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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너구리

2012.02.15 18:18

우선, 윤리적 직관이라는 말이 과연 존재하는 말인지 의문입니다. 옳고, 그름의 윤리적 문제가 어떻게 개인의 직관적 차원에서 해결될 수 있습니까? 물론 기본적으로 직관이라는 말은 연역과 논리의 뼈대를 이루는 어떤 환원불가한 요소로 정의될 수 있습니다. 가령 1+1=2, 남자와 여자는 생물학적으로 다르다 등등, 논리와 연역의 요청없이 그냥 아는 명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직관은 보편성이 있습니다. 즉,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공통적이고, 절대적인 능력입니다.

 

그러나 한윤현 님이 거론하신 직관은 이런 나이브한 차원에서 정의되는 어떤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인간 고유의 능력이 아닌 것 같습니다. 아마도 이번 사안이 나꼼수를 옹호하는 측이나, 나꼼수를 비판하는 측이나 그렇게 부도덕한 행동이 없다고 전제하고, 서로의 "미적 취향"이 다른 것을 문제삼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번 사안은 윤리적 차원에서 옳고 그름을 판별해야 하는 사안이 아니라, 서로의 미적 취향(감각)이 다르다는 것을 인지하고, 이 차원에서 어떤 화합의 정치를 모색해보자는 의미인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꼼수 측에서 사과를 하는 것이 화합의 정치에 좀더 가까운 행동이 아닌가 하는 말인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사적인 문제는 개인의 미적 취향에 고정해두고, (그래서 이런 사적인 미적 취향은 다양성 보존의 가치적 관점에서 절대적으로 존중해주는 동시에 각자의 판단에 맡기고) 사적인 미적 취향이 충동할 경우에 각자의 미적 취향을 넘어선 공적인 담론의 영역을 개척해보자는 취지에서, 사과를 하는 판단이 그 취지에 좀더 부합하지 않냐는 결론인 것 같습니다.

 

<여기까지 저의 독해에 틀린 부분이 없는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질문을 덧붙이자면,

 

이 공적인 담론의 영역이 바로 "윤리"와 직결되는 문제가 아닌가요? 그리고 이 영역은 다분히 선험성에 기초해 있기 때문에 보편적이고, 공통된 지표가 필요한 게 아닌가요?  물론 윤리적 감각은 그 문제가 아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개별적인 윤리적 감각 또는 미적 취향의 "공존"을 위해서는 다시 그보다 한 차원 높은 선험적인 윤리를 요청하게 되고, 다시 우리가 상식적으로 논해야 하는 윤리의 문제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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