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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저도 써도 될까요?

조회 수 8314 추천 수 0 2008.07.20 22:52:18
임괴수 *.42.62.140

토요일 저녁.. 한잔 걸치기 위해 슬슬 나가보려고 했지만 만날 사람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ssy에게 연락.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높아진 ssy의 콧대. '잠을 자야 하기 때문에' 안 된다고 거절. 그래, 인생이란 힘든거야..

잠시 주소록을 뒤지며 고민을 해보았지만 '아니, 토요일 저녁에 약속도 없니?' 라는 질문을 누군가는 할 것 같아서 두려움에 포기. 아주 잠깐 옥수동으로 가서  애 보고 계실 감독님이라도 불러낼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지만 너무 슬픈 느낌이 들어 그것도 포기. 그냥 혼자 마시기로 결정, 대학로 '도어스'로 갔다. 가는 길에 사장님(새로 바뀐 머리 긴 형)을 마주쳤는데 순간 문을 닫고 집에 가는 건지 알고(그 때 시각이 열시쯤이었다) 비참한 심정이 되었지만, 다행히 도어스2에 음반가지러 가시는 길이었다.

도어스.. 궁상떨고 앉아 있는 아저씨 하나, 칙칙한 남자둘과 여자 하나,  여자가 열변을 토하고 있는 커플 한 쌍, 외국인 남자와의 커플이 또 한 쌍 앉아 있었다. 사장형이 없었지만 마치 알바생처럼 냉장고에서 카스 큰병을 꺼내 들고 잔과 오프너를 카운터에서 챙긴 다음 바 구석에 눌러 앉았다. 확실히 혼자 마시니 ssy 같은 녀석들하고 와서 마시면 뚝딱 비워지곤 했던 카스 맥주가 너무도 느리게 비워졌다. 3병쯤 비웠을까. 조그만 접시에 깐 땅콩 몇알을 얹어서 주시는 사장형. "왜 혼자세요?" 그러게.. 젠장, 인간이란 결국 외로운 존재 아닌가요 라고라도 말할걸 그랬나. "저 왕따잖아요." 농담처럼 한다고 한건데 웬지 진담같이 느껴져 버렸다. 젠장, 젠장, 젠장.

옛날에 마이클잭슨의 빌리진이 나오는데 느닷없이 구석에 조용히 앉아 있던 초라하고 키작은 남자가 벌떡 일어나서 정말로 똑같이(어쩌면 마이클 잭슨보다 더 잘) 춤을 춰 버리는 바람에 아무 맥락 없이 버닝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그런 일 안 일어나나 하고 있었지만, 그저 음악만 또 다른 음악으로, 술병만 또 다른 술병으로 바뀌고 있었을 뿐이다.

손님 한 분이 사장형에게 위스키를 따라주는 바람에 약간 술이 오른 사장형과 나는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고, 음악 이야기를 하다보니 사장형도 저번 사장님같은 무시무시한 리스너라기보다는 그런 사람들에게 열등감을 느끼며 자신의 대중적인 취향을 숨겨오던, 나랑 비슷한 면이 있는 것으로 느껴졌다. 그리하여 우리들만의 선곡이 시작되었다. 들국화에서 데블스로, 김정호로 갔다가 광석이형을 거쳐서 김현식으로. u2, alice cooper, radiohead로 가는 듯 하다가 느닷없이 queen, guns & roses, europe. 파이널 카운트다운을 튼 다음 캐리까지 틀어버리더니 한 여손님이 '아저씨 하림 노래 다시 틀어주시면 안되요?' 하는 부탁에 그 때부터 하림, 어떤날로 갔다가 전람회, 서태지.. 우웃! 형, 이건 좀 너무한거 아냐!

들국화의 '제발'을 듣다가 그렇잖아도 최근에 이상한 여자를 만난 후 적잖이 마음 고생을 하던 나로서는 울컥한 심정이 되었다(아흐님께 추천하는 곡입니다). 왔다가 음악에 경악한건지 분위기에 놀란건지 그냥 발길을 돌린 팀이 두 팀. 누군가 페일블루아이스를 신청했지만 술이 오른 내가 그 노래 안 나오는 날이 없네요 candy says 듣고 싶은데, 라고 한마디 하자 candy says를 틀어주시는 사장형. 아마도 pale blue eyes를 신청했을 것으로 추정되던 커플이 계산을 하고 나간다. 우우..

결과적으로 빈병이 여섯개. 남은 손님은 나를 제외하고 커플 한 쌍 뿐. 더 마실 수는 있었지만 그렇게 되면 뭐라도 할 것만 같은 불길한 기분(주로 춤 아니면 전화질이었겠지만)이 들어서 자제하기로 결정, 자리에서 일어났다. 순간, 사장형은 뭐랄까, '난 어쩌고' 하는 황망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지만 잽싸게 계산을 하고 뛰쳐 나왔다. 뭔가 잘 굴러가던 가게 하나를 파탄 내버린 기분이 드는건 왜일까..

택시를 타고 오면서 영화를 극장에서 제대로 보는 것이 틀리 듯이 음악도 큰 스피커로 제대로 듣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다시 한번 느꼈다. 집에 숨지 않고 나와서 궁상떨길 잘한거야 하며 스스로 위로했다.


충분히 예상을 하고 준비를 한다고 해서 고통이 덜해지는 것은 아니다. 고통을 많이 겪는다고 해서 무뎌지는 것도 아니다. 늘 새롭게 아프다. 누군가를 좋아하는데 그가 나를 좋아하지 않는 상황이라는 것을 명쾌히 바라볼 필요가 있다. 그냥 그 뿐이다.


노지아

2008.07.21 09:59:59
*.40.203.22

오-

도어스(다락방) 저도 자주 갔었더랬죠.
요즘은 술을 끊어서.. (?)

조슬린

2008.07.22 15:13:54
*.246.187.134

거긴 정말 사랑스러운 공간인 것 같아요...

임괴수

2008.07.21 16:29:13
*.128.44.41

다락 도어스가 간지는 나는데 까칠한 리스너들은 전 사장님이 계신 도어스2로들 많이 가는듯요

ssy

2008.07.21 13:11:28
*.109.164.20

콧대는 찜쪄먹은지 오래.

ssy

2008.07.21 21:26:50
*.109.164.20

복중에 아기가 있다는 것 외엔 달라진 게 없어... 그게 제일 쎄긴 하지만. -.-;

임괴수

2008.07.21 16:33:01
*.128.44.41

모르겠는데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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