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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음모론, 혹은 논리적인 글쓰기

조회 수 3839 추천 수 0 2012.01.01 13:08:39

진중권 선생이 씨네21 원고에서 황송하게도 내 이름을 언급해 주셨다. 


‘음모론’이라는 것이 있다. 신세대 논객 한윤형의 말에 따르면, 음모론의 특징은 구멍이 없다는 데에 있단다. 하긴, 인간이 신처럼 전지적 시점을 갖고 있지 않는 한, 이른바 ‘사실’이라는 것에는 여기저기 구멍이 나 있기 마련. 반면, 음모론의 경우는 설명에 구멍이 없다. 미지(未知)나 무지(無知)의 부분을 빠짐없이 상상력으로 채워넣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음모론은 팩트와 픽션이 융합을 이루는 로고뮈토스의 대표적 예가 된다.

전문은 http://bit.ly/vA0KSz


내가 한 얘기는 그다지 특별한 이야기도 아니라서, 굳이 저작권을 밝힐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아마도 음모론에 대한 어떤 연구가 있다면, 그 연구에도 틀림없이 내가 말한 특성이 포함되어 있으리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저 말은 당연히 '독창적인' 견해가 아닐 뿐더러, 사실 나 스스로 한 생각도 아니다. 아마 진선생은 내가 트위터에서 한 어떤 말을 의미심장하게 본 후 인용하게 된 것 같은데, 트위터의 발화라는 것이 '말'과 '글'의 사이쯤에 있어서 출처를 생략하고 얘기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일어난 일 것이다. 


(또 하나 별도로 고민이 되는 건, 신문이나 잡지에 글을 쓸 때는 매체에서 요구하는 분량이 너무 짧아 무슨 견해를 소개할 때 출처를 밝힐 엄두도 못 내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거다. 그런 경우 문장을 줄이고 줄이다 보면 특정한 누군가의 견해가 '통설'로 둔갑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내가 하는 말처럼 읽히기도 한다. 이런 경우에 어떻게 처신하는 것이 '정답'인지는 참으로 알 수가 없고 그런 일이 닥칠 때마다 매번 고민이 된다.) 



여하튼 나는 공부가 짧아서 음모론에 대해 어떤 말들이 전거로 있는지 잘 모르고 소개하기도 어렵다. 하지만 우연히 내가 읽은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소개하는 건 다른 이들에게도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영국의 철학자/칼럼니스트라는 줄리언 바지니가 쓴 <가짜 논리 - 세상의 헛소리를 간파하는 77가지 방법>,한겨레출판(2011)의 한구절을 읽고 음모론에 대해 저런 식으로 말하게 되었다. 이 책은 정치평론이나 비문학 글쓰기 일반을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고민할 만하다. "부실한 논리를 들먹이는 건 적들만이 아니며, 우리가 찬성하는 주장의 근거 역시 함량 미달일 때가 있다."는 저자의 말은 한국 사회에선 변태로 취급받는 어떤 종류의 인간들에게 환호받을 만하다. 바지니를 '영국의 진중권'이라 부를 수 있을는지에 대해서도 살짝 고민을 해봤는데, 좀 더 정확히 평가하자면 '우리가 진중권에게서 볼 수 있는 어떤 일면을 극대화시킨 그 방면의 전문가'라고 평해야 할 게다. 당연히 한국 사회는 담론시장이 좁고 필자도 적으니 각각의 필자는 외국의 누구누구보다 훨씬 더 다방면에서 많은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각설하고 이제 해당 내용을 타이핑하겠다. 



10. 신이 착하다고 누가 그래? - 논리적인 헛소리(Logically consistent nonsense) (p48-50)


"신은 인간의 풍부한 상상력이 낳은 형이상학적 존재가 아니라 외계인이며, 지구 곳곳에 그 흔적을 남겨놓았다. - 에리히 폰 대니켄, <신들의 전차>의 작가 


나도 십대 시절에 에리히 폰 대니켄의 <신들의 전차>를 무척 흥미롭게 읽었다. 그 책에는 옛날에 외계인이 지구에 내려와 흔적을 남기고 인류와 번식을 했다는 놀라운 가설이 담겨 있었다. 페루의 나스카 그림은 우주선의 활주로였으며, 불가사의한 스톤헨지나 거대한 피라미드 축조도 외계인의 개입으로 설명된다는 주장이었다. 신이 하늘에서 내려온다는 이야기는 옛날 사람들이 꾸며낸 신화가 아니라, 지구에 내려온 외계 생명체의 실제 이야기라는 것이었다.


스물여섯 권에 달하는 폰 대니켄의 책은 총 6천만 부가 넘게 팔렸다. 학계에서는 허무맹랑하다며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는 그의 주장에 일반 독자들은 왜 그렇게 열광하는 걸까?


폰 대니켄의 가설은 희박한 증거에도 불구하고 설득력을 갖는 주장의 두 가지 특징을 갖추고 있는데, 첫 번째는, 가설이 대체로 사실과 부합한다는 점이다. 이렇게 얘기하면 그의 이론을 옹호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 수많은 허술한 가설이 사실과 맞아떨어진다. 예를 들어 구글이 전 세계의 모든 데이터를 통제하려 한다는 가설도 이미 알려진 여러 사실과 부합하는데, 그중 몇 가지만 살펴보더라도 수많은 사람들이 입력한 개인 정보를 가지고 있고, 인터넷 검색을 거의 독점하며, 구글독스라는 유틸리티에 수백만 건의 파일이 저장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로열티를 지불하지 않고도 구글 서비스의 열람 및 홍보의 목적으로 해당 콘텐츠를 비독점적으로 재생, 수정, 출판, 배포할 권리를 확보하고 있다는 것까지 다양하다. 어째 등골이 오싹하지 않는가?


문제는 사실과 부합한다는 것과 그 사실을 설명할 최선의 방법이 된다는 게 별개의 사안이라는 데 있다. 일례로 고양이가 사라졌을 경우, 그 고양이가 원래 고양이들의 메시아여서 고양이들의 천국으로 승천했다는 가설은 고양이가 사라졌다는 사실과 맞아떨어지기는 해도 최선의 설명이라곤 할 수 없다. 그런데도 설명이 몇몇 사실에 부합하는 것처럼 보이면 사람들은 쉽게 현혹되고 마는데, 폰 대니켄의 경우도 그런 게 틀림없다.


두 번째는, 구조가 탄탄하다는 점이다. 그는 자신의 이론을 놀라울 만큼 탄탄하게 구성했고, 그렇기 때문에 각 부분이 제법 짜임새 있게 들어맞는다. 사실에 부합한다는 말처럼 이것도 어떤 가설을 옹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게 보통이지만, 논리적인 짜임새는 그 가설을 진지하게 고려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조건일 뿐이다. 좋은 가설이 되려면 그 이상이어야 한다. 즉 철저한 검증을 거쳐 어떤 현상을 경쟁 이론들보다 더 잘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외계 생명체가 지구에 찾아와서 인류의 생물학적 진화와 문화의 발전을 촉진했다는 주장은 너무나 터무니없고 불확실하며, 우리끼리 어찌어찌 여기까지 왔다는 식의 다른 가설에 비해 더 많은 의문을 새롭게 야기한다.


가끔 논리적으로 탄탄하고 사실과도 부합하는 이론이 미심쩍은 이유는 오히려 너무 많은 것을 설명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케네디 암살에 대한 공식적인 설명에는 허점이 많다. 그런데 음모 이론들은 대체로 모든 걸 설명할 수 있다고 단언한다. 그건 신뢰를 주기는커녕 정반대의 효과를 낳는데, 알려진 것만으로 현상을 설명할 때는 오히려 완결성을 갖추지 못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단지 논리에 일관성이 있다고 해서 쉽게 현혹되지 않는 법을 배워야 한다. 어떤 현상의 가장 좋은 설명이 되려면 일관성을 갖는 건 당연하고, 그것과 더불어 검증을 견뎌 내야 한다. 미래를 예측하는 힘을  갖고, 해당 사안에 관련된 사실뿐만 아니라 알려진 다른 사실과도 부합해야 한다. 




강조표시는 내가 했다. 이 글은 링크한 진중권의 글과 함께 읽어볼만한 것인 것 같은데, '정치평론'을 고민하는 입장에서도 시사되는 바가 많다. 내 생각에는 '논리적으로 탄탄한 헛소리'가 가장 많이 난무하는 분야가 정치평론인 것 같고, 뭐가 헛소리이고 헛소리가 아닌지를 가늠할 기준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이 별로 없는 분야 역시 정치평론인 것 같다. 


댓글 '1'

이상한기타맨

2012.01.10 01:17:33
*.128.231.141

글은 안읽고 첫문장에서 진빠...랑 노빠의 차이는 무얼까?라는 의문이 퍼드득 떠올랐다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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