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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보강형 사고]를 넘어서자.

조회 수 1080 추천 수 0 2003.03.14 23:54:00
진중권이 노무현 대통령을 [학살도우미]라 칭한 것을 옹호하다가 이런 글이 나왔다. 결국 몇년 째 이런 얘기를 해 왔다는 걸 생각하면... 진보누리의 아흐리만씨가 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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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우리는 이 문제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누구나 짐작하겠지만, 우선 문제들에 관해 여러 가지 의견이나 주장이 있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대개 그 중에서 자신의 감각에 들어맞는 생각을 무심코 선택한다. 물론 우리는 누구나 스스로 생각하려고 한다. 그렇지만 사실 그것은 자신의 감각에 들어맞는 의견이나 생각을, 여러가지 지식과 견해에 의해 보강하는 듯한 식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어떤 문제에 관해 많은 책을 읽거나, 자료를 조사할 수 있다. 그 커다란 노력을 사람들은 '자신의 사고'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이 달성하고 있는 것은 사실 자신의 최초의 직관을 '보강하는 것'일 뿐이다. 나는 이러한 사고를 '직관 보강형 사고'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것은 실은 보통 사람이 생각한다고 하는 경우의 대단히 일반적인 방법이다. ([태초에 철학이 있었다]  p34)

그렇다. 문제는 [직관보강형] 사고다. 왜 "학살도우미"에 성질을 내는가? 진중권의 두 물음,

1. 부시 전쟁이 학살이 아니라는 얘깁니까?
2. 아니면 노무현이 부시의 도우미가 아니라는 얘깁니까?


에 누구 답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왜 "심하다"고 생각하는 걸까? 이것이 심하다 한들, 진중권에겐 그렇게 말할 권리가 있지 않을까? 혹시 "심하다"는 것과, "잘못이다"라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음을 한번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을까?

이것은 우리 사회 구성원들에게 널리 공유된 코드인 것 같다. 수사학적 문필가를 널리 평가하는 전통문화와, 근대정신보다는 근대기술을 받아들이려는 목적을 지닌 실용주의적(?) 교육이 합작해서 만들어낸 코드. 내가 술자리에서 가끔 말하는 "수필쟁이'라는 코드다.

"수필쟁이"에는 수필을 폄하하려는 의도가 담겨있지 않다. 오히려 외국의 경우 수필에도 수필의 주장을 개진하는데 필요한 만큼의 학적 논리성을 요구하고 있다. 신화학에 관심있다고 하면 엘리아데의 수필을 읽으라고 권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수필은 지나치게 관대하다. 좌충우돌 연결되지 않는 개념이라도, 엮어서 하나의 종교 교리를 엮어내면 그만이다.

필자의 직관이 뛰어나다면 이것은 충분히 훌륭한 지성의 자양분으로 기능할 수도 있다.  그러나 대개는 그저 사이비종교 교리에 불과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글쓰기를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직관보강]의 방식으로 쓰여진 수필과, [직관검증]의 방식으로 쓰여진 논술을 구별하는 문화가 없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이다.

나는 서프라이즈의 [진짜 칼럼주의]를 간혹 [진짜 수필주의]로 읽는다. 그만큼 우리 사회가 극복해야 할 코드인 [수필쟁이]에 밀착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겐 그곳에 나름대로 인정할 만한 직관을 가진 글쟁이나, 적어도 아는 부분만 말할 줄 아는 겸손한 글쟁이가 몇몇 있다는 사실은 중요치 않다. 서프라이즈는 기획 자체가 잘못 되었다. 선동주의와 감상주의의 결합. 전자는 존재에 충만함을 주고, 후자는 존재의 눈물샘을 자극한다. 독자들의 마음을 많이 빼앗았기 때문인지, 이들이 그토록 중시하는 것은 "마음"이다. 너희들이 노무현의 진정성을 아는가? 그리고 한나라당엔 그 진정성이 눈꼽에 때만큼도 없다는 사실을 정녕 아는가?

솔직히 말해보자. 한나라당 대북밀사파견이 사실이라면, 거기에는 어떤 종류의 진정성이 전혀 깃들어있지 않겠는가? 한나라당이 대북강경책을 쓴다면 깽판을 치겠다고 선언한 이부영과, 그의 생각에 동조하는 한나라당 개혁파들, 그리고 한나라당 강경파들의 심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의정부 여중생 압사 사건에 분노하는 표심을 잡으려고 했던 이회창의 "진정성"은 거기 전혀 깃들어있지 않았을까? 정치의 영역에서 "마음"이란 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인가?

나는 노무현의 진정성을 믿으며 시작한 노사모란 조직의 탄생 자체에 대해 시비를 걸고픈 생각이 없다. 물론 그 역시도 "노무현의 진정성이 드러난 행동"에 더 방점이 찍혀야 한다는 생각이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와 같이 명백히 비판해야할 사안에서도 "노무현의 진정성"을 믿겠다고, (사실 믿는 건 자유이긴 한데 문제는 그 다음) 그래서 돌을 같이 맞겠다거나, 비판하는 상대방을 "심하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우리는 [보강형 사고]를 넘어서, [검증형 사고]로 가야한다. 직관은 검증에 의해 반증되거나, 재확인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 사회에 합리적이고, 건전한 의사소통이 가능할 수 있다. 그렇기에 나는 지식인이라면 마땅히 이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본다.

그러나 지식인들도 이러한 [보강형 사고]나, 오히려 일반인의 [직관애착]을 이용하고 있음에야! 지식인들은 흔히 [이념 보강형 사고]를 통해 사회구성원들이 공유한 [보강형] 코드에 동참하고 있다. 이는 이데올로기의 특수한 성격 탓이다.

한마디로 말해 이데올로기는 갈등과 밀접한 관계가 있고 따라서 의사소통을 자극한다. 누군가가 정치적 토론에서 즉시 우위를 점하려 한다면, 그는 강력한 '혐의 전담부서'를 운영할 수 있어야 한다. 이 부서가 하는 일은 상대방의 의견을 더 이상 진지하게 받아들일만한 가치가 없는 것으로 만들며, 그 의견에 혐의를 두어 상대방 개인의 이해관계로 환원시키는 것이다. 예컨대 그 부서는 고전적 국민경제학이 착취자의 이익을 호도하고 있을 뿐이라 주장하며, 프로이트의 문화이론은 비범할 정도로 그의 호르몬의 격렬한 활동의 결과로 생겨는 부산물일 뿐이므로 프로이트의 밥원 개혁을 위한 제안은 낯선 것에 대한 그의 두려움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선전한다.

강력한 힘의 부서를 가진 이론은 면역 시스템을 자체 내에 확보하고 있다. 그리하여 이런 이론을 거부하는 사람은 스스로 이 이론을 증명하는 데로 귀착한다. 예컨대 노이로제 환자가 프로이트를 사기꾼으로 간주하지만, 이는 프로이트의 억압이론에 이미 담겨 있는 내용이다.(디트리히 슈바니츠 <남자> p244-255)


이데올로기의 면역체계. "직관"밖에 없고 "보강"밖에 한게 없으면서 "일가"를 이루었다고 주장하는 수군작이 아무에게나 "쁘띠"라는 칭호를 선사할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데올로기는 그 자체로 사회문제를 설명하는데 일정한 효용이 있으므로, 면역체계를 겁내 그것을 피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강준만이 수구세력을 타격하기 위해 만들어낸 이데올로기는, 이제 그 문제를 넘어서려는 사람들에게 그 면역력을 발휘하고 있지 않은가?  강준만의 지지자들은 이제 아무에게나 "호남차별 바이러스"라는 딱지를 붙이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공정하게 말하면, 강준만 본인은 진중권에게 나쁜 짓을 하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할 사람은 아니다.)

내가 홍세화와 진중권을 동시에 지지한다고 말한 것은 이런 의미였다. 강준만의 이데올로기는 필요한 것이므로, 그것을 지지하는 홍세화를 나는 지지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 이데올로기의 면역체계를 넘어 새로운 문제를 지적하려는 진중권을 나는 또한 지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단순히 공부만 많이 한다고 해서 [보강형 사고]를 넘어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직관 보강]에서 [이념 보강]으로의 발전은 우리의 문제의식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늘도, 그리고 이전에도 가끔 게시판의 반응을 보며 한탄하게 된다. [검증]의 원리를 일반화시키기 위한 방법은 없는 걸까?

아흐리만.

p.s 이는 내가 진중권의 글쓰기 패턴에 애정을 갖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변명도 되는 것 같다. 진중권이 수많은 사람의 직관을 비웃는다는 것,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의 분노를 한 몸에 받는다는 것, 이것은 [보강형 사고]를 격파하기 위해 아무런 방법을 찾지 못한 나에게, 일종의 "고름을 찔러서 터트리는" 시술이 될 수도 있겠다는 희망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떻게 생각하면 참으로 가련한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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