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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노조의 정치성과 기업가의 정치성

조회 수 1003 추천 수 0 2004.08.12 23:19:00
이 글은 분명히 미디어몹 블로그, "아흐리만의 도피행각"에만 올렸고, 진보누리에는 올리지 않았다. 이 시기부터 나는 진보누리보다 미디어몹에 더 힘을 쏟았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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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카드와 이마트가 '전쟁'을 벌이고 있다고 한다. BC카드가 이마트쪽 수수료를 올렸더니, 이마트에서 BC카드를 탈퇴하겠다고 맞서고 있다는 것이다. 이 카드수수료 분쟁은 다른 할인마트에게도 확대되어 가는 추세라고 한다. 우리나라 금융계 수수료가 싼 것도 아니고, 이러한 다툼의 피해는 고스란히 소비자들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일련의 기사들 밑의 네티즌 리플들이다. '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닌데, 평소만큼 '물량'이 나오지 않는다.

'욕'하는 것이 옳은 것도 아니고, 생산적인 것도 아니니 그것을 권할 생각은 없다. 다만 내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사람들의 감정의 지향이다. 이 리플들의 숫자는 정확하게 감정의 총량을 보여주고 있어, 이 사람들이 노조의 파업에 분노하는 것의 백분의 일만큼도 기업가들의 다툼에 분노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설명하는 것만 같다.

"기업의 목표는 이윤추구다."
"노조는 그 노조에 가입한 노동자를 위한다."

이 두개의 명제는, 내가 보기엔 동격의 명제다. 둘다 자본주의 사회의  '현상'을 드러내는 명제다. 그런데 사람들은 전자에 대해서는 마치 그것이 자본주의의 당위적인 공리인 것처럼, 신성불가침한 명제로 사수하려든다. 반면 후자에 대해서는 그것이 당위에 어긋나는, 어떤 모종의 타락에 의해 빚어진 비극인 것처럼 느낀다. 말하자면 기업가가 이기적인 것은 당연한 반면, 노조는 자신들의 이익이 아닌 사회적인 당위선을 추구해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근거없는 믿음이다. 자유민주주의-자본주의 체제는 개별 주체의 이기성의 총합이 사회적 선을 창출하도록 유도하는 체제다. 사람들은 노조와 노동운동이 있는 이유가, 마치 기업가에게 놔두면 사회는 자연스레 발전할 테지만, 그래서는 노동자들이 너무 불쌍할 것이기 때문에 이윤의 일부분을 '떨구어주기' 위해서라고 '착각'한다. 그러나 자본가는 물건을 만들어 천국에 팔아먹는 사람들이 아니며, 자본가들끼리의 소비에는 한계가 있다. 노동자들이 소비를 못하면 수요가 사라지고, 수요가 사라지면 공급유인이 사라지고, 공급유인이 사라지면 당연히 생산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편의상 자영업자들을 논의에서 제외시키고 있는 것을 양해해주길 바란다. 나는 맑스주의자는 아니다.) 노동자의 권익보호는 물론 처음에는 인권보장의 차원에서 발생했지만, 오늘날 노동자의 권력은 산업을 지탱하기 위한 요소 중의 하나다. 현대경제학에서 성장과 분배는 분리되지 않는다. 공급중심이나 수요중심 모두 한계가 있기 때문에 각자의 이기심은 바로 그 이기심의 대립을 통해 중화되어야 하며, 그것이 사회적 선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기업의 목표는 이윤추구이므로 이를 욕하는 이들이 경제에 무지하다고 말하려면, 노동조합의 목표 역시 가입노동자의 권익보호이므로 이를 욕하는 이들 역시 경제에 무지하다고 말해야 한다. 그게 아니라 윤리적인 측면을 말하려면, 노동조합에 사회적 선에 대한 지향이 요구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기업에도 사회적 선에 대한 지향이 필요하다고 요구해야 한다.

나는 직장생활의 경험이 없으며, 꼭 그때문만은 아니겠지만 노동운동에 대해서 잘 모른다. 그래서 개별적인 파업들이 사회적으로 정당한 요구를 담고 있는지, 아니면 부당한 요구를 담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리고 민주노동당을 중심으로 한 좌파들이 노동조합의 요구에 대해서는 "언제나 옳다."라는 그릇된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도 있다. 그러나 내가 추측할 수 있는 것은 사회전체적으로 볼 때, 기업가와 노조에게 요구하는 사람들의 공익성의 차이는 양자의 힘의 차이를 나타낼 거라는 것이다. 한쪽은 전혀 제어를 받지 않고 있고, 한쪽은 손발이 묶여 있으니 말이다.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다. 가령 어떤 노동조합이 파업의 요구로 1. 비정규직 철폐,  2. 퇴직노동자 복직, 3. 임금인상을 내걸었다. 사람들은 수군거린다. "어이구, 저놈들, 정당한 척하려고 저 모두를 내걸었지만 사실은 '3'이 목적이야. 비열한 놈들." 기업가들은 신문광고로 연봉을 공개한다. 분위기가 더 싸해진다. 파업이 아무 성과도 못 내고 종료된다. 그래, 노동조합의 요구가 실은 3에 더 집중되어 있었다고 치자. 그래서 너희 노조, 그렇게 정당하고 싶다면 어째서 2만을 내걸지 못했느냐고 (1은 개별노조 단위에서 처리하긴 너무 큰일이니까) 말할 수 있다고 치자. 그런데 왜 기업가에게는 똑같이 말하지 못하는가? "당신은 노조가 이기적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2는 들어 줄 테니, 3에 대해서는 참아라.' 이런 식의 협상조건을 내건 적이 있는가? 당신이 노조보다 덜 이기적이 됨으로써 노조가 정말로 이기적임을 증명하려 한 적이 있는가?"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은가?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나의 파업의 실패는 모든 요구의 실패로 귀결된다. 그 요구 중의 어느 것이 정당하고 어느 것이 부당하느냐에 상관없이.

파업의 권리는 기업주에 대항하기 위한 노동자의 보장된 권리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선 파업이 일어났을 때 그게 '불법파업'이 아니라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으니 어찌된 일인지 모르겠다. 사람들은 노동자들이 영악하다고 비난하면서도, 이럴 때엔 "왜 그토록 영악한 그들이 매번 불법행위만 범할까."라는 생각은 하지 못하는 것 같다. 제도 자체가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은 못하는 걸까?

지하철 파업에 대한 태도도 그렇다. 나는 지하철 파업의 대의명분이 옳은지 그른지에 대해 알지 못한다. 내가 아는 것은 파업은 노동자의 권리이며, 지하철 노동자가 파업했을 때엔 나는 지하철을 탈 권리가 없다는 것이다. 다만 그 권리상실에 대해 호의적인 반응이나 비호의적인 반응을 보일 수 있을 뿐이다. 이것은 내가 먹는 과자의 가격상승에 대해 내가 어찌할 도리가 없으며, 취할 수 있는 조치는 (개인적인 차원의 구매금지, 소비자 운동의 불매운동 등) 일단 그 가격을 받아들인 다음에 취할 수 있는 것이라는 것과 같다.

그런데 사람들은 파업이 났다는 지하철에 승차하면서도 지하철 노동자들을 비난한다. 지하철이 파업하면 지하철을 못 타는게 맞다. 서구 선진국들 중 어느 나라도 노조가 파업했는데 그 기업이 돌아가는 나라는 없다. 그런데 우리의 지하철은 무려 97%의 운행률을 보였다. 물론 체감 운행률은 80%쯤 됐지만 말이다. 하여튼, 이 상황에서 당신이 지하철을 타면서 지하철 노동자를 비난할 수 있을까? 그건 가격상승된 과자를 (어느 슈퍼마켓 주인의 농간 때문에) 상승 이전의 가격으로 사면서 가격상승을 욕하는 꼴이다. 치즈케이크를 먹으면서 동시에 갖고 있을 수는 없다.

사람들은 이런 종류의 얘기에 익숙하지 못하다. 여기에는 형이상학적 관념 뿐 아니라 실제적인 '약자의 우려'도 숨어 있다. 즉, 노동조합은 우리들의 반응에 민감하게 영향받지만, 기업주들은 우리가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할인마트 수수료가 조금 높아지는 것은 효과가 여러번에 걸쳐 조금씩 나타나지만, 노동자의 파업은 한꺼번에 나에게 피해를 입히기 때문에 짜증이 난다는 의식도 있다.

후자에 대해서는 바로 그런 것이 기업가의 권리행사와 노동자의 권리행사의 차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기업가의 권리행사는 일상적으로 일어날 수 있지만, 노동자의 권리행사는 특수한 국면에서만 드러날 수밖에 없다. 따라서 후자가 더 극단적이며, 단기간 내에 더 큰 손해를 끼치는 것은 당연하다. 핵심은 이러한 대립국면을 '말'로 풀어내지 못하면 과격한 파업은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시민'들이 파업을 아무리 혐오한다 하더라도, 상황이 급박해지면 파업은 일어날 수밖에 없다.

전자에 대해서는 선진국의 사례를 조금 참조할 필요가 있겠다. 우리는 모두 한 사람의 소비자이기 때문에, 기업가들에게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의식수준을 높임으로써 가능하다. 유럽의 경우에는 기업들이 기업광고로 매일 이같은 내용을 내보낸다. "우리 기업은 환경보호 기준을 준수합니다. 환경기금도 냅니다. 우리 기업은 법적 기준에 따라 여성들을 채용합니다. 우리 기업은 법적 비율에 맞춰 장애인을 채용합니다..."

이런 광고들이 나오는 이유는, 소비자들이 기업의 저런 행태를 보고 소비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친환경, 친장애인, 친여성 기업이 아니라면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에 저렇게 된 것이다. 한국에서는 장애인 비율을 못 맞췄을 때 정부에 내야할 벌금이 그리 높지 않기 때문에, 많은 대기업들이 신년 예산으로 그 벌금 비용을 미리 적는다. 여기엔 도대체 얼마만큼의 차이가 존재하는가.

기업가에게도 '이윤추구' 이상의 정치성이 있으며, 이는 분명 소비자의 요구에 의해 성립한다. 이에 대한 자각이 성립할 때, 노조의 이기성에 대한 소비자의 비판도 '르상티망'(약자들의 원한)을 넘어 사회적 선을 실현하기 위한 비판으로 자리매김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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