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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서구 근대성의 역사를 분석한 바우만의 논의를 조금 끌어들여보자. 근대성은 최초에 "제한적 자유주의 근대성 (restricted liberal modernity)"의 모습을 띠고 나타났다. 경제적으로는 아담 스미스의 자유방임주의, 그리고 사회적으로는 자유주의의 이데올로기가 번성하던 시대다. 그런데 어째서 "제한적 자유주의"인가? 최초의 자유주의자들의 논의가 자유주의의 보편성을 제대로 담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유주의는 계급 문제, 인종 문제, 성 문제의 불평등을 해결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자유"의 가치가 자본가, 백인, 남성에게만 적용된 것이다.


그래서 "제한적 자유주의 근대성"은 위기를 맞는다. 이는 근대성이 맞이한 최초의 위기다. 맑스주의는 이 위기에 대한 하나의 대안 이론으로 탄생했다. 역사적으로는 이때부터 근대성의 조직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한다. 이른바 "조직화된 근대성 (organized modernity)"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경제적으로는 케인즈주의를 떠올리면 간편할 것이고, 사회적으로는 관료조직을 생각하면 편리할 것이다. 서구는 1960년대에 이 "조직화된 근대성"의 안정기를 경험했고, 70년대부터 근대성의 두 번째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이른바 서구의 68혁명은 조직화된 근대성에 대한 대중의 반란이었다. 그들은 체제가 위기에 이르기 전에 위기를 예고한 셈이다. 근대성의 두 번째 위기는 탈제도적 정치 행위 증대, 복지 국가의 재정 위기 등으로 나타났다. 현재 좌파들이 문제삼는 신자유주의는 역사적 맥락으로 보면 이 위기에 대한 대안 이론이었다고 볼 수 있다.


한국 사회는 흔히 전근대, 근대, 그리고 탈근대가 공존하는 상황으로 묘사된다. 그런 이유로 근대성의 두 가지 위기가 동시에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 한국 사회의 독특한 문제다. 제대로된 정당정치도 확립되지 않은 상황에서 탈의회주의적인 시민 운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가 하면, 노조의 힘이 제대로 성장하지도 않고 복지제도가 제대로 구비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시장에 대한 국가의 개입을 부인하는 신자유주의가 기승을 부리기도 한다. 또한 국내적으로는 주로 "제한적 자유주의 근대성의 위기"에 시달리고 있는 상황에서, 세계경제가 "조직화된 근대성의 위기"에 대응하는 쪽으로 움직이는 상황이 매우 부담스럽다.


그러므로, 한국 사회의 좌파는 두 개의 근대성의 위기를 동시에 고려해야 한다는 어려움이 있다. 강자에게 유리한 "제한적 자유주의"를 파괴하기 위해 적절한 조직화를 고려해야 하는가 하면, 지나친 조직화가 가져올 부작용 역시 경시해서는 안 된다.  


이런 상황을 고려할 때, 이 게시판의 일부 좌파들이 "자유주의자"에 대해 과도한 적개심을 보이는 것은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다. "정직한 자유주의자"라면, 그러니까 자유주의의 확대에 동의하는 자유주의자라면 한국사회에선 충분히 진보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들은 조직화에 대해 어느 정도 반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무조건 조직화로 "제한적 자유주의"의 문제를 풀어가려는 일부 좌파의 행동에 브레이크를 거는 역할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민주노동당에 "자유주의자"가 합류하는 현상을 "우경화"로 볼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무조건 왼쪽으로만 가면 옳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현실은 우리에게 해결해야 할 문제를 던져주고 있고, 우리는 그에 대해 적절한 해결책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한국의 좌파들이 할 일은 세계적으로 "조직화된 근대성의 위기"를 반동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확산되고 있는 신자유주의를 제어하면서, "제한적 자유주의 근대성"의 "제한"을 최대한 풀려고 노력하는 일이다. 그리고 평화 통일을 이루어 세계 평화에 기여하는 일이다.


이러한 목적에 부합하는 수단은, 그 수단이 목적의 가치를 훼손하지 않는 한에선 진보적인 것으로 인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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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6월 15일, 진보누리 쟁점토론방에 세라핌이란 아이디로 올린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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