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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뒤늦은 5.16 기념(?) 포스트

조회 수 5786 추천 수 0 2011.05.18 13:04:30

(어찌 하다보니 5.18에 5.16 얘기를....ㅎㄷㄷ 그런데 5.18에 대해서는 별로 할 얘기가 없다. 너무 명백한 상황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사실 "5.16이 쿠데타냐 혁명이냐"란 질문은 보수언론의 표제 뽑기를 위해 붙여진 것에 불과하지, 그렇게 의미있는 질문은 아니다. 그러나 '박정희'와 '박정희 시대'가 한국인들에게 의미가 없다고 할 수는 없을 거다. 누구처럼 "21세기엔 그런 얘기하지 맙시다."라고 '금지'시켜서 해결될 문제는 아니다. 



이것은 정치토론에 관심이 많은 비전공자의 '정리'이므로 그냥 하나의 관점으로 받아들여주시고 오류나 이견이 있을 경우 마음껏 태클을 걸어주시기 바랍니다.  


일단 책장사(?)부터.



한국인들에게 박정희라는 인물은 한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마법의 키워드다. 그를 어떤 식으로 평가하든 현재의 대한민국을 구성하는 많은 부분이 그의 유산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박정희 찬양자들은 그 덕분에 오늘날 우리가 먹고 산다고 말하고 그가 물려준 폐해는 후임자들이 충분히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이라 이야기한다. 한편 박정희 비판자들은 한국 사회의 모든 구조적 문제를 그의 탓으로 돌리면서, 그의 성취는 다른 이가 그 자리에 있었더라도 가능했던 것이라고 주장한다. 박정희를 둘러싼 시민들의 정치평론은 본질적으로 이 두 가지 구전 설화의 대립이다. 심지어 연구자들조차 두 설화의 틀에서 자유롭지 않다. <안티조선 운동사>, p28




1) 박정희는 친일파가 아니다. 당신이 '친일파'란 말로, 해방 이후 신생 공화국인 대한민국에서 마땅히 처벌받아야 했던 제국주의 부역자를 의미한다면 말이다. 박정희는 반민특위 기준에 들어갈 만한 사람이 아니었고, 반민특위 기준이 다소 느슨했다 가정한다 하더라도 신생 대한민국이 설정할 수 있었던 처벌가능한 친일파의 범주에 들어가지는 않는 사람이다. 


만주육사 2기생 -> 졸업후 일본 육사 3학년 편입 -> 관동군 소위 경력이 그 자체로 처벌대상이 되기는 힘들다고 봐야 한다는 얘기다. 다만 박정희가 만주에서 독립군을 때려잡았다면 이는 계급과 상관없는 얘기가 되지만, 그랬다는 일부의 증언에도 불구하고 당시 만주에 활동했던 독립군 부대는 없었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박정희가 독립군을 때려잡으려 다녔다는 증언은 박정희가 관동군 내 독립운동 분파 안에 속했다는 증언과 마찬가지로 신빙성이 부족하다. 


만주육사에 입학하기 위해 혈서를 썼는지 안 썼는지 문제가 중요하지는 않은 것 같다. '범죄'로서의 친일파를 단죄하려면 과정보다는 결과가 중요할 테니까. 다만 진보적 학자들이 흔히 '혈서론'을 받아들인 것은, 그것을 주장한 사람이 극우논객 조갑제였기 때문에 의심없이 받아들였기 때문이지 특별히 박정희를 흠집내기 위해 노력한 것은 아니다. 


물론 '혈서 사건'(요즘 진위여부가 불확실하다고도 하는)과 그후의 에피소드들을 결합하여, 박정희의 의식세계가 천황제 하 일본군인의 그것이었다라고 주장하는 문맥에서 그를 '친일파'라 부르는 것은 가능하다. 한홍구가 <대한민국사>에서 주장하는 바도 그것이다. 다만 그럴 때는, "박정희는 친일파"란 주장을 반복하는 이 설의 지지자들이 "해방 후 처벌받았어야 할 놈이 어떻게 대통령이 되어 가지고..."라는 식으로 발화하는 것에 대해 동조해서는 안 된다. 이 '친일파'란 말이 그 '친일파'란 말과는 좀 다르다는, 그런 해석상의 문제를 제기해야 하는 것이다. 한국인들이 이런 구별에 별로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소위 진보개혁 세력의 지지자들이 가진 편견을 깨뜨리려면 나처럼 서두에 "박정희는 친일파가 아니다."라고 한번 언명해 주는 것이 좋다.  


또한 박정희에 대한 일본 제국의 영향력을 강조할 때에도, 그에게 큰 영향을 미친 것이 일본 본국보다는 만주국이란 사실이 이해되어야 한다. 만주국은 특이한 나라였고, 만주군관학교의 교관들은 조선계 학생들에게 "일본은 끝났으니 그대들은 조선의 독립을 위해 노력하라."고 말하기도 했다고 한다. 물론 그들의 의도는 일본에서 '진정한 군국주의'를 하고 싶었는데 그게 좌절(?)당해서 조선인들에게 그 '진정한 군국주의'를 실현해보라고 주문한 것이지만. '만주국' 경험은 정치군인으로서의박정희의 인생과 제3공화국 이후 한국의 경제정책을 규정한 것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2) 박정희는 군대 내의 남로당 조직을 관리하는 군사부책 이재복의 직계였다. 남로당 내에서 꽤 높은 위치였다. 그러나 박정희는 기질적/사상적으로 공산주의자가 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가 남로당에 들어온 건 좌익이 득세할지도 모른다는 판단에 따른 기회주의 + 형 박상희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 때문이라고들 한다. 박상희는 (여운형이 만든) 건준 구미지부장이었는데, 46년 대구폭동 때 경찰에게 살해당했다. 박정희의 남로당 전력을 악마화하려는 우익 안티들은 박상희가 폭동을 주동한 빨갱이라고 욕하기도 하나, 사실 박상희는 군중의 폭도화를 방지함으로써 우익 유지들로부터도 신임을 얻은 능력자였다 한다. 여하튼 박정희는 숙군 수사에 걸려 구속되자 자술서를 죽죽 써내려가며 남로당의 동지들을 밀고함으로써 목숨을 건졌다. 다만 그가 다시 군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밀고' 때문만은 아니며 만주군관학교의 인맥도 있고 유능한 군인으로 인정도 받았기 때문이다. (유능한 군인으로 인정받지 않았다면 겨우 목숨이나 건지고 군에서 쫓겨났을 것이다.) 그는 사형에서 10년형으로 감형받았고, 형집행을 면제받고 정보과에서 문관으로 근무했다. 그리고 6.25 전쟁 발발을 통해 더 빨리 복직되었다.


'빨갱이로 몰려 죽은 민간인' vs '형집행을 면제받고 살아남은 박정희'를 비교한다면 박정희의 생존이 불공평하다고 느낄 수는 있다. 사실 그런 느낌은 정당하다. 그러나 해방 이후 좌익활동의 시대적 타당성이나 실존적 고민 등을 이해해달라고 말해야 하는 진보주의자들의 입장으로 "그는 죽었어야 할 인물"이라고 말하는 게 타당한 일인지는 잘 모르겠다.


3) 5.16 주체세력들은 자신들이 4.19 혁명을 계승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정신세계가 '정치군인'이었던 박정희는 언제나 쿠데타를 노리고 있었고, (주로 부산정치파동이나 조봉암 사형 등 이승만 정권의 폭압적 통치가 가해졌을 때 계획을 짜기는 했다.) 4.19 혁명 당시 시위대 때문에 쿠데타 기회를 놓쳤다며 시위대를 욕했던 적도 있다. 물론 나중에는 4.19 혁명의 계승이라고 줄구장창 말했고 스스로도 그렇게 믿었을 가능성이 있다. <박정희 평전>을 쓴 전인권의 해석을 따르자면, 박정희는 자신이 몇년 후에 무슨 생각을 하고 무슨 행동을 할지 스스로도 예측할 수 없는 위인이었다.


4) 김종필이 스스로 5.16을 4.19를 계승한 것으로 주장한 것엔 대충 이러한 맥락이 있다. 4.19 이후 군 내에서도 3.15 부정선거에 가담하고 부정부패한 고위장성들을 축출해야 한다는 식의 '정군운동'이 벌어졌다. 박정희와 김종필이 주도한 이 운동은, 송요찬 참모총장을 물러나게 하기는 했지만 그들 무리의 구속과 예편을 종용했다. 정군운동이 기대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박정희가 그를 따르는 청년 장교들과 쿠데타를 결의한 것이 5.16의 전모였다. 박정희는 소규모 그룹의 리더였지만, 군부 내에서 정치화된 거의 유일한 그룹의 리더였고, 그가 쿠데타를 일으키자 윤보선 대통령과 장도영 참모총장 등은 어이없게도 이 쿠데타에 편승하여 정치적 이익을 누리려는 기회주의를 보였다. 그래서 쿠데타군은 쉽사리 정부를 전복했고, 이는 김종필의 인터뷰에서도 보이듯 쿠데타 세력이 자신들의 행동을 사후정당화하는 근거로 작용했다.


5) 김동춘은 "5·16은 4·19 혁명 이후 비등했던 민주화, 민족통일 요구에 대해 체제 자체의 위기를 느낀 보수세력의 방어적 쿠데타"라고 성격규정을 했으나, 당시 군부의 정치성향을 '보수세력'이라 간단히 규정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또 군부를 대표하지도 못했던 쿠데타 세력의 정치적 성격도 참 난감했다. 역사는 톱니바퀴처럼 진행되었다기 보다는 우연적이었다. 군부세력은 빈민에게 쌀을 나눠주고, 대낮에 춤을 춘 남녀를 구속하고, 상위 재벌 그룹 총수들을 부정축재 혐의로 일단 구속했다.(삼성의 이병철만 일본에 있어서 피했다.) 이정재 등 정치깡패를 잡아 유치한 거리행진을 시킨 것은 유명한 일이다. 박정희를 옹호해야 할 뉴라이트 역사학자 이영훈은 '군부세력의 초기 경제정책은 어설픈 부분이 많았지만 곧 시장주의적으로 흘러갔다.'라는 식으로 서술한다.


어쨌든 확실한 것은 군부세력이 원래부터 보수세력이었다기 보다는 쿠데타 이후 권력을 장악하면서 보수세력이 되었단 것이다. 군정의 초기 조치들은 농촌 냄새 물씬 풍기는 얼치기 민중주의자의 그것이었다. (자유행성동맹의 구국군사회의??) 사실은 5.16 당시 지식인 사회조차 '혁명'을 반겼다. 장준하도 기대감을 드러냈고, 민족일보 조용수는 박정희가 남로당 출신이란 것만 듣고 기쁨의 사설을 썼다. (물론 그는 군정 출범 이후 사형당한다.) 선후관계를 무시하고 마치 한국을 일관되게 통치한 기득권세력이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설정하면 곤란하다. 제3세계에선 군부가 가장 잘 교육받은 집단이고, 농민 자제들도 많이 받아들이기 때문에 일종의 민중적인 정서를 띄는 경우가 흔하다. (언젠가 친 개드립인데, 한민당의 지주들과 군부세력의 변별은, 은하제국의 브라운슈바이크 등 문벌귀족 세력과 라인하르트를 대표로 한 군벌세력의 그것으로 비유될 수도 있다.) 50년대 말 60년대 초엔 제3세계에 쿠데타가 유행처럼 번져나갔는데, 5.16도 그런 시대의 산물이다. 


김동춘은 5.16을 나세르의 쿠데타와 비교한 김종필의 발화를 부정하는데, 그걸 부정한다는게 크게 의미가 있는 일인지는 모르겠다. 제3세계에서 영미에 맞선 나세르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한국에서도 군부쿠데타에 우호적인 분위기가 생긴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5.16은 나세르의 인기에 편승했다고도 볼 수 있다.


5.16 이전의 박정희는 아마도 나세르를 좋아했을 것이다. 쿠데타광들은 좌우를 가리지 않고 쿠데타를 일으킨 선각자들을 무조건 존경하기 때문이다. 박정희가 이집트 같은 곳에 태어나 쿠데타를 일으켰다면, 여건상 경제발전을 이루기는 힘들었더라도 나세르식의 자주적 사회주의를 실현하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그 반대의 가정도 마찬가지로 성립한다. 그러니 '반제 민족주의 독재자'들을 굳이 더 괜찮은 놈들로 분류할 필요가 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렇게 치면 카다피야말로 '나세르 라인'이다.


6) 61년에서 63년 사이 묘하고 이해할 수 없는 정치적 과정을 거쳐 민정이양을 약속한 박정희는 스스로 대선에 출마한다. 이 선거는 오늘날의 상식과 많이 벗어난 선거였다. 윤보선은 귀족 집안의 늙은 정치인의 상징처럼 여겨졌고, (윤보선 본인은 친일파가 아니었지만 그의 집안엔 거물급 친일파들이 득시글했다.) 박정희와 공화당은 혁신을 바라는 젊은이들을 대변하는 정당처럼 여겨졌다. 언론은 '진보 여당'과 '보수 야당'의 대립이라 칭했다.


노정객 윤보선의 선거 전략도 실패였다. 박정희가 '민족'을 위한 자유민주주의가 필요하단 출사표를 던졌을 때, 윤보선은 박정희가 빨갱이이며 공화당이 북한 간첩의 공작금으로 만들어진 정당이라 주장했다. 박정희가 이에 대해 메카시즘적 공세를 중단하라고 발표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그는 언론들이 자신의 남로당 전력을 보도하지 못하도록 잘 막았고, 오히려 한국 전쟁의 직접적인 피해를 받지 않았으면서 '좌익 색출'의 고난을 겪은 영호남 농촌 지역에서 몰표를 받는 기염을 토했다. 윤보선 측은 유세 현장에서 '영남 지방에 빨갱이가 많다'는 자폭 발언을 하면서 박정희가 '영남 지역주의'를 만들어가는 과정에 전적으로 협력했다. 결과는 역대 최저인 15만표 차의 박정희의 승리. 46.6% 대 45.1%. 우연이 필연이 되고 운명이 되는 순간이었다.


사실 쿠데타 당시 이런 상황이 결정되어 있었던 건 아니다. 쿠데타 당시 많은 이들이 수수방관 했던 건, 쿠데타 자체가 'Winner takes all'을 보장하는 방책은 아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5.16의 지지기반은 불충분했고, 권력을 쥔 이들은 연쇄적인 쿠테타를 통해 교체될 가능성이 컸다. 사실 이것이 제3세계 군부 쿠데타 이후의 일반적인 패턴이었다. 5.16 이후 십여 차례가 넘는 실패한 역쿠데타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그러나 어떤 종류의 노력과 운의 작용으로 인해, 박정희는 살아남았고 2년 후 인민의 인준을 받았다. 


7) 1963년에서 1971년의 시기를 그 이후와는 구별해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물론 박정희가 63년 대선에서 졌다고 하더라도 순순히 권좌에서 내려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건 설령 그 개인이 그렇게 하고 싶다 하더라도 권력의 속성상 안 되는 문제다. 그리고 그렇게 되었다면 계속 '독재'를 했건 혹은 민중혁명이나 역쿠데타로 인해 종말을 맞이했건 우리가박정희를 논쟁의 대상으로 삼을 일도 없었을 거라고 본다. 문제의 핵심은 이 8년 동안 박정희가 인민의 의지를 어느 정도 대변했다는 데에 있다. 


'민주주의'란 측면에서도 이 시기는 1980년대와는 달랐다.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비교이고, 많이 부족하기는 했지만, 65년 한일협정 반대 시위에서 보여지듯 대규모 시위를 통한 의사표현이 가능했다.  박정희는 시위를 주도한 대학생들을 청와대에 불러들여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시간이 조금 지난 다음엔 "학생들의 시위 덕에 우리가 협상에서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협상이 끝났으니 그만 반대하고 집에 돌아가라."고 말하기도 했다. (박정희는 머리 속에 민주주의의 개념이 아예 없었고 이처럼 마키아벨리즘적으로 사고했다. 비교할 만한 사건은, 비슷한 시기 월남파병 정국 때 박정희가 대미 협상력을 키우기 위해 차지철을 불러 파병반대 국회의원을 조직하라는 식의 정치쇼를 펼친 것이다.) 의회에는 반대당이 있었고, 영수회담이 있었으며, 언론은 처음부터 통제하려 했으나 아직은 장악이 끝나지 않았다.  


이와 같은 '박정희의 리즈시절'은 두 사람에 의해 작살났다고 생각한다. 1970년 11월 전태일의 분신, 그리고 1971년 연두 기자회견에서 '전태일 정신 구현'을 말한 김대중에 의해. 두 사람에 의해 박정희는 '인민의 지도자'라고 우길 수 있는 처지에서 그냥 독재자로 강등당하게 된다.


8) 잠깐 '박정희 경제발전' 논쟁의 일단을 짚고 가자. 민주노동당 의원이었던 최순영은 "박정희 시대 경제발전은 열심히 일한 노동자의 공로"란 식으로 말한다. 유신독재를 끝장낸 YH의 여공은 사실 그렇게 말할 자격도 있다. 그러나 장하준이 말하듯, "자본주의는 원래 노동자를 착취하지만 그런데도 경제성장을 못한 나라도 많다." 당시 국제정세와 미국의 경제정책 등이 한국의 수출지상주의 정책을 도와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환경에서도 경제성장을 못한 나라도 있다. 장하준은 가령 필리핀의 사례를 든다.


박정희는 운이 좋았다. 그와 김일성을 비교하는 건 김일성에게 억울한 일이다. 객관적인 조건 자체가 달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난한 누군가가 부자가 되는 사건은, 운과 능력과 노력이 모두 필요한 그런 것이 아닌가? 그런 운을 갖추었는데도 능력과 노력이 없어 부자가 되지 못하는 사람이 숱하다. 또한 능력과 노력을 갖추었는데도 운이 없어서 부자가 되지 못하는 사람도 숱하다. 김일성은 운이 달랐기 때문에 그 능력과 노력을 박정희와 비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박정희가 처한 조건을 가지고도 그런 경제성장을 못했을 가능성은 많다. 언젠가 강준만이 박정희의 '공과'를 논할 때 말한 것처럼, 우리는 박정희의 공과 논쟁을 '그보다 훨씬 형편없는 독재자가 들어섰을 가능성'을 겸허하게 인정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경제정책 문제만 따지더라도, 자본가들의 소비를 엄격히 규제하고 산업설비에 재투자하도록 국가가 강제하지 않았다면 노동을 착취한 이윤은 스위스 은행으로 흘러들어갔을 가능성도 높다. (물론 국부유출이 없었던 건 한국의 특수성이라기보단 동아시아의 특수성으로, 조금 다른 해명이 요구되는 지점이긴 하다.) 


다시 최순영의 말에 주목해보자. 동시대 한국의 노동자들은 필리핀 노동자보다 훨씬 열심히 일했을 것이다. 왜 그랬을까? 개인적인 욕망과 사회적인 독려 때문에? 만일 그랬다면 오히려 박정희는 그러한 인민들의 욕망을 대변한 정치가가 된다. 국가가 목표설정을 위해 권리를 박탈하고 강제로 끌어다 쓰는 면도 있지 않았을까? 물론 그랬을 것이다. 만일 그랬다면 박정희는 부작용을 감내하면서 경제성장을 추진한 사람이 된다. 한 시대의 경제발전을 지도자 한 사람의 공으로 돌리는 신화적 상상력은 비판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노동자 공로론'으론 '박정희 공로론'을 뒤집기가 힘든 것이 사실이다. 


진실은 무엇이었을까. 직관적으로 볼 때, 그 사이 어딘가였을 게다. 박정희는 김일성에 비해 경제성장을 추진할 좋은 여건에 놓여 있었다. 한편 박정희는 김일성에 비해 정치적으로는 나쁜 여건에 놓여 있었다. 항일투사의 정통성으로 공산주의 국가의 지도자가 된 김일성은 "네가 왜 통치하느냐?"란 질문을 받지 않았다. 박정희는 그런 정통성도 없었고, 아직까지는 자유민주주의의 형식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질문에 대해 답변해야 했다. 그러한 정치적 악조건은 그가 더욱 경제성장에 집착하도록 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북한의 유일독재체제는 야당·학생·언론의 강력한 도전으로 인한 내부갈등이 초래하는 남한에서의 국가비전 길항, 업적경쟁, 힘의 폭발적인 분출을 감당할 수 없었다. 즉 산업화에 있어서 민주화 세력의 기여는 결정적이었다. 민주화세력과의 경쟁은 북한과의 체제대결에 더해 박정희 정부로 하여금 산업화에 생사를 걸도록 압박했다. 즉 한국에서 산업화와 민주화는 시차적으로 이뤄졌다기보다 상호 길항작용을 하며 거의 동시적으로 이뤄졌으며, 공과 역시 나눠 가져야 한다."라는 박명림의 말은 그런 점에서 정확하다. 


인민이 동의하지 않는다고, 야당이 선거에서 이긴다고 해서 박정희가 동의하진 않았을 것 같다. 63년 선거에 졌다고 해서 권좌에서 내려가지 않았을 거란 얘기와 마찬가지다. 그러나 63년에서 71년까지는 그러한 불일치가 현실화되지 않았다. 민주화세력과의 갈등이 있었고, 그 갈등에서 승리하기 위해 경제성장이란 인민의 욕구를 대변했으며, 그런 차원에서 일정부분 인민의 지지를 얻었다. 말하자면 국가가 나가는 길이 '합의'되었다는 환상이 지배했던 시대였다. '일하는 정부'와 '불평하는 국민'의 이분법이 작동했던 시대였다. 그 환상을 깨버린 것이 전태일이었다. 합의한 적이 없는 이들, 목소리를 낸 적 없고 몫이 없는 이들을 대변하며 불타오른 것이다. 그리하여 이 시대가 파열음을 내며 무너진다. 


9) 박정희가 윤보선을 선거에서 이긴 것이 '진실'이라면, 그만큼은, 혹은 그 이상으로, 김대중이 박정희를 선거에서는 이겼다는 것이 '진실'이라 생각된다. 94만표차가 말해주는 것은 노골적인 부정선거일 뿐이다. 국가예산의 10%를 대선자금으로 쓰고 "문둥이는 문둥이를 찍어라."며 지역감정을 노골적으로 선동했음에도, 박정희는 안심하지 못하고 개표부정을 저질렀다. 전남의 무효표가 서울의 무효표보다 두 배 많았다. 김대중의 장충동 유세 때 서울시민 500만 중 100만명이 몰려들었다. 다른 방식의 경제성장에 대한 욕구가 분명히 있었고, '닉슨 독트린'이라는 안보환경의 변화는 다른 방식의 안보/외교정책을 가능케했다. 물론 박정희는 오히려 이것을 안보의 위기로, 국가의 위기로 받아들였다. 진중권이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에서 예리하게 갈파한대로 독재자들은 "자신들이 위급해질 때 국가가 위급하다고 우기는 경향이 있다."


박정희는 머리속에서 오직 김일성만이 자신의 경쟁자라고 여겼다. 그리고 인민이 아니라 민족사가 자신을 평가할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그의 뇌내망상을 넘어 현실세계에 김대중이란 경쟁자가 나타났고, 그는 박정희로부터 인민의 사랑을 도둑질했다. 상처받은 박정희는 히키코모리가 되었다. '인민의 지도자'라 우길 수 있는 처지에서 그렇고 그런 독재자가 되었다. 1970년대가 그렇게 시작되었다.  


10) 어떤 선배들은 1970년대의 권위주의 체제는 1980년대의 폭압적 파시즘 체제보다는 낭만적인 구석이 있었다고 한다. 또 다른 선배들은 1970년대는 1980년대에 못지 않게, 혹은 그 이상으로 무서웠다고 한다. 상대평가를 한다면 1980년대는 덜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1970년대와 유신은 1980년대의 신군부를 낳은 시대다. 박명림은 어딘가에서 우리는 1980년대엔 박정희가 키운 군부를, 1990년대엔 박정희가 키운 재벌을 상대해야 했다고 지적한다. 박정희 살아 생전 소비를 규제당하고 투자를 강제당하던, 그래서 사실상 공기업의 역할을 했던(장하준 표현) 재벌들은 전두환 시기 어느 시점부터 통제의 대상에서 벗어나 90년대와 IMF 구제금융 시대를 거쳐 한국 사회를 좌지우지하려는 권력이 되었다.


1970년대는 민주주의의 측면에서 논할 것은 없다. 말기에 인혁당 사건 등 인민을 겁주기 위해 별 짓을 다했지만 결국엔 역부족이었다. 하긴 사람을 죽여도 '간첩'이라서 잡아 죽였다고 선전해야 했으니 "나 간첩 아닌데?"라고 반응할 학생들에게 그 폭력 자체가 허무했다. 간단히 경제정책만 논하고 지나가자.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은, 1970년대의 경제적 성과는 1960년대보다 못하다고들 한다. 중화학공업 육성하겠다고 했지만 손대는 것마다 실패했고, 과잉중복 투자를 통해 경쟁력이 떨어졌다는 것이다. 물론 몇몇 산업이 훗날 성공하여 한국 경제에 기여하기는 하지만. 이에 대해 반론하는 건 장하준이다. 장하준은 과잉중복 투자란 건 없었으며, 원래 투자라는 게 열에 일고 여덟은 망하는 아싸리 판이고 그럼에도 투자해야 미래를 담보할 수 있는 거라고 주장한다. 양자의 의견에 일리가 있겠지만 확실한 건 1970년대 말 박정희 체제는 그 스스로 성장동력을 갉아먹는 지경에 이르러 있었다는 거다. 소련에서 그랬듯, 북한에서 그랬듯, 후발주자가 강력한 국가를 통해 추진하는 경제성장은 20여년이 한계라는 얘기도 있다. 1970년대 말은 스태그플레이션의 상황이었다. 그는 스스로에게 부여한 역사적 사명을 더 이상 완수하지 못할 처지에 이르렀을 때 역사에서 퇴장했다. 부산과 마산에서 민간인 학살이 없었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며, 인민이 스스로 독재자를 끌어내릴 기회를 가지지 못한 건 불행한 일이었다.


11) 박정희에 대해 양가감정을 가지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정치적 적대자라 해서 특별히 그의 인생을 '찌질이'의 그것으로 재구성할 필요도 없다. 사실 박정희는 극우파들에게도 양날의 검이다. 하나는 그가 이승만이 국부라는 사실을 결코 인정할 수 없었다는 점에 있고, 둘은 '청년 박정희'의 정신세계가 오늘날의 정치판에 구현된다면 한나라당과 민주당을 가리지 않고 '구정객'들을 싹 쓸어 버리려고 할 것이란 점에서 그렇다.


그런 점에서, '박정희 향수'가 과연 군부독재자를 예찬하던 이들의 세뇌공작에서만 발생하는 것인지에 대해 의문을 가질 필요가 있다. 오히려 핵심은, 우리가 '개혁'에 대해 가지고 있는 판타지가 여전히 구정객을 싹 쓸어버리는 박정희의 그것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 아닐까. 오늘날 누구도 군부를 통해 그 목적을 달성하려는 시도를 하지는 못하지만, (조갑제의 주둥아리를 제외하고...)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상대방에 대해 그렇게 하고 싶어 하고 많은 국민들은 한나라당과 민주당 둘 다를 그렇게 하고 싶어 한다. 평범한 대중의 '박정희 향수'는 두 가지 차원에서 결합되어 있다고 볼 수 있는데, 하나는 '정치적 리셋'에 대한 강렬한 욕망이요, 다른 하나는 63년부터 71년까지의 '민주주의' 시절에 대한 향수라 할 수 있다.(유신시대에 늘어놓은 궤변과는 다르게, 이 시대의 민주주의를 '한국적 민주주의'라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동양적 위정자와 문사의 판타지가 넘실 거리던 시대.)


즉 우리가 민주주의나 개혁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이해의 깊이가 '박정희 향수'를 구성하는 것이지, '박정희 향수'가 스스로 무언가를 생산해 내는 그런 괴물인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사태의 결과인 '박정희 향수'에 분개하기 보다는, 우리가 민주주의와 개혁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이해의 깊이가 그 향수를 가진 이들로부터 어느 정도나 멀리 있는지 성찰해 보는 일이 필요할 것 같다.  


시만

2011.05.18 13:44:33
*.99.62.18

주지주의..(난 주지주의 좋아하는 편)

2011.05.18 21:22:23
*.132.162.169

굉장히 좋은 글이네요.

hwal-in

2011.05.19 00:30:34
*.49.242.29

와우. 감탄했습니다...

영남pd

2011.05.19 00:41:19
*.159.108.64

한윤형씨가 5.18에 대해서는 침묵하면서 박정희를 필요이상으로 재조명 하는 이유는
무의식적인 박정희에 대한 애정때문이겠죠.

한마디로 사회주의의 자유주의적 뿌리에 대한 인식이 결여된 열혈 영남 pd적 사고방식을 답습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김대중의 경제에 대해서는 카드대란과 신자유주의만을 떠올리는 님이 박정희에 대해서는 부정적 평가에 상응하는 긍정적 평가를 하지 않고 못배기는 것은 지적 균형을 맞추거나 비판적 의식이 발달해서라기 보다는 애향심 때문이죠.

김대중과 imf극복을 연결시키데는 거부감을 느끼면서 박정희와 경제성장을 연결시키는데는 너무나도 자유로운 나머지 그걸 연결 못시키는 진보 진영내의 "철모르는 과격 반 박정희 주의자"들을 꾸짖는 욕망을 견디지 못하는 이유는 논리적 정합성 때문이 아니라 그냥 경상도가 낳은 애국 영웅이자 "미제 카터"놈에 대립한 박정희 장군에 대한 애모의 마음 때문이라 할것입니다.

그러니 님은 앞으로도 강남 뺨치는 부동산 값을 자랑하는 울산의 노동귀족 타운에서 애들 고액과외비를 대기 위해 임금 투쟁하는 영남 맑스주의 노동귀족의 자유주의에 대한 이해가 결여된 바보 멍청이 같은 전체주의적인 반신자유주의 교조주의를 대변하시며 박정희를 끊임없이 재조명하고 노무현을 추억하며 폐기처분된 유시민에서 문재인으로 갈아타 차기 대통령으로 추대하시면 되겠습니다.

하뉴녕

2011.05.19 00:43:05
*.171.69.149

아 그래여?

ㅇㅇ

2011.05.19 00:47:09
*.168.28.72

ㅡㅡ;

영남pd

2011.05.19 00:50:34
*.159.108.64

한윤형/
군사 쿠데타의 법적 문제점에 대해서는 아예 거론 자체를 안하는것부터가 영남pd스러운거 아니겠습니까?

하뉴녕

2011.05.19 00:54:26
*.171.69.149

아 그럼 님은 쿠데타가 합법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나여??

영남pd

2011.05.19 01:00:16
*.159.108.64

박정희 재조명의 결과가 보수 우익이 박정희를 분칠하는 영역인 "친일파" "경제 성장" "쿠데타의 정치사회적 정당성"을 철저히 긍정하는 것으로 나타난다면 그 재조명을 지적 회의주의에 입각한 작업으로 볼수는 없는 것이죠.

즉 님은 보수 우익에 의해 박정희가 긍정 평가 받는 부분에 대해서는 전혀 회의를 하지 않고, 진보 진영에 의해 부당평가 받는 부분에 대해서만 재조명을 빙자한 뒤집기를 시도하고 있다는 겁니다.

하뉴녕

2011.05.19 00:59:42
*.171.69.149

아 그래여? 결과가 마음에 안 들면 지적인 작업이 아나게 되는 거네여?

영남pd

2011.05.19 01:01:48
*.159.108.64

자칭 박정희 재조명이 보수우익이 긍정하는 부분은 죄다 건드리지 않은 사실상의 박정희 분칠하기로 끝났다면 님이 그걸 지적인 작업이라고 우긴들 무슨 소용인가요?

회무십일홍

2011.05.19 01:09:34
*.104.123.110

좋은 글 잘 봤습니다.
박정희의 정치적 아들인 박근혜에 대한 평도 기회되면 부탁드립니다.

하뉴녕

2011.05.19 17:27:43
*.171.69.149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말씀하신 문제에 대해선, 박근혜 인물평은 아니고 2012년 대선 관련해서 야권이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에 대해서 써본 글로는 이것이 있습니다...^^;;

http://yhhan.tistory.com/1342

으흐흥

2011.05.19 01:25:36
*.205.71.223

내 저 양반 민주당 진성당원의 멘탈리티를 갖고 있다는데 백원 걸지... 애초에 더이상 논란이 되지도 않을 부분을 언급 안했다고 수구 편들어줬다고 징징징;; 고로 넌 영패주의자 징징징

징하다 정말...

cimen

2011.05.19 13:40:24
*.108.137.173

이번 포스트는 윤형님의 좋은 글들 중에서도 두드러지고 뛰어나네요.

저련

2011.05.19 18:08:35
*.239.104.51

이런 걸 조선일보에서 밀어주는 <한국현대사 학회> 같은데 투고해서 돈을 뜯어내야 하는 겁니다. ㅋ

하뉴녕

2011.05.19 20:28:54
*.171.69.149

중간에 김대중이 위인으로 나와서 힘들지 않을까요...ㅋㅋㅋㅋ 그들은 차라리 전태일을 띄울지언정 김대중을...ㅎㅎㅎ


은 농담이고, 논문이나 저서를 찾아 읽어보진 않았지만 좀 강하게는 신복룡이, 약하게는 박명림이 이미 하는 얘기들이 아닐까 합니다...

신형주

2011.05.21 18:48:58
*.42.51.39

역사에 대해서 거의 문외한인데, 요즈음, 한윤형님을 누가 소개해줘서, 주의 깊게 보고 있습니다.

[어쨌든 확실한 것은 군부세력이 원래부터 보수세력이었다기 보다는 쿠데타 이후 권력을 장악하면서 보수세력이 되었단 것이다. 군정의 초기 조치들은 농촌 냄새 물씬 풍기는 얼치기 민중주의자의 그것이었다.]

[선후관계를 무시하고 마치 한국을 일관되게 통치한 기득권세력이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설정하면 곤란하다. 제3세계에선 군부가 가장 잘 교육받은 집단이고, 농민 자제들도 많이 받아들이기 때문에 일종의 민중적인 정서를 띄는 경우가 흔하다. (언젠가 친 개드립인데, 한민당의 지주들과 군부세력의 변별은, 은하제국의 브라운슈바이크 등 문벌귀족 세력과 라인하르트를 대표로 한 군벌세력의 그것으로 비유될 수도 있다.) ]

(당연히) 전혀 듣도 보도 못한 관점이고 지식이어서, 굉장히 신선하게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자유행성동맹의 구국군사회, 브라운슈바이크, 라인하르트등의 은영전을 이용한 설명에서 뿜었습니다. 한윤형님ㅋㅋ

[박정희가 '민족'을 위한 자유민주주의가 필요하단 출사표를 던졌을 때, 윤보선은 박정희가 빨갱이이며 공화당이 북한 간첩의 공작금으로 만들어진 정당이라 주장했다. 박정희가 이에 대해 메카시즘적 공세를 중단하라고 발표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

[문제의 핵심은 이 8년 동안 박정희가 인민의 의지를 어느 정도 대변했다는 데에 있다. ]

[둘은 '청년 박정희'의 정신세계가 오늘날의 정치판에 구현된다면 한나라당과 민주당을 가리지 않고 '구정객'들을 싹 쓸어 버리려고 할 것이란 점에서 그렇다. ]

굉장히 충격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왠지 회사원 철학자 강유원씨가 우스갯 소리로 '이건 편견인데, 니체 좋아하는 사람들은 파시스트일 가능성이 높음요ㅎㅎ' 했던것도 왠지?! 떠올랐고요..ㅎ



[오늘날 누구도 군부를 통해 그 목적을 달성하려는 시도를 하지는 못하지만, (조갑제의 주둥아리를 제외하고...) ]

뿜었습니다.(ㅋㅋ)


덧)
아 맞다. 맞다. 꼭 이 한윤형님께 보여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본인의 '모에화'를 보는 느낌은 어떨까요...(혹시 이미 보셨으려나요?) 즐겁게 봐보세요. 데헷. 사랑합니다.(뭐?!)

http://rmflarmfla.egloos.com/1857244

하뉴녕

2011.05.22 05:24:47
*.171.69.149

근데 전 니체 좋아합니다. (웃음)

뭐 니체만으로 정치평론을 하려고 하지는 않지만요...

모에화 짤방은 제가 실시간을 봤습니다....ㅡ.,ㅡ;;;

방문 감사드립니다 :)

드래곤워커

2011.05.22 16:22:52
*.234.105.202

항상 한윤형님의 균형잡힌 시각에 감탄하게 됩니다.
재작년 혈서를 쓰고 들어갔던 안 쓰고 들어갔던 무슨 상관이냐고 했다가 수꼴로 몰린 기억이 납니다.
역사교육에서 반일 이데올로기를 강조한 게 박정희라는 건 모르고 ㅉㅉ...

Q

2011.05.30 19:11:35
*.132.76.133

어이 수꼴 너 아직도 여기서 찌질대냐? 공부해임마.

개쌍도

2013.08.16 20:19:42
*.218.160.92

전형적인 쌍도좌좀 마인드구나 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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