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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최규석, <불행한 소년> 비평

조회 수 12826 추천 수 0 2007.10.05 13:48:04
이 만화는 김규항이 만드는 어린이 잡지인 <고래가 그랬어>에 실린 것이라 한다. 나는 어린이도 아니고 학부형도 아니며 교육문제에 가장 큰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아니므로, <고래가 그랬어>를 본 일이 없다. 다만 그 기획 자체는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하려는 얘기는 잡지 자체에 대한 얘기는 아니다. 또 나는 최규석이라는 만화가에 대해서도 풍문만 들었지 그의 만화를 제대로 본 적은 없다. 다만 이런 식의 문제의식이 담긴 만화를 꾸준히 그리는 그의 시도 자체는 평가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내가 하려는 얘기는 만화가에 대한 얘기도 아니다. 나는 다만 이 만화에 한정지어서, 이 만화가 그렇게 훌륭한 만화가 아니며 따라서 (교육심리학적 잣대에서 본다면 어떨지는 나도 모르지만) 아이들에게도 그리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 같지 않다는 점을 간략히 지적하려고 한다. (만화가 인터넷에 퍼진 후로도 꽤 시간이 지나서야 이런 글을 쓰는 건 그 전에는 내가 비판의 포인트를 정확하게 잡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실 이 불행한 소년은 천사의 말을 듣지 않았더라도 덜 불행하게 살았을 조건을 지니고 있지 않다. 천사의 설득이 윤리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몽둥이를 들었을 때, 천사는 그가 폭력을 사용해봤자 더 큰 폭력에 당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그 말은, 옳다. 굳이 따지자면 한두번쯤은 덤벼보는 것이 그의 정신건강에 좋았을 것이다. 때릴 때 시원했을 것이고, 나중에 무리들에게 엄청나게 얻어터지면서도 뭔가 시원했을 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그 이상의 효력은 없다. 그러니까 이 만화는 문제를 엄청나게 단순하게 만들고 있으며, 필요이상으로 천사를 나쁜 녀석으로 몰아가고 있다. '불행한 소년'의 문제는 소외계층의 문제인데, 아이들에게 그 점을 분명하게 전달하지도 못하면서, 일종의 태도의 문제로 치환시키고 있는 것이다. 김규항은 이 만화를 변호하면서 이 천사를 '천사의 탈을 쓴 악마'라고 칭했는데, 나는 잘 모르겠다. '좋은' 조언자가 아니었다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최악의 조언자'였는지는 모르겠다. 악마 운운이 우스운 소리라는 것은 확실하다.


만일 그가 추악한 세상을 변혁시켜야겠다고 결심했다면, 개인 차원의 행동이 아니라 연대를 통해 사회문제를 인지하고 행동했어야 한다. 물론 그런다고 그의 삶이 물질적으로 나아지지는 않겠지만, 자신의 삶에 다른 식의 의미부여는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연대를 말한다면 그는 천사의 충고대로 많은 사람들이 조금씩은 불쌍하다는 점을 인지해야 한다. 하지만 소년은 천사의 충고를 납득하지도 못했고, 나중에 천사를 악마로 몰아가면서 아예 그 지점을 무시하고 있다. 자신을 괴롭히는 그들은 악하며 그들을 용서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기껏해야 불행한 소년이나 괴롭히면서 삶의 의미를 찾는 그들이 조금씩은 불쌍하다는 것도 사실이다. 이 만화가 정치적으로 가려면 소년이 자신을 괴롭히지 않는 조금씩 불쌍한 사람들을 찾아 연대했어야 했다. 하지만 만화는 소년이 가장 불행하다는 것만 언명하면서 끝난다. 그리하여 그는 천사를 죽이게 되는데, 이는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이가 자신이 죽일 수 있는 유일한 조그만 생명체를 죽이는 행동으로, 본질적으로 찌질한 일이다.


나 자신이 가장 불행하며 그 책임이 특정한 어떤 개체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세상의 추악함을 응시하는 방법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 만화가 전달하는 메시지는 진보적이지조차 않다. 마지막에 천사를 죽이는 장면이 심하게 거슬리는 것은 그 폭력 때문이 아니라 내용이 이상한 방식으로 점프해 버려서 보는 이가 그 폭력을 납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만화가 그리는 폭력은 약자의 더한 약자에 대한 폭력일 뿐으로, 전혀 교육적이지 않다.


사실 소년이 세상에 덤볐더래도 나아질 것은 없었을 것이기 때문에, 이 만화의 구조를 유지하면서 만화를 '말이 되게' 만드는 방법은 자살예찬론밖에 없다. 말하자면 삶의 특정한 국면마다 '불행한 소년'은 자살하려고 했는데, 천사가 조금만 더 참으면 좋은 날도 올 거라고 말렸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나중에 그는 천사에게 속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좋은 날은 결코 오지 않는다. 견디고 견뎌도 또 닥쳐오는 것은 불행 뿐이다. 이건 계급문제니까. 이러면 속았다는 게 말이 된다. 그래서 그는 천사를 응징한다. 그래봤자 그 폭력이 찌질하다는 점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지만, 하여간 이렇게 쓰면 말은 된다.


하지만 이 만화의 구조가 자살예찬론으로밖에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은, 이 만화가 그리 교육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고스란히 증명하는 것이다. 만화를 자살예찬론으로 바꿔도 문제는 남는다. 솔직히 나는 자살이 윤리적으로 비난할 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어령의 '자살' 비난을 보고라는 글을 통해 자살을 윤리적으로 비난하는 시도를 외려 비난한 적도 있다. 그렇더라도, 어른이 아이에게 교육한답시고 던져준 텍스트가 자살을 예찬하는 건 좀 그렇지 않은가? 그건 먼저 세상을 살고 있는 어른들이 져야할 책임을 회피하는 행동이며, 한마디로 말하면 예의가 없는 짓이다.


이모저모 따져봐도 나는 이 만화가 비교육적이며,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고, 사회문제를 의식하게 해주지도 못한다는 생각이 든다. 이 만화를 보고 끄덕끄덕하는 사람들의 '취향'은, 나로서는 이해하기 어렵다. 김규항의 옹호논변도 이해하기 어렵다.

하뉴녕

2007.10.09 12:42:42
*.46.105.46

애잡는 짓이죠. 그리고 왠지, 진짜 부르주아지들은 그런 짓 안 하고 있을 거라는 예상입니다. 더 이상은 생각이 없습니다. 지금 관심사가 거기까지 안 가네요.

앙겔루스노부스

2007.10.12 22:53:49
*.237.161.181

한윤형님의 입장을 좀 거들어 보자면, 격언이라는 것이 갖는 부조리가 단적으로 드러난 만화라고 할 수 있을것 같습니다. 격언은 그것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고, 그것을 보다 강렬하게 전달하기 위해 부득이하게 현실에 대한 단순화를 수반하게 되죠. 그러다 보니 필시 모순에 빠지기 마련... 아는것이 힘일까요, 모르는 것이 약일까요? 둘다일수도 있고, 둘다 아닐수도 있지만, 적어도 두 격언이 모두 유통되고 있는 상황에서 저 격언들은 상대의 입장에 대해 호도하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고 봅니다.

제가 격언이나, 속담, 명언류의 것들을 아주 싫어하는 이유가 이것이기도 하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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