. 내용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통상교섭기능은 원래 구 상공부 기능이고 세계적인 차원으로 봐도 산업 관련 부처가 통상교섭기능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통상관료들이 외교통상부를 지키고 앉아 조약 체결에만 열중해 광우병 논란 등을 포함한 한미FTA 문제가 발생했으니 통상관료들의 목줄을 죄는 차원에서 인수위 측 구상을 긍정적으로 평가해줄 수 있다는 것이다.

 
▲ 인수위 측 정부조직개편구상 일부를 긍정한 프레시안의 데스크 칼럼

참으로 바른 말이다. 공무원 사회는 간단하면서도 복잡한 매커니즘을 통해 굴러간다. 인맥, 학맥, 지역 연고 등을 모두 고려해야 하지만 그래도 가장 크게 따져볼만한 요소는 어느 부처 출신이냐는 것이다. 관료들은 경제기획원 출신, 재무부 출신, 상공부 출신, 외무부 출신 등 출신 성분에 따라 끼리끼리 뭉친다. 이들은 정권이 바뀌면 서로 끌어주고 챙겨주며 퇴임을 해서도 나름의 친목단체를 만들어 자기들끼리 민간에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최대한의 배려를 한다.


▲ 이헌재 전 부총리가 재정경제부 출신 관료들의 친목회인 재경회 7대 회장이 됐다는 매일경제의 2012년 1월 12일자 단신. 재경회는 재무부 출신들의 친목회인 재우회와 경제기획원 출신들의 친목회인 경우회가 합쳐 만든 조직이다.

정부조직개편에서 이들이 권한을 잃지 않으려고 각자 치열하게 움직이는 이유도 따지고 보면 이런 데 있다. 외교통상부 관료들은 통상교섭기능을 갖고 있었던 덕에 퇴임이후 민간에서 온갖 좋은 역할을 다 할 수 있었다. 외교통상부의 통상교섭기능을 중심으로 형성된 인적네트워크가 민간기업에도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통상교섭기능을 빼앗긴다는 것은 현직 관료들뿐만 아니라 전직 관료들의 입지도 크게 축소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부 부처에 인적 청산이 이루어져서 민간에서 한 자리씩 하던 전직 관료들이 집에 가게 됐다는 식의 소문은 낯설지 않다. 통상관료들 입장에서는 목숨을 걸어야 하는 문제다. 김성환 장관이 논란이 될 것을 알면서도 헌법을 들먹이며 길길이 날뛰는 데에도 다 이유가 있다. 이들의 전방위적 활약 덕분에 벌써 국회 외통위 의원들은 여·야를 가릴 것 없이 모두 포섭(?)됐다. 야당인 민주통합당도 통상교섭기능을 외교통상부에 그대로 놔둘 것인지, 독립기구화 할 것인지가 합의가 안 되는 상황이 이어지다 지난 달 말에야 독립기구화로 당론이 정해졌다는 후문이다.

따라서 옛 상공부 출신 관료들에게 다시 힘을 실어주는 결과로 이어지더라도 일단 그동안 많이 해먹은 외교통상부 출신들을 당분간 조용히 시키는 것은 의미가 있는 일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프레시안의 데스크 칼럼에 충분히 동의할 수 있다.

그러나 역시 우려되는 지점이 있다. 이런 이야기를 하다가 함정에 빠질 수도 있다는 게 그것이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자. 프레시안의 데스크 칼럼은 구체적인 개별산업의 이해관계를 염두에 두지 않았던 외교통상부의 대표적 실책으로 광우병 논란을 꼽는다. 민동석 당시 농업통상정책관이 외무고시 출신이라 농업정책에 대해 아는 게 없어 미국이 원하는 것을 다 들어준 결과라는 거다.

그러나 농업에 대해서 아는 게 없는 건 산업통상자원부(이 모델은 사실 엄밀히 말하면 김영삼 정부에서 상공부에 동력자원부를 합쳐 만든 상공자원부모델과 일치한다)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제조업과 서비스업 중심의 사고방식을 가진 관료들이지 1차 산업인 농업과 축산업에 전문성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다. 부처의 개편만으로 광우병 논란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하면 우리는 산업통상자원부가 아니라 농림축산통상부를 만들어야 한다.

통상교섭기능을 산업 관련 부처에게 부여하는 것만이 소위 ‘국익’을 더 수호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주장도 100% 올바른 얘기는 아니다. 예를 들자면 미국의 무역대표부(USTR)는 대통령 직속의 독립적인 각료기구이지만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수퍼301조’ 등을 통해 자국의 이익을 방어하는 데 최선을 다한다. 물론 복잡한 문제가 있어 오바마 행정부가  상무부, 미 수출입은행, 해외민간투자처, 중소기업청을 무역대표부와 통합하는 부처 개편에 나선다는 점이 강조되기도 하지만 이러한 조치는 근본적으로 무역대표부의 권한 확대를 위한 것이며 이전에도 무역대표부는 나름의 활약을 해왔다.

물론 프레시안도 이러한 점을 잘 알고 있으므로 ‘구체적으로 어떻게 부처를 개편할 지에 대해선 숙고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게 ‘정부조직개편’에 한정해서 풀 수는 없는 문제라는 것이다.


▲ 이명박 대통령이 3일 청와대 위기관리실을 찾아 북한군 동향과 우리측 대비태세를 점검하고 있다. (청와대 제공) ⓒ뉴스1

결국 통상 교섭의 체결권은 대통령이 가지는 것이고 부처 장관은 이를 위임받을 뿐이다. 국회는 조약에 대한 비준동의권을 가진다. 어느 부처가 무엇을 담당하느냐 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어떤 국정철학을 가지고 어떤 조약을 어떻게 처리할 것이냐의 문제라는 얘기다. 산업통상자원부를 만들겠다는 것은 소위 민주정부 10년에서 추진돼온 3차산업 중심의 국가 정책을 일부 수정하는 것으로도 비춰질 수 있다. 금융위기 등의 문제 때문에 다시 제조업 중심으로 돌아가려는 세계적 추세를 따를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장하준 총리설’과 같은 루머가 돌았던 것도 이러한 사정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이런 청사진이 지금 필요한가에 대해서 많은 논의가 있어야 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리고 언론은 그러한 수준의 담론을 생산하는 데 도움을 주는 공적 역할을 적극적으로 수행할 필요가 있다.

이런 문제들을 고려하지 않고 정부조직개편이라는 이슈에 접근했을 때 자칫 잘못하면 작은 변화로 근본을 해결했다는 착각에 빠지는 함정에 빠질 수도 있다, 그냥 이런 우려를 잠시 표현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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