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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다른 동물들에서도 찾아볼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 우리가 앞서 수호자에 비유한 동물에 있어서 찾아볼 수 있네. 자네도 알겠지만, 혈통 좋은 개들의 경우에 있어서 이것들의 기질은 천성적으로 낯익은 사람들이나 아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최대한 온순하지만, 모르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정반대일 테니까 말일세.”(플라톤, <국가>에서)

혈통 좋은 개와 늑대

어렸을 때는 꽤나 애국심(?)이 강한 편이었는데도 진돗개의 수려함을 찬양하는 말을 들으면 피식 웃음이 나왔다. 물론 내 생각에도 진돗개는 꽤 많은 종류의 다른 개보다 잘 생긴 축에 속했다. 다만 진돗개의 수려함은 이 개가 그 정도 크기의 개들 중에선 꽤나 늑대를 닮은 편이기 때문이라는 느낌이 들었던 것. 그렇다면 진돗개가 잘 생겼다고 해서 거기에 별도의 아름다움이 있는 것은 아닐 텐데, ‘그림자’의 아름다움을 자랑해 봤자 무엇 하겠는가. 그런 느낌은, 가령 훨씬 더 늑대를 많이 닮아 수려한 시벨리안 허스키 따위의 개를 바라볼 때 더욱 강해졌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하다. 우리가 흔히 ‘혈통 좋은 개’의 분별있는 온순함과 폭력성을 찬양할 때는, 분명 그들의 성격을 다른 어떤 개들보다도 ‘늑대’와 멀리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의 외모는 시시한 개들보다도 늑대에 가깝다니. 도대체 개와 늑대의 사이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어떤 의미에서는 늑대의 음험함과 폭력성이라는 것도 양치기들의 잣대에서 잰 것에 불과하다. 실제로 수컷늑대의 생태를 살펴보면, 그들은 우두머리 늑대를 중심으로 군집생활을 하고, 대체로 한 쌍의 암컷과 평생을 지내며, 암컷과 새끼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같은 무리끼리 암컷을 두고 싸울 때에는 이빨을 드러내지 않고 싸운다. 일종의 스포츠처럼 승패를 가리는 것이다. 야생동물의 폭력성 역시 생존을 위한 도구인 만큼, 어느 정도의 질서가 있다. 아마도 인간은 그 질서를 활용해서 자신에게 충성을 다 하는 ‘개’라는 종족을 만들어 냈을 것이다. 그렇기에 훌륭한 개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훌륭한 늑대의 자질을 갖추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비록 훌륭한 늑대가 반드시 훌륭한 개가 되지는 않을 지라도 말이다. 처자식에만 목숨을 바치는 늑대는 아직은 개가 아니지만, 적어도 그쯤은 되어야 좀 더 추상적인 것들에 -주군과의 의리든, 국가든- 목숨을 바치는 개를 상상할 수 있다.

늑대의 본성과 개의 목적

이것은 그저 논리적인 상상일 뿐이지만, 수현(이준기)은 실제로 그 사이에 있다. 그가 아리-지우(남상미)의 아버지인 마오(최재성)를 만났을 때를 생각해 보자. 처음에 마오는 수현에게 남성성을 과시하고, 아리를 끔찍이도 아끼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그의 시선 밖으로 사라진다. 그때 마오는 늑대의 모습으로 수현에게 각인되었다. 아버지 없이 자라난 수현에게 그것은 매우 인상깊은 장면이었을 것이다. 앞으로 따라야 할 삶의 전형을 보여주는 것과 같은. 그런데 마오는 얼굴을 보여주지 않은 채 그의 어머니를 살해하면서 수현의 정신에 치명상을 입힌다. 늑대의 논리로 볼 때 그는 어머니를 지켜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리하여 그는 붕괴하거나 단순히 복수를 위해 살아갈 운명이었다.

그러나 강중호(이기영)가 그를 한국으로 데려오면서 상황은 달라진다. 그가 태국 생활과 늑대의 맥락을 포기하고, 강중호의 아들임을 받아들이게 되는 사건을 드라마는 한 번의 싸움과 한 번의 매질로 간략하게 설명하고 있다. 사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자신의 힘으로 ‘죽거나, 혹은 복수하거나’ 하면 되는 거라고 생각했던 꼬맹이는 “형제와 싸우지 말라.”는 아버지의 금지 명령 속에서 쾌락을 느낀다. 그리하여 그는 새로운 아버지와 함께 새로운 국가도 받아들인다. NIS 요원이 된다는 것은 국가의 가장 충직한 개가 된다는 의미와 같다. 걸핏하면 ‘국가를 위해 싸우다 죽은’ 사람들을 쳐다보며 삶의 위안을 얻을 정도로, 그는 그런 생활에 익숙해진다.

그러나 트라우마를 안겨준 이가 돌아왔을 때, 그는 국가의 금지명령을 어기고 어머니의 복수를 하기 위해 격발한다. 억누르지 못한 늑대의 기질이 튀어나온 것이다. 문제는 여기서 개의 주인, 국가가 대응한 방식이다. NIS의 정부장(김갑수)은 그에게 언더커버를 제의한다. 사적인 복수심은 요원으로써는 실격이지만 언더커버의 업무에는 제격이라는 논리다. 그 말인즉 수현에게 늑대의 본성을 가지고 국가의 개가 되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개와 늑대가 구분이 되지 않는 시간’은 수현에게 있어 단순히 아군과 적군이 구별이 안 된다는 차원의 인식론적인 것이 아니다. 그에게 그것은 자신이 그 중 무엇인지를 알 수 없다는 차원의, 존재론적인 문제다. 늑대의 본성과 개의 목적이 정부장의 계산처럼 깔끔한 동맹을 맺지 못한다면 어찌할 것인가. 총을 맞고 인천 항만의 물속으로 쳐박히기 이전에, 케이의 이름을 받아들인 수현은 이미 그 지독한 딜레마를 경험했다. 마오가 지우의 아버지임을 안 순간, 지켜야 할 것과 처단해야 할 것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게 된 것이다.

자아를 유지하기 위한 선택

늑대와 개를 넘어서서 우리는 동일한 곤궁에 처해있다. 우리는 우리가 폭력성을 방출할 대상을 분별하는 방식을 잘 알고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 기준은 -충성하는 기준은- 사실 매우 취약한 토대에 있다. 기억상실증에 걸리자 자신을 K라고 생각하고 마오를 사실상의 아버지로 섬기는 수현의 모습을 보라. 현재 그런 일이 가능하다면, 어린 시절 우연적인 조건들 몇 개가 달랐다면, 자연스럽게 성장해도 충분히 그렇게 될 수 있었을 거라고 예상할 수 있지 않겠는가? 양아치처럼 행동하는 수현의 모습은 어딘가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것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트라우마가 없었고 강중호가 새로운 법을 제시하지 않았을 경우 그의 모습을 보여준다고 볼 수 있다. 적어도 드라마는 그런 추론을 의도하고 있다. 

지우의 상황도 어떤 의미에선 이것과 비슷하다. 그녀는 어머니를 불행하게 만들 수가 없어서 아버지를 버리고 어머니와 함께 달아났다. 어머니는 죽는 순간까지도 그녀에게 새아버지만을 인정할 것을 요구했다. 심지어 지우는 어린 시절 아버지와 나쁜 기억이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오랜 세월 동안 지우는 친아버지를 일정 부분 그리워하면서도 새아버지를 적극적으로 따른다. 그녀는 새아버지에게 충성하는 척 한다고 말할 수 있는 걸까? 그렇다면 ‘충성하는 척 하는 것’과 ‘실제로 충성하는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 하필 아리라는 이름과 지우라는 이름은 두 아버지가 각기 지은 것이다. 만일 처음에 도망가지 않았더라면 지우는 친아버지를 아버지로 여기고 살았을 것이다. 현재의 지우는 친아버지가 조폭이라는 이유로 멀리하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친아버지가 조폭이라는 게 비윤리적이라는 것이 아니다. 진짜 문제는 그 상황이 조폭을 버리고 떠난 양아버지의 성격과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반드시 한 쪽을 선택해야 하는 이유가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어쨌든 어느 쪽이든 선택은 해야 한다. 그래서 그녀는 선택한다. 이런 상황은 지금의 민기(정경호)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것이다. 수현과 지우의 사랑에 관한 에피소드는 그리 많지 않지만, 적어도 두 사람이 서로의 사정을 알고 있다면 끌릴 만한 이유는 충분해 보인다. 

하나의 선택은 다른 많은 선택을 가져온다. 일관된 나의 모습은 거울 속에 비친 자아다. 수현은 기억을 잃었을 때 깨어진 거울 속에서 분열된 자신을 체험한다. 이 분열된 자신을 수습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환상의 커플>에서 조안나(한예슬)는 자신의 패턴에 충실하게 행동하면서 그것을 수습하려고 한다. 남편에게도 ‘마녀’라고 여겨졌던 자신의 패턴이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장점을 발산하는 것을 확인하면서 새로운 삶을 얻는다. 얼핏 보면 수현은 조안나와 정반대의, 양립할 수 없는 사례를 보여주는 것처럼 보인다. 환경이 바뀌자 아예 인물의 성격이 바뀌어 버린 것처럼 보이니까. 그러나 그렇게 보이는 이유는 수습의 방법이 다르기 때문이다. 수현은 눈에 보이는 무언가에 충성을 하면서 분열된 자신을 수습하려 한다. 지금으로선 마오만이 그에게 완결된 이미지를 주니까. 어떤 경우엔 충성을 하는 대상이 바뀌면 충성을 하는 방식도 바뀐다. 그런 의미에선 케이-수현의 모습도 자연스럽다. 그러나 앞으로는 그가 택한 수습의 방식도 평탄하진 않을 것이다. 이 드라마가 담아내려는 진실은 근본적으로 개과 동물들에게 너무나 비정하다. 분별있는 폭력이, 서로를 후벼파고 있다. -한윤형 (드라마틱 26호,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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