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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자음과 모음R 3호에 실린 특집의 한 꼭지입니다. 3호는 11월 초에 나왔습니다. 원래 제가 잡지 원고는 그 잡지 다음호가 나오기 전에는 블로그에 잘 안 올리는데, 잡지 홍보도 할겸 조금 미리 올립니다. '청소년 잡지'라곤 하지만 성인들에게 도움이 되는 내용이 많은듯 하니 관심있으신 분들은 사보세요. :) 저 유명한 굽시니스트 본좌님의 <한국 기업사> 만화는 특히 강추입니다.

3호 소개는 공식 블로그의
포스트를 참조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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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토론, 어떻게 할 것인가?


한국 사회 시민들의 언어생활 습관에서 ‘토론’이란 말은, 뭔가 ‘당연하게도 좋은 것’으로 여겨진다. 그말인즉 우리는 ‘토론’을 징글징글할 만큼 겪어볼 일이 드물다는 것이다. 가령 ‘토론수업’이란 말은, 대부분의 수업에는 토론이란 것이 없다는 걸 보여준다. 십 수년 전 중학교를 다니던 시절 내게 ‘토론수업’은 ‘주입식교육’보다도 더 지겨운 교육이었다. 학생 수가 많은 한국의 교실에서 토론을 하려면 분단별로 나누고 수업을 해야 한다. 선생님이 주제를 던지고 분단토의를 ‘명’하면 학생들은 잡담을 하다가 교사가 다가올 때쯤 하나마나한 소리를 한다. 대개 오늘의 ‘토의 정리’ 역을 맡은 공부를 두 번째 쯤 잘하는 학생이 -공부를 제일 잘 하는 학생은 보통 이런 때에도 영어나 수학 문제집을 붙들고 있고 교사들은 토의수업에 열성적이지 않은 뭇 학생들을 나무라면서도 이상하게 그들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잡담 내용과는 상관없는 주제에 맞는 적당한 얘기를 노트 한구석에 끄적거린다. 고등학교에 진학하자 수능 공부에 ‘올인’하느라 이런 풍경조차 사라져 버렸다.


여러분들에게 비밀을 한 가지 알려주자면, 이런 상황은 ‘어른’들의 감언이설과는 달리 고등학교를 졸업해도 별로 달라지지 않는다. 물론 많은 대학의 교양강의들은 중고등학교 수업보다 더 자유로운 질문을 허락한다. 하지만 거기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교수님의 일거수일투족에 집중하는 대부분의 학생들과, 단과대마다 하나 정도씩 발견되는 자신의 모든 의문점을 교수에게 끝없이 질문하여 강의시간이 끝나도 수업이 종료되지 못하도록 하는 ‘토론 종결자’들 뿐이다. 그래도 수십 명이 앉아 있는 강의실에서 ‘토론 종결자’ 1인의 계통없고 맥락없는 질문에 시달리는 교수들을 보다 보니 나는 차라리 “가르칠 내용이 너무 많아서 내가 혼자서 다 설명해야겠다.”고 선언하는 교수들의 강의를 더 좋아하게 되었다. 경험적으로 보았을 때 대개 그런 교수들의 강의가 더 흥미로웠고, 배운 것도 많았다.


토론이 없는 사회, 토론 특별 자치구!


이런 상황에서 그나마 ‘토론’을 하는 수업들이 있다면 ‘인터넷 게시판’을 활용하는 수업들이다. 많은 강좌들이 학교 홈페이지 서비스나 포탈의 커뮤니티 서비스를 빌려 수업 게시판을 운용하고 있다. 이런 게시판이 운용되는 경우 여러분은 한 학기 동안 한 두 번의 발제문을 쓰고 두 세 번 정도 남의 발제문과 ‘토의’할 의무를 짊어지게 된다. 좀 팍팍하다 느껴질 수 있겠지만 이런 규제가 있어야 한다. 어떤 순진한 교수는 성적으로 환산되는 토론량의 ‘기준’을 정해주지 않았다가 학점을 위해 계속 글을 올리는 모든 수강생들을 바라보며 정말 만족스러운 수업을 했다고 만족해했다. 하지만 그 교수는 나중에 학기 동안 각자 수십 건의 게시물을 올린 그 학생들이 그 수업을 고생스러운 것으로 여기고 자신을 원망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강요된 토론’이란 건 모순적인 말 같지만 토론이 잘 이루어지고 있음을 ‘전시’해야 하는 한국 사회에선 드물지 않게 벌어지는 사태다. 오늘날엔 일선 중고교의 수행평가 수업시간이나 대안학교의 체험학습 시간에 이런 일들이 종종 벌어진다고 들었다. 이처럼 특정한 시공간에서 토론이 강요되는 세태조차도 우리 사회에서 ‘토론’이 ‘일상’과는 거리가 먼 일종의 의례행위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환경에서 ‘인터넷 토론’이란 것은 묘한 위상을 차지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한국에서 ‘인터넷’은 ‘토론’이 가장 활발한 공간으로 묘사된다. 다른 나라에서도 그런 경향이 없지는 않겠으나 한국에선 정도가 좀 심하다. 사회적인 관계에서 상하가 뚜렷하고 하급자의 이견이나 항변이 쉽게 수용되지 않는 사회에서, 인터넷은 해소되지 못한 욕망이 들끓는 뜨거운 냄비가 될 수밖에 없다. 이를테면 몇몇 민선교육감들이 추진하면서 교육계에서 이슈가 되고 있는 ‘학생인권조례’나 중고등학교 교실의 ‘영원한 떡밥’인 두발규제 논쟁 같은 것을 생각해보자. 한 명의 고교생이 이 문제를 교실에서 교사와 토론하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을까? 그런 직접적인 관계에서의 ‘토론’이 너무 부담스러운 상상이라면, 이런 것은 어떠한가? 백분토론에서 교사와 고교생이 토론하는 모습은? 혹은 저널에서 교사와 고교생이 제 이름을 걸고 스스로의 입장을 대변하는 모습은?


사실을 말하자면 ‘학교에서 만나는 우리 선생님’과의 관계만이 문제가 아니라, ‘학생’의 처지로 ‘교사’와 공론장에서 ‘논적’으로 만날 권리가 없는 것이다. (누군가 이런 기회를 준다고 제안한다 하더라도 당연히 거절하는 것이 좋다!) 2008년 촛불시위의 단상에서 많은 십대들이 뜨거운 발언을 했던 것은 분명 그들이 평소에 그런 발언의 공간을 찾기가 어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예외적인 공간에서 그들은 ‘대통령을 비판한다.’는 전제 안에서 ‘한국 교육을 규탄할 자유’를 얻게 되었더랬다. 그러나 그런 공간은 흔하게 생겨나는 것이 아니고, 시위현장에 장학사를 배치함으로써 금방 닫히는 공간이며, 설령 열려 있을 때라도 시위대의 주장에 동의한다는 전제 하에서야 발언에 대한 호응을 얻을 수 있는 공간이다.


(한국 사회에서 정치적으로 심하게 배제되어 있는) ‘청소년’을 예시로 ‘소통’의 희소함에 대해 논하는 건 보편성이 없는 사례인 게 아닐까? 삼성직원들의 경우를 생각하면 꼭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그들은 ‘삼성직원’이란 정체성을 은폐하지 않는 한, 사내커뮤니티나 인터넷에서나 ‘회장님’을 찬양할 권리만을 가진다. ‘삼성직원’이 ‘삼성사주’를 비판하지 못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라 말해보도록 하자. 그렇다면 ‘다른 회사 사장’은 비판할 수 있을까? 아마 대기업 회사 직원 중 협력업체 담당 업무를 하는 이들은 협력업체 사장들을 좌지우지하겠지만 이것은 그 자체로 권력관계의 반영이지 권력관계의 역전은 아니다. 직장인이 좀 부자연스러운 처지라면 다른 사람들은 어떨까? 헐리우드 배우 스칼렛 요한슨은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부시를 마음껏 조롱하고도 사는데 별 탈이 없었다. 하지만 한국의 연예인들이 그 정도 자율성을 누리고 있다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총리실 민간인 사찰의 사례에서 은행과 거래하는 중소기업 사장이었던 김모씨는 자신의 블로그에 정부 비판적인 동영상을 스크랩한 후 사찰을 받아 별다른 흠결이 없었는데도 거래은행의 압력을 받아 업계를 떠나야 했다. 한국 사회의 정치적 민주화는 다시 독재사회로 역전될 수 없겠지만, 여전히 한국 사회는 ‘침묵’이 처세의 미덕이 되는 사회다.


인터넷 토론의 의의?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런 곳에서 인터넷은 해소되지 못한 욕망이 들끓는 냄비가 될 수밖에 없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인터넷 토론의 특성을 꼽아보자면 세 가지가 떠오른다. 첫째는 휘발성이다. 내가 남긴 말이 남들이 확인할 수 있는 공간에 오래 남지 않고 날아가 버린다. 둘째는 개방성이다. 다른 곳에서 이루어지는 토론과는 달리, ‘나’와 너‘가 하는 말을 누구누구가 듣고 있는 것인지 가늠하기 어렵다.


셋째는 비대칭성이다. 비대칭성엔 여러 가지가 있는데, 일단 신상정보 공개의 비대칭성이 있다. 가령 내가 실명을 걸고 논쟁을 벌이더라도, 논쟁 상대방은 실명을 공개해야 할 의무가 없다. 이것은 인터넷 논쟁의 공간에서 우리가 익명성을 선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많은 사람들은 익명성이 인터넷 공간의 본질적인 속성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실 익명성은 인터넷에서 선택되는 것이며, 인터넷에서조차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무던히 노력을 해야 한다. 디시인사이드(dcinside.com) 유저들의 ‘신상털기’에 희생되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면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또 다른 비대칭성으로 발언기회의 비대칭성이 있다. 인터넷은 개방적 공간이기 때문에 ‘룰’을 만들어 발언기회를 중재해야 하는 여타 공론장과는 다르게 발언기회의 비대칭성이 생긴다. 더 많은 시간을 들여 더 많이 발언하는 이가 생긴다. 물론 그가 이 기회를 제 논리의 명료함이 아니라 제 논리의 모순성을 드러내는데 사용할 수도 있지만 말이다.


마지막으로 발언확산의 비대칭성도 있다. 쌍방이 말하더라도 쌍방의 말이 같은 범위로까지 퍼지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타블로의 스탠포드 영문학 석사 학력을 의심한 ‘타진요’나 ‘상진세’의 주장의 대부분은 MBC 스페셜의 방영 이전에 넷에서도 논파완료된 것이었다. 하지만 ‘타진요’ 회원들이 그들의 주장을 합리적으로 논박한 이들이 없는 게시판에 자꾸 자신들의 게시물을 확산시켰기 때문에 계속해서 의구심을 품는 사람들이 늘어나버렸다.


이렇게만 정리해도 알 수 있는 사실이지만 인터넷 토론의 몇 가지 특징은 ‘소통’을 잘 되게하는 요인이기는커녕 교란하는 요인이다. 그럼에도 인터넷이 토론의 온상이 된 것은 다른 곳에서 토론을 할 수 없기 때문이며, 다른 곳에서 얘기할 수 없는 정치적·사회적 약자들이 ‘도망 다니면서’ 자신의 주장을 개진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가 인터넷이란 매체를 조심스럽게 대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인터넷엔 기존 여론의 권력구조에서 배제된 공론형성을 위해 필요한 의견과 단순한 유언비어가 공존한다. 따라서 인터넷을 무작정 예찬하는 이는 저급한 음모론 수천 수만 개가 가득한 세상에서 살게 될 것이며, 인터넷을 무작정 거부하는 이는 두세 개 당파의 도그마가 앎을 지배하는 세상에서 살게 될 것이다.


‘좋은 토론’이란 무엇일까.


인터넷 토론의 특성들이 ‘좋은 토론’을 방해하는 면이 있기 때문에 이 점을 보완하기 위해 개인들은 무던히도 노력한다. 가령 개인 홈페이지나 블로그를 운영하면서 과거 글을 저장하는 이들은 ‘휘발성’을 줄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소중한 노력들이 궁극적인 성공을 거둔다면 인터넷은 더 이상 소통의 공간이 되지 못할 것이다. 여기에 인터넷의 역설이 있다. 휘발성을 줄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개인만이 아니다. 이제 많은 포털사이트들은 ‘흘러가는 말’이었던 트위터twitter의 글들에 대한 검색기능을 제공한다. 이제 많은 회사들은 트위터에서 누가 ‘반기업적’ 언동을 일삼는지 대략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인사담당자들이 최종면접에서 구직자들의 싸이월드나 블로그를 검색·확인하고, 구글에서 이름을 검색해 본다는 식의 그럴듯한 ‘도시괴담’도 들려온다. 따라서 당신이 삼성의 행태엔 문제가 있고 2008년 촛불시위를 지지한다는 수준의 (사실 별로 진보적이지도 않은) 정치성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글은 필명으로 쓰고 싸이월드처럼 내 인간관계를 네트에 공개하지 않는 편이 현명한 일이다.


이처럼 인터넷에선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인간의 내면마저도) 투명하게 만들려는 욕망과 그 모든 것에서 도망치고 싶다는 욕망이 길항한다. 앞에서 나는 익명성이 인터넷의 본질적 속성이 아니라고 말했는데, 그 이유는 익명성을 지키는 것은 인터넷에서도 ‘심연의 한가운데에 놓인 밧줄을 타는’ 것처럼 아슬아슬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인터넷 토론의 기술”을 말하려면 ‘좋은 토론’이 무엇인지부터 말해야 한다. 어렵고 추상적인 정의를 내리겠다는 것은 아니다. ‘기술’이 무엇에 종사하는지 정도는 분명히 하자는 것이다. 인터넷 토론을 흔히 ‘키보드워리어’질이라고 부른다. 우리 시대의 글쟁이들뿐만 아니라 역사적인 글쟁이들을 검토해 봐도, 토론을 전투에 비유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악덕인 것 같다. 하지만 그렇다고 토론이 전투 그 자체라고 생각해선 곤란하다. 인터넷상의 ‘키보드워리어’질 교본들은 가르친다. 나는 상처입지 않고, 남은 상처 입히는 게 승리라고. 그러려면 스스로의 감정을 다스리면서 남의 감정에 생치기내는 술법들을 익혀야 한다. 그리고 앞서 말한 비대칭성 중 신상정보 공개의 비대칭성을 유지하는 것은 ‘감정 싸움’에서의 전략적 우위를 유지하는 첩경이기 때문에, 내 정체를 들키지 않기 위한 심리적·기술적 술책들이 중요해진다.


그런 것들이 인터넷 세상을 살아가는데 쓸모가 없다고는 말할 수 없다. 멀티, 도배, 인신공격 등은 인터넷 토론의 어디에나 따라다니는 것들이다. 하지만 이 지면에서 나는 그런 것들을 잘하는 방법을 말하지 않겠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토론을 위한 글쓰기란 이런 것이다. 첫째, 소재로 삼은 ‘사건’에 대해 정확히 접근하는 글쓰기, 둘째, 토론이란 ‘나’와 ‘너’가 그 사건에 대해 얘기하면서 그것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켜 나가는 것이란 점을 이해하는 글쓰기, 셋째, 그렇게 하여 토론이 이루어진 공동체에 보탬이 되기를 원하는 글쓰기다.


인터넷 토론을 위한 세 가지 팁! - 하나, 충실한 정보조사


물론 고루한 얘기다. 그리고 이렇게 접근할 때엔 ‘인터넷 토론’이란 것에 따르는 별도의 룰이 있을 것 같지도 않다. 그 점도 맞다. 다만 제시된 룰을 인터넷에서 실행하는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서는 따로 말해볼 것이 있을 것이다.


첫 번째 팁은 “주어진 논점에 대하여 충실하게 정보조사하기”다. 우리는 주로 자신이 관심있는 문제, 그래서 잘 알고 있다고 믿는 문제에 대해 어떤 이가 ‘뻘소리’를 지껄이면 분노하여 논쟁의 욕망을 느끼게 된다. 상대방을 해체하고 발라버리고픈 욕망에 휩싸이게 된다. 그래서 토론의 장에 뛰어든다. 하지만 우리가 언제나 ‘가장 잘 아는 논제’에 대해 말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우리는 자신이 충분히 잘 알고 있다고 믿었던 논제에 대해 생각했던 것만큼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사실 자신이 얼마나 알고 있는지 모르는 것이야말로 무지(無智)의 본성이다. 토론에 끼어들기 전의 정보조사는 그러므로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 팁은 앞서 내가 말한 ‘좋은 토론을 위한 글쓰기’의 첫 번째 조건, “소재로 삼은 ‘사건’에 대해 정확히 접근하는 글쓰기”와 관련이 깊다.


필자도 부정확한 정보와 기억으로 논쟁에 끼어들었다가 낭패를 본 경우가 많았다. 한 번은 양심적 병역거부를 옹호하는 입장에서 “나치 시대에도 양심적 병역거부가 인정되었다.”고 주장한 적이 있다. 또 한 번은 무상급식 논쟁에 끼어들면서 현행 초중고 급식이 위탁급식의 형태로 진행되는 것으로 오인하고 그 전제에 입각하여 글을 쓰기도 했다. 전자에 대해선 위키피디아 검색만 해봐도 나치 시대에 1만여명의 여호와의 중인 신도들이 강제노역하고 그중 2천5백명 이상이 순교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후자에 대해선 간단한 뉴스검색만으로도 초중고 급식의 대부분이 학교에서 직접 운영하는 직영급식 체제로 전환되는 단계임을 파악할 수 있다.


그런데 필자는 왜 이렇게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저질렀던가. 실수를 저지르는 누구나 그렇겠지만 믿는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양심적 병역거부에 관한 실수는 내가 어느 퇴역군인의 인터뷰에서 본 것을 그대로 따른 것이다. 나는 그 퇴역군인이 군대에 관한 얘기를 그렇게 잘못 얘기하리라고 상상하기 어려웠다. 어쩌면 그는 ‘나치의 탄압 이후 양심적 병역거부가 이슈화되고 인정받게 되었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 자신의 표현이 명료하지 못했거나 인터뷰를 쓴 기자의 착각 탓으로 그만 내용이 잘못 전달되어 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여하튼 경위야 어찌됐든 필자는 이로 인해 ‘쪽’을 팔아야 했다.


무상급식에 관한 실수는 필자의 기억을 믿었던 탓이다. 2004년 무렵의 위탁급식 업체의 부실도시락 파문의 기억이 너무 생생했던 것이다. 당시 필자는 인터넷상의 ‘부실도시락’ 성토자들과 함께 자료를 찾아보면서, 위탁급식의 비율이 만만치 않음을 확인했던 것이다. 지금의 청소년들에게 2004년은 매우 먼 기억이겠지만, 성인들에게 6년 전의 일이란 것은 구태여 그 연도를 끄집어내 기억하지 않으면 “얼마 전의 그 일”로 지각되기 쉽다. 필자는 “얼마 전의 그 일”이 언제였는지 구체적으로 기억해내지 않고, 새로운 자료를 검색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부실도시락 파문 이후의 시간이 초중고 급식의 직영화를 추진하기에 충분한 시간이라는 점을 그만 간과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래도 이 논쟁의 경우 당시 필자가 제시한 논점의 핵심이 직영급식-위탁급식에 있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치명적이진 않았지만 ‘쪽’을 판 건 매한가지였다.


여기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은 한 두 개의 정보만으로 사안을 판별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우리는 적어도 몇 가지 관점에서 쓰여진 수십가지 정보들을 고려해야 논제에 관한 대략적인 정보에 근접할 수 있다. 다행히도 이런 정보수집은 인터넷에서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나의 사건을 키워드로 검색하다보면 1990년대 이후의 언론기사들은 모두 검색이 되고, 운이 좋으면 그 사건을 직접 체험한 이들이 블로그 등에 남긴 소회글도 찾아낼 수 있다. 이런 정보들까지 얻는 데에도 서핑 한 두시간이면 충분한데, 정보가 이 정도가 되면 실제로 그 사건을 겪은 당사자에 준하는 정보를 얻기 마련이다. 필자의 실수에서도 알 수 있듯이 피해야 할 것은 ‘원소스의 정보를 신뢰하는 것’이다. 위키피디아도 안 된다. 위키피디아 역시 누군가 축약한 정보가 원본과의 대조없이 유통되는 인터넷의 한 장(場)일 뿐이다. 나는 예전에 읽은 책의 내용이 잘 떠오르지 않아 위키피디아를 뒤졌다가 그 내용요약에 고개를 갸우뚱하며 다시 책을 찾아 읽은 적이 있었다.


그래도 위키피디아 사용자는 의도적으로 정보를 왜곡하려는 의도는 없지만 인터넷상에서 본 누군가의 글이라면 의구심은 더욱 커진다. ‘타진요’가 인터넷 여기저기에 퍼나른 타블로의 학력의혹에 관한 글들은 그들이 제시한 근거를 찾아서 본다면 허황된 것이었다. 즉 그들은 타블로가 하지도 않은 말을 했다고 하기 위해, 있지도 않은 학력위조의 정황증거를 제시하기 위해, 그림파일들을 의도적으로 왜곡했다. 그들은 그 게시물을 본 대부분의 사람들이 원소스를 찾아볼 생각은 하지 않고 게시물 안에서 끼워맞춰진 증거들의 논리에 동요되고 흔들릴 거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당신이 그 게시물에서 벗어나와 블로고스피어에서 ‘타블로’나 ‘타진요’를 키워드로 검색해서 글을 살펴보면 MBC 스페셜의 방영 이전에도 그들의 주장이 얼마나 허황된 것임을 충분히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둘, 논점에 대한 정확한 요약


두 번째 팁은 “상대방의 논점을 정확하게 요약하기”다. 이것 역시 어떤 토론에서도 요구되는 덕목이다. 특히 TV토론 같은 곳에서는 얼마나 빠르고 정확하게 상대방의 논점을 요약하고 이에 대한 방어논리를 세우냐가 그 사람의 토론 실력을 보증하는 것이다.


인터넷에서도 ‘속도’는 물론 중요하지만, TV토론만큼은 아니다. 상대방의 논점을 정확히 요약하라는 요구는, 상대방이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를 이해하고, 그 이해의 틀 위에서 논점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재서술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팁은 내가 말한 ‘좋은 토론을 위한 글쓰기’의 두 번째 조건, “토론이란 ‘나’와 ‘너’가 그 사건에 대해 얘기하면서 그것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켜 나가는 것이란 점을 이해하는 글쓰기”와 밀접한 것이다.


요약을 잘하는 사람은 정말로 부럽다. 어떻게 하면 ‘요약도사’가 될 수 있을까? 너무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 사실 인터넷은 요약능력을 걸음마부터 뜀박질까지 향상시킬 수 있는 장이다. 인터넷 초창기의 토론자들은 마치 자신이 손으로 글을 쓰는 문필가인 듯 상대방의 ‘에세이’에 자신의 ‘에세이’로 대항했다. 그런데 이런 식의 토론(?)이 진행되면 서로가 서로에게 던진 질문을 서로가 생까고 그냥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유려한(?) 문장으로 풀어내려고 하는 경향이 생겨났다. 그러나 PC통신에서부터 게시판 토론에 단련된 실용주의자들은 다른 방식을 택했다. 그들은 상대방의 게시물을 그대로 두고 그것을 단락별로 해체하는 방법을 택했다. 초창기 인터넷 게시판에서도 ‘Re’ 버튼을 누르면 상대방의 게시물이 그냥 그대로 떴다. 우리는 그 단락 사이사이에 “---->”와 같은 부호를 집어넣고 코멘트를 할 수 있었다.


상대방의 모든 단락을 찢어발기고 대꾸하는 이런 방식의 논쟁은 상대방도 이런 식으로 대응할 경우 종종 지저분해졌다. 문단 사이로 “---->”가 난무하고 종국에 이르러선 'Re'의 연쇄 속에서 누가 한 말이 무엇인지조차 알아내기 힘들었다. 이런 단계를 지나치다 보면 상대방의 긴 글을 요약하고픈 욕망이 생겨난다. 이때에 상대방의 논점을 요약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와 함께 쓰여진 내 짧은 코멘트들을 다시 한번 주욱 읽어보자. 내용이 겹치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그건 상대방이 비슷한 얘기를 했기 때문이다. 그런 것들을 정리하여 합치는 것부터 시작해보자. 훨씬 간결한 얘기를 할 수 있다.


이런 일을 반복하다 보면, 나중에는 그 사람의 글을 링크로 걸어논 후 내가 쓰는 글의 본문에선 A4 반페이 정도 분량으로 그 사람의 A4 2-3페이지의 중언부언을 요약하는 일도 가능해진다. 사실 이런 식의 글쓰기는 ‘Re' 버튼이 없이 다른 주소에 놓여진 텍스트를 상대해야 하는 블로그 시대의 글쓰기에 참 걸맞다. 한번 실천해보자.


팁 셋, 패배를 두려워 말라!


마지막 팁은 “나 자신의 ‘옳음’에 대한 강박을 버리기”라 말할 수 있다. 간단히 정리하면 패배를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는 얘기다. 이 팁은 물론 내가 앞서 말한 ‘좋은 토론을 위한 글쓰기의 세 번째 조건’, “토론이 이루어진 공동체에 보탬이 되기를 원하는 글쓰기”를 위한 것이다.


누구나 내가 남보다 잘났기를 바란다. 토론의 영역이라면, 내가 한 말이 옳기를 바란다. 그 말이 숙고 끝에 개진한 주장이든, 홧김에 내뱉은 말이든 간에, 자신의 말이 부정당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무작정 내 말이 옳기를 바라는 것은 현실적이지도 않을뿐더러 토론의 역할에 비추어  봐도 바람직하지 않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는 옳은 주장을 개진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토론에, 그 토론이 일어나는 공동체에 기여할 수 있다.


토론을 하는 우리는 언제나 코끼리를 함께 더듬는 소경이다. 누구는 다리를 만지고 코끼리를 통나무와 같다고 하고, 누구는 몸통을 만지고 코끼리를 바위덩어리 같다고 한다. 이들의 접근법이 만날 때 우리는 코끼리에 대한 하나의 상(象: 이 한자는 방금 말한 그 고사에 의거해, ‘코끼리’와 ‘모습’이란 뜻을 가진다.)을 얻는다. 물론 이 상조차도 여전히 불완전한 것일 수가 있다. 여하간 토론을 통해 우리는 전진해 나간다.


‘좋은 토론자’가 된다는 것은 적어도 남들의 전진속도에 뒤처지지 않으면서, 지금까지 나온 정보와 논점을 모두 활용하여 코끼리의 본질에 다가설 수 있는 의견을 펼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나는 두 개의 팁을 제시했다. 하지만 우리는 언제든지 실수를 할 수 있다. 팁을 알아도 숙달되기 전에는 잘 실행이 되지 않을 수 있고, 사실은 팁이 숙달된 뒤에도 종종 실수를 한다. 우리는 인터넷에서 익명을 유지할 경우 논쟁을 하다가 줄행랑을 칠 수도 있고 줄행랑을 친 과거를 지워버릴 수도 있다. 이런 것들이 전적으로 나쁜 일이라 규탄하긴 어렵다. 하지만 언제나 도망만 간다면 위에서 말한 팁들을 숙달할 기회가 생기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어째서 어떤 사람들은 글을 많이 쓰는데도 잘 늘지 않고, 어떤 사람들은 글을 쓰는 만큼 느는 것일까? 그것은 그가 맞은편의 장님을 생각하는지, 아니면 코끼리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는지에 따라 달려있다. 내가 주어진 정보로 코끼리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함을 한탄하는 사람만이 좋은 토론자가 될 수 있다. 코끼리의 진짜 모습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만이 좋은 토론자가 될 수 있다. 설령 코끼리의 모습이 우리 장님들에게는 끝까지 포착되지 않을 저 너머의 것이라 해도 그렇다.


그리고 코끼리를 향하는 길은 언제나 좌절을 경험하는 길이다. 차이가 있다면 남들이 이미 겪고 지나친 좌절을 경험하느냐, 아니면 논의 자체의 한계에 부딪히느냐는 것 뿐이다. 어느 쪽이든 우리가 넘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인터넷엔 넘어지는 사람들을 보고 비웃는 사람들이 지나치게 많다. 그러므로 당신은 넘어지는 꼴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길 꺼릴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잃는 것이 없이는 성장도 없다는 것은 만고불변의 진리였다. 인터넷을 통해 토론능력을 향상시키는 이들이 인정해야 하는 것도 결국 그런 진리다.   


 


에라스네츠

2010.12.08 12:12:49
*.168.64.56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곳으로 퍼가도 되나요?

하뉴녕

2010.12.08 12:25:34
*.149.153.7

실린 매체와 출처 표기해주시면 상관없습니다~

음..

2010.12.08 13:24:29
*.214.245.94

정말 성인이 읽어도 좋을 만한 내용이네요.

p.s. 제가 생각해도 요약정리 능력이 정말 중요한 거 같네요.

조갑제의회개

2010.12.08 13:54:53
*.149.40.249

와 역시 한윤형은 이 시대의 스승이다... 진짜 쓸모있고 유용한 얘기를 하잖아 늘

토론이 시러ㅠ

2010.12.08 14:38:55
*.182.132.40

저는 대학에 진학 후, 뭣도 모르던 새내기 때, 수업 시간에 덜컥, ‘토론해보라’라는 ‘명’이 떨어지면, 어찌할 바를 몰라 했습니다. 공부라는 것이, 객관식 형태의 시험 점수로 다 환산되는 그것이라고 알고 있던 제게, 지식을 말로서 표출하라는 것은 너무 어려운 일이었죠. 그러한 이유로 토론이나 발표가 동반하는 수업은 될 수 있으면 회피하게 되었습니다. 뭣도 모르고 참여한 문예 동아리도 탈퇴하구요. 하지만 그것에 대한 열등감은 남아서, 익명이 가능하여 터놓고 연습이 가능한‘인터넷 토론’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진중권’을 알게 되었죠. 그를 앎으로서, 논리를 갖춘다는 것, 논점 이탈의 오류를 범하지 않는 것, 꼴통들 까대는 것이란 무언가를 대충은 알게 되었던 거죠. 이러한 계기로 인해 오늘도 저는 사안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삶의 태도를 놓치지 않으려 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오랜 시간이 지난 오늘도, 여전히 ‘토론해보라’라는 ‘명’은 왠지 불편하고 성가신 일로 느껴집니다. 차라리 글을 쓰라면 써내겠는데, 면대면 토론을 하는 건 부담이 되요. 상대를 대놓고 까는 것도 싫고, 상대가 나를 대놓고 까는 것도 싫더라구요. 물론 그 정도의 열정을 쏟아 토론할 일도 없었지만, 그리해야 할 목적이 무엇인가에 대해 회의가 들었습니다. 단지 세상의 사기꾼들의 말발에 속아넘어가지 않기 위해 자가적인 논리력을 갖춰야 할 필요는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마지못해 업무상 말을 뱉어야 할 일 외에, 그 이상으로 진정성 있는 토론을 할 기회는 저에게 없을 것 같습니다. 제가 보아온 20여 년동안, 책 한권 읽으시지 않는 어머님, 아버님과 동생 사이에서 말발이 늘긴 어려운 일이었겠죠. 외국영화에서처럼 커피 한잔을 앞에 두고 논리가 등장하는 건 그저 지적인 로망이었던 것 같습니다.

진실로

2010.12.08 16:04:16
*.132.77.191

키워계의 본좌 답군요..

지나가던 행인

2010.12.09 00:01:47
*.46.209.134

오오 과연 1세대 인터넷 논객의 노련함이 한껏 묻어나오네요 오오

그리핀

2010.12.09 08:26:59
*.223.191.68

갈등의 틈바구니에서 진리의 끝자락을 잡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해왔는데 역시 윤형님의 노련한 글은
'갈무리 1순위'의 위엄이 돋보입니다.

저도 실생활 속 문학 동아리나 여타 인터넷의 게시판에서 인기도와 영향력에 의해 주장의 파급력이나 설득력이 왜곡되는 현상을 보고 허무함에 빠진 적이 있었죠. 뭐 결국 '자신이 옳다'가 관철되는
승률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토론의 관람자, 관찰자에게 각자의 근거가 충돌하며 형성되는
'온전한 형태의 큰 그림'의 제공이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넷 상에서 '논박을 위한 촘촘한 자료를 찾는 수고로움'을 개의치 않고 논리가 단초로운 풋내기들
(대체로 존중하기 어려운 자존심 밖에 없는 치들)과 '싸워 주는' 과정에서 피곤한 상처를 입는 것에
의연한 분들에 대한 감사 또한 배웠습니다.
긴 말 짧게, 오늘도 좋은 글에 감사합니다. 항상 건강 챙기시길.

시만

2010.12.09 22:04:21
*.25.134.65

병풍에 넣고 싶은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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