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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재신임'과 '비판적 지지'

조회 수 917 추천 수 0 2003.10.12 14:23:00
노무현 대통령의 '재신임' 정국에서 좌파는 '불신임'을 해야 한다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들에 반대하며 쓴 글이다. 진보누리의 아흐리만씨가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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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임 대통령에게 재신임 표를 던지는 것을 비판적 지지와 연결시키려는 분들이 많은 것 같은데 이는 무리한 얘기로 보입니다.

우선 저는 이 사건에 대해 민주노동당이 '재신임할 것이다'라는 당론을 가지고 접근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건 정국을 "친노 vs 반노"로 개편하려는 노무현의 의도에 놀아나는 개삽질이지요. 그런 일이 생긴다면 저부터 앞장서서 비판하겠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에 대해 민주노동당이 '불신임할 것이다'라는 당론을 가지고 접근한다면? 그것 역시 올바른 일일 것 같지가 않아요. 그 역시 선택지만 뒤집혔지 정국을 "친노 vs 반노"로 개편하려는 노무현의 의도에 놀아나는 개삽질이 됩니다. 그러니 개인적으로 불신임 할 분들이라도 그런 일이 안 생기도록 예방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러므로 결론은 우리는 이 문제에서 빠져야 한다는 겁니다. 조직적으로 접근하지 말고 선택은 개인에게 맡겨두어야 합니다. 이 정국은 우리가 활용할 수 있는 정국이 아니에요. 그냥 지나쳐보내야 합니다. 왜 이 단순한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지 모르겠어요.

원래 민주주의 선거의 '위대함'이란 이렇게 모든 조직화를 무화시키고 개개인의 입장에서 투표를 하게 만드는 것이죠. 이는 좌파 입장에서도 불리한 일이나, 전체주의자들의 입장에서도 불리한 일이니, 너무 투덜거릴 이유가 없어요. 게다가 이 싸움은 우리가 '조직화'로 대항하는 순간 어느 편이든 가담할 수밖에 없는 싸움입니다. 굿이나 보고 떡이나 보면 될걸, 왜 아득바득 끼어들려 하나요?

'비판적 지지'라 함은 원래 '전략적 지지'라는 함의를 가지고 있지요. (대선 정국에서) 내가 택할 수 있는 선택지가 있으나, 당선가능성이 큰 후보들 중에서 내게 더 가까운 쪽으로 투표하는 행위를 지칭합니다. 대선결선투표가 없는 한국의 맥락에서 통용되는 말이지요.

그런데 재신임 투표 용지에는 '재신임'란과 '불신임'란밖에 없을 겁니다. 애초에 선택지가 두 개란 말이지요. 그러므로 예루리 님이 386의 세계관을 비판하려면, 진중권이 아니라 국가를 비난하셔야 할 겁니다. 아니 왜 우리에게 양자택일을 강요하냐, 국가야? 뭐 이렇게.  

여기서 '진정한 좌파'가 되기 위한 몇 가지 행동원리를 이끌어내는 분들이 있더군요. 사실 가장 좋은 방법은 '무효표'입니다. 초등학교 반장선거에서 가끔 튀어나오듯이, 투표용지에다 "나는 권영길이 대통령 했으면 좋겠다."고 적어놓는 거죠. 이보다 더 우리의 의사를 확실히 대변하는 방법이 어디있겠습니까? 그러나 아무도 이런 의견은 제시하지 않네요. 초등학교 졸업한지 오래 되어 상상력이 부족하신가요? ^^

또 다른 방법은 기권하는 것입니다. 사실 '재신임 투표' 자체가 위헌까지는 아니더라도 헌법에 '없는' 짓을 하는 절차를 무시하는 행위입니다. 정당성이 없어요. 정당성이 없는 행사에는 참여하지 않겠다는 것도 훌륭한 의사표시가 될 것입니다.

또 다른 방법으로 '불신임'을 주장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불신임'엔 일정한 딜레마가 있지요. 어제 제가 지적했듯이, '불신임'에 표를 찍으려면 이번에 노무현이 '재신임'을 물은 행위가  "매우 훌륭한 일이었다."고 평가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평가하는 분은 없는 것 같아요. 그러면서 '잘못된 제도'를 발의한 노무현에게 끌려가 그 '잘못된 제도'를 실현시키려고 노력하겠다니 우스운 일이죠.

혹시 궤변에 능한 수군작 같은 이는 "잘못된 제도인 재신임 투표를 발의했기 때문에 '불신임'하는 것이다!! 클리어~?"라고 외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는 형용모순이지요. 재신임 투표 발의가 잘못되었다고 본다면 그 투표가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기권'하거나 '무효표'던지거나 아니면 차라리 '재신임'하는 건 몰라도, 그 투표가 '효력'을 발휘하도록 표를 던져놓고 제도가 잘못 되었다고 말할 수 있나요? 이는 국가보안법이 잘못 되었다고 말하면서 그 잘못된 국가보안법으로 조갑제를 처단하려고 하는 것만큼이나 형용모순입니다.

"좌파는 '불신임'을 던져야 한다."는 주장을 정당화하는 다른 논리는 아마 "좌파는 모든 부르주아 정치체제를 반대해야 한다."가 되겠지요. 뭐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아마 이분이 대선 결선투표가 있는 나라에 산다면 우파 정당 두 명이 결선에 올라가면 무조건 기권해야 겠군요. 뭐 실제로 그러실수도 있겠지요. 이는 존중해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이는 "부르주아 정치체제는 무조건 흔들고, 혼란스럽게 만들어야 한다."는 인식으로 귀결되는데, 이 판단이 개인적 판단이나 어느 정파의 판단일 수는 있어도 좌파 일반의 판단이 될 수 있다고는 보지 않습니다. 혼돈은 그 자체로 좋은 게 아닙니다. 혼돈 이후에 어떤 결과가 오느냐가 중요한 것이지요. 자본주의 부르주아 정치체제가 혼돈스럽고 흔들릴 때 그 후 좌파들이 권력을 잡은 경우도 있었지만 파시스트들이 권력을 잡은 경우도 많았습니다. '혼돈' 자체가 선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저의 경우는 오히려 '부르주아 정치제제'가 '가장 성공을 거둘 때' 그것과 싸움을 벌이며 좌파가 성장해야 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좌파가 우파의 실패에 기생한다면, 그들은 우파의 '실패'에 실망한 '우파 지지자'들에게 언제나 둘러 싸여 있을 수밖에 없으니까요. 지금 민주노동당의 포지션이 두리뭉실하다고 비판받는 것도 따지고 보면 한국 우파들이 못나서가 아닌가요?  

결론은 '재신임 조직화'든 '불신임 조직화'든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정답'이 아니라는 겁니다. (혹시 무효표 조직화나 기권표 조직화를 원하는 분이 있다면 그건 인정해 줄 수 있을는지도 모르겠어요.) 이 투표는 그저 개인적인 수준에서 처리하는 것이 가장 알맞습니다. 그러므로 '비판적 지지'니 하는 어휘도 정치과잉이 되겠지요.  

이 문제를 가지고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 않았으면 하는 희망이 있습니다. 다른 할 일도 많지 않습니까? 하지만 정녕 '불신임 조직화'가 좌파가 이 시국에서 취해야 할 길이라고 보는 분이 있다면, 계속 논쟁할 수밖에 없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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