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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운동권과 촛불집회

조회 수 4979 추천 수 0 2008.05.27 03:15:04

많은 측면에서 최근의 정국은 여러 가지 시사점을 던지고 있는데, 이것에 대한 많은 분석과 논의들이 있다. 그것들은 대개 '촛불집회에 자주 나오는 새로 도래한 훌륭한 정치세력의 정체가 도대체 뭐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대개 그것은 10대 여고생이라 던지, 아이의 부모라 던지 하는 정체성에 어떤 레퍼런스를 붙일 것이냐 하는 논의로 귀결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세대론 으로 설명하며 20대와는 구별되는 또 다른 세대의 등장이라고 주장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우리의 대통령이 한국 사람들이 대개 민감해 하는 '아이의 문제'를 건드린 결과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나는 일단 문제가 무엇이든 내가 접한 분석이 특별히 고약한 종류의 것이 아니라면 대개는 그냥 고개를 끄덕끄덕 하는 편이다. 그런데 이번의 경우에는 내 생각을 특별히 말해두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란 생각을 했다. 왜냐하면 이들에 대한 분석, 정의는 향후에 소위 우리 '운동권'들이 무엇을 해야 하느냐를 규정할 수 있는 단초가 될 것이고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운동권인 나의 안정된 일자리와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뭐라고 얘기하든 나는 이 상황에 대한 여러 가지 합리적인 분석을 존중하지만 새로운(그러나 전혀 새롭지 않은) 이야기를 꺼내지 않을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애써 외면하고 있는 듯 보이는 사실은 우리가 이러한 상황을 이전에 한 차례, 아니, 혹은 두 차례 이미 겪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2002년 의정부 장갑차 사건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고 2004년 탄핵 열풍을 기억하고 있다. 물론 의정부, 탄핵, 광우병에서의 대중의 모습은 많은 지점에서 서로 다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셋을 묶지 않을 수 없는데, 그것은 첫째, 요 근래 보기 드문 정치적 지형을 뒤흔들 정도로 이슈화된 사건이었고, 둘째, 유력한 정치인이나 소위 '운동권'이 아닌 '선량한 시민'이 주체가 되었으며, 셋째, 주로 종이컵에 끼워진 '촛불'이 등장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나의 관심사는 그러한 상황에서 '운동권'이 무엇을 해야 하느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다들 알다시피 2002년과 2004년의 사건들은 '운동권'에게 표면적으로는 어떠한 이득도 가져 주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민주, 평화, 개혁'세력에게 정치적 '키'를 쥐어줄 따름이었는데, 이번 정국에서 우리 '운동권'의 목표는 어떻게 하면 이 상황이 2002년과 2004년의 재판이 되지 않게 하느냐에 있다.

누구는 운동권이 뭘 잘했냐고 물을 지도 모르겠지만, 운동권이 지금까지 뭘 잘했든 못했든 이러한 정치적 기회의 수혜자가 '민주, 평화, 개혁'세력이 되는 것이 이 땅의 '선량한 시민'들에게 결코 좋은 일이 아니라는 걸 지난 10년 간 계속해서 몸으로 겪어왔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막말로 이번 쇠고기 협상 문제와 떼고 싶어도 뗄 수 없는 관계인 한-미FTA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추진했는데, 온라인에는 대통령 이명박과 노무현을 비교하면서 노무현 전 대통령이 얼마나 위대하고 훌륭한 사람이었는지에 대해 설파하는 글이 버젓이 떠돌고 있으니 어찌 염려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말이다.

쇠고기 문제는 이미 '운동권'이 2, 3년 전부터 주구장창 떠들어 왔고 지금 광화문과 청계광장을 유령처럼 지배하고 있는 그 '괴담'의 상당 부분은 우리 '운동권'들이 오랜 기간 주장해온 것인데 여전히 집회 현장에서 운동권은 푸대접 받고 있지 않은가. (물론 경찰의 강경진압이 시작되고 나서는 운동권이 시위의 전술적 측면을 잘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도구적으로 사고되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 같다.)

그렇기에 나는 이것이 여전히 '노빠 프레임'이고 '신자유주의적 주체'들의 잔치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내가 지금부터 이들과 선명히 선을 긋고 뭐 대단한 가두투쟁을 지휘하자고 이야기 할 것이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그리고 혹시라도 그렇게 주장하는 운동권 친구들이 있다면, 나는 그들에게 과감히 '대중투쟁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라고 이야기 할 용의가 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이번 집회의 주체들을 보면서 정리한 특징들은 운동권으로 생활하다 보면 종종 만나볼 수 있는 것들이다. 운동권도 태어날 때부터 운동권이었던 것이 아닌 이상, 지금 집회의 주체들이 보이는 행태와 똑같은 일을 했다. 그것은 학생이건 덤프 아저씨건 똑같다. 신생 비정규직 노동조합에서 '특정한 정치세력이나 좌익 운동권들 없이 우리들만의 힘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라고 조합원들이 주장하는 것을 목격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물론 이 초짜들은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상황처럼 소규모 집회 하나도 제대로 기획하지 못하고 우왕좌왕 하기 마련이다. 깨지고, 또 깨지고, 아주 작살이 나고 나서 비로소 그들은 결론을 내린다. '아, 그래도 운동권이 필요할 때가 있구나!' 그래서 내가 과거 만들어진지 2년 밖에 안 된 덤프 운전자들의 비정규직 노동조합에 취직할 때 조합원들이 내걸었던 조건은 '운동권 상근자로 데려올 것!'이었다.

그리고 집회에서의 전술은 운동권이건 뭐건 언제나 논쟁이 붙을 수밖에 없는 문제다. 집회 전술은 운동권끼리도 합의가 안 된다. 한쪽에서 '책임질 수 없는 무책임한 투쟁 전술로 동지들을 위험에 빠뜨릴 수 없다.' 라고 말하면 또 한쪽에서는 '공권력에 대한 지도부의 두려움이 우리의 투쟁을 폴리스라인 안으로 가둬놓고 있다.' 라고 소리 지르기 시작한다. 운동권끼리도 그러는데 '선량한 시민'들이 우왕좌왕 하는 것은 매우 당연하다.

지금 '선량한 시민들'이 노동조합이나 학생운동을 하는 '운동권'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들은 이 투쟁이 끝나면 집에 간다는 것이다. 조합원과 학생은 각기 노동조합과 학교로 돌아가는데 선량한 시민은 집으로 간다. 지금 촛불집회의 아수라장 한가운데서 신문 팔고 플랑 걸고 나름 존재감을 어필하려고 하는 정치세력들은 이 선량한 시민들이 집에 가기 전에 뭘 어떻게 해보려고 하는 그런 눈물겨운 노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선량한 시민들이 집에 가면 이제 그들을 더 이상 정치 지형에서 볼 수 없다. 즉, 집밖에 돌아갈 데가 없다는 것은 정치적으로는 소멸한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신자유주의적 주체가 행동하는 방식이고 그로 인한 정치적 성과가 이명박이나 노무현에게 귀결되는 방식이다.

다시 말하면, 투쟁의 열기가 소강하고 실패가 가시화되면 운동권은 모여서 '평가'라는 걸 하겠지만 집에 간 사람들은 자기들이 왜 졌는지, 지금 실패한 것이 뭘 의미하는지 조차 결론을 내릴 수 없는 상황이 된다는 것이다. 이들의 평가는 자기가 딛고 있는 관념적인 토대와 별로 중요하지 않은 주위 환경에 따라 천차만별로 진행된다. 개중에 어떤 사람들은 바람직한 평가를 토대로 다른 정치적 행위를 시작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의 경우 그런 평가의 결론은 냉소주의 혹은 무정견주의다. 여름날의 뜨거웠던 투쟁은 이렇게 아름다운 과거가 되고 한 때의 추억이 된다.

이 모든 과정이 단 한 가지 사실을 드러내는 근거로 사용된다. 우리가 움직이고 있는 이 공간에는 정치적 행위의 연장선상에서 또 다른 정치적 행위에 대해 사고할 수 있는 요람이 되어야 할 '정치' 그 자체가 없다는 사실이다. 정치도 없고 정당 정치도 없고 지역 정치도 없다. 오로지 악마와 같은 '정치인'들과 ‘인터넷’만 있다. 그리고 그렇다는 사실을 누구나 알고 있다. 대통령은 '정치적인 건 안 된다'고 말하고 집회에 참가한 선량한 시민들은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말라'고 한다.

따라서 더 이상 운동권이 볼멘소리를 해야 할 이유가 없다. 왜 시민들은 우리를 이해해주지 않을까? 어떻게 하면 시민들에게 우리의 존재를 설득할 수 있을까? 이 고민에 대한 답이 너무나도 명백하기 때문이다. 아무도 만들려고 하지 않는 정치를 이제는 운동권이 만들어 내야 한다는 것, 선량한 시민들이 집회를 마치고 돌아갈 정치적 공간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는 것, 이것은 뭐 한 건 터뜨려서 되는 게 아니라는 것, 우리들의 대답은 바로 여기에서 시작되어야 하는데, 서로 굼뜬 몸짓만 하면서 눈을 굴리는 데에 촛불집회만 훌륭한 핑계거리가 되고 있다.


http://weirdhat.tistory.com/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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