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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하뉴녕

2012.02.16 12:22

1. '윤리적 직관'이란 말을 남들이 쓰는 걸 본 적은 있습니다. 예전에 진중권이 쓰는 걸 보고 "재미있는 표현이네?"라고 생각했는데 그후 윤리학 텍스트 몇몇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근데 제가 책을 폭넓게 읽은 편이 아니라, 이 말을 메타윤리학 전반에서 쓰는지 아니면 필자 몇몇만 쓰는지 여부는 잘 모르겠습니다.


2. '윤리적 직관'이란 말은 미적 취향과 다릅니다. 이 말을 미적 취향과 같은 것으로 치부하면, 메타윤리학적 입장에선 이모티비즘이 됩니다. 이모티비즘이란 우리가 윤리판단이라 믿는 것은 사실은 어떤 사물/사건에 대한 "좋아요"/"싫어요" 감정으로 환원될 수 있다는 입장입니다. 논리실증주의가 윤리학으로 전파되면서 생겨난 가설이죠. 그런데 이모티비즘의 신봉자라면 애초에 '직관' 앞에 '윤리적'이란 형용사를 붙이는 것을 저어할 것입니다. 그들은 '윤리'란 개념을 설명하면서 그것을 해체하려고 하니까요. 따라서 '윤리적 직관'이란 말을 사용하는 이들은 이 말을 미적 취향과는 다른 의미로 사용할 가능성이 높은데(적어도 제가 본 경우엔 다 그랬습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다르게 쓰는 가장 핵심적인 감정은 '당위성에 대한 정서'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건을 볼 때 그저 "좋아요"/"싫어요"란 감정만 생겨나는 건 아니지요. 이성애자인 저는 남성끼리 키스하는 걸 보면 어딘가 심기가 불편해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성애는 그들의 권리라고 생각하기에 옹호합니다. 저는 이렇게 호오의 문제를 당위의 문제와 분리하는 것이 어떤 윤리적 판단의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윤리적 직관이란 미적 취향과는 다르고, 어떤 행동이 당위적으로 올바른지 올바르지 않은지에 대한 일차적인 느낌을 가리킵니다.  


3. 너구리 님의 정리는 제가 '윤리적 직관'이란 말을 '미적 취향'으로 썼다는 전제 하에선 합리적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런 얘기를 한 것이 아니죠. 이제 한번 더 정리해보겠습니다. 


1) 저는 미권스 카페에서 남성들이 '비키니 인증'을 소비하는 방식, 멤버들의 '코피' 운운의 문구에서 나꼼수 여성청취자/지지자들 중에 "이건 이래서는 안 되는 일이다."는 윤리적 직관을 가진 이들이 폭넓게 존재했다고 생각합니다.

2) 이들의 판단은 '직관'에 있었기에 "지금까지 나꼼수가 계속 마초적이었는데 왜 하필 이번만 지랄이냐?"라는 합리주의적(?) 반론이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3) 이 말이 중요한 이유는, 나꼼수와 나꼼수 팬덤이 이 상황을 '윤리적 직관'이라고 받아들이지 않는 '전략'을 취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여성청취자들이 처한 상황을 '미적 취향'의 문제나 '윤리의식'의 문제로 치환하려 합니다.

4) '미적 취향'의 문제로 치환하면 "그럼 내가 무조건 너보고 불쾌하다 하면 너도 나에게 사과할 거냐?!?!"라는 식의 반례가 나옵니다.

5) '윤리의식'의 문제로 치환하면 "너희들이 보수적 성담론의 지배를 받고 있거나, 남성 일반을 피해자로 상정하는 수십 년 된 고루한 페미니즘을 답습하고 있어서 그렇다."가 됩니다. 결국엔 이도 4)를 향해 귀결되는데, 왜냐하면 김어준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결국 "그 윤리의식은 잘못 되었으므로 결국 너는 네 취향으로 우리에게 사과를 요구하는 땡깡을 부리는 거나 다름없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6) 사태를 이렇게 바라보면 여성청취자/지지자들이 특정한 사건을 보고 느꼈던 감정은 '관념적으로' 해체되고, 남는 것은 외부세력(진보정당원,꼴페미,조중동 알바,서양물 먹은 먹물)의 '선동' 밖에 없게 됩니다. 이 선동이 잘못된 윤리의식을 주입하여 나꼼수를 괴롭히고 있다고 해석하는 거죠.

7) 사과를 하든 말든 그 이전에 이 문제가 외부의 어떤 사상주입에 의해서가 아니라 내부 구성원들의 '상이한 윤리적 직관'에서 발생했음을 인지라도 한다면 그들이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을 것이고, 이 문제가 여기까지 오지 않았을 거라는 게 제 일관된 주장인 겁니다. 


본문에서 다 한 얘기라고 여겼는데 너구리 님의 말을 듣고 다시 한번 정리하게 되는 부분이 있네요. 이런 취지를 이해하고 다시 한번 글을 읽어보신다면 이해가 더 쉬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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