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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메타 이론, 과학, 물리주의

조회 수 1736 추천 수 0 2008.03.17 18:46:34



1.
“어떤 사람은 라캉이 심리학자가 아니라 철학자라고 하겠지만, 철학은 메타 학문이기 때문에 개별 학문에서도 인정받지 못하는 내용을 가지고 논의를 전개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내가 라캉을 적어도 심리학과 대상을 공유하는 영역에서 인정할 수 없다고 말한 이유는 그가 심리학에서 듣보잡이고, 그의 주장을 뒷받침할만한 경험적 근거가 없다는 것인데 이 정도의 주장을 '과학주의'라고 부를 과학철학자는 거의 없을 것이다.”


전자는 논쟁 전의 아이추판다 님의 진술이고, 후자는 논쟁 후의 아이추판다 님의 진술이다. 이 정도에서 만족하려고 했는데 그의 글을 보니 충분히 논의되지 않은 부분이 있다.


논의의 편의를 위해 일단 전자의 진술이 어떤 의미에서 ‘오류’인지를 명료하게 진술하면서 지나가자. 이것은 경험적 오류도 아니고 논변적 오류다.


분과 학문인 심리학에서 인정받는 내용이 심리에 관한 메타 학문을 구성해야 한다면, 현재의 심리학은 어떤 메타 학문을 구성할 수 있는가? 심리학은 라캉의 이론과 다른 그들의 방법론을 가지고, 데카르트, 칸트, 헤겔 등에 주석을 다는 메타 학문을 구성할 수 있을까?


직관적으로 볼 때 그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이에 대해선 심리학도들도 흔쾌히 동의할 것이다. 이 하나의 사실에서 두 가지의 다른 선택지가 따라나올 수 있다.


a) 분과학문인 심리학의 메타화로 나오지 않는 철학 이론들, 특히 인간의 의식이나 심리에 대한 철학 이론들은 모두 말이 안 된다. 특히 주체 철학 혹은 의식 철학이라 부르는 분류에 들어가는 학자들, 데카르트, 칸트, 독일 관념론, 헤겔, 훗설은 철학이라 볼 수 없다.

b) 우리는 심리학과 철학의 관계를 이렇게 단순하게 설정해서는 안 된다.


a)의 결론은 논리필연적이다. 다음과 같은 예상반론이 가능하다. “데카르트나 훗설의 시대엔 심리학이 지금과 같은 데이터를 갖추고 있지 않았다. 따라서 그들의 이론은 성립이 가능했다. 그러나 라캉의 경우는 얘기가 다르다.” 답변. “지금도 데카르트주의자가 있고 현상학자들이 있다. 당신들의 얘기가 일관성을 갖추려면 심리학의 발전이 데카르트에서 훗설까지의 철학자들의 논법을 격파했다고 주장해야 한다. 빙빙 돌리지 말고 어서 한번 그렇게 주장해 보시지.”


어떤 심리학도도 a)의 결론으로 가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일전에 아이추판다 님의 주장이 “훗설의 현상학을 심리학 전공자가 임상을 통해 반증했다고 주장하는 것과 별 다를 바 없다”고 지적했던 것이다.) 그리고 a)의 결론을 내린 이와 내가 굳이 논쟁을 해야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분석철학자들이라고 해서 저런 결론을 옹호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내가 보기에, 저 결론은 분석철학 전통 내 심리철학의 일부분까지도 도려낼 수 있는 주장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산뜻하게 b)의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b)의 결론에 도달할 경우 심리학과 의식 철학은 굉장히 먼 거리에 있는 학문이 되어 버린다. 따라서 “심리학에서 듣보잡이니 넌 철학도 불가”라는 얘기는 “촘스키라면 모를까, 전공인 언어학에서도 듣보잡인 네가 무슨 수로 정치평론을 하겠다는 거니?”라는 얘기와 논리적으로 동일해진다. 물론 이는 부당한 권위에 의한 논증의 오류에 해당한다.    



2.
아이추판다 님의 글이 이 오류를 충분히 인지하고 있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나는 방어적인 자세에서 공격적인 자세로 전환하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주장을 ‘과학주의’라고 부르는 것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과학주의의 참된 뜻을 추적하고 있다. 글 자체는 흥미로운데, 이 논쟁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는 의문이다. 그리고 그는 어떤 과학철학도 한의학을 옹호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 듯한데, 이 역시 그렇지는 않다. 파이어아벤트는 일종의 ‘인식론적 무정부주의’를 내세웠고 뉴튼 물리학과 점성술이 다른 이유를 찾아낼 수 없다고 주장했다. 점성술조차도 옹호가 되는데 한의학이 무슨 대수일까. (그런데 나의 경우 파이어아벤트의 견해에 찬동하지는 않는다.)


반과학주의자들이 과학을 상대화시키기 위해 노력하면서, 궁극적인 목적은 자신 역시 과학임을 증명하려는 데에 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그들은 과학을 부인하면서도 승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을 묘사하는 데엔, 노정태가 보여주었듯이 오히려 정신분석학의 언어가 탁월할 듯싶다. 하지만 그런 귀찮은 과정은 생략하고 논점으로 돌아가자. 아이추판다 님의 주장은 ‘과학주의’인가? 내가 그렇게 부른 적이 있는지도 모르겠는데, 굳이 용어를 정립하자면 그의 주장은 과학주의라기보다는 ‘과학물신’에 가깝다. 그의 태도를 ‘과학주의’라고 칭할 때의 ‘과학’은 개념적인 정의라기보다는 자신이 과학임을 강변하고 손쉽게 그것을 인정받는 어떤 학문을 가리키는 사회적인 개념일 터이다.


내가 그의 주장을 ‘과학물신’이라고 칭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정신분석학을 추방하는 그의 방식이 전혀 과학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의 오류라기보다는, 오히려 심리학의 속성과 연관이 되어 있다. (물론 그 속성을 인지하지 못한 것은 그의 오류다.) 다시 메타 이론 얘기로 돌아가자. 심리학이 관념론에 참견할 수 있는 메타 이론을 스스로 생산해 내지 못한다는 사실은 1에서 지적했다. 그렇다면 심리학은 다른 종류의 메타 이론은 생성해낼 수 있는 걸까?


심리학의 메타 이론은 마땅히 심리철학일 것이므로, 나는 곧바로 김재권의 <심리철학>을 펴놓고 심리학도들에게 물을 것이다.


“분과학문으로서의 심리학을 사랑하시는 심리학도 여러분. 오늘은 친애하는 우리의 친구 심리학이 어떤 메타적인 심리철학 이론을 생산해낼 수 있는지를 묻는 시간입니다. 자, 답변해 보세요. 그것은 실체이원론입니까? 아니면 행동주의입니까? 심신 동일론? 인과론적 기능주의? 심적 인과성론? 심적 실재론? 부수 현상론? 이렇게 세부적인 것에서 고를 수 없다면, 그것은 물리주의입니까? 아니면 비물리주의입니까? 물리주의라면 환원론적 물리주의입니까, 아니면 비환원론적 물리주의입니까?”


우리의 심리학도들은 이 질문에 하나도 대답할 수 없게 되어 있다. 왜냐하면 심리학이란 학문은 이 모든 메타 이론을 생산해낼 수 있는 모든 가능한 방법론을 다 차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경생리학이란 학문은 환원론적 물리주의를 전제한다. 하지만 이 메타 이론을 받아들인다면 심리학에서 수용하는 상담 등의 의료행위는 설 자리를 잃는다. 환원론이냐, 아니냐? 라는 이 단순한 질문에도 심리학도들은 “그게 환원론인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고...”라는 모순적인 답변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은 다른 학문도 마찬가지 아닌가? 경제학에도 양립이 불가능한 여러 가지 입장이 있고, 사회학에도 양립이 불가능한 여러 가지 입장이 있다. 학문이란 게 원래 그런 거다. 그런데 왜 심리학의 그런 측면을 조소하는 것인가?”라는 반론이 있을 수 있겠다. 사태를 잘 모르는 소리다. 나는 이렇게 답할 것이다.


“당연히 하나의 학문 안에는 여러 가지 입장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입장들은 하나의 보편화를 추구합니다. 가령 사회학에서 마르크스주의 학파와 베버 학파가 있다면, 이들은 모든 현상을 자기 이론을 통해 설명하려고 합니다. ‘여기서는 마르크스주의로 설명하고...에에 저기서는 그게 안 되네? 그럼 저건 베버로 설명하고...’ 이런 식의 논법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경제학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통화주의 학파나 신제도주의 학파 역시 사회학의 그것과 마찬가지 관계에 있지, 심리학처럼 삼선짬뽕으로 얽혀 있지는 않습니다. 게다가 주류 경제학은 여러분의 친구인 친애하는 심리학은 물론 사회학보다도 훨씬 엄밀한 학문 체계를 자랑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학문의 도입부에서 그들이 가정해야 하는 열 가지 정도의 원칙을 상정하고, 그 후로는 이 원칙의 안쪽에서 논리적으로 타당한 법칙만을 수립하기 때문입니다. 심리학도 그런 원칙을 가지고 있습니까?”


물론 그런 원칙이 없다. 게다가 양립할 수 없는 입장들이 모두 하나의 학문 아래 수용되어 있다. 이래가지고선 학적 방법론을 충실하게 구비하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즉, 그것은 제대로 된 과학주의를 들이민다면 충분히 과학이 아닌 것이다. 충분히 과학이 아닌 것이 아주 당당한 과학인 양 행세하면서 과학이 아닌 것을 단죄하고 있는 현실은, 정신분석학의 광신적인 지지자들이 과학을 부인하면서도 승인하는 것에 맞먹을 만큼 희극적이지 않은가?



3.
이 테제가 그저 관념적인 것에 불과할 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사태를 모르는 것이다. 이 테제를 정식화하면 더 이상 아이추판다 님은 심리학의 임상의 효용성을 자랑할 수 없게 된다.


정신분석학의 임상 부분에서의 효과가 매우 제한적이라는 사실은 이미 서로 간에 동의했거나, 적어도 논의하지 않기로 했기 때문에 언급하지 않는다. 애초에 나는 정신분석학의 임상적 효과가 탁월하다고 주장한 적도 없었다. 다만 이제부터 내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통합된 방법론이 붕괴된 상황에선 임상 결과의 우월성이 큰 의미를 지니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얘기다. 아이추판다 님은 주류 심리학의 접근법을 택한 환자 집단과 정신분석학적 접근법을 택한 환자 집단의 치료 비율을 비교해 본 후 전자를 과학적인 것으로 승인했을 것이다. 그러나 ‘주류 심리학의 접근법’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말한다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것이 밝혀졌기 때문에, 이 표본은 성립하기 어렵다. 어떤 이가 이 표본을 마음대로 추출해서 바꿔도 아무런 항변을 제기할 수 없게 된다.


가령 융을 생각해 보자. 프로이트가 정신분석학계의 조폭적 보스라면, 융은 이 동네의 ‘샤먼 킹’쯤 된다. 이 아저씨 자서전 보면 장난 아니다. 환자를 만나기 전날에 만나지도 않은 그에 대한 꿈을 꾸고, 자기가 맡았던 환자가 애석하게도 자살한 그 순간 환자의 권총 총알이 관통한 그 부위에 통증을 느끼면서 잠에서 깬다. 유령에 대해 그가 글을 쓰고 있을 때 저택 주변에 유령이 가득했고 자식들이 이상 행동을 보였다고 한다. 요새 말로 하면 구라빨 쩐다. 융은 실제로도 많은 사람을 치료했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치료 잘 하는 사람 몇 명의 환자 집단과 심리학자들의 환자 집단을 비교해도 그들은 할 말이 없다.


“왜 할 말이 없느냐. 한 두명이 치료를 잘 하더라도 그 방법이 보편적으로 통용될 수 있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냐. 그게 과학적인 비교가 아니냐.” 그 말 맞다. 그런데 아까 말하기로 심리학엔 일관된 방법론이 없다고 했다. 그러면 이제 임상 사례는 과학성과는 아무 관련이 없고 미아리 점집의 확률 논쟁으로 비화된다. 


물론 아이추판다 님은 특정한 접근법 대 특정한 접근법의 환자 집단을 비교하는 것이므로 내 주장이 무의미하다고 주장할 것이다. 타당하다. 단, 그렇게 주장하려면, 앞에서 지적했던 것처럼 어떤 문제에 대해선 이런 방법론을, 또 어떤 문제에 대해선 다른 방법론을 적용하는, 혹은 문제가 잘 안 풀리면 이 방법 저 방법 다 써보기도 하는 심리학의 발달 수준에 대한 인정도 뒤따라야 할 것이다. “그게 뭐가 어떠냐. 사람 치료하기 위해 이 방법 저 방법 쓰는게 올바른게 아니냐.” 물론 올바르다. “상대방의 말을 듣건, 약을 먹이건, 전기충격을 주건 환자를 잘 치료하는 게 적어도 임상에서는 옳은 것입니다.”라는 아이추판다 님의 진술도 그래서 나왔다.


하지만 단지 이것만으로 변명이 되지는 않는다. 그런 변명이 통용되는게 사실이라면 심리학은 마땅히 정신의학이라고 이름을 바꿔야 할 것이다. 게다가 아직 의학 중에서도 상대적으로 발달이 덜 된. 의학이 한의학에 대해서 데이터를 통해 공박할 때에는, 의학의 방법론이 정연하기 때문에 효과가 있는 것이다. 심리학이 사람 고치는데 정신분석학보다 더 유용하다는 점에 동의할 수는 있겠으나, 과연 심리학이 정신분석학을 갈굴 만큼의 어떤 과학주의를 지니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물론 심리학이 이렇게 잡탕학문인 것은 심리학자나 심리학도들의 잘못이 아니라 현재 인간이 지닌 지식의 한계 때문이겠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더 그렇다. 그리고 마음에 대한 탐구가 마음이 아픈 사람들을 고치는 일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니 만큼, 마음에 대한 (라캉이 아니더라도) 철학적인 메타 이론들에 대해서 성질을 부릴 필요도 없는 것일 터이다.


정신분석학의 경우 임상을 통해 착상을 얻어 인간의 마음이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해 개념적으로 파악하려고 하는 조류이다. 의식에 포섭되지 않는 무의식이 존재한다는 (무의식의 옹호자들은 ‘존재’라는 표현을 선호하지 않겠지만) 자료는 얼마든지 찾을 수 있기 때문에, 이 무의식의 구조를 탐사하겠다는 정신분석학의 접근을 부인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다만 이들의 탐사는 과학적인 방법론을 적용하기 힘든 분야에서 이루어지는 만큼, 노정태가 말했듯이 전임자의 텍스트를 비평하는 데에서 시작하는 일종의 특수한 인문과학이 되었다. ‘인류학’이란 그의 비유는 완전히 적합하지는 않더라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정신분석학과 심리학은 논쟁의 접점을 찾기도 힘든 국면에 처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지금의 싸움은 과학이란 이름을 획득하려는 양자의 페티쉬를 드러내는 것 이외의 의의는 없는 것 같다.  



4.
위에서 나는 소위 과학주의의 입장에서 볼 때 심리학조차도 엄밀한 과학이라기보다는 그 경계선에 걸친 잡탕학문임을 보여주려 했다. (사실 평소의 나는 학문에 대해 그닥 이런 잣대를 들이밀지는 않는다. 메타 이론이란 철학적인 개념을 들이밀었을 때, 그 개념이 부메랑으로 어떻게 돌아올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싶었을 뿐이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당연히 이건 심리학의 잘못이 아니다. 물리학도가 심리학도를 이런 이유에서 비웃는다면 이건 공정한 일이 아닐 것이다. 이것은 ‘과학주의자의 폐해’라고 말할 것까지도 없고 그냥 싸가지가 없는 거다.


그럼 다른 의미에서 과학주의가 해가 되는 시점은 언제일까? 나는 그것은 과학이 성립하는 조건들에 대한 인지를 잃어버릴 때라고 생각한다. 가령 앞서 나는 주류 경제학이 교과서 처음에 나오는 열 가지 정도의 기본 전제를 받아들인 후에 논변을 전개한다고 얘기했다. 즉 경제학이 다루는 공간은 그 기본 전제를 받아들인 어떤 가상의 공간이다. 그 가상의 공간의 확보를 통해 학문은 더욱 탁월함을 발휘하게 되고, 오히려 현실에 더 정합적이게 되지만, 이 가상의 공간이 곧바로 현실인 것으로 믿고 있어서는 곤란하다. 어떤 종류의 대안적 논의들이 ‘비경제학적’이라고 무시받을 때에는, 물론 정당한 판단인 경우도 있겠으나, 섣부른 판단인 경우도 있을 터이다. 이것이 흔히 ‘과학주의’ 혹은 ‘과학중심주의’를 비판할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의미하는 것이다.


자연과학의 경우 역시 그렇다. 물리학은 물리계의 인과관계가 폐쇄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전제하에서 성립한다. 당연히 그런 전제가 있어야 한다. 그 전제가 없으면 신이 개입하고 어쩌구 답이 안 나온다. 신이 개입했다는 사실은 논증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신이 개입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이걸 그냥 놔두면 이성이 무력해진다. 그래서 애초에 전제 조건에서 빼고 들어가는 것이다. (심리철학에서 대개 물리주의의 관점을 택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하지만 미리 구조 바깥을 그렇게 배격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월권을 행사한다면 어찌 되겠는가? 아름답지 못한 일이 벌어질 것이다. 심리철학이 아무리 발달했다 한들 심지어 데카르트주의자마저 가능하다. 왜냐하면 신경생리학이 아무리 발달한다 하더라도 그게 실체이원론을 결정적으로 반증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특이하게도, 현대에 와서 신경생리학으로 노벨상을 수여받은 어느 심리철학자도 여전히 실체이원론자로 남아 있는 것이다.


“그것은 과학이 아니다.”라는 말은 “그것은 존재할 가치가 없다.”는 말과는 또 다르다. 과학에 대한 공격을 현존하는 과학과 다른 과학의 존립근거를 주장하는 것으로만 받아들이는 의식은 과학 이외의 다른 어떤 지식체계도 효용이 없다는 어떤 특수한 오만을 함축한다. 의학과 한의학의 논쟁에서 나는 대개 의학의 편을 드는 편이지만, 한의학의 모든 기술은 쓸모가 없다는 식의 주장을 들으면 얘기가 또 다르다. 정말 다 검증해 보고 하는 얘기인지에 대해 의구심이 드는 것이다. (한의학 논쟁 때 어떤 블로거는 “그것은 과학이 아니므로 검증이 불가능하다.”고 말했는데 독해불능이다. 당연히 과학이 아닌 것도 검증이 가능하다. 물론 한의사들이 ‘과학적인’ 변인통제를 한의학의 총체론적 시각에 반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거부한다면 문제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겠지만 그건 다른 얘기다.) 과학은 우리에게 유효한 하나의 지적 체계를 가리키는 이름이지, 이 사회에서 가장 잘나고 권위있는 무언가를 표상하는 이미지가 되어서는 곤란하다.


노정태

2008.03.17 23:25:44
*.162.212.41

수동 트랙백입니다.

"과학적인 것과 과학적인 것이 아닌 것"
http://basil83.blogspot.com/2008/03/blog-post_17.html

kritiker

2008.03.17 23:32:18
*.39.252.30

나는 왜 바빠 죽어야 하는 이 상황에서 열심히 찾아다니며 덧글도 안 달고 글만 읽고 있는 걸까...ㅠㅠ

하뉴녕

2008.03.17 23:45:37
*.176.49.134

노정태/

뭐가 이렇게 길어. 일단 전반부만 봤다.

"전자는 '올바른 철학이라면 올바른 과학적 지식에 기반해야 한다'라는, 철학에 요구되는 당위에 대한 진술이다. 반면 후자는 '올바른 과학적 지식이라면 철학적 차원으로 승화될 수 있어야 한다'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이 두가지가 다르다는 것에 대한 당신의 지적은 올바르지. 하지만 나는 바로 아이추판다 님의 주장이 전자를 의도했지만 적절하지 않게 쓰여지면서 결국 후자에 대한 요구를 (스스로) 불러왔다고 보는 거야.

라캉으로 돌아가 보자면 라캉이 무의식에 관한 이론을 만드는데에 있어 기반해야 할 '올바른 과학지식'은 무엇일까? 계속해서 아이추판다 님은 환자의 치유율만을 얘기하고 있는데 그래서야 "지금 정신의학 얘기 하는 겁니까?ㄲㄲ"라는 조소를 받을 수밖에 없지. 1) 도대체 마음에 관한 이론을 만드는데 반드시 지켜야 할 과학적 지식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2) 그리고 그 지식은 왜 과학적인 지식인지. 따위의 얘기에 대해서 그는 전혀 말을 하지 않고 있어. 다만 심리학에서 '듣보잡'이라고 할 뿐이지.

그러면 당연히, "저 듣보잡 말고 당신들이 만들어낼 수 있는 메타적 심리이론은 무엇이죠?"라고 묻게 될 수밖에.

심리학이 메타 이론을 발달시켜 전통 철학에 가필하는 경지에 이르는 것은 당신 말대로 심리학의 영역과 전혀 상관없는 일이다. 그 전혀 상관없는 일에 심리학의 인증을 요구했다는 것 자체가 아이추판다 님의 오류인 것이지. 그래서 1번에서 제기한 내 논지는 전적으로 올바르다고 봐. 다만 여기서 제기한 논변이 지금 네가 격렬하게 저항하고 있는 어떤 것과 공유되어 2번 논증으로 흘러가고 있는데, 그에 대해선 차후에 다시 얘기하도록 하자.

아이추판다

2008.03.18 02:32:48
*.140.173.176

수동트랙백입니다.

쿤, 과학학, 김재권 그리고 해킹
http://nullmodel.egloos.com/1728054

하뉴녕

2008.03.18 12:28:37
*.46.105.46

노정태 님, 이상한 모자 님, 그리고 아이추판다 님의 글 모두 잘 보았습니다. 답변할 논점도 대략 잡아 놓았는데, 시간상 내일 오후에 다시 정독하고 세심하게 글을 작성하여 올려야 할 것 같습니다. 되도록 논쟁을 매듭짓는 쪽으로 가볼 터이니 그때 뵈어요. ^^;

노정태

2008.03.19 01:18:41
*.52.184.233

"1) 도대체 마음에 관한 이론을 만드는데 반드시 지켜야 할 과학적 지식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2) 그리고 그 지식은 왜 과학적인 지식인지. 따위의 얘기에 대해서 그는 전혀 말을 하지 않고 있어. 다만 심리학에서 '듣보잡'이라고 할 뿐이지.

그러면 당연히, "저 듣보잡 말고 당신들이 만들어낼 수 있는 메타적 심리이론은 무엇이죠?"라고 묻게 될 수밖에."

-> 무슨 말인가 했더니, 정치평론가더러 총선에 출마하라는 소리였구만.

1)과 2)에 대해, '정신분석은 과학이 아니다' 정도의 말을 하는 사람이 그 이상을 입증해야 할 책임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도 타당하지 않고. 1)은 나도 잘 모르지만, 2)에 대해서는 내 글이 어느 정도 대답이 될 거라고 봐.

자, 그러면 내일 발표할 과제물을 쓰러 가야겠네. 네 리플을 보니 어디서 오류가 생겼는지 너무 확연해서 답글을 달고 있지만, 여기서 리플 논쟁을 하지는 말자고. 정리 포스트 기다리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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