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blog.daum.net/irepublic/7888257
미디어스에 실린 나의 정희준 비판&'나꼼수 코피 논쟁' 비평 글에 대한 격암 님의 글을 읽었다. 격암 님 글의 핵심적 요지는 만사를 어떤 이론적 틀을 동원해 논리적으로 재단하려고 하는 먹물들의 작업이 세상을 올바로 바라보는 것을 방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먹물들에게 노장사상이나 바가바드 기타를 읽어보라고 충고한다.) 그 실례로 그는 내가 정희준을 비판한 부분은 정당하지만 본질적으로 정희준과 동일한 작업을 수행하고 있다고 보는데, 그 이유는 정희준이 '진보/보수' 구분을 연역적/논리적으로 적용하여 사태를 재단하려고 했다면 나는 '공/사' 구분을 연역적/논리적으로 적용하여 사태를 재단하려고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내 글의 핵심을 이렇게 요약한다.
한윤형은 스스로 문제의 핵심은 공과 사를 구분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즉 공인에게 요구되어야 할것이있고 사사로운 개인에게 요구되어야 할것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꼼수는 언론상도 받았으며 진보를 대표하는 지명도를 가지게 되었으므로 바로 공인으로 분류되어야 하고 따라서 그들의 언행에 의해 상처받은 사람이 있다면 유감이다라고 한마디 해줘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 한윤형이 쓴 글의 핵심이다.
그러나 이런 요약은 그가 내 글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거나, 띄엄띄엄 읽었다는 인상을 준다. 실제로 내가 뭐라고 했는지 해당구절을 찾아보자.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무언가 명확한 합의에 도달하지는 못하더라도, 우리가 어렴풋이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구분’이라 부를만한 문제를 건드리고 있다는 사실 정도는 깨달을 수 있다.
말하자면 나는 나꼼수 코피 논쟁에 맥락초월적으로 개입하여 뜬금없이 공사구분이란 카드를 꺼내든게 아니다. 사람들이 서로 주장하는 바를 들어보면 분명히 이 문제를 건드리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이 점을 정리해야 한다고 말했을 뿐이다. 그리고 격암 님이 비평대상으로 삼은 내 글을 주의깊게 읽어보면 내가 공사구분에 대한 어떤 외국학자의 이론이나 나 자신의 정의를 주장하고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심지어 나는 나꼼수가 공적 영역이라고 확정짓지도 않았다. 만일 내가 격암 님이 정리한 (정희준과 비슷하다는) 논증구조를 취했다면 글의 분량은 훨씬 줄어들었을 것이다. 아마 댓글란에는 "뭐가 이렇게 길어 짜증나."란 반응보다 "나꼼수는 스스로 해적방송이라 했는데 뭔 개소리냐 빙신아." 같은 반응이 더 많았을 것이다.
정희준은 처음에 내가 문제삼은 글에서 '진보정치인'은 '정치인'이므로 무언가를 요구해도 되지만, 그냥 '진보'인 사람에게 무언가를 요구하는 것은 폭력이라고 했다. 격암 님 역시 생긴 모습을 내버려두어야 화합할 수 있다는 논지를 펼치면서 대통령과 같은 사람은 예외로 둔다. 즉 그들은 명료하게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1)공적영역과 사적영역의 구분이 있고 2)오직 전자에 대해서만 이런 종류의 행위들에 대한 규제를 요구하는 것에 합당한데 3)나꼼수는 전자에 해당하지는 않기 때문에 4)나꼼수에게 사과를 요구하는 님아들은 문제가 있어 라는 논리구조를 취하고 있다. 격암 님은 자신이 이런 주장을 하고 있단 걸 인지하지 못하는 것 같고 마치 스스로 논리초월적인 주장을 펼치는 것마냥 글을 썼지만 그래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그들과 다른 여러 사람들이 한 얘기를 분석하면서 논점을 정리하고 있는데 그런 것이 필요없다고 말한다면 얘기를 하지 말자는 것과 마찬가지다.
격암 님은 논리는 필요할 때나 사용하는 것이라 말한다. 정말 그렇다. 나는 별로 논리적인 인간이 아니다. 가령 점심 때 짜장면을 먹을지 짬봉을 먹을지를 고민할 때, 나는 구태여 논리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만일 친구와 함께 밥을 먹어야 하는데 내가 짜장면을, 그녀석이 짬뽕을 원한다 해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우리는 각자 원하는 것을 시켜먹거나, 상대방에게 자신이 맛있어 하는 음식을 먹는 것에 동참해 줄 것을 설득하는데 성공하기만 하면 된다. 이런 부분엔 논리가 필요없다. 나는 "검토하지 않은 삶은 가치가 없다."는 소크라테스식 주지주의의 신봉자가 아니다. 실제로 살다보면 이성적 사고가 별로 문제해결에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하고, 이성과 삶에 대한 내 주관적 느낌을 말하자면, "검토하다 보면 삶이 정말 가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리적 말하기가 필요해지는 지점은 서로의 직관이 다를 때일 것이다. 우리는 대부분의 판단을 직관적으로 내리는데, 서로의 직관이 다른데 그 사실을 서로 참지 못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만약 인간종족의 행위에 관련된 직관이 거의 동일하다면 (도무지 상상하기 어려운 무리한 가정이지만) '논리'란 말은 탄생하지도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만일 그런 사회에 논리학이란게 있다면 그건 심리학과 거의 구별이 안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1) 서로 의견이 다르고, 2)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께 행동하기 위해 행동을 조율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논리란 걸 찾는다. 그런데 1)은 보편적 상황이지만 2)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가 문제가 된다. 즉 공사구분의 문제란 건 좀 더 원초적으로 말하면 "문제가 된 이 상황이 서로의 다른 생각을 인정하고 따로 행동하면 그만인 상황인지, 아니면 어떻게든 합의를 이루어 함께 나아가야 할 상황인지"를 판별해야 하는 문제란 것이다.
나꼼수 코피 논쟁에 대해 나는 해당 글에서 다음과 같은 핵심들을 주장했다. 1) 나꼼수 비판자들을 조중동 알바/꼴페미/진보신당원로 몰지 말고, 그들을 별도의 윤리적 직관을 공유한 (함께 나꼼수를 즐기던)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인정할 것, 2) 논리적 공방보다는 그들과의 대화에 신경을 쏟을 것, 3) 나꼼수를 공적 대상으로 볼지 사적 대상으로 볼지를 확실히 정하고 일관된 주장을 할 것. 격암 님은 내가 정희준과 같은 도식을 사용했다고 하지만, 사실 정희준과 같은 도식을 가진 것은 위에서 내가 분석한 격암 님의 주장이다. 심지어 나는 그것에 정확하게 반대되는 논증구조를 취하지도 않았다. 그렇게 두 개의 주장이 평행선을 달리는게 큰 의미가 없다고 보았기 때문에, 양 주장의 기저에 깔린 전제들을 검토하며 그 주장들이 어떻게 어긋나는지를 살펴보려고 했다.
그러므로 내 글의 결론에서 나꼼수의 사과를 요구한 것은 그러므로 논리필연적인 결론은 아니었고, 직관적인 양자택일이었다. 말하자면 내 글의 핵심요지에 따르면 나꼼수가 사과를 안 하는 선택을 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그런 선택을 옹호하려면 나꼼수를 "듣기 싫은 사람들이 떠나면 되는" 사적인 것에 가까운 것으로 정당하게 위치시켜야 하고, 야권통합이란 대의를 위해 봉사하는 어떤 것으로 거듭 강조해서는 안 된다. 여기까지는 동의하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듣기 싫은 사람은 떠나라."고 말한 입으로 삼국카페가 지지철회 성명서를 내자 흥분해서 살생부 투표를 하는 치기만은 벗어던져야 할 것이다. 나꼼수가 다른 윤리적 직관을 가진 이들을 아우르려고 했다면 사과나 그에 준하는 해명을 했어야 하는 문제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적어도 떠나는 이들에게 침은 뱉지 말아야 할 것이 아닌가.
격암 님은, 본인이 핵심적으로 말하는 대로 믿는다면 오히려 내가 하는 얘기를 적극적으로 옹호해야 하는 입장이다. 그는 문제의 핵심은 공동체의 화합이며 상처라고 했다. 그리고 내가 글 말미에서 굳이 '사과'를 요구하는 양자택일을 권했던 이유도 바로 그것이었다. 나꼼수와 그 지지자들에겐 일관된 선택을 한다고 볼 경우 택할 수 있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는데, 하나는 생각이 다른 이들을 떠나보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생각이 다른 이들을 품기 위해서 한발 물러서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상처를 줄이기 위해 나꼼수가 후자를 택하는 편이 낫다고 보았다. 그런데 격암 님은 사과를 하든 안하든 상처는 남는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격암 님의 세계관에선 사람들이 상처를 안 받기 위해서는 나꼼수 발언에 상처를 받은 이들이 문제제기를 안하는 수밖에 없다. 노동자가 파업을 일으키기 전에는 사회문제는 존재하지도 않는다고 보는 전경련의 세계인식을 보는 느낌이다.
여기에선 격암 님이 '먹물'들을 질타하기 위해 끄집어 낸 '논리vs직관'의 구도가 허물어진다. 나꼼수를 듣고 낄낄대는 것도, 상처입는 것도 모두 직관의 영역이다. 그리고 상처입은 사람들이 행동에 나섰을 때 김어준이나 나꼼수 팬덤은 다음과 같은 논리적인(?!) 말을 한다. "네 기준으로 치면 지금까지도 용납못할 게 많았을텐데? 이제와서 화내는 건 비일관적이잖아?"(격암님 식으로 정리한다면, 존나 먹물적인 반응이다.) "내가 이번에 사과하면 앞으로 넌 분명히 또 계속 사과를 요구할텐데? 그럼 난 영원히 사과만 하다가 방송접어야겠네?"(이건 논리학에서 흔히 말하는 '미끄러진 비탈길 논증'이다. 상황에 따라 맞는 말일 수도 틀린 말일 수도 있는데 노동조합이 파업을 했을 때 기업이 어떠한 손해를 입더라도 결코 요구조건을 들어줘선 안되겠다고 믿을 때 흔히 가지는 느낌이 이런 거다. 나꼼수 사례의 경우도 그들이 이번에 사과요구를 처음 받는데 이런 믿음을 가진단 건 과도한 우려다.) 그들은 자신과 다른 윤리적 직관을 가지고 상처입은 사람들을 이렇게 논리적으로 비판한 후, 다른 생각을 가진 그들이 떠나갈 권리를 인정하는 것도 아니고 (물론 인정하지 않는다 해도 떠나갈 수 있단 점에서 이게 '위헌적 책동'은 아니지만) 그들이 문화적으로 후져빠졌다고 비웃는다. 물론 이건 나꼼수 팬덤만 그러는게 아니고, 이 사태에 관해 진보진영이나 페미니스트들도 상대편에게 취하는 방식이다. 나는 내가 쓴 글의 첫부분에서부터 이 지점을 비평했다. 대체 내가 언제 환원주의를, 연역논리를 사용했으며 직관의 소중함을 무시했단 말인가?
정리하자면, 이렇다. 1) 나는 연역논리&환원론을 동원하기는커녕 논란 당사자들의 상이한 직관으로부터 문제를 파악하려고 하였다. 2) 그리하여 나는 나꼼수측이 주도적으로 내세우는 성해방담론이란 '윤리'와, 페미니즘측이 주도적으로 내세우는 '윤리' 사이에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않았고, 이 다른 생각들이 어떻게 공존해야 할지만을 말하려고 했다. 3) 공사구분이란 개념은 바로 2)의 작업을 하기 위해 동원된 것이며, 내가 느닷없이 끌어낸게 아니라 논란에 동참하는 모든 사람들이 부지불식간에 사용하고 있던 것이다. (정희준이 동원한 '마돈나' 사례, 그리고 사람들이 나꼼수를 옹호하기 위해 동원한 해적방송/잡놈/B급 문화 등등의 어휘를 고려하면 그렇다.)
우습게도 한국 사회에서 정치사회문제에 대해 이런 식으로 접근하는 것은 나하나 밖에 없는 것 같은데, 그런 이를 비판하면서 먹물 일반이나 논리적 접근 일반에 대한 정형화된 비판을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어쨌든 나는 나꼼수의 '사과하지 않을 선택'을 존중하지만 그것이 존중받으려면 삼국카페의 지지철회 성명서에 대해서도 "이렇게 싸우느니 차라리 그게 더 나은 일인 것 같다."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지지자들 모아놓고 '주키니' '주추행' '김변태'를 연호시키면서 상대방을 우스운 존재로 만들려는 김어준의 선택이 격암 님의 '윤리적 직관'에 부합한다면, 격암 님이 자신의 글에서 늘어놓은 그 미사여구들은 맥락을 잃게 될 것 같다. 김어준이 떠나는 사람들을 '다르다'고 생각하는게 아니라 '틀렸다'고 생각하는게 명백하고 그 점을 공표하는 데에도 주저함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굳이 노장사상이나 바가바드 기타를 읽지 않아도 알 수 있는, 평범한 인간들의 의사소통에 대한 관념 안에서의 '진실'일 것이다.
댓글 '21'
킹카남
트윗에 올라온 뉴녕님의 하소연을 읽고...다시 글을 올립니다...
님의 트윗을 읽어보니 어느새 제가 '진보신당측을 까는 뇌없는 나꼼빠'같은 사람이 된것 같군요;;;......
'난해하다'라는 표현이 정확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재미없다', '지루하다',,
과거 디씨의 표현을 빌려서 표현하자면
'글이 너무 길어서 무효!!'정도가 더 적당한 것 같습니다..
저도 나름 가방끈 긴 축에 속하는데
이 글-뿐만 아니라 뉴녕님이 쓰시는 웬만한 글들-을 딱 보고
머랄까...숨이 막힌다고 할까요...되게 답답함과 그로인한 읽기귀찮음이 밀려오는 건...
머..저의 탓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런 호소를 하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라서.....
그 사람들이 나꼼빠나 민주당지지자도 아닌데 말이죠.....ㅜㅜ
문장이 길지 않다고 하셨는데 글쎄요..... 지금 이글만 놓고 본다면...
긴편 아닌가요???-_-;;;;;;
이상하네요...모르겠습니다....
뉴녕님 트윗만 보자면 뉴녕님은
'전 글을 친절하게 쓰는 자상한 대인배'같은 이미지인것 같은데...
트윗안과 밖은 확실히 다르네요...
트친글을 서로 RT하며 그 패밀리끼리만 놀면 정신건강엔 도움이 될지 몰라도
오프에선 뉴녕님과 아무런 연이없는 사람들이 글을 읽는 냉혹한 현실이 기다리고 있는데...
모르겠습니다... 제가 이 글을 쓴다고 해서 뉴녕님의 스타일이 단박에 바뀌실리는 없겠지만....
박권일옹은 아예 저같은 말을 하는 사람을 '뉴녕님과 다른편'으로 정해놓는것 같더군요...
너구리
우선, 윤리적 직관이라는 말이 과연 존재하는 말인지 의문입니다. 옳고, 그름의 윤리적 문제가 어떻게 개인의 직관적 차원에서 해결될 수 있습니까? 물론 기본적으로 직관이라는 말은 연역과 논리의 뼈대를 이루는 어떤 환원불가한 요소로 정의될 수 있습니다. 가령 1+1=2, 남자와 여자는 생물학적으로 다르다 등등, 논리와 연역의 요청없이 그냥 아는 명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직관은 보편성이 있습니다. 즉,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공통적이고, 절대적인 능력입니다.
그러나 한윤현 님이 거론하신 직관은 이런 나이브한 차원에서 정의되는 어떤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인간 고유의 능력이 아닌 것 같습니다. 아마도 이번 사안이 나꼼수를 옹호하는 측이나, 나꼼수를 비판하는 측이나 그렇게 부도덕한 행동이 없다고 전제하고, 서로의 "미적 취향"이 다른 것을 문제삼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번 사안은 윤리적 차원에서 옳고 그름을 판별해야 하는 사안이 아니라, 서로의 미적 취향(감각)이 다르다는 것을 인지하고, 이 차원에서 어떤 화합의 정치를 모색해보자는 의미인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꼼수 측에서 사과를 하는 것이 화합의 정치에 좀더 가까운 행동이 아닌가 하는 말인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사적인 문제는 개인의 미적 취향에 고정해두고, (그래서 이런 사적인 미적 취향은 다양성 보존의 가치적 관점에서 절대적으로 존중해주는 동시에 각자의 판단에 맡기고) 사적인 미적 취향이 충동할 경우에 각자의 미적 취향을 넘어선 공적인 담론의 영역을 개척해보자는 취지에서, 사과를 하는 판단이 그 취지에 좀더 부합하지 않냐는 결론인 것 같습니다.
<여기까지 저의 독해에 틀린 부분이 없는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질문을 덧붙이자면,
이 공적인 담론의 영역이 바로 "윤리"와 직결되는 문제가 아닌가요? 그리고 이 영역은 다분히 선험성에 기초해 있기 때문에 보편적이고, 공통된 지표가 필요한 게 아닌가요? 물론 윤리적 감각은 그 문제가 아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개별적인 윤리적 감각 또는 미적 취향의 "공존"을 위해서는 다시 그보다 한 차원 높은 선험적인 윤리를 요청하게 되고, 다시 우리가 상식적으로 논해야 하는 윤리의 문제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직관?직감?
그리고 윤형님이 '직관'이라는 개념을 원래 철학에서 사용되는 것과 다르게, 왜곡해서 사용하고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요. 직관은 경험적 직관과 선험적 직관으로 구분되지 않나요? 윤형님이 쓰는 '직관'은 당연 경험적 직관이구요. 너구리님 께서는 수학 공리와 같은 선험적인 직관만 직관으로 취급하시는것 같은데요. 예를 보면 또 그렇지는 않거든요. '여성과 남성은 생물학적으로 다르다.'는 명제는 직관적인 명제도 아니구요. 선험적인 명제도 아니잖아요? 그렇다면 보편타당한것만 직관이라고 주장하시는 것 같은데요. 그런데, 경험적 직관은 개개인마다 다르거든요.
너구리
직관?직감? 님/
1.
저는 직관의 사전적 의미를 가지고 윤형 님이 본문에서 사용한 직관의 용법이 틀렸다고 지적한 게 아니라, 윤형 님이 사용한 직관의 의미가 제 해석의 기준에서는 미적 취향에 가깝다고 말한 겁니다. 그러니까 직관의 의미를 폭넓게 고려해서 미적 취향을 그냥 갖다 붙여서 글을 해석한 것 뿐입니다. 그래서 저는 님의 지적처럼 단어의 문맥적 의미를 고려하지 않고 원어적 의미에만 집착한 것이 아니라, 오히러 문맥을 고려했기에 미적취향이란 어휘를 가감하게 선택할 수 있었던 거지요. 물론 이런 자의적 어휘선택은 저의 해석이 맞다는 가정에서만 용인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 같은 일반독자는 이해의 허술함이나, 어휘선택에 있어서 디데일하지 못한 흠결보다는 글의 맥락과 핵심 논지만 어느정도 추려낼 수 있다면, 일반독자로서 그에 따른 의견과 감상을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반론이나 문제제기를 할 수 있는 입장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2
선험적 윤리는 연역과 논리를 기반으로 도출되는 윤리입니다. 물론 이것 또한 저의 자의적인 개념입니다. 하지만 이런 임의적인 개념을 제가 댓글에서 암시한 이유는 개별적인 미적 취향들을 포섭하고 조율하고 봉합할 수 있는 단단한 기반은 "이성"이라는 강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성으로부터 도출되는 윤리는 취향과 감수성의 문제가 아니라 사유와 고뇌의 문제이고, 그리고 소통과 관련된 매뉴얼의 문제이지요. 그래서 선험적 윤리는 이런 맥락에서 쓴 것입니다. (물론 원론적으론 선험이라는 말 자체가 존재하는지 의문입니다. 신의 말씀처럼 어떤 초월적인 지평이 애초에 존재하지 않거나, 그걸 도무지 알 수 없다면, 경험 이전에 인간에게 주어진 매뉴얼을 확신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불확실성을 넘어 역사를 일정한 방향으로 흘려가도록 하는 힘이 있습니다. 예컨대 패러다임, 이데올로기, 상식 등등. 이런 의미에서 선험이란 말을 썼습니다.)
3
"생물학적으로 여성과 남성은 다르다"라고 예를 든 것은, 그냥 이건 실수한 것 같습니다. 개드립이었습니다. 이번 사안과 관련해서 마땅한 경험적 직관이 떠오르지 않아서 대강 내뱉은 말입니다. 사실 저 명제는 직관명제가 아닙니다.
4.
그리고 킹카남께서 황공하옵게도 저와 윤형님을 비교해주셨는데, 한윤형 님이 갓 고딩 때 쓴 글만 봤어도 그런 멍청한 소리는 못합니다. 한윤형 님은 그냥 천재인 것 같습니다. 다만 인류역사를 거쳐간 숱한 천재들이 노력이 부족하여 세상이 이 모양 이 꼴인 듯이 조숙한 천재에게 나타나는 선천적인 게으름이 좀 의심스러울 따름입니다.
1. '윤리적 직관'이란 말을 남들이 쓰는 걸 본 적은 있습니다. 예전에 진중권이 쓰는 걸 보고 "재미있는 표현이네?"라고 생각했는데 그후 윤리학 텍스트 몇몇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근데 제가 책을 폭넓게 읽은 편이 아니라, 이 말을 메타윤리학 전반에서 쓰는지 아니면 필자 몇몇만 쓰는지 여부는 잘 모르겠습니다.
2. '윤리적 직관'이란 말은 미적 취향과 다릅니다. 이 말을 미적 취향과 같은 것으로 치부하면, 메타윤리학적 입장에선 이모티비즘이 됩니다. 이모티비즘이란 우리가 윤리판단이라 믿는 것은 사실은 어떤 사물/사건에 대한 "좋아요"/"싫어요" 감정으로 환원될 수 있다는 입장입니다. 논리실증주의가 윤리학으로 전파되면서 생겨난 가설이죠. 그런데 이모티비즘의 신봉자라면 애초에 '직관' 앞에 '윤리적'이란 형용사를 붙이는 것을 저어할 것입니다. 그들은 '윤리'란 개념을 설명하면서 그것을 해체하려고 하니까요. 따라서 '윤리적 직관'이란 말을 사용하는 이들은 이 말을 미적 취향과는 다른 의미로 사용할 가능성이 높은데(적어도 제가 본 경우엔 다 그랬습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다르게 쓰는 가장 핵심적인 감정은 '당위성에 대한 정서'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건을 볼 때 그저 "좋아요"/"싫어요"란 감정만 생겨나는 건 아니지요. 이성애자인 저는 남성끼리 키스하는 걸 보면 어딘가 심기가 불편해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성애는 그들의 권리라고 생각하기에 옹호합니다. 저는 이렇게 호오의 문제를 당위의 문제와 분리하는 것이 어떤 윤리적 판단의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윤리적 직관이란 미적 취향과는 다르고, 어떤 행동이 당위적으로 올바른지 올바르지 않은지에 대한 일차적인 느낌을 가리킵니다.
3. 너구리 님의 정리는 제가 '윤리적 직관'이란 말을 '미적 취향'으로 썼다는 전제 하에선 합리적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런 얘기를 한 것이 아니죠. 이제 한번 더 정리해보겠습니다.
1) 저는 미권스 카페에서 남성들이 '비키니 인증'을 소비하는 방식, 멤버들의 '코피' 운운의 문구에서 나꼼수 여성청취자/지지자들 중에 "이건 이래서는 안 되는 일이다."는 윤리적 직관을 가진 이들이 폭넓게 존재했다고 생각합니다.
2) 이들의 판단은 '직관'에 있었기에 "지금까지 나꼼수가 계속 마초적이었는데 왜 하필 이번만 지랄이냐?"라는 합리주의적(?) 반론이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3) 이 말이 중요한 이유는, 나꼼수와 나꼼수 팬덤이 이 상황을 '윤리적 직관'이라고 받아들이지 않는 '전략'을 취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여성청취자들이 처한 상황을 '미적 취향'의 문제나 '윤리의식'의 문제로 치환하려 합니다.
4) '미적 취향'의 문제로 치환하면 "그럼 내가 무조건 너보고 불쾌하다 하면 너도 나에게 사과할 거냐?!?!"라는 식의 반례가 나옵니다.
5) '윤리의식'의 문제로 치환하면 "너희들이 보수적 성담론의 지배를 받고 있거나, 남성 일반을 피해자로 상정하는 수십 년 된 고루한 페미니즘을 답습하고 있어서 그렇다."가 됩니다. 결국엔 이도 4)를 향해 귀결되는데, 왜냐하면 김어준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결국 "그 윤리의식은 잘못 되었으므로 결국 너는 네 취향으로 우리에게 사과를 요구하는 땡깡을 부리는 거나 다름없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6) 사태를 이렇게 바라보면 여성청취자/지지자들이 특정한 사건을 보고 느꼈던 감정은 '관념적으로' 해체되고, 남는 것은 외부세력(진보정당원,꼴페미,조중동 알바,서양물 먹은 먹물)의 '선동' 밖에 없게 됩니다. 이 선동이 잘못된 윤리의식을 주입하여 나꼼수를 괴롭히고 있다고 해석하는 거죠.
7) 사과를 하든 말든 그 이전에 이 문제가 외부의 어떤 사상주입에 의해서가 아니라 내부 구성원들의 '상이한 윤리적 직관'에서 발생했음을 인지라도 한다면 그들이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을 것이고, 이 문제가 여기까지 오지 않았을 거라는 게 제 일관된 주장인 겁니다.
본문에서 다 한 얘기라고 여겼는데 너구리 님의 말을 듣고 다시 한번 정리하게 되는 부분이 있네요. 이런 취지를 이해하고 다시 한번 글을 읽어보신다면 이해가 더 쉬울 것 같습니다.
한줄 요약 : 주진우 지못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