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솔직함에 대해

조회 수 1475 추천 수 0 2007.02.16 18:49:55

아름다운 자연에 넋을 잃거나 아름다운 건축물 앞에서 감탄사를 연발하는 데는 아무런 윤리적 자의식이 따르지 않는다. 그러나 아름다운 여성 앞에서 호들갑을 떠는 것은, 미스코리아 대회를 둘러싼 논란에서 보듯, 더러 윤리적 비난의 대상이 된다. 거기에는 사람의 외모에 공개적으로 미적 잣대를 들이대는 것이 그 사람의 인격을 훼손한다는 판단이 깔려 있을 것이다. 말할 나위 없이, 외모(만으)로 사람의 값어치를 판단하는 것은 부당하다.

이 글은 가장 최근에 나온 고종석의 시평집 <신성동맹과 함께 살기>에 수록된 수필의 일부다. 이 부분을 읽는 순간 나는 이 글의 작성일자를 확인했다. 2002년도에 쓰여진 글이었다.

고종석 본인도, 2000년에 태동했고 2001년에 지적으로 융성했으며 2002년에 대중적으로 크게 확산된 안티조선 운동에 대해 "옛날옛적에 '안티조선운동'이라는 게 있었다."라고 표현한다. 그렇다면 안티미스코리아 대회를 포함해서, (그 대회가 지금도 열리는지 나는 확인해 보지도 않았지만) 미스코리아에 대한 논란이 있었던 시절, '아름다운 여성 앞에서 호들갑을 떠는 것'이 '더러 윤리적 비난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이 인지되던 시절도 '옛날옛적'이라 칭할 수 있을 게다.

고등학생 때 고은광순의 책을 한 두권 읽은게 영향을 미쳤는지는 모르겠으나, 나도 저 옛날옛적의 윤리대로 살아왔다. 운나쁘게 나와 연애를 했던 여성들을 제외한다면, 내가 어떤 여성을 보고 딱 꼬집어 '예쁘다.'고 칭한 건 한번이다. 그때 나는 열 아홉살이었고, 술에 취해 있었다. 다음날 나는 그 상황을 돌이키며 쪽팔려 죽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사람에게 내 행동이 불쾌했는지 어쨌는지에 대해서 물어보지는 않았다. 대개 불쾌할 거라고 생각했고, 그러지 않더라도 쪽팔린 건 변함이 없었던 것이다.

군대에서 또래 남자아이들과 '여자' 얘기를 할 때 이런 얘기가 나오면 나는 줄구장창 깨지기만 했다. 말하자면 그들에게 그러한 윤리는 납득은커녕 이해도 불가한 '다른 세계'였다. 여자들도 불쾌해하지 않는 어떤 것을 윤리라고 부여잡고 있는 내가 그들에겐 웃음거리였다. 그들은 그것을 윤리가 아니라 '독한 취향'으로 받아들였다. 나는 그들의 반응을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남의 프라이버시를 건드리는 놈은 못 참아."

"미안. 궁금해서 물어본 것뿐이야."

그렇다면 우에구사가 레이코의 프라이버시에 관련되어 있다는 말이 아닌가. 나는 솟구치는 호기심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너는 아주 예뻐. 그러니까 쓸데없이 너에 대해 이런저런게 알고 싶어지는 거야."

"그래?"

레이코는 그리 싫지만은 않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마음속으로 그럼 그렇지, 하고 중얼거렸다.

인용된 소설은 야마다 에이미의 <나는 공부를 못해>다. 고등학생인 히데미가 동급생인 레이코의 연애사를 캐묻는 장면이다. 나도 고등학교 때 고은광순 대신 야마다 에이미를 읽었다면 저 문제에 대해 좀 달리 생각했을 지 모른다. 한번쯤 저런 상황을 따라 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도 문제는 남는다. 히데미처럼 귀여운 아이가 아무리 여자들을 칭찬한다고 한들, 가령 배슬기가 <말괄량이>라는 노래에서 요구한 그런 칭찬을 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물론 아직 우리 사회의 여성들도, (사람에 따라 다르기야 하겠지만 대개) 그런 칭찬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요즘 우리 사회의 분위기는, 그런 종류의 솔직함을 장려하는 쪽으로 흘러간다. 그것을 거부하는 이들이 오히려 '허위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매도당하는 듯도 하다. 대개는 '허위의식'이란 단어도 사용되지 않고, 한마디로 난도질당한다. '쿨하지 않아.'

여기서 나는 낸시랭을 만난다. 허위의식을 혐오하는 한국인의 특성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어느 행위예술가 말이다. 나는 미술을 모르기 때문에 그녀의 미술에 대해 아무것도 논하지 않을 생각이다. 사실 대중문화 이상의 어떤 종류의 문화도 향유하지 않는, 교양과는 거리가 먼 평균적인 한국인인 내가, 행위예술가에 관심을 가져야 할 이유는 없다. 그녀가 <아티스트 낸시랭의 비키니 입은 현대미술>이라는 책을 쓰기 전까지는 말이다.

적어도 그녀는 책은 내지 말았어야 했다.

로마 신화에서는 '아프로디테'라고 한다.(p48)

물론 상식인들만 해도 그리스 신화의 아프로디테가 로마 신화의 비너스라는 사실을 안다.

영화 <오아시스>의 유명한 대사 "나 돌아갈래"부터,(p54)

평생 이창동 영화 한편도 안 본 나같은 사람도 "나 돌아갈래"가 오아시스의 대사가 아니라 박하사탕의 대사라는 건 안다. 이런 실수들이 그대로 남아있는 걸 보면, 출판사 교열부도 어지간히 이 책을 읽기 싫었던 모양이다.

뒤러의 <아담과 이브>를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그림은 일종의 집단 최면술을 표현한 것이 아닐까?" 인류의 기원이 아담과 이브였으니, (중략) 너와 내가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그냥 듣기에는 좋은 말이다. 하지만 매우 위험한 이야기다. 잘못하면 히틀러같은 파시스트가 될 수 있다. (중략) 혹시 누가 알겠는가. 독일인 뒤러의 피가 섞이고 섞여 히틀러를 낳게 한 건지.(p54-56)

대충 진중권의 문체만 따라한다고 아무나 파시즘의 분석가가 될 수 있는건 아니다. 그러나 이 책의 '지적 파탄'을 지적하는게 이 글의 목적은 아니니 넘어가자. 나는 낸시랭이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는 우리의 '솔직한' 욕망을 어떻게 응대해야 할 것인지가 내내 궁금하다.

나는 이 지리멸렬한 세상에서 '미술'이 '달러'가 되길, 머리 풀고 정화수 떠놓고 빌고 또 빌고 싶은 심정이다.(p22)

낸시랭의 생각에는 미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철저하게 '소비'의 대상이다. 미는 향유되는 것이 아니라 소비되는 것이다.(p38)

그러나 천만에, 낸시랭의 생각에는 여성은 남성보다 언제나 한 수 위다. 왜냐고? 남자들이 넥타이 매고 검은 양복입고 성냥갑 같은 빌딩에 갇혀 있을 때, 여성들은 샹들리에 반짝이는 백화점으로 쇼핑 간다. 사실 남성들이 들이대는 미의 기준은 별 것 아니다. 간단한 몇 가지 욕망만 충족시켜 주면 남자들은 열심히 돈 벌어 온다. 여자들은 남자들의 피와 땀을 지갑 속에 꼭꼭 채워서 명품과 바꿔 오면 된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인가.(p40)

욕망이 무슨 죄인가. 욕망을 포장하는 권력이 죄다. 그래서 나는 벗는 것으로 입는다. 그렇게 입고는 이렇게 외친다. "아저씨 날 똑바로 쳐다보란 말이에욧!"(p113)

이쯤이면 나는 낸시랭의 사고방식을 인용문만 통해 모두 드러냈다고 볼 수 있다. 내가 주목한 부분의 논리만 도식화하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모든 것은 욕망이다. 그것을 벗어나는 것은 없다. 둘째, 남자는 여자를 욕망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며, 비난할 일이 못 된다. 셋째, 여자는 남자의 욕망을 활용함으로써 얼마든지 자기 인생을 재미있게 살 수 있다. 

정말로 한국 여성들이 이런 식으로 재미있게 살 수 있다면 나도 좋겠다. 아마 평균적인 한국 남자들이 낸시랭을 싫어한다면, 그녀가 자신이 된장녀임을 자랑스럽게 떠벌리고 다니기 때문일 것이다. 된장녀 현상에 대해서는 따로 글을 쓸 생각이니 이 문제도 넘어가자. 이 부분에서는 차라리 낸시랭이 전복적인 부분이 있다. <호모 코레아니쿠스>에서 진중권이 낸시랭을 곤혹스러워하면서도, 결국 긍정적으로 언급한 데에는 이런 사정이 있다.

그러나 나는 크게 세가지 점에서 낸시랭의 세계관을 우려한다.

첫째는 '벗은 여자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는 아저씨'를 조소하는 것이 과연 정당할까 하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허위의식이다. 나도 에스컬레이터에서 나보다 여섯계단 쯤 위에 서 있는 미니스커트 입은 여자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는 정도의 허위의식은 있다. 그럴 때 나는 시선을 바닥에 깐다. 그 여자 옆에 애인으로 보이는 남자가 붙어 있을 경우 '이봐, 이럴 땐 당신이 여자 뒤에 서 주는게 예의 아냐?'라고 투덜투덜하면서.

말하자면 나는 허위의식에 대한 한국인들의 혐오에 반대한다. 자존심, 윤리, 이념과 같은 것들은 허위의식이라는 토양 위에서 자라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혹은, 그것들 자체가 하나의 허위의식이다. 하지만 나는 자존심이나, 윤리나, 이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그것들 모두를 가져야 할 필요는 없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보다 아름다워 보인다. 허위의식 자체를 부인하는 것은 결과적으로는 세계관의 다양성을 부정하는 행위가 된다. 욕망에 편승하는 행위 이외에는 모두 허위의식으로 매도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윤리'를 '독한 취향'에 불과하다고 폄하할 수는 없다. 하지만 '독한 취향'도 인정받지 못하는 곳에서, '윤리'가 발전하기는 힘들다. 언젠가 고종석은 이라크 파병 반대를 당론으로 내건 유일한 제도권 정당인 민주노동당을 일컬어 "한국 정치의 명예를 부분적으로나마 지켜냈다."고 평한 적이 있다. 그의 말은, 물론 모든 정치세력이 이라크 파병 반대를 내걸어야 한다는 얘기는 아닐 것이다. 이런저런 현실적인 주판알을 튕기는 사람들 사이로, 윤리적인 당론을 내거는 정당도 있어야 한다는 얘기일 것이다. 마찬가지 생각에서 나는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이 공화국으로서의 대한민국의 명예를 부분적으로나마 지키고 있다고 생각한다. 내 얘기 역시 모든 한국 남성들이 총을 들 수 없다는 세계관에 동의해야 한다는 얘기는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종류의 행동이 웃음거리가 되는 세상에 살고 있고, 그 '웃음'의 저변에 '허위의식에 대한 혐오'가 숨어 있는 것은 아닌지?

둘째는 철저하게 욕망의 입장에서 본대도 낸시랭의 솔직함이 특정한 종류의 욕망만을 드러내고 추인하며 결과적으로 다른 종류의 욕망을 억압하고 있다는 생각에서다. 솔직함이 어떤 욕망에 대한 솔직함이라면, 여러가지 욕망이 가능한 만큼 솔직함은 다양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여러 종류의 욕망의 충돌에 대한 개인의 곤혹스러움을 드러내는 것도 솔직함(이런 솔직함은 대개 '진솔함'이라고 칭하지만)의 영역에 포함시켜야 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 시대가 요구하는 솔직함은 이런 복잡한 솔직함이 아니다. 따라서 이 솔직함은 솔직함 일반이라기보다는 다른 종류의 욕망을 억압하는 욕망에 대한 특수한 솔직함이라고 이해되어야 한다.

전역 후 처음으로 이택광을 만났을 때, 이런 일이 있었다. 인사동에서 나보다도 어려 보이는 어떤 20대 여성이 길거리에서 무슨 물건을 팔고 있었다. 1차 때 그녀를 지나쳤을 때, 그녀는 몹시 추워보였다. 한시간 후 2차를 가기 위해 우연히 또 그녀를 지나치게 되었는데, 이번에도 그녀는 몹시 추워보였다. 1월, 한겨울이었다.

이택광 : 쟤들도 (길거리에 그런 여자가 그녀만 있는 게 아니었다.) 안 됐네.

나 : 그러게요. 왜 더 껴입지 않은 걸까요? 꽁꽁 껴입으면 훨씬 나을 텐데.

이택광 : (웃음) 저 여자들은 자기 몸의 상품가치를 윤형씨보다 훨씬 더 잘 알아. 더 껴입을 수가 없어.

나 : 하지만, 난, 몸에 이것저것 칭칭 두른 여자가 더 매력적이던데.

이택광 : 그거야말로 윤형씨 취향이고.

가령 이 단순한 사례에서도, 남성 소비자에게 어필하려는 욕망은 추위를 피하고 싶다는 욕망을 억압해야만 한다. 도대체 무엇이 솔직함일까? 낸시랭은 자기 자신이 상품임을 솔직하게 인정한다는 점에서, '솔직하다.' 하지만 여러가지 사진에서 그녀의 표정과 포즈는 매우 일률적이고 작위적이다. 그녀는 자신이 남성들의 상품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한에서만 '솔직하다.' 다른 부분의 욕망에서 그녀는, '전혀 솔직하지 못하다.'

셋째는 한국적인 삶에 대한 저런 식의 추인이 한국 여성들에게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아서다. 낸시랭의 생각처럼 행동해서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젊었을 때, 예뻤을 때, 결혼하기 전에는 그렇게 될 것도 같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주체성을 가지려고 의도한다면, 저런 식의 삶에서 행복을 느끼기는 힘들지 않을까? (물론 낸시랭식으로 행동해서 행복하게 살 여성들에 대해서, 나는 특별히 유감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가령 '빼어난 외모'가 여성들에게 무조건 도움이 된다면, 왜 KTX 승무원들은 그렇게 몸을 가리고 시위를 하겠는가? 여성들이 남성들에게 뭔가를 '요구'하기 시작할 때, '빼어난 외모'는 득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실이 되기 때문이 아닐까?

말하자면, 대부분의 한국여성들은 낸시랭도 페미니스트도 싫어하겠지만, 좌표를 그린다면 대개 낸시랭 쪽에 가까이 있을 것이다. 나는 페미니즘에 대해 무지하고 따라서 한국여성들을 반대편으로 끌어당겨야 한다는 사명감은 없지만, 이 좌표상의 위치가 한국여성들의 삶의 질을 개선하는 데 유리하리라는 생각은 전혀 안 든다.

그래서 나는 낸시랭이 드러내고 한국 사회가 추인하는 솔직함이, 한국인들의 삶의 양식을 긍정하지만, 한국사회가 한국인들을 억압하는 방식을 긍정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Milkwood

2007.02.17 01:23:33
*.177.1.12

평소에 생각하던 점이기도 해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제가 앞으로 하려는 말 자체는 윤형님이 글 속에서 이미 전제하고 있는 내용이라서 하나마나한 이야기긴 하지만요, 몇 자 적어봅니다. 낸시랭의 세계관에서 우려되는 점 세 가지에 입각해서요.

첫 번째로 '허위의식'에 대한 혐오가 있을 만큼 '허위의식' 자체가 '윤리'적으로 성장한 적은 없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허위의식에 대한 혐오가 얼마나 사회전반적으로 공통된 감정인가는 중층적으로 따져봐야 할 문제긴 하지만요, '허위의식'은 윤리로서 강요되었기보다는 사회 안에서 욕망을 최대화하게 하는 작동규칙(물론 윤리에도 이런 의미가 없다는 건 아니지만)으로서 강요된 면이 한국에서는 더 많지 않았나 합니다. 그런데 이 작동 규칙이 잘 들어먹지 않는다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혐오심이 생겼다기보다는 즉각적인 폐기가 이루어질 수 있는 거고요, 윤형님 말대로 하자면 이런 혐오나 폐기는 자기 욕망에 충실한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어쨌거나 '허위의식' 자체도 일종의 욕망의 실현으로 생각되던 시기도 있었던 게 아닌가 합니다. 그러니까 두 욕망 사이의 충돌이랄까..... 문제는 누구 시점에서의 욕망인가 하는 문제고요. 그러니 충돌하는 욕망은 서로를 배척하고요. 모든 허위의식이 윤리에 기반하고 있고, 모든 솔직함이 억압에서의 해방에서 기반하고 있는 게 아니라 윤리에 기반한 허위의식이 필요한 거고, 억압에서 해방이란 솔직함이 요구되는 건데 막상 사회에서 널리 실행되는 쪽은 필요한 방식의 허위의식이나 솔직함은 아니었다는 거죠.

그래서 이게 두 번째로 말씀하신 논지와 이어지는데, '이 솔직함은 솔직함 일반이라기보다는 다른 종류의 욕망을 억압하는 욕망에 대한 특수한 솔직함'이라는 지적이 맞게되는 거죠. 특수한 솔직함은 (솔직함이라고 인정할 수 있다면) 특수한 허위의식에 대응하는 거니까요.

세 번째의 점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습니다. 낸시랭은 행복할 것 같습니다. 그렇게 행동하지 못했던 낸시 랭보다는요. 낸시랭의 솔직함은 특정하기 때문에 한국 여성 전반에 도움이 된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요. 그렇지만 말씀하셨듯이 특정한 솔직함은 자신의 욕망을 한정된 범위 안에서 실현해주기 위한 수단이기 때문에 개개인의 선택에 있어서는 그 결과나 이점을 추산하기 어려운 듯해요. (지금 잠깐 논지를 잊어버려서 말하기가 어려운데), 이 특정한 솔직함은 '특정'하기 때문에 개인에게 작용하지 확대될 수가 없고 확대할 수 없는 사람만이 이 특정한 솔직함에 집착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낸시 랭을 비난하지만, 좌표상 더 유사하다는 지적에는 동감을 해요. 허위의식이든 솔직함이든 개인의 욕망이라는 토양이 다르지 않았기 때문, 여기서 말하는 허위의식은 윤형님이 추구하는 허위의식하고 다른데 윤형님의 개념은 개인을 넘어서 공동체적인 가치까지 포괄하고 있기 때문이겠죠.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개인적인 레벨에서 잘 실천되지 않는 것이기도 합니다. 낸시랭은 여자를 대표하지도, 당연히 팝아티스트를 대표하지도 않아요. 다만 즉각적이고 개인적인 욕망의 인간을 대표할 수는 있겠지요. 제 이해가 맞다면 이 점은 윤형님의 논지와 다르지 않은 듯 해요. 다만 특정한 허위 또한 즉각적이진 않아도 개인적인 욕망의 표현이라는 점에서 둘이 서로를 먹여주고 있다고 보기도 할 수 있겠어요. 욕망으로서의 허위의식이 없다면 욕망으로서의 솔직함이 별로 상품가치가 없잖아요.

하뉴녕

2007.02.17 12:40:31
*.148.250.73

사실은 (아직) 허위의식이 있던 시대를 살아보지 않아서, 한국적인 허위의식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그래서 제 '허위의식'은 책 속에 있고, 그 모습 그대로 책 바깥으로 나오는 거죠.

어쨌든 잘 읽었습니다.

쟁가

2007.02.17 13:05:24
*.50.69.85

윤형님 글도, milkwood님 댓글 모두 일리가 있고 공감도 갑니다.

허위의식을 '솔직하지 못한 것'으로 치환해버리는 것은 윤리적 측면보다 기능적인 측면에서 비롯한 것이겠지요. 저는 milkwood님 말씀도 저는 그런 취지에서 읽었습니다. 과거에는 허위의식이 충족시켜주던 어떤 욕망이 존재했는데, 이제는 더이상 그렇지 않기 때문에 즉 더이상 상품가치를 생산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솔직함'으로 돌아선 것이라고 봅니다. 게임이론식으로 말하자면 '허위의식'이 개체들에게 과거와 같은 효용을 주는 보수를 안겨주지 못하는 전략이 됨에 따라 최적대응이 '솔직함'으로 변화된 것이구요. 굳이 게임이론 얘기를 꺼낸 것은 윤리적 차원을 배제하고 말하기 편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욕망에 대해서 전혀 솔직하지 못하면서 상품가치의 욕망에만 솔직하다"는 말에 저도 전적으로 동감합니디만, 역추론해보면 '다른 욕망'이라는 것이 거의 무시될 정도로 상품가치가 압도적인 거죠. 좀더 명확히 말해서 '다른 욕망'이라는 것이 더이상 욕망 축에도 못끼는 상황이 도래했습니다. 따라서 너는 왜 다른 욕망에는 솔직하지 못하냐는 질문은 탁월하게 윤리적이지만, 전혀 기능적인 효과를 발휘할 수 없게 됩니다. 윤리적인 요청 대다수가 그렇긴 하지요.

"톡 까놓고 보면 모두가 원하는 건 다 똑같다"는 논리, 모든 유의미한 차이를 일거에 무화시키는 어떤 절대성을 쾌락원칙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신 앞에서 우리 모두가 죄인, 죄 없는 자 돌을 던져라"라는 종교적인 태도와 유사해지는 것 같습니다.

하뉴녕

2007.02.17 14:09:04
*.148.250.73

좀 더 명확하게 정리가 되는 듯 하네요. 좋은 댓글 감사합니다. ^^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3 우리편 전문가, 비평의 방법론, 그리고 현실의 재구성 [13] 하뉴녕 2011-09-13 26522
2 뭐?? 쥐뿔 보상도 안 되는 군가산점 따위가??? [3] 하뉴녕 2008-02-18 978
» 솔직함에 대해 [4] [1] 하뉴녕 2007-02-16 14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