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밸런스 논쟁에 대한 다른 방식의 접근

조회 수 1225 추천 수 0 2004.12.14 15:22:00

PGR21에 실명으로 올린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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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스타크래프트 밸런스 논쟁을 하려면, 그에 앞서 우리가 일단 스타크래프트를 '어떤 게임'으로 이해하고 있느냐가 중요한 문제가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스타크래프트에 대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어떠한 '상(想)'이 밸런스 논쟁의 준거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분들은 스타크래프트를 은연 중에 1대1 대전 스포츠와 비슷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 듯 합니다. 굳이 e-sports가 아닌 것 중에서 꼽자면 복싱이나 이종격투기 같은 것처럼요.  


그러나 이러한 이해는 스타크래프트라는 게임의 현상을 어느 정도 드러냄에도 불구하고 일정한 한계를 지닙니다. 스타크래프트에는 '맵'이라는 것이 있고, '종족상성'이라는 것이 있고, '전략'이라는 것이 있지요. 무하마드 알리가 조지 포먼을 킨샤샤에서 무너뜨릴 때는 습도 높은 날씨와 관중의 응원도 한몫 했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이것은 예외적인 경우죠. 복싱선수인 그에게 경기장(맵)이나 아웃복싱이라는 스타일(종족상성?) 그리고 포먼을 무너뜨릴 때의 얼굴을 가리고 배를 내주다가 마지막에 몰아치는 전략까지도, '일반적인' 복싱경기에서 승패에 영향을 미칠만한 사안은 아닙니다. 무엇보다 투기종목의 선수들은 잘 나갈 때는 평소 하던 데로 하면서도, 어떤 스타일의 누구에게도 거의 지지 않는다는 점이 스타크래프트와 많이 다르죠. 이는 스타크래프트가 격투기와는 사뭇 다른 면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복싱에는 스피드, 체격, 파워 등 나름대로 수치화시킬 수 있는 기준들이 존재할 것입니다. 단 한편의 경기를 예상할 때라도 말이죠. 스타크래프트 역시 APM 속도, 컨트롤, 운영, 물량 등의 잣대로 선수를 평가할 수 있다는 반론이 있을 수 있겠고, 사실 그런 식의 평가기준이 없다면 애초에 스타는 '스포츠'가 될 수도 없겠지만, 그렇더라도 스타크래프트는 복싱의 경우와 상황이 다릅니다. 말하자면 스타에서는 그런 식의 평가에서 비등비등한 수준으로 보이는 선수일지라도 전략의 가위바위보에서 패하게 되면 경기에서 허무하게 질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스타크래프트에서는 매 경기마다 고도의 심리전이 중요해집니다.


일주일 전에 있었던 프리미어리그 준플레이오프의 테란 이윤열 선수 대 프로토스 박정석 선수의 1경기를 생각해 봅시다. 2경기의 경우 이윤열 선수의 타이밍이 너무 기가 막혔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지만, 1경기의 경우는 박정석 선수의 컨트롤도 비인간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드라군 두기가 원탱크 투벌쳐 드랍을 거의 피해없이 막아냈습니다.) 이윤열 선수에게 일방적으로 밀리고 말았습니다. 패스트 닥템 체제가 원팩 원스타 체제에 약하기 때문이지요. 이는 에버배 듀얼토너먼트 변길섭 vs 전태규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들을 고려해본다면, 흔히 기성세대들이 스타크래프트를 이해하기 위해 들이대는 잣대인 "청소년들의 바둑"이라는 레토릭도 그리 엄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바둑 역시 격투기와 같이 선수의 기량이 승패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치며 다른 요소들의 개입은 지극히 한정되어 있는 종목이기 때문이지요.


2.
여러 가지를 생각해보건대 저는 스타크래프트와 비교할 만한 스포츠가 야구라고 생각합니다. 정확히 말하면 야구라는 게임 전체보다는 '투수와 타자의 대결'이 스타크래프트 프로게이머들이 직면하는 상황에 비유할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앞서 언급했던 '전략의 가위바위보'와 가장 비슷한 양상을 드러내는 것이 투수와 타자 사이의 심리전인 것 같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야구에서도 타자와 투수의 능력에 대해 수치화를 할 수 있지만, 그리고 장기적으로 본다면 그러한 수치화와 성적 사이에 '양의 상관관계'가 존재하겠습니다만, 적어도 이번 한번의 대결에서는 투수가 어떤 구질을 던질 것이며 타자가 어떤 구질을 예상할 것인가가 매우 큰 변수로 작용합니다. 타율이 4할에 이르는 강타자라도 불펜 투수에게 삼진아웃 당할 가능성이 존재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야구는 투수의 경우 선수의 '성격'마저 성적에 영향을 미치는 경우도 있습니다. 말하자면 베짱 좋은 투수는 구질이 뛰어나지 않아도 타자를 곤란하게 만드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지요. (물론 이 역시 장기적으로 본다면 '실력'이 뒷받침되어야 할 테지요.)


종족상성이라는 것도 다른 스포츠보다는 야구에서 비교적 설명하기가 쉽습니다. 가령 왼손타자는 오른손 투수에게 강하고 왼손 투수에게 약하다는 것처럼, 선수들의 '객관적인' 기량과는 상관없이 승패에 영향을 미치는 기질적인 면이 존재하니까요. '맵'의 경우는 비록 야구에서는 훨씬 영향이 적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지만, 조금 무리하게 얘기하면 홈런타자가 구장의 크기에 영향을 받는 것에도 비교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가장 문제가 될 것은 스타에는 '투수'와 '타자'의 구별이 없다는 것인데, 이는 제가 야구를 끌어들인 것이 스타의 어떤 측면을 명료하게 이해하기 위한 비유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렇게까지 큰 문제라고는 볼 수 없을 것입니다. 프로게이머는 전략을 건다는 입장에서는 투수라고 볼 수 있고, 전략에 대응한다는 입장에서는 타자라고 볼 수 있겠지요.


이렇게까지 스타크래프트가 야구와 가지는 유사성을 부각시킨 이유는, 종족밸런스 논쟁을 하기 전에 우리가 당연한 것으로 인지하고 있는 더욱 근본적인 문제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스타크래프트가 '전략'과 '종족상성'에 강하게 영향받는 게임이라면, 그런 점에서 투수와 타자의 대결과 비슷한 부분이 있다면, 스타크래프트라는 게임을 운용하는 가장 합리적인 방식은 야구가 그렇듯이 개인전이 아니라 단체전이라는 결론이 나올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스타크래프트 리그가 단체전을 중심으로 운용되게 된다면, 지금의 밸런스 논쟁은 상당부분 퇴색될 것입니다.


온게임넷 프로리그처럼 특정한 맵이 정해져 있고 엔트리를 팀에서 짜야 하는 상황이라면 어떨까요. '종족상성'이란 것이 큰 문제가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종족상성'을 고려해서 엔트리를 짜는 것이 팀의 권한일 테니까요. 말하자면 양키즈가 왼손타자 대비용으로 왼손투수 구대성을 데려가듯이, 팀에서도 가령 프로토스 유저들은 주로 상대팀 테란이나 프로토스를 상대하게끔 활용하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박정석 선수의 프로리그 개인전 15연승은 그런 점에서 의미가 크지요. 물론 박정석 선수의 포스는 개인전에서도 나름대로 극강입니다만, 프로리그에서 '에이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이런 사정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임요환 선수 역시 그런 시스템이었다면 프로토스에게 밀려 '먹튀' 소리를 들을 필요는 없었겠지요. (사실 임요환 선수가 이전에 워낙 잘해서 그렇지 '먹튀' 소리를 들을 정도로 못한 적도 없습니다만) 그의 대저그전 능력은 예나 지금이나 극강이고 팀에서는 충분히 활용이 가능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지금도 온게임넷 프로리그와 엠비시 팀리그 등 단체전이 있지만 개인전인 스타리그 쪽이 훨씬 인기가 많고 중심이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저는 단체전이 스타크래프트 리그의 주력이 될 경우 다음과 같은 이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 번째는 (제가 글을 쓰게 된 동기겠지요.) 종족밸런스와 맵밸런스가 게이머에 미치는 영향이 상당부분 줄어든다는 것입니다. 개인전에서는 언제나 밸런스 논란이 끊이지 않고 '공정성'에 대한 시비가 있을 수 있습니다. (지금이 바로 그런 상황이지요.)


두 번째는 비슷한 얘기일 수도 있지만 충분히 훌륭한 게이머들에게 지금보다 합당한 평가가 내려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스타리그 우승이라는 것은 적당히 대진운도 따라줘야 합니다만, 지금의 시스템에서는 한번이라도 우승을 차지한 사람이 팬들의 인기와 스폰서의 시선을 거머쥘 수 있고, 그것을 바탕으로 꾸준히 연습하여 게임계에서 살아남는 것 같습니다. 이는 몇몇 능력있는 게이머들에겐 가혹한 일일 수가 있습니다.


가령 저그 박경락 선수를 생각해 봅시다. 세 번 연속 온게임넷 스타리그 4강에 진출했던 그가 현재 이토록 부진한 이유를 전적으로 개인적인 이유에서만 찾을 수는 없다고 봅니다. 만약 그가 그 '전성기' 때에 한번이라도 그대로 주욱 치고 올라가 '우승'을 차지했다면, 그후 그의 행보는 지금같지 않았을 것입니다. 앞서 말했듯 팬의 인기를 얻고 스폰서들의 눈에 들 수 있었다면, 연습환경이나 본인의 의지 자체가 현격히 차이가 날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박정석 선수의 팬이라서 자꾸 그를 언급하게 됩니다만, 만일 박정석 선수가 2002년 sky 때에 우승을 차지하지 못했다면, 그 후의 슬럼프를 딛고 지금의 위치에 오를 수 있었을지 의문이 듭니다. 조금 더 약한 예로는 프로토스 이재훈 선수를 들 수 있겠습니다. 저그 상대로 약점이 있고 테란 상대로 강한 그도 단체전이 중심이 된다면 충분히 포스를 발휘할 수 있는 선수입니다.


세 번째는 단체전 중심의 재편이 스타크래프트가 발전된 컴퓨터 사양에 맞추기엔 너무 부끄러운 게임이 되어 e-sports가 대안적인 게임을 모색해야 하는 미래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개인의 카리스마에 의해 지탱되는 리그는 '스타'가 군대에 가거나 게임이 바뀔 경우 급격하게 사그러들 수 있지만, 구단끼리의 경쟁체제가 확립된 리그는 그런 것들을 넘어서 존립하기가 좀더 수월하지 않을까 하는 예상입니다.


물론 제가 "단체전이 대안이다."라는 당위성을 설파한다고 한들 프로리그나 팀리그의 인기가 개인전 스타리그보다 더 높아질 리는 없겠습니다. 그러나 스타크래프트 리그에 애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스타크래프트라는 게임의 이러한 속성에 대한 인식을 공유해 나간다면 '길'은 열릴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엠비시 팀리그 방식과 온게임넷 프로리그 방식 중 어느 것이 좋은지, 혼용은 불가능한 지에 대한 고민도 할 수 있겠지요. 개인적으로는 양자 모두 일장일단이 있다고 봅니다. 다시 야구에 비유를 하자면, 프로리그 방식은 불펜투수를 감독이 기용하는 것을 보는 듯한 자잘한 재미가 있고, 팀리그 방식은 괴물 선발투수가 상대타선을 초토화시키는 것을 보는 듯한 (소위 말하는 '올킬' 말이죠.) 굵직굵직한 재미가 있습니다.


3.
한가지 더 하고 싶은 말은 스타크래프트의 특성에 대한 이런 인식이 개인전 전략을 짜는데도 유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최근의 밸런스 논쟁을 촉발시킨 원인은 프로토스와 저그의 밸런스가 저그 쪽으로 무너진 것임에도 불구하고, 논쟁 자체는 프로토스와 테란 사이의 밸런스에 대해서 많이 이루어졌습니다. "프로토스 > 테란 > 저그 > 프로토스" 였던 종족상성이 "프로토스 = 테란 ≥ 저그 >> 프로토스"로 바뀌면서 프로토스 유저들의 불만이, 주로 이전에는 만만하다고 생각되었던 테란에 대해서 폭발한 것이지요. 사실 프로토스 유저들의 성적이 안 나오는 이유는 (저그 상대로는 원래 어려웠고) 대테란전에서의 승리를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니 그러한 폭발과 논쟁도 잘못되었다고 보기는 힘듭니다.


저의 견해는 일단 프로토스와 저그의 밸런스는 맵을 통해서 고려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구요. 엠비시 스타리그엔 김환중이라는 '저그킬러'까지 있다는 걸 생각하면 플저전 밸런스 붕괴는 온게임넷의 잘못된 맵에 영향을 받은 바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문제는 테플전 밸런스가 되겠는데, 이는 아직은 프로토스 유저들의 노력을 지켜보면서 시간을 두고 지켜봐야 하는 문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확실히 테란의 유닛들이 컨트롤을 잘 하면 잘 할수록 효율이 극대화되는 면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프로토스의 유닛들이 (다른 종족에 비해 상대적으로) 완결된 것이기에 더 노력한다고 해서 실력이 더 쌓이지 않는 부분도 있는 것 같습니다. 가령 옵저버 없이 드라군 드라이브로 마인 심는 벌쳐를 제압해버리는 박정석 선수의 컨트롤은 '경탄스러울' 지경인데, 이를 보고 아무도 "우와, 저렇게 플레이하는 플토를 테란이 어떻게 잡아! 저건 사기야! ㅠ.ㅠ"라고 외치지는 않는 실정이니까요. 드라군을 그보다 더 어떻게 잘 부릴 수 있을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프로토스가 테란에 비해 불리하다는 '확증'은 나오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프로토스에 대한 역상성을 가장 강하게 보여주면서, 서로 경쟁하듯이 프로토스를 압살하는 이윤열 선수와 최연성 선수를 생각해 봅시다. 최연성 선수는 현재가 전성기이기 때문에 미래에 파해법이 나올지도 알 수 없고, 이윤열 선수의 경우 오늘 프리미어리그 플레이오프 조용호 선수와의 경기에서 그 진가를 보여주었듯, 저그든 플토든 상성 따위는 무시하는 '천재'라는 생각이 듭니다. ('천재'와 동시대를 사는 이의 임무는 천재를 넘어서는 것이 아니라 그와의 동시대를 '견뎌내는' 것입니다. 박정석 선수는 우선 이윤열 선수와의 상대전적을 4할-5할까지 끌어올리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만일 테란들이 최연성이나 이윤열의 전술(?)을 따라해서 프로토스를 수월하게 잡을 수 있는 타이밍이 온다면 그때는 프로토스의 불리함을 논할 수 있겠지만, 아직은 시기가 조금 이르다는 느낌입니다. 물론 테란의 벌쳐 컨트롤과 골리앗 활용도가 높아지면서 프로토스는 반드시 캐리어를 가게 되었고, 캐리어를 간 후에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은 인정해야 겠지만요. (프리미어 리그 김정민 vs 강민 경기가 이를 보여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테란들은 패스트 캐리어, 하나도 안 무섭습니다.)  


오히려 프로토스 유저들이 경기를 좀더 긴 호흡으로 바라보는 안목을 키웠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앞서 말한 스타크래프트의 전략적 특성이 나오는 것인데요. 한동안 레퀴엠이 머큐리에 버금갈 만큼 저그 상대로 한 프로토스에게 암울하다는 말이 나왔는데, 하드코어 질럿러시가 몇 번 먹히자 다른 전략들(더블넷, 원게이트 테크트리 등)까지 더 잘 먹히게 되면서 밸런스가 5대 5를 향해 수렴되어 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투수가 야구에게 공을 던질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 경기에서의 전술은 개별적으로 독립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상 다음에 올 경기들을 위한 '자료'가 된다는 점을 이해해야 합니다.


다른 프로토스 유저들은 이런 것까지 고려하기에는 먼저 넘어야 할 산이 많습니다만, 현재 홀로 분투하면서도 2% 부족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박정석 선수의 경우엔 충분히 고려해볼만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박정석 선수는 이제 물량에 전략, 운영까지 겸비한 선수로 주로 온게임넷 김도형 해설위원 등에게 '극찬'을 받고 있는데, 지금껏 그의 전략이 잘 먹힌 것은 이전에 그가 '물량 프로토스'로 쌓은 승수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박정석 선수의 경우 현재 성적은 좋지만 그에 상응하는 '베짱'을 가지고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이윤열, 그리고 최연성 선수와 가졌던 중요한 경기에서 무너진 것은 바로 그러한 심리적인 요인이 큽니다.


에버배 스타리그 준결승에서 테란 최연성 선수 상대로 보여주었던 머큐리 물량전은 '고육지책'에 가까웠습니다. 비유하자면 강속구 투수가 괴물타자를 상대로 마운드에 올라왔을 때, 첫 투구를 자신의 장기인 빠른 직구로 찔러넣어 스트라이크를 잡아내지 못하면, 도저히 이 타자는 잡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박정석 선수의 판단은 정확하게 맞아떨어져 천하의 최연성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정도의 물량전 명기를 만들었지만, 문제는 그후 한번 더 직구를 던질 엄두를 내지 못했다는 겁니다. 3경기 비프로스트와 5경기 머큐리의 패배요인은 다른 무엇보다 "다시 한번 물량전을 하기는 싫다."는 박정석 선수의 심리였습니다. 한번 더 직구를 던질 각오가 있었다면 그날 박정석 선수는 최연성 선수를 삼진아웃시킬 수 있었을 겁니다.


이윤열 선수와의 경기는 자세한 전략 이전에 '천재'의 앞을 막아선 '수재'의 안타까운 분투를 보는 듯한 경기였습니다. 여기서도 문제는 그가 도망가는 피칭을 했다는 것이지요. 3대 0이라는 스코어보다 더 문제인 것은 박정석이 다음에 이윤열을 만났을 때도 이윤열은 '박정석의 물량전'을 크게 염두에 두지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박정석 선수는 '물량전을 잘하면서 전략과 운영이 겸비된 프로토스'입니다. 말하자면 '간혹 변화구를 던지는 강속구 투수'인 것입니다. 그의 변화구가 먹히려면 필수적으로 일정한 비율의 직구를 던져줘야 합니다. 설사 얻어맞는다 하더라도 필수인 것이지요. 질레트배 스타리그 준결승에서 박성준 선수가 최연성 선수를 잡아낸 모습을 생각하면 이해가 빠르실 겁니다. 계속 같은 비유로 나가서 죄송하지만, 그 경기는 네 번 연속 직구를 던지던 박성준 투수가 마지막에 변화구를 던지자 최연성이 그대로 헛스윙을 해버린 경기였습니다. 스타크래프트의 특성을 감안할 때 그런 식의 한번의 게임을 넘어서는 '운용'이 적극 고려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p.s 처음 쓰는 글입니다. 그런데 곧 군대갑니다. ㅠ.ㅠ 입대하기 전에 write 버튼이 생겨서 다행입니다. ;;

p.p.s 남들 다 할 때 스타크래프트를 안 하고 늦바람이 났습니다. 그래서 게임실력은 허접하고 (같이 연습할 실력의 친구가 없더군요. -.-;;) 스타리그를 본 경력도 1년 남짓합니다. 다소 부정확한 부분이 있어도 양해구합니다.


서하

2007.03.24 22:08:25
*.249.0.101

본론에서 벗어나는 감이 있긴 하지만 딴지를 좀 해보자면 '무엇보다 투기종목의 선수들은 잘 나갈 때는 평소 하던 데로 하면서도, 어떤 스타일의 누구에게도 거의 지지 않는다는 점이 스타크래프트와 많이 다르죠.' 라고 하셨는데 그건 스타크 역시 마찬가지 아닙니까. 잘나갈때 최연성이 닥치고 더블만 했다고 진적이 없죠. 그게 테란이 사기인 이유라고 말하면 물론 할말이 없지만.

서하

2007.03.24 22:13:40
*.249.0.101

말나온 김에 겉가지를 도는 이야기를 좀더 해보자면 복싱등 투기 종목이 스타크와 그리 다른 것 같지는 않군요. 스타크처럼 계절마다 바뀌는 것은 아니지만 복싱에도 링이란 맵이 있고 스타의 '맵적응력'처럼 '링 공간 활용'이란 덕목이 있습니다. 아웃복서는 인파이터에 약하다, 스워머는 슬러거에 약하다 등등의 종족상성이란 것이 있고 이녀석은 어떻게 상대해야 겠다고 미리짜온 전략도 있습니다. 경기중에는 주먹을 주고받으며 많은 심리전이 오고가지고요. 내가 원투를 치면 이녀석이 들어올테니까 그때 클린치를 해서 지치게 만들자 등등의. 물론 초보때는 아무생각없이 주먹만 휘두를뿐이지만 그것이야 스타크도 마찬가지지니까....

서하

2007.03.24 22:17:49
*.249.0.101

마지막으로 어떤 스타일의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투기종목의 선수란 세상에 지극히 드문존재입니다. 그런 사람이면 레전드가 되죠. 알리나 로키 마르시아노처럼요. 현재 챔피언이란 사람들도 다 약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호야가 모슬리에게 약하다든지 앤더슨 실바가 파워형 그래플러들에게 약하다든지 등등...완벽한 인간이란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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