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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요즘 인터넷 논쟁을 보면서 가장 의아하게 생각되는 것들 중 하나는 '까야 될 건 까야 돼!'라는 식의 정서다. 요즘 인터넷 논쟁에서 이런 식의 표현은 매우 자주 등장한다. 사실 까야 될 건 까야 된다는 말은 좋은 말이다. 비판할 것은 비판하고,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자는 얘기 아니겠는가. 실제로 나는 처음에 이런 표현을 그렇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런 표현을 사용하는 사람들을 보면 볼수록 그런 의미가 전부는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물론 까야 될 건 까야지 라면서 올바른 비판을 하고 건전한 대안을 추구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표현은 종종 우리를 '그래서 과연 이 대상은 까야 할 대상인가, 까지 말아야 할 대상인가?'라는 물음에 직면하게 한다.

그런데 이러한 물음은 일의 순서가 바뀐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즉, 상대의 주장을 검토해서 잘못되거나 적절하지 못한 부분을 찾고 그에 대한 반박을 하면 자연스럽게 판단할 수 있는 일 아니겠냐는 것이다. 상대의 개별 주장에 대한 비판의 범위를 명확히 하고 그에 대해 언급하면 되는 일을 상대의 전체 주장을 놓고 이것은 비난의 대상이냐, 아니냐의 판단부터 요구하고 있는 셈이다. 이것을 단순하게 정리하면 결국 이 주장을 구성하는 논리를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말을 하는 녀석이 착한 놈이냐, 나쁜 놈이냐 부터 가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인데 이것은 합리적인 토론을 중시하자는 입장에서는 꽤 부당한 것이 아닌가?

이러한 태도는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지지자들이 서로 논쟁을 할 때에 종종 드러나기도 한다. 한나라당을 까여야 할 대상으로 보는 민주당 지지자들은 한나라당에 온갖 끔찍한 레토릭을 갖다 붙이는데 열중한다. 수구꼴통, 친일파, 파시스트... 물론 역의 경우도 성립한다. 너희들은 빨갱이고 헌법정신을 부정하며 북한에 퍼주기만 하는 놈들이라는 레토릭이 또 그렇다.

이런 레토릭들로 미루어 본다면 한나라당이 우측에 있고 민주당이 좌측에 있다는 사실이 명약관화해 보인다. 그런데 좌, 우를 가르는 정확한 기준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레토릭뿐만 아니라 실제로 이 양당이 추진하는 정책이 과연 어떤 것이었나를 판단해보는 것이 먼저일 것이다. 사실 이러한 판단을 내려 보는 것은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상당히 중요하다. 그래야 거기에 맞는 비판을 할 것 아닌가? 그런 측면에서 다시 한 번 문제를 제기해보자면 모든 기득권의 상징인 한나라당과 이명박에 맞서 민주당을 중심으로 민주평화개혁세력이 모여 싸워야 한다는 주장이 과연 올바른 전제에 근거하고 있느냐 하는 것을 탐구해보자는 말이다.

많은 인터넷 논자들이 민주당은 진보적 성향을 가지고 있는데 여러 가지 문제로 그러한 자기의 성향을 충분히 펼치지 못했기 때문에 비판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진보정당을 지지하는 사람들도 그러한 이유를 들먹이는 경우가 많다. 민주당이 제대로 하지 않고, 또 앞으로도 제대로 할 가능성이 없기 때문에 진보정당을 지지한다는 것이다. 만일 이게 사실이라면 어느 날 민주당이 제대로 하게 될 경우, 그 때는 또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문제를 돌려서 생각해보자. 이명박 정권을 신자유주의 정권이라고들 한다. 여기에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한나라당의 미디어법 강행 처리를 온 몸으로 막는 민주당은 마치 신자유주의에 온 몸으로 저항하는 투사처럼 보인다. 그런데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오늘 날 민주당의 근간을 이루는 사람들이 정권을 잡아보았던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 시기에 소위 민주당 계열의 정치인들은 신자유주의에 반대했나? 누가 봐도 아니다. 그렇다면 김대중, 노무현 정부와 이명박 정부의 차이는 무엇인가?

이런 난제들을 검토하고 거기에 맞는 해답을 얻기 위해서는 시대별로 각각 정부가 추진한 경제정책을 검토해보아야 할 것이다. 사실상 대한민국이라는 황무지를 개간한 박정희의 시대로부터 오늘 날까지의 정부 정책을 시대 순으로 늘어놓아보면 하나의 흐름을 발견할 수 있다. 박정희식 국가주도 수출경제에 의해 만들어진 재벌과 워싱턴 컨덴서스의 이념을 실현하려는 신자유주의 개혁가들의 끊임없는 충돌이 바로 그것이다.

이쯤 되면 갑자기 머릿속이 혼란스러워 지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아니 재벌이 신자유주의자들과 싸우다니, 그건 왜지? 많은 사람들이 신자유주의라는 용어를 그저 ‘뭔가 나쁜 정책’, 좀 더 세련되게 말하자면 ‘기득권을 위하고 기득권이 아닌 사람들에게 정당한 몫을 주지 못하는 정책’ 등으로 이해하고 있겠지만 사실 신자유주의는 이 사회 구석구석에 경쟁의 원리를 이식하고 시장의 원칙에 맞추어 사회를 돌아가게 하려는, 그래서 그 경쟁에 돈을 건 사람들이 더욱 많은 돈을 벌 수 있게 해주려는 움직임이다. 최소한 이 개념에 맞추어 생각하면 재벌 체제는 신자유주의의 걸림돌이다. 재벌은 시장원리를 통한 공정한 경쟁으로 태어난 존재가 아니며 현실 세계에서는 오히려 경쟁의 원리를 저해하고 경제를 비효율적으로 만드는 주범일 뿐이지 않은가?

이 때문에 박정희 시대에는 대통령이 나서서 신자유주의 경제 관료들과 전쟁을 치러야 했다. 즉, 박정희의 국가주의에서 볼 때에 신자유주의란 건 책상머리에서나 만들어 낸 허황된 이상일 뿐이었던 것이다. 국가가 나서서 산업 발전을 주도하면 되는데 웬 놈의 시장 원리고 경쟁이란 말인가?

그 이후에는 끝없는 신자유주의 경제 관료들과 재벌의 싸움이다. 대표적인 재벌 수장 정주영이 더 이상은 못 참겠고 차라리 내가 하겠다며 국민당을 만들고 대통령 선거에 출마를 했던 것도 이러한 맥락이다. 김영삼이 대통령 후보 시절 ‘돈이면 다 되는 줄 아냐’고 일갈했던 것도 마찬가지 맥락이다. 정부는 신자유주의 경제 관료들의 영향을 받아 정경유착을 단절하고 우리 경제의 투명성을 높이며 공정한 경쟁을 조장해서 경제를 안정화시키려는 시도를 해왔고 재벌은 이러한 시도에 온 힘을 다해 맞서 저항해온 것이다.

이 전쟁은 결국 97년 IMF 위기로 인해 신자유주의 경제 관료들의 승리로 일단락된다. 김대중은 그 자신이 충실한 신자유주의자였으며 때를 잘 만나 신자유주의 개혁을 원없이 펼쳐보였다. 재벌 대기업들은 신자유주의 경제의 체질에 맞게 구조조정 되었고 노동자들의 삶은 짓밟혔다.

이것은 노무현의 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단지 노무현 정권은 모든 것을 좀 더 전투적으로 해결했다. 언론과는 적극적으로 불화했고 정치적으로 여러 위기를 특유의 정면 돌파로 맞섰다. 또한 ‘정치개혁’을 꿈꾸는 이상주의자들의 면모를 종종 보여주어 여러모로 기득권층의 반발을 샀다.

노무현 정부가 한-미FTA를 추진했던 것은 결코 수구보수 세력에 밀려서라거나 당장 남길 대통령의 업적이 급해서가 아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것은 그저 신자유주의의 교리에 불과하다. 노무현 정부는 심지어 복지정책에까지 오는 게 있어야 가는 게 있고 생산을 해야 보상이 있다는 식의 공정한 경쟁 원리를 도입했다. 그 결과가 바로 오늘날의 ‘희망근로’ 사업이다. ‘불의에 맞서’ 정치개혁을 외치고 탈권위를 외쳤던 노무현 정부가 경제 정책의 영역에서 공정한 경쟁을 이야기 하고 투명한 경제를 이야기 하면서 신자유주의적 개혁 조치를 현실화 시키는 것은 전혀 모순된 얘기가 아니다.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을 추구했던 노무현 정부에게 신자유주의는 경제적으로 ‘올바른 것’이었으므로 ‘올바른’ 정권이 계속해서 ‘올바른 것’을 추구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결국 오늘 날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는 바와는 달리, 민주당의 신자유주의와 한나라당의 신자유주의에는 단 한 가지 차이점이 있을 뿐이다. 민주당은 세계적 차원에서 공정한 경쟁의 원리를 적용하기 위해 공기업을 외국 자본에게 내놓지만 (공기업을 파는데 국내 자본만 살 수 있다고 하면 그것은 외국 자본에 있어서 불공정한 경쟁이 아니겠는가?) 한나라당은 국내 재벌에게 팔아넘긴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다. 결국 양당제적 정당정치가 몸에 배어 있는 사람들은 늘 외국 자본의 배를 불리느냐, 국내 재벌의 배를 불리느냐 하는 기로에 서있는 셈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노무현 정권 시절 방송부문에 외국자본을 유치하고 싶어했던 민주당 의원들이 지금 미디어법에 반대하는 상황에 대한 올바른 해석이 수미일관하게 정리된다. 이 국면에서 가장 불쌍한 것은 국내의 NL계열 운동권들이다. 그들은 국가주의자들일텐데, 국부를 외국에 팔고 싶어하는 세력을 단지 북한과 친하다는 이유로 비판적 지지해야 한다니, 얼마나 딱한 처지이냔 말이다.

이런 전제를 놓고 본다면 진보정당운동 세력에게 어떤 반MB전선이 가능하겠는가? 'MB반대!'라는 전선은 민주당의 근본적인 신자유주의를 긍정해야 하는 것처럼 들린다. '신자유주의 반대!'라는 전선은 상황에 따라 오히려 박정희식 국가주의의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 앞에 놓여진 선택지가 박정희 또는 김대중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 사실을 깨닫기 위해서는 위에 쓸데없이 길게 서술한 경제 정책 측면에서 보수 양당의 실체를 파악하는 일이 매우 중요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런 방식으로 사고하길 싫어한다. 그냥 어딘가에 대고 ‘나쁜 놈’이라고 대책 없이 말하는 것이 쓸데없이 두뇌활동에 에너지를 사용하지 않아도 되고 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이 사람들이 묻는 것은, ‘아 그래서 민주당을 도대체 까야 된다는 거야, 까지 말아야 된다는 거야?’다. 이로서 모든 정책적 문제는 단지 선전선동의 문제로 전락한다. 이 얼마나 몰상식한 일이란 말인가?

뉴라이트 교과서 문제도 마찬가지다. 뉴라이트 교과서는 특정한 정치세력에 역사적, 이데올로기적 알리바이를 맞춰주기 위한 것이 맞다. 그런데 그저 그렇다고 규정한 후에 그저 ‘역시 우리가 까야 되는 대상이로구나.’라고 하면서 ‘야 이 수구 꼴통들아!’라고 외치는 것이 옳은 일인가? 오히려 우리는 뉴라이트를 논박해야 하지 않을까? 일부 사람들은 자기들이 ‘나쁜 놈’에게 욕을 잘 하면 그것으로 그 나쁜 놈의 주장을 논박했다고 믿는 것 같다. 하지만 ‘논박’이라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 그런 걸 논쟁이라고 할 수 있다면 무조건 목소리 큰 놈이 대장 먹게?

‘뉴라이트 사용후기’는 바로 그러한 측면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책이다. 이 책의 저자는 폭 넓은 독서와 자료조사를 통해 한나라당 지지자들과 민주당 지지자들이 뉴라이트 논쟁에서 갖는 포지션과 그들의 정치적 입장 사이에서 생기는 모순을 각각 밝히고 왜 그들이 자기 논리의 모순에 묶여 그런 딱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는지를 치밀하게 분석한다.

저자가 이 책을 통해 한국 정치의 모든 것을 설명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뉴라이트와 그 반대자들에 대한 가장 설득력 있는 분석을 제공하는 것은 틀림이 없는 것 같다. 이것은 그저 한나라당과 민주당 지지자들이 서로를 비난하는 욕설에 지쳐 지적 호기심을 채우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아니, 오히려 스물 몇 살 먹은 저자와 같은 일개 인터넷 논객이 혼자 이런 고된 작업을 하고 있다는 한국적 현실이 서글프게 느껴지기까지 할 정도다.

세간의 잘못된 정치적 프레임, 즉, 사악한 한나라당 VS 정의로운 민주당이라는 프레임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고 싶다면 이 책을 꼭 읽으시라. 이 책 한 권으로 그러한 프레임에서 당장 벗어날 수는 없겠으나 상당한 도움이 될 것이다.

아울러 자칭 주대환주의자들은 특히나 이 책을 꼭 사서 보길 바란다. 이 책을 본 후에 자신들의 포지션을 명확히 확인하는 것이 주대환 선생이 남긴 ‘대한민국을 긍정하는 좌파’라는 정치적 주장과 기획의 긍정성을 살리는 최후의 길 일듯 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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