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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본문에서도 나오지만, 참여정부는 포털 사이트를 규제할 수 있었던 기회를 스스로 차버렸다. 그것도 언론운동권들의 건의를 받아들여서 그렇게 했다. 사람들의 뉴스 소비를 사실상 규정하는 포털에 대해선 기존의 언론비판의 논리를 들이대지 않았던 것이다. 왜 그랬을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변희재의 불만처럼 “포털이 ‘우리편’이라고 여겨졌기에 조중동을 견제하기 위해” 그렇게 풀어줬다는 것도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참여정부나 참여정부에 조언했던 언론운동권 모두 그렇게 생각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포털이 참여정부를 지원한 방식은 상업주의 때문이었지 그 어떤 개혁성 때문은 아니었고, 정치성이 어떻든 언론의 역할을 하는 단체가 언론의 책임윤리의 대상에서 면제되어 있다는 것은 일종의 ‘반칙’이었다. 


그리고 참여정부가 당장의 이익(?)을 위해 포털을 방관한 결과는 2007년 대선에서의 ‘네이버 평정’과 2009년 노무현 서거 국면에서의 ‘노무현’ 검색어 삭제로 대표될 수 있는 포털사이트의 사실왜곡 사례들로 돌아왔다. 물론 신문법을 그들에게 적용했다고 해서 올바른 개혁을 할 수 있었을지는 의문이지만, 무언가 다른 기획을 할 수 있었는데 시도조차 하지 못했다는 것은 아쉬운 일이다. 무엇보다, 이 사례는 “당장 우리편으로 보인다고 원칙을 구부려서 적용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어떤 손해를 가져올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팟캐스트를 대안언론으로 찬양하면서도 그것이 해적방송이란 이유로 언론윤리를 적용하는 것은 거부하는 그 조류가, 과연 ‘새로운 진보’를 보여주고 있는 것인지 면밀히 성찰해 볼 일이다.   




잊혀진 이야기  14  안티조선 논객 열전 - 변희재 편
《안티조선 운동사》,텍스트(2010),p416-427

‘변희재’라는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인터넷에 꽤 관심이 많은 사람일 거다. 변희재를 아는 사람들은 그를 상대하지 않는 게 미덕이라 주장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변희재 문제’는 그 자체로 흥미롭기도 하지만 한국 사회의 언론 운동이 어떤 부침을 겪었는지를 보여 주는 바로미터다. 한국 사회가 좀 더 합리적이었다면, 변희재는 사람들이 욕하는 그런 모습으로 변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사람들은 변희재의 얘기 중에서도 받아들일 내용이 있다는 사실을 철저하게 외면한다는 점에서 변희재에 대해 공정하지 않다. 변희재가 《조선일보》로 가게 된 까닭은 ‘변절’이라는 한마디 말로 규정할 수 없다. 

변희재는 강준만의 열렬한 지지자였다. 그는 민주당 지지자였고, ‘자유주의자’를 자칭했으며, 1990년대 말, 대학교의 운동권 학생들과 이념적으로 불화했다. 한국 사회에서 좌파는 정치적으로 소수인 주제에 담론적으로는 주도적인 영향력을 지닌다. 좌파가 선거에 나오면 지지율이 2~3%밖에 안 된다. 그런데 정치에 열렬한 관심을 가졌다고 말하는 이들 중에는 좌파를 자칭하는 이들이 많다. ‘전투적 자유주의자’ 강준만이 등장하자 ‘자유주의’를 정치적으로 강력하게 주장하는 이들이 결집을 꿈꾸기 시작했다. 변희재는 대학 사회 안에서 자유주의의 대변자가 되고 싶어 했다. 변희재는 줄곧 운동권 학생들, 특히 세기말 운동권 사회에서 맹위를 떨쳤던 신세대 페미니스트들(속칭 ‘영 페미’라 불렸던 이들)과 불화했다. 하지만 변희재 역시 한때는 ‘변이희재’라는 아이디로 ‘양성쓰기’를 실천했던 사람이다.
 
그런 변희재가 강준만에게서 매력을 느낀 부분 중 하나는 ‘개혁 상업주의’에 관한 것이었다. 강준만은 상업주의를 죄악시한 좌파들과는 달리, 개혁 세력도 상업주의를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정치적 적대자들에게 맞설 수 있다고 보았다. 강준만이 월간 《인물과 사상》이란 잡지를 스스로 창간했을 때, 사람들은 교수가 왜 장사질을 하느냐며 못마땅한 시선을 보냈다. 강준만은 이에 맞서며 ‘개혁 상업주의’를 옹호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의 눈으로 보면 애초에 광고 수주를 포기한 그 잡지는 상업주의의 발현이라기보다는 사회봉사 활동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보다 덜 상업주의적인 잡지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러나 어쨌든 변희재는 좌파들에 맞서는 ‘스승’ 강준만의 ‘개혁 상업주의’를 중요한 덕목으로 체득했다.
   
변희재가 특히 관심을 가진 것은 ‘스타 마케팅’이었다. 변희재는 가령 미국처럼 연예인도 정치적 의사를 스스럼없이 밝힐 수 있는 사회를 꿈꿨다(10년 후엔 연예인 정진영과 김민선을 두고 지적 수준이 딸리는 사람들은 정치적 견해를 표명해선 안 된다고 비판하긴 했지만 말이다). 만약 어느 연예인이 안티조선이나 진보 정당에 동의한다면 그 운동에 얼마나 큰 힘이 되겠느냐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한국 연예인들이 처한 구조적으로 열악한 현실을 생각해 볼 때, 왕년의 변희재가 내놓은 기획은 성공할 수 없을 것 같다. 하지만 당시에는 그의 견해에 좌파들의 고루한 인식을 질타하는 ‘참신한’ 점이 없지 않았다. 변희재는 강준만이 운영하는 출판사 인물과사상사에서 《스타비평 1~3》(인물과사상사, 2000)이란 책을 주도적으로 저술하여 대중문화에 관한 글을 선보였다. 《스타비평》은 이론적인 문화 평론과는 거리가 먼 연예인에 대한 소비 대중의 품평 모음집이었는데, 아마도 오늘날이었다면 여느 누리꾼의 글과 다를 바 없다 하여 출판되기 힘들었을 것이다. 

대중문화를 활용하자는 변희재의 관심은 실천적인 조언으로도 나타났다. 가령 그는 《조선일보》 기자와 《한겨레신문》 기자의 사랑을 소재로 한 로맨스 소설을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에는 1) “《조선일보》 기자와 《한겨레신문》 기자는 원수일 것이다” 2) “《조선일보》 기자는 악당이다”라는 두 개의 판타지가 드러났다. 나는 그런 판타지에 동의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주장을 절대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하지만 저런 판타지의 도식 속에서 얘기를 전개하는 것은, 어쩌면 로맨스 소설이라는 장르에 퍽이나 잘 어울리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변희재는 스스로 소설가로 데뷔하지는 않았다.

대신 변희재는 기자가 ‘스타’가 되어야 사회가 바뀔 수 있다고 주장했다. 사주가 지면을 통제하는 언론 현실에 맞서 기자 개개인의 개성과 능력이 발휘될 때 ‘개혁 담론’도 힘을 받을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변희재의 주장은 물론 옳다. 그리고 그것은 ‘지식인’을 ‘언론(사주)’으로부터 해방시키자는 강준만의 ‘지식인론’을 기자 사회에 적용한 듯했다. 문제는 기자를 어느 정도 ‘스타’로 만드는 방법조차도 《조선일보》가 제일 잘 안다는 데에 있었다. 《조선일보》의 ‘이동진의 씨네마레터’로 유명한 이동진 기자가 그 예였다. 《조선일보》는 그만큼 상업성에서도 앞섰고, ‘스타 기자’조차 정치적으로 통제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스타 기자’의 거의 유일한 사례였던 이동진 기자마저 훗날 《조선일보》를 떠나게 되면서 변희재의 주장은 설 자리를 잃었다. 변희재는 어쩌면 스스로 그 ‘스타 기자’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지만, 어느 곳에서도 기자로 일할 기회를 잡지는 못했다.  

변희재는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매체 환경에서 자신만의 매체를 만들고 싶어 했다. 그는 매체의 힘을 믿었고, 자신의 언론을 만드는 일에 집착했다. 어쩌면 그것 역시 스스로 매체의 창시자였던 강준만에게 그가 존경을 표하는 방식이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변희재는 대학 사회 내에서도 여러 종류의 웹진에 관여했으나 뚜렷한 성과는 내지 못했다. 변희재는 초창기 안티조선 운동 진영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웹진 《대자보》에서 편집국장으로 일했는데, 여기서 그는 ‘1차 강준만-진중권 논쟁’과 ‘월장 사태’를 계기로 진중권과 불화했다. 

그렇지만 변희재가 처음부터 10년 후에 보여 주는 볼썽사나운 태도로 진중권을 무시했던 것은 아니다. 1999년 11월 24일에 웹진 《대자보》에서 변희재는 자신의 인터뷰 연재의 첫 손님으로 진중권을 초청했다. 그는 진중권이 “이미 한국 지식사회에서 작은 거인으로 등장”하고 있다고 평했고 “그의 저서 《미학 오디세이》는 내가 처음 미학을 공부할 때 길라잡이 역할”을 했다고 고백했다. 물론 우리는 10년 후 변희재가 진중권이 전문성이 없는 사이비 지식인이며 자신은 대중문화 평론에 전문성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변희재의 인생의 반전은 노무현과 함께 찾아왔다. 2002년 가을, 《국민일보》 서영석 기자는 노무현을 옹호하는 논객들 몇 명을 그러모으고, 안티조선 우리모두의 시스템 관리자였던 ‘이름쟁이(ID) ’의 시스템 지원을 받아 친노무현 성향의 정치 토론 웹진 《서프라이즈》를 출범시켰다. ‘진짜 칼럼주의’라는 표어를 내세운 《서프라이즈》는 인터넷에서나 가능한 길이 제한 없는 칼럼(?)으로 노무현을 옹호하는 사이트였다. 대선 국면에서 《서프라이즈》는 노무현의 개인 홈페이지인 ‘노하우’, 노무현 팬클럽의 대명사인 ‘노사모’와 함께 노무현을 옹호하는 담론을 생산하는 가장 강력한 기지로 기능했다. 그리고 변희재는 회원이 수만 명에 이르는 《서프라이즈》의 대표가 되었다. 
 
2002년 대선 당시 변희재는 자타가 공인하는 친노무현 논객이었고, 조중동에 대한 가장 강력한 비판자였다. 변희재는 노무현과 정몽준의 후보 단일화도 가장 적극적으로 옹호했는데, 그는 여론 조사 방식 후보 단일화가 사실은 단일화가 아니라 정몽준과 이회창을 각개 격파하기 위한 전술적 책략이라고 주장했다.
 
2003년에 이르자 한때 안티조선 운동을 같이 했던 노무현에 비판적인 좌파들이 ‘진보누리’ 라는 정치 토론 사이트를 설립했고, 그곳의 대표적인 논객이었던 진중권은 마치 왕년에 조독마에 출격하듯 《서프라이즈》에 와 글을 올리기 시작했다. 이라크 파병으로 좌파와 노무현 지지자 사이에 이견이 발생하던 시기였다. 그러나 《서프라이즈》는 예전의 조독마보다도 훨씬 폐쇄적인 사이트였다. 유저는 각 게시물에 대해 플러스 점수와 마이너스 점수를 줄 수 있었는데 (가능 점수는 최하 -5점에서 최고 +5점까지였다) 마이너스 점수가 일정 수준 이상 누적되면 그 게시물은 삭제됐다. 진중권의 게시물은 욕설도 도배도 아니었음에도 올라오자마자 그 글을 보기 싫어한 유저들이 일사불란하게 마이너스 점수를 줘서 삭제됐다. 점수제가 마치 도편 추방제처럼, 합리적 기준에 의한 제재가 아니라 구성원들이 정서에 반하는 게시물에 대한 제재로 변한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삭제해서 진중권이 글을 계속 올리는 상황을 만들어 놓고는 그것이 ‘도배’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나중에는 마이너스 점수가 차기를 기다리지도 않고 ‘관리자’ 변희재가 진중권의 게시물이 올라오는 대로 삭제했다. 진중권은 “J.S. 밀을 운동권에게 설파하던 자유주의자가 게시물을 임의로 삭제하는 이유가 뭐냐”고 따졌지만 변희재는 그것이 이곳의 룰이라고 답변할 따름이었다.   

‘희재의 전성시대’는 오래가지 못했다. 서영석 기자는 《서프라이즈》가 잘 되자 《국민일보》를 그만뒀다. 사람들은 이제 서영석 기자가 《서프라이즈》 대표를 맡으리라 생각했다. 변희재는 시스템 관리자 등을 동원하여 저항했고 한동안 암투가 일어났지만, 결국엔 변희재가 내쫓겼다. 변희재는 그 후 여기저기를 떠돌다 2003년 12월에 웹진 《브레이크뉴스》에 안착했다. 그렇기는 해도 2003년은 전반적으로 변희재에게 좋은 시절이었다. 《한겨레신문》 여론 매체 위원을 지내면서 여섯 차례나 《한겨레신문》에 기고했기 때문이다. 

서영석과의 알력이 없었더라도 변희재가 《서프라이즈》에 오래 있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민주당을 깨뜨리고 새로운 여당인 열린우리당을 창당한 것을 계기로 인터넷상에선 ‘노무현’을 더 중시하는 지지자들과 ‘민주당’을 더 중시하는 지지자들이 분화하기 시작했다. 《서프라이즈》의 골수 민주당 지지자들은 동프라이즈, 남프라이즈 등 새로운 사이트를 만들어 분리해 나갔다. 변희재의 ‘스승’ 강준만도 노무현에 매우 실망하고 2004년 총선에서 열린우리당 지지가 아닌 민주당 지지를 선언했다. 《브레이크뉴스》는 민주당 지지 성향의 웹진이 되었고, 그곳에서 변희재는 민주당이 김대중 노선을 회복해야만 한다고 말했다. 

변희재가 ‘포털 사이트’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바로 이 《브레이크뉴스》에서의 경험 때문이었다. 변희재는 《브레이크뉴스》를 키우려고 무던히 애를 썼다. 2004년 7월 30일, 그는 네이버에 《브레이크뉴스》의 콘텐츠를 공급하기로 계약을 맺었다. 새로운 도약의 계기를 마련한 셈이었다. 변희재가 2004년 9월, 여기자들이 몸을 팔아 스타를 인터뷰하는 경우가 있다는 지극히 선정적인 기사를 써서 물의를 빚은 이유도 아마도 포털에서 매체를 띄우기 위한 경쟁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기사에 관한 논란이 커지자 변희재는 1개월도 지나기 전에 사과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브레이크뉴스》의 편집국장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2005년 3월 23일, 변희재는 영화 평론가 이문원, 대중문화 평론가 조현우 등과 함께 ‘안티 포털(www.antiportal.net)’을 개설했다. 이미 2월부터 《경향신문》과 《한겨레신문》의 지면을 통해 포털에 대한 문제 제기를 공식화한 후였다. 4월에는 《한겨레21》에서 특집 기사 〈포털뉴스를 저격하라〉를 내며 그를 인터뷰했다. 그 후 그는 1년여 동안 《경향신문》과 《한겨레신문》 등에서 포털 문제를 지적하는 칼럼을 썼으나 점점 반향이 줄어들었다. 특히 《미디어오늘》에 보낸 포털 비판 글들이 게재되지 않자 그는 특단의 결심을 내렸다. 바로 《조선일보》 기고였다. 당시엔 참여정부와 ‘개혁 매체’, 그리고 포털이 ‘같은 편’으로 인식됐고 조중동이 그 반대편에 있었다. 포털에 대한 문제점을 사회적으로 이슈화하고 싶었다면 《조선일보》행이 좋은 선택이 될 수 있었다. 마침 2005년 한 해 동안 《조선일보》는 변희재의 ‘안티 포털’ 활동에 대한 보도를 간간히 내보내 주고 있었다.

2006년 3월 11일, 변희재는 《조선일보》에서 시론 <포털과 청와대의 신권언유착>으로 데뷔했다. 직전인 3월 4일에는 언론학자 최영재 교수와 함께 ‘신문 살리기’와 관련한 대담을 했다. 변희재가 처음에 《조선일보》로 가서 던진 메시지가 그르다고 볼 순 없다. 변희재는 앞에서 살펴봤듯이 인터넷 매체의 문제점을 스스로 실천한 사람이었지만, 그런 사람이 신문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다면 그도 그럴듯한 일이었다. 또 참여정부가 포털 문제에 대한 인식이 없는 상황에서 정략적 차원에서 포털을 적극 활용했단 점도 비판의 대상이 될 만했다. 변희재의 두 번째 시론은 3월 28일에 실렸는데, 민주당을 소외하는 《한겨레신문》의 정략적 보도 행태를 비판하는 글이었다. 이 역시 설득력 있고 필요한 얘기였다. 이 두 편의 글이 실린 이후에 변희재는 《조선일보》 ‘아침논단’에 정기적으로 글을 쓰는 필진으로 합류했다.

변희재의 2006년 《조선일보》 ‘아침논단’ 원고는 1) 포털 권력 비판 2) 포털 권력에 대한 규제 장치를 만들지 않고 친정부적으로 길들이려 하는 참여정부 비판 3) 포털 권력을 옹호하는 지식인 비판으로 이뤄져 있었다. 이런 비판들은 설득력도 있었고, 강준만이 처음으로 《조선일보》에 문제 제기하던 시절의 논조를 계승한 부분도 있었다. 변희재는 언론 개혁 세력이 조중동에 대한 비판 논리를 포털에는 적용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참여정부가 신문에는 신문법을 통해 무거운 사회적 책임을 부여해 놓고 포털은 신문법에서 배제한 상황이 불공정하다고 주장했다. 참여정부는 언론 운동 진영의 건의를 받아들여 포털을 신문법 적용 대상에서 제외해 줬는데, 이는 납득하기 어렵다. 그 외에도 변희재는 대중문화에 관한 제언과 386세대 이후 떠올랐던 ‘신세대’의 실종에 대해 말했다. 

이것들을 조합하면 어떤 상이 나온다. 386세대, 포털, 신세대, 대중문화. 엮어서 스토리를 만들어 보자. 대중문화에 대한 감각을 가지고 있는 신세대가, 불공정한 구조(=포털!)를 만들어 낸 386세대에게 눌려서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서른 줄에 들어선 변희재가 파악한 한국 사회의 문제였다. 그리고 아마도 이것은 변희재에게 ‘내가 출세를 못한 이유’이기도 했을 것이다. 물론 개인의 문제는 언제나 사회의 문제와 연관을 맺는다. 변희재의 생각이 100% 그릇되다고 볼 수는 없다. 하지만 변희재의 사회 문제 인식은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이었고, 자신을 위해 사회 문제를 왜곡하여 구성해 낼 위험성을 품고 있었다.

2007년, 아침논단 필자에서 물러나 다시 간간이 시론을 쓰게 된 변희재는 차츰 그 위험한 길을 밟아 나가기 시작했다. 변희재의 망상에 방아쇠를 당겼던 사건은 ‘<디 워D-WAR> 사태’였다. 과거 변희재와 악연이었던 진중권이 <디 워>의 애국주의 마케팅과 <디 워> 옹호자들을 비판하자 변희재는 여기서 386세대와 포스트 386세대의 대립을 보았다. 이제 문화 평론가 진중권은 변희재의 상상 속에서 포스트 386세대의 발랄한 창의성을 억압하는 기득권 386세대의 대표 주자가 되고 말았다. 

2007년 대선을 전후해 변희재는 정치적으로도 결정적인 한 발을 내딛었다. 이명박 대통령 취임사 작성에 참여하고 한나라당 의원들과 포털 규제 법안을 함께 추진하는 등 이명박 정부에 밀착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에 대해 그가 제기하는 “포털 문제, 청년 창업, 무료 신문 규제, 대중문화 선진화 정책” 등에 오직 한나라당만이 관심을 가져 주기 때문이라고 해명했다. 민주당과 열린우리당의 합당을 반대한 자신은 통합민주당이 탄생하면서 무당파가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주1) 즉 변희재는 자신이 파악한 한국 사회의 문제, ‘대중문화에 대한 감각을 가지고 있는 신세대가, 불공정한 구조를 만들어 낸 386세대에게 눌려서 자리를 잡지 못하는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한나라당을 활용하기로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변희재가 진보 진영에서 만들어 낸 ‘88만원 세대론’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필연이었다. 변희재는 이 담론을 자기식대로 해석했다. 변희재가 보기에 ‘88만원 세대론’은 386세대의 허위의식을 비판하고 세대 문제를 제기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하지만 변희재의 생각에 ‘88만원 세대론’은 20대의 자질이 386세대의 자질보다 뛰어나다는 사실을 통찰하지 못했다. 20대가 능력이 없다면 그들은 평생 88만 원을 받으며 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20대는 뛰어나기 때문에, 386세대의 훼방만 이겨 낸다면 놀라운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변희재는 주장했다. ‘신세대(X세대) ’부터 ‘88만원 세대’까지 386세대 이후의 모든 세대 담론은 386세대의 명명이었다고 변희재는 지적했다. 이에 대항하여 변희재는, 386 후세대의 이름을 스스로 명명하고자 했고 그리하여 ‘실크 세대’라는 조어를 만들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실크 세대는 “70년대 이하 생들로 386세대들과 달리 인터넷과 대중문화를 기반으로 전 세계를 연결하는 새로운 실크로드를 열어나가는 대한민국의 젊은 세대”다.(주2) 변희재는 그 실크 세대의 창업을 돕기 위해 ‘실크로드CEO포럼’이란 것을 만들고 이 단체의 회장이 됐다. 

변희재의 세대 규정이 그렇게 잘못된 것은 아니다. 청년 세대의 창업을 돕겠다는 프로젝트도 분명 한계는 있지만 나쁜 일이라고 볼 수는 없다. 문제는 다른 데 있다. 20대가 평생 88만 원을 받으며 비정규직으로 살게 되리라는 ‘88만원 세대론’의 예상은 20대의 자질과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한국 자본주의의 현실과 관련이 있다. 기업은 20대의 자질이 모자라기 때문에 그들을 뽑지 않는 것이 아니다. 필요한 인력은 적은데 취업하고 싶어 하는 젊은이가 넘쳐 나기 때문에 불균형이 생기는 것뿐이다. 20대가 취업이 안 되는 이유를 자질의 문제로 환원하는 기성세대의 술자리 담론 그 자체도 문제지만, 거기에 대고 “사실 20대는 능력이 있으므로 앞으로 잘 할 수 있을 거야”라고 말하는 건 하나 마나 한 소리다. 그 논리대로라면 변희재의 창업 프로젝트가 실패할 경우 결국 20대의 자질이 윗세대들보다 떨어진다는 것이 입증되는 우스운 결론이 나온다.   

더구나 창업 프로젝트를 내세운 이가 어째서 386세대를 적으로 상정해야 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이것은 ‘실크 세대론’의 내적 논리로는 파악할 수 없고 한국 보수 세력과 변희재의 욕망의 관점에서만 이해할 수 있다. 조중동은 2007년 대선에서 승리하기 위해 ‘반기업 정서에 찌든 386세대가 경제를 망쳐 이 혼란이 야기됐으니 청년 세대는 장년 세대와 연합하여 정권 교체에 협력하는 것이 옳다’는 논리를 유포했다. 보수 세력의 입장에서는 청년 세대와 장년 세대가 386세대를 정치적으로 포위하는 것이 언제나 ‘좋은 일’이다. 한편으로 변희재는 이미 자신의 망상 속에서 세계를 어그러뜨리는 주적으로 설정된 문화 평론가 진중권에 대한 개인적 원한을 배설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진중권은 변희재에 의해 ‘불공정한 구조 덕에 연명하는, 무능력한 386세대의 표본’으로 호출됐다. 

《88만원 세대》(레디앙, 2007)의 공저자인 박권일은 이렇게 비평했다. “‘능력과 전문성도 없는 386세대’와 ‘무한한 잠재력과 전문성을 가진 젊은 세대’로 구별짓기하는 변희재식 세대론은 세대론이 아니라 차라리 변형된 인종주의에 가까운 것이다. 저 발언을 보면서 나는, ‘능력도 없으면서 탐욕스러운 유태인’과 ‘무한한 잠재력을 가졌지만 유태인들 때문에 고난을 겪는 아리아인‘을 명확히 구별한 콧수염 달린 어떤 사내를 연상할 수밖에 없었다.”(주3) 나 역시 “이렇게만 본다면 변희재의 주장은 나치스의 인종주의 주장과 닮은 데가 있다. 1) 시장주의를 신봉한다. 2) 그러나 시장을 교란하는 무능한 불순분자들이 있다. 3) 이들을 타도해야 유능한 우리가 잘 먹고 잘 살 수 있다. 일치하지 않는가? 그 불순불자가 유태인에서 386세대로 바뀌었다는 것 정도가 차이점이다.”(주4)라며 변희재의 세대 자질론이 인종주의의 논리 구조와 동일하다는 사실을 지적한 바 있다. 

한국의 보수주의자들은 입으로는 시장을 신봉한다 말하면서도 정작 자신이 시장에서 실패하면 좌파 세력이 자신을 방해했기 때문이라고 우기는 경향이 있다. 그리하여 《조선일보》는 시장에서 실패하면 방송국을 자신에게 달라고 떼를 쓰고, 변희재는 담론 시장에서 무시당하면 창업을 할 테니 투자를 해 달라고 떼를 쓴다. 

변희재의 실크 세대론은 88만원 세대론의 맹점을 공략했고 노골적으로 정치적이었다. 하지만 이미 노티 나는 30대 중반의 변희재를 대표자로 포함시키기 위해 ‘70년대 이하생’들을 기점으로 삼은 이 담론은 우파들이 좋아하는 마케팅의 관점에서 볼 때 참신함이 부족했다. 《조선일보》가 적어도 세대론에 있어서만큼은 변희재를 버리고 G세대론을 들고 나온 데에는 그러한 까닭이 있었을 것이다. G세대는 1986년 서울 아시안 게임, 혹은 1988년 서울 올림픽 이후 태어난 이들을 지칭한 말로 역사상 가장 많은 지원을 받고 자라났으며 외국어 능력과 컴퓨터 능력으로 무장하고 글로벌 시대를 헤쳐 나갈 능력이 있는 젊은이들로 묘사된다. 알다시피 ‘G’는 바로 ‘Global ’의 약자다. G세대론은 변희재식 세대 자질론을 이어 갔지만 386세대에 대한 적개심을 소거했고 세대의 연령도 훨씬 낮췄다.

생물학적인 세대는 대략 25년 주기로 나뉘고 문화적인 세대는 10~15년 정도로 분절하는 것이 보통이니, 《조선일보》의 과도한 분절보다는 차라리 변희재의 세대론이 더 개념적으로 그럴듯하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실크 세대론이 정치적 필요와 개인의 욕심으로 억지로 만들어 낸 거라면, G세대론은 한국 사회의 욕망의 시선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 훨씬 비평할 가치가 있다. G세대론은 이를테면 김연아나 박태환을 신기하게 바라보는 한국 어른들의 시선을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다. 가령 2010 동계 올림픽의 금메달리스트들에게 붙여진 ‘88둥이’라는 명칭은 용어 정의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G세대론에 담긴 욕망을 정확하게 보여 준다. 실제로 그들은 G세대의 요건인 외국어 능력이나 컴퓨터 능력과는 상관없이 대회 이후 G세대로 불렸다.
 
하지만 앞으로도 변희재가 《조선일보》의 세대론에 맞춰 자신의 견해를 뜯어고칠 것 같지는 않다. 그는 단지 출세를 위해 《조선일보》나 한나라당에 투항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망상(이념?)을 실현하거나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조선일보》와 한나라당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변희재는 단순한 변절자가 아니라, 여전히 소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 소신은 ‘꺼삐딴 리’와 같은 자기 보존 본능을 넘어선 나름의 체계적(!) 망상 위에 펼쳐져 있는 것이다. 

진중권은 그를 ‘꺼삐딴 변’이라 불렀지만, 이런 측면에서 볼 때 변희재는 ‘꺼삐딴 리’보다는 차라리 허경영에 더 가깝다. 2009년 진중권이 정권의 외압 탓에 몇몇 대학에서 강의를 할당받지 못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자, 강준만을 비롯한 몇몇 지식인은 과거 진중권과의 악연에도 불구하고 진중권을 옹호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당시 변희재는 다소 어이없게도 왕년의 스승 강준만의 행동에 매우 당혹스러워하는 기색을 보였다. 이 사건은 내게 변희재라는 사람을 다시 생각하도록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어쩌면 변희재는 아직도 자신이 강준만주의자라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주1) 고동우, 〈돌아선 분, 헤매는 분, 종잡을 수 없는 분〉, 《시사IN》, 49호, 2008년 8월 18일. 
(주2) 변희재, 〈낡은 386은 가라. 20~30대 실크세대가 나간다〉, 《조선일보》, 2009년 1월 10일자.
(주3) 박권일, 〈88세대론 ‘조선’ 독우물에 빠지다〉, 《레디앙》, 2009년 1월 30일.
(주4) 한윤형, 〈변희재, 진중권이 아니라 ‘조선’ 386과 싸워라〉, 《프레시안》, 2009년 2월 11일.



댓글 '4'

김익명

2012.02.27 09:34:39
*.96.13.145

그래도 팟캐스트랑 포털사이트는 다른데요. rss에 mp3 붙인게 팟캐스트인데... 그걸 검열하겠다는건 개인블로그나 sns를 검열한다는 것과 같은 말인데요.  

하뉴녕

2012.02.27 22:41:08
*.246.73.41

책임성 얘기를 했지 검열 얘기를 한 게 아닙니다.:)

농담

2013.02.05 13:48:53
*.255.32.69

포털은 티비보다 더 집중형 미디어니 규제를 동원해 중립성을 강제해야 한다는 주장에는 공감.

상업주의 하에서 1구매자 1표주의의 민중적 시스템이 포털의 독점적 소통구조로 인해 왜곡된다는 암시에도 공감.


그러나 팟캐스트에 같은 논리 적용은 불공감.

독점적 유통구조가 확립되지 않았고 수용자의 적극적 선택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아직은 포털의 대척점에 서 있음.

누구나 만들고 유통시킬 수 있는 동안은 포털을 비롯한 전통적 미디어를 견제한다고 생각.


농담

2013.02.05 13:49:27
*.255.32.69

포털은 티비보다 더 집중형 미디어니 규제를 동원해 중립성을 강제해야 한다는 주장에는 공감.

상업주의 하에서 1구매자 1표주의의 민중적 시스템이 포털의 독점적 소통구조로 인해 왜곡된다는 암시에도 공감.


그러나 팟캐스트에 같은 논리 적용은 불공감.

독점적 유통구조가 확립되지 않았고 수용자의 적극적 선택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아직은 포털의 대척점에 서 있음.

누구나 만들고 유통시킬 수 있는 동안은 포털을 비롯한 전통적 미디어를 견제한다고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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