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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개혁, 혹은 고통의 평등주의

조회 수 7125 추천 수 0 2011.04.15 20:04:53

* 덧글 토론의 내용을 다소 추가하였음. - 4/17

 
- 이 글은 일종의 '메모'이며, 본인의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올리는 것인지라 가독성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 대략 
2011/01/26 - [정치/메타-비평] - 한국 보수와 진보의 판타지 이 글과 비슷한 문제의식에서 연유한, 비슷한 형식의 글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 '고통의 평등주의'라는 개념은 문화평론가 이택광이 즐겨 사용하는 '쾌락의 평등주의'를 살짝 변형한 것이다.  


 
--- 이 글은 카이스트 대학생 연쇄자살 사건에 대한 한국 사회의 반향에 대해 고민하다가 작성되었다. 말하자면 한국 사회에서 그들의 죽음에 대한 사회적 책임이 면제되는 방식과, 그것을 규탄하는 진보주의자들의 평론의 무기력함의 원인을 탐구하는 글이다. 이 사건에 대해 나는 경향신문에 이미 글을 한 편 썼으나, 2011/04/15 - [정치/분석] - [경향신문] 빈곤층에 교육비 더 물린 ‘징벌적 등록금제’ 두 편의 글은 연결되지 않는다.



1.

공부방에 나가는 친구들의 말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르치는 빈곤층 자녀들이, 무상급식에 찬성하지 않아서 당혹스럽다고 했다. 빈곤층 자녀들은 "왜 세금으로 부잣집 자녀들을 먹이느냐."고 반발한다고 했다. 이것을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에 포섭된 결과라고 단순하게 설명하는 것은 적절치 못한 것 같다. 그렇게 말하는 순간에 그 빈곤층 자녀들은 오히려 분명하게 '계급적 적대'를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고, 무상급식 찬성론자들은 그에 맞서 부잣집 자녀들에게도 세금으로 밥을 먹을 수 있는 권리가 있음을 옹호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식의 '계급적 적대감'은 개혁정책에 대한 원군이 될 수도 있지만 적군이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만사에 계급적 적대감을 표출하면 세상 문제가 잘 해결될 것처럼 얘기하는 어떤 영성적 사회주의자들의 단순무식한 주장에 우리는 찬성할 수가 없는 것이다. 



2.

사회적으로 용인된 고통의 기준이 너무 높다면, 나보다 처지가 나은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의 고통을 증가시키는 것이 '개혁'으로 보일 수가 있다. 용산에서 망루에 올라간 사람들이 죽었다. 그런데 사회는 그들이 죽거나 말거나 상관하지 않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사유재산을 침해한 것이 잘못이라고 주장한다. 경찰의 수장은 사망한 철거민이 아니라 '도심의 테러리스트'들에게 살해당한 경찰에 대해서만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 명백하게 부유하지 않은 꽤 많은 사람들이 그 말에 동의한다. 이를 두고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에 포섭된 결과'라고 표현할 수 있을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것으로부터 파생되는 결과는 지배계급의 의도와는 또 다른 것이다.


이를테면 사람들은 '가장 어려운 사람들'이 아닌 이들이 당한 고통에 대해 감정이입하지 않는다. 시나리오 작가 최고은씨의 죽음에 대해 '아르바이트라도 했어야 했다.'고 말하는 이들은 보수진영 뿐만이 아니다. 노동자들의 죽음이 그녀의 죽음에 비해 덜 다뤄지는 것을 애석해 하는 이들이 그런 식의 말을 한다. (최고은씨의 처지가 빈곤층보다 나았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사회의 시선은그녀에게 '예술가의 길을 포기하지 않은' 따위의 딱지를 붙여 그녀를 빈곤층으로의 하강을 거부한 사람으로 만든다.) 뭐 여기까지도 체제에 순치(?)된 결과라고 생각할 수 있을 거다. 하지만 체제가 요구하는 그 논리(?)를 충실하게 받아들인 '시민'들이 요구할 수 있는 것은 더 있다. 말하자면 그 시민들은 이른바 명문대 학생들이 자살할 정도의 스트레스를 받는 경쟁의 압력에 시달리는 것을 '어쩔 수 없는 현실'이 아니라 '그래야만 하는 당위'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체제가 가르쳐준 것을 적용한다면 그건 논리적 필연일 수가 있다. 이것이 소위 '노블레스 오블레주'라는 단어가 한국적으로 수용된 방식이 아니겠는가.




3.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어째서 "약자는 죽어도 되고 살아남은 유능한 강자가 사회를 이끌어난다."는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를 그 이데올로기가 곧이 곧대로 실행된다면 죽을 처지에 있는 약자들이 수용하게 되는가. 왜 신자유주의의 교리에 의하면 죽어 마땅한 사람들이 그 논리를 내재화하고 진보주의자들의 비평에 코방귀도 뀌지 않게 되는가? 핵심은 그 사람들 중 다수는, 진짜로 죽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가 아무리 베틀로얄의 이미지로 경쟁을 정당화한다고 해도 현실세계에서 베틀로얄이 벌어지지는 않는다. 인간 사회에서 경쟁에서의 낙오가 곧바로 물리적인 죽음으로 이어지는 일은 드물기 때문이다. 경쟁에서의 성공과 패배는 "죽일놈은 죽고 강하게 키워진 살놈만 살려서 과실을 따먹는다."는 다윈주의적(?) 슬로건으로 치장되어 있기는 하지만, 사람들은 여기서의 '죽음'이 그저 경제적 실패와 빈곤을 의미한다는 것을 다 알고 있다.실제로 약자를 모두 죽여버리는 체제라면 약자들도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또한 그 체제가 존속해서 부르주아들만 살아남게 된다면 부르주아들 역시 편할 리가 없다. 착취할 이들이 사라지면 그때부턴 자기들끼리 착취자-피착취자를 결정하는 싸움을 시작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죽음의 공포를 느끼고 살기는 하지만, 어차피 죽는 사람은 소수라는 걸 본능적으로 잘 이해하고 있다. 그래서 자신이 죽는 사람이 되지 않도록 노력하고, 그 가능성을 회피하기 위해 죽은 사람들을 도덕적으로 비난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남은 '약자'들이 '신자유주의적 개혁'을 지지하는 의식구조를 바로 '고통의 평등주의'라고 표현할 수 있다. 약자들을 모두 죽이지는 않지만, 그들의 일부를 죽이면서 내면화되는 그 가치가, 자신의 위에 있는 강자들, 특히 자신의 눈에 바로 보이는 바로 위에 있는 강자들에게도 보편적으로 실현되기를 원하는 것이다. 

 
4.
최고 등록금이 600만원(혹은 700만원)이었다고 한다. 당연히 부당한 일이 아니다. 실제로 5-600만원 등록금을 내는 대학생들이 넘쳐나니까. 게다가 그건 최대금액이지 차등적 등록금을 부담한 학생들 다수는 단지 200만원 미만의 등록금을 낼 뿐이었다. 자살할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한다. 당연히 부당한 일이 아니다. 우리도 그렇게 살고 있고, 사회는 다른 어떤 죽음에 대해서도 책임이 없다고 방기하고 있는데 말이다. 이 논리구조에 있어서, 서남표는 한 사람의 훌륭한 개혁가이다. SKY 학생들이 응당 받아야 하는 경쟁의 압력을 받지 않는데 비해, 서남표는 카이스트에 다니는 명문대생들에게 그들이 마땅히 짊어져야 하는 의무를 요구한 윤리적인 사람이다. 다른 명문대학교 교수들은 자신들의 의무를 게을리했다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서남표를 비판하고 있을 뿐이다.


이것이 우파 냉소주의자들이 조국의 서남표 비판을 이해하는 방식이다. 사실 서남표는 정말로 (그 지향에 대한 찬동여부와는 상관없이) '개혁가'라고 불릴만한 자격이 있다. 왜냐하면 서남표는 기껏 약자에 해당하는 학생들만 괴롭힌 게 아니라 교수들에 대해서도 평가제를 도입하며 괴롭혔기 때문이다. 서남표가 독단적이었단 비판은 이 맥락에선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 어떻게 정조가 노론들과 합의하여 조선 사회를 개혁할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노무현이 조중동과 강남 사람들과 타협하여 한국 사회를 개혁할 수 있단 말인가? 서남표는 정말로 우리들이 상상 속에서 숭앙하는 '개혁가'였던 것이 아닌가? 




5.

"그래도 서남표만큼 일을 했던 사람이 없다. 일을 해보지도 않았던 사람들이 떠들 일이 아니다." 조중동과 보수진영이 서남표를 옹호하는 논변을 정서적으로 요약하면 이렇게 된다. 이 논변의 비극적 대상으로는 1971년 대선에 맞춰 공사기간을 줄이기 위해 수십 명의 노동자를 사망시킨 경부고속도로가, 희극적 대상으로는 추진자의 별명에 해당하는 동물들이 돌아다닌다는 도시괴담이 있는 청계천이 있다.


하지만 이 논변은 우익의 전용화법이 아니다. 이것은 김대중의, 노무현의, 곽노현의 '개혁정치'를 옹호하는데에도 쓰이는 논변이다. "그는 뭐라도 했지 않느냐. 누군가를 괴롭혔지만 뭔가를 만들지 않았느냐." 좌파정당 내에서도 활동가들이 이론가들의 비평을 회피할 때 하는 말이다. 즉 개혁에 대한 우리의 입장은 똑같다. 누군가를 괴롭히는 것, 고통을 증대시키는 것, 잘났거나 잘먹고 잘사는 놈들의 고통을 증대시키는 것, 좀더 정확히 말하면 그런 놈들 중에서 나와 편이 다른 인간들의 고통을 증대시키는 것, 이다. 김대중은 의사들을 괴롭혔다. 그것은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는가? 김대중은 개혁을 하고 있고, 의사들은 기득권세력이기 때문이 아닌가?


이런 도식은 의약분업의 정책적 타당성과 그 실행효과에 대한 논의를 전면적으로 파묻어버릴 수가 있다. 서남표가 카이스트에 대해 했던 일들에 대한 논쟁에서 그랬듯이 말이다. 우리가 정치에 대해 논한다는 것이 다 무어란 말인가? 우리는 정당한 권리나 타당한 이익조정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는 게 아니라, 하나의 '도식'을 만들어 제 주장의 정당성을 확보하려 든다. 남이 만든 도식을 까부수고 거기에 내가 만든 도식을 집어넣는게 소위 정치평론가들이 하는 일이다. 서남표의 옹호자들이 '카이스트 교수들과 학생들'을 기득권으로 본다면, 비판자들은 서남표를 기득권으로 몰고 학생들을 피해자로 위치시키려는 것 뿐이다. 


서남표의 개혁 뿐만이 아니라, 좌파들이 개혁이라고 부르는 작업도 '고통의 평등주의'라는 심성에 의해 옹호되는 일이 많다면, 각자가 가져야 할 합당한 몫에 대해 설명하지 않고 "기득권세력에게 고통을!"이라는 심성만을 강조한 '개혁'은 서남표의 '역풍'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이는 대중들이 삼성의 이건희 가문을 욕하는 것, 조중동을 욕하는 것,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을 욕하는 것, 타블로나 박재범과 같은 한국 국적을 가지지 않은 연예인들을 욕하는 것 등을 동등하게 '진보적인 것'으로 파악하게 되는  착시현상을 가져오게 된다.


우리는 이런 '착시'에 대해 뭐라고 답변할 수 있는가? "타블로와 박재범과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은 기득권이 아니고, 이건희 가문과 조중동은 기득권이다."라는 규정만으로 충분한가? 어떤 빈곤층이 "나에게는 현대자동차 노동자들도 충분히 기득권이다."라고 말한다면 뭐라고 답할 수 있을까? 가장 위에 있는 이들만 기득권이라 부를 수 있다면, 강남에 집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나 의사들 역시 이건희는 아니기 때문에 기득권이 아니라고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말한다면 도대체 어떻게 개혁이 가능한가? 개혁은 언제나 잘 사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6.
"종부세가 싫다면 그 비싼 집을 팔고 다른 동네에 가서 살면 된다." 참여정부 시절 종부세 논쟁에 대한 진중권의 논평이다. 나는 굳이 종부세에 대한 입장을 묻는다면 그 제도에 찬성하는 편에 섰을 것이다. 종부세의 부작용을 보완하고, 자산소득에 대해 대단히 너그러운 한국 조세 제도의 전면적인 개편을 후속조치로 취하는 것을 전제로 그 제도에 찬성했을 것이다. 그러나 진중권의 이 논평에는 종부세의 정책적 타당성에 대한 고려는 없다. 한국 사회에 조세불평등 문제가 분명히 있고, 부동산으로 돈번 사람들에 대한 징세가 분명히 필요하다 하더라도, 종부세라는 제도가 어떤 사람들에 대해선 공정하지 않을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한 배려가 그의 말에는 없다. 


있는 것은 '강남에 사는 기득권'이라는 도식과 그들에게 고통을 가중시키는 '개혁'에 대한 찬미일 뿐이다. 어떤 사람이 굳이 강남에서 살고 싶어하는 이유가, 정말로 단지 '강남에 산다는' 기득권을 유지하고 싶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단정지어 버리면 '자본으로 환원불가능한 차원'의 영역을 인정하지 않는 결과를 낳지는 않는가? 이를테면 우리는 철거민에 대해서도, 그들이 다른 곳에서 장사할 수 있는 충분한 '금액'을 지불하기만 한다면, (물론 그렇게 한다면 대부분의 철거민 문제는 해결될 것이고 지금은 그것이 되지 않기 때문에 크나큰 문제인 것이지만) '이 곳에서 계속 살고(장사하고) 싶다.'는 욕망 정도는 깔아뭉게도 좋은 것인가?


이 지점을 빼고 생각하더라도, 진중권의 발언은 "어쨌든 의사들은 기득권이고 의약분업은 개혁이므로 지금은 의사를 비난하고 의약분업을 찬성하면 될 일이다."와 비슷한 수준의 사리판단에서 나온 것이다. 이 사리판단을 그대로 서남표의 상황에 대입하면, "어쨌든 교수들은 기득권이고 교수들에게 경쟁을 도입하려한 서남표의 정책은 개혁적인데, 지금 학생들이 자살한 상황을 틈타 그 개혁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기득권세력이 준동하고 있다. 이때 우리는 조국처럼 제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사안에 대해 물타기하는 사이비 진보들을 타도하고 서남표를 옹호해야 한다."라고 말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혹은 진중권의 말을 곧이 곧대로 패러디해서, "차등적 등록금제가 싫다면 애초에 그 학교에 입학하지 않았으면 되었다. 국비로 누리는 특권이 싫다면 다른 사립대 공대에 들어가 훨씬 비싼 등록금 내고 다니면 된다."고 바꿔보면 어떨까? 오히려 이 말은 진중권의 발화보다 훨씬 합리적이다. 왜냐하면 강남에 집을 산 사람들은 종부세라는 제도에 동의한 적이 없지만, 카이스트에 입학한 학생들은 차등적 등록금제의 존재를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입학했기 때문이다.


카이스트가 '기득권'으로 모자란다면 '서울대'를 대입시켜도 된다. 오늘날 강남의 계급재생산 학교로 전락한 서울대에 대해, "어차피 부자들만 오는데 등록금을 한 천만원씩 받아도 되지 않을까?"라고 말하는 것은 개혁일까? 혹시나 서울대에 입학할지도 모르는  가정형편이 좋지 않은 학생을 미리부터 내쫓는게 개혁인가? 그게 아니라면, 투기꾼들에게서 세금을 징수하기 위해 집 한채 겨우 가진 이들의 보유부담을 올려버리고 그게 유지가 되지 않으면 집을 팔라고 윽박지르는 건 어째서 개혁인가? 양자에 상대적인 차이가 있다는 항변 말고,(물론 타당한 항변이다.) 다른 답변은 불가능한가? 종부세가 싫다고 자살한 강남의 아파트 집 주인은 물론 없었(던 것으로 안)다. 하지만 자살했다고 해서 뭐가 상황이 달라졌을까? '자살세'를 거두자고 독설을 퍼부으면 그만인 일인데 말이다.


나는 진중권이 이미 너무 나아간 독설이라고 겸허하게 사과한 이 사안을 두고 그를 비난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의 태도가 참여정부의 개혁이 주는 '고통'에 대한 '기득권세력'의 주장의 시시비비에 대해선 검증하지 않으려고 했던 (막말로 개혁정책이 취지만 좋다고 다 잘 작동하는게 아니라 본다면, 개혁에 대해 저항하는 '기득권세력'의 준동 중에도 정책에 반영할 부분은 있어야 한다고 보는게 정상이 아닌가?) 소위 '개혁세력'의 정신세계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었기에 이를 인용했을 뿐이다.


물론 개혁이란 것을 추구함에 있어 누군가에겐 고통이 전가되는 사태를 피할 수는 없다. 이해관계를 조정하다 보면 반드시 그 이전에 비해 피해를 보는 사람이 생기기 마련이다. 하지만 우리에겐 그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고 사람들에게 요구하는 합당한 목적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런 경우라도 일개인에게 지나치게 큰 고통이 집중되는 것은 막아야 한다. 그렇지 않고 "기득권세력이 고통을 느끼는 것이 개혁이다."라고 말할 때, 좌파들이 말하는 '평등'에의 요구는 '민중'들이 원하는 '고통의 평등주의'와 비슷한 것이 된다. 만일 그렇다면 서남표의 개혁과 우리의 개혁이 다른 이유는 무엇인가? 다르게 만들고 싶다면 어떤 과정이 필요할까?




7. 

서남표가 카이스트 학생들에게만 '노블레스 오블레주'를 합당하게 요구하고 있었다는 '우파 냉소주의자'들이 현실인식은 올바르지 않을 수도 있다. 가령 서남표 총장 퇴진을 요구하는 조국에 대한 '좌파 냉소주의자'(?)들의 비판지점은 이렇다. 카이스트 학생들만 시달리는 것이 아니다. 다른 학교 학생들도 똑같이 시달린다. 가령 조국은 서울대 법대 교수인데, 로스쿨 학생들이 시달리는 방식도 그렇다. 조국은 자신의 물적 조건과 긴밀하게 연결된 로스쿨 제도나 운영방식의 문제에 대해 지적한 적이 없지 않은가? 그러면서 카이스트 학생들이 당한 고난이 별나라 먼세상 이야기인 것처럼 '책임자 퇴진' 운운하는 태도는 얼마나 설득력 있는가? 로스쿨 제도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이 비판이 어느 정도로 합당한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아직까지 로스쿨 학생의 '자살'이 사회적으로 문제가 된 적은 없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선배들이 그랬듯 이런 비판들에 대해 "법전공하는 예비 기득권 세력의 개혁에 대한 거부" 쯤으로 치부해 버려도 꽤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8.
카이스트와 우리는 얼마나 떨어져 있는가? 이런 질문은 난감하다. '학점기계'에 대한 개탄이나 창의력 말살하는 대학교육에 대한 성토 따위들은 '별나라 먼세상'에서 들려오는 얘기들처럼 공허하다. '징벌적 등록금' 제도 따위가 없더라도 이미 우리는 학점기계이며, 대학사회 내에 배려해야 할 창의력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아마 한국 사회에서 (과학적) 창의력이 가장 충만한 공간이 있었다면 그곳이 카이스트였을 가능성이 높다. 머리좋은 아이들이 들어가는 곳 중에서 등록금이 가장 싼 편에 속하니까. (비록 우파들의 논리로 그들을 비판하려는 의도를 지니고 있기는 하지만) 창의력을 키우기 위해서라도 학생들을 그렇게 다루면 안 된다는 진중권의 논리가 공허해지는 이유는 그래서다.


왜냐하면 오늘날에는 창의력이란 말야말로 학생들의 고통을 쥐어짜내는 가장 가혹한 '스펙'의 요구를 표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가 학생들을 널럴하게 내비두면서 창의력을 육성한다면 참 좋은 일이겠지만, '고통'을 개혁으로 보는 한국 사회에서 그런 얼빠진(?) 요구는 불가능하다. 세계화 시대에 발맞추기 위해 우리 학생들도 창의력을 갖추어야 하므로, 이제는 학점경쟁을 넘어선 '창의력 경쟁'이 필요하다. 창의력을 증명하기 위해 배낭여행도 다녀와야 하고, 동아리도 해봐야 하고, 공모전도 내봐야 하며, 이 모든 것들을 '한줄 경력' 이상으로 써먹는 자기 서사화 능력도 갖추어야 한다. 차라리 점수 높은 모범생들을 원하던 시대가 더 편한 세상이 된 거다. 좌파들이 '학점'에 대항(?)하는 무기로 '창의력' 드립을 치기 전에, 이미 창의력 자체가 우파들이 학생들을 괴롭히는 무기가 되어 있는 거다.



이런 복잡한 지형에서 카이스트 학생들의 죽음에 대한 사회적 냉소를 뛰어넘어 사람들과 소통하려면, 사람들이 말하고 행동하는 방식에 대한 훨씬 더 실천적이고 근본적인 관심이 필요하다. 나도 이런 잡글을 통해서라도 그런 관심을 드러내려고 하지만, 이건 혼자서 노력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9.
그런 일이 힘들다고 생각될 때, 하뉴녕이 쓴 횡설수설하는 문제제기를 따라가기가 버겁다고 생각될 때, 그래도 서남표를 비난하고 좌파이고 싶은 사람들이 택할 수 있는 손쉬운 태도가 있다. 이 세계가 정상이 아니고 미쳤다고 단언하는 것이다. 단지 카이스트의 특정한 제도만이 문제가 아니라 '경쟁'에서 승리하면 삶이 나아진다고 믿는 인간들의 마음이 문제라고 단칼에 재단하는 것이다. 조국이나 진중권과 같은 방식의 현실개입은 어차피 '경쟁' 이데올로기에서 근본적으로 분리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을 모두 사이비로 재단하고 귀를 막고 '경쟁에서 승리하려는 욕망을 억누르는 사회주의자의 심성'을 갈고 닦으면 언젠가 다른 세상이 올거라고 믿는 것이다.


이름하여 영성좌파의 길이 될 터인데, 이렇게 적어보니 기독교적이라기보다는 도참사상 비슷해 보이기도 한다. 하긴 아시리아를 제발 멸망시켜달라고, 혹은 바빌론을 제발 멸망시켜달라고, 유태인들이 기도할 때 그들의 종교도 이와 비슷한 형태였을 것 같긴 하다. 그리고 그렇게 기다리다 보면 페르시아의 키루스 대왕이 나타나 바빌론을 멸망시키고 유태인들을 해방시킬 날도 올 수도 있겠지. (우리 살아 있을 때 무슨 일이 안 생길 가능성이 높다란 점을 잊고 원론적으로만 생각하면) 자본주의란 체제도 영원불멸하진 않을 테니까 말이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눈감고 귀막고 옴마니 반메홈을 외우는 사람들이 사회에 무언가 하고 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다만 그런 이들이라도 다른 이들의 사회운동에 무언가 도움을 줄 수 있는데, 그 공로를 부정할 수는 없겠다. 기독교인의 천국을 믿지 않더라도 그들이 빈자들에게 선행을 베푼다면 그것 자체로는 사회적 의미를 지닌다는 점을 인정해야 하듯이 말이다. 그러니 어쩌면 '좌파 종교인'은 어떤 사람이 평정을 유지하면서 계속 좌파운동에 관심을 가지도록 할 수 있는 훌륭한(니체 표현으로는 데카당스한) 방책인지도 모르겠다. 


 10
.
우리는 "쾌락을 늘리고 고통을 줄인다."는 공리주의의  공리를 배격하고, "나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는 니체의 교리를 따르는 것 같다. 우리가 자본주의를 대하는 태도는 경제학적이라기보다는 신학적이다. 소위 '좌익'이란 것들은 이 삶의 진리를 외면하려는 데카당스의 현현일 뿐이다. 김규항과 같은 정신승리형 영성좌파는 가장 솔직하고 적나라한 데카당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를 무시하며 현실세계에 나름대로 '개입'하고자 하는 다른 '진보주의자'들은, 그와 자신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단 말인가.

 

피노키오

2011.04.16 00:50:43
*.230.76.90

오래전 목동의 빈민촌을 불도저로 깔아뭉갤 때, 새로 지을 아파트에 입주할 사람들이 저항하는 사람들을 향해 이구동성으로 외쳤더랬죠. '능력없는 자 서울을 떠나라"

세월이 흘러 그들의 아파트가 종부세 대상이 되자 저항하는 그들을 향해 빈민촌의 자식들이 똑같이 외쳤죠. '능력없는 자 목동을 떠나라'

물론 계급적 적대감이나 복수심이 진보일 수는 없고 나보다 처지가 나은 사람들의 고통을 증가시키는 것이 개혁일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잣대는 공평하고 일관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빈민촌 자식들의 욕망을 깔아뭉갰던 사람들이 자신들의 욕망은 존중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온당할까요? 그런 사람들을 비난하는 것이 과연 고통의 평등주의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럼 진보주의자들은 이때 과연 어떻게 해야할까가 문제겠죠. 빈민촌을 밀고 들어오는 불도저와 맞섰던 자세로 막무가내식 종부세를 비판해야 하는가, 아니면 철거에 저항하는 빈민들도 비난하고 종부세에 저항하는 사람들도 비난하는 양비론을 할 것인가. 아니면 다른 방법이 있는 것인가.

물론 정답은 나와있겠죠. 빈민들의 권리도 보호하고 억울한 종부세 대상자의 사연도 들어주고. 모두에게 공평하고 따뜻한 사람. 그런데 그게 과연 가능한 것이고 진짜로 공평한 건지는 의문이죠. 현재는 늘 과거로부터 규정되고, 우리가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를 되돌릴 수는 없으니, 현재를 재구성하는 것 역시 불가능한건지도 모르겠죠. 결국 지나간 일은 다 잊고 새출발하자고 할 수 밖에 없는데, 과연 얼마나 수긍해줄지는 의문.

하뉴녕

2011.04.16 15:28:14
*.171.69.149

1. 지난번 논쟁의 이미지에 포개서 제 논지를 "모두에게 따뜻한 사회를 만들자."는 이상주의적 논평으로 이해하시는데 그런 논지는 아니구요.


2. 한국 사회의 부동산/주식에 대한 세금이 지금보다 몇 배 더 늘어나야하죠. 양도세와 보유세 모두 그렇습니다. 종부세는 세금이 턱없이 부족한 상태에서 어떤 기준 위의 사람들에게만 세금을 물린 상황이라 볼 수 있겠는데, 그런 점에서 시행과정에서 좀 문제가 있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저에게 종부세에 대해 찬성이냐 반대냐를 물었다면 찬성이라고 대답했을 것 같습니다. 다만 문제가 드러난 지점을 보완하고, 점점 더 부동산 세금 체계를 개편해 가야 한다는 코멘트를 덧붙였겠죠. 제가 본문에서 쓴 표현을 빌리자면, "정당한 권리나 타당한 이익조정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라는 것이죠. 강남 사람들을 괴롭힌다는 사실 자체에 쾌감을 얻으면 문제의 선후가 뒤바뀐다는 거에요. 사실 그런 식으로 괴롭히면 강남에서 비교적 약한 사람들을 괴롭힐 수 있을 뿐이겠죠. 비유하자면 김승연은 마음껏 욕하면서 이건희에겐 무심한 상황이 벌어지게 되는 겁니다. 즉 이 이야기의 개혁세력에 대한 비판의 핵심은, "기득권세력에 고통을 준다는 이유만으로 개혁을 긍정한다면 그것은 부메랑 맞기 딱 좋은 논변이다."라는 것입니다. 본문에 쓰려고 했는데 아마도 잊어버려서 못 쓴 구절이, 개혁이란 걸 추구할 때 누군가의 고통이 수반되지 않을 수는 없다는 말이었어요. 그렇지만 고통에도 불구하고 어떤 가치를 추구하기 위해 개혁이 필요한 것인데, 많은 경우 개혁가들은 그 가치를 제대로 논의하지 않고 '고통' 자체가 개혁의 방법인 것처럼 말합니다. 거기에서 서남표와 노무현 옹호의 공통점을 발견한 겁니다.


3. '목동 이야기'에 대한 서사도 좀 왜곡되어 있죠. 물론 서사는 우리가 세상 만사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기는 합니다만, 그런 식으로 치면 다른 서사도 가능하겠죠. 그때 목동에서 빈민들을 향해 서울에서 떠나라고 외쳤던 사람만이 참여정부 시절 여전히 목동에서 종부세의 대상이었을까요? 어떤 사람들은 더 돈을 벌어 그 동네를 떠나갔을 수도 있고 (물론 그도 종부세 대상이었겠지만, 능력이 없어 목동을 떠나야 할 대상은 아니죠.) 당시엔 목동 주민이 아니었지만 참여정부 시절 '부동산 신화'에 눈이 멀어 몇 억 대출받아 막차로 들어가서 이자부담에 끙끙 앓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는 거죠.

사회주의자는 아니지만

2011.04.16 02:34:21
*.162.149.48

고통을 주는 방식으로 진행된 개혁방식이 잘못이라고 하더라도 그 고통이 어떻게 자살로까지 이어질 수 있었나라고 생각한다면, 지나친 경쟁이데올로기가 문제라고 밖에 생각이 안드네요. 경제적 부담보다 낙인효과가 더 무서운 거라고 생각되는데, 집단은 구성원을 경쟁력의 수단으로만 생각하고 개개인은 그것을 내면화하여 자신과 타인을 승자와 패자로 평가할때, 카이스트가 승자의 입장에서 그러한 이데올로기를 가장 내면화한 집단중 하나로 생각되고, 자신이 그러한 생각을 가지지 않더라도 가까운 주변에서 그런 기준으로 자신을 평가한다면 징벌적 등록금이라는 낙인이 자살로까지 이어지는 스트레스가 될 수있죠

하뉴녕

2011.04.16 15:34:04
*.171.69.149

이 정도 비율로 사건이 터졌으면 제도가 원인이었다고 봐야 하는 건 맞지요. 가정형편도 제각각이고 수치심을 느끼는 방식도 제각각이기 때문에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는 달랐겠지만, 이 제도의 징벌을 당했어도 괜찮은 사람들이 있다고 해서 죽은 사람들의 원인이 제도와 상관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죠.

대충 미국 명문대 자살률도 그만하다는 얘기는 말도 안 되는 루머라고 분쇄가 된 것 같은데, 오히려 사람들은 미국과의 비교가 아니라 다른 학교 다른 집단과의 비교를 해보고 싶어하는 것 같습니다. 필요한 자료라고 생각합니다.

sinabadon

2011.04.16 16:16:20
*.56.175.63

생각해보게 만드는 글 잘읽고 갑니다. 모두가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얘기를 하지만 정작 옳은 얘기는 얼마나 될까 싶은 생각이 드는 요즘이네요....

놀이네트

2011.04.16 17:41:32
*.48.5.188

잘 읽었습니다. 이번 카이스트 사태를 렌즈삼아 한국사회를 바라보는데 박경신 씨의 '서남표를 위한 변명'과 함께 참 좋은 텍스트를 던져준 것 같네요. '얼빠진' 상상을 거의 일처럼 하는 한 사람 입장에서 한국사회를 미친 사회로 매도해 버리고 혼자 알리바이를 얻어버리는 걸 늘 경계하고 있는데요. 학교 교장들이 허구한 날 애국조회 같은데서 창의력 드립을 치고나면 그 날은 수업시간에 교장 개객기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시간을 날려버리기 일쑤가 되고 있어요. ㅋㅋ 저도 가끔 비슷한 조어를 써보곤 한다는..,

....

2011.04.17 01:56:43
*.141.213.75

어차피 개혁이니 진보는 누군가의 고통과 손해가 이어질 수 밖에 없죠....
계급적 적대감을 언제나 울궈먹는 건 코미지지만 필연적인 건 필연적인거죠

하뉴녕

2011.04.17 02:01:52
*.171.69.149

그 점을 부인하지 않았을 텐데요...

wallk

2011.04.17 14:03:32
*.116.64.35

1. 먼저 '아, 이것은 좋은 횡설수설이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2. 이 글에서 어지럽지만 명확하게 짚어주신 무비판적 신자유주의자, 냉소적 우파와 종교적 좌파의 시선에 대해 동감하는 바입니다.(단순화 죄송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세 가지 다 현재 우리 사회의 많은 현상들을 너무 이분법적이고 거칠게, 당파적으로 칼질해대는 것 같아서 불편한 터인데, 이 시각들에 대해 일부는 수용하고 일부는 비판하면서 횡설수설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저 자신의 입장을 명확히 설명할 언어가 없다는 것이 개인적인 문제라는 생각이 자꾸 들어요. 나는 그냥 냉소적인 양비론자가 아닌가. 좋게 말해 봐야 이도 저도 아닌 좌파 자유주의자... 이기는 한 것인가 하는 자각 말이죠.
3. 이것저것 더 적고 싶기는 한데, 좀 더 생각을 다듬어 보고 더 덧글 달겠습니다.

모과

2011.04.19 00:23:13
*.47.249.132

훌륭한 고민들이네요. 간만에 가슴 두근거리는 글이었습니다.

이모씨

2011.04.19 22:10:29
*.133.32.241

멋대로 잘라먹고, 개드립을 첨부할께요...;;;

종부세 찬성한다, 등록금 벌금 반대한다,
근데 까려거든 반대파들을 설득 (제압?)할 수 있는 세심한 관점을 찾아내라...
이걸 잘 하면, 정치 평론을 넘어서 의회에 진출할 수 있어요!
(하지만 현실은 저런 세심함 따위...;;; )

Reznor

2011.04.24 03:20:06
*.37.109.203

마치 고등학교 시절, 지각한 학생들은 모두 엎드려 뻣쳐서 허벅지를 5대씩 맞곤 했는데, 그 선생님이 잠시 화장실을 간다거나 몸이 아파 늦게 오셨던 날에, 무사히 빠져나갔던 그 학생들을 내심 증오하던 그런 구조와 비슷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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