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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요새 대통령의 내면을 지배하고 있는 정조는 '억울함'인 듯하다. 한 개인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일은 물론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그 '억울함'에 공적인 가치가 크게 없다면, 게다가 그 '억울함'의 주체가 사회빈곤층이 아니라 꽤 살만한 사람이라면 그 중요성은 점점 줄어든다.

가령 김영삼 전 대통령을 생각해 보자. 평균적인 한국인들이 김영삼 전 대통령을 평가하는 방식에는, 분명 문제가 있다. 그는 '평가절하'되어 있다. 문민정부에 대한 학자들의 평가도 그리 좋지는 않지만, 몇 가지 업적은 지적하고 넘어간다. 그런 점에서 볼 때 김영삼 전 대통령은 분명 '억울'하다. 그러나 지금 한국 사회에서 김영삼의 억울함을 해소해 주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문제일까?

현임 대통령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문제는 사실 그만큼도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억울함이 아니라, 그가 남은 임기 동안 무엇을 할 것인가이다. 나는 그가 자꾸 약자인 척 하는 것이 민망하다. 대통령 당선되기 전에는 오히려 그러지 않았다. '학벌없는 사회'인가 하는 모임에서 초청한 토론회에서, 당시 노무현 후보는 분명히 이렇게 말했다. 자신이 상고출신이라 해서 학벌문제에서 깨끗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자신은 사법고시 합격자이고, 그런 면에서는 분명 기득권층이라고.

물론 그는 정치인으로서는 비주류 중의 비주류였다. 하지만 대통령 당선되고 나서는 어떠한가. 대통령제 국가에서 대통령이 스스로를 약자로 칭하는 이 상황을 누가 이해할 수 있을까. 대통령은 조선일보 사주보다 분명 힘이 세다. 김대중 대통령조차도 그랬다. 수만명의 열성적이고 자발적인 노빠들이 여전히 옆을 지키고 있는 현임 대통령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여소야대 문제는 탄핵 신풍으로 2004년에 해결됐다. 지금에 와서는 집단탈당으로 다시 제2당이 되었지만, 임기말년에 레임덕 현상이 생기는 것은 막을 수 없는 일이다. 막을 수 없는 일을 막기 위해 자꾸 여러가지 이슈를 제기하는 것도 부질없는 짓이다.

구체적으로 언론들을 살펴보자. 조선일보는 노빠들보다 약하다. 그리고 중앙일보의 세계관은 노빠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양자가 결합해서 중산층을 빈곤층으로 만드는 게 대충 내 눈에 그려지는 근미래상이다. 그리고 동아일보는 아무런 생각이 없다. 대통령은 억울해 할 이유가 없다. 세상은 그가 바라는 대로 흘러가고 있다.

대통령이 쓴 글을 찬찬히 뜯어보면, 그도 그점을 알고는 있는 듯하다. 그리고 그 상황을 '진전'이라 보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나는 생각이 좀 다르다. 내가 예전에 안티조선 운동에 동의했을 때, 그 동의는 조선일보라는 하나의 주체를 향한 것이 아니라, 그 주체의 특수한 성격에 대한 것이었다. 노빠들이 조선일보를 해체(?)하는 방식은 반지성적이고, 심각하게 편향적이다. 세상은 하나도 좋아지지 않았다. 사우론이 끼던 반지를 사루만이 이어받았을 뿐이다. 최근 시사저널 사태를 보라. 세상은 더 나빠졌다. 월간조선이 최장집 교수를 탄압했을 때는 분개하는 시민들이 있었다. 하지만 시사저널 사태에는 오직 지식인들만 발언하고 있다. (나도 남말할 처지는 아니다. 그네들의 시위 현장에 한번도 가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년 동안 언론운동의 질은 전혀 성장하지 않았다. 오히려 퇴보했다.

이라크 파병과 한미 FTA에 대한 반대가 진보주의자들의 교조성을 보여주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참여정부가 이라크 파병을 강행하는 여러가지 가능한 방식들이 있었다. 물론 진보주의자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파병을 반대했으리라. 하지만 그중 참여정부가 택한 것은 가장 최악의 방식이었다. '반대'는 같았겠지만, '반대'하는 사람들의 '감정'은 점점 더 심해졌다. 나는 머릿속에서 대한민국보다 훨씬 더 미국에 의존적인 어떤 나라를 가상해볼 수 있다. 하지만 내 머릿속에서 가상된 어떤 나라도, 제 나라 국민을 인질로 잡은 테러범들이 24시간을 주며 철군을 요구하는데 6시간만에 서둘러 '파병방침 불변'이란 브리핑을 발표해야 할만큼 철두철미한 '부-자유' 상태에 놓여있지는 않다. 그런 '부-자유'를 상상하는 것이 오히려 '부자연'스럽다. 하지만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은 그 가능성을 실현했다. 차일피일 시간을 끄는 미련함을 버리고, 화끈하게 부시에게 러브콜을 보냈다. 그로써 대한민국을 공화국이라 믿고 살던 몇 안되는 공화주의자들의 얼굴에 침을 뱉었고, 몇 안되는 그들의 공화주의적인 '애국심'을 영구히 앗아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시 대통령이 파병한 국가들에게 감사를 표할 때는, 그 명단에서 누락되는 영광을 누렸다. 다행이다. 후세의 역사가들은 한국군이 이라크에 있었는지를 확신하지 못할 테니. 이렇게 철저하게 '명분'을 위배한 참여정부는 '실리'를 챙기지도 못했던 것이다.

한미 FTA를 반대하는 경제학자들이 '종속이론'이나 '신식민지 국가독점 자본주의론이니, 식민지 반봉건 사회론'을 가지고 반대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최근 유행하는 무슨 진보주의 이론을 가지고 반대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들은 그저 경제학의 원리대로, 주판알을 튕겨보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 진보진영은 개방을 할 때마다 "개방으로 나라가 무너질 것"이라고 걱정했으나 우리경제는 모든 개방을 성공으로 기록하면서 발전을 계속했습니다. 이제는 2만불 시대에 들어섰습니다.라고 말할 일이 아니다. 미국과 FTA를 체결해서 이득을 볼 수 있는 나라를 상상하려면, 나는 다시 머릿속에서 지구를 떠나 가능세계로 진입해야 한다. 고종석의 말대로 우리는 2002년에 너무 지적인 대통령을 뽑았다. 정책 하나를 비판할 때마다 내 머릿속에서 지구를 떠나야 하는 이런 대통령을 나는 상상하기 힘들다. 그런 대통령을 상상하려면 나는 다시 가능세계로 달려가야 한다. 그런데 그는 지금 대한민국에 대통령으로 현존한다. 환장할 일이다.

그는 참여정부의 지지율이 낮아지면서 민주화 세력 무능론이 대두하고 '다시는 진보세력이 정권을 잡지 못할 것'이라는 우려가 생기는 것을 우려한다. 그리고 그런 모든 우려가 부당하다고 말한다. 나도 그게 부당하다는 걸 안다. 하지만 한줌도 안 되는 좌파들이 '노무현 정부는 진보와 관계가 없어요- 진보는 그런게 아니에요-'라고 아무리 외쳐도 사람들은 그리 생각하지 않는다. 대통령은 비주류, 소수자, 진보의 표상으로 그 자리에 올랐다. 그의 실패는 그 표상에 담겨 있는 문화적 가치들의 실패다. 그러므로 그는 그 모든 것에 책임을 질 수밖에 없는데, 그걸 논리적으로 논박하고 있다는 건 결국 책임은 지기 싫단 얘기다. 정말로 그는 행복한 사람이다. 노빠들도 몇 만명이나 주변에 있고.

그 역시 그런 표상을 활용하지 않았던가. 기타 치고 이매진 부르면서 무슨 생각을 했단 말인가. 그리고 지금의 열린우리당도 그런 표상을 활용하고 있지 않은가. 2월 14일 발렌타인데이에 나는 열린우리당 전당대회의 현장에 있었다. 전당대회장 바깥에서 일군의 시민(?)들이 정동영 캠프에 결합하여 개헌 찬성 서명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온갖 운동권 노래 틀어놓고 '마임'을 추면서. 사람들이 그걸 보면 무슨 생각을 할까. 열린우리당은 결국 혼자 망하기는 싫고해서 운동권과 같이 망하기로 작정한 정당이다. 나도 운동권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리고 운동권도 우리 못지 않게 무능하다는 참여정부의 볼멘소리가 이해갈 때도 있지만, 그들에게도 스스로 깽판치다가 망할 권리는 있는 것 아닌가. 하지만 내가 보기에 운동권은 그런 권리를 결국 가지지 못할 것 같다. 나는 참여정부와 같은 물귀신을 일찍이 본 적이 없다.

2002년 국민경선 토론에서 노무현 후보를 '극좌'라고 칭했던 정동영 씨, 그는 개혁당의 열기를 보고 감화받아 노사모 일부세력에게 끝없는 러브콜을 보냈고, 결국 그 중 일부와 함께 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가 노무현에게서, 아니 노사모에게서 배운 건 이념은 아니고 (사실 배울 이념도 없으니까) '노빠식 참여'였다. 이 노빠식 참여가 민주세력의 대단합을 외치며 이루어지고 있는 동안, 전당대회는 표결도 없이 '박수'를 통해 의결되는 '파행'을 연출했다. 박수소리가 불쾌하게 귀청을 때리면 저 앞에서 진행자가 '만장일치로 통과되었습니다.'고 멘트를 때린다. 나는 보았다. 기간당원제 폐지를 선언하는 안건에서, 최소한 두 명의 대의원이 자리에서 일어나 '반대합니다!' 혹은 '이의있습니다!'라고 외친 것을. 하지만 그들의 목소리는 박수소리에 묻혀 들리지도 않았고 안건은 그대로 통과되었다. 진행자가 그들을 무시한 것도 아닐 것이다. 육천명이 노란막대기를 들고 박수를 치는데 두 세명의 목소리가 들릴 리가 있나. 이게 그들이 발전시킨 참여와 민주주의의 종착역이었다. 정동영 씨가 배운 것, 그것은 결국 새로운 의미의 동원정치다. 참여정부는 동원정부였다.

나는 정동영 씨 같은 위인들이 어떤 종류의 정치공학을 통해 울렁울렁 반 대 반 게임으로 한나라당 후보와 싸우다가 엉겁결에 대통령이 되어도, 이명박 대통령이나 박근혜 대통령보다 더 좋은 대통령이 될 거라는 생각이 전혀 안 든다. 그런데 왕년의 노사모 왕초 명계남 씨는 "정동영이 노무현이다. 나는 한나라당 후보를 이기는 사람은 무조건 노무현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고 말한 모양이다. 어떡하나. 이제 나는 범여권 후보로 예수가 출마한다고 해도 그의 당선을 바라기는 어렵게 되었다. 명계남 씨 말이 맞다면, '예수는 노무현'일 테니까.

고종석은 지방선거 직전에 적은 어느 칼럼에서, 열린우리당은 자기가 맞아야 할 매를 맞고 있지만, 민주노동당은 남의 매를 나눠 맞는 격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그 점을 안다면 여권도 조금은 위로가 될 거라나 뭐라나. 그 말이 맞다면 아무래도 억울해야 할 건 대통령이 아니라 한줌도 안 되는 진보주의자들일 게다. 대통령 말씀대로, 대한민국엔 진보주의자만 사는 게 아니다. 그래서 대통령이 맞아야 할 매를 약간만 나눠 맞아도 그들은 그렇게 힘든 것이다. 그 어려움에 대한 푸념 조금 들었다고 대통령이 저리 반론을 해야 한다면, 아마 진보주의자들은 대통령의 귀를 독점하고 싶은 심정일 것이다. 얼마 전에 만난 이순녀씨, 보험노조위원장으로 민주노총을 떠나 개혁당으로 투신했던 그녀는, 아직까지도 대통령 개인에 대한 미련은 버리지 못했지만 참여정부의 정책에 너무 실망한 나머지, 대통령이 퇴임하면 그와 함께 비정규직 세미나를 같이 하고 싶다고 했다. 집권동안 들어주지 않았던 말을 해야 한다나 뭐라나. 그녀는 요새 내가 만난 수많은 노빠들에 비하면 '순혈 노빠'도 안 되지만, 나는 화내야 할 대상에게 화내지 못하는 그녀의 심성에 생래적인 거부감을 느낀다. 그러나 대통령은 그래서는 안 될 것이다. 그가 한미 FTA나 이라크 파병에 반대하는, 혹은 참여정부를 평가절하는 '지식인'들을 같잖게 보는 것은 자유이지만, 적어도 그는 과거 자신을 지지했던 이들을 같잖게 봐서는 안 될 것이다. 사실 억울한 건 대통령이 아니다. 자신이 만든 대통령에 대한 비판이 성글다고 나같은 사람에게 '노빠'라는 욕을 먹어야 하는 그 지지자들이다.
 


nova

2007.02.21 07:59:26
*.100.197.208

이 글에 국정홍보처 트랙백이 걸려있는 것은, 2만불 시대니 입 닫아라 그런 뜻일까요? 거참. 트랙백 받고 참 난감하셨겠네요.

요즘 대통령과 그 주위의 팬클럽 말을 보고 있자면, 2002년에 비해 조중동의 영향력이 백배쯤 커진 것 같더군요. 그 어떤 대통령보다 많은 친위부대도 모자라 직접 대언론 사이트까지 운영하는 청와대, 가끔 TV에 등장해 본인이 직접 언론탓이라 세뇌하기. 이런 공세 속에서는, 모든 건 노무현/조중동 때문이라는 웃기는 이분법 속에 지지자들이 갇히지 않을 도리가 없다는 생각도 듭니다.

요즘, 관련 글에서 이야기하다 '모든 건 노무현 탓'이라는 조선일보 프레임에 갇혀 있다고 꾸짖고 대화를 거부해 버리는 인간들을 몇 만나서 살짝 짜증이 나 있었는데 이글 보고 기분 좀 풀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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