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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라캉 논쟁 정리글

조회 수 1304 추천 수 0 2008.03.27 18:48:46


1. 라캉 이론에서 무의식의 개념


하늘빛마야 님이 제기했던 질문에 대해 다시 답변하면서 시작해보자. 라캉 이론에서의 무의식도 경험적으로 검증되어야 하지 않는가? 그렇지가 않다. 무의식 개념 자체가 경험적으로 정의되지 않는 것이 라캉 이론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무의식은 의식에 포착된 순간 더 이상 무의식일 수가 없다. 정신분석학의 옹호자들은 (적어도 책을 쓰는 인간들은) 애초에 “정신분석학은 과학이 아니다.”라고 단언하고 시작한다. 원래 무의식이 과학주의적으로 옹호될 수 있는 개념이 아니기 때문이다. 과학자들이 어떤 기구를 통해 각 주체 속에서 진행되는 생리적 과정을 포착해 낸다 하더라도 그것 자체가 의식에 포섭된 것으로 간주된다. 이런 언급에서는 개인의 인식의 차원과 인간 종족 일반의 인식의 차원의 구별을 대충 뭉개버렸다는 느낌도 들지만 하여간 그들의 설명이 그렇다. 말하자면 “주체가 관찰의 대상이 되면 주체를 매개로 주체를 관찰한다는 역설적인 상황에 빠지게 되고 만다.”는 것인데, 이는 훗설이 <시간 의식>에서 부딪혔던 ‘자기 의식의 난제’에 정확하게 상응하는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 무의식의 개념은 마치 칸트의 사물 자체나 라캉 본인의 실재와 같은, 논의의 시작에서 가정된 사변적인 개념이 된다. 라캉 본인의 말을 들어보자.


“무의식은 불가능한 것으로 자신을 제시함으로써만 유지될 수 있는 지식을 지칭하는 은유적 용어일 뿐이다. 그리하여 그것은 실재임이 밝혀진다.”


구성된 주체가 인간 전체를 대변하지 않다는 것, 그 단순한 진실에서 라캉은 무의식의 개념을 추출했다. 라캉은 “정신분석학이 다루는 주체는 과학적 주체이다.”라고 말한 적도 있다. 말하자면 그의 주체 이론은 과학적 담론이 성립하기 전의 조건들을 다루고 있는 건데, 그러므로 애초에 과학적인 검증의 대상이 될 수가 없다. 처음부터 정신분석학의 포지션이 이런데도 “그것은 과학이 아니다.”는 선언이 비장하게 흘러나오는 것은 철저한 무지의 산물이라 봐야 할 것이다.


나는 “당신들은 라캉의 무의식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고 논의를 전개하고 있어!”라고 아이추판다 님과 하늘빛마야 님에게 말한 적이 없다. 라캉의 무의식 개념이 상식인이 꼭 알아야 할 것도 아닐뿐더러, 이것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인지도 의문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나는 라캉이 이미 철학의 영토에 들어선 사람이니 이 구역을 크게 침범하지 않으려면 임상의 효과만으로 그의 이론을 부인할 수 있다는 주장은 하지 말아야 할 것이라고 썼다. 하지만 노정태의 심각한 오해와 그로 인한 논의 전개를 보고 있자니, 내가 잘못된 방식을 택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에, 실험 데이터로 반증도 불가능한 저 따위 포지션을 지니고 있다니! 아 쇳스러워. 근데 왜 저렇게 저딴걸 신뢰하는 사람들이 많은 거지?!”라고 어느 과학도가 외친다면, 나는 그냥 쓰윽 웃고 지나갈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근데 그건 노정태가 훗설에 대해 설명하면서 말했듯이 관념론이란 게 원래 그렇다. 믿으면 계속 믿는 대로 보이고 안 믿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다. 그러므로 과학도들은 라캉을 무시해도 된다. 내가 성질을 부리고 있는 부분은 단 하나, “정신분석학은 과학으로 반증될 수 있고, 그 경우 당연히 (정신분석학 이론의) 철학적인 부분 역시 무너진다.”는 그 신념이다.



2. 훗설도 똑같다.


그러므로 “라캉주의를 제외한 현대 대륙철학의 상당수는 과학적인 검증의 대상이 아니거나 되지 않기 위해 나름의 노력을 기울여왔다고 봐도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라는 노정태의 말은 완벽한 오해이다. 나는 노정태가 라캉에 대해 이 정도의 사실도 모르는 줄은 몰랐다. 과학도들과 달리, 천 권의 책을 독파하고 최근 철학과 대학원에 들어간 노정태는 철학계에서 꽤나 유명한 철학자를 아주 초보적인 수준의 이해도 없이 신나게 조소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변명할 입장에 처해 있지 않다. 반성하기 바란다.


“그렇다면 "당신들의 얘기가 일관성을 갖추려면 심리학의 발전이 데카르트에서 훗설까지의 철학자들의 논법을 격파했다고 주장해야 한다"는 말은 대체 무슨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 노정태는 이렇게 물었다. 말 그대로의 의미다. 그냥 님하가 라캉을 몰라서 내 말을 다르게 알아들은 거다. 훗설이 과학적으로 반증될 수 없는 영혼으로부터 얘기를 시작했으니 심리학으로 반증될 수 없다면, 과학적으로 반증될 수 없는 무의식으로부터 주체 이론을 끌어내는 라캉도 당연히 과학적으로 반증될 수 없다. 물론 아이추판다 님은 지금 무의식도 우리가 탐사해서 밝혀낼 수 있다는 자료를 정리하기 위해 열심이시겠지만, 라캉 이론에서는 개념적 정의로 그런 접근을 거부한다. 그렇게 밝혀지면 무의식이 아니라는 것이다. 현상학과 정신분석학 이 양자 사이에서 차이를 찾는다면 영혼은 하나의 비과학적인 실체인 반면 무의식은 실체가 되기도 거부한다는 것일 게다.


요약하자면, 우리의 노이디푸스는 자신이 실컷 옹호한 아이추판다 님의 견해를 털어버리기 위해 맹진하고 있었던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며칠 전부터 이 결말 알고 있었다. (‘안다고 가정된 주체’질을 괜히 하는 게 아니다.) 그렇긴 해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내가 현상학을 잘 모르기도 했기 때문에, 나는 그가 현상학의 구체적인 부분에서 심리학의 성과를 반영하면서 철학적 접근을 시도한 부분을 지적하면서 정신분석학과의 차이를 규명할 줄 알았다. 그래서 그게 지도교수와 협의할 일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하지만 저 정도의 얘기는, 그냥 술먹으면서 나한테 했다가 쫑코 먹어도 된다.


“대륙철학의 이론적 체계 중에서 현대의 심리학 데이터를 반영해야 하는 부분이 어디이고 데이터와 상관없는 부분이 어디인지를 파악하는 것은 그 자체로 난해한 철학적 문제일 것 같다. 아마 그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논의가 시작된다 해도 철학자마다 견해가 다를 것이다.”


라는 나의 코멘트에 대해, 노정태는 바로 그 지점을 스스로 탐구하고 있지 않다고 나보고 철학도도 아니라고 말하는데, 사실 내가 헐겁게 공부하는 건 사실이니 철학도 아니라고 치자. 그런데 노정태도 말했듯이 그 문제는 철학자들이 알아서 방어 논리 잘 만들어 놓지 않았을까? 과학의 시대가 개막된 게 어제 오늘의 일도 아닌데. 내가 대륙철학 운운한 건 대륙철학이 걱정되어서가 아니라 그네들의 논변이 얼마나 허접한지를 까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천권의 책을 읽은 철학도가 이 조크를 듣고 철학의 미래를 걱정하다가 훗설의 ‘영혼!’ 한마디를 듣고 안도감에 잠이 들었다니 막 내가 죄책감이 느껴지려고 한다. 철학자들을 그보다 더 신뢰해도 된다. 담대함을, 보다 담대함을! 


가령 이런 얘기다. 훗설의 이론은 영혼에 관한 것이라고 하자 어떤 이는 그걸로 영혼의 병을 치유할 수 있냐고 묻는다. 데이터를 내놓으라고 떼를 쓴다. 인문대생인 나는 그런 데이터가 있는지 없는지 관심도 없는데 말이다. 그러다가 데이터가 없으니 과학이 아니라고 한다. 당연히 훗설은 과학이 아니지, 그래서 뭐 어쩌라고. 그래도 나는 참을성을 가지고 영혼의 병을 치유할 수 있다면 당연히 그 이론의 경험적 정당성이 확립되겠지만, 치유가 안 된다 해서 그 이론이 오류라고는 볼 수 없다는 당연한 얘기를 한다. 그러자 누군가는 “그래요. 치유율이 전부는 아니겠지요. 그렇다면 다른 과학적 증거를 대셔야죠?”라고 말한다. 내적 성찰과 사변으로 만든 이론을 어떻게 경험적으로 반증하냐고 했더니 한 쪽에선 “어머 인문대생들은 사변만으로 이론을 만드셨어요?”라고 비웃고 다른 한 쪽에선 “성찰? 아, 내성 심리학? 내성을 믿지 마세요.”라고 말한다. “그거 다 돈 들이면 반증할 수 있어요. 그런데 돈 대줄 거에요? 양심이 있어야지.”란다. (노파심에서 말하는데, 정신분석학 이론의 ‘어떤’ 부분은 과학적 검증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종류의 것일 수도 있고, 그것이 반증된 사례가 있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까지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수준의 얘기가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반복된다. 지겨워 미치겠다. 그런데 노정태는 왜 이런 상황을 보고 내게 화를 내는 걸까?


아마 노정태는 이 비유에 동의 안 하겠지? 라캉 이론은 이미 철학이라고 아무리 설명을 해도, 라캉은 임상으로 출발했으니 우리가 털어버릴 수 있고 나머지 철학자는 알 바 아니라는 게 그들의 입장이다. 그리고 노정태도 이에 동조하는 듯 싶다. 정신분석학이 이미 프로이트로부터 단순히 신경증 환자를 치료하려는 임상학이 아니라 정상적인 사람들을 이해하기 위한 새로운 정신학을 의도했다는 사실은 더 말하기도 귀찮다. 그런데 노정태는 그 사실은 알고 있나? 현상학과 정신분석학은 상호간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 학문이라는 사실을. 초기 훗설은 정신분석학을 현상학에 흡수하고자 했고, 후기 훗설은 현상학과 정신분석학을 결합하려고 했다는 사실을. 훗설은 프로이트에서 막대한 영향을 받았고, 라캉은 훗설에게서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훗설의 이론에도 프로이트가 분석한 임상자료가 경험적으로 깔려 있는 셈이고, 라캉의 이론에도 훗설의 흔적이 남아 있는 셈이다. 아이추판다 님이 황우석급 사기극이라 비웃은 라캉의 거울 단계 이론에 거의 상응하는 구절이 훗설에게서도 보인다. 라캉은 털려도 되는데 훗설은 털리면 안 되는 이유를 서술한다면 그야말로 페이퍼 감이다. 나는 솔직히 노정태가 이 모든 사실을 알고, 그 정도는 쓰고 있을 줄 알았다. 그래서 그건 너무 어려운 문제니 이런 블로그 논쟁에 끼지 말고 지도교수와 상담하라고 했던 거다.  


출발이 과학적으로 반증될 수 없는 영혼이라도, 무의식이라도, 구체적인 이론 전개에서는 심리학적 탐구를 수용할 수 있는 부분이 있지 않을까? 통약불가능한 언어를 핑계로 소통을 게을리 한다면 대륙철학의 생명력은 쇠진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것이 내 상식적인 의문인 것이고, 과문한 탓인지 그런 작업을 하고 있는 자료를 본 일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심리학과 면밀한 관련이 있는 미국 심리철학만을 쓸모 있는 철학이라 인정하는 것은 너무 극단적인 견해일 것이다. 더더구나 분석철학자들도 ‘논리적으로는’ 대륙철학을 털어버릴 수 없어 “에이 니들은 그냥 그렇게 살아...”하고 있는 형국에 과학도들이 과학의 방법론으로 라캉을 털어버릴 수 있다고 믿는 것은 희극적인 일이다.


정리를 하자면 이렇다. 라캉 이론이 임상에서 별 쓸모가 없다는 얘기는 심리학 전공자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얘기다. 그야 데이터로 말하면 되는 거니까. 데이터가 라캉에게 유리하지 않으니까. 이 사실은 나 역시 애저녁에 인정했는데, 내 논적들은 이 사실에서 곧바로 “라캉 사살!”이라는 결론을 도출해낼 수 있다고 우겨서 논쟁이 이 지경이 된 것 아닌가? 여하튼 그것과, 그 사실을 통해 철학으로서의 라캉마저 손쉽게 부인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전혀 다른 층위의 일이다. 스스로 깨닫기를 원해서 그간 단적으로 말하진 않았는데, 그냥 툭까놓고 말하면 ‘오류’다. 진짜로 라캉을 털어버리고 싶다면 결국 라캉을 읽어야 한다. “데이터에 기반하지 않은 이론은 사기다.”라는 명제를 적용하려면 그 이론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봐야할 게 아닌가. 이 부분은 우리 과학도로선 모르는 부분이니까 패스, 하지만 이 부분은 데이터와 연관지어 생각해 봐야 하는 부분인 것 같은데? 어 그리고 좀 아닌 것 같거든? 뭐 이런 차원에서 비평을 해야지. 이 논쟁을 정리하기 위해 칸트 훗설 하이데거를 뒤적였다는 노정태도 실천적으로는 그렇게 행동한 듯 싶은데, 그러면서도 왜 읽지도 않고 라캉을 털어버릴 수 있다고 믿었던 과학도들을 옹호하는 것일까? 왜 그의 실천과 글은 불일치하는 것일까?



3. 철학은 신비주의가 아니다.


노정태도 알고 있는 모 PD님이 그저께 술을 마시다가 나더러 이 논쟁 좀 그만하라고 만류했다. 철학도 입장에서 보면 과학주의가 우습기는 하겠지만, 과학주의자들이 한국 사회에 해악을 끼칠 만큼 많다고도 볼 수 없고 오히려 황우석 사태에서 보듯 더 필요하다고 말할 수 있는 형국이 아니냐는 말씀이었다. 옳은 말이다. 나도 이렇게 길게 논쟁하게 될 줄은 생각도 몰랐다.


그런데도 마지막으로 긴 글을 쓰는 이유는 과학도들의 오해를 바로잡기 위해서다. 철학은 신비주의가 아니다. 철학의 역사는 오히려 신비주의에 대항해온 역사다. 몇 명 예외를 발견해낼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큰 흐름으론 그렇다. 황우석 옹호와 같은 종교적 광신은 철학과 가까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가장 멀리 있다. 철학과 과학은 똑같이 ‘이론적 사유’의 우위를 말하고 있고, 태초에는 하나의 학문이 철학이란 이름으로 있었으되 인간 지성의 발전에 따라 분과 학문으로 분화되었다. 예술이나 종교가 이론적 사유를 억압하려 할 때, 합리주의의 이름으로 이론적 사유를 수호해 왔던 것은 철학이었다.


노정태는 우리 패거리에게만 전설적인 네티즌인 ‘철학공부하는 사람’의 발언을 내세워 나더러 왜 세계 지성계를 믿지 못 하냐고 한다. 세계 지성계의 판단을 신뢰하니까 이 짓을 하고 있다. 경험적 자료가 빈약하다니 라캉 임상의 효과가 별로라는 사실에 흔쾌히 동의했고, 그럼에도 수많은 철학자들이 관심을 가지고 응대하고 있으니 그래도 철학적으로는 쓸모가 있다고 했다.


논쟁 중반에 내가 좀 뻘짓을 했다. 일부는 계산된 오바였지만, 무지에 의해 계산보다도 훨씬 더 오바했다. 그런데 내가 왜 그 짓을 했을까? 빡이 돌아서였다. 라캉을 어느 사기꾼 물리학자에, 프랑스 지성계를 그 사기꾼을 인터뷰한 신동아에 비유한 아이추판다 님의 행태 때문이었다. 노정태는 내가 한국 사회의 언론의 수준에 대해 평균적인 상식인들보다는 더 많이 알고, 더 많이 분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 근대 학문의 기본적인 규칙을 알고 있는 노정태는 답해 보라. 프랑스 철학자들은 근대 학문의 레벨에 편입되지 못할 사기꾼들인가? 그렇게 치부해도 되는가? 아이추판다 님이야 그렇게 주장하는게 당연하다. 라캉이 병신인데 당연히 라캉이랑 싸운 들뢰즈 데리다도 병신이 되어야 마땅하지. 그런데 노정태 역시도 그렇게 생각하는가? 


내가 아무리 무식해도 이거 하나만은 확실히 말할 수 있는데 결국엔 과학을 옹호하는 것이 철학이다. 과학과 샤머니즘을 구별해 줄 수 있는 잣대도 철학에서 나온다. 데이터와 사변이 멀리 있는 것 같겠지만, 결국엔 데이터를 수집할 때조차도 이론의 틀이 개입한다. 나와 같은 사람들이 결국 과학과 비과학을 똑같이 샤머니즘의 진흙탕으로 몰아넣고 있다는 아이추판다 님의 진술을 보고 내가 왜 화가 났는지를 확인했다. 철학자들을 진흙탕에 몰아 넣어 버리고 과학은 제 몸 더럽히지 않고 독야청청할 수 있을 줄 알았나? 철학자들이 샤머니스트가 될 정도면 과학은 뭐가 어떻게 되는 건데? 내 실패한 공세는 그런 거친 감정에서 시작했던 것이다. 정말 단순한 사실 몇 개만 지적하면 되는 것이었는데, 내가 충분히 알지 못했기 때문에 이 논쟁이 지나치게 길어진 감이 있다. 그 점에 대해서 나도 많이 반성하고 있다. 변명도 이만하면 되었다. 나도 이 논쟁은 이제 정말로 끝이다.     



노정태

2008.03.28 01:05:58
*.52.184.252

네 반응도 예상했던 대로니 나도 덧붙일 말은 없어. 결국 너는 레비나스와 다를 바 없는 수준의 말을 하고 싶지 않아서 빙빙 돌려가며 엉뚱하게도 심리학을 공격한 것이었군. 세부적인 차원에서 수도 없이 드러나는 논리의 오류들을 지적하고 싶지만, 그러면 '논쟁을 끝낸다'고 선언한 바를 어기게 되니까 참도록 하지. 그야 아껴뒀다가 술자리에서 '쫑코'를 먹이면 될 테니까.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진짜 아는 것이다"라는 공자의 명언이 떠오르는구나. 아무튼 논쟁을 끝내자고.

이상한 모자

2008.03.28 09:35:50
*.77.133.65

너희 둘은, 참.. 어쩌면 그렇게 똑같이 결론이 '술'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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