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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펌/김인식] 진보대통합 논의에 부쳐

조회 수 1252 추천 수 0 2010.12.28 20:3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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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질적 진척과는 별개로 진보진영 내에서 진보대통합 논의가 활발하다. 이 논의는 압도적으로 2012년 총선과 대선 대응에 맞춰져 있다. 그래서 진보대통합 논의에서 노동자 투쟁 같은 대중 행동은 이명박 정부에 맞서는 방법으로 올라와 있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물론 2012년 총선과 대선 대응은 작은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대중 행동을 호소하고 건설하려는 노력 속에서 진보진영의 총선과 대선 대안도 마련한다는 자세가 아니다 보니, 진보대통합 논의는 순전히 선거 논리로 대체되고 있는 듯하다. 한나라당의 집권 연장에 맞서 범야권연대(민주대연합)가 필요하다는 논리가 득세하는 배경이다.

한나라당의 집권 연장은 지금으로서는 배제할 수 없는 시나리오다. 반이명박 정서가 그렇게 강한데도 이런 시나리오가 유력하다는 사실은 한국 정치의 양극화가 그만큼 첨예해지고 있다는 뜻이자 민주당이 대중에게 정치적 매력을 못 주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한나라당의 집권 연장을 끔찍하게 싫어하는 사람들의 심정은 공감이 간다. 대중의 반감 때문에 2012년 대선에서 한나라당이 패배한다면 대중의 자신감이 올라갈 수 있고 그 결과 새로운 정치 공간이 열릴 수도 있다. 가령, 지난 6월 선거에서 진보 교육감들이 당선하면서 학교 비정규직들의 노조 건설 운동이 탄력을 받게 된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혹여 한나라당이 재집권할지라도 그것이 자동으로 노동운동의 대규모 패배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노동자 운동이 어떤 상태에서 우파 정부를 맞이하느냐가 중요하다. 노동자 대중 투쟁은 우파의 공세를 무력화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다.

그런데 진보진영 내 민주대연합론자들은 한나라당의 집권 연장 반대를 절대적인 과제로 여기고, 민주당과의 선거연합을 이를 위한 가장 중요한 수단으로 본다. 문제는 노동자 대중 투쟁이 어느 수위를 넘게 되면 민주대연합이 그 투쟁에 차꼬를 채우는 구실을 한다는 것이다.

물론 특정한 상황에서는 불가피하게 민주당과 연대해야 할 수도 있다. 선거에서도 민주노동당이나 진보신당 등의 진보 후보에게 투표하는 것이 우선이지만, 진보진영이 후보를 내놓지 못한 선거구에서는 “진보적 노동자들이 민주당/참여당 후보를 개혁적으로 여길 경우 그에게 비판적 투표”를 할 수 있다.[1] 이런 전술적 제휴조차 거부하는 것은 “사실상 자유주의자들로 하여금 지도적 지위를 점하게 하고, 노동자들의 정치교육을 그들 손에 맡기며, 결국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지도자에 지나지 않는 사람들에게 정치투쟁의 헤게모니를 넘겨주는 것이다.”[2]

그러나 민주당과 전술적으로 제휴할 때조차 민주당에 정치적으로 종속돼 운동의 요구를 민주당의 저급스러운 그것으로 낮춰서는 안 된다. 오히려 “프롤레타리아트의 당은 자유주의자가 1센티 앞으로 내딛으려는 바로 그 순간을 포착해서 그로 하여금 1미터 앞으로 나아가도록 만드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만일 그가 완강히 버틴다면 우리는 그를 제치고 그를 딛고 전진할 것이다.”[3]

그러나 개혁주의 지도자들이 추진하는 민주당과의 동맹은 이런 방식이 아니다. 그보다는 2012년 선거를 통한 공동정부 구성이라는 집권 프로젝트로 자리매김돼 있다. “반MB 연대는 기존 진보진영의 대통합과 함께 새로운 진보대연합으로서 동일한 위상의 전략적 과제[다.][4] 그래서 민주대연합은 부분적 투쟁을 둘러싼 진보정당과 자유주의 정당의 전술적 제휴 문제가 아닌 것이다.

‘빅텐트’론

‘빅텐트’론은 극단적인 민주대연합 전략이라 할 수 있다. ‘빅텐트’론은 아예 민주당부터 진보정당까지 포함하는 야권단일정당을 만들자는 주장이다. ‘국민의 명령’의 문성근, 사회디자인연구소장 김두수, 참여연대 정책위원장 김기식 등은 미국식 양당 체제를 구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빅텐트’론의 핵심은 독자적 진보정당 노선 폐기다. 문성근은 “민노당 역사만 보면 20년 가까이 되는데, 애써 온 건 존중하지만, 현실을 보면 어렵죠. … 국민들 눈에는 박정희 가문이 있고, 다음에 김대중·노무현 ‘가문’이 있을 뿐이야” 하고 말했다.[5] 김기식도 “예측 가능한 미래에 진보정당이 집권은 차치하고 독립적으로 자신을 확장할 역사적, 계급적, 대중적, 지역적 기반이 있는지에 대해 근본적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6]

그러나 정성희 민주노동당 최고위원은 “민주당을 중심으로 국민참여당, 창조한국당, 민주노동당, 진보신당을 흡수하자는 것에 다름아니다. 이는 1987년 대선 시기 김대중 비판적 지지에 이어 줄곧 민주당으로 흡수 동화된 재야진보세력들의 2012년 버전이다” 하고 옳게 비판한다.[7]

지난 지방선거에서만도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은 합쳐 2백17만 표(투표자의 10퍼센트)를 얻었다. 진보정당의 “독자적인 생존 기반이 어느 정도 마련되어 있는 상황에서 진보세력이 민주당이라는 신자유주의 세력의 빅텐트로 들어갈 이유가 전혀 없다”는 손호철 교수의 지적이 타당하다.[8] 진보세력의 지지 기반이 상당한 한국에서 미국식 양당 체제를 만들자는 것은 명백한 후퇴다.

미국 민주당의 현실은 ‘빅텐트’론의 문제점을 밝히 보여 준다. 애초 ‘빅텐트’는 ‘미국의 진보적 민주당원들PDA, the Progressive Democrats of American’의 프로젝트를 일컫는 용어였다. 2004년에 창립한 PDA는 민주당 안에서 진보적 대의를 위해 투쟁하는 전략을 표방했다. 곧, 미국에서 대중적 운동이나 “좌파”가 민주당을 민주적으로 접수할 수 있다면 그 당을 진보적 사회 변화의 수단으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곧,

PDA의 “빅텐트” 전망은 좌파가 친기업적인 민주당과 철저하게 독립한 당을 건설하는 것보다 좀더 “현실적”이고 성취 가능한 목표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논리가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알려면 2004년 선거 경험을 봐야 한다. 당시 거의 모든 좌파가 민주당의 텐트로 몰려갔다. 인기 없는 전쟁, 전례 없는 실업, 미국의 목표에 대한 비관주의에도 불구하고 조지 부시와 그의 보수적 의제가 2004년 선거에서 이기게끔 돼 있었는가? 많은 진보주의자들은 “그렇다”고 답했다. 미국이 치유 불가능한 보수적 나라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2004년 선거는 노동 대중에게 이라크 점령을 반대하고 건강보험을 지지하고 시민권 공격에 반대해 투표할 기회를 제공했는가? 호전적이고 친기업적이고 시민적 권리를 부정하는 케리-에드워즈 후보는 그 기회를 주지 않았다.
네이더-카메요의 독자적 대선 운동이 모든 핵심 쟁점에서 좌파적 대안을 제공했다. 그러나 PDA의 현 리더들과 그 협력자들을 포함해 많은 주요 진보적 지식인들과 활동가들이 퍼뜨린 “부시만 아니면 돼” 북소리 때문에 그들의 선거운동은 시작부터 주변으로 밀려났다. 2004년 이런 정치적 선택의 결과는 재앙이었다.[9]

미국의 양당 체제는 70여 년 전 미국 공산당의 역사적 실수 덕분에 성립될 수 있었다. 공산당은 1934년까지만 해도 로즈벨트가 자본가 정치인이고 ‘뉴딜’은 사기라고 공격했다. 그러다 스탈린의 지령을 받아 1935년 인민전선 정책으로 선회했다. 그때부터 공산당은 노조 지도자들을 앞세워 민주당 정치인들에 대한 착각을 퍼뜨렸고, 현장조합원들이 민주당과의 편안한 관계를 해치는 일이 없도록 단속했다. 비록 초대받지는 않았지만, 공산당은 로즈벨트 ‘뉴딜’ 동맹의 충성스러운 일원이 됐다. 마침내 1938년 공산당 지도자 유진 데니스는 인민전선이 “정치 연맹의 형태를 취할 수 있다”는[10] 이유로 제3의 정당 건설이라는 생각을 포기했다. 이것이 바로 미국식 양당 체제의 역사적 기원이다.

다행히 ‘빅텐트’론은 진보진영에서 별 호응을 얻지 못하고 있다. “이 주장은 현실의 대안이라기보다는 ‘열정’이라고 보는 편이 나으며, 설령 이것이 가시화되더라도 실제로는 민주-진보인사 몇 사람 정도가 모이는 행사로 그칠 것이다.”[11]

진보진영 내 민주당 ‘좌클릭’론의 문제점

한국에서 10여 년 동안 지지 기반을 넓혀 온 진보정당을 해체하고 민주당과 합당하라는 주장은 전혀 설득력이 없다. 민주노동당 지도부를 포함해 많은 개혁주의 지도자들도 민주대연합을 전폭 지지하면서도 진보정당 해체는 반대한다. 그러나 민주노동당 지도부는 진보정당의 독립성을 형식적 독립으로만 이해하는 듯하다. 가령, “민주당과 한나라당 사이에 샛강이 흐르고, 진보정당 사이에는 한강이 흐른다는 인식의 오류는 이미 이명박 정권 2년 반을 통해 확인”됐다는[12] 김기식 참여연대 정책위원장의 생각을 이정희 민주노동당 대표도 완전히 공유한다.[13] 이는 “자유주의적 개혁정당(민주당)과 좌파적 진보정당들 사이에 이념적·역사적 뿌리와 정서”가 다르다는 점을[14] 간단히 무시하는 생각이다. 특히 그 사회적 기반(전자는 자본가 계급의 일부, 후자는 노동계 상근간부층과 진보적 지식인들)이 다르다는 점을 보지 못한다. 그리하여 진보정당의 정치적 입지를 스스로 좁히고 있다.

그러나 민주노동당의 등장은 자본가 정당 밖에서 노동계급의 변화 염원을 대변하고자 하는 시도를 대표했다. 민주노동당의 등장과 부상 이면에는 첫째, 1997년 1월 노동법 개악 반대 파업과 1998∼99년 경제 위기와 2000년대 초반의 대중 저항이 있었다. 2000년대 초반 경제 회복을 배경으로 노동자 투쟁이 되살아났고, 무엇보다 2004년 청·장년들의 운동 참여가 두드러졌던 촛불운동이 있었다.

둘째, 부르주아 자유주의 정권의 등장이 있었다. 1998년에 박정희 군사정권 이래 처음으로 정권이 교체됐다. 김대중 정부는 일당 국가에 대한 대중적 반감 덕분에 등장했지만 집권 후 자본가 계급을 위한 정책을 추진했고, 노무현 정부까지 그 과정이 지속됐다. 자유주의의 배신과 개혁 파탄으로 그 왼쪽에서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위한 공간이 열렸다.

민주노동당이 이 공간을 부분적으로 메우는 구실을 했다. 민주노동당은 자유주의 정권이 배신한 개혁을 추진하고자 했다. 그러나 민주노동당은 자유주의 정당과 정치적으로 일관되게 단절하지 못하는 약점을 자주 드러냈다. 특히, 국회에서 이른바 ‘개혁 공조’라는 이름으로 열린우리당과 부적절한 동맹을 자주 맺었다. 그 결과 2005년 노무현 개혁의 제한성과 일부 허구성으로 환멸과 사기저하가 만연할 때 거기서 자유롭지 못했고 그 기회를 활용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 등장 후 벌어진 2008년 촛불운동과 경제 공황, 2009년 용산참사 항의와 쌍용차 투쟁 등은 ― 자유주의 정당인 민주당이 때때로 반사이익을 얻었지만 ― 진보정당들에 새로운 기회를 제공했다. 게다가 이명박 정부에 대한 대중적 반감이 있는데도 민주당의 지지도가 반등하지 않고 있다. 결코 순탄치만은 않겠지만, 민주당 밖에서 진보적 정치 대안을 창출하고자 하는 새로운 이니셔티브를 발휘할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이런 상황에서 민주당과 진보정당이 별 차이가 없다는 식의 주장은 이 가능성을 차단하는 효과를 낼 것이다.

그래서 최근 진보진영 내에서 민주당의 ‘좌클릭’이 회자되는 것은 위험한 징후다. 민주노동당은 진작에 민주당과의 동맹을 정당화하려고 그 당을 미화해 왔다. 최규엽 민주노동당 부설 새세상연구소 소장은 지방선거 전에 “민주당이 보이고 있는 반MB를 위한 진보민중 진영과의 지금까지의 연합 노력은 — 얼마나 진정성 있게 앞으로 지속될지 더 두고 봐야겠지만 — 어쨌든 민주당이 그동안 중심적으로 견지해 왔던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가치와 전략에서 벗어나려는 실천적 움직임으로 평가하고 싶다”고 말했다.[15]

민주당 ‘좌클릭’론은 진보신당 내에서도 나오고 있다. 진보신당 내 ‘연합파’인 박용진 부대표는 “[KEC]파업 현장에 와서 활개를 치는 민주당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 보수 표의 반발, 보수언론의 반발에 아랑곳하지 않고 진보 표를 잡겠다는 자기 전략을 보여 준 것입니다” 하고 말했다.[16] 그러나 민주당이 KEC 파업에서 한 일은 공장점거를 해제시킨 것이다. 민주당이 민주노총·진보정당 지도부에게 타협하라는 압력을 가했고, 이 노동계 지도자들이 KEC 노동자들에게 점거 해제를 ‘설득’했다. 민주당의 이런 행태는 새삼스운 게 아니다. 쌍용차 점거파업 때도 마찬가지였다. 한 쌍용차 조합원은 “지난해 쌍용차 파업 때도 추미애가 공장 안에 들어와 농성 해제를 요구했어요. 민주당은 이번에도 똑같은 짓을 저질렀습니다” 하고 <레프트21>에 말했다.[17]

그러나 민주당은 ‘좌클릭’은커녕 한나라당과의 구별점을 찾기 어려운 지경이어서, 민주당에 우호적인 언론조차 자주 실망감을 드러냈다. 7월 재보선에서 민주당이 참패하자 <한겨레>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국무총리실의 민간인 불법 사찰, 선진국민연대 및 ‘영포라인’ 출신 인사들의 불리한 갖가지 악재가 쏟아진 점까지 고려하면 민주당으로서는 변명할 여지가 없다.”[18] 불과 두 달 전 지방선거 때 나타난 반MB 정서가 줄어들 이유는 전혀 없었다. 민주당 후보들(특히 서울 은평과 충북 충주)이 진보적인 것은 고사하고 개혁적이지도 않았던 것이 패인이었다. 개혁과 진보를 염원하는 사람들이 이런 민주당에 투표할 마음이 생길 리 만무하다. 한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지방선거 때도 “민주당이 잘해서” 찍었다는 사람은 2.4퍼센트밖에 안 됐다.

민주대연합에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민주노동당조차 최근에 민주당 비판 논평을 심심찮게 발표해야 하는 상황이다. 가령 민주노동당은 10월 22일 대변인 논평에서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SSM규제법 분리처리 합의는 서민들 뒤통수를 친 것”이라고 민주당을 비판했다. 오죽하면 이정희 민주노동당 대표가 “민주당이 한 단계 뛰어넘을 수 있는 기회를 드릴 테니 못 이기는 척 따라오기라도 해 달라”고 애원하기까지 했다.[19] 민주노동당은 대중에게는 민주당이 ‘좌선회’하고 있다고 선전하고, 민주당에게는 야권연대를 위해 ‘좌선회’하라고 주문하는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민주당의 ‘좌클릭’ 운운은 불신받는 민주당에 얼토당토않게 진보적 색칠을 해주는 것이다. 이 주장의 정치적 귀착점은 민주대연합 정당화다. 실제로 박용진은 “과감하게 민주개혁세력과도 선거연합을 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20] 과거에 자주파의 ‘열린우리당 2중대’식 실천을 강하게 비판했던 그가 이제는 자주파를 흉내내고 있다.[21] 박용진의 에 앞서 진보신당의 실천이 먼저 있었다. 지방선거 때 진보신당은 경기(심상정)와 부산(김석준)에서 범야권연대에 참여했다.

심상정 진보신당 전 대표는 지난 지방선거에서 유시민을 지지해 경기도지사 후보를 사퇴했다. 그 뒤에 한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진보신당+민주노동당+친노 세력+시민사회’의 진보대연합] 가능성을 배제하지 말자는 생각이다.”[22] 그는 대선에서도 민주대연합을 할 수 있다고 시사했다. “대선은 연립정부 구성의 논의가 가능할 경우 선거연합의 검토가 가능할 것[이다.][23]

진보신당의 주요 리더들이 공공연히 민주대연합을 옹호하는 상황은 민주노동당 지도부를 고무하고 있는 듯하다. 게다가 진보 양당이 경쟁하는 상황에서 진보신당의 비판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던 민주노동당 지도부로서는 정치적 부담감을 덜 수 있게 됐다. 진보교수연구자모임(진교연)의 교수들이 ‘선 진보대연합, 후 조건부 민주대연합’론을 채택한 것도 민주노동당 지도부의 마음을 홀가분하게 해주고 있다. 2010년 11월 16일 진교연이 주최한 “진보대연합과 통합의 쟁점과 과제” 토론회에서 정성희가 한 말은 민주노동당 지도부의 심정을 잘 보여 준다. “진보신당도 지방선거를 겪으면서 선택적 조건부 범야권연대가 합의됐고 진교연도 그런 입장이다. 범야권연대 원천 부정, 묻지마 범야권연대 양편향을 극복하고 가닥을 잡아나가면 이것[민주대연합]이 큰 쟁점이 되겠는가.”

그러나 이것은 희망 사항이지 현실이 아니다. 예를 들어 진보신당만 봐도 새 지도부의 다수파가 ‘독자파’다. 그들은 진보대통합과 민주대연합 모두에 부정적이다. 조승수 대표는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이 재통합하는 것을 내켜하지 않는다. 진보대통합보다는 선거 때 후보단일화를 하는 방식의 선거연합을 선호하는 듯하다. 그렇다고 조승수가 좌파적 견지에서 그러는 것은 아니다. 그는 ‘건강보험 하나로 시민회의’의 노동자 보험료 선제 인상 방안에 기울어 있는 듯하고, G20을 일관되게 반대하지도 않았다. 지난해 쌍용차 파업 때는 피켓팅 확대를 건설하기보다는 투쟁 중재에 주력했다. 그럼에도 진보신당의 핵심 리더들이 이렇게 ‘연합파’와 ‘독자파’로 나뉘어 있다는 사실은 그 당이 장차 겪을 심각한 논쟁(어쩌면 분리까지 포함하는)을 예고한다.

민주대연합 전략의 문제점

게다가 민주대연합이 “쟁점”이 되는 이유는 단지 개혁주의 지도자들 간의 이견 때문이 아니다. 설사 개혁주의 지도자들 간의 이견이 해소된다 해서 민주대연합의 문제점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민주대연합의 진정한 문제점은 첫째, 계급투쟁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이다. 그것이 적대 계급 간의 동맹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찍이 트로츠키는 프랑스에서 인민전선이 선언되기 석 달 전인 1935년 5월 28일 다음과 같이 썼다. “급진당[중간계급에 기반을 둔 자유주의 정당]과 의회에서 동맹을 체결하는 행위는 노동계급의 역사적 이해에 비추어 보면 범죄 행위에 해당되는데, 이것은 의회라는 제한된 영역에서 보면 최소한이나마 실제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파시즘에 대항해 의회 밖에서 급진당과 동맹을 맺는 것은 범죄 행위일 뿐만 아니라 바보 행위다.”[24]

민주대연합에서 진보정당은 근본적 사회 변화에 관한 논의를 훗날로 미루고 자본주의 정당을 “관용”으로 대하게 된다(민주노동당 지도부는 “수권” 정당이 되기 위해 내년에 당 강령을 개정하겠다고 밝혔는데, 이것은 사회주의 문구 삭제 등 당 강령의 급진적 요소들을 탈각시키려는 계획이다). 이 ‘관용’은 노동자 투쟁을 일정 수준 이하로 억누르는 것을 뜻한다. 즉, 민주대연합은 진보진영의 강령·공약·이데올로기 수준을 민주당의 협소하고 저급한 그것에 맞추게 만드는 효과를 내, 아래로부터의 노동계급 투쟁이 일어날 때 그것을 자제시키는 구실을 하게 된다. 이것은 결국 진보정당들의 영향력을 잠식하고 그리하여 우파의 반격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게 만든다. 최영준은 민주대연합 정치가 어떻게 최근의 투쟁들을 삭혔는지를 이렇게 지적했다.

지난해 노무현 자살로 표면화된 반이명박 정서는 운동으로 발전해 [2009년] 6월 10일 10만 명이 모이는 범국민대회에서 정점에 올랐다. 이날 시위는 같은 시기에 대량해고에 맞서 점거파업을 하고 있던 쌍용차 노동자들에게 자신감을 주었다. 그러나 민주당은 아래로부터의 격앙된 대중 정서에 부담을 느껴 숨 고르기에 들어갔고, NGO들과 한국진보연대는 민주당과 계급연합(인민전선)을 본격화해 운동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이명박은 반정부 운동이 민주당을 추수하는 개혁주의 세력의 통제 속에 가라앉자, 신속하게 언론악법을 날치기 통과시켰다. 이어서 점거파업을 하던 쌍용차 노동자들에게 무자비한 공격을 감행했다.
이 과정에서 한국진보연대는 민주당과 공조하면서 결정적 시점에 운동의 김을 빼고 통제하는 구실을 했다.[25]

실로, 민주당은 의회 밖 영역에서도 완벽한 행동의 자유를 누리면서 노동자 계급의 투쟁에는 지극히 엄격한 제한을 가했다. 쌍용차 노동자 투쟁 당시, 민주당은 야4당 연석회의에 포함돼 있었지만, 점거 파업을 지지하지 않았다. 민주노동당은 의회 내 동맹자인 민주당을 의식해 공기업화를 통한 고용 보장을 요구하지 않았다.

둘째, 민주대연합은 선거중심주의에 근거해 있다. 실제로 민주노동당 지도부에게는 선거적 실리가 최우선 가치처럼 돼 있다. 정성희 민주노동당 최고위원은 진교연이 주최한 11월 16일 토론회에서 “인천에서 구청장 두 명 우리가 먹었잖아요, 야권연대 안 했으면 못 먹었죠. 구청장 안 하는 게 낫겠습니까?” 하고 말했다. 그의 말대로 민주노동당은 광역단체장 선거에서 민주당을 밀어 준 대가로 처음으로 수도권에서 기초단체장에 당선했다. 그러나 계급 정치의 관점에서는 톡톡히 후과를 치렀다. 민주노동당이 수도권에서 민주당·참여당을 위해 후보를 죄다 사퇴하는 바람에 서울처럼 단연 중요한 지역에서 민주노동당은 기초단체장뿐 아니라 광역의원 선거까지 전멸했다. 민주노동당 지도부는 진보적 강령을 내세워 진보 염원 대중의 신뢰를 획득한 뒤 이 신뢰를 대부분 민주당에 헌납한 것이다. 그 결과 가장 중요했던 수도권 선거에서 진보정당의 목소리는 미미했다.

한편, 7·28 재보선은 반MB 민주연합이 선거적 성공을 언제나 보장해 주지도 못한다는 점을 보여 줬다. 민주대연합의 선거적 성공은 구체적 상황에서 동맹 세력(정당이나 후보)에 대한 대중 정서와 관계 있다.

셋째, 민주대연합 정치는 산수의 덧셈 정치를 넘어서지 못한다. 박석운 한국진보연대 공동대표의 다음 발언이 그 전형이다. “진보대통합을 하고 이 과정에서 감동과 희망을 만들면서 진보민주개혁 세력 간의 선거연합을 하면 저는 원내교섭단체 정도는 만들 수 있겠다 생각합니다. 두 번째로 여기에다 좌파 리버럴의 지지를 획득하면 제1야당이 될 거라 생각합니다. 여기다가 중도 리버럴까지 획득할 수 있으면 집권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26] 그러나 세력들을 단순히 더하면 그것이 전체의 합이 될 것이라는 가정은 틀렸다. 민주대연합은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의 정치 연합이다. 그 기본 이해관계가 180도 반대인 두 계급 간의 동맹이다. 방향을 달리하는 말들이 이끄는 마차가 움직일 수 없는 이치와 마찬가지로, 적대 계급 간의 동맹은 ‘1+1=2’의 효과를 내지 않는다.

트로츠키가 지적했듯이, “인민전선 이론가들은 본질적으로 산수의 첫 번째 규칙, 즉 덧셈 이상을 넘어서지 못한다.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무정부주의자, 자유주의자들을 전부 다 더하면, 각각의 개별적인 숫자보다 더 크다. 이것이 이들이 알고 있는 지식의 전부다. 그렇지만 여기서는 산수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적어도 역학 하나는 더 필요하다. 힘의 평행사변형의 법칙은 정치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우리가 알고 있다시피, 평행사변형에서 합력合力은 분력分力이 서로 다를수록 더 작아진다. 정치적 동맹자들이 반대 방향으로 끌어당기는 경향이 있다면, 합력은 0과 같아질지도 모른다.”[27]

넷째, 민주노동당 지도자들은 민주대연합 비판에 ‘지금은 전과 달리 독자적 진보정당이 있으므로 비판적 지지 같은 오류를 피할 수 있다’고 반박한다. 신판 ‘견인론’이다. 그러나 조직의 독자성은 정치적 독자성을 자동으로 보장해 주지 못한다.

1930년대 중후반 프랑스 공산당의 경험이 한 사례다. 1936년 프랑스 공산당 당원 수는 28만 8천 명이었다. 프랑스 공산당이 노동운동에 미치는 영향력은 오늘날 민주노동당의 그것과 비교가 안 될 만큼 강력했다(민주노동당이 노동운동에 미치는 영향력이 프랑스 공산당에 견줘 그다지 대단한 게 못 되기 때문에 노동자 투쟁을 단속할 수 있는 민주노동당의 능력은 현저하게 제한적이다. 물론 민주대연합이 아래로부터의 노동계급 투쟁을 제한하려 한다는 문제점은 여전히 남는다). 그럼에도 프랑스 공산당은 급진당에 정치적으로 종속됐다. 급진당이 인민전선 내에서 특권적 지위를 점했다. 트로츠키는 “급진당은 단순히 인민전선의 우파로 간주되고 있으나 사실 이 정당은 지배계급을 대표하여 인민전선에 참여합니다. 그리고 이 정당을 통해서 금융 자본은 인민전선과 노동계급을 지배합니다” 하고 주장했다.[28]

그리하여 프랑스 공산당은 급진당의 강령 수준 이하에서 투쟁하도록 제약받았다. 프랑스 공산당은 고용주와 타협하기 위해 1936년 공장점거 파업 물결에 제동을 걸었다. 그러다 결국 공산당은 인민전선에서 쫓겨났다. 급진당의 달라디에는 1939년에 나치와 뮌헨협정을 체결했고, 마침내 1940년에 나치인 비시 정권이 들어섰다. 인민전선이 노동계급의 힘을 마비시켜 반동의 공세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결과였다.

게다가 한국에서는 민주당이 ‘지배계급을 대표해서’ 반MB연합에 참가할 뿐 아니라 의석 수로 보나 지지율로 보나 민주노동당보다 월등하게 앞선다. 그래서 민주당이 언제나 반MB연합에서 특권적 지위(“패권적 성향”)를 점하고 있다. 선거만 해도 민주당은 그동안 가망 있는 지역에서는 후보를 양보하지 않았다. 민주당이 아예 가망이 없는 곳에서만 나오지 못했던 것이다. 진보진영과 민주당의 후보 단일화는 사실상 민주당으로의 후보 단일화를 뜻했다. 진보진영이 범야권연대를 강조할수록 당선 가능한 야당 후보 — 현실에서 많은 경우에 이것은 민주당 후보를 뜻했다 — 를 지지해야 한다는 압력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됐다.

이렇듯 민주노동당의 민주당 ‘견인론’은 비현실적인 얘기다. ‘견인’은커녕 대등한 관계로도 보이지 않는다.

‘소텐트’론으로서의 진보대통합당

비민주 진보대통합당론은 민주당과 진보세력 사이의 현실적인 세력 평가에 근거해 있다. 이들의 계산법은 진보세력이 각개약진하면 민주당 좋은 일만 시키니 진보세력이 통합해 유리한 위치에서 민주당과 선거연합을 하자는 것이다. 민주당을 견인하기 위해서는 진보세력의 세(숫자)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들은 민주대연합의 진정한 문제점이 상호 적대적인 계급 간의 체계적 협력이라는 점을 이해하지 못한다.

아예 진보대통합당에 국민참여당을 포함시키자는 주장도 제기된다. 이름은 ‘진보대통합’이되 실내용은 ‘소텐트’라 할 수 있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심상정이 비민주 진보대통합론의 물꼬를 텄다. 정성희도 “참여당의 진보파”까지 견인하는 “반한나라당 비민주당 진보대통합”을 주장했다. 손석춘 ‘복지국가와 진보대통합을 위한 시민회의’ 공동대표는 “진보세력이 새로 통합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민노당, 진보신당, 사회당을 통합하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요. … 고통받고 있는 민중에게 책임있는 정당을 만들어 내는 게 우리의 숙제입니다” 하고 말했다.[29]

손석춘 공동대표는 “고통받고 있는 민중”을 위해 비민주 진보대통합당이 필요하다고 하지만, 참여당의 뿌리인 노무현 정부가 신자유주의 정책을 앞세워 그 “민중”을 무자비하게 공격했다는 사실은 말하지 않는다. 이명박 정부로 가는 길을 닦은 것이 다름아닌 노무현 정부의 개혁 배신이었다는 사실도 함구한다. 의도적 회피거나 기억상실증이다. 경험에서 교훈을 이끌어내지 않는 사람들은 같은 실수를 반복하기 쉽다.

김기식 참여연대 정책위원장이 잘 꼬집었듯이, “이념, 노선, 정책, 과거에 대한 책임 등에서 차이가 없는 국민참여당은 포함하면서 민주당은 배제한다는 논리의 대중적 설득력이 떨어”진다.[30] 비록 그래서 김기식이 민주당까지 포함하는 야권단일정당을 만들자고 하지만 말이다.

국민참여당은 주로 중간계급에 기반을 둔 친자본가 자유주의 정당이다. 그들이 말하는 개혁에는 민주 개혁(노무현 정부가 보여 줬듯이 매우 제한적이고 일관되지 못한)뿐 아니라 신자유주의 개혁도 포함된다. 노무현은 “좌파 신자유주의 정권”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내며 한미FTA를 추진했다. 참여당의 핵심 리더인 유시민은 지금도 한미FTA를 적극 찬성한다.[31] 그 당의 강령도 “적극적인 대외개방으로 선진통상국가” 되기를 채택하고 있다. 또, 이 당이 “과거” 노무현 정부의 실정을 공개적으로 반성한 것도 아니다.

이런 비판을 의식해서인지 국민참여당 자체가 아니라 “국민참여당의 진보파”와 통합해야 한다거나(정성희), “과거의 친노 세력과 연합하자는 게 아니”라는(심상정) 식으로들 본심을 감춘다. 손호철 교수도 “비민주 진보-개혁연합당”을 “미디엄 텐트론”이라고 비판하면서도 “국민참여당의 상층부 지도자들도 신자유주의에 비판적인 좌파의 경우 진보세력과 함께하도록 적극적으로 권유하고 견인할 필요가 있다”며 여지를 남긴다.[32]

그러나 이들은 대부분 누가 국민참여당의 “진보파”나 “좌파”인지를 말하지 않는다(손호철 교수는 이정우 경북대 교수를 꼽았지만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국민참여당에 그런 계파 분열의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아직까지 진보정당과 국민참여당의 통합 주장은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김칫국부터 마시는 꼴이다. 유시민이 진보대통합에 합류 의사를 밝힌 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보세력과 자유주의 세력이 통합하면 선거에서 진보적 촛불 시민들(이들을 단순히 “친노 세력”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부정확하다)의 지지를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이 이 구상의 밑바탕에 깔려 있다. 그러나 진보세력이 국민참여당 지도자들에게 구애하는 방식으로는 진보적 촛불 시민들을 진보진영으로 “견인”할 수 없다. 그러기는커녕 국민참여당을 진보로 보이게 만들어 진보적 촛불 시민들을 그 당에 빼앗길 것이다. 선거적 셈법이 아니라 대중 투쟁 속에서 국민참여당 지도자들의 불철저하고 소심한 행각을 대중적으로 입증할 때 진보적 촛불 시민들이 확실하게 진보진영을 지지하도록 이끌어낼 수 있다.

진보의 단결 방식

사회주의자들은 어떤 형식으로든 진보의 단결을 지지한다. 가짜 진보를 제외한다면 말이다. 많은 노동자들이 진보세력의 단결을 바라기 때문이다. 정치 감각이 어지간히 둔감한 벽창호가 아니라면 대중의 단결 염원을 외면하지 못할 것이다.

진보의 단결 방식을 말하기 전에 분명히 해 둘 점은, 민주대연합과 ‘소텐트’가 결코 진보대연합이 아니라는 점이다.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민주대연합과 ‘소텐트’는 진보세력과 부르주아 자유주의 세력의 계급 연합이다. 따라서 사회주의자들은 민주대연합과 ‘소텐트’를 반대한다.

다함께가 여러 해 전부터 주장해 온 진보대연합은 진보가 단결해 부르주아 자유주의 정당 왼쪽에서진보적 정치 대안을 제공하는 정치 연합이다. 이 정치 연합은 단지 진보진영의 공동 선거 대응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명박 정부에 맞서 부르주아 자유주의적 대안이 아닌 진보적 대안을 대중에 제시하는 상시적 연합체다.

그렇다면 어떤 방식으로 진보세력이 단결할 것인가? 지금 진보대통합 주창자들은 합당 방식을 압도적으로 선호한다. 정성희 민주노동당 최고위원은 “그 어떤 우여곡절이 있더라도 … 진보정치대통합을 이뤄야 한다. 조직 통합을 이뤄야 한다”고 강조한다. “일상 시기 연대투쟁이나 선거 시기 연합을 의미하는 진보대연합은 불안정하고 일회적”이라고 보기 때문이다.[33]

단일한 정당 모델이 단단한 단결을 보장해 준다는 믿음이다. 그러나 민주노동당도 단일한 정당 모델이었지만 분열을 막지는 못했다. 단일한 정당 구조를 갖추는 것이 곧 그 내부에 존재하는 상이한 정치 경향들 간 이질성을 자동으로 해소해 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민주노동당은 이미 한 차례 분열을 경험했다. 민주노동당의 분당은 단순히 실망스러운 대선 성적 때문이 아니었다. 원칙, 강령, 전략 등을 둘러싼 오랜 정치적 차이가 조직적 분리로까지 이어진 것이다. 지금도 특히, 북핵이나 북한 3대세습 같은 “북한 문제”를 놓고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의 리더들 그리고 다함께 등 좌파단체 사이에 큰 이견이 존재한다.

토론을 통해 이런 정치적 이질성을 극복할 수 있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물론 토론을 통해 얼마간 정치적 수렴을 이룰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정치적 수렴은 부분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민주노동당이든 진보신당이든 다함께든 모두 이미 나름의 원칙과 강령을 가지고 있으므로, 토론을 통해 자신들의 원칙과 강령을 양보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정치적 수렴이 단지 부분적이고 모호하므로 상이한 경향이 숨쉬고 공존할 공간을 제공할 수 있는 조직 구조가 필요하다. 공동전선적 모델이 그것이다. 진보대연합에 참가하는 세력들의 독자적 조직, 저널, 실천을 보장하되, 매우 구체적이고 명확한 공동 요구 10∼20개를 중심으로 공동 활동을 하는 방식이다.

그렇다고 진보대연합이 공동전선적 모델에 근거할 때만 조건부로 지지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공동전선적 모델이 더 효과적인 단결 방식이라는 점을 주장하는 것이다. 변혁적 좌파의 이러한 정치적·조직적 독립성 보존 요구를 종파적 자기방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당 내의 상이한 경향들이 자신들의 독특한 원칙과 강령을 당에 강요하는 것을 촉진함으로써 오히려 긴장과 분란을 심화시키곤 했던 과거 민주노동당의 경험을 반면교사 삼아 이끌어낸 단결 방식이다.

결론

지금 논의되는 진보대통합론은 새로운 광범한 사회민주주의 정당 만들기 프로젝트다. 그럼에도 사회주의자들이 이 논의에 참여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형성된, 한국의 구체적 상황에서 지금 같은 급진화 시기에는 많은 활동가들이 진보적 견해들을 받아들이지만, 사회주의 견해가 자동으로 득세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좌파가 그저 존재를 선언하기만 하면 대중이 자신의 결정을 따를 것이라고 기대할 수는 없다. 새 세대를 설득하려면 급진 좌파가 진보 정치 운동의 일부가 돼야 하고 사회주의 사상의 타당성을 그 안에서 실천으로 입증해야 한다.

개혁주의와 예리하게 선을 긋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좌파는 개혁주의(정당)와 관계를 맺어야 하고, “협력”은 “체계적으로 이뤄져야 한다.”(레닌) 이런 일을 거부하는 좌파는 우파에 반대하는 대중의 광범한 정서로부터 고립될 수밖에 없다. 레닌이 《‘좌익’ 공산주의-유치증幼稚症》에서 강조한 것도 바로 이것이다. 레닌은 이 책에서 혁명적 결론에 이른 전투적 소수 그룹이 훨씬 더 광범한 운동과 연관 맺는 방법을 자세히 다루고 있다. 요컨대, 개혁주의 정당과 공동전선과 노동조합에 개입하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현재 진행되는 진보대통합 논의가 아무 문제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그렇기는커녕 많은 경우에 진보대통합을 민주대연합 전략과 연결시키려 한다(매우 유력한 시나리오다). 또, 아예 처음부터 진보대통합 자체를 인민전선적 방식으로 하고 싶어하는 사람들도 꽤 있다(그 실현 가능성은 논외로 하더라도).

물론 이 논의가 대중의 단결 염원을 부분적으로 반영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문제는 개혁주의자들이 노동 대중의 단결 염원을 적대 계급 간의 단결로까지 무원칙하게 확장하려 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사회주의자들은 진보의 단결을 바라는 노동계급의 염원을 지지하되, 이 단결 염원을 무원칙하게 적대 계급과의 동침으로 이끌려는 개혁주의 지도자들의 시도를 반대해야 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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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최일붕 2010.
[2] 레닌 1991, p120.
[3] 레닌 1991, p121.
[4] 최규엽 2010.
[5] <한겨레>(2010.10.18).
[6] 김기식 2010, p47.
[7] 정성희 2010a.
[8] 손호철 2010, p24.
[9] Selfa 2008.
[10] Klehr 1984, p178, Smith 2002에서 재인용.
[11] 고원 2010, p15.
[12] 김기식 2010, p49.
[13] 《시사IN》 151호(2010.8.10).
[14] 고원 2010, p15.
[15] 최규엽 2010.
[16] 박용진 2010.
[17] <레프트21> 44호(2010.11.13).
[18] <한겨레>(2010.7.29).
[19] <오마이뉴스>(2010.8.19).
[20] <레디앙>(2010.9.21).
[21] 민주노동당 내 ‘평등파’는 말로는 자주파를 ‘열린우리당 2중대’라고 비판하면서도 실천에서는 오래 전부터 ‘열린우리당 공조’에 나섰다. 이에 대한 지적으로는 김하영2009, p90 참조.
[22] 《한겨레21》 815호(2010.6.18).
[23] <레디앙>(2010.7.8).
[24] 트로츠키 2001, p121.
[25] 최영준 2010.
[26] 박석운 2010.
[27] 트로츠키 2008, pp329-330.
[28] 트로츠키 2001, p260.
[29] 손석춘 2010.
[30] 김기식 2010, p48.
[31] <폴리뉴스>(2010.11.18).
[32] 손호철 2010, p29.
[33] 정성희 2010b, pp6-7.

이상한 모자

2010.12.28 20:34:55
*.208.112.113

글만 보면 당장이라도 민주노동당을 뛰쳐 나올 것 같네요. 왠지.. '아.. 나가고 싶다..' 이런 마음이 전해져 옵니다.

멀리서

2010.12.28 23:57:23
*.171.215.139

김인식씨는 토론과 글을 참 잘 쓰고 말을 잘한다능~~~ 민주노동당에 왜 레닌주의자이며 트로츠키주의자가 남아있는진 몰라도... 구좌파쪽은 진보신당의 분열과 우경화에 대해서 강력하게 규탄하던데...

멀리서

2010.12.29 23:01:24
*.171.215.139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는데 아저씨는 이상한 모자님이 아닌가요? 김인식은 미혼인걸로 아는데?

이상한 모자

2010.12.29 00:19:39
*.208.112.113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는데 저 김인식 아저씨 별로 안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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