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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꼴찌도 행복한 교실 - 10점
박성숙 지음/21세기북스(북이십일)
 

이 글은 글쓴이가 태터앤미디어에서 주최하는 행사에 참석한 후, 소정의 원고료를 약속받고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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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핀란드 교육’에 관한 담론이 유행이다. 서점 사이트 가서 검색해보니 번역서만 해도 십 수종이다. 주로 일본인들이 쓴 것 같고 간혹 영어이름이 눈에 띈다. 물론 발빠르게 책을 낸 한국인들도 있다.


핀란드 교육이 이렇게 화제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간단하다. 1등이기 때문이다. 국제적인 학습능력 평가에서 핀란드는 매번 1위를 차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세계인들이 그 나라의 교육에 관심을 가지는 것도 당연하다. 더구나 미국인, 일본인, 한국인은 1등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사람들이 아닌가.


“세계학력평가에서 핀란드가 1위 한국이 2위를 하자 한국 교육 관계자가 말했다. ‘허허, 근소한차이로 저희가 졌습니다.’ 핀란드 교육 관계자가 차갑게 대답했다. ‘저희가 큰 차이로 앞섰습니다. 우리 학생들은 웃으며 공부하지만 그쪽 학생들은 울면서 공부하지 않습니까?’ ”


한때 트위터에 돌았던 글이다. 이게 실제로 있었던 에피소드인지 만들어진 우화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실화이든 아니든 간에 여기엔 하나의 진리가 담겨 있다. 개인적으로 핀란드라는 나라와 그 나라의 교육제도에 감사를 표한다. 이 나라가 없어서 한국이 1등이었다면, 1등을 위해 희생한 것이 무엇이었든 간에 한국 교육은 스스로를 성찰할 수 없었을지도 모르니까. 한국이 1등이 아니라 2등이란 사실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하지만 2등이 아니라 1등이었다면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었을까? 어찌됐든 한국의 학생들이 세계학력평가에서 수위를 차지하고 있으니 한국 교육은 훌륭하게 기능하는 것일까? 참여정부 시절 보수언론이 평준화교육으로 인한 학력저하 문제를 심각하게 제기했을 때, 정부정책의 옹호자들은 세계학력평가의 성적을 근거로 학력저하가 없었음을 열심히 논증했다. 씁쓸했다. 한국 학생들의 생활환경을 돌이켜보건대, 그 성적은 ‘평준화교육조차도 얼마나 학생들을 잘 괴롭힐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지표였을 뿐인데. 그걸 근거로 평준화교육을 옹호하다니. 그건 ‘이렇게 잘 괴롭히고 있는데 뭘 더 괴롭히려고 그래?’라는 반문이었을까.


한국의 교육이 훌륭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거다. 정부나 교육청의 홍보담당관들이나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고, 그 사람들조차 학부모의 입장에서 다른 학부형을 만났을 때는 한국 교육을 침을 튀기면서 욕할 것이다. 아이들을 살인적으로 괴롭히고, 부모들에게 무지막지한 돈을 쓰게 하고, 그러면서도 적성에 맞는 능력계발에도 실패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 교육은 총체적인 난관에 처해 있다. 어떤 부분이 제일 불만인지는 생활수준에 따라 차이가 있겠으나, 부유층과 중산층, 서민에서 빈곤층까지 계층을 막론하고 한국 교육에 대해 만족하는 사람은 없어 보인다.


이러한 실정은 우리에게 한국의 교육문제에 대한 좀 더 깊은 성찰을 요구한다. 시험성적 2등이라는 한국 교육이 2등이라는 성적에 걸맞는 만족감을 느끼지 못하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 2등이니 1등이 공부하는 법을 베껴보자는 식의 접근보다 훨씬 근원적인 접근이 필요할 거다. 교육문제는 단순한 ‘교육방법’의 문제를 넘어 사회체제의 문제를 반영한다. 물론 핀란드 교육에 관한 담론 역시 그 지점을 짚을 수도 있다. 진보적 교육평론가들이 핀란드를 말할 때, 진보신당의 심상정이 ‘핀란드 공교육’을 논할 때 그들이 ‘교육방법’의 문제만 말하는 것은 아닐 거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핀란드에 대한 논의는, ‘1등을 따라하자.’는 수사를 통해 보수층에도 먹힐 수 있다는 바로 그 장점만큼의 한계를 가진다. 가령 80분 수업-30분 쉬는 시간을 가지는 핀란드식 학습법을 도입하겠다는 최근의 언론기사들을 생각해보라. 이런 식의 교육'기법' 도입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자기주도적 학습법에 관한 논의조차도 1등이 어디 학원에 다니는지 무슨 참고서로 공부하는지를 궁금해 하는 한국 학부모의 호기심의 반영인 것만 같다. 이럴 때 우리는 교육에 대해 무엇을 말하고 있는 걸까?


2.
<꼴찌도 행복한 교실>은 그런 점에서 중요한 책이다. 책을 읽어본 후엔 핀란드 교육에 대한 여러 책들보다도 교육을 고민하는 이들에게 훨씬 중요한 책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사실 독일교육은 최근 세계학력평가에서 OECD 국가들 중에서 하위권을 면치 못하고 있다. 독일은 2009년 <더 타임즈>의 세계대학평가에서 50위권 안에 든 대학이 하나도 없는 유일한 선진국이었다. 일본 3개, 프랑스 2개에 한국의 서울대도 47위 중국의 칭화대가 49위를 하는 그 순위에서 독일에서 가장 순위가 높은 뮌헨 대학은 55위에 그쳤다. 독일의 정치인들은 이렇게 눈에 보이는 지표를 개선하기 위한 ‘교육개혁’이 필요하다고 외치는 중이다. 이런 데이터를 주로 챙기는 한국인들이라면, 독일 교육에서 무언가를 배울 수 있다고는 믿지 않을 것이다. 설령 누군가가 독일식 교육의 효용을 주장하더라도, 한국의 보수언론들이 주제넘게도 유럽의 복지병을 걱정하고 사민주의 모델의 파탄을 선언하는 것과 비슷하게, 독일 교육은 이미 문제가 많아 스스로도 개혁을 추진하는 실패한 모델이라고 말할 것만 같다. 


하지만 이 책은 ‘학력평가’라는 박제화 된 잣대의 이면에 숨어 있는 진정한 교육의 문제들을 다룬다. 교육이 사회 구성원들을 어떻게 행복하게 하는지를, 그들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를, 그리고 한 사회의 제도와 기품 속에 교육제도가 어떻게 뿌리내리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 책에서 드러나는 독일 교육의 철학은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경쟁을 배격하는’ 것이다.


“도대체 이 무한경쟁의 시대에 경쟁을 배격하고서 어떻게 학생들의 능력을 배양할 수 있나, 제정신인가?”라고 묻고 싶은 사람이 많을 거다. 그런데 이 책은 구석구석에서 ‘경쟁을 배격하는’ 독일 교육이 철학이 어떻게 독일 학생들을 행복하게 만들고 심지어 능력까지 배양할 수 있는지를 생생하게 증언한다. 독일의 교실이 “꼴찌도 행복한 교실”이 될 수 있는 이유는 그 나라에 ‘꼴찌’라는 말이 아예 없기 때문이며, 구조적으로 누가 꼴찌인지도 알 수 없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나라의 학생들은 인성교육의 비중이 절반 정도나 되는 교육을 받으며, 우등생들이라도 자신들이 좋아하는 과목만 잘한다. 좋아하지 않는 과목은 낙제를 받아 유급하지 않을 정도로만 유지한다. 그게 일반적인 일이다. 그런데 이런 체제에서 학생들이 능력을 배양할 수 있을까?


물론 그렇다. 저자 박성숙(아이디 무터킨더) 님은 책을 설명하기 위해 나온 4월 19일의 방송에서 오히려 “창의력을 기를려면 경쟁을 배격하는 수밖에 없다.”고 단언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창의력을 기르려면 학생들의 주관을 존중하는 커리큘럼과 교사 개인의 주관을 신뢰하는 평가방법이 필요하다. 그런데 교육이 그 자체로 경쟁이며 승자가 사회적 재화를 독식한다는 관념이 있는 사회에서, 그런 주관적인 교육방법과 평가방법이 어떻게 뿌리내릴 수 있을까? 이를테면 학생의 작문이 재미있는지 재미없는지에 대한 교사의 주관적인 판단이 그 학생이 대학에 갈 수 있는지 없는지를 결정한다면, 한국의 학부모들은 그것을 납득할 수 있을까? 어림없는 소리다. 주입식 교육은 다른 무엇을 위해서가 아니라, 누구도 시비 걸 수 없는 ‘객관적’ 평가기준에 학생들을 맞춰가기 위해서 존재한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사람에게 필요한, 사람이 알아볼 수 있는 능력이 아니라 컴퓨터가 점수로 판독할 수 있는 종류의 문제풀이 능력을 가진 이들을 양산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경쟁’의 진정한 결과가 아닌가?


그런데 독일식의 경쟁을 배격하는 교육이 뿌리내리려면 한국 사회와는 사뭇 다른 사회체제가 전제되어야 한다. 당장 독일 교육의 체제를 한국에 그대로 이식한다고 해도 아비규환의 나날이 펼쳐질 거다. (이건 핀란드 체제 역시 마찬가지.) 교육의 문제는 사회의 문제다. 독일의 대학진학률은 39% 정도, 졸업자는 그 반 쯤되니 실질적인 대졸자의 비율은 20%다. 입학하면 졸업하고 진학률이 80%를 넘어가는 한국과는 천지차이다. 이런 교육제도가 가능하려면 대학을 가지 않은 학생들도 나름의 적성을 계발하여 훌륭한 사회구성원으로 살 수 있어야 한다. 고졸과 대졸이 임금격차도 적어야 하고, 대학을 포기한 이들이 기술교육만으로 자신의 길을 걸어갈 수 있어야 한다. 실제로 독일에선 대학에 떨어진 이들도 직업학교를 졸업한 후 큰 불만 없이 살아갈 수 있다. 이에 비하면 기껏 한국에서 4년제 대학을 나온 후 유럽의 고졸들이 진학하는 전문 직업학교에 유학을 다녀와야 기술 전문가를 자처할 수 있는 한국 교육의 낭비는 얼마나 심한가?


저자는 독일의 ‘마이스터’ 제도의 이름만 본딴 듯한 현 정부의 ‘마이스터고교’를 비판한다. 마이스터고교에 주어지는 특례가 독일의 마이스터 제도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며, 대학을 못 간 이들을 온전한 사회구성원으로 대우하는 것과 거리가 먼 것이기 때문이다. 교육문제를 사회의 문제로 인지하기를 거부하고 특정한 제도를 해법으로 삼는 행정편의적인 발상은, 지금까지 거듭 실패해왔다. 참여정부 시절 ‘쉬운 수능’이 좋은 취지와는 달리 아비규환을 불러온 것 역시 그 하나의 예다. 예시는 무궁무진하다. 4월 19일의 방송 직전에 저자가 사회자와 입학사정관제에 대해 토론하는 것을 들었다.


사회자는 사정관제를 통해 입학한 학생들이 여느 학생들과는 다르다고 말했다. 지금은 그럴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경쟁이 사라지지 않는 한 그런 제도적 변혁은 무의미할 거라고 예언했다. 나는 저자의 말이 옳다고 생각한다. 논술고사가 처음 시행되었을 때에도 이 새로운 제도로 선발된 ‘새로운 아이들’에 대한 기대가 있었다. 하지만 제도가 몇 년 존속되자 논술교육은 사교육 시장에서 예상지문과 예상답안을 달달 외우는 ‘인스턴트 주입식 교양교육’으로 전락했다. 지금대로라면 입학사정관제 역시 비슷한 결말을 맞이할 것이다. 조기유학을 다녀와 한국식 교육제도에 적응하지 못하는 중산층 자녀들을 위한 구제책이 되지 않으면 다행이다.


그런 미봉책을 벗어나 교육문제가 사회문제에서 기인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이 문제는 한층 거대해진다. 대입문제에서 드러나듯 이 문제는 한국 사회의 룰을 다시 세팅하는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그런 문제의식을 가지지 않는 한, 우리가 한국 교육에게 만족하게 될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물론 독일 교육에도 문제는 있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미리 진로를 고민해야 하는 독일교육의 분기 시스템은 지나치게 이른 감이 있다. 공교육이 하위권 학생들에게 초점을 맞춘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상위권 학생들이 더 공부하는 것을 원천봉쇄할 지경이 되면 곤란하다. 수학경시대회에 나가는 학생들을 위한 참고서 한 권이 없더라는 것은 독일 교육의 황당한 매력이면서도 답답한 현실이다. 저자는 이런 점들도 지나치지 않는다. 이것들은 독일 교육이 어떻게든 풀어야 할 숙제일 것이다. 하지만 문제점을 침소봉대하거나 왜곡해서는 곤란하다.


독일 교육이 학생의 미래를 일찍부터 결정짓는다고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고등학생 때까지 운동선수를 지망하던 학생이 느닷없이 대학에 가서 변호사가 될 수도 있는 가능성을 보장한다. 이들이 한국 교육을 잘 안다면 한국 교육이야말로 사람의 미래를 너무 쉽게, 일찍 결정짓는다고 할 게다.


예의 대학평가에서 독일은 50위권 안에 대학 하나 밀어넣지 못했지만, 500위 안에는 무려 41개의 대학이 포함됐다. 일본 30개, 프랑스 20개, 한국 12개, 중국 10개에 비해 월등한 수치다. 대학 자체가 평준화되어 있으니 높은 순위는 가지 못해도 전반적인 질은 높아지는 것이다. 한국의 서울대는 학생들을 일렬로 줄세워서 윗부분을 뭉텅 잘라간 후에야 47위를 기록하지만, 55위인 독일의 뮌헨대는 그저 몇몇 학과가 유명한, 바이에른 지방의 학생들이 가는 평범한 대학일 뿐이다. 독일에는 뮌헨대 같은 대학이 널려 있다. 학습능력평가에서 성적이 저조한 이유도 상위권 학생을 방치한 탓도 있겠으나 독일 학생들이 그런 유형의 시험에 전혀 익숙하지 않다는 점도 있다. 독일 시험에는 오지선다형이 전혀 나오지 않는데, 이를 ‘낙후된’ 교육이라 말할 수 있을까?


독일의 수준 높은 공교육(대학교육과 직업학교를 포함한)은 독일의 수준 높은 제조업을 지탱하는 버팀목일 것이다. 인구 5백만의 핀란드와는 달리 인구 8천만의 독일은 한국과 같은 나라에게 훨씬 좋은 모델이다. 독일은 별다른 부존자원 없이도, 미국이나 영국처럼 (외국인 대상의 영어사교육과) 금융업의 중심지가 되지 않고도 수준 높은 제조업만으로 국가경제를 이끌고 있다. 빌 게이츠나 스티브 잡스 같은 천재가 수 만 명을 먹여 살린다는 것이 미국의 교육 철학이라면, 잘 교육받은 수많은 사람이 국가 경쟁력을 만들어낸다는 것이 독일식의 경쟁력 확보 전략이라 말할 수도 있겠다. 그들은 그런 전략을 통해 공동체 의식을 유지하고 학생들에게 행복한 삶을 돌려줬다. 독일 교육 역시 장래에는 세계의 표준을 만들어가는 영미식 교육을 어느 정도는 따라가게 되겠지만, 이런 전통은 쉽사리 사라지지는 않을 것 같다.


우리도 우리가 기르려는 경쟁력이 근본적으로 무엇을 위한 것인지를 물어봐야 하지 않을까? 우리 스스로 행복할 수 있고, 능력을 길러 사회 전체의 효용을 증대시킬 수 있다면, 국제학력평가에서 몇 점을 얻는 문제가 얼마나 중요할까? 우리는 국제학력평가가 있기도 전에 우리 사회의 룰을 지탱하기 위해 일률적인 학력평가 기준을 만들고, 그것으로 사람을 괴롭힌다. 이것이 행복을 위한 것이기는커녕 잘 먹고 잘 살기 위한 것도 아니라면, 우리는 다른 것을 고민해 봐야 하지 않을까?


3.
이 책의 매력은 저자가 ‘한국 엄마’의 습속을 그대로 가지고 독일에서 적응하는 과정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어쩌면 저자가 자녀들의 교육에 지극히 관심이 많은 ‘한국 엄마’였기 때문에 독일 교육의 요체를 그토록 속속들이 깨달을 수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자식도 독일에나 보낼까.’라고 푸념하게 될 이 책의 독자들을 향해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내 마음이 바뀌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고. 많은 한국인 부모들이 기껏 독일에 와서도 아이들을 한국식으로 괴롭히고 있다고 말이다. 그래서 저자가 한국 교육의 개혁을 위해 먼저 요구하는 것은 사람들의 정신적 각성이다.


‘어떻게 바꿀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은 언제나 어렵다. 넘쳐나는 대졸자가 취업을 하지 못해 그간의 ‘투자비’를 되돌려 받지 못하기 시작한 오늘날의 현실에서, 사교육비 조금 덜 쓰기, 대학 학벌에 조금 덜 연연하기, 정도는 정신적 각성이나 의식개혁을 통해 가능할 것도 같다. 하지만 가령 대학을 포기한다는 식의 판단은 한국 사회에선 도저히 ‘판단’이라 표현할 수 없는 윤리적 결단이다. 자발적으로 대학을 거부한 '김예슬 선언'이 던진 충격은 역설적으로 그 결단의 윤리적 크기를 보여준다. 결국엔 저자가 ‘지금으로선 불가능하다.’고 말한 명문대 위주 체제에 대한 제도적 변혁이 필요하다. 실업계 고등학교나 전문대에 대한 정책 역시 체계적으로 고민되어야 할 테고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제도의 변혁은, 현재의 체제가 괴롭고 불합리하다는 많은 사람들의 각성이 없이는 성립하지 않을 거다. 그리하여 우리는 평범한 사람들이 실천할 수 있는 의식개혁과, 그렇게 의식을 바꾼 이들이 주체가 되는 이후의 제도개혁을 꿈꿀 수밖에 없는 것일 게다.  


한가지 확실한 것은, 지금 '한국 교육'이 당신을 구속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당신의 의지와 제도의 변혁 두 가지가 모두 필요하다. 이 책은 전자를 도와주고 후자에 대한 고민을 성찰하도록 해준다. 그런 점에서 나는 이 책을 '자유'를 위한 책이라고 부르겠다.
 


  


열패당

2010.04.26 18:27:05
*.68.222.145

오 당수님이시여.. 잘 읽었스빈다 그런데 한국에서 대학안가면 저임금 생활을 하게되는데 경제적 혁명 없이는 힘들겠지요 그리고 학생들을 옥죄는 입시교육도 큰 문제이고요.

놀이네트

2010.04.26 19:39:34
*.234.83.32

독일과 핀란드의 놀이터는 세계 최고라능...

비르투

2010.04.26 21:36:26
*.191.106.251

교육문제가 사회문제와 얽혀있으니, 사회 구조를 전체적으로 바꾸지 않고는 교육문제를 해결하기 힘들겠죠. 답답한 일이에요...
http://ellesar.egloos.com/5223198 Ha-1님 글과도 통하네요. 이 분은 우파인 듯하지만요.

미니쿠퍼콜

2010.04.26 21:41:27
*.43.225.76

학교에서의 1등이 사회에서 1등이 아닌데 말이죠!!
모두의 편견이 사라지길 기다리는 것보다 선생님들의 올바른 철학으로 아이들에게 가르쳐져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이용

2010.04.27 01:04:47
*.116.36.44

질문 1)17문단에서 상위권 학생들이 더 공부하는 것을 원천봉쇄할 지경이 된다면 곤란하다고 하셨는데 상위권 학생이란 무엇을 뜻하는 건가요? 지능과 관련이 있는겁니까?
질문 2)18문단에서 독일이 장래에는 영미식 교육을 따라가게 될 것이라는 얘기를 하셨는데 그건 어떤 전망에서 그런건가요?

하뉴녕

2010.04.27 01:10:58
*.152.193.36

1)답변: 지능이란 것도 수치화된 잣대에 불과하지만 어떤 교육이 되었든 학교에서 교육을 하면 잘 따라오고 빨리 이해하는 학생이 있고 그렇지 못한 학생이 있지요. 독일 교육제도에서 전자는 그후부턴 그냥 놀거나 월반을 해야 합니다. 수학경시대회 나가는 친구들이 쓸 참고서가 없다는 사례가 상황을 설명하겠지요.

2)답변: 본문에서도 언급되었는데 학습능력평가에서 미진하여 독일 정치인들이 교육개혁을 말하고 있습니다. 학부모와 학생은 시큰둥한 편인데, 모든 분야에서의 추세를 생각해 볼 때, 미국식 교육방책들이 어느 정도는 도입될 것 같습니다. 물론 다른 문화가 뿌리내려져 있으므로 다른 방식으로 수용될 수 있는 가능성도 높겠지만요.

하이용

2010.04.27 01:16:30
*.116.36.44

헐.. 뭔가 이상한데요....

하이용

2010.04.27 01:27:46
*.116.36.44

1) 놀거나 월반해야 한다는 얘기속에는 공부라는것에 자기가 배우는 것에 대해 어떠한 상승욕구(?)가 존재한다고 전제되는거 같은데요. 물론 자기가 원하는 공부를 하는 자유가 있어야겠지만 그것이 경시대회나 다른 어떤 제도적인 틀에 맞춰져야 할 이유가 있을까요.. 그런 지적인 호기심과 어떠한 상승욕구(?)를 충족하는데에 꼭 수직상승만 있을까요..
2) 저는 요즘 돌아가는 추세를 잘 몰라서 그러는데 그걸 더 잘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요?

하뉴녕

2010.04.27 01:29:28
*.152.193.36

아니 학교에서 요구한 학업성취도 완성한 후 놀고 싶은 사람들은 놀아도 되는데, (이런 사람들이 경시대회 나가지는 않겠죠? 상식적으로...) 더 하고 싶은 사람들이 있더라도 그 사람들이 공부할 수 있는 여건이 안 잡혀 있어서 문제라는 거지요.

독일 교육의 추세에 대해 알고 싶으시면 소개한 책을 보시면 되겠네요.

고양이

2010.04.27 01:41:01
*.140.136.145

1) 꼭 수직상승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수직상승의 욕구가 없는 사람들만 한 사회를 이루고 사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더구나 독일 내에 경시대회가 없다손 쳐도 국제적 경시대회(수학 과학 올림피아드 등) 같은 것이 있다면 나가보고 싶은 사람도 있을 수 있겠지요. 그런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사회적으로 '전혀' 없다면 그것도 당사자들에게는 답답한 일일 겁니다.

2) 요즘 돌아가는 추세라는 게 뭘 말씀하시는 건지 너무 모호하네요. 교육? 정치? 문화? 사회?

하뉴녕

2010.04.27 01:42:58
*.152.193.36

고양이// 흠 근데 이 책을 보면 독일 내에도 경시대회는 있는데, 그 경시대회를 나갈 때 풀 수 있는 참고서가 없다는 얘기였어요. 기출문제 가지고 조금 보는데 한두시간이면 다 풀 수 있는 그 정도의 분량....;;

하이용

2010.04.27 01:36:40
*.116.36.44

헐.. 제가 쓴 댓글은 그런 의미를 갖고 쓴게 아닌데 서로 다른 얘기를 하는거 같네요..

하뉴녕

2010.04.27 01:40:44
*.152.193.36

상승욕구가 제도적인 틀에 맞춰져야 할까, 라는 문제라면, 교육의 본원적인 문제인 것 같긴 한데, 공교육 제도로 고민해 주긴 힘든 문제겠죠. 물론 교사 본인의 재량이 큰 체제에선 어느 정도 가능할 것 같긴 합니다만, 독일 교육은 그런 체제이긴 한데, 기본적으로 교육 자체가 상위권 학생들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는 듯. 그래서 이 책에서도 그런 사례는, 별로 못 찾았어요. (다만 대학을 갈 수 있을지 없을지 간댕간댕했던 학생의 상승욕구를 교사 재량으로 받아준 사례는 나오지요.)

하이용

2010.04.27 02:23:48
*.116.36.44

상위권 학생이 무엇인지는 학교에서 교육을 하면 잘 따라오고 빨리 이해하는 학생이 성적을 잘내고 그런 학생이 상위권 학생이다 뭐 그런걸로 받아들이면 되겠습니까?
그리고 상승욕구를 가진 사람이 대회같은거 나가고 싶어하는건 뭐.. 그런걸 배려해야 한다는건 어느정도 동의하는데 잘 모르겠습니다.
또 추세를 물어본건 독일 교육의 추세를 물어본게 아니고 글속에 맥락에서 독일 전통교육이 영미식 교육을 어느정도 받아들일 것이다 그런식으로 흘러가는거 같아서 하는 말인데
영미식 교육이 어떻게 요즘 추세인지 정체를 알 수 없어서 그렇습니다... 교육현장과는 먼곳에 있는 사람이라서 말이죠... 그 추세를 어떻게 알 수 있고 어떤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뉴녕

2010.04.27 02:37:20
*.152.193.36

상위권 학생이 무엇인지는 학교에서 교육을 하면 잘 따라오고 빨리 이해하는 학생이 성적을 잘내고 그런 학생이 상위권 학생이다 뭐 그런걸로 받아들이면 되겠습니까?

--> 예. 사실 그게 상위권 학생의 정의지요...--;;

그리고 상승욕구를 가진 사람이 대회같은거 나가고 싶어하는건 뭐.. 그런걸 배려해야 한다는건 어느정도 동의하는데 잘 모르겠습니다.

--> 뭐 그게 아니라 생각하신다면 독일식 교육에 완전히 동의해 버리면 되는 것이겠구요...

또 추세를 물어본건 독일 교육의 추세를 물어본게 아니고 글속에 맥락에서 독일 전통교육이 영미식 교육을 어느정도 받아들일 것이다 그런식으로 흘러가는거 같아서 하는 말인데

영미식 교육이 어떻게 요즘 추세인지 정체를 알 수 없어서 그렇습니다... 교육현장과는 먼곳에 있는 사람이라서 말이죠... 그 추세를 어떻게 알 수 있고 어떤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 제가 정밀하게 쓰려고 했던 건 아닌데, 이 맥락에선 주로 1) 교육방식과 2) 평가방식에 있었고, '주관'과 '객관'(?)의 얘기를 했던 것 같네요. 오지선다형과 문제풀이 방식으로 국제학력평가가 이루어지니 그 기준에 맞추는 방식이 영미식, 이란 것이겠지요.

하이용

2010.04.27 02:43:22
*.116.36.44

상위권 학생에 대한 배려인지 수직상승(뭔가 우월하고픈.. 월반.. 경시대회..)욕구를 가진 학생에 대한 배려인지 이 구분에 따라서 큰 간격이 생기는데..
상위권 학생에 대한 얘기는 정말 알 수 없는 노릇입니다... 상위권 학생이 뭔지는 오리무중입니다....

하뉴녕

2010.04.27 02:50:15
*.152.193.36

흠 그러면 '상위권 학생 중 수직상승하고픈 학생에 대한 배려'라고 정리를 할께요. 여전히 상위권 학생을 넣어야 하는 이유는, 독일 교육은 학교교육을 잘 못 따라오는 학생들이 가지는 수직상승 욕구에는 정말 잘 반응해줄 수 있기 때문에....(그런데 독일 사회에는 님이 말하는 수직상승 욕구라는 것 자체가 잘 없는 듯 해요. 부모가 대졸자라도 자식이 대학갈 성적이 안 된다고 선생님이 통보하면 그냥 체념하고 받아들입니다. 별다른 사교육도 안 하고... 그런 사회는 독일 밖에 없을 거라고 책 중간에 어떤 독일 선생님이 말씀하시더군요.)

그리고 그것과는 별개로, 상위권 학생이 지금 배우는게 재미가 없어서 그냥 순수하게 더 어려운 걸 배우고픈 욕망이 있을 가능성도 엄연히 존재하긴 하는 것이죠. 그리고 이런 욕망을 채워줄 때 그 사람의 선천적인 능력이 잘 계발된다라고도 말할 수 있겠구요. 독일식은 이런 부분이 비어 있다는 것이 지금까지 한 얘기들이죠.

그리고 '상위권'의 정의는,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것이고 체제논리에 의한 것인데 그게 뭔지 모르겠다고 하는게 더 이상한 것 같아요. 독일에서는 독일 교육체제에서 높은 점수를 받는 이들이 상위권이겠고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죠. 한국의 상위권 학생이 독일에서는 잘 적응이 안 될 수 있고 그 역도 성립하겠으나 그러므로 '상위권'이란 말이 의미가 없다는 건 말이 안 되죠.

하이용

2010.04.27 03:24:48
*.116.36.44

순수하게와 더 어려운것. 이 두 단어가 매치가 안되는데.. 지식에 대한 욕구와 지성에 대한 욕구를 혼동해서 사용하시는거 아닌가요?
그리고 상위권이란 단어는 어떤 가치에 따라서 바뀌는 것이므로 상대적인것 같지 않습니다. 그것은 교육에 있어서 가치체계를 미리 정해놓고 얘기했을때 상대적인 것이겠죠..
잠을 자겠습니다.

하뉴녕

2010.04.27 09:24:36
*.152.193.36

수학 정말 좋아하면서 잘 하는 친구들 못 만나 보셨나 본데 '순수하게'라는 말이 성립을 합니다. 그래봤자 한국적 실정에선 수학과가 아니라 의대를 가게 된다는 게 비극이지요.


'지성에 대한 욕구'가 있으면 더 좋겠지만, 아쉽게도 '지식에 대한 욕구'가 더 일반적입니다. 당장 사람들이 지식을 폭넓게 부릴 수 있는 사람보다는 골든벨 울리는 사람을 더 대단하다고 바라보니까요.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아마 님도 저보다는 어려운 단어 줄줄 읊어대는 사람이 훨씬 더 부러울 겁니다.


'상위권'이란 말이 마음에 안 드시는 모양입니다만 성인군자 레벨 만드는 게 아니라 성인 이전의 아동/청소년에 대한 교육이라면 지식의 습득에 능숙한 치와 그렇지 못한 치들이 구별되는 게 자연스럽습니다. 굳이 '상위권'이란 말을 쓴 것은 '시험에서 점수를 더 잘 받는' 이란 의미이므로 '상대적인 것이고 체제논리에 의한 것'이라 부연했습니다. 하지만 굳이 다시 표현하자면 '뛰어난' 이라고 적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독일의 우등생이 한국에 와도 우등생이 될 가능성이 높고 한국의 우등생이 독일에 가도 우등생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보니까요. 어느 나라에나 해당하는 문제입니다. 다만 일치하지 않는 2할-3할의 집단이 있을 텐데, '한국 교육이 변별력에 문제가 있다.'고 말하는 건 일단은 이 2할-3할의 문제가 되는 것이겠구요. 흔히 사람들이 말하는 식으로 하자면, 그 2할-3할 속에 아인슈타인이 끼어 있을 수 있다, 뭐 이런 문제인 것 같습니다. 뭐 아인슈타인이 낙제생이었다는 것도 좀 과장된 신화에 불과하긴 하지만요. 물론 한국 교육이 변별을 탁월하게 하는 것도 아니면서 모든 학생들을 살인적으로 괴롭히는 것이 문제라는 점도 지적되어야 겠습니다.


여기서 더 근본적인 문제로 나아가 보면 교육의 목적이 잘난 놈 못난 놈 변별하는데 있는게 아니라 어떤 종류의 능력을 배양하기 위해 있는 것이라는 걸 겝니다. 이 경우 이 '능력'이 뭐가 되어야 되느냐에 대해선 사회적인 차원에서 가치의 문제가 들어가게 되겠지요. "한국 교육이 독일 교육에 비해 문제가 크다."고 말할 때는, 아마도 이런 부분을 얘기하는 것일 겝니다. 본문에서 언급했듯, 문제해결 능력이 아니라 컴퓨터가 판독할 수 있는 문제풀이 능력을 배양하는 시스템이라는 식으로 비판할 수 있겠지요. 님이 얘기한 가치체계의 문제는 아마도 이런 부분과 연관이 있을 것 같군요. 그러나 이 문제는 상위권/하위권 학생을 말하는 것과는 좀 다른 차원에 놓여 있는 문제인 것 같습니다.

루카스

2010.04.27 05:41:06
*.183.41.16

정말 궁금해서 묻는다면, 난독이지만 괜찮아.
발릴 준비가 되어 있다면, 키워라도 상관 없어.
하지만 저 놈이 못나서 글을 애매하게 쓰는지라 내가 고생해서 정확하게 만들었다는 착각이나 진실
속에 있으시더라도, 성실히 답변해 준 상대에게 고맙다는 마음을 품는 정과 예의는 갖고 살아가는 것
이 본인의 물기 어린 삶을 위해서도 좋은 게 아닐까요?
ㅋㅋㅋ 오, 단순한 무례를 지성과 열정으로 착각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여!

여러 사람에게 공개 하신 공간이니까 이런 저런 일이 있겠죠. 정말 궁금하셔서 묻는 분도 있을테고
글에 도움 주기 위해 이런다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을 거구요. 늘 겪고 익숙하게 겪는 일이라고해
도 기분이 좋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어쩌면 주인장은 자주 겪는 일이라 해탈했는데 옆에서 보는 저
만 짜증나 있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이번에 달린 댓글만 두고 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ㅋ

약 한 달(까지는 안 됐나?) 전 쯤부터 원래 좋았던 글이 더 깔끔해지고 전달력이 좋아진 것 같아요. 건설적인 생각을 하며 살아가는데 늘 많은 도움 받습니다. 한윤형 씨, 좋은 글 많이 써 주셔서 고맙습니다. 앞으로도 건필하세요.

하이용

2010.04.27 10:57:57
*.116.36.44

저도 초등학교때 수학경시대회 나가본적 있는데요. 저같은 경우는 사교육을 조금 받았던게 있어서 그런지 몰라도 흥미도 있고 성적도 되고 해서 그런거지만 제가 모르진 않습니다. 저는 그때 경시대회 문제지를 보면서 재미없어지는 느낌을 받았지요ㅋ 그런걸 순수하게 좋아한다는건데 그때 옆자리에 앉아있는 애들중에서 그런 애들이 있었겠죠 그들을 배려해야 한다라... 그런 시험을 치르고 싶어하는거... 뭐 알겠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초딩이 대학가서 공부하는것도 티비에서 여러번 본것도 같고요. 그런게 독일에선 전혀 없으니 뭔가 바뀌어야 한다는거면 이해를 하겠습니다. 그건 정말 특수한 경우죠.
근데 그걸 상위권과 연관시키는데 상위권이라... 천재와 상위권.. 흠
상위권이 맘에 안드는게 아니고 상위권이란게 님이 말씀하신 정의라면 학습능력이 높다는건데 학습능력이라는 것이 의심스럽습니다.(흥미 적성 정서 태도 성격등의 미묘한 차이가 능력의 차이로 치환 될 수 있는 부분이라서) 이 부분은 심리학을 끌여들여야 하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물론 송유근군과 같은 천재는 특수한경우와 분리해야하는데 그건 어떻게 하는지의 문제가 있네요....

하뉴녕

2010.04.27 11:03:14
*.152.193.36

저는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 수학경시대회 나갔습니다. 문과지망생인 주제에...지금은 다 까먹었으니 됐구요. 이런 말씀 굳이 드리는 이유는 초중고 경시대회 다 나가본 입장에서, 초등학교 경시대회는 엄마가 극성스러운 아이들이 나가는 대회라는 인상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한국 교육의 실정에서, 진짜로 수학 잘하고 좋아하는 애들은 더 나중에 눈에 띕니다.


문제는 아주 간단합니다. 가령 소설책 좋아하는 애가 교과서로는 충족이 안 되는데 책살돈도 없고 주변에 도서관도 없다면 얼마나 괴롭겠어요. 그런 경우를 좀 고려해 주자는 겁니다. 님이 별 흥미가 없었다고 남들도 흥미가 없다는 건 아닙니다.


그리고 심리학은 학습능력이란 게 대체 어떤 걸로 구성되어 있는지를 탐구하는데 써먹을 수는 있을지 몰라도, 엄연히 있는 학습능력의 차이를 부인하기 위해 고생하지는 않을 겁니다. 갑자기 문제를 철학적(응?) 사변(응?)의 레벨로 점프시키시네요.


더 배우고픈 상위권 학생에게 원하는 것을 조금 더 주자, 라는 말이 초딩이 대학가서 공부하는 거나 송유근 사례로까지 점프하는 건, 좀 당혹스럽습니다. ('상위권'이란 말과 '천재' 사이에도 엄청난 간극이 있죠.) 개인적으로 초등학생이 대학가서 공부하는 건 별로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교육학을 잘 아는게 아닌 만큼, 그건 제 직관의 표현일 뿐이죠. 여하간 지금 말하는 문제에서 너무 멀리 나간 사례라고 생각합니다.

하이용

2010.04.27 11:16:56
*.116.36.44

저는 비교적 일관되게 말씀드린건데 저는 상위권이라는 단어를 동의한적이 없는데 그게 무엇인가를 계속 물어봤고 사변철학인지는 모르겠는데 심리학 인지과학 내에서도 논란이 있는걸로 알고있습니다. 인지과학 뇌과학 심리학에 대한 다큐나 대중서적같은 걸 좀 봤던게 있어서 쉽게 동의하긴 어려웠던거죠. 상위권을 딱 그냥 성적갖고 얘기하는것 그거에 따라 맞다 틀리다 하는것도 그 틀을 수용하는거니까 쉽사리 동의되지가 않았습니다.
또 어떠한 욕구에 대해선 배려가 필요하다는것엔 동의하는데 저는 경시대회같은건 동의하지만 뭘 더 주자는건지 상상이 안됩니다. 도서관이요.. 네 그것도 동의합니다. 월반이요.. 월반은 모르겠습니다.

하뉴녕

2010.04.27 11:24:38
*.152.193.36

월반은 원래 독일에 있어요. 다만 한가지 잘해서 월반해봤자 적응 못하고 도로 내려오는 경우가 있으니까, 어지간해선 잘 안하려고 들죠.

님이 하려는 말을 전달하려고 했으면 "학습능력의 차이라는게 학문적으로 엄밀하게 정의될 수 있는 종류의 것인지는 의문이다."라고 한번만 덧글 달면 될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상위권이란 말을 '해당 학습체제에서 요구하는 학습평가 기준에서 우수한 자' 정도로 사용했다고 밝혔기 때문에, 서로 더 이상 할 말이 없는 거겠죠. 저는 이 글에서 그 부분까지 고민하려는 의도가 없었습니다. 물론, 잘 모르기도 하구요.

독일은 워낙 상위권 학생에 대한 배려가 전무해서 그런 걸 약간이라도 만들었으면 좋겠다는 것이 책 내용과 그 책 내용을 전달한 저의 취지였죠. 학교수업에서 상위권을 배려하지 않는 것까지는 공교육이니까 이해를 하는데, 그 녀석들이 경시대회 나간답시고 집에서 공부 좀 하려고 해도 참고서가 없어서 공부를 전혀 할 수가 없는 현실은 좀 과하지 않느냐는 그런 정도 차원의 문제제기였습니다. 이렇게 학습능력의 존재유무(?)에 대해서까지 논의해야 할 얘기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이용

2010.04.27 11:27:33
*.116.36.44

알겠습니다.

gglife

2010.04.30 14:20:53
*.46.67.198

경향신문 및 딴지일보에서 한윤형님의 글을 몇 번 읽은 후부터 요즘에는 블로그의 글들까지 잘 보고 있습니다. 제가 님의 글을 평가할 능력이 되지는 못하겠지만 다양한 문제에 대단히 이성적으로 침착하게 생각하시고 그것을 유려하게 표현하시는 것을 보며 늘 감탄하고 있습니다.

교육이 사회문제라는 것에는 저도 많이 공감하고, 현재 우리나라의 소위 주류라는 사람들이 대학 교육을 과도하게 중시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정글같은 미국식 자본주의보다는 (제가 잘 알지는 못하지만) 독일식의 안정된 제조업 기반의 산업이 개인의 삶을 행복하게 할 것이는 생각이 어렴풋이 듭니다.

그러려면 우리나라도 독일식으로 경쟁력을 갖춘 다양한 중소 (제조업) 기업들이 출현하고 안정되어야 할 것 같은데, 한윤형님께서는 현재 우리 나라에서 구체적으로 과연 어떤 산업에서 이런 기업들이 나타날 수 있을지, 정책적으로는 어떤 산업을 육성해야 할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이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지금 우리 세대(저는 서른입니다)가 소위 기성세대개 될 때에는 우리 사회가 이렇게 바뀌었으면 하는데 어떻게 이를 달성해야 할지 구체적인 방법을 고민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제대로 육성해야할 우리나라 사람들과 여기저기서 많이 욕먹는-_- 우리 세대의 강점은 무엇일까요?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전통적으로 마이스터와 같은 장인들을 별로 존중하지 않고 심지어 천하게 보던 의식이나 한 가지 일에 묵묵히 매진해서 뭔가를 이루는 것보다 한탕 제대로 하려는 주의가 우선 문제가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중국의 가격 경쟁력 기반 제조업과 경쟁하는 현재 국내 제조업이 성공하려면, 또는 성공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뉴녕

2010.04.30 23:51:42
*.71.226.237

저도 산업정책을 입안할 능력은 없구요. 그런 부분은 진보진영이 하나의 지향을 정립했을 때, 그 지향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심각하게 고민되어야 하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지금 상황에서도 말할 수 있는 것은,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불공정한 거래 관행이 제도적 개혁을 통해 근절되어야 한다는 것이겠구요. 제조업의 경쟁력을 위해서도 부동산 가격. 상승을 기본으로 생각하는 성장전략은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것일 겝니다. 임금상긍으로 인해 중국에 대해 경쟁력을 잃었다고 말하지만 임금차이가 열 배라면 부지가격은 백 배는 차이나거든요;; 이런 메커니즘으로 힘들어진 기업경영을, 세금이나 자꾸 깎아주면서 지원하고 있는건데, 장기적으로 보면
문제가 많지요.

1203호

2010.05.01 09:28:09
*.46.194.100

딴지 걸 마음은 없지만 쥔장을 너무 혹사시키는 댓글이 아닌지...?
안타까워 집적댑니다.

Bigcat

2010.08.29 01:32:57
*.64.245.252

대단하시네요-_-;; 개념정의도 제대로 못해서 이걸 질문이라고 계속 해대는 댓글들에 일일이 답글을 다 달아주시고. 주인장님이 너무 고생하시는 것 같아 저도 안타깝습니다.

조갑제의회개

2010.11.10 23:10:10
*.149.40.37

이런 댓글들에 일일이 고생하시다니... ㅠㅠ
이렇게 몸을 혹사시키고 고민이 많으시니
실제로는 아주 마르셨을듯 ㅠㅠ 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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