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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나는 노빠들에 대해서 총론만 쓴 게 아니라, 가끔 이렇게 각론도 썼다. 유명하지도 않고, 출판물의 저자도 아닌 이의 글을 이 정도로 분석한다는 건 웬만한 정신으로는 못할 짓이다. 쓸데없이 이런 부분에서만 부지런했다. 진보누리에 실명으로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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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두

나는 민주노동당 부대변인이 데일리서프라이즈dailyseop.com 김석수씨 칼럼에 대해 항의전화를 했다는 사실을 비판한 바 있다. 이는 김석수씨의 칼럼의 내용이 그럴듯해서도 아니요, 민주노동당의 요구가 전두환식 언론탄압의 한 예라는 데일리서프 편집장의 황망한 주장에 조금이나마 동감해서도 아니다. 내가 민주노동당 대변인실에 요구한 것은 제3정당으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품격 있는 처신이었고, 꼭 그것이 아니더라도 언론체크라는 당의 업무에 선택과 집중이 필요할 것은 자명한 일이다. 나는 1) 매체의 영향력으로 보나, 2) 매체 논지의 합리성으로 보나 데일리서프가 민주노동당이 신경 쓸 만한 매체가 아니라는 판단을 민주노동당 대변인실과 공유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러면서 나는 나 자신은 데일리서프에 간혹 출입한다는 사실을 밝혔는데, 그것은 누군가의 비평처럼 "내가 하면 로맨스, 당이 하면 불륜"이기 때문이 아니라, 인터넷에 간간이 잡문을 올리는 나의 입장과 할 일이 많은 민주노동당의 입장이 같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데일리서프에 올라온 글 중에 부적절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나 정도의 위인이 비평하거나 말거나 해야할 사안이라는 것인데, 그 판단의 순수함에 대한 증거로 이하 이번 데일리서프 필화논란(?)의 주역이라고 할 수 있는 김석수씨의 글들에 대한 비평을 해보도록 하겠다.  


1. 비평의 잣대

자유주의 비평은 원래 '사상적 일관성'을 비판의 기준으로 삼는다. 반면 맑스주의자들은 주체의 일관성이라는 것은 없고, 일관성처럼 보이는 것은 주체를 둘러싸고 있는 현실구조의 반영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양자가 다 일리가 있다고 보는 회색분자이지만, 자유주의자들을 비판할 때는 주로 전자의 잣대를 활용해 왔다. 그것이 그들의 논리를 내적으로 격파하는 데에 더욱 알맞기 때문이다.


그런데 김석수씨는 특이하게도 (혹은 뭘 잘 모르는 짜깁기주의자들이 흔히 그런 것처럼) "변증법적인 세계현실"을 자신의 주장의 근거로 내세우는, '일관성'에 대해 혐오의 감정을 드러내는 자유주의자다. 그가 '일관성'을 싫어하는 이유는 단병호나 홍세화가 노무현 대통령의 십수년전 발언을 근거로 현재의 대통령을 질타하기 때문이다. 출처가 의심스러운 "변증법적 세계현실"이라는 단어에 대해 굳이 엄밀한 검증은 필요없겠지만, 일단 맥락상으로 김석수씨의 논리구조는 "세계는 변했다."는 전제 위에 서 있으므로,


첫째, '세계의 변화'에 대한 김석수씨의 인식은 타당한지, 혹은 상식 수준에라도 부합하는지,

둘째, 그 '변화'를 한국사회에 적용시키는 김석수씨의 인식은 타당한지, 혹은 상식 수준에라도 부합하는지,

가 먼저 규명되어야 할 것이다. 이처럼 비교적 실증적이고 단순논리에 입각한 부분을 규명한 후에, 그보다는 좀더 추상적인 김석수씨의 민주주의에 대한 관점을 검토해 보도록 하겠다. '민주주의'를 잣대로 보수주의자와 진보주의자를 비판하는 것은 자유주의자들의 기본적인 행동패턴이고, 김석수씨 역시 이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기 때문이다.


김석수씨가 데일리서프에 올린 글은 14편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나는 그 글들을 모두 읽을 수 있었다. 이전에도 그렇고 이하로도 큰따옴표 안에 있는 건 모두 김석수 씨 본인의 글을 인용한 것이다.


2. 세계의 변화

"20세기의 노동운동에서 파업투쟁이 가지는 의미는 작게는 노동자계급의 사회경제적 개선이요, 크게는 레닌의 혁명론에서 보듯 혁명투쟁의 한 방법일수 있었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라는 이데올로기대결의 시대에서 노동자들의 파업투쟁이 가지는 의미는 결코 생략할 수 없는 혁명운동의 한 수단이었고, 적어도 자본주의 진영내에선 취약한 노동계층이 중산층으로 성장할 수 있는 유효한 수단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냉전이 끝난 21세기는 각국간, 각 자본간의 무자비한 경쟁이 치러지는 신자유주의시대다. 특정부문에서 세계시장의 1, 2위를 점하는 거대기업들이 서로 통합하여 더욱 덩치를 키워 초일류 경쟁력을 가져야 살아남는 무한경쟁의 세계시장속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20세기의 이데올로기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라면 21세기 이데올로기는 적어도 현재까지는 '경쟁력' 그 자체이다."



11월 9일에 공무원노조를 비판한 글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말하자면 20세기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대립하는 이데올로기의 시대인데, 21세기는 '경쟁력' 그 자체의 시대라는 것이다. 이 서술만 보고도 두 가지 문제점을 추려낼 수 있지만, 그 지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선 조금 더 봐야 한다. 11월 18일에 홍세화를 비판한 글의 일부를 보도록 하자.


"다시 한번 강조하건대 21세기는 20세기의 냉전적 질서와 그 질서의 전제위에서 살아나가는 것이 불가능한 사회다. 그래서 늘상 뉴 패러다임으로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20세기는 냉전적 질서의 시대고, 21세기는 탈냉전의 시대라는 것이다. 이제 그의 문제는 확실해졌다. 그것은 다음의 두 가지로 정리된다.


첫째로 김석수씨는 냉전시대 양 진영의 대립을 20세기의 이데올로기 대결과 같은 것으로 보고 있다. 사회주의 이념의 정치적 지향과 현실사회주의 체제를 사실상 동일시하고 있는 것이다. 현실사회주의 체제의 몰락을 자본주의의 영속적인 승리로 해석하고 '이념의 시대의 종언'을 말하는 것은 후쿠야마 등의 선례가 있다. 그러나 그 주장은 '이념'이나 '이데올로기'는 반드시 "소비에트 연방식의 공산주의냐, 아니면 미국식 자본주의냐."는 식의 극단적인 질문을 요구한다는 전제가 깔려있지 않는 한은 오류다. 그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그 자신도 긍정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사민주의 정당 등은 탈이념적인 정당이라는 결론이 나오는데, 이는 무리한 해석이다. 상식적인 견지로 보면 전지구적 자본주의라는 현실 속에서도 자유와 경쟁을 더욱 강조하는 쪽과 평등과 분배를 더욱 강조하는 쪽이 있다고 볼 수 있으며, 이들을 '우파'와 '좌파'라고 부르는 것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그가 언급하는 서구의 정당들은 이전에도 이념정당이었고, 앞으로도 이념정당일 수밖에 없다. 그는 열린우리당의 '실용주의' 선언을 지지하면서, 그리고 이른바 '좌파 수구꼴통'들을 비판하면서, 두 번 정도 "덩샤오핑의 개혁개방노선이나 유럽의 제3의길"을 언급한 바 있다. '실용주의' 선언에 대한 지지는 정당의 이념성을 배격하는 그의 주장에 부합한다. 그러나 그것은 덩샤오핑의 개혁개방노선과는 어울릴 수 있어도 유럽의 제3의 길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제3의 길은 이념정치를 인정하면서 그 중간쯤의 이념을 지향하거나 양쪽의 극단성을 가급적 배제하자는 것이지, 이념을 없애자는 것이 아니다. 유럽에서 가령 과거 개혁당처럼 "우리 정당엔 이념이 없다."고 선언한다면, 곧바로 "님하 지금 장난하3?"이란 반응이 튀어나올 것이다.


덩샤오핑이 김석수씨와 궁합이 맞는 이유는 그 나라가 일당독재국가이기 때문이다. 일당독재국가라면 집권당이 '이념'이 아니라 '실용주의'를 추구하는 것이 훨씬 알맞다. 그러나 민주주의 사회에서 시민들은 각각의 이념을 주장하는 정당들을 선택하는 수밖에 없다. '실용성'은 정당이 가져야 하는 특성이 아니라 시민의 선택기준 중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일 뿐이다. 가령 어떤 유럽의 시민이 '실용성'에 따라 어쩔 때는 좌파 정당을, 어쩔 때는 우파 정당을 찍는다고 해서 정당이 '실용주의'를 표방해도 된다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그러면 시민들은 뭘 보고 그 정당을 찍으라는 말인가. 정당은 원래 기본값으로 실용적으로 놀아야 하는 것이지, '실용주의'라는 이념(혹은 탈이념)은 없다. 그건 "우리 잘 하겠습니다." 이외에 아무 것도 말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정동영류의 '실용주의' 선언이 '삽질'이라고 생각하며, 그것에 동의하는 열린우리당 지지자들은 도대체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을 어떤 섬세한(?) 잣대를 사용해서 구별하는지 매우 궁금해진다.    


둘째로 김석수씨는 21세기의 패러다임을 명확히 정의하지 못하고 있다.'경쟁력'이라는 말은 "경쟁의 주체가 누구냐?"라는 질문에 따라 내용이 확연히 달라지는 말이기 때문에 주장의 '내용'을 구성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 역시 "실력이 딸려 감히 21세기 패러다임을 완결된 형태로 말할 수는 없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경쟁력'이라는 말은 완결된 형태는커녕 아웃라인을 그리기에도 충분치 않은 말이다.  


"세계시장의 1, 2위를 점하는 거대기업들이" 어쩌구 저쩌구 하는 것을 보면 그가 언급하는 '경쟁력'은 기업의 경쟁력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그러나 그가 좌파들의 "대한민국 호"의 생존을 걱정하지 않는다고 비난하고, 공익성에 어긋난 노동운동이 국가에 해가 된다고 주장하는 것을 보면 그가 말하는 경쟁력은 '국가경쟁력'으로 보는 것이 더 맞을 것 같다.


그런데 '국가경쟁력'이라는 말은 경제학자 폴 크루그먼에 의해 너무 처절히 해체되었는지라, 심지어 부시의 공화당조차도 선거유세에서 사용하지 못했던 말이다. '국가경쟁력'이란 말은 맑시스트가 아니라 폴 크루그먼과 같은 주류경제학자의 의견을 따르더라도, 실체 없는 오류에 불과하다. 여기서 떠오르는 것은 무슨 경제학적인 사실이 아니라 어렸을 때 읽은 송병락, 이원복 공저의 애국심 넘치는 '경제만화'다. 이 친구들은 '한국'이란 아이를 어느 정도 덩치를 지닌 꼬맹이로 그려놓고, 이 '한국'이란 친구가 훨씬 덩치 큰 선진국의 친구들과 '싸움'을 벌이고 있다고 야무지게 상상한다. 물론 한 나라의 경제가 다른 나라에 종속되는 것이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핵심적인 것은 경제문제의 대다수가 국가 대 국가의 차원이 아니라 국가 내부의 차원에서 발생한다는 데에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그가 주장하는 '냉전시대 -> 경쟁력 시대로의 패러다임 변화'는 국가의 외교전략에 대한 지침으로는 충분히 기능할 수 있으나, 그가 주장하는 "변증법적 세계현실"을 지탱할 경제적 패러다임으로는 턱없이 부족한 것이다. 그런데 그는 이 패러다임 변화를 근거로 공무원 노조와 이를 지지하는 단병호, 홍세화, 권영길 등을 순차적으로 비판하고 있으니, 일단은 그 비판의 전제 자체가 틀려먹었다고 볼 수 있겠다.  


세계의 변화에 대한 좀더 상식적이고 일반적인 해석은 냉전구도 해체 후 자본주의가 세계화 되었다는 것이며, 덕택에 기존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좌파들이 주장하던 '분배정의를 위한 국가적 대응'(이것이 '사회민주주의' 내지는 '민주사회주의'가 아니던가.)이 점차 무력화되어 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한국등 제3세계보다는 훨씬 더 잘 대처해 나가고 있다는 것도 명약관화한 사실이다.) 그래서 지역별로 블록을 구축해야 한다는 전망도 나오고, 이 방안이 가지는 배타성에 대한 우려도 나온다. 물론 우파들의 입장에서 보면 기존 좌파들의 대응이 복지국가의 재정악화를 불러일으켰고, 그것이 사회시스템의 효율성을 저해시켰기 때문에 신자유주의적 개혁이 필요하다고도 말할 수 있겠다. 여하간 이 정도의 해석이 비슷한 현상을 두고 본 좌우파의 다른 해석이다.


이 두 가지 해석과 김석수씨의 해석의 차이점은 포괄하는 면적의 범위에 있다. 즉, 전자는 냉전시대 이전부터 자본주의 국가였던 곳에 국한된 반면에, 김석수씨는 전지구를 포괄하고자 한다. 후자가 훨씬 무리한 것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자본주의 국가의 좌파들에게 현실사회주의 체제는 '천국'으로 보여졌다가 '지옥'으로 전락하고 만, 결코 실상을 알 수 없었던 '타자'이기 때문에, 그들의 활동은 현실사회주의 체제와는 별개의 범주로 서술될 수 있다. 게다가 현실사회주의 체제가 들어섰던 국가들의 상황은 어떠한가. 덩샤오핑 이후의 중국은 김석수씨 생각처럼 새로운 패러다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제 와서 산업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물론 그들도 크게 보아 신자유주의의 흐름에 직면하고 있고, 한국 역시 북서유럽처럼 복지국가를 겪어보지도 못한 채 신자유주의에 대응해야 하는 '특수성'을 과제로 안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세계의 변화에서 헛발질을 한 김석수씨가 한국의 특수한 변화에 대해선 제대로 설명을 해낼 수 있을까. 다음 챕터로 넘어가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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