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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옛날글] "노동자"라는 진보의 근본어휘

조회 수 756 추천 수 0 2010.09.12 23:41:52

장석준 선생 글에 대해 코멘트 하면서, 장석준이 의도하는 바를 충족하려면 '노동' 개념에 대한 재정의가 필요할지도 모른다고 말했는데, 그와 관련해서 옛날옛적에 쓴 글을 퍼온다.

 

 

한국에서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긴요성을 부인할 사람은 자본가뿐이다. 그 절실함에 비할 때 한국사회에서 노동자의 정치세력화는 지체되었다. (홍세화, [노동자 정치세력화와 세개의 진보정당])

기본적으로 아직도 현장에서 땅개노릇하는 동지들, 어쩌다 '노동해방'이라는 참으로 기이한 단어 한마디에 그만 반역의 불길로 심장을 태워버린 노동자들 말이다.(수군작, [중권이가 빨갱이라고? 사기치지 말라구 그래라 응? ^^])

그러나 세계의 노동자들이 단한가지라도 공통점을 찾는다고 노력한다면 그것은 두번 생각할 것도 없이 평등이요, <프롤레타리아>의 권익이며, 노동해방이다. (지에팡, [전세계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왜 "민주노동당은 노동자계급의 정당입니까?" (달동무, [민주노동당은 '노동자계급'의 정당인가?])


기왕에 "민주노동당의 우방한계선"이라는 괴상한 커밍아웃(?)을 했으니, 궁금한 걸 물어봐야겠다.  진보사상을 가진 사람들에게 "노동자"라는 기표는 그야말로 막중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나는 이 기표가 기의와 굳건히 결합되어 있지도 않으면서, 이리저리 핑계를 대고 미끄러지며 진보의 근본어휘로 행세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1300만 노동자"라고 말할때의 노동자는 고용인이라는 뜻일 것이다. 내 아버지는 저 안에 들어가는 사람이다. 그러나 동산도 가지고 있고 부동산도 가지고 있는 내 아버지가 "무산계급"일리는 만무하다. 그래서 나는 노동자라는 말에 영성을 투여한 좌파의 어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노동자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킬까?

민주노동당의 긍정성은 현실과 맞닿아있는 구체성과 실천성에 있다. 당 강령은 노동자, 농민, 어민, 도시빈민, 영세상공인을 언급한다. 그리고 이들을 위한 정책을 발의한다. 이들을 예외가 없는 일반적인 용어로 묶으려면 "사회적 약자" 정도가 될 것이다. "진보는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것이다."라고 말하면 될 것이다. 좀 더 감상적이고 문학적이고 싶다면, "상처"라는 단어를 끌어들이면 되겠다. "진보는 상처를 치유하는 것이다." 그러나 진보사상을 가진 사람의 텍스트가 이런 용어에서 출발하는 것을 나는 본 적이 없다. 시작은 노동자다. 여기서 노동자는 무엇일까?

이론은 옛날에 쓰던 대로 냅두고, 실천은 그걸로 하면 망가지는걸 아니까 제대로 하고... 그런 건가? 수군작이라는 극단화된 인간형태를 체험한 후라 더 부정적으로 느껴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정말로 저런 식의 감상이 들 때도 있다.

"사회적 약자"나 "상처입은 이" 같은 언어가 첫 머리에 등장하면, 비대한 집단인 노동자가 그 안에 온전히 소속될 수는 없을 것이다. 여기서 사람들은 "민주노동당은 대기업 노조 정당"이라는 일부 민주당 지지자들의 히스테리를 떠올릴 수도 있다. 나도 그와 같은 얘기를 하려는걸까? 그런데 나는 많은 경우 직감적으로 국가나 자본가보다는 대기업 노동자의 편이었다. 이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들과 나 사이엔 어떤 차이가 있는 걸까?

그것은 진보가 행해야 할 다른 문제를 제시하면서 해결해야 할 것 같다. 그것은 사회적 약자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구성원들의 경제생활의 안정성의 문제인 것 같다. 단순히 말하면, 사회구성원들이 앞날 걱정을 덜하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대개의 복지제도는 이를 위한 것이다. 아프면 의료비 없을까봐 걱정하고 살지 마라, 애들 교육이 없을까봐 걱정하고 살지 마라... 그런건 비인간적이다... 진보는 이런게 아닐까? 이 문제는 상위 몇프로 이내에 드는 일부 부자를 제외한 대부분의 사회구성원들에게 적용되는 것 같다. 그러므로 한국의 경우 사회구성원들의 경제생활의 안정성의 수준이 매우 낮기 때문에, 비교적 연봉이 높은 대기업 노동자들의 요구 역시 두말할 나위없이 정당하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나는 한국사회에서 진보정당이 해야 할 두 개의 과제를 정리하게 된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1. 사회적 약자를 보호한다.
2. 사회구성원의 경제생활의 안정성을 향상시킨다.

"노동자"라는 기표는 내게는 뚜렷이 구별되는 이 두개의 문제를 한큐에 다 포섭하려고 하는 것 같다. 그런데 나는 그 원리가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선진국의 진보정당의 경우 어느 정도 보장되어 있는 2를 절실하게 추구할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에겐 2 역시 1과 맞먹게, 어쩌면 그 이상으로 절실한 문제다.

1은 일부 사람을 위하는 것이지만, 2는 대부분의 사회구성원들에게 설득력이 있다. 그래서 민주노동당 지지는 당파성과 함께 보편성을 띠게 되는 것 같다. 따라서 민주노동당 강화를 위한 전략은 2를 사회구성원들에게 설득시키고, 이에 부기하여 1의 가치를 주장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은 실패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1 역시 크게 보아 2 안에 들어간다고 말할 수도 있다. 여하간 내가 보기엔 이런 식의 구별이 유효하다. 현실과 부합하기에 설득력이 있고, 대중들의 요구에 부합하기에 실현성이 있다. 노동자란 기표가 이런 일을 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아무도 지금껏 내게 그 작동원리를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설명해 주지는 못했다.

알고자 함은 더 잘 행동하기 위함이다. 나는 1과 2를 구별하면서, 민주노동당의 주요정책이 2에 있으며, 1의 경우도 상가임대차보호법이나 여성관련 법안들에서는 실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1을 더욱 충실하게 수행하기 위해선, 한국사회의 못사는 사람들이 구체적으로 어디에 있는지를 찾아보는 일이 진보정당의 중요한 과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알고자 함은 더 잘 행동하기 위함이다. 노동자라는 두리뭉실한 기표는 이런 작용을 할 수 있는가? 나는 잘 모르겠다.

아흐리만.

 

//진보누리 쟁점토론방, 2003년 3월 12일



이상한 모자

2010.09.12 23:58:37
*.146.143.41

비슷한 문제의식이지만 맥락이 다른 평소의 고민이 있는데 그것과 관련하여 덧붙입니다. 한국의 운동권에게 '노동자'라는 이름은 사실 역사적 맥락이 있는 단어일 것입니다. '노동자'라는 이름을 지켜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누군가에게 고용된 사람, 회사에서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개념, 열심히 일을 해서 자기 실현을 하는 사람 이라는 보수적인 의미를 극복하고 역사적, 사회적 주체의 하나로 인정받기 위하여 투쟁한다는 상징적인 차원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87년 이후 전투적노동조합주의에 의해 구축된 패러다임의 측면에서 이해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는 모두 노동자'라고 말하면서 가슴 속에 투쟁의 결의를 세우는 시대가 실제로 있었던 것이지요.

97년 이후, 신자유주의 개혁조치가 본격적으로 한국에서 실행되면서, 운동적 관점에서 '노동자'라는 상징은 이제 '비정규직'으로 대체되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상황에서 보듯, '비정규직'이라는 상징 전략(?)은 실패하였습니다.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인가? 왜 오늘날의 상황은 87년의 패러다임과 같은 방식의 전략이 작동하지 않는가? 이에 대한 고민과 답변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오늘도 운동권 불세출의 이론가 장석준 선생은 '비정규직당'이 되자고 이야기 합니다. 물론 여러가지 내용이 함께 있는 글입니다만 그런 근본적인 고민거리가 해소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저 글은 참 '모범생'답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이상한 모자

2010.09.13 21:22:33
*.146.143.41

바로 그래서 새로운 구상으로 '사회연대전략'과 같은 것이 등장했던 것이거든요. 그런데 실컷 욕만 먹고 날아가 버렸죠.

duripop

2010.09.13 19:33:47
*.104.37.180

전자에서는 가능했던 동질화 과정이 후자에는 통하지 않았던 게 아니었을까 싶습니다만

윤형

2010.09.13 00:06:55
*.149.153.7

참고로 이 글에 대해 당시 진선생이 답변 비스무레한 걸 하셨는데요. 문제의식에 공감은 한다고 하셨지만 그에 대한 뾰족한 해법은 없었고, 말미에 그래도 노급(노동계급)의 힘은 운동에 도움이 되지 않느냐는 식으로 말했던듯. 그래서 그분은 좌파고 난 자유주의자인 것이죠...


아 맞다 진은 반공주의자지...OTL

질문

2010.09.13 22:33:55
*.171.215.188

<운동권 불세출의 이론가 장석준 선생>은 공인된 사실입니까? 아니면 사견입니까?

이상한 모자

2010.09.14 08:36:13
*.114.22.131

그런걸 어떻게 공인을 하겠습니까.. 2004년에 제가 붙여준 별명입니다. '전국조직 기본 테제' 였던가 하는 백몇 십쪽에 이르는 장문의 문건을 써왔기에..

verdendi

2010.09.14 20:05:49
*.146.239.27

근데 원래 자본가 잡는 사람은 노동자일 수 밖에 없는 거 아닌가요?
거칠게 노동자를 피 고용인으로 넓게 정의하고 자본가는 일안하고 돈을 버는 사람으로 본다면 자본가가 존재하려면 노동자가 존재해야만 하는 거 아닌가요?? 특히나 자본가가 살아남기 위해서 자본 축적을 강하게 하려면 노동자의 몫을 뺏어갈 수 밖에 없는 노릇이고요. 그래서 이론상으로 보자면 자본가가 존재하려면 노동자가 존재해야하고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언제나 자본가가 노동자와 대립할 수 밖에 없는 거겠죠.
물론 노동자란 현실 상에서는 다양하게 나타나니까, 일률적으로 노동자를 정의할 수는 없겠지만 자신이 가진 자본으로 사회적 재생산이 불가능한 사람들은 누구나 다 노동자들이 느끼는 고통을 공감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노동자라는 정치적 상징이 갖는 힘 역시 무시 못하는 거 같아요,

ir

2010.09.23 02:09:44
*.153.75.79

결국, 분배에 충실하자는 복지국가와 뭐가 다른 건지요?

윤형

2010.09.25 03:32:15
*.149.153.7

안 다르면 안 되나요? 그럼 뭘 하자고 할까요? 저는 이 글에서 뭘 하자고 얘기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것들'에 대해 설명할 방법을 찾아본 것이죠. '다른 것'을 열어제끼려고 해도 할 수 있는 기존의 것들은 해야겠죠. 근데 지금 우리가 하자고 하는 일이 대체 뭐냐는 겁니다. '다른 것'은 어디서 나올까요? 이를테면 본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모르면서 '노동계급'을 3만번 외치면, 저절로 급진성이 담보되고 '복지국가'가 아닌 다른 것의 길이 열릴까요?

ir

2010.09.26 21:44:31
*.222.165.149

아니요, 달라도 됩니다. 요즘 썩 편치는 않으신 듯 한데 괜히 제가 더 불편하게 만드는 게 아닌지 조심스럽고, 또 죄송하기도 합니다. 그래도 제가 보기에 저 위에 써 놓은 것은 백년전, 페비안 협회나 유럽의 사민주의 협회에서 말한 것과 놀랍도록 일치하는 부분이 많습니다. 그래서 질문을 드린 것이고요. 만약, 추구하는 부분이나 이뤄할 종속변수가 비슷하다면 지금껏 그 종속변수를 이루기 위한 독립변수들이, 역사적 질곡을 그려온 것들이 뻔히 보이는데요, 자꾸 그것들은 거부하고 종속변수만 취하려 하다보니 심한 괴리가 느껴집니다. 그래서 질문들 드린 것이고요, 물론 현장의 활동가로서 한국사회의 특성을 반영한 방식을 고려해 볼 수 있다 하더라도, 기존의 역사적 흐름을 좌시해서는 안 되는 것이고요. 제가 알기로 '조'가 무슨 연구소 소장으로 있었는데 거기서 윤도현 선생과 발간한 '사회민주주의란 무엇인가?' 이런 시리즈가 두어권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책부터 한번 손에 잡아 보시지요. 물론, 그것도 빙산의 일각입니다...

그리고 '해야만 하는 것'만 고집하지 마시고, 당장 현실적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고서는 이 땅의 진보세력은 설 자리가 없습니다. 정책, 혹은 제도의 형성과 진행과정을 아주 면밀하게 봐야 합니다. 경로의존, 거부점 이런 국가의 행정 권력의 적용 등도 진중히 봐야 하고자 하는 바를 조금이나마 이룰 수 있는 것이지요...

윤형

2010.09.27 17:05:52
*.141.4.16

예 조언 감사드립니다... 제가 좀 오해가 있었군요.

ir

2010.09.27 18:21:00
*.222.165.149

아뇨 사실, 제가 오지랖 넘게 계속 깔짝되는 거 같아서 미안하군요. 담에 기회되면, 언제 밥이나 같이 함 먹죠...제가 맛있는 거 사 드릴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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