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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심리학의 기억

조회 수 3931 추천 수 0 2008.03.24 04:40:27




* 나는 블로그를 따로 가지고 있고, 논쟁을 하고 싶은 글은 거기에 쓰겠다는 원칙을 세웠다. 여기에 쓰는 글은 개인적 잡설이지 논쟁용 글이 아니다. 어떠한 진지한 비판과 반박도 불허한다. (안 진지하면 이 글에 대해 무슨 말을 해도 됩니다. 메롱~)


내가 심리학을 배우던 시절에. 물론 나는 철없는 대딩이었기 때문에, 심리학개론에서 가르쳐주는 권위있는 내용을 100% 신뢰했다. 가장 관심있게 지켜본 과목은 생리심리학 이었는데, 공부를 하도 안 해서 성적이 다 거지 같았지만 그 중에서도 그나마 나은 성적을 받았던게 생리심리학 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주 명쾌한 과목이었기 때문에 한 두 번만 읽어도 술술 외워졌다. 어린 마음엔 이거 하나만 있으면 다른건 다 필요가 없겠구나 싶었다. 약 먹고.. 호르몬 조절 하고.. 그러면 되니까. 나아가서는 인간의 인식 자체가 뇌니까.

그런데 그 과목을 듣기도 전에, 1학년 1학기부터 나는 심리철학 수업을 우연히 들었던 것인데, 생리심리학을 듣고 나서 그 수업 내용을 떠올려 보니 더욱 더 반석같은 믿음이 생겼다. 나에게 심리철학을 가르쳤던 교수는 자기는 크리스챤이고 해서 '속성 이원론자' 라고 우기면서 '물질과 의식' 이라는, 제거론자가 쓴 책으로 수업을 했다. 대단히 인상 깊은 수업이었기 때문에, 지금도 과학철학 하고 이 수업 내용은 거의 다 외우다시피 한다. 한 학기 수업을 다 듣고 보니 제거론이 킹왕짱 이었다. 그래서 나는 제거론자가 되었다.

당시에 나랑 같이 공부했던 심리학도들은 생리심리학을 너무 싫어해서 심지어 '생리통' 이라는, 생리심리학 공부만 하면 머리가 아프다는 은어가 있을 정도였는데, 오히려 나는 이런 배경 때문에 생리심리학을 더 친근하게 바라봤던 것이다.

덕분에, 나는 알지도 못하면서 라캉을 대단히 심하게 폄하했다. 라캉? 뭔 듣보잡? 교과서에도 안 나오는데? 당시에 깨손이라는 사이트에 드나들면서 민주노동당이니, 진중권이니 하는 일들을 알게 됐는데, 거기서도 문화비평이니 하면서 라캉 인식론 가지고 장난치는 사람들이 좀 있었다. 나는 별로 알아듣지도 못하면서 '그런거 다 실험으로 증명된 것도 아닌데' 라고 주장하면서 설쳤던 기억이 난다. 라캉 할아버지 싫어요.. 글만 어렵게 써요.. 등 몇 개 레토릭 주워달면서..

그때 이름을 '무정유'라고 쓰는 사람이 있었는데, 좀 골 때리는 사람이었다. 그 사람이 그랬다. '제거론? 아그야 나는 네가 불쌍하다.. 그 나이에 뭔 제거론이냐.. 팍팍하게스리.. 지젝이나 좀 읽어보거라.. 엉?' ... 그때 추천한 게 정확하게 지젝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여튼 그 사람과의 논쟁 이후로 내가 지젝을 읽기 시작한건 분명한 듯 하다.

노정태의 지적대로 지젝의 작업은 라캉을 임상의 늪에서 구원해 내려는 시도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애초에 라캉이 했어야 하는 것이 그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여튼 지젝은 멋있는 사람인데,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을 읽고 나는 지젝에게 완전히 반해버렸다. (이것도 '무정유'라는 사람이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이냐,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이냐 이것 가지고 시비 걸고 그랬던 기억이 좀 난다.)

제거론은 아주 명료했지만 너무 위험했다. 게다가 제거론이 흠집나지 않는 권위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아주 많이 필요한 것으로 느껴졌다. 게다가 나는 그 때 정치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기 때문에, '정치든 뭐든 다 뇌에 약물이나 주입하면 되는거지.' 라고 말하는 것 보다는 '자, 봐봐. 이데올로기란건 이래.. 그러니까 싸울 때는 이렇게 하라구. 알겠어?' 라고 말하는 쪽이 훨씬 도움이 많이 되었다. 그러고나서 다시 생각해보니 제거론은 별 쓸데가 없었다. 기능주의적 입장으로 후퇴할 수도 있었는데, 심리철학 자체에 관심이 뚝 떨어졌다.

이후에 마르크스, 프로이트, 프랑크푸르트, 실존주의, 소쉬르, 롤랑 바르트, 푸코, 보드리야르.. 이런걸 다루는 수업을 들으면서 내가 가진 관점은 지금과 같은 것으로 굳어졌다. 이게 꽤 재밌는 분야였는데, 기회가 된다면 이 작자들의 책을 더 열심히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있다.

어쨌든 이런 일련의 과정들 속에서 '심리학'은 나에게 애증의 대상이 되었는데 그건 심리학 자체가 가진 학문적 성격 때문이기도 했지만 심리학도들의 태도 때문이기도 했다. 나는 철학도들보다 훨씬 과학이니 실험이니 증명이니 하는 것에 익숙하다고 생각했는데, 심리학도들이 그게 학문의 전부라고 주장하면서도 불리할 때에는 '과학으로 모든 걸 해결할 순 없겠지..' 라면서 도망가는 것이 대단히 고까웠다. 그렇게 갈팡질팡 하지 말라고 얘기를 하면 '아직 생긴지 얼마 안되는 학문이라서..' 이게 심리학도들이 자기들끼리 말하는 단골 메뉴였다. 개 중에 몇몇은 그게 웃기니깐 또 모여 가지고 심리학은 웃기는 학문이네, 말도 안되네, 근본도 족보도 없네, 이러면서 낄낄거렸지만.. 여튼 심리학 자체는 꽤 매력있는 학문이었다. 그러니 그게 애증의 대상이지..

게다가 굉장한 빨갱이 좌파가 되고 보니까, 심리학은 자본주의 없이는 애초에 성립할 수도 없는 학문이라는 확신도 들었다. 이래 저래 감정적으로 심리학을 미워했던 적도 있는데, 정확히 말하면 앞에 말했듯이 '애증'이다. 그때까지도 나는 심리학 공부 하는걸 포기하진 않았었으니까. 지금도 별로 그런 측면에서 포기는 하지 않았다. 돈이 없어서 그렇지..

내 친구들이나 후배들은 거의 인지심리학 전공이다. 요새 트렌드인가 싶기도 한데, 기본적으로는 참 따분한 과목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컴퓨터로 실험을 하는 프로그램도 있었고... 색깔 이름의 각 글자마다 색깔 다르게 칠해서 '글자 말고 색깔이 뭔지 말해보셔!' 라고 하는, 그런 흥미로운 실험들도 있었다. (그 왜, 스펀지스러운거..) 어쨌든 응용할 수 있는 분야가 굉장히 넓을 것 같기는 한데, 철학에서 인식론으로 말할 것 같으면 생리심리학이랑 논쟁을 할게 아니라 바로 여기랑 논쟁을 해야 하는 것 같다.

하여간 최근에 심리학-라캉 논쟁 때문에 옛날 기억들이 많이 스쳐 지나가는데.. 이 논쟁은 정말 오랜만에 보는 막장 논쟁인 것 같다. 따지고 보면 이 논쟁을 촉발한게 난데.. 괜히 남의 블로그에 리플은 달아가지고.. 쩝.. 그걸 본 한윤형의 키보드워리어 본능이 작렬을 해서.. 지금 논쟁 구도는 아주 엉망진창이고, 전선도 혼란스럽고, 그 와중에 노정태는 모처럼 책도 천 권 읽었고 공식적으로 철학도도 되었고 하니 좀 생산적인 논점을 찾으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조금 쌩뚱맞다는 느낌도 들고.. 하여간 인터넷 논쟁 6년 만에 이런 논쟁 참 오랜만에 본다.

자연과학/인문학의 전선이 하나가 있고, 심리학/정신분석학의 전선이 하나가 있고, 대륙철학/영미철학의 전선이 하나가 있고, 오늘 보니까 양신규/진중권 전선도 있다. (이건 반 조크) 무슨 이런 엉망진창인 논쟁이 있는지.

배도 어느정도 꺼졌고 하니까.. 이제 잠을 자야겠다. 3시간만 자고 출근해야지.


종우

2008.03.24 10:20:40
*.30.5.11

흠.. 그게 사실이라면 좀 무섭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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