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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누가 좌빨이 되는가

조회 수 2221 추천 수 0 2011.12.18 16:29:27
존경해 마지않는 이 시대의 큰 스승님, 중앙당 홍보국장으로 영전하셨다는 낭보를 들었습니다. 경하드립니다! 저 역시 기쁘기 한량없습니다만 동시에 걱정도 앞서네요. 첫째, 평소 강조하셨던 당원 교육 사업은 뒷전으로 미뤄지겠구나. (만약 큰 스승께서 저 같은 문외한의 눈높이에 맞춘 레닌 강의를 여신다면 꼭 듣고 싶어요) 둘째, 넷상에서 자기검열 수위를 높이실지도 모르겠다. 셋째, 출퇴근이 정말 고역이시겠다. 넷째, 따라서 야채라디오 편집하시는 일도 힘들어지시겠다. 가만히 앉아서 공짜로 야채라디오를 들으며 활력소를 얻는 저로서는, 큰 스승님께 (그리고 변태형님께도)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쓰고 보니 오지랖 돋네요.

이 글은 이러한 저의 남다른 오지랖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저는 자폐아동연구소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곳엔 자폐아동들에게 행동치료를 하면서 동시에 대학원에서 특수교육 전공을 병행하시는 분들이 근무하고 계십니다. 서로 ‘선생님’이라고 부르시더군요. 저도 졸지에 ‘선생님’이 되었습니다. 하루는 ‘선생님’ 한 분과 저녁을 먹고 있었습니다. 식사 도중 ‘선생님’이 불친절한 택배기사 아저씨에 대해 불평을 하시더군요. ‘선생님’은 저에게 그 아저씨를 같이 까면서 맞장구 쳐달라고 요청을 한 거였겠죠. 얘기를 들어보니, “수신지 주소가 잘못 적혀있어서 엄청 헤맸다”고 버럭 화를 내더란 겁니다. ‘선생님’의 하소연을 요약하자면: 첫째, 주소 잘못 알려준 게 내가 아닌데 억울하다. 둘째,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처음 본 사람한테 그렇게 고함을 지르면 어떡하느냐.

문제는 여기서 제 오지랖 본능이 발동되었다는 겁니다. 저는 우선 ‘선생님’께 택배 아저씨들의 고약한 근무조건을 설명하기 시작했습니다. 읽고 계신 분들이 더 잘 아시겠지만, 그분들은 현행법상 노동자가 아니라 자영업자로 분류되기 때문에 4대보험이나 각종 고용보호제도의 혜택을 누리지 못한다, 사실상 건당 배달료는 700원 정도에 불과하다, 그런데 아까처럼 배달이 지연되면 그 손실은 고스란히 택배 아저씨들이 물어야 한다, 등등. 그리고 배달료 30원 올리려고 해고돼서 자살한 박종태 열사에 대한 이야기도 덧붙이며 “이렇게 열악한 조건에서 일하는 분들이 항상 싱글벙글 웃기는 힘들지 않을까? 우리가 이해해 줘야 하지 않겠느냐?”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선생님’의 첫 번째 반응은 “열사”라는 단어 자체에 대한 알레르기였고, 두 번째 반응은 “혹시 <한겨레신문>에서 나온 얘기 아니냐? 그렇게 적게 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닐 것”이라는 되물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날 아침 <조선일보>에 나온 워킹푸어들의 소득 통계 수치를 말씀드렸죠. 그랬더니 ‘선생님’께서는 “일부 소수의 경우를 크게 부각시킨 자료가 아닌가? 평균 수치로 따져보면 이상 없을 것”이라고 대꾸하셨습니다. 맞는 얘기죠. 5000만 국민 중에, 그것도 워킹푸어에 속하는 택배 아저씨들의 수가 몇이나 되겠어요. 무시해도 되는 소수가 맞죠.

그런데, 자폐아동의 비율은 전체아동의 1% 가량이라고 알려지고 있고, 특정 지역의 자폐아동 비율이 2.6%라고 밝힌 논문이 외신특종감이 되는 형편이라 들었습니다. 같은 논리로 따지자면 자폐아동들 역시 무시해도 되는 소수 아닐까요? 전형적인 아이들 98%만 붙잡고 잘 교육해도 세상은 잘만 돌아갈 테니까요. 그런 소수의 아동들을 치료대상 혹은 고객으로 삼고 있는 ‘선생님’이실 텐데, 또 다른 소수파에 대한 감성이 왜 이리도 무딘지요. 또한 특수교사라는 집단 자체도 교사라는 포괄집단 내에서는 소수파 아니던가요. 일반교사의 TO에 비해 가파르게 줄어드는 특수교사의 TO 때문에 시위도 하고 있지 않으시던가요.

그 ‘선생님’께 이런 얘기까진 차마 하지 못했습니다. 어디선가 한윤형 선생께서 멍청한 좌빨을 인페스티드 테란에 비유하신 적이 있는데, 더 지껄여봐야 그 ‘선생님’이 가지고 계실 좌빨에 대한 편견만 강화시켜드릴 뿐이라는 걸 직감했거든요. “좌빨이란 사람들은 눈치가 없어서 남 얘기 잘 거들어 주지도 않는구나. 괜히 잘난 척이나 하고. 사회성 제로야. 흥!”이라고 생각하셨을 듯. 그래서 재빨리 화제를 돌렸습니다. 똑똑해지기 전엔, 아니, 똑똑해지더라도 어지간해선 하고 싶은 말을 삼키리라, 팀킬보단 낫지 않겠느냐,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여러 가지 생각을 했습니다. 저는 좌우익이 무슨 소린지 하나도 잘 모르지만, 내심 좌빨을 정하는 기준 가운데 하나로 ‘소수자가 겪는 고통에 대한 공감능력’을 꼽습니다. 옛말에도 동병상련이라고, 저는 여태껏 소수자를 잘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래도 소수자라고 생각했습니다. 소수자는 항상 남들로부터 이해받기를 갈망하며, 이 요구가 수미일관하려면 스스로도 다른 소수자를 잘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테니까요. 따라서 소수자일수록 좌빨이 될 확률이 높을 것이라고 으레 짐작했었습니다. 

하지만 살다보니 세상에는 소수자를 관용하지 못하거나 혐오하는 소수자가 굉장히 많더군요. 그 ‘선생님’이 자신이 다니는 교회에 초대하시기에 따라가 봤더니, 왜 그런 반응을 보이셨는지 조금은 짐작할 수 있었어요. 타자에 대한 배타성을 강화하는 거대한 훈육기관 같은 곳이었는데, 이 얘긴 여기서 줄여야겠네요. 혹시 교인이 계시다면 미리 사과드립니다. 하여간 이런 곳에 있다 보면 자신이 다른 어디에선 소수자일수도 있다는 사실을 잘 의식하지 못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정리하자면, 누가 좌빨이 되는가? 여러 가지 경우가 있겠지만, 어떤 소수자가 좌빨이 되려면 자신이 소수자라는 자각이 필요한데, 이러한 자각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그리고 어떤 소수자들이 스스로 소수자임을 인정하지 않는 까닭은 무엇일까? 주류와의 동일시가 주는 안도감 때문일까? 뭐 이런 걸텐데, 정리해도 개판이네요. 그럼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똥글 쌌더니 기분이 좀 나아지네요 헤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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