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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알라딘 서평란과 스누나우에 올린 서평이다. 좋은 책 좀 더 많이 팔리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널리 유포시킨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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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인생의 이야기
테드 창 지음, 김상훈 옮김 / 행복한책읽기 / 2004년 11월
 


어떤 장르이든 간에 우리나라에 외국의 최신 작가의 소설이 번역되어 나온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다. 더군다나 서브컬쳐로 분류되는 SF라면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런 점에서, 미국에서 2002년에 출간된 테드 창의 중단편선집 <당신 인생의 이야기>가 2004년 한국에서 출간되었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사건’임에 틀림이 없다. 일단 그 사건의 의미를 3초간 기쁘게 음미한 다음에 작품집을 읽어나간 후, 나는 이 작품집이 한 시리즈의 SF작가선집의 1번을 장식하기에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SF가 과학소설(Science Fiction)이라면, 그 소설들에서 S(Science)가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느냐는 것이 그것을 평가하기 위한 하나의 기준이 될 수 있다. 이 기준에서 접근할 때 나는 테드 창의 작품들이 매우 특이하다고 느꼈다. 읽어본 SF 작품들이 그리 많지는 않지만, 가령 아서 클라크나 할 클레멘트와 같은 (흔히 언급되는) ‘하드SF’ 작가들의 작품에서 S는 엄밀한 사유실험을 하기 위한 법칙이며 도구다. 반면 로저 젤라즈니와 같은 재기발랄한 작가의 작품에서 S는 작가의 상상력을 펼칠 수 있는 설정을 구성하는 데에 곧잘 이용된다. 뜸하게 볼 수 있는 어슐러 르 귄 류의 SF소설에서 S는 본인의 인문학적 사유를 스며들게 하는 바탕질이다. 그러나 테드 창의 소설에서, ‘과학’은 그런 식의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조건으로 서술된다. 말하자면 “S(Science)가 S(Subject)를 구성한다.”는 명제의 증명이랄까. 과학은 인간이 가진 도구의 일부가 아니라 인식의 대표자로써, 인간을 성장하게 하고 한정짓는 창이다. 이쯤에서 SF소설은 철학적 인식론을 소재로 품을 수 있는 사유의 높이에 올랐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더 특이한 것은 테드 창의 소설이 품고 있는 철학적 문제가 SF소설과 겉돌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SF소설이 흔히 ‘심오하다’고 일컬어지는 문제들을 다루는 것이 전혀 없는 일은 아니다. 가령 스타니슬라프 렘은 그의 장편소설인 <솔라리스>에서 철학적으로 흔한 테마인 주관과 객관의 비일치성에 대해 섬세하게 다루고 있다. 그러나 이런 소설들에서는 주류문학에 대해 문학성을 인정받고자 하는 SF라는 하위 장르의 ‘욕망’이 엿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이런 소설들은 SF팬덤에서보다는 그 바깥에서 훨씬 높은 평가를 받았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결과적으로 <솔라리스>는 철학도에겐 범용한 주제를 장르문학 독자들의 문법에 맞춰 치밀하게 소개한 작품이 되며, 아마도 SF라는 독자수용의 맥락을 벗어나면  일종의 ‘오버’가 될 것이다. 그러나 테드 창의 경우 S가 인식론의 차원으로 격상되었음에도 보편적인 인식론의 문제가 아니라 SF 소설 자신의 문제를 지시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되는데, 이 경우 그의 소설들은 번역자인 김상훈씨가 적절하게 지적한 대로 일종의 ‘메타SF’의 위치를 전유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 ‘전유’는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는가. 내 식으로 이해한 대로 적어보자면, 인간은 과학이라는 인식틀을 통해 우주의 법칙을 인지하면서 앞으로 전진하게 되는데, 이러한 노력에는 끝이 있을 수가 없다. 그것은 그 노력의 끝에 어떤 경이로운 대상(근본법칙이라든지, 신이라든지 하는)이 존재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러한 모든 법칙들이 일종의 ‘텅 비어있음’에 의해 구조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무(無)의미’가 ‘의미’를 규정한다는 이런 식의 역설에 도달하기까지 그의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엄밀한 과학을 사용한다. 그것이 가장 도식적으로 나타난 단편은 <바빌론의 탑>, <이해>, <영으로 나누면> 등이다. 이 주제의식이 너무나도 탄탄하기 때문에, 각각의 작품집에서 매우 다른 성격의 우주들이 지독한 현실감을 가지고 묘사됨에도 불구하고, 독자는 흔히 SF에서 얻을 수 있는 다른 세계에 대한 ‘경이’보다는 일종의 답답함을 느끼게 될 공산이 크다. 말하자면 테드 창이라는 이름의 한 신학자는, 우리에게, 우리가 겪는 삶의 문제들이 현존하는 우주에서만이 아니라 가능한 모든 우주에서 존재할 수밖에 없는 어떤 근원적인 문제라고 선언하는 듯하다. 그런 점에서 그의 이야기가 어떤 우주를 다룰지라도, 그것들은 “당신 인생의 이야기”인 것이다. 그야말로 다큐멘터리 형식의 <외모 지상주의에 관한 소고: 다큐멘터리>는 이런 ‘이야기’를 좀더 미시적인 차원에서 반복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선집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보이는 <지옥은 신의 부재>는 이 주제를 조금 비껴나가는 것 같은데, 이 점을 설명하기 위해선 기독교적 세계관에 대한 초보적인 설명이 필요하다. 한국에 기독교도가 매우 많아진 지금도 제대로 이해되지 않는 이 세계관의 본질은 형이상학적 인식과 윤리적 믿음이라는 두 개의 층위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이 선취하고 있는 형이상학적 인식은, 모든 현상에는 그것을 관장하는 법칙이 있으며, 또한 그 법칙은 현상보다는 높은 차원에 위치하고 있으며, (그것은 ‘진실’에 가깝다. 가령 속도의 원인은 가속도이며, 가속도의 값은 속도의 제곱을 통해 튀어나온다는 사실을 상기하라.) 결과적으로 그 법칙들의 위계를 따라가다 보면 하나의 법칙으로 수렴할 수 있다는 데에 있다. (이것은 직관에 가깝다. 이러한 직관에 대한 현대적인 사례를 든다면, 물리학에서 추구된 통일장 이론에 대한 욕망이 있을 수 있다.) 그것이 소리높여 주장하는 윤리적 믿음은 그 하나의 법칙이 인간의 것과 비슷한 ‘인격’이며, 인간을 ‘사랑’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인간’은 세계 속에서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의구심을 떨쳐버리고, 일종의 안도감을 느끼게 된다.



현대사회는 그런 식의 윤리적 믿음을 취향의 영역으로 밀쳐버렸으며, 이로 인한 인간의 불안은 여러 문학 작품들의 범용한 소재가 되어 왔다. 그 점에 대해서는 별로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반면 형이상학적 인식에 대해서라면 얘기가 좀더 복잡해지는데, 비록 현대과학이 그것에 대해 다양한 방법으로 의구심을 제기해 왔지만 그 의구심만으로 ‘수렴된 법칙’에 대한 욕망을 폐기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아직까지 인간은 그런 ‘욕망’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학문하는 법을 알지 못한다. <일흔두 글자>라는 단편에서 주인공 로버트는 의식의 수준에서는 명명과학과 ‘신’, ‘신성한 이름’을 연결짓는 ‘교사’들을 ‘신학자’들이라고 무시한다. 그러나 행위의 수준에서 그의 탐구는 추상화와 분류작업을 통해 플라톤주의자의 그것을 그대로 따라간다. 이 소설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깨달음은 두 가지다. 첫째, ‘판타지’의 세계관이 그대로 실현되는 우주라 하더라도 거기서 ‘신’의 존재가 저절로 증명되는 것은 아니다. 둘째, 그런 세계에서도 과학은 ‘우리’의 세계와 비슷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문화사적 관점에서의 ‘근대’의 ‘중세’에 대한 대립이라는 것도 어떤 공통의 지반 위에서의 ‘적자’ 투쟁의 산물이었다고 보는 시각도 충분히 설득력을 지닐 수 있다. 말하자면 ‘근대’는 ‘중세’의 ‘신’의 위치에 ‘우주의 작동함수’를 올려놓고 그것을 인간의 이성(과학)으로 파악할 수 있다고 믿는 시대였던 것이다. 기독교적 세계관과 별반 영향이 없어 보이는 ‘우리’에게도 이런 문제가 중요해지는 것은 ‘우리’ 역시 그러한 ‘근대’ 속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테드 창 본인은 <지옥은 신의 부재>가 판타지라고 설명하면서, 그 이유는 그가 생각하는 SF는 우주를 합리적인 탐구가 가능한 대상으로 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관점은 SF에 대한 간략한 정의이면서도 서양의 중세와 근대를 관통하는 형이상학적 인식의 표출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접근할 때, 그의 소설들에 고대의 신화(<바빌론의 탑>)와 신화적 근대과학(<일흔두 글자>)이 동시에 등장하는 것에는 모종의 ‘일관성’이 보인다. 그것들은 별로 다른 이야기가 아니며, 사실상 테드 창의 소설에서도 별로 다른 양식을 요구하지 않는 것이다.



앞서 다른 용어로 설명했지만, 그의 대부분의 소설들은 형이상학적 인식을 극단까지 밀어붙이는 이들이 겪는 체험을 그린다. 그것은 윤리적 믿음은 사라지고 형이상학적 인식만 찌꺼기처럼 남아 있는 우리 시대에 잘 어울리며, 쉽게 감정이입이 된다. 반면 <지옥은 신의 부재>에서는 윤리적 믿음이 현시하기 때문에 형이상학적 인식이 불필요한 ‘우주’를 다루고 있다. 신의 의지가 도처에서 발견되는 이 세계에서 사람들은 "도대체 당신(여기에서는 ‘신’)은 무엇을 원하는가."라는 타자에 대한 질문에 시달리게 되는데, 여기서도 궁극적으로 얻어내는 의미는 ‘무의미’다. 결국에는 ‘아무 것도 없다’. 그리고 그 없음이 우리의 체계를 형성하고 지탱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지옥은 신의 부재>는 그의 소설의 맥락에서 ‘다른’ 소설이라기보다는, 거울이미지처럼 기타 소설과 좌우대칭의 구조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분명 이 소설에는 ‘우연’이 넘친다. 그러나 ‘우연’이란 것은 ‘법칙’에 미처 포섭되지 않은 실재를 가리키는 용어일 수 있고, 또는 오히려 ‘법칙’이란 것이 ‘우연’의 다발들에 일관성에 대한 의지를 외삽시킨 구성물일 수 있다. 그러므로 테드 창의 SF/판타지 구별법은 유효하기는 하지만 오히려 판타지와 SF의 거리를 근접시키고 있는 것 같다.)



여기에서 빛나는 것은 새로운 방식의 숭고의 감각이다. 말하자면 테드 창은 일반적인 SF소설가들처럼 우주법칙의 담지자에 대한 놀라움을 소설에 담지 않는다. 그가 담는 놀라움은 그 법칙의 무한함이 아니라, 그 초라한 한계(법칙 자체의 초라함인지 아니면 인간 자신의 초라함인지 구별도 가지 않는)에 대한 인식이다. <바빌론의 탑>에서 광부들은 하늘의 천장을 파내는 행위에 대해 야웨께서 어떤 반응을 보이실지에 대해 걱정한다. 그러나 야웨는 기뻐하지도 분노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주인공 힐라룸이 하늘의 천장에서 어떤 종류의 ‘무의미’를 발견함으로써 거기에서 ‘숭고’가 발생한다. <지옥은 신의 부재>에서 닐 휘스크가 자신의 목적을 달성했다면 그는 어떤 불변의 법칙을 발견한 것이며, 거기에서 ‘숭고’가 발생했을 것이다. 그러나 테드 창은 그런 식의 숭고를 배격하고 닐이 법칙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결말에서 ‘숭고’를 보여준다.



여기에서 그가 점하고 있는 메타SF적인 위치가 다시금 드러난다. 그간 SF 소설들은 과학이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 것인지, 혹은 불행하게 만들 것인지에 은 의견을 교환해 왔다. 과학기술에 의한 유토피아를 그린 최초의 작품은 근대철학자 베이컨이 쓴 <뉴 아틀란티스>였다. 그후 많은 SF 작가들은 그의 의견에 찬성하거나 반대하거나 했다. 그러나 ‘분노하지도 기뻐하지도 않는 신’은 ‘유토피아도 디스토피아도 아닌 과학’과 일맥상통하지 않는가! 유토피아나 디스토피아는 똑같이 과학의 힘에 경도되었다는 점에서 공통된 지반을 가진다. 반면 테드 창의 ‘숭고’는 과학의 힘에 대한 경도가 아니라 과학의 한계의 지점에 대한 인식에서 나온다. 그런 점에서 그는 ‘SF-바깥’을 사유하는 SF 작가라는 명칭을 부여받을 수 있을 것이며, SF의 맥락을 떠나서도 근대를 떠나보낼 준비가 되지 않은 탈근대의 자식들에게 영감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이 서평이 길어진 것은 ‘테드 창’에 대한 것이 아니라 ‘테드 창이 아닌 것’에 대해 설명하는 것이 벅찼기 때문이다. 그의 중단편들은 한편 한편이 매우 흥미롭고 기상천외한 설정을 담고 있으니 부담없는 일독을 권한다. 번역은 깔끔하고 책 말미에 달려있는 작가와의 대담도 흥미롭다. 다음은 내가 개인적으로 매겨본 각 작품들에 대한 평점과 간략한 코멘트다.



<바빌론의 탑> : 짜임새가 좋았고, 주제가 잘 드러났다.
★★★★★★★☆ 7.5


<이해> : 강박증적인 화자의 자기기술이 일품이었는데, 타자로써의 ‘구세주’가 나오고 나서부터 짜임새가 좀 아니었다. 
★★★★★★☆ 6.5


<영으로 나누면> : 좀 아는 얘기라서 그런지 참신함이 떨어졌다. 게다가 이 이야기는 수학을 무력화시키는 어떤 수학적 행위에 대해 다루고 있는데, 아마 나는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수학을 좀더 높이 평가하게 될 것 같다. 진정한 무능은 그런 행위조차 스스로 할 수 없다는 것이다.  
★★★★★ 5


<네 인생의 이야기> : 짜임새는 좋았다는 말로도 부족. 감상도 잘 배어남. 이 소설집의 백미라고 칭할 만하다.
★★★★★★★★★ 9


<일흔두 글자> : 이거 판타지 아니라 SF 맞다.
★★★★★★★ 7


<인류 과학의 진화> : 나도 당신 의견에 공감한다. 하지만 너무 짧아서 더 주기는 좀...
★★★★★★☆ 6.5


<지옥은 신의 부재> : 나같으면, 교통사고랑 다를게 뭐람, 이러면서 살텐데.
★★★★★★★★☆ 8.5


<외모 지상주의에 관한 소고: 다큐멘터리> : NCA 회장이 학생회 애들보다 낫더라...
★★★★★★★☆ 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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