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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한때 진보 정당의 상근자로 일하던 시절 동네 초등학교 보육 교사 한 명이 해고를 당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투쟁'에 함께 한 일이 있었다. 나는 또 한 명의 노동자가 부당한 대우를 받게 된 것에 분노하며 보육 교사를 해고한 초등학교 앞에서 일주일에 한 번씩 아침마다 1인 시위를 했다.

1인 시위 시간은 선생님들이 출근하는 7시 반부터 학부모들이 아이들의 등교를 도와주기 위해 함께 오는 8시 30분까지로 정했다. 해고당한 보육 교사는 자신의 일에 남들이 나서주는 것에 고마워하며 1인 시위가 끝난 다음 아침 식사를 자신이 책임지겠다고 말했다. 나는 해고를 당한 당사자가 그러한 금전적 부담을 지는 것에 대해 미안하다는 생각을 했다. 자신도 어려운 상황일 텐데.

아무거나 싸구려 음식을 먹었으면 더 좋았겠지만 그 선생님은 꼭 가격이 약간 비싼 죽 전문점을 이용했다. 나는 마치 금가루가 뿌려진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죽을 숟가락을 떠먹으면서 해고당한 선생님의 푸념을 들어주곤 했는데, 어느 날은 미처 상상하지 못한 얘기까지 듣게 되어 혼란스러운 상황에 빠지게 됐다.

나를 혼란스럽게 한 그 선생님의 말씀이라는 것은 이런 것이다.

"남편이 500만 원만 벌었으면 좋겠어요!"

물론 나도 내 부모나 친인척이 부자였으면 좋겠다는 상상을 해본 일은 있으나 그런 정도의 얘기는 아닌 것 같아서 '남편 분이 지금은 얼마를 버시는데요?' 하고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선생님은 대답했다.

"380만 원이요."

나는 깜짝 놀랐다. 아마 방과 후 보육 교사 월급이 120만 원 정도는 하지 않았을까를 추측해볼 때 결국 이 가정은 한 달에 500만 원의 소득이 있어야 편하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당시 내가 받는 상근비가 110만 원 정도였고 가정에 다른 소득이 없었으니 결국 가계 소득 110만 원인 사람이 가계소득 500만 원인 사람을 위해 1인 시위를 했다는 얘기가 되니 이게 얼마나 기가 막힌 일인가?

물론 가계 소득이 500만 원인 사람들도 나름의 고충에 시달리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한다. 예를 들자면, 500만 원의 소득을 올릴 수 있는 직업에는 그에 걸 맞는 옷과 자동차가 필요할 것이며 그 정도 수준의 사람들이 즐기는 음식과 음주 문화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을 것이며, 어느 정도 부가 쌓이면 결혼, 출산, 육아를 위한 지출을 시작해야 할 것이다. 실제로 내 주위에 연봉 6000만 원을 버는 사람들도 삶의 고충을 호소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2000년대 초반 비웃음의 대상이 됐던 모 신문의 '연봉 1억 이하는 중산층'이라는 표현은 일말의 진실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산업 혁명 시대에는 자본가와 노동자를 매우 쉽게 구분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시대에는 옷차림과 얼굴색으로만 그 사람이 어느 계급 소속인가를 추측하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라는 점을 우리는 직관적으로 추측할 수 있다. 하지만 오늘 날의 계급 관계는 과거와 같이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다 떨어진 옷을 입고 있어도 강남의 18억짜리 아파트에 사는 사람일 수 있고 그럴듯한 치장을 하고 있어도 언덕 꼭대기 건물의 옥탑방에 사는 사람일 수 있다. 가난한 사람이든 그렇지 않은 사람이든 똑같은 모델의 스마트폰을 사용하고 있으며 빈부격차에 상관없이 거의 모든 사람이 인터넷 쇼핑을 즐기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가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이상은 거기에 계급(꼭 마르크스주의적 의미가 아니더라도)이라고 부를 만한, 어떤 계층적 구분이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당신의 계급 사다리는 안전합니까?>(김종목·김재중·손제민 옮김, 사계절출판사 펴냄)는 바로 이런 구분에 대한 <뉴욕타임스>의 탐사 기획 보도를 모아놓은 책이다.


▲ <당신의 계급 사다리는 안전합니까?>(뉴욕타임스 지음, 김종목·김재중·손제민 옮김, 사계절출판사 펴냄). ⓒ사계절출판사

기자들은 마치 박물지를 만드는 것처럼 문제에 접근한다. 통계 자료와 사회학 이론을 들먹이는 대신 실제 오늘의 미국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 그 자체를 취재한 것이다. 기본적인 조사 자료를 보면 상당의 보통 사람들이 계급에 의한 사회적 구분은 무의미하며 계급적 이분법을 통해 사회를 분석하는 것은 철이 지난 틀일뿐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자본주의의 발전에 따라 이제 실질적인 계급 계층 간의 장벽은 허물어졌으며 개인의 노력 여하에 따라 계급 계층 간의 이동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책에 의하면 미국 사회에서 계급 계층 간의 이동이 전혀 일어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보면 계급에 대한 오늘날의 일반적 믿음이 일정한 근거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자본주의 체제의 선전처럼 자기가 처한 여러 가지 여건에 따라 하층 계급이 상층 계급으로 이동하는 일은 분명히 일어난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이동이 일어날 때조차 계급적 차이가 드러나지 않는 순간이 없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한 사람이 소속된 계층 계급에 따라 문화가 형성되므로 개인들은 자라면서 자신이 소속된 계층의 문화를 체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점에서 생각을 시작해볼 수 있다. 즉, 계층의 이동은 자신이 겪지 못한 상이한 문화를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라는 얘기다.

예를 들어, 가난한 집에서 자란 사람은 생일 선물을 받을 때 그것의 금전적 가치보다 상대방의 '마음'을 더 중요시해야 한다는 점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자라났을 것이다. 그런데 상대적으로 풍족한 집안의 사람은 바로 그 '마음'을 결국 금전적 가치로서 표현한다! 이 두 사람이 결혼을 하였을 때 서로 예상하지 못한 곤란한 상황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은 잠깐만 생각해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갈등이야 말로 계급 계층 간의 벽을 드러내는 하나의 요소가 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것 아닐까?

고전적인 마르크스주의의 분석에서 계급의 구분은 '생산 수단의 소유 여부'로 판단된다. 하지만 이후 등장한 여러 이론들에는 '생산 수단의 소유 여부'를 보다 광범위한 측면에서 파악하려고 하는 흐름이 있는 것 같다. 계급 구분을 생산 수단인 자본재 이외에도 조직재, 자격 및 기술재 등으로 파악해야 한다는 에릭 올린 라이트와 같은 사람들의 작업이 대표적인데, 꼭 계급론에 대한 이론적 작업이 아니더라도 계급과 계층을 나누는 단서를 문화적 차원을 포함한 다양한 요소에서 찾아보려는 시도는 늘 있어 왔다. 아마 폴 윌리스가 영국 미들랜드의 산업 도시 해머타운의 문제아 열두 명의 삶을 추적한 <학교와 계급 재생산>(김찬호·김영훈 옮김, 이매진 펴냄)과 같은 책들은 이러한 시도의 대표적인 결과물일 것이다.

<당신의 계급 사다리는 안전하십니까>는 이러한 맥락에서 마치 씨줄과 날줄처럼 연결되어 사회 구성원 모두를 둘러싸고 있는 다양한 형태의 계급적 진실들을 파헤쳐 보려는 시도를 하는 것 같다. 자본주의의 발달은 빈부 격차를 심화시키고 계급적 불평등을 야기했지만 동시에 다양한 분야에 걸친 압도적 생산력으로 이러한 불평등의 요소를 은폐하고 이를 통해 사회 구성원들이 자신의 삶을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걸 맞는 것으로 재편하는 동기를 부여하고 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사례는 어떻게 보면 자본주의의 이러한 은폐 시도가 실패하는 지점을 집중적으로 취재함으로써 계급의 불평등을 폭로하는 기능을 수행하려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러한 작업의 의의는 무엇인가?

이 책에 등장한 사례들이 미국의 것에 한정되어 있다는 사실에 잠깐 주목할 필요가 있겠다. 미국은 우리가 잘 알다시피 워싱턴 컨센서스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의 논리에 강하게 지배받는 국가이다. 책의 사례들은 이것을 떠나서 사고될 수 없을 것이다.

대표적인 예로 책의 초반부에 나오는 심장마비 환자들의 사례를 생각해보자. 이것은 사람이 병에 걸렸을 때 각자의 계급적 처지에 따라 겪게 될 의료 서비스의 종류와 질이 달라져 결국 인생 전체에 걸친 계급적 문제를 야기한다는 점을 심도 있게 파헤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사례의 배경이 의료 서비스의 공공성이 확보되고 강력한 사회보장제도가 존재하는 국가였다면 여기에서 계급적 불평등을 명확하게 드러내도록 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을까? 그리고 사실은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이 집중해야 할 지점도 바로 여기이지 않는가 하는 것이 내 생각이다.

즉, 이 책의 폭로(?)는 그것에 대한 대책을 수립할 것을 필연적으로 요청하게 된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그리고 이러한 요청은 앞서 언급한 자본주의의 계급적 불평등에 대한 은폐 시도를 더욱 완벽한 것으로 만드는 것에 집중될 것인데, 이견이 있을 수도 있겠으나 어떻게 보면 이것이야 말로 진보 정치의 필요성을 다수 대중에게 강변할 수 있는 유용한 도구가 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 점에서 <뉴욕타임스> 기자들은 박물지와 같은 외양을 하고 있지만 사실은 꽤 정치적인 책 하나를 만들어 낸 셈이라 말할 수 있겠는데, 국내의 언론들도 이를 본받아 이러한 시도를 계속하여 한국 사회의 근본적 문제들을 드러내고 이를 통해 진보 정치가 대안을 만들어 갈 수 있는 다양한 환경들이 조성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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