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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정치적 관심에 대해

조회 수 1096 추천 수 0 2006.09.05 02:32:00
카이만은 병장 2호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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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수다 중에서도 어떤 사람의 성격을 결정짓는 이런 저런 행위의 윤리적 가치에 관한 수다들보다도 더 그 밖의 머리쓰는 일에서는 권태를 느끼는 사람들의 참여를 촉발하고 모임에 일종의 활기를 불어넣는 것은 없다. (칸트, <실천이성비판>에서)

나는 그런 종류의 '활기'를 아주 좋아했다. 중학교 때, 한참 <은하영웅전설>에 빠졌을 때, 내가 했던 일은 그 소설을 친구들에게 읽히고, 그 인물들에 관한 수다에 그들을 동참시키는 것이었다. 그것을 위해 나는 별 짓을 다했다. 등장인물들에 관한 인기투표까지 실시했을 정도였다. 물론 인기투표는 내가 원했던 종류의 수다에 한참 못 미치는 것이었지만, 어쨌든 출발점은 그것으로 그런대로 좋았다. 소설 앞부분만 살짝 읽고 키르히아이스를 찍어버리는 순정만화 취향의 소년들 때문에 차등투표제를 도입했다는 사실도 고백해야겠다. 2권을 읽고 키르히아이스를 찍은 이의 1위 추천표는 10점이었지만, 본편 10권 외전 4권까지 다 읽은 나의 양웬리 1위 추천표는 70점의 효력을 가졌던 것이다. 그럼에도 양 웬리는 키르히아이스에 밀려 2위에 머물렀으니, 여러분은 나의 전횡에 너무 분노하지 마시길 바란다.

고등학교 때는 그 시기 청소년들의 일종의 전형으로, <에반게리온>이나 <슬레이어즈> 따위를 가지고 그런 식의 수다를 떨었다. 아직 그런 수다의 영향권 안에 있던 대학교 새내기 시절, 아는 누나와 술을 먹다가 둘 다 필름이 끊길랑 말랑 할 때쯤 둘 다 제로스를 비슷한 방식으로 좋아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당장 의남매를 맺었을 정도였다. (그러고보니 그 누나는 만 5년 가까이 못 보고 있다.)

사회의식이랄까, 공동체에 관한 선의랄까, 그런 부분을 모두 빼버리고 난다면,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시작된 나의 정치적 관심은 그런 수다의 연장선상이다. 나는 진중권이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를 통해 이문열, 이인화, 조갑제 등을 비판하는 것을 보았고 그런 종류의 글을 더 찾아보다가 강준만의 인물비평을 만나게 되었다. (나보다 나이가 몇 살이라도 더 많은 사람들은 강준만을 읽다가 진중권을 만나게 되었다고 한다. 이런 걸 우리는 흔히 세대차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 인물비평에 대한 흥미가 내 정치적 관심의 시작이었다. 좌파들은 강준만의 인물론이 '구조'의 차원을 결여하고 있다고 비판했지만, 훌륭한 인물론이라면 그 인물의 내적 갈등을 통해 구조적 모순까지 인물의 중핵으로 끌어들이는 법이다.

어쩌면 한국사회에 대중소설의 팬들이 조금만 더 많았더라면, 그래서 내가 저 수다를 스스로 찾아다니지 않아도 되었더라면, 나는 또래의 많은 젊은이들과 마찬가지로 종시 정치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가령 <얼음과 불의 노래>같은 소설은 등장인물도 많고 케릭터도 생생해서 그들에 대해 거의 현존하는 정치인에 대한 정치평론 수준의 코멘트를 할 수 있을 듯하다.) 그리고 그렇게 사는게 더 행복하기도 했을 것이다. 지금의 나는 행복의 가치를 크게 보고 있지는 않지만.

오늘 내가 정치적 관심에 대해 의견을 피력하는 행위가 공동체의 내일에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지는 언제나 의문스럽다. 따라서 공동체에 대한 선의를 가지고 있음에도 정치적 이슈에 대해 의견을 표명하지 않는 사람을 만나는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나는 실제로 그러한 사람들을 많이 알고 있다. 그들 중 일부는 아예 정치적 문제에 대한 관심이 없고, 나머지 일부는 자신이 바라는 사회의 방향에 대한 관점은 가지고 있으면서도 구체적인 문제에 대해선 판단을 유보하거나 피해간다. 그리고 그것은 정치평론을 업으로 삼지 않는 모든 사람에게 합리적인 선택이다.

따라서 비합리적인 선택을 하는 이들은 그들의 선택을 '이런 것도 있어야 한다.'는 식의 일종의 당위로, 의무로, 치장해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된다. 가령 이런 식의 논증이 가능하다. 나 한 사람이 정치적 이슈에 대한 의견을 표명하거나, 하지 않거나는 사회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하지만 만일 우리가 행위의 준칙을 보편적으로 의욕한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모든 사람이 정치적 이슈에 대한 의견을 표명하는 사회와, 모든 사람이 정치적 이슈에 대해 침묵하는 사회를 비교해본다면, 명백하게 전자쪽이 훨씬 더 바람직한 민주주의 사회에 가까운 것 같다. 그러므로 나는 정치적 이슈에 의견을 가지지 않는 행위를 보편적으로 정당화할 수는 없다. 그러나 반대의 경우는 가능하다. 결국 정치적 이슈에 의견을 가지는 행위는 비록 유용성에 의문이 있을지라도 그렇지 않은 행위보다 정당한 행위가 된다.

이것이 지나치게 당위적이고, 정치에 대해 코멘트하지 않는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 우려가 있다면, 약간 완화된 논증도 가능하다. 역시 여기서도 모든 사람이 정치적 이슈에 대한 의견을 표명하는 사회가 그렇지 않은 사회보다 더 낫다는 의견은 남는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사람들은 그렇게 할 만한 환경에 있지 않다. 따라서, 그런 환경에 있는 사람들이라도 (이 기준은 매우 자의적이긴 하지만, 원래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지 않으려면 그 기준이 자의적인 편이 더 낫다.) 정치적 이슈에 대한 의견을 표명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런 당위가 결코 타당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어떤 사람이 지속적으로 정치적 이슈에 대해 코멘트하고 있다면 거기엔 저 수다에 대한 욕망이 베어 있을 것이다. 양 웬리나 제로스가 아무리 몇몇 사람을 흥분시킨다 하더라도, 가령 '이명박'이라는 이름을 언급했을 때처럼 술자리에 동석한 이들의 눈빛이 동시에 초롱초롱해지는 효과를 거두지는 못한다. 그 쾌감은 강렬하고 중독적이라, 여러 내용없는 정치잡설을 양산하는 요인이 된다. 욕망은 그 자체로는 긍정적이지도 부정적이지도 않다. 그 욕망은 대부분의 신문들이 제공하는 경마식 중계보도를 통해 충족되기도 하고, 정치적 담론의 주인이 되려는 새로운 시민적인 욕망에 의해 다듬어지기도 한다.

군대라는 공간은 어쩔 수 없이 나를 '정치잡설'의 세계에서 이탈시켰다. 비록 내가 블로그를 유지하고 있다고는 하나, 여기다가 서평은 올릴 수 있어도 "최근에 있었던 이 사건이 의미하는 것은..." 따위의 문구로 시작되는 글을 올릴 수도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군당국이 지속적으로 내게 관심을 가질리도 만무하고, 싸이월드 미니홈피나 네이버 블로그를 제외한 '사바넷' (인트라넷의 우주에 서식하는 군인들은 인터넷을 이렇게 부른다. 불교에서 말하는 '사바세계'가 어원이라는 견해도 있고, '사회'의 '사', '바깥세상'의 '바'를 따서 만든 신조어라는 의견도 있다.)의 세계를 잘 모르기 때문에 너무 널리 읽히는 글을 쓰지만 않는다면 몰래 서방질이 가능할 듯도 하다. (물론 '가능'하다 해도, 그런 리스크를 감수해야 할 이유가 없긴 하지만.) 하지만 그런 직접적인 규제보다도, 현실적으로 며칠 지난 뉴스를 들을 수밖에 없고, 듣더라도 곧바로 글을 쓸 수가 없고, 설령 글을 썼다 하더라도 곧바로 블로그에 올릴 수도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나느 별다른 유혹없이 자연스럽게 정치적 관심의 스위치를 꺼버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일년 반이라는 시간이 지났고, 이제는 그 꺼져버린 스위치 너머로 다시 새로운 욕망이 꿈틀댄다. 나 자신이 개선되었다는 느낌은 대부분의 경우 착각이라는 사실을 잘 알지만, 그래도 이제는 예전보다 그 욕망을 세련되게 발산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드는 것이다. 지금의 나는 정치적 수다의 재미 못지 않게 '강건너 불구경'의 재미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일까?

지멘

2009.03.20 10:19:24
*.127.208.63

저에게 있어서 양 웬리라는 존재는 가카 만큼이나 눈을 반짝이게 해주는 존재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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