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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세종이 되고 싶니?

조회 수 952 추천 수 0 2004.08.27 14:39:00
진보누리와 폴리티즌politizen.org에 아흐리만이라는 아이디로 올린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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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이 "세종이 되고 싶었는데 태종밖에 못 될 것 같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새시대의 첫아들이 되고 싶었는데 구시대의 마지막 아들밖에 못될 것 같다"는 발언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라고 한다. 일단은 민주주의 국가의 대통령께서 왕조시대의 비유를 드시는 풍토가 별로 좋은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많은 한국인들의 정치비평이 삼국지 스토리 분석하는 수준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있는데, 거기에 대통령까지 장단을 맞춰서 쓰겠는가.


그러한 원론적인 지점을 벗어나더라도 노무현 대통령의 '비유'는 태종이나 세종 당대의 역사적 현실들을 제대로 알고 현대에 '적용'한 것이 아니라, 그저 세간에 흔히 알려진 편견을 기초로 한 '수사'라는 느낌이 짙다. 일반인들 사이에서야 태종 시대의 과단성 있는 정치가 왕권을 강화시켰고, 이로 인해 세종 시대의 태평성대의 기틀이 마련되었다는 것이 '상식'처럼 되어있지만, 역사를 살펴보면 그 문제가 그리 개운하게 결론이 나지는 않기 때문이다.


태종이 줄곧 지켜왔던 것은 조선의 왕권이 아니라 그 자신의 권력이었다. 그가 아들 세종을 즉위시키고도 상왕 자리에 올라 병권을 쥐고 있었던 것은 순진한 아들 세종을 신하들로부터 보호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자신이 세종으로부터 축출당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상왕으로서의 태종은 오히려 세종의 권력을 약화시키는 조치들도 거리낌없이 취했다. 그런 상황에서도 상왕과의 관계를 훼손하지 않은 채 국정을 무리없이 이끌어나간 세종에게 우리는 더 높은 점수를 줘야할는지도 모른다.


조선사에 관련한 통설들을 보면 역사드라마가 얼마나 사람들의 역사인식에 큰 영향을 미치는지, 그리고 대부분의 역사드라마가 그간 얼마나 군사정권 이데올로기에 충실히 복무했는지가 드러난다. 고려시대 무인정권이라는 흥미로운 사건이 민주화가 충분히 진척된 이후에야 역사드라마의 소재로 채택될 수 있었다는 점이 이를 반증한다. 그러한 '복무'를 나타내는 인식 중에 하나가 바로 태종에 대한 신비화와 영웅화이며, 다른 하나를 든다면 세조(수양대군)에 대한 정당화이다.


모든 역사드라마와 상당수의 대중역사서들은 수양대군이 신권의 상승과 왕권의 약화를 두려워한 나머지 계유정란을 일으켰으며, 세조로 즉위한 다음에는 왕권이 튼튼해졌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단종을 위협하던 신권이란 것은 집현전 학자들을 중심으로 한 지식엘리트들의 공동지배체제 시스템이었으며, 오히려 계유정란 이후에 한명회 등 훈구파들이 많아져서 왕권이 더욱 축소되었다는 것이 올바른 시각이다. 훈구파에 대해 기술할 때 흔히 "개국공신과 정란공신"의 짬뽕이라고 하는데, 주지하다시피 개국공신은 태종 이방원이 거의 처단해 버렸으니, '전횡'을 일삼은 훈구파들은 도대체 어디에서 왔겠는가. 세조가 한 일은 세종이 만들어낸 시스템의 신권을 자의적인 신권으로 교체한 것이지, 결코 왕권의 강화가 아니다. 따라서 사육신과 생육신의 저항도 단순히 왕조에 대한 충성으로서가 아니라, 그들 학자들이 추구했던 왕조의 이념이 자의적인 권력에 의해 부정된 결과로 파악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이처럼, 치세를 위해선 (보통은 자의적인) 중앙권력으로의 집중이 우선적으로 요구된다는 주장은 대개의 경우 검증될 수 없는 것이다. 태종이 개국공신과 형제들을 모두 쓸어버렸기 때문에 조선왕조가 안정되었다는 것은 물론 옳은 말이다. 그러나 태종은 '살아남기 위해' 그렇게 한 것이지 어떤 지향을 가지고 그렇게 한 것이 아니다. 누군가가 의지적으로 "나는 태종의 역할을 하겠다."라고 말할 때, 고개가 갸웃거려지는 것은 그 때문이다. 또한 태종식의 자의적인 권력행사 다음에는 대개 또 다른 자의적인 권력행사가 이어지거나 권력투쟁이 다시 시작되는 것이 일반적이지, 세종과 같은 치세가 시작되는 일은 극히 드문 일이다. 그런 식의 어법이 올바르다면 히틀러는 지주계급('융커')을 쓸어버렸기 때문에 독일 민주주의 발전에 공이 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굳이 태종의 역할을 오늘날의 상황에 대입한다면, "시스템이 부재한 상태에서 정당한 통치권력이 인정받지 못하는 상태"라고 말할 수 있겠다. 노빠들은 지금이 바로 그러한 상태라며 딴잔련의 탄핵 등을 운위할 것이나, 한국의 선출직 대통령 중에서 그러한 상태를 맞이한 사람이 있었다면 김영삼이었다. 김영삼이 과단성있게 하나회를 해체한 일이야말로 한국인들이 흔히 생각하는 태종의 역할에 걸맞는 일이었다. 그 이후 한국의 시민사회는 군사정변을 용인하지 않을 정도로 성숙했으며, 군 장성 중에서도 감히 쿠데타를 일으킬 배짱을 가진 이가 없어졌다. 조갑제류의 선동은 위험한 것이긴 하나 이미 그것을 즐기는 대중들조차 실현되지 않을 것을 알기에 즐기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노무현 시대에 이르러서는 통치권력의 시스템은 별다른 무리없이 작동하고 있으며, 문제는 운용이라고 볼 수 있다. 국회의원들의 대통령 탄핵 역시 그 사유가 부적절하고 타당하지 않은 것이긴 하나, 그들의 행동이 불법적인 것은 아니다. 그들은 적법한 절차에 의해 대통령을 탄핵했으며 이에 헌법재판소는 역시 소정의 절차에 따라 국회의 요구를 기각했다. 이를 "쿠데타"로 칭하는 것은 비유에 불과한 것이지 문자 그대로 그런 의미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점을 구별하지 못하는 이들이 너무나도 많다.


세종이 되고 싶다면 세종이 되시라. 세종은 아버지 태종의 실록을 보고 싶었고 근 이십 년이 가깝도록 이를 요구했지만 선왕의 실록을 볼 수 없다는 원칙을 강변한 황희와 맹사성의 요구에 굴복했다. 물론 태종이라면 절대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세종은 스스로 역점을 두고 추진한 훈민정음 창제에 정면으로 반박한 최만리에 대해서도 관용했으며, 오히려 사직서를 내고 내려간 이는 최만리였다. 세종은 최만리 이외에는 집현전 부제학을 할 사람이 없다며 한탄했다고 한다. 물론 태종이라면 자신의 자존심에 상처를 준 신하를 가만두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것들이 태종의 방식과 세종의 방식의 차이일 것이다. 세종의 방식이 오늘날 요구되는 민주적 리더십에 훨씬 가깝지만, 노무현의 국정운영이 보여주는 것은 오히려 태종의 것에 훨씬 가깝다.


노무현 대통령의 발언은 이 점을 인정하기 때문에 나온 것이다. 인정하지만, 자신은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변명과 이러한 행위 또한 역사가 자신에게 부여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일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 혹은 희망을 담고 있다. 세상을 그토록 편하게 사는 것은 정말이지 인간에게 용인되지 않은 행복일진대. 잠시 노대통령의 발언을 무지의 소산이라 해야 할지 무의식적인 진실의 발설이라 해야 할지 혼동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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