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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지금 보니 부끄러움이 많은 글인데, 당시 판타스틱 편집부에 한국 판타지 소설 독자가 거의 나하나 밖에 없다시피 했던 관계로 미흡한 서술대로 그대로 글이 나오게 되었다. 지금보니 내용과 문장이 너무 허접한데...-0-;;;; 보관해두는 게 성격인 고로 그냥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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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스틱 2007년 6월호,

장르 토착화 기획 PART 1 : 판타지, 다른 세계에 대한 매혹

한국 판타지, 10년 그 방랑의 연대기


소설적 수사로 '대마법사'라고 부르거나, 게임의 감수성으로 '궁극 9서클 마법사'라고 부르거나, 우리의 마음 속에서 아주아주 센 마법사의 이미지는 무엇일까? 사실은 강호무림의 고수와 비슷한 것이 아니었을까? 물론 옆나라 일본의 경우도 <로도스도 전기>처럼 마법사와 검사가 상호 협력하지 않으면 얘기가 안 되는 소심한 소설이 있는가 하면, <슬레이어즈>처럼 마법사든 검사든 무조건 강하기만 하면 웬만한 건 해결할 수 있는 화끈한 소설이 있다. 그러나 일본은 무협지가 발달하지 않은 나라다. 사실상 무협지가 장르소설 시장을 선점하는 우리의 실정에서, 무림고수와 구별되는 캐릭터의 정체성이 있느냐는 문제는 판타지 소설의 자율성을 말할 수 있는 리트머스 시험지가 될 법도 하다. 이 글에서는 지난 10년간 무림고수와 끊임없는 긴장 관계에 있었던 판타지 캐릭터들의 정체성을 중심으로 우리의 판타지 소설을 평가해보고자 한다.


최초로 출판된 한국 판타지 소설

1. 김근우 <바람의 마도사> 1997

김근우의 <바람의 마도사>는 최근 개작을 거친 후 재출간되었으며, 많은 작가들이 과거의 기억을 되살려 찬사를 보내고 있다. 이 소설에서 마법은 주로 정령과 연결되어 나오는데, 주인공 라니안 나이스만은 바람의 정령왕을 소환해 데리고 다니기 때문에 바람의 마도사다. 정령의 체계는 운디네나 살라만다가 나오는 북구 신화 계통이 아니라 독자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소설은 세계관보다는 주인공의 캐릭터를 통해 사람들에게 다가왔다. 혼자서 모든 것을 처리할 수 있을 듯한 '마도사'라는 두루뭉술한 개념은 한국 판타지의 주인공이 떠맡는 강한 캐릭터성이 '무림고수'에 가까이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그럼에도 나락의 나락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삶을 시작하려는 라니안은 <에반게리안>의 신지같은 음습한 분위기에서 출발해 주인공으로서의 사명을 하나씩 완수해 나가며, 성장기 소년의 예민한 감수성에 빠져들고 싶어 하는 판타지 독자층에게 어필했다. 이후 10대 후반 소년이 주인공이 되는 것이 한국 판타지 소설에서 하나의 패턴으로 자리잡았다.

작가의 주목할 만한 후속작 <흑기사>


통신 문학 최초의 베스트셀러

2. 이영도 <드래곤 라자> 1998


이영도의 이 소설은 한두 마디로 평할 수 없는 걸작이다. 세계관의 측면에서 바라본다면, 마법체계는 롤플레잉(RPG) 게임과 일치하고, 우주론은 질서(cosmos)와 혼돈(chaos)의 대립이라는 고전적인 판타지의 이분법에 기초한다. 그러나 질서 역시 혼돈의 파생물일 수 있다는 칼 핼턴트의 언급은 이영도가 수입된 서구 판타지에 새로운 요소를 덧붙이고 있음을 보여준다. RPG물이나 일본 판타지를 수용하는 방식도 마찬가지. 가령 드래곤이나 엘프의 성격에 대한 서술은 일본 판타지물의 그것에 대한 이미지를 충실히 반영하고 있으면서도 한걸음 더 나아갔다. 자기 소설의 뱀파이어를 설명할 때 앤 라이스보다는 브람 스토커를 따랐다고 기술한 이영도 자신부터 장르소설의 충실한 독자였음이 틀림없다.

주인공은 역시나 성장기 소년이고, 특유의 어른인 척하는 냉소주의를 보이지만 결국 일행 중의 일부분이며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핸드레이크나 솔로쳐와 같은 대마법사는 거의 혼자서 무적인 것처럼 나오지만, 그들은 현재의 사건을 이끌어가는 주역은 아니다. 이영도만큼 캐릭터의 성격을 강하게 표현하면서도 그것을 '무림고수'와 먼 곳에 두는 작가는 없다.

작가의 주목할 만한 후속작, <이영도 단편집>, <눈물을 마시는 새>


기사 로맨스 판타지 등장, 한국 판타지의 자율성을 증명하다

3. 이상균 <하얀 로냐프 강> 1999


<하얀 로냐프강>은 최근 예전에 나오지 않았던 2부까지 합쳐서 재출간되었다. 1부에 한정해서 얘기한다면, 이 소설은 기사도 문학, 궁정 로맨스의 요소를 차용하고 있으며 순정만화 감수성으로 접근하여 친근감을 높인다. 그리고 사건의 진행은 국가 간의 전쟁을 통해 이뤄지기 때문에 긴박감을 잃지 않는다. 전쟁에 나서는 군단의 움직임도 <은하영웅전설> 류의 전략물에 익숙해진 독자들의 눈높이를 충족시키고, 그 토대 위에서 기사들의 싸움을 낭만적으로 묘사한다. 기사인 퀴트린과 음유시인 아아젠의 신분을 초월한 이야기가 테마지만, 결말에서는 퀴트린과 파스크란이 보여주는 남자들끼리의 우정에 주제가 약간 눌리는 것 같아 아쉽다. 판타지 소설이 활용할 수 있는 소스가 다양하다는 점을 보여준 역작이다.


'휘긴교도'들을 양산한 매력적인 판타지

4. 홍정훈 <비상하는 매> 1999


이 소설에는 '무림고수'형 캐릭터가 활보한다. 주인공 페르아하브는 지극히 강하고, 잘생겼고, 언제나 이기며, 어딜 가나 여자들이 따라다닌다. 그는 일행을 이끌지만 사실 그 일행이 꼭 필요하지는 않다. 애초부터 강하다는 점을 빼면 무협지 주인공이라 해도 상관이 없을 정도다. 그러나 이 소설을 훌륭한 판타지 장르물로 만드는 힘은 클리셰에 대한 패러디에서 나온다. 페르아하브는 어디서나 미녀를 만나는 주제에 '세상에 왜 이렇게 미녀가 많은 걸까'라며 조소한다. 전형적인 사(邪)파 성향 인물인 페르아하브와 정(正)파 성향 인물인 다한을 한 팀으로 만들어놓고, 이들의 좌충우돌을 보여주는 것을 넘어서, 끝내는 성기사(聖騎士) 다한을 극한까지 고생시켜 다른 방식의 캐릭터로 발전시키는 것은 지극히 신선한 시도였다. 마지막에는 아예 주인공을 죽여버리고 주인공의 클론으로 마무리를 짓는다. 그래서 이 소설엔 무슨 요소가 있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다. 그 모든 요소를 패러디하고 있으니까. 급한 마무리로 통일성엔 다소 문제가 있으나, '휘긴 경'의 매력을 엿보기에 충분한 작품이다.

작가의 주목할 만한 후속작, <더로그>, <월야환담 창월야>


정교한 톱니바퀴처럼 움직이는 심술 궂은 운명

5. 전민희 <세월의 돌> 1999


전민희는 이영도와 함께 가장 전통적인 의미의 판타지물을 구현하는 작가다. <세월의 돌>의 지나치게 섬세한 구성은 독자가 할말을 잃게 만든다. 인생의 밑바닥을 봤다고 굳게 믿는 라니안보다도, 대충 어른들의 세계를 다 이해했다고 믿는 후치보다도, 파비안의 성장기는 전복적이면서도 쓸쓸하다. 사랑하는 여자 유리카가 있고, 아버지와의 투쟁이 있으며, 세계의 운명이 걸려 있다. 이쯤 되면 <앰버 연대기> 같은 마초물이 떠올라 버리지만, 그런 느낌은 전혀 없다. 파비안이 무림고수와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은 단지 약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운명의 예정을 거스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버지를 죽이고, 유리카가 엔젠 안에 갇히는 것을 보는 그 순간까지.

작가의 주목할 만한 후속작 <룬의 아이들>


언령마법의 힘, 그 의미는 무엇인가

6. 김상현 <탐그루> 1999


<탐그루>는 좀 다른 의미에서 전형적인 판타지 소설이다. 세계의 마법은 언어로 구동되고, 말은 마음의 흔적일 뿐이다. "마법은 마음이다. 마음은 칼이다." 이 대답은 만족스럽지 못할 수도 있지만, 그 질문만큼은 어슐러 르 귄식 판타지의 문제의식과 동일하다. 한국 현대사에 대한 온갖 패러디가 어색하지 않았던 것도, 그 질문의 보편성이 판타지 세계와 현실 세계를 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설에서 동화로 돌아가는 듯한 천진난만한 결말은 이 소설이 성장소설이 아님을 전복적으로 증명한다. 성장이라니! 그는 소년 소르카와 소년 비류가 겉늙은 우리보다 낫다고 말하는 거다.


두 세계의 만남이 시작되었다

7. 전동조 <묵향> 1999-2007


<묵향>은 위에서 언급한 작품들과 같은 시기에서 출발, 지금껏 이어지고 있으며 한국 판타지의 20세기와 21세기를 묶는 가교와도 같다. 이 소설이 묘사하는 무림이나 판타지 세상은 치밀하지만 평이하다.  즉 단적으로 무림인 세계와 단적으로 판타지인 세계가 만났을 때 발생하는 경이가 이 소설을 지탱하는 매혹적인 요소다. 그것을 발견했을 때 우리는 두 세계를 다양하게 변주시켜야 할 이유를 잃어버린 게 아닐까? 이 작품 이후로 마법사나 드래곤이 무림으로 가는 일이 자주 생겨났다. 판타지 캐릭터가 무림고수와의 긴장관계를 잃어버리고 그것의 '번안'이 되어버린 것이다.


무협 세계에 대한 SF/판타지 시점의 재서술

8. 유기선 <극악서생> 2000-2005


무협과 판타지가 혼혈을 이루다 보니 한편으론 강호무림을 일종의 판타지 공간처럼 체험하는 일도 생겼다. <극악서생>의 주인공은 미래인들을 만나 타임머신을 타고 강호무림에 떨어지지만, 어쩐지 이 공간은 역사적인 것 같지도 않다. 모든 무협의 설정들은 미래의 컴퓨터 몽몽에 의해 다른 언어로 재서술된다. 그 재서술은 '익숙한 것을 낯설게 보게 하는' 효과를 낳는다. 무협의 입장에서는 스스로를 돌아보는 성취일 수 있겠으나 판타지의 입장으로는 창조성의 고갈을 드러내는 징후일 수 있다.


우리 판타지 소설의 10년을 요약해보자. 초반 3년(1997-1999) 동안 씨 뿌리는 이들이 있었고 그들은 지금도 추수를 하는 중이다. 하지만 그 후 새로 씨를 뿌리는 이들은 거의 없었고 그 자리를 '무협과의 퓨전'이라는 손쉬운 방법이 차지하고 있다. 물론 퓨전은 다양성을 확보하기 위한 방법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반복되면서 새로운 실험의 여지를 막는다면 오히려 장르의 획일화를 초래하고 만다. 무협소설이 신무협이란 새로운 흐름을 탄생시킨 것처럼 판타지 소설 역시 현재의 틀에 안주해선 안 된다. 판타지 소설을 펼치게 하는 강력한 힘은 '새로운' 세계에 대한 동경이며, 그 동경을 충족시키기 위한 우리의 방랑은 끝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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