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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87년 이후 조직된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제기된 유의미한 정치노선을 이야기 한다면 우리는 '노동자정치세력화'라는 구호를 이야기 해야만 할 것이다. 사실 이 구호에는 2가지 함의가 있다. 하나는 말 그대로의 노동자정치세력화로서 노동계급이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정치세력을 만들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소박하지만 멋진 꿈을 의미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민주노총 내부의 특정 파벌이 실행한 프로젝트라는 의미이다.

 

그 특정 파벌은 민주노총 중앙파라고 불려졌는데, 이들은 사회 참여와 온건 노선을 내세운 국민파, 현장에서의 물리적 투쟁을 강조하는 현장파 사이에서 부정적인 평가를 감수하면서 노동자정치세력화를 주장하였던 것이다. 이들이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96년의 노동법 날치기 통과 사건이었다. 김영삼 정부 시절 노동계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여야의 합의에 의해 노동법 개악안이 통과 되었던 것인데, 이때 민주노총 중앙파들은 전노협 이후 노동운동의 기본 노선이 되었던 전투적 노동조합주의의 한계를 느끼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 당시에 민주노총 중앙파들이 조직적으로 노동자정치세력화에 대한 결의를 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다른 정파의 구성원들이 노동자정치세력화라는 프로젝트 자체에 동의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도 일면적인 이야기일 수 있다. 하지만 후일 노동자정치세력화라는 프로젝트에 대해 가장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던 정파가 바로 민주노총 중앙파라는 점은 부인하기 힘들 것이다.

 

이 시기의 결론은 기껏해야 국민승리21이라는 기구를 만들고 당시 민주노총 위원장이었던 권영길을 대선에 출마시키는 것 정도였다. 하지만 이 시기의 경험이 밑바탕이 되어 민주노동당 창당과 '노동자정치세력화는 민주노동당을 통해서만 한다'라는 소위 '배타적 지지'방침에 이를 수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노동자정치세력화라는 측면에서 '민주노동당 모델'은 전노협, 민주노총과 동시대의 맥락 - 즉, 87년 체제의 유산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뒤집어 말하면 2007년의 분당 국면은 민주노동당을 지탱했던 87년 체제의 종식과 민주노총 중앙파의 정치적 프로젝트라는 의미에서의 노동자정치세력화 실패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이제 현재 시점에서 그 중앙파들이 무엇이라 말하고 있는지를 한 번 점검해보자. 중앙파의 실질적 지도자였던 단병호는 노동자정치세력화에 대한 책임을 잊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단 한 사람을 제외한 중앙파의 다른 유력자들은 사실상 노동자정치세력화를 포기했다. 중앙파 3대 지도자 단, 문, 심의 한 명인 문성현은 6월 지방선거에서 민주노동당의 우경화에 발 맞춰 노란 티셔츠를 입고 김두관과 노래를 부르며 포즈를 취했고 또다른 한 명인 심상정은 모두가 익히 알고있다시피 유시민 지지를 선언하고 경기도지사 후보를 사퇴했다. 중앙파를 실질적으로 이끌었던 나머지 참모 출신의 활동가들의 경우도 더 이상 노동자정치세력화를 이야기 하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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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민주노총 중앙파의 대표적 인물 중 하나이자 공공연맹의 전 위원장인 양경규는 최근에 이 문제에 대한 글을 남겼다. 그 글은 진보신당 부대표인 정종권의 블로그에서 볼 수 있는데 아래의 링크를 참조하면 된다.

 

http://blog.naver.com/jjkpssp/10091643920

 

이 글의 논리를 요약하자면 이런 것이다. '분당은 애초에 잘못된 것이고 때문에 앞으로 진보신당과 민주노동당에 의해 진보정치가 발전할 가능성이 없으며 그래서 나는 노건추를 조직한 것이었지만 그마저도 진보신당의 당적을 가진 자들 때문에 망했다. 따라서 다들 이제 그만 진보신당과 민주노동당을 탈당하여 노동자정치세력화를 다시 시작하자.'

 

이 글은 다소 편집증적이긴 하지만 현재의 상황을 냉정하게 바라보고 있다는 긍정적인 부분이 있다. 하지만 과거의 일에 대해서는 올바른 방식으로 평가하지 않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예를 들면 분당으로 인하여 내부에서 진보신당파와 민주노동당파가 싸우느라 이번 선거에서 민주노총 정치위원회가 제대로 기능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대목을 보자. 그렇다면 도대체 민주노총 정치위원회가 제대로 기능했던 때는 언제란 말인가? 내가 듣고 보아온 바로는 민주노동당 창당 이후에 민주노총 정치위원회는 계속해서 무기력한 모습을 보여왔다. 특히 민주노동당 내부의 좌, 우 노선 갈등이 첨예해진 2004년 이후에는 더더욱 그랬다. 세액공제 사업과 민주노동당의 후보에 대한 지지방침을 형식적으로 결정하는 것이 정치위원회의 주요 사업이었는데 바로 그 점이 문제였다는 것은 분당 과정에서 충분히 설명되었다. 그리고 그 문제적 지점에 대하여 이제는 연로한, 노동운동에 헌신한 '동지들'의 책임이 참으로 막중하였다는 것 또한 외면할 수 없는 진실이 아니겠는가?

 

2007년에 이미 진보정치는 파행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분당을 반대했던 사람들은 소위 신당파들의 조급증 때문에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으나 단지 조급증이 문제였다면 '분당'이라는 정치적 기획이 과연 작동하였겠는가? 2007년 권영길의 대선 참패는 단지 분당의 핑계가 된 것이 아니라 '민주노동당 모델'로서의 노동자정치세력화가 사실상 끝에 다다랐음을 의미하였다는 것이다.

 

양경규도 이 점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 글의 다른 부분에서 그는 바로 그러하다는 점을 반복해서 장황하게 이야기 하고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뭐란 말인가? 분당을 한 현재와 분당을 하지 않았다는 가정으로서의 현재에 도대체 무슨 차이가 있다는 것인가? 그의 논리로는 그 점이 규명되지 않는다. 즉, 그는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분당이 왔다는 사실을, 민주노동당 모델이, 그리고 참으로 길게 이어진 87년이 끝났다는 사실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따라서 남는 것은 노동자정치세력화의 나머지 의미, 즉, 글자 그대로 노동계급이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정치세력을 만들어 내는 문제라고 말 할 수 있다. 사실은 이것이야 말로 지금 시점에 제기되어야 할 노선 논쟁의 핵심이 아닌가? 이 문제를 외면하고서는 그 누구도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지 않은가?

 

(계속)


Q

2010.09.08 16:34:34
*.132.162.34

재밌게 읽고 있습니다.

인천에서

2010.09.11 02:51:17
*.171.215.188

아~~~ 문성현!!!!!!!!!!!!!!!!!!!!!!!!!!!!!!!!
그가 한미FTA단식할때 여의도 칼바람을 맞으며 그 여윈 모습에 눈물 지었던, 그리고 아! 나의 민노당!이라고 내심 뿌듯해했던 그때가 떠오른다.
노란티 입고 참 사람 값어치를 못하는구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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