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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카이만, 군인, 병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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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 한민족이 잘났다는 얘기를 하려는 것도 아니다. 가령 박영규의 <특별한 한국인>과 같은 책은 내게 필요없다. 그러나 나는 그런 책이 많은 사람들에게 필요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다. 연개소문도 싫어하고 박정희도 싫어하는, 한마디로 최소한의 소양을 갖춘 이 역사 교양도서 작가는 역사 속에서 '위대하고 놀라운 업적'을 긁어모아 한국인이 특별하다고 할 생각 따위는 하지 않는다. 다만 한국인의 특수성을 열거하고, 바로 그것이 한국인이 잘 될 수 있는 지점이라고 말할 뿐이다. 한국사를 비하하는 사람들의 전형적인 특징은 조선사를 언급하기를 고통스러워하고, 고구려사를 매우 좋아한다는 것이다. 그런 시각으로 백날 역사책을 들춰봐야 부끄럽기만 할 수밖에. 영광스런 민족사에 대한 강조는 사실 저 '부끄러운 자기상실'의 역사관과 동전의 양면일 뿐이다. 물론 김상봉은 그런 수준은 아니다. 그가 인용하는 함석헌의 글을 보자.


특별한 한국인 상세보기
박영규 지음 | 웅진닷컴 펴냄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을 출간하면서 대중역사서의 지평을 연 박영규의 우리 역사 이야기. 잘못된 역사관이 국민성을 망치고 있다는 생각을 구체적으로 정리했으며, 한국인의 특별한 면들이 현대 문화와 어떤 식으로 접목될 수 있는지 9가지 예로 살폈다.


세계의 각 민족이 다 하나님 앞에 가지고 갈 선물이 있는데 우리는 있는 게 가난과 고난밖에 없구나, 할 때 천지가 아득하였다. 애굽과 바빌론은 문명의 시작이라는 명예를 가졌고, 중국은 도덕을, 그리스는 그 예술을, 로마는 그 정치를 가지고 가겠지만, 한국은 무엇을 가지고 갈 터인가? 인도는 망했어도 인도교, 불교를 남길 수 있고, 유대는 없어졌어도 유대교, 기독교가 남을 수 있으며, 영국도 오히려 헌법을 자랑할 수 있고, 독일도 오히려 철학을 내세울 수 있으나, 그래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자랑할 터인가?


영광스런 역사 아무리 찾으려 해봤자 다른 나라에 비하면 쨉도 안 된다는 얘기다. 함석헌의 심정은 이해할 수 있다. 말하자면 그는 고난의 시대에 민족의 종말이라는 상황을 상정하면서 묘비명을 고민해 봤던 거다. 죽음이 임박했는데 묘비명에 별로 쓸 말이 없다는 건 정말이지 슬픈 일일 것이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지금은 민족의 종말을 걱정할 시기는 아니다. 그렇다면 사태는 어떻게 될까? 가령 어떤 아이가 이런 식으로 말하고 있다고 치자.


나는 마이클 조던보다 농구를 못해. 랜디 존슨처럼 강속구도 못 던져. 이승기처럼 키가 큰 것도 아니야. 김희철처럼 어려보이지도 않아....


이 아이에게 뭐라고 말해줘야 하겠는가? 나라면 끝없이 이어질 그의 넋두리를 끊고 "그래서, 넌 뭘 하고 싶니?"라고 물어보고 싶다. 제일가는 것들만 골라서 비교하고 있으니 자신이 비참해지는 건 당연지사다. 먼저 하고 싶은 것을 찾고, 그 일에 대한 역할모델까지는 고른 다음에 그놈 한놈만 부러워하는게 정신건강과 인격수양, 더불어 실력향상에 훨씬 이롭지 않을까. 왜 나는 최고가 아니냐는 투정은 도대체 자기비하일까. 자기과시일까. 유치한 자기과시는 자기비하 속에서 독버서서럼 돋아나는 법이다.


그러나 말하기를 그만두라. 인류의 역사란 결국 눈물의 역사요, 피의 역사 아닌가? 고난을 당하는 건 우리만이 아니다. 온 인류가 다 그렇다.


계속 인용되는 함석헌의 말. 이건 그냥 '마땅한 말'이다. 지극한 고통과 슬픔 후에 도달한 어떤 경지가 아니라, 지극한 고통과 슬픔을 자랑하기 전에 마땅히 느꼈어야 할 감정이다. 이 경지(?)가 무슨 깨달음인양 설파되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여기서 자기비하는 본격적으로 자기과시로 전환된다. 저 지극한 고통의 현장에서 가장 낮은 곳에 임한 정신의 분만이 예감되는 것이다.


그리스 비극에 대한 편지 상세보기
김상봉 지음 | 한길사 펴냄
우리에게 여전히 베일에 가려져 있다 해도 좋을 그리스 비극의 전체상을 그려본 책 이 책은 그리스 비극의 근본 정신은 무엇인지, 그것은 어떤 역사적 배경으로부터 형성되었는지 그리고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디서 어떻게 공연되었는지 등에 대해 관련된 테마를 편지글 형식으로 엮었다.


슬픔의 시대에 그 슬픔에 무언가 뜻이 있기를 바라는 것은 자연스러운 인간본성이다. 니체는 그 사태를 일컬어 "고통이 아니라 고통의 무의미함이 인간 종족에게 던져진 저주"라고 간명하게 표현했다. 김상봉은 "그러나 고통을 긍정하기 위해서는 고통의 의미를 납득할 수 있어야만"(<그리스 비극에 관한 편지>) 한다는 사실을 니체가 몰랐다고 주장한다. 산상수훈에 대해 역사상 최대의 험담을 퍼부은 사람이 왜 그 사실을 몰랐을까. 그 심리적 사실이야말로 니체의 가장 큰 적이었는데. "나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나를 더 강하게 한다."(<우상의 황혼>)는 식의 니체식의 고통에 대한 의미부여는 김상봉과 마찬가지로 나도 싫어한다. 고통은 그저 고통일 뿐이다. 한번 군대에서 이 고통이 나 자신에게 얼마나 큰 도움이 되었는지를 자랑해보라. 말년병장들이 당신에게 고통의 진리를 가르쳐 줄 것이다. 바로 이 한마디로. "그래서, 좋냐?"


그러나 니체의 삽질은 고통에 대한 복잡한 의미부여를 피하기 위해 가장 단순한 의미를 부여하려 했다는, 고통을 삶의 내적인 차원에서 정당화하려 했다는 의의라도 있다. 반면 김상봉은 산상수훈과 독일관념론과 니체주의를 오묘하게(?) 뒤섞어 한국사의 고통을 이데올로기적으로 정당화한다. "우리가 할 수 있다." 그래 이건 그렇다 치자. "저들은 할 수 없다." 쪽팔리게 이건 무슨 소리란 말인가? 폴란드인들이 들으면 펄쩍 뛸 소리다. 폴란들인들이 자기들도 하느님께 크게 쓰이기 위해 고통받았다고 하면 (사실 그들이 이런 민족주의 신학의 원조격인데) 뭐라고 해야 할까? "아니다. 너희들은 우리만큼 철저하게 자신을 상실한 적이 없다."라고 말해야 하나? 제 입으로 제가 제일 못났어요, 라고 간증해야 하는 수치심을 잃은 이론이 도대체 무엇을 구원할 수 있단 말인가?


무엇이 수치인지에 대한 견해야 다를 수 있다고 치자. 더 중요한 건 지금이 '슬픔의 시대'가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김상봉의 정치의식에 동의하고, 그의 슬픔이 고귀하고 정당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지금의 한국인들의 출발점은, 슬픔이 아니다. 그들은 자신의 삶의 방식에 만족한다. 심지어는 삶이 그들에게 미소짓지 않아 투덜거릴 때조차도, 다른 방식의 삶에 대한 조언은 거부할 정도로 그토록 한국적인 삶을 사랑한다. 나는 그것을 조소하기도 하고 두려워하기도 하며 긍정하기도 한다. 철학이 자기의식에서 시작된다는 김상봉의 말이 맞다면, 한국사회에 대한 철학적 분석은 차라리 '자기의식 없는 행복'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하리라. '슬픔의 자기의식'이 아니라 말이다. 나는 이라크 파병 찬성이 '약소국의 설움'이니 어쩔 수 없다고 말하던 사람들을 똑똑히 기억한다. 이런 건 자기의식이 아니라 둘러대기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슬픔도 저리 잘 둘러댈 줄을, 함석헌이 어찌 알았겠는가. 하지만 그것이 우리 시대의 출발점인 것을. 행복이 윤리학의 목적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칸트주의자라면 바로 그 점부터 슬퍼하면서 분석을 시작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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