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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갈등을 드러내기 위해

조회 수 1165 추천 수 0 2007.03.06 09:28:02
한홍구의 <대한민국사>를 보면 “보수와 수구를 구별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식의 말이 자주 나온다. 내 기억엔, 이런 식의 어법을 한국에 처음 들여온 사람은 홍세화였다. “보수와 극우를 구별해야 한다.”는 말은 ‘좌파 홍세화’가 ‘우파 강준만’의 작업을 의미있는 것으로 인정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었다. 여기서 조선일보는 극우 헤게모니의 성채가 되고, 민주당은 보수주의 정당이 된다. “극복대상과 경쟁대상을 구별해야 한다.”는 말 역시 이런 맥락에서 나왔다. 갑자기 유행한 프랑스어 똘레랑스의 맥락 역시, 앵똘레랑스를 일삼는 극우파를 제외한 다른 모든 정파들은 극우파를 극복하는 지점에서는 연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극우파를 정의할 수 있는 손쉬운 방법은 자유주의자들의 행위의 준칙인 ‘사상의 자유’를 탄압하는 세력이라는 것이다. 자유주의자를 참칭하는 수많은 이들과 구별되는 유일한 자유주의자인 고종석은 어느 칼럼에서 극우파와 보수주의자를 구별하는 ‘가장 미더운 시금석’은 국가보안법 폐지에 대한 입장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사상의 자유를 인정하지 못하는 이들을 가장 크게 비판하는 것은 민주주의 체제를 옹호하는 사람의 의무이기는 하다.


하지만 다른 사회문제는 싸그리 무시하고 반-극우동맹만을 부르짖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극우파에 대한 정의에서도 볼 수 있듯이 반-극우동맹은 결코 사회경제적인 문제를 제기하는 정치행위가 되지 못한다. 비록 국가보안법이 남아있기는 하지만, 국민의 정부가 사상전향서 제도를 폐지하고 참여정부가 준법서약서 제도를 폐지하는 등 이 부분의 문제는 뚜렷한 진전이 있다. 더구나 ‘사상의 자유’ 문제는 원칙적으로는 자유주의자와 좌파가 모두 제기해야 하는 문제이기는 하되, 전술적으로는 자유주의자가 자신의 정당성을 강변하기 위해 우선적으로 제기해야 하는 문제다.


비교적 숫자가 많은 자유주의자들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자유주의자들이 문제해결의 의지가 없을 때 한줌도 안 되는 좌파들이 국가보안법 폐지를 요구한다고 해서 상황이 반전되는 것은 아니다. 단식을 하려면 자유주의자들이 해야 한다. NL들이 단식해봤자 사람들은 국가보안법 폐지했을 때 혜택을 받는 이들이 누구인지 알 수 있을 뿐이다. 남의 사상의 자유를 위해 자유주의자들이 싸우는 것이 원칙에도 부합하고, 사람들에게 감동도 준다. (NL정당으로 전락한 민주노동당의 과거 ‘국보법 철폐 올인’에 대한 비판은 내 글 <박경순과 ‘국보법 올인론자’들에게>를 참조할 것.) 


반-극우 전선이란 것이 존재한다는 것은 잊어버리지 않더라도, 현존의 것과 다른 방향의 사회경제정책을 제기하는 일을 게을리 하거나 부인하지 않을 수 있다. 지금 한국에는 오직 한가지 방향의 경제정책, 현존하는 경제정책이 있을 뿐이므로, 이런 일의 중요성은 더욱 커진다.


‘보수’와 ‘수구’를 구별해야 한다는 말은 가령 (그렇게 얘기하는 사람들이) 보수정당(이라 주장하는) 열린우리당과 (그렇게 얘기하는 사람들이) 수구정당(이라 주장하는) 한나라당 사이에 이미 정립된 노선의 차이가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든다. 그러나 그런 것은 없다. 열린우리당 탈당 1호인 임종인 의원은 열린우리당이 지난 몇 년간 시행한 경제정책이 과거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의 대선공약이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노무현 대통령 역시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에 별다른 노선 차이가 없음을 말한 바 있고, 그것을 대연정 제안의 합리성의 근거로 활용하기도 했다. ‘보수’정당과 ‘수구’정당의 차이는 햇볕정책에서나 드러날 뿐이다. 햇볕정책 역시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긴 하나, 외교 정책 하나가 모든 종류의 정책을 대체할 수는 없다.


한홍구는 ‘보수’와 ‘수구’를 구별하자고 말할 때 정치인이 아니라 일반 대중을 염두에 두고 있는데, 이 부분에선 문제가 더 심각하다. 고종석의 ‘미더운 시금석’조차도 쓸모가 없기 때문이다. 한국사회는 자기 자신의 성향을 이념적으로 정립해 본 경험이 없다. 정치인들은 그나마 한나라당은 (고진화와 같은 소중한 예외를 제외하고는) 국보법 폐지를 반대하고 열린우리당은 국보법 폐지 및 개정을 추진하는 식으로라도 정형화가 되어 있지만 대중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송두율 구속에 동의하는 사람이 사회경제적으로는 강력한 복지정책을 요구할 수 있다. 반재벌 정서가 강해서 재벌개혁 정책을 적극 옹호하는 사람이 재벌을 혐오하는 것보다도 더 여성가족부를 혐오할 수도 있다. 구체적인 사안에서는 이들의 잘못된 면을 비판해야겠지만, “그렇기 때문에, 당신은 수구다.”라고 판정내린다면 한국엔 ‘보수’가 남지 않는다. 그렇다 하여 ‘사상의 자유’를 모르는 이들에게 함부로 ‘보수’의 레토릭을 선사한다는 것도 올바른 일은 아니다.


“보수와 수구를 구별해야 한다.”는 한홍구의 레토릭은 기껏해야 촛불 시위에 나오는 군중은 ‘진보’를 몰라도 “우리 편”으로 간주하자는 진영논리의 함의밖에 없다. 정말로 한국의 시민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관심을 기울이고 대화를 나눠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수구 / 보수 / 우파 / 좌파 등의 용어가 그들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게다. 나는 차라리 한국의 시민들을 확신범 / 냉소주의자 / 감성주의자로 나눠보는 것이 어떨까라는 제안을 한다.


확신범은 조갑제 신혜식 등의 극우파, 박세일 신지호 홍진표 등의 뉴라이트, 한줌도 안 되는 좌파를 모두 포괄하는 개념이다. 이들이 같이 묶인 것은 한국사회를 살아가는 상황에서 이들과 다른 이들 사이에 가장 본질적인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즉, 이들은 전반적인 사회문제에 대해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준거틀을 가지고 있다. 이상적인 시민사회라면 이런 이들이 구성원의 대다수여야 하지만, 한국사회에서 이들은 ‘특별한 인간’이나 ‘이해할 수 없는 인간’으로 취급당한다. 어떤 보수(?)적인 대학생이 있다면, 그가 이해할 수 없는 건 내 생각이 아니다. 이해 못할 것은 토익 공부하지 않고 블로그에 정치 관련 글을 올리는 내 행위 그 자체다.


조갑제를 싫어하거나, 적어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아주 많다. 그러나 열린우리당 지지자들은 이 사실에 안도해선 안 된다. 햇볕정책에 반대하는 사람 숫자와 조갑제를 좋아하는 사람 숫자의 현격한 차이야말로 한국 사회의 징후다. 햇볕정책은 대한민국 정부가 북한에 대해 수립한 ‘최초의 외교정책’이다. 이후의 외교정책은 나오지도 않았다. 그런데 ‘어떻게’ 햇볕정책에 반대할 것인가? 한나라당과 대다수 사람들의 반대는 감정적인 반대다. 그들의 반대에 합리적인 근거가 전혀 없다고는 말할 수 없으나, 그 근거를 가지런히 정돈하여 새로운 정책을 제시하는 작업이 완벽하게 결여되어 있다. 그들은 ‘햇볕’정책을 반대하는 게 아니라 햇볕‘정책’을 반대한다. 정책이 없던 시절로 다시 돌아가 일희일비(一喜一悲) 즉물적인 반응을 북한에 선사하는 것이 정의로운 일이라고 생각하는 거다.


그런 사회에서, “나는 햇볕정책에 반대하며, ‘서늘한 가을 햇볕’을 추진하겠다.”는 고건의 코미디가 나온다. 그건 베이비복스 심은진이 솔로데뷔하면서 ‘절제된 섹시미’를 보여주겠다고 선언한 것보다도 더 웃기는 소리다. 차라리 조갑제가 정의롭다. 그는 적어도 햇볕정책을 반대하는 일이 “대한민국 국군의 탱크가 주석궁에 진입할 때 통일이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통일관을 설파하는 일과 같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다. 그가 극우파인 것은 분명하지만, 토론은 이런 사람과 할 수 있다. 주장이 없는 이들, 주장이 없는 데도 햇볕정책을 싫어하는 이들과는 토론이 불가능하다. 강준만이나 진중권과 같은 정치평론가가 모두 조갑제를 씹으면서 성장한 데에는 이런 배경이 있다. 다른 이들은 씹을 수도 없는 것이다. 조갑제는 한국 극우파의 영혼이다. 그가 없으면 한국 극우파는 천국도 지옥도 갈 수 없는 가련한 신세가 된다.


나는 한국사회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어느 쪽이 되었든 확신범의 숫자가 더 늘어나고, 그들이 다른 이들에게 대우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나는 조갑제가 웃음거리가 될 때  그것을 극우파를 조소하는 보수주의자들의 건강한 웃음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한국인들을 수구/보수/개혁/좌파 뭐 이런 식으로 잘라놓고 보면 그런 결론이 나온다. 하지만 나처럼 한국인들을 확신범/냉소주의자/감성주의자로 잘라놓고 보면 다른 결론이 나온다. 그것은 체계화에 저항하는 한국인들의 오묘한 형이상학의 발현이다. 그들은 누군가 자신의 헛소리를 논리적으로 정립하는 것이 짜증나는 것이다.


그런 이들이 바로 냉소주의자다. 이들은 사회문제에 대한 통합된 의식을 가지기를 거부한다. 이들은 자기 문제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진정으로 현명한 일이라 믿고 있다. 사실 이들은 모든 것에 냉소하지도 않고 (원래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 조중동이 정해준 것에만 냉소한다. 조중동이 서구 사회 기준으로 볼때 정론지가 아니라는 사실은 이렇게 이해되어야 한다. 조중동은 냉소주의자들의 정론지다. 냉소주의자가 먼저냐, 조중동이 먼저냐는 우문이다. 이젠 그런 걸 따질 필요도 없이 공교하게 결합해 있다. 가령 조중동이 세계의 모든 석학이 자신들의 경제관을 지지하는 것처럼 ‘왜곡’하는 광경을 살펴보라. 과연 이것이 신기한 일일까? 한국 남자들은 여성가족부가 지배하는 한국을 제외한 모든 나라는 성매매 합법화가 되어 있다고 믿고 있는데? (이건 조중동이 알려준 사실조차도 아니다.)


역시 사회문제에 대한 통합된 의식은 없지만 뭔가 더 나은 사회가 필요하다는 선의만 있는, 그래서 ‘희망’이나 ‘상식’과 같은 어휘에 쉽게 공명하는 일군의 집단이 있다. 이들을 편의적으로 감성주의자라고 칭할 수 있을 게다. 감성주의자는 민족주의자들과 거의 겹치지만, 완전히 같은 건 아니다. 이들이 개혁정권의 지지자들이다. 감성주의자와 냉소주의자의 투쟁이야말로 한국의 정치투쟁이다. 그러나 감성주의자와 냉소주의자에겐 아무리 싸울지라도 확신범 따위는 끼어들 수 없는 끈끈한 동질성이 있다. 주몽의 시청율과 햇볕정책의 지지율의 차이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최근의 한국인들은 환상의 영역에선 감성주의자가 되고 현실의 영역에선 냉소주의자가 되려 한다.


감성주의자와 냉소주의자의 투쟁은 최장집이 언급한 ‘갈등을 드러내는’ 정치와는 거리가 멀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더 많은 갈등을 드러내는 것이다. 햇볕정책에 대한 찬반 여부 정도로만 구별이 가는 감성주의자와 냉소주의자에게 사회경제의 문제를 던져주고, 이에 대한 찬반 의사표시를 통해 이들이 더 분절되도록 해야 한다. 그 분절의 이합집산을 통해 그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정당을 찾도록 해야 한다.


극우파들은 박정희가 “가난은 나랏님도 구제하지 못한다.”는 오랜 관념을 혁파한 위인이라고 찬양한다. 하지만 90년대 이후를 생각해 볼 때, 그 관념은 혁파되지 않았거나 다시 도래했다. 사람들은 여전히 가난은 나랏님도 구제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우리 ‘국가님’은 내 가난은 구제하지 못하고, 단지 국민소득을 구제할 수 있을 뿐이다. 왜 많은 사람들이 대기업 노조에 대해 원한감정을 품는가? 그들 모두 경제 문제는 타인에게 의탁하지 않는데, 오직 대기업 노조만이 자신들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남에게 요구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의 욕망을 양보하는 데 너무나 익숙해져 있다. 자신의 표가 사표가 될 까봐 민주노동당을 못 찍고 열린우리당을 찍을 때, 열린우리당이 깨지면 대통령이 개헌발의하는데 방해가 될까봐 기간당원제 사수라는 자신의 신념을 포기할 때, 우리는 모두 자신의 욕망을 포기하는 것이 아닌가. “너 자신의 욕망에 대해 양보하지 말라.”는 라캉의 금언은 이 지점에서 필요하다. 대다수가 자신의 욕망을 포기하고 부자들만 욕망하는 사회는 민주주의 제도를 활용하지 못하는 사회다. 민주주의는 개개인의 내면이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전제로 삼는 체제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내가 예전에 쓴 <혼네의 민주주의>라는 글을 참조할 것) 라캉은 자신의 금언이 윤리적인 명제라고 생각했다. 그 말이 옳다면 국가경제와 수출에 구애받지 않고 월급을 올려달라고 말하는 대기업 노조원들보다 윤리적인 사람은 대한민국에 없다. 모두가 그들을 본받는다면, 갈등이 드러나고 정치가 복원될 것이다. 당신의 욕망을 포기하지 않아야 갈등이 드러난다.


이상한 모자

2007.03.06 11:35:05
*.63.208.236

한형, 마본좌가 졌습니다. 저는 확신범인가여?

하뉴녕

2007.03.06 12:18:10
*.176.49.134

김형은 한줌의 한줌도 안 되는 극좌 확신범이잖소...

이상한 모자

2007.03.06 14:54:18
*.63.208.236

김규항 만화를 본 후 한형의 리플을 보니 문득 불온이스크라가 떠오르는구려..

아큐라

2007.03.06 15:53:49
*.241.136.2

이모 / 최규석 만화 입니다.

한윤형 / 질문입니다. 확신범하고 감성주의자 사이에 있는 사람은 뭘까요? 확신범이라고 하기에는 의식과 논리의 호흡이 길지 않고 감성주의자들 중에서 논리적이고 일관된 사고를 하는 사람들은?

trotzky

2007.03.06 17:25:13
*.232.157.225

어떤 기준으로 나누더라도 결국 그 사이사이에 존재할 수 있는 다양한 스펙트럼을 모두 정의내릴 수는 없겠지만 무언가 변화를 줄 필요가 있다는 점에서는 공감합니다. 저 자신도 30여 생을 살아오면서 이슈에 대해 파이터 모드냐 아니냐의 갈림길 속에서 고민하다가 나중에 돌아보면 과연 어느 쪽의 스펙트럼에 나타났을지 참 모호할 때가 많았거던요.

쎄느

2007.03.06 18:02:39
*.230.188.202

시작은 흥미로운데 결론은 아햏햏하군요.

쟁가

2007.03.07 00:37:59
*.50.69.85

한줄요약: "우리는 아직 이념지형도 씩이나 그릴 깜냥이 안된다."

그러나...결론이 조금 이해가 안됩니다. 왜냐하면 "욕망에 충실해야한다"는 라깡의 동전 뒷면엔 이런 글도 있을 것 같거든요.
"너는 너의 욕망을 위해 목숨걸고 싸울 수단과 각오가 있는가"
저는 "그렇지 않다"에 올인-_-.


대기업노조의 행동방식은 라깡이 말하는 개인의 윤리적 차원에서 말할 사례는 아닌 것 같습니다. 개인의 행동방식이 욕망의 윤리학으로 설명될 수 있는 반면, 집단의 행동방식을 설명할 때는 계급의 동학이 더 적절하니까요


물론 그 계급범주가 노동자 전체인가, 아니면 대기업정규직남성노동자에 국한되느냐는 어느정도 윤리적 차원에 걸쳐있긴 합니다만, 역시 크게 보아서는 계급적 범주에 속하겠지요.


사람들이 대기업노조에 원한감정을 품는 것은 타인에게 원가를 요구한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타인에게 뭔가를 요구할 수단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때문이라고 봅니다. 자신에게는 수단이 없는데 그들에겐 그럴 수단이 있는 거지요. 이건 행위자에게는 선택의 폭이 완전히 달라지는 문제이지요. 그래서 집단이기주의라고 욕하는게 사람들한테 먹혀드는 것이고...


(덧. 만약 대기업노동'조합'이 아니라 대기업노동자 개인이 자기욕망을 위해 사측과 싸운다면 라깡이 말한 윤리적 인간에 더 부합하겠지요).

노정태

2007.03.06 22:08:56
*.52.184.218

쟁형, 라깡의 동전 이면에 적혀있는 말에 대해 쟁형과 나의 해석은 다른 것 같소.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한다면 그 대상은 이미 욕망의 대상이 아니지 않소? 신념이나 이념이나 종교적 가치 같은 더욱 큰 것을 위해 인간은 목숨을 바치지만, 욕망을 위해서는 그럴 수가 없다고 생각하외다. 욕망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고통이 욕망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쾌락보다 크면 사람은 그것을 포기하게 되지요. 이 작동 기제에서 벗어난 것이라면 그것은 이미 욕망이 아닐게요.

쟁형, 욕망을 드러내야 갈등이 생기고 정치가 복원된다는 말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해봅시다 그려. 욕망을 정말 거리낌없이 드러내버리는 순간 그것을 공유할 수 없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소. 헌데 쟁형도 알다시피 갈등은 비가역적어서, 아무리 최선을 다해 봉합한다 한들 불거지기 전 상태로 돌아갈 수는 없는 것이오. 그러니 욕망을 노출하는 순간 갈등이 발생하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정치적인 기제가 작동해야 한다는 것은 논리적 필연에 가깝소.

헌데 한국사람들은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가며 자신의 욕망을 미루어두거나 유폐시키거나 타인에게 전이시키는 경우가 허다하지요. 특히 타인에게 전이시키는 경우가 바로 미칠듯한 교육열인데 그건 다른 기회에 논하기로 하고요, 핵심은 목숨을 걸고 싸울 각오와는 무관하게 일단 욕망을 노출을 시켜야 한다는 거요. 만약 모든 욕망을 노출시킬 때마다 목숨을 걸어야 한다면 그 누가 욕망을 드러내려 하겠소이까? 욕망은 대체로 그다지 크지 않다는 걸 쟁형도 잘 알잖아요. 사소한 것은 사소한 것대로 소중하지만, 목숨을 걸어야 하는 것들은 절대 사소하지 않지요.

혹시, 쟁형의 반감은 '목숨을 걸 가치가 없는 것을 요구하는 행위'를 탐탁찮게 보는 시각에서 비롯한 건 아닌가요? 하지만 나는 목숨을 걸 가치가 없는 것들도 나름대로 소중하다고 생각해요. 아마 한형의 이 글도 같은 전제에서 출발한 것일테고요. 그 부분을 잘 생각해 봐요. 목숨을 걸고 운동해야 하는 사람들이 있긴 하지만, 그런 사람들의 문제까지 '욕망'의 정신분석학으로 치환하여 해석하면 그건 지적인 폭력일지도 모르는 거요. 그건 생존권의 문제이고 어떤 이론을 들이대기에 앞서 우리가 인간이기에 서로 지켜줘야만 하는 그런 영역이지 않소.


그리고 한형, 자신의 글을 인용할 때에는 다소 번거롭더라도 링크를 걸어주는 편이 낫지 않겠소? 지금처럼 글의 제목만이 적혀있으면 독자 중 그 누구도 직접 그 글을 검색하여 읽지 않을 게요. 따라서 한형이 '참조'를 표시하는 행위는 한형의 만족만을 위한 정도로 받아들여지게 되고 말이오. 그러니 가급적이면 독자의 편의를 고려하여 링크를 해 주는게 어떨까 싶소. 어차피 정확한 제목을 얻는 과정에서 각 글의 주소를 확인하게 되지 않소?

이상한 모자

2007.03.06 23:46:35
*.63.208.236

노형, 시퍼런 글 링크는 불온이스크라와 연관되어서 아니되오.

쟁가

2007.03.07 00:08:28
*.50.69.85

노정태님/ '~형'이라고 부르는 행위는 이 블로그에 왔던 어떤 분에 대한 조롱처럼 보여서 눈살이 찌푸려지네요.

그리고, 님이 오해하지 말아야할 것은, '목숨걸고'에 방점이 찍히는 게 아니라, '수단'과 '각'오에 방점에 찍혀있다는 겁니다. 아래 문맥으로 봐도 그렇지요. "혹시, 쟁형의 반감은 '목숨을 걸 가치가 없는 것을 요구하는 행위'를 탐탁찮게 보는 시각에서 비롯한 건 아닌가요?"라는 말은 그래서 뻘타가 됩니다. 지엽말단을 붙잡고 타인의 '혼네'를 어림짐작하는 것이 그리 바람직하지 못한 행위라는 걸, 저는 이미 다른 곳에서 님에게 지적했던 것으로 압니다.

덧붙여, 욕망을 날것으로, '있는그대로' 드러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욕망은 언제나 매개적으로 드러나기 마련이고, 라깡이 말한 자신의 욕망을 양보하지 말라는 말은, 욕망을 있는그대로 노출시키라는 외부발산적 행동지침이라기보다, 자신의 욕망이 타인의 욕망이 아니라 진정 자기의 욕망인지 성찰해보라는 내부수렴적 윤리라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물론 제 이해가 틀렸을 수 있겠습니다만.

하뉴녕

2007.03.07 00:09:44
*.236.21.174

문체를 보아하니 내일모레부터는 서로를 'X소협'이라고 칭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불길한 예감이 듭니다. -_-;;

라캉의 말과 연관지어 생각할 때는 쟁가님 의견이 더 일리가 있고, 제 글의 문맥에서는 노정태님의 해석이 타당합니다. 그러니까 완전히 정확한 인용은 아니었던 셈이죠. 라캉은 가령 안티고네나 사드같은 사람을 '윤리적 인간'이라 칭하니까요.

하지만 라캉이 자신의 욕망에 대해 양보하지 않다가 사회의 탄압을 받게 되는 이들을 윤리적이라고 찬사했지만, 그 행위가 죽음을 가져오기 때문에 윤리적이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 욕망에 대해 양보하지 않은 행위 그 자체가 윤리적이라고 말한 것이라고 저는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대략 저렇게 가져온 것이구요.

링크가 깔끔하게 안 되어서 몇번 시도하다가 포기했는데, 다시 한번 수단을 강구해봐야겠군요.

노정태

2007.03.07 02:30:45
*.52.184.218

쟁가/ 조롱하는 맥락이 담겨있기도 합니다.

그렇게 반박하실 줄 알고 있었지만, 저로서는 님의 '혼네'가 아닌 "너는 너의 욕망을 위해 목숨걸고 싸울 수단과 각오가 있는가"라는 말 자체가 갖는 지나친 비장함을 지적하고 싶었기 때문에, 꼬투리 잡는거라는 말씀을 받아들이기가 어렵습니다. '수단'이야 비교적 가치중립적이지만, '각오'는 그렇지 않죠. 님이 쓰신 저 문단을 통으로 짚어보면, 적어도 이 글의 맥락과는 맞지 않습니다. 라캉이 진정 그런 의미에서 저 말을 했다면 저로서는 그냥 쓰게 웃고 말 수밖에 없고요. 뭐 확인할 방법도 없을뿐더러, '라캉도 결국 이렇게 무게 잡는 사람이었군' 같은 생각밖에 안 드니까요.

대기업 노조원들을 포함하여 정치적으로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사람들이 그것을 비합법적인 경로로 표출할 때, 과연 다들 '목숨걸고' '각오' 하는지 저로서는 의문입니다. 아니, 진짜 궁금하다는 거죠. 대기업 노조원들과 다른 사람들의 차이는 수단이 있느냐 없느냐라는 님의 주장에 대해, 님이 바라시는 수위의 논쟁을 하려면 적어도 '각오' 정도는 전제로서 동의가 되어야 할텐데, 제게는 그게 전혀 당연하게 느껴지지 않거든요. 이 경우에 '세상을 모른다'라고 하시면 저야 그냥 네 그렇군요 하면 되는 겁니다만, 아무튼 이 지점에서 차이가 있는데 저는 그냥 개의치 않고 제 해석을 말했을 뿐입니다.

노정태

2007.03.07 02:45:48
*.52.184.218

결국 쟁가님이 말씀하시는대로 라캉의 언설의 이면에 그런 주장이 있다고 가정한다면, 어떤 욕망은 목숨걸고 추구해야 하는 무언가가 되어버립니다. 이건 그냥 한국어의 자연스러운 해석상 그래요. 수단과 각오에 방점이 찍혀있다고 해서 그 사실이 달라지지는 않고요. 하지만 저는 목숨을 걸고 싸워서 쟁취해야 하면 그게 과연 욕망인지부터 의문시하고 있고 그 내용도 제 리플에 적혀있습니다. 거기서 차이가 나면 당연히, 상대방이 욕망을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확인해야 하고, 제가 했던 것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죠. 그러니 님에게 확인 질문을 던지는 거고요. 이 추론 과정에서 잘못된 게 뭐가 있는지를 지적하실 수 있습니까?

이상한 모자

2007.03.07 02:59:29
*.63.208.236

다들 잊어버릴까봐 다시 한 번 상기시키는데 저는 요즘 한 비정규직 노조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쟁가

2007.03.07 03:29:16
*.50.69.85

노정태님/
1. 님이 조롱하는 것까지야 제가 말릴 수 없습니다만, 그 '놀이'에 저까지 끌어들여서 불쾌하더군요.


2. 라깡이 말한 '욕망'이 대기업 '노조'의 행위를 설명하는데 적절하지 않다는 게 위에서 제가 말한 내용입니다. 대기업노조는 구성원들의 욕망을 관철시킬 수단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대개의 경우 목숨까지 걸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데 삼성의 일개 직원 하나가 노동조건과 급여 등등 회사를 상대로 자신의 욕망을 관철시키려 할 때는 '각오'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수단'이 있다면 '각오'는 상대적으로 비중이 덜하지만, '수단'이 없다면 '각오'가 강해야겠지요.


3. 대기업노조 사례와 관계없이, 아주 일반적인 차원에서 개개인의 욕망을 말하고자 한다면, 욕망을 드러내는 일에 굳이 목숨을 걸 필요까진 없겠습니다. ("모든 욕망을 위해 목숨 바쳐라"라는 생각으로 쓰지 않았는데 그렇게 읽혔다면 오해이거나 제가 글을 잘못 쓴 탓입니다.) 나의 욕망이 타인의 이해관계를 건드리지 않는 경우는 당연히 목숨 걸고 싸울 필요도 없겠지요. 두말하면 입 아픕니다. 그러나 대기업노조가 본문에서 중요한 준거가 되었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는 공허합니다.

노정태

2007.03.07 04:21:02
*.52.184.218

저는 님이, 어쩌면 라캉 본인이 '욕망'이라는 단어를 다루는 방식이 부적절할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삼성에 다니는 사원이 불이익을 각오하며 요구하는 조건이라면 그건 욕망의 대상이 아니라 기본권 혹은 분배적 정의 차원에서 요구될 수 있는 어떤 권리의 대상일 겁니다. 제가 첫 리플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그런 사람들의 문제까지 '욕망'의 정신분석학으로 치환하여 해석하면 그건 지적인 폭력일지도 모르는 거" 아닌가요? 자신들이 다룰 수 있는, '욕망'이라는 말랑한 어휘로 남들의 처절한 문제를 포장해버리는 건 어쩌면 그 자체로서 옳지 않은 일일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저는 님의 글을 "모든 욕망을 성취하기위해서는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식으로 읽고 있는 게 아니라, '만약 어떤 욕망이 목숨 걸고 싸우거나 그것을 각오해야 할 만큼 그 개체에게 처절한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면, 그것은 욕망의 대상이 아니라 생존권 차원에서 접근해야 할 문제'라는 말을 하고 있는 거에요. 즉, 그 어떤 욕망도 생명이나 치명적인 재산적, 신체적 피해를 감수해야 할 만큼 처절할 수는 없다는 겁니다. 그런 각오를 하고 생존을 위해 투쟁하고 있는 사람에게 '오, 당신은 지금 욕망을 추구하고 있군요. 윤리적이에요'라고 말하면 그건 정말 폭력적인 행위 아닐까요. '오해하지 말아요, 라캉에 따르면...' 하면서 설명해봐야 이미 늦은 걸테고요.

노정태

2007.03.07 04:33:13
*.52.184.218

그러니 제가 가지고 있는 전제하에서는, 대기업 노조의 임금 투쟁 따위가, 기성 언론에서 보도하는 바와 같이 '짜고 치는 고스톱' 수준으로 만만하면 한윤형의 글이 내용면에서도 옳고, 그들의 투쟁도 비교적 편하긴 하지만 사실 처절하고 힘겨운 거라면 한윤형의 본문은 개념적으로 옳지만 예시로는 옳지가 않게 됩니다. 제가 두번째 리플에서 '대기업 노조의 파업이 과연 만만한가요?'라고 물었던 건 바로 그것을 확인하고 싶기 때문이었죠. 저에 비하면 젱가님은 확실한 정보를 알고 계시니까요.

쟁가

2007.03.07 04:40:46
*.50.69.85

윤형님 본문에 따르면, 대기업노조는 욕망에 충실합니다. 그런데 삼성사원이 같은 욕망을 관철하려면 대기업노조보다 훨씬 큰 '각오'가 필요합니다(이것은 상식적으로도, 제 취재경험으로도 사실입니다). 제가 보기에 이 둘의 차이는 '수단의 유무'입니다. 그런데 지금 님의 말씀에 따르면, 수단이 있으면 욕망이 되고, 수단이 없으면 생존권 문제가 됩니다. 즉, '수단이 있을 경우에만' 욕망이란 것이 성립한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님의 '욕망'은 너무 마술적인 개념 아닌가요?

노정태

2007.03.07 05:16:59
*.52.184.218

성취하기 위한 (현실적인) 수단이 없는데도 '욕망'이라는 단어를 쓸 수 있다면 우리는 다음 어구들도 옳은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욕망의 대추리'
'KTX 여승무원들, 삭발까지 하면서 무엇을 욕망하나'
'이라크 국민들은 평화를 욕망한다'

음, 더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 같군요.

노정태

2007.03.07 05:24:39
*.52.184.218

아, 약간 핀트가 어긋났군요. 수단의 유무가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추구할 때 극단적인 손해를 감수해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가 문제입니다. 위 세 경우가 다 그렇죠. 저런 극단적인 상황에까지 '욕망'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어법을 실제로 들으면 우리는 그냥 풋 하고 웃습니다. 넌센스니까요. 그 웃는 순간 우리는 진실을 보고 있습니다. 그게 다에요.

쟁가

2007.03.07 05:45:19
*.50.69.85

논리적 모순을 지적해 드렸으면, 그냥 받아들이세요.
님이 자의적으로 만들어낸 "욕망의 대추리"같은 레토릭은 욕망이라는 말이 사회적으로 어떻게 유통되는지를 시사해줄 뿐, 님의 개념적 모순을 교정해주진 못합니다. 대기업노조와 같은 법적/제도적 수단이 없어 극단적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욕망'이란 말 대신 '염원'과 같은 말로 예의를 갖추니까요.
이만 하지요.

노정태

2007.03.07 06:50:26
*.52.184.218

한가지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게, 님은 저의 모순을 지적해낸 적이 없어요. 그러니 저로서는 받아들여야 할 게 없습니다. 개념적 모순은 선언되는 게 아니라 입증되는 건데, 님이 언제 그런 일을 해내셨나요.

'욕망'이라는 단어가 '염원'으로 치환되면서도 본래의 철학적 맥락을 유지한다면 그건 애초부터 엄밀한 개념도 아닐 겁니다. '당신의 욕망을 드러내라'라는 말이 '당신의 염원을 드러내라'는 말과 같습니까? 욕망을 드러내는 것이 윤리적인 것처럼 염원을 드러내는 것도 윤리적일 수 있습니다만, 그 둘이 같은 것이라고 단정짓는다면 님은 철학적 개념을 다루기에는 너무도 무딘 언어 감각을 가지고 계신겁니다.

생각을 해보시죠. 성 경험이 없던 사춘기 당시에, 젱가님은 섹스를 욕망하셨나요 아니면 염원하셨나요? 그 둘을 같은 차원의 것이라고, 다만 한쪽이 좀 더 예의바른 언어라고 해버리면, 아마도 라캉이 '욕망'이라는 어휘를 끌어들이면서 얻고 싶어했던 섹시한 이미지 또한 모두 날아가버립니다. 리비도적인, 충동적이고 자발적인 그런 에너지가 염원에는 없으니까요.

내가 아까부터 하는 소리가 이겁니다. 우리는 팔 하나 다리 하나를 잘라주면서까지 섹스를 하고 싶어하지는 않아요. 하지만 어떤 이슬람 청년은 자신의 목숨과 바꿔서 몇 명의 미군 병사를 죽이고 싶어하죠. 전자를 욕망이라고 부르고 후자를 염원이라고 부르면 말이 딱 됩니다만, 후자마저 어찌어찌 욕망이라고 개념 정립을 시키면서 다만 그것을 예의바르게 염원이라고 한다면, 그건 그 욕망이라는 개념 자체가 철학적인 차원을 획득하기에는 너무도 물러터진 것이거나, 단어를 적용할 수 없는 부분에까지 갖다 붙이고 나중에 뒷수습을 하는 것이거나 둘 중 하나에 불과합니다. 제가 평소 '인문돌이'를 씹는 건 바로 그런 행태를 아무런 죄책감 없이 저지르기 때문이고요. 욕망과 염원이 같은 게 되어버리면, 여자 가슴 한번 만져보려다가 옥수수 털리는 주정뱅이와, 억압받는 제 동포를 위해 목숨을 버리겠다고 결심한 독립군의 내적인 동기의 차이를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 사라지지 않습니까? 이건 정말이지 언어의 타락이고 인간성에 대한 모독입니다.

게다가 언어를 바라보는 젱가님의 시선 또한 업데이트되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욕망이라는 말이 사회적으로 유통되는 방식이 바로 욕망이라는 단어의 의미에요. 저는 바로 그러한 상식적이고도 현대적인 언어관에 입각하여 논의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뭐 이해가 안 가시는 것 같은데 저도 더이상은 할 말 없어요.

JWalker

2007.03.07 11:05:19
*.149.21.186

신입생 아니라고 학회에서도 안 받아준다. 강의실에서는 내 옆에 아무도 안 앉는다. 난 아싸다.

이상한 모자

2007.03.07 11:43:56
*.41.199.50

전 어제 사직서를 써놓고 제 서랍속에 놔두고 왔습니다.

쟁가

2007.03.07 13:43:54
*.50.69.85

노정태님/ 하하, 하도 웃겨서 댓글 다시 답니다. 지구에서 하던 논의가 완전히 안드로메다로 옮겨와 버렸네요. 이제는 "철학적 개념=그 단어의 사회적 유통방식"이 되어버리는군요. 저를 아주 웃겨죽일 작정이신가요? 그동안 개념을 정립하려 노력하던 수많은 학자들이 졸지에 바보되었습니다. 왜 개념정의를 하나요? 그냥 네이버 사전에서 긁어붙이면 되는 것을...


라깡이 라깡인 것은, 욕망이란 저잣거리의 단어를 가지고 본래 가지고있던 뉘앙스를 포함하면서도 보다 지평을 확장했기 때문입니다. 라깡이 말하는 '욕망'이 대기업노조와 같은 집합행위자의 행동을 설명하는데 다소 부적절한 것은, 라깡의 욕망개념이 사회학적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정신분석의 차원에서 세련되게 다듬어졌기 때문입니다. 만일 집합행위자의 행동을 설명하기 위해 라깡의 욕망을 사용하려면, '욕망'개념에 대한 추가적 재정의가 필요합니다. 제일 처음 라깡 동전의 이면을 내가 굳이 제기했던 것은, 그 때문이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님은 '인문돌이'를 씹기 전에 철학공부를 좀 더 할 필요가 있습니다. 상태가 좀 심각해보입니다. 현재 님의 수준에서 라깡은 너무 과분합니다. 아, 물론 제 언어감각을 업데이트하란 충고는 고맙게 받아들이겠습니다.

노정태

2007.03.08 01:09:26
*.52.184.237

쟁가님께 얘기하는 건 이제 더 소용이 없는 것 같습니다. 님은 제가 말하는 바를 이해할 수 있는 능력도 의지도 가지고 있지 않으니까요. 몇 가지 딱한 지점을 짚겠습니다.

일단 님은 너무 이해력이 떨어집니다. 제가 언제 철학적 개념이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언어 그 자체와 같다고 했나요? '욕망'을 철학적 개념으로 승화시키는 과정에서, 그 단어가 이 사회에서 통용되는 방식을 무리하게 어겨서는 안된다는 요청을 한 것 뿐이죠. 거기서 바로 이꼬르 긋고 혼자 좋아하시는 모습은 마치 수군작의 그것을 연상시켜서 정말이지 우스꽝스럽습니다. 언어의 냄새를 맡을 코가 없어서인지, '욕망'과 '염원'의 차이도 인지하지 못해 네이버 사전을 펼쳐봐야만 하는 님의 그 딱한 한국어 실력도 서글프고요(그런 분이 안드로메다니 뭐니 하는 어휘를, 급하게 배워서 급하게 쓰시는 모습이 참 난감합니다. 님의 입에 붙어 있는 단어와 어구를 사용하세요. '난 알아요'에 맞춰서 덩실덩실 춤을 추던 아저씨들 생각이 납니다).

라캉에 대해서는 제가 아는 바가 없으니 넘어가겠습니다.

저의 철학공부에 대해서는 젱가님이 평가하는 것 자체가 넌센스인 것 같습니다. 님은 저의 수준을 판단할 수 있을만한 실력을, 그 분야를 막론하고, 담지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다못해 라캉의 책에서 직접 인용을 해서 저를 논박하시려 했다면 저는 달갑게 그 질책을 받아들였을 겁니다. 근데 지금 이게 뭔가요? '당신은 수준이 안 돼, 당신은 상태가 심각해' 이건 그냥 선언일 뿐이죠. 하지만 저는, 님이 알고 있지도 못한 어떤 철학적 기반을 딛고 여태까지 논의를 이끌어오고 있고, 그래서 젱가님이 제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게 이상하지는 않지만 참 딱하고 또 서글픕니다.

저는 젱가님이 라캉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이렇게 횡설수설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고 믿고 싶습니다. 그래도 한번쯤 읽어볼 생각을 하고 있는데, 이렇게 덜떨어진 결론으로 이끌어지도록 예정되어 있다면 얼마나 처참하겠어요.

저 또한 철학공부를 더 하라는 조언을 고맙게 받아들이겠습니다. 다른 분야를 보다가 다시 들춰보니 신선한 맛이 있네요. 그럼 건강하게 잘 사세요.

쟁가

2007.03.08 08:35:16
*.50.69.85

정리 좀 하겠습니다.^^;


윤형님 본문의 문제점은 이미 저의 첫 댓글에서 핵심이 나왔습니다. 윤형님 역시 "아주 정확한 인용이 아니었다"고 했습니다.


<정신분석의 개념을 사회경제적 문제에 적용할 때 생기는 어떤 '괴리'>를 저는 지적하고 싶었고, 필자도 완전히는 아니지만 어느정도 수긍했으므로 상당히 생산적인 합의가 있었던 것이지요. 그 정도 수준에서 저도 만족합니다. 현실적으로도 똑같이 연봉 4500 받는 현대차노조와 삼성직원이라면 둘다 먹고살만 하므로 처우에 대한 욕망 역시 비슷한 질적 상태일 것입니다. 그러나 (법적 제도적 조직적) '수단'의 유무에 의해 욕망을 드러내느냐 못 드러내느냐의 차이가 발생할 수 있지요. 욕망의 윤리학을 논하기 이전에, 사회구조적 제약이 각각의 행위자들의 욕망에 다르게 작용한다는 의미입니다. 즉, 현대차노조가 라깡식으로 말해 '욕망을 양보하지 않은 것'은 윤리적 결단이라기보다 그냥 경제학적 판단입니다. 욕망을 양보 안해도 될만한 상황이니까 안하는 겁니다. 굳이 욕망을 끌어들이자면 욕망의 경제학이 되는 것이지요.


노정태님은 "욕망추구과정의 고통이 쾌락보다 크지 않을 경우에만 욕망이란 개념이 성립"하는 것이라 말하지만, 이 주장의 개념적인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그런 경우를 사회분석의 일반적 기준으로 적용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왜냐하면 사회적 문제의 거의 대다수는 이해관계의 충돌이며, 그 과정에서 이익(즉 고통보다 쾌락이 큰 경우)을 관철하는 집단이나 개인은 극소수인 반면, 그러지 못한 집단이나 개인은 압도적 다수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극소수의 특수한 경우를 윤리적 준거집단("우리는 이렇게 욕망을 드러내야한다")으로 삼으면 "현대차노조는 (욕망에 충실하니까) 윤리적인데, 다른 사람들은 욕망 자체를 드러내지 않으니 비윤리적이야"라고 말해야 하는 경우가 발생하고 맙니다.


대다수 사람들은 현대차노조처럼, "욕망을 추구하는 고통보다 쾌락이 큰" 행복한 상황이 아닙니다. 설령 현대차노조와 동일한 욕망(성과급 인상 등등)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걸 "욕망"이라 불러선 안됩니다. 노정태님 정의에 따르면 쾌락보다 고통이 크면 그걸 "욕망"이라 불러선 안되기 때문이죠. 따라서 "욕망"이라 부를 수도 없는 것을 드러낸다고 해서 "욕망을 드러냈다"고 할 수는 없죠. '윤리적 존재'가 되고싶어도 논리적으로 그럴 수가 없습니다. 이들이 욕망을 드러내어 '윤리적 존재'가 되는 길은 '바바리맨'이 되는 것과 같은 종류에 제한됩니다. 노정태님이 개념적 모순을 범하고 있다고 한 것은 바로 이 부분이었지요. 본인은 아니라고 우기는데, 사실 우기는덴 장사 없긴 합니다...


결론적으로, 이런식의 논리는 별로 상식적이지 않고 설득력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애초에 내가 얘기했던대로 욕망의 윤리학 자체가 이런 사회적 문제를 다루는데 별로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하는 게 합리적입니다. 차라리 "대중들이 자신의 계급정체성을 드러내지 않는게 문제"라고 주장하는 편이 더 설득력이 있을 테지요. 어쨌든 댓글 초반에 윤형님은 내 말이 무슨 말인지 대충 알아들은 듯 했고, 논의는 사실상 종결되었습니다.


이후에 해볼만한 논의로는, 그렇다면 라깡의 욕망이란 개념을 어떤 식으로 재해석하고 확장해야 사회적 문제에 정교하게 적용시킬 수 있는가, 정도일 겁니다.
본문의 결론 부분 외에 글 전체에서 제가 동감하지 않는 부분은 거의 없어요. 우리는 아직 이념지형도씩이나 그릴 깜냥이 안됩니다. 다만 조만간 그렇게 되어야하고, 그러기 위해서 무엇을 먼저 할 것인지는 좀 더 깊이 사유해 보아야할 문제입니다.


그 이후의 얘기는 사실 단어의 뉘앙스니 용법에 대한 것으로, 본문과 하등 상관도 없는 내용입니다. 댓글 스무 개를 넘길만큼 심오한 문제는 더더욱 아니구요. 정작 본문을 쓴 윤형님만 뻘쭘하게 구경하는 처지가 되어버린 셈이지요. 댓글로 눈을 어지럽혀서 주인장께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노정태님/


수군작은 요즘 뭐하고 사시나 저도 궁금해지는구만요.^^


"아무리 생각해봐도 님은 '인문돌이'를 씹기 전에 철학공부를 좀 더 할 필요가 있습니다. 상태가 좀 심각해보입니다. 현재 님의 수준에서 라깡은 너무 과분합니다."
->이부분은 철회하고 노정태님에게 사과드리겠습니다. 어른스럽지 못했고, 상대에 대한 예의도 아니었습니다.


맹세컨대 이건 조롱도 아니고 비아냥도 아닌, 진지하게 하는 얘기입니다. 굉장히 망설이다 꺼내는 말이기도 합니다. 얼마 전에도 그렇고 이번에도 님이 반응하는 '어떤 패턴'을 보면서 느낀 건데, 전문가에게 심리상담 한번 받아보시길 권합니다. 주제넘은 참견이라는 거 압니다만, 님, 너무 아파 보입니다.

이상한 모자

2007.03.08 13:00:59
*.63.208.238

수군작님은 빛을 찾는 순례를 하고 계십니다.

하뉴녕

2007.03.08 16:39:34
*.46.105.47

1. 한 이틀 정신이 없는 처지여서 이제서야 이 리플들을 모두 정독했습니다.


2. 일단 글을 명료하게 쓰지 않으면 거기서 어떤 극한대립이 나올 수 있는 건지를 잘 본 것 같구요. 그 점 사과드립니다.


3. 그렇다고 제가 두분 논쟁 중에 어간 거친 언사에까지 책임을 느껴야 할 필요는 없는 것 같습니다.


4. 이 논쟁과 관련된 문제를 제대로 탐구하려면 본문의 맥락과는 전혀 다른 글이 나와야 하구요. 그 점은 굉장히 부담스럽습니다. 제 능력 안의 일이라는 보장도 없고.


5. 위에서도 말했듯 라캉의 말에 대한 이해는 ('목숨걸고 싸울'이란 단어가 부적절하긴 했지만) 쟁가님이 앞서고, 글의 문맥을 고려하는 부분에서는 ('고통보다 쾌락의 기대가 더 커야 욕망이다'라는 정의가 굉장히 자의적이긴 하지만) 노정태님이 앞서죠. 그런데 두 사람 모두 어떤 맥락에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는 제가 대강은 알겠단 말이에요. 그래서 두 사람 모두 그쪽 편에서 공격을 하시면, 제가 딱히 방어할 능력은 없습니다.


6. 그렇다면 왜 하필 대기업 노조를 언급했느냐, 다소 부적절하게. 또는 과장되게, 라고 묻는게 글쓴 제 입장에선 더 적절한 질문이죠. 대기업 노조는 한국의 상식인들의 입장에서 가장 비윤리적인 집단으로 공박당하고 있는데, 그 점에서 저는 비윤리적이기는 커녕, 대개의 사람들보다는 윤리적이다, 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거죠.


7. 삼성직원의 사례가 그렇게 적절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삼성직원 역시 욕망을 실현하고 있죠. 노조가 없는 대신 회사에서 '알아서' 실현해주는 형국이니까요. 그러니까 그가 욕망을 드러내지 않는 것은, 회사를 겁내서이기도 하지만 생활수준이 떨어지는 것을 겁내지 않아서이기도 합니다. (물론 삼성이란 기업의 특성상 전자가 압도적일 수는 있겠지만) 이건 말씀하신 대로 '욕망의 경제학'인데, 이 부분에선 쟁가님 말씀대로 윤리의 문제가 전혀 개입하지 않아요. 합리적 판단만 남지요.


8. 그러므로 같은 경제행위를 한 삼성직원과 (가령) 현자노조원 사이에 윤리적인 차이는 전혀 존재할 수 없다는 게 쟁가님 입장인 것인데,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건 윤리를 대하는 칸트적인 시각과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시각의 차이인 것인데, 가령 어떤 구체적인 개인을 구체성을 제거해 버린채 다른 맥락에 갖다놓고 가정법을 붙여가며 "그도 이 시점에선 이렇게 했을 거다. 그러니..."라고 전적으로 사람의 마음씨로만 윤리를 판단하는 입장에 동의하지 않아요. 둘다 경제적인 판단을 했고 생활수준이 비슷해도 현자노조원은 윤리적일 수 있고, 삼성직원은 그렇지 않을 수 있습니다.


"라깡의 욕망이란 개념을 어떤 식으로 재해석하고 확장해야 사회적 문제에 정교하게 적용시킬 수 있는가"에 대한 쟁가님의 의문은 적절하지만, (사실 저도 거기엔 답이 없죠. 거기에 답이 있다면 논문을 쓰지 왜 블로깅을 하겠습니까?) 쟁가님이 반례라고 생각한 것은 제 입장에선 반례는 아니라는 거죠. 그런 식의 논리를 좀 극단적인 사례에 적용한다면, 한국사에 명멸했던 수많은 정치인들의 대개는 김일성이 처했던 역사적 문맥에 위치시켰다면 '민족해방전쟁'이란 판단을 내렸을 사람들이죠. 그렇다고 김일성이란 인물에게 민족상잔의 비극에 대한 윤리적 평가를 내릴 수 없는 것은 아니지 않겠습니까?


9. 그런 점에서 욕망의 경제성에 대한 평가는 욕망을 드러내는 것을 윤리적으로 평가하는 일과는 전혀 다른 문맥에 위치한다는 것이 제 생각인데요. 그래서 이 부분에선 노정태님의 정의도 어긋나게 됩니다. 왜냐하면 노정태님의 욕망 정의에는 욕망의 경제성에 대한 평가가 필연적으로 들어가니까요. '욕망의 대추리'가 가능하지 않다는 말은 그것과는 좀 다른 얘기로 들립니다. 욕망 이론을 끝까지 밀고나간다 해도 그것은 처음에 욕망을 드러내는 것으로 시작되었던 일들이 그것에 대한 탄압을 통해 모종의 다른 종류의 문제로 변질되는 과정을 보여주는게 아닐까 해요.


10. 여기서 다른 문제가 하나 더 생겨버리는데, 가령 라캉은 그런 문제도 다 욕망의 문제, 혹은 욕망의 문제의 변형으로 취급할 수 있을 것 같거든요. 쟁가님이 '염원'이란 표현을 쓰며 약간 주저했던 건 그때문이라고 생각하는데, 거기서 노정태님의 반격이 생산적이냐는 거지요. 내가 프로이트를 신뢰하기 위해, 꼭 카톨릭 성인들 앞에서 "당신에게 이성이 따로 있는게 아니라, 메저키즘적 욕망이 당신을 지배하고 있는 거다."라고 말하고 비난을 받아야 할 필요는 없는 것 아니겠어요? 저의 경우는 "그것을 메저키즘적 욕망으로 치환시킨다 한들, 메저키즘적 욕망에 자신의 신체를 복속시키는 이들은 존중할 만하다."고 생각하는데 말이죠.


거기선 인문돌이의 문제가 나오지 않을 겁니다. 그건 "정신대 할머니들 앞에서 할 수 없다면 이영훈을 옹호하지 마라. 그렇지 않다면 그건 너희들의 지적 허영이다."라고 말한 이들의 시각과 비슷한 것이죠.


11. 무슨 문제가 이렇게나 많은지 ;; 빼먹은게 많더라도 두 분 양해 바랍니다.

쟁가

2007.03.08 18:42:16
*.50.69.85

이상한 모자님/ 진짜 궁금해서 그래요. -_-;;


한윤형님/ 얼추 정리된 것 같습니다. 대부분 동의합니다. 마지막으로 저에게 두 가지 의문이 남는군요. 첫번째는 그리 중요한 건 아닙니다.


1. 단지 "대기업노조가 상식인들 사이에서 가장 비윤리적 집단으로 공박되고 있다는 점"은 동의할 수는 없습니다(명확한 통계적 근거가 없을 뿐 아니라 정치인집단 등등의 '증오 직군'들이 몇몇 존재하죠). "대기업노조가 과도한 윤리적 비난을 받고있다"는 주장은 정당하나, "그들이 일반인보다 윤리적이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지금 보다 훨씬 풍부하고 정교한 근거들이 필요합니다.


2. 대기업노조(현자노조)와 삼성직원이라는 가상의 사례가 다소 작위적이라는 것에 저도 동의합니다. 수단의 유무를 놓고, 특정한 요구상황(성과급인상)을 수평비교하기 위한 불가피한 가정으로 이해해주시면 될 듯하네요. 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 비교가 '집단선택 vs. 개인선택'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이 양자를 비교할 때, 경제학적 선택이 가장 큰 요소이긴 하나 윤리적 잣대가 아예 필요없다거나 양자 사이에 윤리적 차이는 없다고 단정하기는 곤란합니다.
현자노조는 욕망을 드러내고 삼성직원은 욕망을 드러내지 못하는 상황을 가정하면 욕망의 경제학만으로 상당부분 설명이 가능합니다. 그런데 만약 삼성직원 한명이 같은 욕망을 양보하지 않고 사측과 맞선다고 가정하면 문제는 또 달라집니다. 이 때, 저는 삼성직원이 '더 윤리적'이라고 말하고 싶군요. 이때 삼성직원은 조직에 기대지 않고 '홀로 선 개인'으므로 상대적으로 더 큰 위험부담을 지는 것이며 따라서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윤리, 상대적 윤리성이 발생하니까요. 이를 보는 일반인들의 반응도 저와 다르지 않을 거라고 보고, '칸트적'인 의미에서도, '라깡적'인 의미에서도 그렇다고 봅니다.

좀 다른 얘기인데, 집단 vs.집단을 비교할 경우, 현대차노조가 기업노조형태를 유지하는 반면, 기아차노조가 비정규직을 끼워 산별노조에 참여한다면, 우리는 기아차노조를 "더 윤리적"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이 경우, 욕망을 드러내고 드러내지 않고는 윤리적 판단기준이 될 수 없고, 오히려 충분히 관철시킬 수 있는 욕망을 의지적으로 억압했기 때문에 윤리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개의 경우가 그렇지만, 행위자 개인의 선택이 100% 경제학적이라 가정하는 것은 비현실적입니다. 반면 개인이 아니라 노조와 같은 집합행위자는 상대적으로, 그리고 구조적으로 경제학적 선택을 할 가능성이 훨씬 높습니다. 그래서 집합행위자의 문제에서 욕망의 윤리를 적용하기가, 개별 행위자에서의 그것보다 힘든 것이죠. 오류를 무릅쓰고 거칠게 도식화하자면 <윤리적 개인 vs. 경제학적 집단>입니다. 물론 이건 어느 한쪽이 전적으로 윤리적이거나 경제학적이라는 얘긴 아닙니다. 집단도 윤리적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파리코뮌은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통치하겠다"는 욕망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처절하게 공격받았다고도 할 수 있지요. 파리코뮌의 기억은 좌파들에게 비극이지만 동시에 주이쌍스이기도 합니다.
집단이 윤리적 선택을 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고, 아주 가끔 그런 사건이 발생하면 처참한 역사적 비극이 되거나 혹은 위대한 역사적 순간이 됩니다. 하지만 그런 경우를 일반화하기란 불가능하므로 "집단의 문제를 다룰 때 윤리적 차원이 개입할 여지가 적다"(없는 게 아니라)는 게 제가 했던 주장에 더 가깝습니다. 또 얘기가 길어지네요.-_-;; 아무튼 욕망의 윤리학이든 욕망의 경제학이든, 모든 경우에 딱 맞아떨어지지 않습니다.


당위의 차원에서야 개인이건 집단에게건 욕망의 윤리를 요구할 수 있지만 현실설명력이 너무 떨어지기 때문에 공허해집니다. 특히 집단의 차원에서는 너무 특수한 당위인지라 거의 무력한 요구입니다. 개인의, 혹은 집단전체의 사활을 건 윤리적 결단을 요구하는 경우도 종종 있을테구요. 한편 욕망의 경제학이 현실 설명력은 있지만, 한윤형님의 의도, "우리는 욕망을 드러내야하고 이를 통해 갈등을 노출시켜야한다"는 주장을 뒷받침하기엔 또한 무력합니다.

이상한 모자

2007.03.08 18:12:24
*.63.208.238

젱가 / 제 말도 진짜인데요.. 작년 여름 쯤에 확인한 사실인데 무슨 빛을 찾는 순례모임인가 그런게 있는데 거기서 간사 비슷한걸 하고 있더군요. 요즘은 또 뭐하는지 잘 알 수 없지만.

쟁가

2007.03.08 18:18:47
*.50.69.85

이상한모자님/ 허거덩...글쿤여.

하뉴녕

2007.03.08 18:20:33
*.176.49.134

쟁가/ 삼성직원이 개인적으로 기업에 맞서게 될 경우에 "더 윤리적"이 될 거라는 판단에 동의합니다. 나머지 내용도 대개는 동의하구요.


다만 개인에겐 욕망이, 집단에겐 경제학 혹은 계급이 적절하다는 님의 말씀이 실용적이긴 하지만, 가령 천상계와 지상계를 지배하는 법칙을 나누어 서술했던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의미에서 '실용적'이란 말이죠. '좀 더 적절하다'는 것과 이 범주에는 이것만이 쓰여져야 한다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는 것을 님 역시 알고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오히려 "대기업 노동자들의 행동이 윤리적이다."라고 말했을 때, '대기업 노동자'가 전체 노동자 중에서 어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느냐를 두고 이 명제의 타당성을 검토하는 것 자체가, 이미 그들을 판단하는데 계급적인 시각을 동반하는 것만이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편견이 개입되지 않았나 하는 의문이 듭니다. 그러니까 님은 이미 계급의 관점에서 이 명제를 판별하고, 결국 이 명제의 관점보다는 계급의 관점이 더 올바르다는 일종의 순환논증을 하고 있는 셈이죠.


제가 본 것은 '대기업 노동자'가 아니라 '대기업 노동자의 행동'이거든요. 대기업 노동자의 행동을 전체 노동쟁의 속에서 바라본다면 항의할 '수단'을 소유한 중상위계층의 행동이라 볼 수 있겠지만, 아예 그런 매개의 지점을 제껴버리고 (제가 굳이 라캉의 '욕망'을 끌어들인건 오히려 그 지점을 위해서였습니다만) 더 많은 행동 속에서 보면 어떻게 될까요?


노정태님의 덧글을 제가 '이해'했던 건 굳이 대기업 노동자보다 항의하기 힘든 비정규직 노동자 (혹은 삼성직원) 등의 사례를 도입하지 않더라도, 그러니까 욕망에 대한 구체적인 권력의 탄압이 없을 때에라도, 타자의 시선이나 비난, 혹은 이데올로기적 강박관념 때문에 욕망을 포기하는 구체적인 행동 사례들이 대한민국엔 무척이나 많다는 사실을 전제에 깔고 이 글이 쓰여졌기 때문입니다. 즉 제 글은 전체 노동쟁의 속에서 대기업 노동자의 노동쟁의의 윤리성을 찬양하는 게 아니라, 그보다 넓은 맥락의 대한민국 국민들의 '행동' 속에서 대기업 노조의 '파업' 행위를 보고 있습니다. 타자의 욕망이 아닌 자신의 욕망에 귀를 기울이라는 것이야말로 라캉의 금언이 의미하는 바가 아니었던가요? 저는 그런 '포기'가 민주주의라는 제도를 작동하지 못하게 한다고 믿고 있고 굳이 제 인용의 맥락을 끼워맞춘다면 그런 틀 안에서 내용이 성립하지요.


물론 개인적 행동과 집단적 행동의 차이가 있다는 문제는 여전히 남습니다. 만일 파업하고 싶지 않은 개인이 노조에 휩쓸려 파업을 한다면 그건 정말이지 라캉적 의미의 윤리적 인간과는 거리가 멀텐데 그 점에 대한 대비책도 없구요. 그 점을 저도 알고 있기 때문에 님의 비판을 상당 부분 받아들인 것입니다. 하지만 오해가 있었기 때문에 좀더 설명을 드린 것입니다.

노정태

2007.03.08 18:34:36
*.152.81.180

젱가님/ 일단 저도 제가 했던 인신공격에 가까운 표현들에 대해서, 전부 나열하기도 힘듭니다만, 사과를 하겠습니다.

아무튼 논의로 돌아가보자면,
"대다수 사람들은 현대차노조처럼, "욕망을 추구하는 고통보다 쾌락이 큰" 행복한 상황이 아닙니다. 설령 현대차노조와 동일한 욕망(성과급 인상 등등)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걸 "욕망"이라 불러선 안됩니다. 노정태님 정의에 따르면 쾌락보다 고통이 크면 그걸 "욕망"이라 불러선 안되기 때문이죠."
-> 저는 기본적으로 현대자동차를 포함한 '대기업 노조' 소속 노동자들의 임금도 저평가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비교적 편하게 투쟁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나름의 역사적 맥락에서 형성된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겠지요. 그들이 속편하게 성과급 투쟁이나 벌일 수 있는 건, 삼성에 대한 풍문처럼, 직원들의 사생활을 감시하고 개인적인 통신 내용까지 회사에서 '관리'하는 등의 원초적인 인권 침해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노조를 만들겠다는 건 반드시 임금 인상만을 요구하기 위한 건 아니겠죠. 임금만큼 중요한 많은 것들을 지키기 위해 노동조합이 필요합니다. 제 정의에 대해서는 잘 이해하셨고요.

"따라서 "욕망"이라 부를 수도 없는 것을 드러낸다고 해서 "욕망을 드러냈다"고 할 수는 없죠."
-> 이것도 맞는 말.

"'윤리적 존재'가 되고싶어도 논리적으로 그럴 수가 없습니다. 이들이 욕망을 드러내어 '윤리적 존재'가 되는 길은 '바바리맨'이 되는 것과 같은 종류에 제한됩니다."
-> 여기서 젱가님의 논리에는 비약이 생깁니다. 윤리적 존재가 되는 방법이 오직 욕망을 드러내는 것으로 제약됩니까? 저는 그런 전제를 깔아놓은 적이 없습니다. 욕망을 드러내지 못하고 자신의 생존권을 위해 투쟁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어쩌면 좀 더 원초적인 의미에서 윤리적이라고 볼 수도 있고, 그 외에도 다양한 가능성이 존재합니다. 여기서 갑자기 배중률을 도입하고, 바바리맨의 비유를 넣으면서 쟁가님의 이해는 엉뚱한 방향으로 메다꽂히는 겁니다. 잘 나가다가 왜 이러시는지 모르겠어요.

님이 보시기에 제가 모순을 범하고 있는 까닭은, 전혀 엉뚱한 전제를 끌어다가 자신만의 잣대로 제 주장을 가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는 '욕망을 드러내는 사람만이 윤리적이며 그 외의 경우에는 윤리적이라고 불릴 수 없다'는 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인간의 윤리가 그렇게 협소한 건가요? 욕망을 드러내면서 윤리적일 수 있는 것처럼 욕망을 억누르면서도 윤리적일 수 있겠죠. 그거야 완전히 별개의 논의입니다만 문제는 님이 자신도 모르게 이상한 전제를 슬그머니 끼워넣은 다음, 거기서 영 엉뚱한 방향으로 '모순'을 도출하여 제게 들이대고 있다는 겁니다.


개인적으로 염려해주신 부분은 감사합니다. 저는 젱가님이 어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직업을 찾으셨으면 해요. 본인이 그 맥락을 제대로 감지하지도 못하는 다양한 분야를 건드리면서, 극히 상투적이고 표피적인 감상과 반응만을 내보이시는 모습이 너무 안쓰러워서 주제 넘은, 짜증 섞인 참견을 했던 것이 화근인 것 같습니다. 권태에 잡아먹히시고 있는 것 같아요. 어서 바빠지시길.

쟁가

2007.03.08 19:37:00
*.50.69.85

윤형님 말씀처럼
1. "한국에 사는 많은 사람들이 구체적인 권력의 탄압이 없을 때에라도, 타자의 시선이나 비난, 혹은 이데올로기적 강박관념 때문에 욕망을 포기"하고 있습니다. 옳은 지적입니다.


그러나 또한
2. 한국에 사는 많은 사람들이 사회구조적 제약 때문에 타인의 욕망이 아닌 자신의 욕망을 알면서도 포기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1.과 2.는 상호배제적인 게 아니라 유기적으로 공존하는 문제입니다. 그러나 제가 느끼기에, 1은 사회경제적 욕망이라기보다 문화적/섹슈얼리티적 문제에 더 가까워 보였습니다. 2는 그보다는 사회경제적 문제에 가까워보이구요. 둘 다를 욕망의 윤리학으로만 재단하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1부터 제대로 한 번 실천해보자는 말이라면 어느 정도 동의합니다. 그러나 2의 문제를 동시에 언급하고 해결해나가지 않으면 대다수 상식적인 사람들이 납득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누군 욕망이 없어서 이러고 사는줄 아느냐"라는 막말이 주는 효과는 꽤나 큽니다.


그리고 윤형님 말씀대로, 대기업노동자의 '행동'이 아니라 '대기업노동자의 행동'에 제가 더 방점을 두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제가 기본적으로 계급적 시각을 갖고 있기 때문인 것도 맞습니다. 계급강박증이라서가 아니라, 노동자의 행동을 이야기할 때 계급적인 시각을 미리 배제하는 게 저한테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윤형님이 말씀한, 그리고 제가 말한 몇 가지 골치아픈 문제를 남겨두고 대강 정리된 셈이로군요.


노정태님/


제 감상이 상투적이고 표피적인 걸 스스로는 인정하겠는데, 남이 그렇게 말하려면 트집이 아닌 근거가 있어야겠지요. 말 나온 김에 개인적인 근황을 말씀드리자면, 지금은 일종의 안식년이고 놀다 지치면 다시 취업할 생각입니다. 지금 작업하는 일들도 많고...저야 뭐 지금 20대보다야 취업하기 쉽죠.
노정태님은 사회진출할 나이가 되었는데, 그 전에 꼭 그 "짜증섞인 참견"하는 증후군을 고치도록 노력해 보세요. 무슨 일을 하든 논의의 핵심을 짚는 능력이 매우 중요합니다. 직장에서 회의할 적에 제일 짜증나는 인물이, 근면성실하긴 한데 끝없이 지엽말단에 집착하면서 삼천포로 빠지는 사람이거든요.

하뉴녕

2007.03.08 19:36:10
*.176.49.134

저도 문제가 대강 정리되었다고 느끼며 여기서 논쟁을 접겠습니다.

다만 다음에 제 블로그에서 쟁가님과 노정태님이 논쟁이 붙을 경우 그때는 모두 삭제할 예정이라는 점은 따로 공지드립니다.

쟁가

2007.03.08 19:40:24
*.50.69.85

한윤형님/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 앞으론 그럴 일 없을 겁니다.

hs

2007.03.11 08:07:58
*.232.106.56

거의 마흔개에 달하는 댓글과 본문을 뒤늦게 읽고난 소감은,

1. 윤형님이 본문 마지막 단락에서 라캉을 언급하는 순간, '욕망'이라는 기표가 윤형님의 본래 의도에서 벗어나게 된 것 같습니다.

2. 다들 알고 계시겠지만, 라캉은 요구(demand)와 욕구(need)와 욕망(desire)을 구분하는 편입니다. 윤형님이 마지막 단락에서 사용하신 '욕망'은 라캉적 의미로는 '욕구'쪽에 더 가깝지 않을까 합니다. 물론 '욕망' 개념을 라캉이 전세낸 것도 아닌 이상, 쓰는 이의 자유입니다만, '라캉'이라는 이름의 등장으로 인해 오해의 여지가 발생했으니까요. 게다가 뒤이어 등장한 라캉적 맥락의 '윤리'의 경우에도, 저는 그것이 기독교적 맥락의 πιστις(충실성 혹은 신실함 정도로 번역해야 할 것 같습니다)와 상통한다고 보기 때문에, 대기업 노조원들이 윤리적이라는 윤형님의 평가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3. 2.와 연결하여 생각해 보면, 노정태님께서 욕망이라고 부르신 것은 라캉적 맥락에선 욕구일테고, 염원이라고 하신 것이 라캉적 맥락의 욕망일겝니다. (물론 정확히 들어맞는 것은 아닙니다만..) 앞서 말씀드린바와 같이 글을 쓸 때 항상 라캉적 맥락에서 개념을 구사해야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이 경우에는 노정태님의 일상어와 라캉적 맥락의 철학-정신분석학 개념에 대한 혼동으로 인해 이후의 불필요한 마찰이 빚어진 것 같습니다.

4. 조금 다른 이야기입니다만, 좌파적 지향을 갖고 있는 분들의 글쓰기를 보면, 자신을 초월적인 비평 주체-혹은 judgement의 최종 심급으로 상정하는 듯한 느낌을 많이 받습니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멋모르는 이의 인상비평으로 받아들여 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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