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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황장엽의 죽음에 대한 잡상

조회 수 832 추천 수 0 2010.10.11 16:14:14

'풍운아' 황장엽이 죽었다. 소위 보수우파 진영에서 호들갑을 떤다. 시대의 지식인이니, 노(老)철학자니, 양심이니... 놀구들 있다...


황장엽은 왜 망명했을까? 조선일보와 그 친구들은 양심 때문이라고 한다. 일생을 안락하게 지낼 수 있었지만 북한 인민들이 굶는 현실에 견딜 수 없어서 월남을 했다는 것이다. 차라리 북한에서 권력투쟁을 한 뒤 죽는게 낫지 그럴거면 뭐하러 남한에 온단 말인가?


황장엽은 소위 말하는 김일성 세대다. 이론담당 서기라는 자리는 오늘날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당대에만 해도 굉장히 중요한 자리였을 것이다. 그는 이른바 공화국이 아직 마르크스-레닌주의(스탈린주의)를 버리지 않았던 시절에 러시아로 유학을 가서 철학박사를 따온 사람이다. 그리고 세간에서 언급되듯 주체사상을 만드는데 일정한 기여를 했을 것이다. 하지만 김일성 사후에 과연 그러한 지위가 언제까지나 이어질 수 있으리라는 점을 확신할 수 있었을까? 나는 아니라고 본다.


후계자 김정일에게 있어서 황장엽은 좋은 선생님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도자 김정일에게 있어서 황장엽은 더 이상 도움이 되는 존재가 아니었을 것이다. 어쨌거나 아버지 세대의 핵심 인물이고 자신이 쉽게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내가 김정일이었다면 그의 숙청 방법을 늘 고민하였을 것이다.


북한의 모든 것이 김정일의 뜻대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산이다. 인민을 굶기는 독재국가에서도 지배층 사이에서의 권력관계는 예외없이 작동한다. 3대 세습 국면에서 김정은이 정치국 상무위원에 포함되지 않았다는 사실과 당대표자회의가 수차례 미뤄졌다는 것에서 이러한 사례를 발견할 수 있다. 항간에는 이러한 사실관계를 바탕으로 한 김경희 비토설, 장성택-김옥 대연정설 등의 각종 추측성 소설이 난무했었다. 그러한 소설들에 진실이 단 1%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렇든 저렇든 당대표자회의의 연기는 북한 권력층 사이에서 권력분점에 대한 합의가 늦어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다. 그리고 이는 김정일의 세습국면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 현상이었을 것이다.


황장엽도 이런 사정을 모를리 없고 아마도 작은 꼬투리를 잡힌 일 등으로 마음고생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런 것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일가족이 모조리 죽음을 당할 것을 알면서 망명신청을 하였겠는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아마 부하린의 운명이었을 것이다. 그는 부하린처럼 자신의 운명을 체제에 맡긴 것이 아니라 그 운명을 거부하였던 것이다.


그는 어떻게 부하린이 거부하지 못한 것을 거부할 수 있었을까? 그는 일종의 질서의 붕괴를 경험하였을 것이다. 강철서신 김영환이 김일성을 만나고 소위 주체사상의 학자들과 토론하고 나서 경험하였던 것과 같은, 대타자의 소멸이라고 생각할만한 것 말이다. 황장엽이 김정은에 대해 지나치게 격렬한 반응을 보이는 것을 보면 결국 여기서도 문제는 세습이 아니었나 싶다. 황장엽은 과거에 김정일의 세습을 반대하는 입장에 섰던 것이 아니었을까? 북한의 정치적 권력관계는 김정일의 세습을 정당화하였지만 스탈린주의 이론조차 세습을 정당화할 수 있는 틀을 갖지는 못하였을 것이고 소위 이론가라는 황장엽은 다른 정치꾼들과는 달리 자신의 모순적인 고뇌를 그대로 안고 있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만약 그런 맥락이 있었다면 황장엽이 그래도 학자가 맞기는 맞았던 모양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황장엽의 독백에 따르면, 가족을 죽게 내버려두고 남한으로 온 이후 사실상 목숨을 버린 것이나 다름 없다는 생각을 하고 살았다고 한다. 그가 북한의 암살 시도에 대해 지나치게 초연한 태도를 보이는 것도 이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는 그대로 부하린의 운명을 받아 들여야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남한의 극우이데올로그들에게 부관참시를 당하는 그를 보며 조금 안쓰럽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특별히 황장엽을 추모하거나 비난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저 이 시대를 살아간 온갖 인간군상들의 죽음 하나 하나에 경이로움을 느낄 뿐이다.


Q

2010.10.12 00:36:02
*.192.131.227

명문이네요.

...

2010.10.13 21:42:01
*.235.165.65

닥쳐 이 저작권도 모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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