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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정치평론

조회 수 1045 추천 수 0 2006.11.28 16:15:00
카이만, 군인, 병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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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도 한번 언급한 적이 있지만, 온게임넷 스타리그에는 '가을의 전설'이라는 징크스가 있다. 그래서 많은 스타리그팬들이 가을과 프로토스에 대해서 설왕설래하지만, 그렇다고 그들 중에서 '가을의 전설'이 스타크래프트라는 게임이나 프로토스라는 종족의 내적 본질과 관련이 있다고 믿는 이는 없을 것이다. 가을이면 프로토스가 우승하더라는 아름다운(?) 전설은 스타크래프트라는 게임과는 무관한, 스타리그의 서사에 해당한다. 그리고 그 서사는 단지 모니터 안의 점들의 조합에 불과한 유닛들을 내 삶의 이야기 속으로 끌어들이는 구조다. 그렇다면 매니아들로부터는 꾸준히 비판을 받는 온게임넷 엄재경 해설위원의 필요성도 밝혀진 셈이다. 온게임넷 해설진은 (그들이 게임에 대한 분석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지만, 타게임 방송국에 비해) 서사를 만드는데 치중하고 있다.


상업적인 면에서 본다면 그런 시도는 매우 긍정적이다. 가령 강민의 별명이 몽상가이며 박정석의 별명이 물량토스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면, 2003년 말에야 스타크래프트를 처음 접한 내가 스타리그를 즐겁게 보기란 불가능했을 것이다. 게이머의 특성과 업적에 따라 스타리그를 이해하는 것이, 종족 밸런스/맵 밸런스/유닛간의 상성관계를 숙지한 후 게임 실력을 일정한 레벨로 올려가면서 스타리그를 이해하는 과정보다 훨씬 쉽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스타리그 뿐 아니라 모든 '관람하는 스포츠'에는 나같은 일반적인 시청자가 있는가 하면 그 경기를 비교적 차가운 잣대로 분석하는 평론가 혹은 매니아들이 있다.


그러나 스포츠에서 성립하는 일이 정치에선 성립하지 않는다. 한국정치에선 서사와 구별되는 평론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없는 건 아니지만, 모든 관람자들이 서사가 평론이라고 믿고 있는 이곳에서 평론은 외계어보다 더 동떨어진 무력한 목소리로 되기 십상이다. 많은 종이신문들은 홍진호는 폭풍저그고, 조용호는 목동저그라고 규정하는 바로 그 수준으로 정치인들을 케릭터화하고, 그것으로 정치를 설명하고, 정치의 문제를 해명한다. 그들이 평소에 가장 큰 관심을 보이는 것은 대통령의 품성인데, 어느 정도인가 하면 바로 그것때문에 이 나라의 모든 문제가 발생했다고 주장할 정도다. 그런데 그들은 이런 식의 총체적인 인물평가는 서슴없이 내리면서도, 오히려 개별적인 사건에 있어서는 이 사건은 이래서 옳다. 혹은 이래서 그르다는 판단을 개진하기 보다 '이번 사건으로 이 케릭터와 저 케릭터가 싸우게 됐는데, 두 케릭터가 이런 식으로 상이하니 마찰이 있을 것 같다.'는 식으로 말하기를 좋아한다. sylent 님은 파이터포럼의 옐로우저널리즘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사실 그 정도의 기사는 신문 정치면에선 언제나 나오는 것들이다. 그들이 개별적인 사건에 평가를 내릴 수 있는 경우는, 그 사건의 행위자가 대통령이거나, 북한이거나, 노조일 때 뿐인 것 같다. 그것은 그들의 평가가 '판단'이 아니라 '반응'에 불과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의 현실에 많은 영향을 미치는 결정을 내리는 정치인들에 대한 분석은 물론 중요한 일일 수 있다. 가령 <한미FTA 폭주를 막아라>의 저자인 우석훈 박사도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위해서 미국형 FTA의 협상 테이블에 서게 된 것인가?"라고 자문한 후 "이건 경제학적 분석대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대통령 노무현에 대한 심리학적 분석이 필요한 대목"이라고 한탄한다. 그러나 그런 말은 이미 사건에 대한 계산은 모두 끝내놓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다. 인물에 대한 설명이 사건에 대한 설명을 대체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사건이 합리적으로 설명되지 않을 때에, 그 사건을 일으킨 인물에 대한 분석이 시작될 수 있는 것일 게다. 그리고 그때에 그 분석은 종이신문의 두께로 감당할 수 있는 분량은 결코 아니다. 사실 우석훈 박사도 자신의 책에서 그 '심리학적 분석'을 시도하지는 않는다.


그런데도 종이신문들은 정치인들의 뇌구조를 조악하게 그려놓고 모든 것을 설명하고 있다고 믿는다. 그들의 심리학적 분석은 프로이트나 융이 아니라 (강준만의 말을 따르자면) '시기심-질투 결정론'에 근거하고 있다. 대통령과 386세대의 시기와 질투, 약자들의 원한이 이 나라를 이렇게 만들었다는 것이 종이신문과 그들을 좌지우지하는 이들의 세계인식이다. 그보다는 차라리 스타리그의 서사가 재미있을 것이다. 엄재경 해설위원의 출신(?)이 증명하듯, 스타리그의 서사는 소년만화를 모방하고 있다. 그리고 소년만화의 서사는 숭고와 과장 사이 그 어딘가에 있다. 과장은 기껏해야 우스꽝스러워질 뿐이지만, 도대체 누가 누구를 시기하고 있는지를 두고 서로 뿔잡기 싸움을 할 수밖에 없는 '시기심-질투 결정론'은 비생산적이면서도 끝없이 싸움을 확대시킨다. 사실 정치에 대한 우리의 담화는 노상 이러한 싸움의 과정이다.


정치평론이 필요하다고 말한다면, 아마도 이러한 현실에 대한 우려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현실 때문에, 도대체 정치평론이라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의구심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다시 스포츠 평론에 비유하자면, 대중에게 영향을 미친 쓸만한 정치평론은 결국에는 팬클럽의 자장에서 출현해야만 했다. 그것이 중요한 순간 그 평론들의 발목을 잡았던, 크나큰 한계이다. 하지만 애초에 팬클럽의 바깥에서는 사람들의 주목을 끄는 어떠한 정치평론도 불가능했던 데에야, 누가 그들을 욕할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정치평론의 문제는 한번쯤은 '도대체 어떻게 정치평론이 가능한가?'라는 인문학적인 질문으로 돌아와야 하는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정치현상에서 무엇을 인식할 수 있는지, 정치평론들은 사람들에게 무슨 영향을 미쳐왔는지, 그리하여 우리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기 위해 어떤 식으로 말해야 하는지, 그 영향은 긍정적인 것인지 아닌지 등을 해명하지 않고서는 자신의 정치평론 역시 비생산적인 싸움의 재료로 소모되어 가는 것을 막을 수 없는 지도 모른다. 철학이 아무 것도 보살펴주지 않는 곳에서 모든 담론은 스스로가 스스로를 정립하면서 자신의 활동을 시작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이 모든 것이 정치평론의 어려움이자 매력이다. 그리고 다시 정치의 계절이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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