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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잡지가 나온지 약간 시간이 지났기 때문에 부분공개를 전문공개로 수정합니다.


월드컵 주체와 촛불시위 사이, 불안의 세대를 말한다
- 강제로 규정된 청년세대의 복잡미묘함에 대해


오늘날의 20대 혹은 청년세대 담론이 흥미로운 지점은, 청년들을 규정해 보려는 윗 세대들의 필사적인 노력에 대한 20대들의 철저한 무관심 혹은 소외현상에 있다. 20대는 본인들을 어떻게 규정해야 하는지를 알지 못한다.(무관심) 한편 윗 세대들 역시 청년세대를 규정함에 있어 20대의 견해를 참고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누구의 견해를 참고해야 하는지를 정하지 못한다.(소외현상)


말하자면 오늘날의 청년세대는 그들 자신의 공통의 코드나 특성에 의해 정의되지 않는다. 20대나 기성세대가 모두 동의하는 것은, 오늘날의 청년세대에게서 그러한 공통의 코드나 특성을 발견하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 세대를 ‘무규정성’으로 규정한다는 것은 말장난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규정하기 힘든 것에 대해 억지로 규정하려는 시도가 반복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비평거리가 된다. 따라서 오늘날의 청년세대론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한국 사회가 맞닥트린 어떤 불안감의 실체를 대면한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리고 이 불안감의 이면에서 우리는 오늘날 한국 사회에 짙은 먹구름을 드리우는 청년세대의 삶의 문제도 발견해야 할 것이다.


X세대와 ‘아버지’ 담론, 그리고 N세대 사이


청년세대가 그 자체의 특성으로 정의되기가 힘들 때 우리에게 가능한 하나의 접근방법은 이 세대와 근접한 세대들에 대한 정의가 이루어진 문맥을 살피는 것일 게다. 1990년대 초, 지금의 청년세대가 초등학생이거나 미취학 아동이었을 때 한국 사회는 문화평론과 유행의 영역에서 하나의 강력한 세대론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른바 ‘X세대’론이 그것이다. 당시 20대였던 X세대는 산업화의 주역을 자부하는 장년세대와 민주화 운동에 투신했던 386세대와 구별되어, 최초로 소비사회와 대중문화의 문맥에서 규정되는 세대가 되었다. 산업화와 민주화를 모두 이루었다는 한국 사회의 자신감은 새로운 담론문화를 가능하게 했다. 조선일보는 왕년의 운동권들을 인터뷰하면서 신문시장에서 구매력을 갖춘 새로운 고객이 된 386세대의 비위를 맞추려고 애썼다. 386세대와 X세대, 당시의 이들 젊은 세대들이 소비사회의 새로운 주류였다. 90년대의 ‘문화대통령’ 서태지는 20대만을 대변하며 등장했지만 영리하게도 <발해를 꿈꾸며>와 같은 노래를 통해 자신의 영향력을 386세대로까지 넓혔다. 한편 386세대와 그 후세대의 비평가들에겐 거대담론에 복무했던 운동권의 집단주의에 대한 성찰과 대중문화의 시대에 대한 새로운 해석틀이 필요했다. 새로운 세대에 대한 그들의 찬사는 대략 그러한 맥락 위에 있었다.


20대는 X세대의 등장을 지켜봤거나 적어도 그들이 열어젖힌 새로운 세계의 룰에 영향을 받았다. 초등학생들은 교실에서 X세대들보다 더 열심히 ‘서태지와 아이들’의 춤을 췄다. ‘서태지’를 기억하지 못하는 이들도 은퇴한 태지보이스를 존경한다고 말하며 등장한 HOT의 강력한 지지세력이었다. 이 시기의 10대들은 대중문화를 통해 세상을 인식했으며, 심지어는 팬클럽 문화를 통해 조직을 학습하게 되었다. 90년대 후반 HOT 팬덤과 젝스키스 팬덤의 대립은 ‘취향의 전쟁’을 벌이는 10대들에게 조직화의 중요함을 가르쳤다. 그러므로 노사모의 핵심인물로써 훗날 참여정부의 홍보수석이 된 시인 노혜경이 “노사모는 HOT 팬클럽을 본땄다.”고 말한 것도 단순한 농담으로 치부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X세대 담론을 둘러싼 장밋빛 아우라는 IMF 구제금융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통해 해체되고 왜곡된다. IMF 이후 X세대는 세대론의 중심에서 퇴출당했다. IMF 이후를 지배한 것은 4-50대 장년 세대들의 삶에 대한 연민이었고, 이른바 ‘아버지 신드롬’으로 대변되는 ‘가부장의 귀환’이었다. 물론 사회가 가부장의 역할을 강조하게 된 것은 역설적으로 가계의 붕괴 때문에 가부장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게 된 세태를 보여주는 것이긴 하다. 그러나 한국 사회가 경제위기의 충격을 ‘가족 이데올로기’의 강화를 통해 극복하게 되면서, X세대가 표상했던 ‘자유’의 이념은 서구의 68혁명과 같은 ‘권위주의에 대한 거부’의 길로 나아가지 못하고 ‘소비의 자유’라는 문맥 안에 머무르게 되었다. 이후 한국 사회의 세대론은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새로운 소비의 주체를 찾아다녀야 하는 자본의 이해에 충실히 복무하게 된다. 지금은 잊혀진, 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까지 명멸한 세대의 이름들은 주로 기업들의 마케팅 전략과 관련이 있었다.(각주1)


N세대 담론 역시 그 중 하나이지만, 별도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담론이기도 하다. 사실 N세대는 훗날 ‘88만원 세대’로 불리게 된 오늘날의 청년세대가 십대였을 무렵의 이름이라고 볼 수 있다. IMF는 한국 사회에 포드주의로부터의 이탈을 강요했다. 대량생산/대량소비는 이제 더 이상 미덕이 아니었고 소비자는 까다로운 취향으로 새로운 품목의 생산을 유발하는 창조성을 발휘해야만 했다. 김대중 정부는 그러한 새로운 소비자를 넷트(NET)를 통해 육성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자본주의의 육중한 물질성을 벗어난 듯한 새 시대 소비자의 취향은 비물질적인 사이버스페이스를 통해 길러졌다. 정부는 지식기반경제로의 전환을 역설했고 <용가리>를 제작한 감독 심형래를 ‘신지식인 1호’로 축성했다. 벤처열풍이 테헤란로에 돈을 끌어 모으자 ‘서민’들은 너도나도 코스닥 시장에 뛰어들었다. 소소한 월급 중 일부를 저축하여 집도 장만하고 차도 사는 ‘서민’의 삶은 더 이상 긍정적인 것이 아니었다. 있는 돈을 굴리지 않는 사람은 멍청이로 취급받았다. 돈이 없으면 빌려서라도 굴려야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 취급을 받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김대중 정부는 ‘하나만 잘해도 대학을 갈 수 있다.’는 신화를 유포시켰다. 이른바 ‘이해찬 세대’들의 탄생이다. 지금 생각하면 우습지만 이 ‘이해찬 세대’들은 컴퓨터 실습실에서 ‘야후’와 같은 검색엔진을 켜놓고 포털사이트에서 자료를 검색하는 방법을 ‘실습’하곤 했다. ‘제한된 사이버 공간’인 PC통신에서 ‘제한되지 않은 사이버 공간’인 인터넷 커뮤니티로의 대이동이 일어났다. 이런 교육을 받은 중고등학교 학생들에게 사회가 붙여준 이름이 바로 ‘N세대’였다.


IMF 이후 주춤해진 X세대 담론을 대신하여 나타난 N세대론은 ‘새로운 소비의 주체’에 관한 담론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이 세대는 대중문화에 대한 X세대의 관심을 계승했다. 김대중 정부가 실시한 일본 대중문화 개방은 이들이 향유하는 문화의 지평을 넓혔다. 한편으로 이 세대는 사이버스페이스에서 정보를 취득하고 자신의 견해와 취향을 표명하게 된 시대이기도 했다. X세대 역시 PC통신을 통해 그런 문화를 열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오늘날 파워블로거로 알려진 사람들은 대개 PC통신 시절부터 글을 쓰고 사람들의 인정을 받았던 30대들이다. N세대의 일부는 PC통신을 겪었지만 이내 인터넷 커뮤니티의 세상으로 옮겨왔다. 그들은 제약이 없는 사이버스페이스에서 자신들의 특질을 더 강화해 나가게 된다. N세대론은 X세대론을 따라다녔던 문화비평의 진보적 아우라를 가지진 못했으나, 기술적 진보의 측면을 더 강하게 포함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N세대의 특질은 십년 후 촛불시위 정국에서 웹 2.0세대라는 신조어가 등장하기 전까지 잊혀진다.       


88만원 세대의 등장과 이에 대한 비판적 평가 


이 세대에 대한 새로운 호명이 바로 2007년 출간된 우석훈과 박권일의 저서의 이름인 <88만원 세대>였다. 어떤 이들은 세대론이란 접근 자체를 비판한다. ‘세대론’이 복잡한 사회문제를 특정세대의 책임으로 단순하게 전가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 한다. 전적으로 동의할 수 있는 말이다. 문제는 그런 식의 세대론을 말한 건 ‘88만원 세대’가 처음이 아니었다는 거다. 사실 ‘88만원 세대’론은 기존의 세대담론에 대한 방어담론이었다.


그 기존의 세대담론이란 건 무엇이었나? 2002년 대선은 일종의 ‘세대전쟁’으로 생각되었고, 노무현의 당선은 장년세대에게 상실감을 주었다. 2004년 총선의 열린우리당의 승리는 386세대의 최종적인 승리라고 여겨졌다. 자유기고가 김남훈은 당시 깜악귀라는 아이디로 서울대 학내웹진에 “386, 가장 힘 센 세대의 모순과 트라우마”라는 글을 썼다. 이 글은 맥락과 관계없이 조선일보가 덜컥 인용해버리는 해프닝을 낳기도 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386세대가 선거에서 승리한 이후부터 세대담론은 다시 높은 곳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탄핵당한 동안 읽었다는 김훈의 <칼의 노래>가 베스트셀러로 등극했다. 김훈의 소설은 그야말로 장년 남성의 감수성을 미문으로 풀어낸 것이었다. 김훈은 그 후부터 한국 문단의 대표적인 베스트셀러 작가로 군림한다.


청년실업의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었지만 신문의 시선은 청년세대가 아니라 그들의 늦은 독립으로 고통받는 부모세대에 있었다. 경제신문은 ‘청년실업 70만’과 ‘외국인 노동자 100만’을 같은 지면의 헤드로 뽑았다. 청년세대가 눈높이를 낮추지 않아서 외국인 노동자를 쓰게 되어 사회문제가 생기고 한국경제의 활력이 떨어졌다는 메시지를 노골적으로 전달하는 것이었다. <88만원 세대>가 나오기 전, 특히 동아일보는 당시의 20대에 대해 ‘눈높이를 낮추지 않아 부모의 등골을 빼먹는 암적인 존재들’로 묘사하고 있었다고 우석훈은 회고한다. 그야말로 ‘복잡한 사회문제를 특정세대의 책임으로 단순하게 전가하는 구조’를 갖춘 세대론이 아니었던가. 이에 우석훈과 박권일은 이 세대담론에 맞서 새로운 변혁의 주체를 호출하는 세대론을 만들어내야 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세대론의 한계에 대한 비판은 타당하지만, 그 책임을 <88만원 세대>로 전가하는 것은 동의하기 어렵다. 


‘88만원 세대’론은 20대의 대부분이 88만원을 받는 비정규직으로 살아가게 될 거라는 묵시론적인 예언이었다. 한국 사회의 계층불평등이 ‘세대’로 전이될 거라는 새로운 통찰이었다. 요즘의 젊은이들이 예전보다 훨씬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한국 사회에서 열심히 살고 있지 않다는 것이 어른들의 ‘상식’이었다면, 88만원 세대는 이후 세대의 평생소득이 윗세대의 그것보다 적을 거라고 주장했다. 윗세대가 젊어서 훨씬 고생을 한 건 사실이지만 취직을 하고 나이를 먹으면서 소득이 크게 증가한 반면, 오늘날의 세대는 시간이 지나도 젊을 때와 비슷한 수준의 급료를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박권일은 저자들의 작업이 “불안정노동의 전면화라는 다분히 계급적인 문제에 세대론의 '당의(糖衣)'를 입힌다는 것”(각주2)이었다고 술회한다. 그 결과 “세대론에 집중하다보니 세대 내부의 양극화, 20대와 50대에서 쌍봉형으로 나타나는 불안정노동과 같은 주요 문제들이, 언급되긴 하지만 상대적으로 소홀히 취급”(각주3)되었다고 아쉬워한다. 88만원 세대론은 유럽의 <천유로 세대> 담론처럼 자본주의의 이윤 축적방식이 변동하면서 피해를 입게 된 청년층의 문제를 주제화했다. 그것은 전지구적인 자본주의의 문제였다. <88만원 세대>를 꼼꼼히 살펴보면 이 담론이 유럽과 일본의 세대론을 참조하여 한국 사회에 적용한 훌륭한 ‘보세가공품’이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단순하게 세대론과 계급론을 대립적인 것으로 파악하여 우석훈과 박권일을 비판한 일부 좌파들은 현실 자본주의의 분석에도 무능했다는 점에서 문제가 많았다고 생각한다.


다만 한국적인 특수성은 있다. 가령 김영미의 경우, “노동시장의 '인사이더'에 대한 보호장치가 두터워 청년 세대의 신규 진입이 쉽지 않은 유럽과 달리, 외환위기를 계기로 일자리 보호장치가 파괴된 한국의 경우엔 불평등이 모든 세대에 걸쳐 증가하고 있다."(각주4)고 지적한다. 노동시장의 유연화가 상당 부분 진척된 한국 사회에서는 계층불평등이 세대로 전이되는 정도가 훨씬 덜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사회학자 신광영은 한국노동연구원이 전국에서 5,000가구를 추출하여 1998년에 수집한 1차 노동임금패널 자료부터 2007년 제 10차 노동임금패널 자료까지 10년 기간의 자료를 분석하고 각 연령 코호트의 근로소득 변화를 비교하면서 ‘계층불평등의 세대전이’가 실증적 근거가 없다는 점을 증명한다.(각주5)


그렇다면 <88만원 세대>의 분석은 허황된 것이었을까. 먼저 우리는 ‘88만원 세대론’의 통찰이 미래를 향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즉 ‘계층불평등의 세대전이’ 문제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 심각하게 진행되는 문제일거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1998년과 2007년의 자료를 비교하는 것은 <88만원 세대>의 문제제기를 충분하게 반영하지 못한 것이라 볼 수도 있다. 당장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부터 취업시장은 꽁꽁 얼어붙었고, 이에 대해 정부는 ‘잡 셰어링’이란 명목으로 대졸 초임을 삭감하고 인턴을 늘리는 놀라운 정책수행능력을 보여주었다. 우리는 한국 자본주의가 노동을 워낙에 탁월하게 배제하기 때문에 유럽에 비해 ‘계층불평등의 세대전이’가 상대적으로 덜했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의 정책을 보면 앞으로는 한국 정부가 ‘계층불평등의 세대전이’에도 탁월하게 앞장설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든다.


또 하나 놓치지 말아야 할 부분은 부동산 문제다. 한국 사회의 계층불평등은 임금격차보다는 부동산 자산의 격차에 의해 크게 좌우된다. 지니계수와 같은 지표를 보면 한국 사회의 소득불평등은 선진국들에 비해서도 양호한 편이지만, 이것만으로 한국 사회의 계급격차와 서민들의 박탈감을 설명할 수는 없다. 월급이 비슷하더라도 빚을 내서 아파트를  산 가구는 그렇지 못한 가구에 비해 훨씬 계층적으로 높은 곳에 있다. 그 아파트값이 크게 상승하여 가장 효율적인 자산축적 수단으로 기능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부동산의 문제에서는 ‘계층불평등의 세대전이’가 필연적으로 일어난다. 부동산 가격이 지속적으로 상승할수록 ‘이미 자기 집을 소유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격차는 커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격차는 어느 정도 수준을 지나면 소득보다 세대에 의해 좌우될 수밖에 없다. 이를테면 부동산 폭등이 진행되기 전 기성세대는 소득이 다소 낮더라도 전세를 끼고 대출을 받아서라도 아파트를 사고 계층상승을 노려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청년세대는 다른 이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는 공무원이나 대기업 정규직이라 할지라도 ‘내 집 마련’의 꿈을 가지기가 쉽지 않다. 중산층의 자녀들이 전세금을 마련할 때에도 부모의 지원이 필수적인 것이 오늘날 한국 사회의 실정인 것이다.


요약하자면 ‘88만원 세대론’은 원래부터 ‘88만원’을 벌었던 젊은이들이 아니라,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사회에 적응하며 살아왔는데도 ‘88만원’을 벌게 될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가진 젊은이들을 위한 담론이었다. 그것이야말로 <88만원 세대>라는 책을 베스트셀러로 만든 원동력이었다. 그리고 그 불안감이 던지는 질문은 사실 “한국 자본주의가 스스로의 체제를 재생산할 수 있는가?”라는 것이었다. 한국의 중산층은 부동산 가격의 지속적인 상승을 통해 자산을 축적하면서, 그렇게 해서 훼손된 기업의 경쟁력을 신규 노동시장에 진입한 이들의 임금을 낮추면서 보충해왔다. ‘집값’은 높이고 ‘사람값’은 낮추는 체제를 운용해온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그 체제를 지지해왔던 그들 중산층의 자녀조차 자신의 월급으론 독립을 꿈꾸지 못하게 된 ‘멋진 신세계’다. 박권일은 여러 지면에서 자신은 ‘88만원 세대’론이 청년 빈곤층과 기성세대 빈곤층의 연대를 위해 쓰여지기를 희망했다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우리는 ‘88만원 세대’ 담론이 지적한 문제, 그리고 그 담론이 성공한 요인은 모두 중산층 내지는 중간계급과 결부되어 있었다고 봐야할 것 같다.
    

실크세대와 G세대의 반격(?)


박권일은 “20대와 50대에서” 나타나는 “새로운 형태의 계급모순들을 세대모순의 형태로 형상화하기 위해 노력”했고 “그 과정에서 가장 힘이 센 세대, 이른바 386세대 비판은 필수적”(각주6)이었다고 진단한다. 이 서술은 <88만원 세대>가 대중성을 획득하기 위해 치러야 했던 모종의 대가를 암시한다. 원론적으로 말하면 20대와 50대에서 불안정노동 문제가 가장 많이 나타난다고 해도 그것이 386세대의 책임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88만원 세대>는 386세대에게 책임을 돌렸다. ‘복잡한 사회문제를 특정세대의 책임으로 단순하게 전가하는 세대론의 구조’를 역방향으로 차용한 것이다.(각주7) 우석훈은 그보다 더 적극적으로, 유럽의 68세대와 한국의 386세대를 비교하며 한국의 386세대가 그 진보적인 아우라에 비해 한국 사회를 진보적으로 바꾼 부분이 별로 없음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것보다, <88만원 세대> 서문에 나오는 386세대의 취업환경에 대한 회고가 결정적이었다. 필자 주변의 많은 20대들은 <88만원 세대>를 앞부분 1/3정도 밖에 읽지 못했는데, -그들은 그것만으로도 그 책의 모든 내용을 파악했다고 주장했다.- 가장 기억에 남았던 부분으로 대체로 서문을 꼽았다. 386세대들이 그렇게 학점이 나쁘면서도 직장을 골라가며 취직을 할 수 있었다는 걸 전혀 몰랐고 알게 되어 매우 놀랐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후로 인터넷에선 ‘개념없고 노력도 안 하면서 정치적 관심도 없는 되바라진 20대’와 ‘편하게 취업해서 운동경력으로 꼰대질하는 386세대’에 대한 상호비방이 시작되었다. 마치 일본의 전공투세대와 단카이세대의 상호비평(?)처럼 말이다.


변희재는 바로 그 지점을 노렸다. 변희재가 보기에 ‘88만원 세대론’은 386세대의 허위의식을 비판하고 세대문제를 제기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하지만 ‘88만원 세대론’은 20대의 자질이 386세대의 자질보다 뛰어나다는 사실을 통찰하지 못했다. 20대가 능력이 없다면 그들은 평생 88만원을 받으며 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20대는 실제로는 뛰어나기 때문에, 386세대의 훼방만 이겨낸다면 놀라운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변희재는 주장했다. ‘신세대’(X세대)부터 ‘88만원 세대’까지 386세대 이후의 모든 세대담론은 386세대의 명명이었다고 변희재는 지적한다. 이에 대항하여 변희재는, 386 후세대의 이름을 스스로 명명하고자 했고 그리하여 ‘실크세대’라는 조어를 만들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실크세대는 “70년대 이하 생들로 386세대들과 달리 인터넷과 대중문화를 기반으로 전 세계를 연결하는 새로운 실크로드를 열어나가는 대한민국의 젊은 세대”(각주8)이다.


변희재의 세대규정이 그렇게 틀린 건 아니다. ‘인터넷’과 ‘대중문화’라는 키워드, 그리고 X세대와 88만원 세대의 관련성을 얘기한 것은 앞에서 정리한 필자의 견해와 대동소이하고 누구도 부인하기 힘든 평이한 분석이다. 문제는 다른 데 있다. 20대가 평생 88만원을 받으며 비정규직으로 살게 될 거라는 예상은 20대의 자질과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한국 자본주의의 현실과 관련이 있다. 기업은 20대의 자질이 모자라기 때문에 그들을 뽑지 않는 것이 아니다. 필요한 인력은 적지만 취업하고 싶어하는 젊은이는 넘쳐나기 때문에 불균형이 생기는 것뿐이다. 20대가 취업이 안 되는 이유를 20대의 자질의 문제로 환원하는 기성세대의 술자리 담론은 그 자체로 문제이지만, 거기에 대고 “사실 20대는 능력이 있으므로 앞으로 잘 할 수 있을 거야.”라고 말하는 건 하나마나한 소리다. 변희재는 일종의 창업 프로젝트를 대안으로 내세웠는데, 이 기획이 실패한다면 결국 20대의 자질이 윗세대들보다 떨어진다는 것이 입증되는 것일까?


더구나 창업프로젝트를 내세운 이가 어째서 386세대를 적으로 상정해야 하는지는 이해불능이다. 이것은 ‘실크세대’론의 내적 논리로는 파악될 수 없고 한국 보수세력과 변희재의 욕망의 관점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 조중동은 2007년 대선에서 승리하기 위해 ‘반기업정서에 찌든 386세대가 경제를 망쳐 이 혼란이 야기되었으니 청년세대는 장년세대와 연합하여 정권교체에 협력하는 것이 옳다.’는 논리를 유포했다. 보수세력의 입장에서는 청년세대와 장년세대가 386세대를 정치적으로 포위하는 것이 언제나 ‘좋은 일’이다. 한편으로 변희재는 세대론과는 별 상관도 없는 문화평론가 진중권에 대한 개인적 원한을 배설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진중권은 변희재에 의해 ‘무능력한 386세대의 표본’으로 호출되었다.


박권일은 이렇게 비평한다. “ ‘능력과 전문성도 없는 386세대’와 ‘무한한 잠재력과 전문성을 가진 젊은 세대’로 구별짓기하는 변희재식 세대론은 세대론이 아니라 차라리 변형된 인종주의에 가까운 것이다. 저 발언을 보면서 나는, ‘능력도 없으면서 탐욕스러운 유태인’과 ‘무한한 잠재력을 가졌지만 유태인들 때문에 고난을 겪는 아리아인‘을 명확히 구별한 콧수염 달린 어떤 사내를 연상할 수밖에 없었다.”(각주9) 필자 역시 “이렇게만 본다면 변희재의 주장은 나치스의 인종주의 주장과 닮은 데가 있다. 1) 시장주의를 신봉한다. 2) 그러나 시장을 교란하는 무능한 불순분자들이 있다. 3) 이들을 타도해야 유능한 우리가 잘 먹고 잘 살 수 있다. 일치하지 않는가? 그 불순불자가 유태인에서 386세대로 바뀌었다는 것 정도가 차이점이다.”(각주10)라며 변희재의 세대 자질론이 인종주의의 논리구조와 동일하다는 사실을 지적한바 있다. 한국의 보수주의자들은 입으로는 시장을 신봉한다 말하면서도 정작 자신이 시장에서 실패하면 좌파세력이 자신을 방해했기 때문이라고 우기는 경향이 있다. 그리하여 조선일보는 시장에서 실패하면 방송국을 자신에게 달라고 떼를 쓰고, 변희재는 담론시장에서 무시당하면 창업을 할 테니 투자를 해달라고 떼를 쓰는 것이다.
 

변희재의 실크세대론은 88만원 세대론의 맹점을 공략했고 노골적으로 정치적이었다. 하지만 이미 노티나는 30대 중반의 변희재를 대표자로 포함시키기 위해 ‘70년대 이하생’들을 기점으로 삼은 이 담론은 우파들이 좋아하는 마케팅의 관점에서 볼 때 참신함이 부족했다. 조선일보가 적어도 세대론에 있어서만큼은 변희재를 버리고 G세대론을 들고 나온 것은 그러한 까닭이었을 거다. G세대는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 혹은 1988년 서울 올림픽 이후 태어난 이들을 지칭한 말로 역사상 가장 많은 지원을 받고 자라났으며 외국어 능력과 컴퓨터 능력으로 무장하고 글로벌시대를 헤쳐나갈 능력이 있는 젊은이들로 묘사된다. 여기서 G는 바로 Global의 약어인 것이다. G세대론은 변희재식 세대 자질론을 이어갔지만 386세대에 대한 적개심은 소거시켰고 세대의 연령도 훨씬 낮췄다.(각주11)


하지만 G세대론의 서술은 비록 세태의 일면은 담고 있을지라도 계층적으로 너무 한정된 대상을 다루고 있다. 서울대저널에서 서울대 학생들에게 여론조사를 한 바에 따르면, 서울대생들은 “스스로 속한 세대를 어떻게 평가하십니까?”라는 질문에 대해 ‘특정한 세대론으로 규정할 수 없다’(35%). N세대(28%), 88만원 세대(17%), G세대(16%)의 비율로 응답했다고 한다. 오늘날 부르주아지의 계급재생산 학교로 전락했다는 평마저 듣는 서울대에서조차 G세대론이 88만원 세대론만도 못한 공감을 받고 있다면, 이 담론이 지칭하는 대상이 ‘엄친아’(각주12)와 비슷한 ‘환상’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확언할 수 있을 것 같다. 어학연수를 가는 학생들이 무척 늘어났지만, 그런다고 해서 그들이 모두 자신의 외국어능력이나 국제감각에 대해 자신하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각주13)


월드컵 주체와 웹 2.0 세대는 다른 곳에 있나


2007년 대선과 2008년 총선에서의 패배는 소위 개혁세력의 지지자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이 두 선거에서의 패배는 ‘민주화세력’의 십 년 집권이 서민들의 삶을 개선시키지 못했고 그리하여 결국 외면을 받게 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는데, 개혁세력의 지지자들은 대체로 그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 했다. 그들의 적나라한 욕망은 2008년 촛불시위에서 10대를 예찬하면서 타올랐다. 즉 2008년 촛불시위를 계기로 그들은 과거의 정치적 실패는 보수화된 20대의 책임이며, 촛불시위를 일으킨 진보적이고 발랄한 10대가 한국 정치를 구원할 거라고 기대하게 된 것이다.


20대가 보수화 혹은 탈정치화하게 된 사회구조에 애써 눈감은 이러한 망상에 호응한 담론이 사회학자 김호기가 내세운 ‘웹 2.0 세대’담론이었다. 김호기는 “80년대의 ‘386세대’(민주화 1.0세대)”, “90년대의 ‘신세대’(정보화 1.0세대)”, “외환위기 이후의 ‘88만원 세대’ ”와 촛불시위를 주동한 웹 2.0세대를 구별한다.(각주14) 그것은 보수화된 20대와 구별되는 새로운 세대를 찾아 헤매는 386세대의 적나라한 욕망의 발현이었다. 설령 그렇지 않았더라도, 이 논의가 후기 자본주의 시대의 경제적 측면(88만원 세대를 만드는)과 문화적 측면(웹상의 소통을 일상화시키는)을 별도로 구별하여 다른 세대에 위치시키는 오류를 범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취직을 못하고 정치적으로 무기력한 88만원 세대와 인터넷 인맥을 통해 시위를 주동하는 웹 2.0세대는 동전의 양면인 것이다. 실제로 시위가 진행되면서 웹 2.0세대는 언론매체에서 ‘시위현장에서 문자질로 소통하며 경찰들의 방어선을 농락하는 젊은 세대’ 정도의 의미로 쓰이게 되었다. 이들을 스케치한 기사에서 10대와 20대의 구별이 사라졌음은 물론이다. 시위현장에서 20대의 정보기기 숙련도는 10대와 별 차이가 없었던 것이다. 김호기의 웹2.0세대론은 이 점을 도외시하면서, 오늘날의 10대 역시 20대와 동일한 사회경제적 조건에 처하게 될 것이라는 진정한 문제를 은폐했다.


여기서 돌아봐야 할 것은 2002년 월드컵이다. 왜냐하면 2002년 월드컵 길거리 응원의 집단 체험이야말로 그 후의 촛불시위들을 가능하게 한 경험적인 조건일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잊는 사실이지만 촛불시위는 일회적인 현상이 아니었다. 비록 담론적으로는 언급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지만 2008년 촛불시위는 무의식적으로 2002년의 촛불시위를 참조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십 여년 동안 한국 사회에서 문화평론을 했던 스콧 버거슨은 말한다. 촛불이라는 것은 죽음에 대한 애도라는 상징을 가지고 있는데, 2008년의 시위가 애도한 것은 ‘예상되는 미래의 죽음’에 대한 애도라는 점에서 하나의 판타지가 아니겠냐고. 그리고 미군 장갑차에 의한 여중생 두 명의 죽음으로 촉발된 2002년의 시위가 ‘촛불소녀’라는 캐릭터의 형성에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니겠느냐고. 나는 스콧의 말에 동의한다. 2008년에 죽음에 대한 애도라는 상징을 가진 촛불이라는 기호가 시위를 위해 봉사할 수 있었던 이유는, 우리가 이미 2002년에 여중생들의 죽음을 애도하며 촛불을 든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2002년의 촛불이 가능했던 이유는 월드컵 거리응원의 경험 때문이었다. 동계올림픽 때 강탈당한 금메달, 그해 여름 붉은악마가 보여주었던 민족적 고양, 그 고양에서 흘러나온 자주국가에 관한 욕망과 촛불시위를 통해, 젊은 세대는 2002년 노무현이라는 사람을 대통령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그때 청년세대들은 분명 스스로 민족을 호출하여 자신의 정치성을 과시했다.


그런데 붉은악마의 민족주의는 고도성장을 담당했던 전후1세대의 ‘동원된 국가주의’와 민주화 운동에 투신했던 386세대의 ‘진보적 민족주의’와도 다른 것이었다. 자본의 마케팅이란 요소가 계속해서 그것을 침식하기는 했지만, 적어도 2002년의 길거리 응원을 촉발시킨 욕망은 국가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젊은이들 자신으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말했던 민족은 ‘통일을 통해서야 완성될 우리 민족’이라는 ‘미래의 약속’이 아니었다. 그것은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즐기고 누리는 삶, 대한민국이라는 정치적 공동체에서의 삶을 긍정하고 그것이 유지되기를 바라는 이들이 만든 판타지였다. 물론 북한의 이탈리아전 승리를 대한민국의 승리와 동일시하는 “Again 1966"이라는 구호와 (역사적인 게 아니라) 환상적인 초고대사의 흔적을 보여주는 치우천황의 깃발은 ‘진보적 민족주의’나 ‘전근대적 환상으로서의 민족’과 잇닿아 있는 지점이 있다. 하지만 붉은악마의 자긍심의 출발점은 분명 ‘지금 이 순간 우리들의 삶’이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여기서 젊은이들은 일본의 사회학자 모토아키가 ‘고도성장형 내셔널리즘’과 ‘개별불안형 내셔널리즘’이라 구별한 것과 같이,(각주15) 기성세대와 구별되는 새로운 내셔널리즘을 형성하게 되었다. 하지만 좀 더 직접적으로, 공통의 체험을 통해 그것을 형성하게 되었다. 인터넷에서 유희적으로 극우적 언사를 내뱉는 일본의 젊은이들이 ‘사건’ 없이 ‘주체’를 형성했다면 한국의 젊은이들은 ‘사건’을 통해 ‘주체’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 젊은이들을 ‘월드컵 주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붉은악마는 ‘오지 않은 노스탤지어로서의 민족’ 대신 ‘현존하는 정치적 단위를 구성하는 민족’을 논했다는 점에서 서구의 근대 민족주의를 연상시키는 진보적이고 실천적인 함의가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것은 ‘폐쇄적’인 담론이었다. 붉은악마의 옹호자들은 이렇게 말할지 모른다. 외국인들도 붉은 티를 입고 한국인들에 섞여서 응원했는데 그게 어째서 폐쇄적인 것이었느냐고.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살펴봐야 할 것은 인종에 대한 차별이 아니라 생각의 차이에 대한 용인이다. 2002년의 대한민국에서는 외국인이라도 한국 대표팀을 응원하면 붉은 무리의 점에 무리없이 섞일 수 있었다. 하지만 한국인이라도 한국 대표팀을 응원하지 않거나 그들의 승리에 무관심했다면 그들은 틀림없이 소외감을 느꼈다.


그리고 2008년의 촛불시위에서도 폐쇄성은 드러났다. 월드컵 거리응원에서 그랬듯 이 시위에서도 ‘시위대의 주장에 동의만 한다면’ 외국인이라도 ‘같은 편’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시위대에 반대하거나 의구심을 품는 이들은 쉽게 ‘외래인’으로 매도당했다. 시위현장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구호는 “이명박을 오사카로!”였다. 그들은 그들이 싫어하는 대통령의 고향을 문제삼아 그를 일종의 ‘외래인 군주’로 취급하고 있었던 것이다. 젊은 세대 간에 널리 공유되는 ‘딴나라당’이란 조어에 담긴 정치적 판타지 역시 그와 비슷한 것이 아닐까? 2008년 촛불시위의 현장, 거리에 존재했던 ‘주권’은 자신의 적대자를 ‘외국인’으로밖에 이해하지 못하는 폐쇄적이고 통합적인 나였다.(각주16) 촛불시위의 전성기 때 우리의 10대들은 이명박 대통령이 독도를 포기할 거라는 ‘루머’를 퍼트리고 있었다. 여기서 드러나는 그들의 정치성은 붉은악마의 그것과 대동소이하다. 즉 20대와 10대는 후기 신자유주의의 한국적 현실을 살아가는 이들로서, 사회경제적 조건에서도, 문화적인 소통의 환경에서도, 그 정치성에서도 동일하게 묶여야 하는 이들이었던 거다.


그런데 우리는 2002년 당시 탄생한 ‘월드컵 주체’가 형성한 자긍심이 절반 정도는 좌절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20대 보수화론자들이 말하는 2007년 선거에서의 ‘20대의 선거 이탈’ 현상이다. 2002년 참여정부를 만들어냈던 그 20대들이 5년 후에 자신들의 업적을 포기한 것이다. 참여정부의 당선은 장년세대를 좌절시켰지만, 참여정부의 통치는 청년세대를 좌절시켰다. 이를 증명하는 것은 조성주의 논의다. 조성주는 <대한민국 20대, 절망의 트라이앵글을 넘어>라는 책에서 ‘20대 보수화’론을 분석하기 위해 17대 대선의 투표율과 16대 대선의 투표율을 잘게 잘라 비교했다.


17대 대선 투표율 : 19세 54.2%, 20대 전반 51.1%, 20대 후반 42.9%, 30대 전반 51.3% 
16대 대선 투표율 :              20대 전반 57.9%, 20대 후반 55.2%, 30대 전반 64.3%


여기서 두드러지는 것은 16대 대선 때 ‘20대 전반’이었던 이들이 17대 대선 때 ‘20대 후반’이 되어 보여준 투표율 저하의 현상이다. 전반적인 투표율 하락의 추이에서도 15%의 하락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조성주는 이 하락의 원인을 ‘대학 등록금 1천만원 시대’의 개막에서 찾는다. 17대 대선 당시의 20대 후반이 다른 세대와 구별되는 삶의 문제라면 아무래도 등록금 문제가 제일 크기 때문일 것이다. 2002년에 6580억 규모였던 학자금 대출액은 2007년엔 2조 1296억으로 증가한다. 2002년에 27만 8천명 정도였던 학자금 대출자의 수도 2007년엔 61만 5천명으로 증가한다. 2007년의 20대 후반은 이러한 환경변화에 직격을당한 세대다. 이러니 함께 참여정부를 만들었던 30대 직장인들이 ‘투표를 하지 않는 20대의 보수화’를 질타해도 씨알이 먹힐 리가 없다. 조성주의 분석은 2008년 촛불시위에서 예찬받았던 그 10대들이 장래에 오늘날의 20대와 비슷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섬뜩하다. 우리에겐 청년세대들을 분리해서 혹자는 예찬하고 혹자는 비난할 겨를이 없다.
 

파편화된 취향과 만성화된 불안의 세대


세대의 특성이란 것은 사회가 만든 것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논의했던 청년세대의 특성, 즉 인터넷, 대중문화, 민족주의의 정치성, 취업난 등은 모두 사회적인 조건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이 점을 인정하면서 20대들의 특징에 대해서 하나 더 덧붙여야 할 것이 있다면 ‘파편화된 취향’의 문제다.


‘파편화된 취향’은 인터넷의 소통과 대중문화의 영역에서 만들어진 것이긴 하지만, 정치의 문제이기도 하다. 70년대 대학생들은 리영희를 중심에 두고 토론할 수 있었고, 80년대 대학생들이 마르크스를 가지고 토론할 수 있었으며, 90년대엔 포스트모던 철학자들이라도 유행의 대상이 되었다면, 오늘날의 청년세대에겐 서로 얘기를 할 수 있는 출발점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오늘날의 젊은이들도 리영희를 읽을 수 있고, 마르크스를 읽을 수도 있으며, 문화연구를 참조할 수도 있다. 실제로 어떤 이들은 그렇게 한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그들이 더 이상 또래들에게 이해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청년들은 각자의 고립된 공간에서 고립된 주체로 살아간다. 정치성 역시 오늘날엔 ‘파편화된 취향’과 비슷한 것이 되었고, 그 중심에 대중문화와 인터넷이 있다. 인터넷에서 우리는 취향이 비슷한 사람들끼리끼리 만난다. 대중문화의 시대가 오래 지속되면서 점점 사람들은 ‘서태지’나 ‘HOT'와 같은 공통의 취향에 머무르지 않고 여러 가지 취향을 지니게 되었다. 그런 소통환경에 익숙해진 우리가 정치 문제를 논한다고 해서 갑자기 공동체의 공동의 관심사의 문제를 논할 수 있을 리가 없다.


‘파편화된 취향’의 문제를 극복하고 공동체의 정치를 논하기 위해서는 모종의 통합의 경험이 필요하다. 그 가능성은 대략 두 가지 정도로 보여진다. 하나는 비교적 공통적인 조건에 놓여진 20대의 삶의 문제를 제시하는 문화컨텐츠를 통해 20대 스스로의 삶을 성찰하게 하는 것이다. 진보진영에서 주시하는 다큐멘터리들, <개청춘>이나 <방 있어요?> 같은 것이 하나의 사례일 것이고, 좀 더 대중적인 측면에서 보면 <무한동력>(각주17)이나 <남기한 엘리트 만들기>(각주18)와 같은 웹툰들이 이에 해당할 것이다. 다른 하나는 취향의 영역에서 서로 다른 취향들을 소통하게 만들면서 공통의 영역을 넓혀가려는 시도다. 이런 시도는 주로 패러디의 측면에서 이루어지는데, 여러 취향의 오타쿠들이 즐기는 문화적 컨텐츠를 활용하여 교양만화나 시사만화를 그리는 굽시니스트가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겠다.(각주19) 문제는 기존의 정치/문화담론이나 기성세대들이 이런 이들의 작업에 대해 알지 못하거나 관심조차 없다는 것이다. 정말로 기성세대들이 20대를 투표장으로 끌어내고 싶다면 도덕적 훈계가 아닌 훨씬 세밀한 접근전략이 필요할 거라는 생각이 든다. 청년세대를 분석하고 그들에 대해 접근한다는 것은 한국 자본주의의 현재에 대해 말한다는 것과 다를 바 없으므로, 그들을 위해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의미없는 일이라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20대의 일원으로서 나는 우리 세대를 ‘파편화된 취향과 만성화된 불안의 세대’라고 생각한다. 이들의 불안이 어떤 조건에서 어떤 방식으로 발생하는지를 규명해 내지 못한다면 우리의 정치(평론)의 미래도 밝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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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1: 그중 대표적인 것이 2002년 월드컵 직후 제일기획(주)의 보고서 <P세대의 라이프 스타일과 특성>을 통해 등장한 P세대였다. 여기서 P는 참여(participation)·열정(passion)·힘(potential power), 패러다임의 변화를 일으키는 이(paradigm-shifter) 등 P로 시작되는 4개의 영어 단어를 의미했다. 이 보고서에서 P세대는 2002년 당시 17세에서 39세까지의 연령층을 일컬으며, 386세대/X세대/N세대/W세대를 포괄하는 개념이었다. 이 세대규정은 2002년 대선 당시 노무현을 지지한 ‘젊은’ 세대를 폭넓게 지칭한다는 의미는 있지만, 세부적으로 볼 때는 각각의 세대가 갖고 싶어 하는 전자제품을 분석하는 등 본질적으로 기업의 마케팅 전략을 위한 보고서였다고 여겨진다.

각주2: 박권일, “88세대론 <조선> 독우물에 빠지다”, 레디앙, 2009년 1월 30일,
 
http://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12455

각주3: 같은 곳

각주4: “ '한국사회 불평등 핵심고리를 천착하라'-비판사회학회 불평등연구회”, <한겨레신문> 2009년 1월 12일.

각주5: <경제와 사회>, 2009년 봄호(제 81호), 신광영, “세대, 계급과 불평등” 이 논문의 핵심내용을 웹에서 찾아보려면 http://socio1818.egloos.com/3448835 을 참조하면 된다.

각주6: 박권일, “88세대론 <조선> 독우물에 빠지다”, 레디앙, 2009년 1월 30일,

각주7: 박권일은 <88만원 세대>의 후속작을 쓰기 위해 모였던 (이 프로젝트는 결국 성사되지 못했다.) 필자를 포함한 20대들과의 대화에서, “<88만원 세대>는 일종의 프로파간다”라고 설명했다. 사회비평이 사람들에게 쉽게 이해되기 위해서는 누가 됐든 특정한 무언가를 타깃으로 삼고 비판하는 작업이 필요한데, <88만원 세대>의 경우엔 그 타깃이 386세대였다는 것이다. 그는 필자를 포함한 20대들의 작업에 대해, 그러한 타깃이 명확하지 않아서 설득력을 가지기 어렵다고 조언했다. 사실 우리들은 그 타깃이 존재하는지에 대해서도, 그것을 애써 설정한다면 무엇이 되어야 되는지에 대해서도 서로 합의할 수가 없었다. 이 프로젝트는 오늘날의 청년세대의 문제를 오롯이 드러내면서 좌초되었다. 여하간 박권일의 설명이 옳다면, “그 결과 떠올린 방책이 불안정노동의 전면화라는 다분히 계급적인 문제에 세대론의 '당의(糖衣)'를 입힌다는 것이었다.”라는 그의 레디앙 기고문의 구절은 정확히는 이런 의미로 설명되어야 한다. “그 결과 떠올린 방책이 ‘한국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이라는 따분한 문제를 ‘한때 진보적이었던 386세대에 대한 비판’이란 섹시한 문제로 치환한다는 것이었다.” 우석훈과 박권일은 다분히 대중성을 위해 그런 길을 택했고 그 길은 성공적이었지만, 이것이 변희재와 조선일보에게 하나의 ‘빌미’로 작용했다는 것도 사실이다.

각주8: 변희재, “낡은 386은 가라. 20~30대 실크세대가 나간다”, <조선일보> 2009년 1월 10일

각주9: 박권일, “88세대론 <조선> 독우물에 빠지다”, 레디앙, 2009년 1월 30일,

각주10: 한윤형, “변희재, 진중권이 아니라 <조선> 386과 싸워라”, 프레시안, 2009년 2월 11일

각주11: 생물학적인 세대는 대략 25년의 주기로 나뉘고 문화적인 세대는 10-15년 정도로 분절하는 것이 보통이니, 조선일보의 과도한 분절보다는 차라리 변희재의 세대론이 더 개념적으로 그럴 듯하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실크세대론이 정치적 필요와 개인의 욕심으로 억지로 만들어낸 거라면, G세대론은 한국 사회의 욕망의 시선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훨씬 비평할 가치가 있다. G세대론은 이를테면 김연아나 박태환을 신기하게 바라보는 한국 어른들의 시선을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다. 2010 동계올림픽의 금메달리스트들에게 붙여진 ‘88둥이’라는 명칭은 용어 정의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G세대론에 담겨진 욕망을 정확하게 보여준다. 실제로 그들은 G세대의 정의라는 외국어 능력이나 컴퓨터 능력과는 상관없이 대회 이후 G세대로 호명되었다.

각주12:  ‘엄마 친구 아들’의 준말. 골방환상곡이라는 웹툰에서 유래한 ‘완벽한 친구’를 가리키는 조어다. 현실세계에 존재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집에서 엄마와 대화를 하다보면 그것이 무엇인지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각주13: 이와 관련한 흥미로운 에피소드가 조선일보의 박해현 논설위원이 칼럼에서 <요새젊은것들>이란 책을 G세대와 엮어서 얘기했다가 저자들의 조소를 받은 사건이다. (“베이비붐 세대와 ‘요새 젊은 것들’에 부쳐”, 조선일보 2010년 1월 27일자) 박해현의 글은 나름대로 88만원 세대론과 G세대론에 치우치지 않고 균형을 잡아보려는 시도가 보이는 글이었다. 글의 결론은 20대의 부모세대인 전후 베이비붐 세대와 그들의 자녀인 청년세대를 배려하는 사회정책이 필요하다는 것으로 읽힐 수도 있었고, 이는 조선일보의 평소 시각이나 변희재의 논리에 비해서도 ‘진보적’이었다. 하지만 “88만원 세대의 자력갱생 프로젝트”라는 부제를 단 <요새젊은것들>의 인터뷰어나 인터뷰이들(그 중엔 필자도 포함되어 있다. 참고로 필자는 아웅산수지 테러사건이 있던 해에 태어났으며 외국어도 컴퓨터도 젬병이다.) 은 G세대론과는 너무 멀찍이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저자들은 박해현이 자신들이 쓴 책을 읽어보았는지에 대해 의심했다. 3명의 인터뷰어 중 하나였던 단편선은 G세대론에 대해, “난 그래도 친구는 나름 많은 편이라 자부하는 편인데, 주위에 저런 애들도 한두 명은 있는 것 같다. 그렇다. 한두 명이다. 그걸 세대라 부를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내 상식으로는 못 부른다.”라고 코멘트했다. 조선일보는 <요새젊은것들>의 저자 중 한 명인 박연에게 인터뷰 제의도 했다고 한다. 보수세력 역시 ‘참신하고 새로운 세대’의 이미지를 소비하고 싶어 한다는 점을 보여주는 하나의 증거라 볼 수 있겠다. 사실 촛불시위를 주도한 10대에게 열광하는 진보세력의 태도 역시 이와 큰 차이는 없다고 여겨진다.

각주14: 김호기, “쌍방향 소통 ‘2.0세대’ ”, 한겨레신문 2008년 5월 14일

각주15: <한중일 인터넷 세대가 서로 미워하는 진짜 이유>, 다카하라 모토아키 지음 정호석 옮김, 삼인(2007)을 참조할 것

각주16: <발칙한 한국학>, 스콧버거슨과 친구들, 은행나무(2009), “종로의 이방인” p351-423,
“왜 우리는 무력한 촛불이 되었나 : 촛불의 일면성을 넘어서기 위한 자기기술”, 한윤형, <그대는 왜 촛불을 끄셨나요>(산책자, 2009), p19-35을 참조할 것

각주17: 포털사이트 야후의 인기 연재작이었고 완결 후 단행본으로 출판된 주호민의 웹툰 <무한동력>은 ‘무한동력기관’을 연구하는 어느 몽상가 아저씨의 집에 세든 20대 하숙생들의 이야기다. 취업준비생, 공무원시험준비생, 네일아티스트 등 다양한 직군으로 이루어진 이 20대들이 주인 아저씨 가족과 소통하며 스스로를 성찰하고 발전해나가는 내용으로 웹상의 20대들에게 많은 인기를 끌었다.

각주18: 현재 포털사이트 네이버에서 인기리에 연재되고 있는 미티의 미완작 <남기한 엘리트 만들기>는 주인공이 현재의 기억을 가진 채 초등학생으로 돌아가 ‘엘리트’가 되기 위해 분투한다는 비교적 단순한 설정의 작품이다. 하지만 이 작품이 인기를 끌고 있는 이유는 ‘시기’의 문제 때문이다. 주인공이 90년대로 돌아간다는 건 말하자면 ‘한국 신자유주의의 기원’으로 돌아간다는 것과 같다. 영어 유치원도 없고 공무원이 최고 인기직종도 아니었던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주인공은 충분히 엘리트가 될 수 있을 거라고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웹툰은 그 설정 자체로 의도하지 않은 사회적 진리를 드러낸다.

각주19: 디시인사이드에서 만화를 그리다 출판사에 발탁된 만화가 굽시니스트는 오타쿠 문화를 패러디해 2차세계대전사를 서술한 <본격 제 2차세계대전만화>를 베스트셀러로 만든 후 시사in에서 시사만화를 연재하고 있다. 파편화된 오타쿠 취향의 패러디로 공통의 역사적 사실이나 시사적 현실을 드러내는 작업이 매우 흥미롭다.


프리스티

2010.05.07 23:22:03
*.14.180.209

각주가 인상적입니다 ㅎㅎ <문화과학>에 실려야 할 글이 어떤 글인지 보여주는 것 같군요..

뮤탄트

2010.05.08 00:42:33
*.140.125.102

1. 박권일씨가 '계급의 문제에 세대의 문제라는 당의정'을 입힌 것...이라고 답한 글은 예전에 이미 보았습니다. 그런데, 원론적으로 저자 자신의 해명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그 저작에 대해 반드시, 타당한 대답일 수 있을까요. 즉, 저자의 의도가 곧 저작의 결과물과 반드시 일치하거나, 결과물이 저자의 의도를 결코 넘는 법은 없다,는 전제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일까요. 저작은 저자의 의도가 아니라, 저작이 재구성해낸 사회적 맥락에서 파악하는 것이 더 올바른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2. 저는 '88만원 세대'라는 책이 불안정 노동의 전면화를 대중적으로 풀어쓴 것. 이라는 설명이 지나치게 함량 미달이라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그런데 제가 지나친 상상력을 발휘한 것이 아니라면, 윤형님이 '한국 자본주의의 구조적 문제를 ....386세대라는 섹시한 문제로 치환했다'는 문장으로 박권일씨의 진술을 전환한 데에는, 88만원 세대라는 책은 세대론을 통한, 소위 87년 체제 전반에 대한 문제제기라고 생각하는 님의 독해가 작동한 것은 아닌지요. 만일, 그렇다면 님은 '88만원 세대'라는 책이 불안정 노동의 전면화를 대중적으로 풀어쓴 것'이라는 박권일씨의 설명에 저처럼 불만족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3. 위에서 다 눈치채셨겠지만, 저는 '88만원 세대'가 단순히 현재의 20대와 386세대 간의 세대 간 착취 문제나, '불안정 노동의 전면화'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더 중요하게 386으로 대표되는 87년 체제 전반에 대한 적절한 문제제기라고 보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저는 님이 민주대 파시즘이라는 무능한 이분법에 대해 가지고 있는 문제의식을 저 88만원 세대라는 저작이 가지는 문제의식과 별개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기도 하구요....제 오해라고 하면 머 할 말 없습니다...

xenga

2010.05.08 07:57:33
*.176.2.56

뮤탄트/

저한테 질문한 건 아니지만 간단히 해명하지요. 이 기회를 빌어 저도 책에 대한 입장을 조금 정리해둔다는 의미에서요.^^ 물론 이건 우석훈 박사와 무관한 제 입장입니다. 저작이 저자의 의도를 넘어선 것일 수 있다는 말씀에 원칙적으로 동의하지만, <88만원 세대>라는 책이 "87년 체제 전반에 대한 적절한 문제제기"라고 하는 것은 과대평가이거나 오류라는 게 솔직한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그 책에는 정치적 분석이 없고, 정치적 주체에 대한 분석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나쁘다는 게 아니라 87년 체제에 대한 포괄적인 비판이라 하기에는 핵심적인 관점과 도구가 빠져있다는 것이죠. 물론 <88만원 세대>는 새로운 주체를 요구하는 말로 끝맺고 있지만 그것은 추상적인 요청일 뿐 하나의 시대를 총체적으로 평가하고 새로운 전망을 세우는 경지에 이른 것은 아닙니다.

또 한가지, 제가 지적하고 싶은 건 '87년 체제 전반에 대한 문제제기'라는 말이 대체 뭘 가리키는가에 대해 우리들이 별로 합의한 바가 없다는 겁니다. 제가 보기에 이 말은 그냥 그럴듯해서 반복되는 일종의 클리셰같은 말입니다. 구 체제에 대한 문제점들은 대개 시간이 흘러 어떤 새로운 사회모순이 불거져나오면 거의 자동적으로 확증되는 것입니다. 특히, '87년 체제는 총체적으로 실패한 체제였다' 식으로 단언하는 건, 근대의 관점에서 중세의 봉건성을 일방적으로 비판하는 것과 비슷한 오류를 범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오히려, 만약 <88만원 세대>가 87년 체제 '전반'에 대한 문제제기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읽힌다면 그것이야말로 그 책이 잘못 쓰여진 책이라는 증거가 아닐까, 하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88만원 세대>에 대한 제 규정은 여전히 변하지 않습니다. 이 책은 '불안정 노동으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적 삶 양식의 전면화라는, 21세기 한국사회의 가장 핵심적인 모순이 어떻게 청년세대의 문제로 드러나는가를 보여준 책'입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그리고 그것을 일반독자들에게 호소력있게 보여주기 위해서 정치팸플릿처럼 타겟(기성세대)을 공격하거나 성찰을 요구했습니다. 그것이 제가 말한 '당의'의 의미입니다. 어느 꼴통스런 좌파는 자기 블로그에서 '당의'라는 표현에 꼬투리라도 잡은양 '책 팔아먹으려 사기쳤다'는 식으로 길길이 날뛰기도 했지만, 당의라고 해서 그저 '껍데기'인 건 아니었습니다. 그 '당의' 자체로도 의의가 충분히 있는 이야기였어요. 유신세대, 386세대라는 주체에게 미래세대라는 '타자'를 생각하라고 요구하는 일종의 윤리적 호소였으니까요. 하지만 한윤형이 썼듯 조선일보류가 공격하는 빌미를 제공한 것 또한 사실이었습니다. 2009년초에 우석훈 박사가 조선일보의 실크로드 세대론에 동조하는 납득하기 어려운 행보를 보이고 제가 그걸 비판하는 상황이 벌어지면서, 이런 부분이 더 부각되게 되었죠. 그러나 만약 다시 책을 쓰라고 한다고해도 저는 똑같이 세대담론을 '당의'로서 적극적으로 활용했을 겁니다. (다만 저는 책에 나오는 '세대간착취'라는 개념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착취'에 대한 정의가 우석훈 박사의 그것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저는 기성세대와 88만원 세대 사이에서, 마치 계급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것처럼 실제로 계측가능하고 검증가능한 수준으로 경제적 착취가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하진 않고 다만 사회문화적으로 '세대억압'은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88만원세대> 이후 2년여 동안, 88만원 세대 스스로가 세대 담론을 박살내면서 88만원 세대 내부의 계급을 말하고 그 구분들을 지양하면서, 동시에 생물학적 세대구분 역시 가로지르면서 정치적 주체로 일어서는 아름다운 장면을 꿈꿨지만, 지금 상황을 봐선 그저 꿈이었던 것 같구요. 계급이나 정치적 주체는커녕 일각에서 주창되고 주도된 '20대 당사자 담론'조차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 극복하지 못하는 게 현실이죠. 이를테면 20대 당사자라고 해도 계급도 학벌도 천차만별인데, 그냥 당사자가 나서야한다는 말에 88만원 세대건 386세대건 죄다 "맞는 말"이라며 고개만 끄덕거리는 상황같은 것들. 20대 '당사자'가 누구냐, 누가 진짜 88만원 세대냐, 그런 게 있긴 있는 건가, 어떤 조직, 어떤 이들과 같이 가야 하나, 누가 먼저 '동'을 떠야 하나, 등등의 기초적인 의문조차 제기하지 않는 지금 이 상황이야말로 정말 코미디 아닌가요. 20대면 무조건 당사자! 이러면 언론은 명문대 출신 20대 명망가만 줄구장창 소비할 뿐이고 그걸로 울궈먹다 약발 떨어지면 땡입니다. <88만원세대>보다 좀더 구체적인 매개가 되는 책도 필요하고 운동의 계기도 필요할 것 같아요. 그러니까, 무지무지 게으른 제가 책을 쓰게 된다면 정치적 주체화에 대한 책이 되지 않을까 싶네요.

아무튼 이 모든 것들이 오롯이 <88만원 세대>의 성과이고 한계입니다. 물론 그 이상을 읽어내는 것이야 자유지만, 저자들의 능력 밖의 어떤 성취를 자꾸만 책에 덧씌우는 건 저자에게도 독자에게도 좋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뉴녕

2010.05.09 10:14:25
*.40.203.239

쟁가 님의 생각에 거진 동의합니다. 아마 본문 보시면 쟁가 님도 그렇게 생각하실 겁니다.

'세대착취'는 그저 레토릭이라 생각해서 본문 중에선 언급도 하지 않았고, '계층불평등의 세대전이'라는 표현을 썼지요. 1998년과 2007년을 비교할 때 계층불평등에 세대라는 변수가 유의미하게 드러나지 않더라는 신광영의 논문을 존중하면서도, 1) 애초에 '88만원 세대론'이 미래의 문제를 지적했다라는 점(금융위기 이후 대졸초임 연봉 삭감과 같은 사례 등) 2) 부동산의 문제 (이것은 '88만원 세대론' 이후에 김광수 경제연구소나 손낙구가 더 정교하게 분석한 것이기도 하니 3) 중산층 자녀들의 불안감 이란 측면에서 그 담론이 유의미한 부분이 있다고 지적하였습니다. 뭐 이미 이전에 여기저기서 한 얘기들을 집대성한 것이지요.

저도 이 원고를 끝으로 세대론 관련 원고는 한동안 거부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무슨 대담기획이 또 튀어나오네요. -0-;; 어느 정도 수용될진 모르겠지만 그냥 솔직하게 이런저런 얘기를 하려고 합니다. 쩝 ;;

뮤탄트

2010.05.09 19:41:45
*.140.125.102

소녀시대 팬페이지에 난입해서 티아라 까지 말라고 오바하는 팬이 된 기분이라는... ^^;;;

머 실제로 오바하기는 했습니다... 지나치게 읽고 싶은 대로 읽은 면이 없지 않습니다. 88만원 세대, 라는 저작 자체가 아니라, 88만원 세대라는 책이 불러온 현상들이나, 그것이 환기시킨 책 외부의 문제들을 88만원 세대라는 책 자체로 무리하게 환원시키려고 한 점도 있습니다.

다만, 20대 불안정 노동의 문제는 진보/보수라는 구분 자체가 무능해지는 지점을 짚어내었다는 점에서 '당의' 이상의 의미를 환기시켰다고 생각합니다. 우석훈 아저씨의 행보가 거시기 해져버리는 바람에 그런 표현이 나왔다고 생각은 합니다만, '당의'라는 표현은 너무 구태의연한 레토릭이라는...88만원 세대는 긍정적인 의미에서 해석의 여지가 풍부한 텍스트라고 생각해요. 그것을 굳이 한정하려 들지 않았으면 합니다.

공현

2010.05.09 02:54:59
*.140.58.178

xenga / 저도 읽으면서 '세대착취'라는 말, 특히 반복적으로 나오는 30-40대가 10대를 인질로 잡고 20대를 착취하고 있다는 표현에 고개가 계속 갸웃거려졌던 거 같습니다. 응? 10대가 뭔데 20대에 대해 인질이 된다는 거지? 그리고 30-40대가 20대들을 어떻게 착취하고 있단 거지? 하면서...

으잌

2010.05.09 03:46:35
*.30.45.117

음....잡지가 발행된 이후에도 블로그에 본문이 게재가 안되는건가요...

하뉴녕

2010.05.09 10:17:36
*.40.203.239

제 경우엔 잡지사에서 넷에 원고를 게재하는 시점에 블로그에 제 글을 올립니다. 그런데 계간지는 넷에 원고를 게재하는 일이 별로 없어요. 전문 보시려면 아마 구입하셔야 할 듯 합니다. ^_^;;

피카소

2010.05.09 13:36:47
*.153.230.243

다음 뷰로 구독하고 있는데, 뷰로도 좀 글을 보내주세요~!!!
최신글에 더이상 업데이트가 안되고 있어서 이상해서 와봤더니;; 계속 새로운 포스팅은 하고 계셨었네요~

하뉴녕

2010.05.09 14:45:48
*.40.203.239

다른 매체에 보낸 글이나 그냥 끄적인 수준의 글들은 다음블로거뉴스로 안 보내다 보니,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 요즘 블로그가 좀 소강상태인 것은 사실....ㅋㅋ 죄송해요 ^_^;;

zeno

2010.05.10 19:59:19
*.10.47.106

오오, 오늘 밤이나 내일 1백만 힛 찍겠군요 ㅋㅋㅋㅋ 미리 ㅊㅋㅊㅋㅊ

똠방(안테바신)

2010.07.31 14:35:10
*.71.52.142

잘 읽었습니다. 쟁가님의 '국가가 침몰한 곳에서 인양된 낯선 아이러니'와 함께 읽으니 곳곳에서 공감이 터지게 되는 글입니다. '세대착취'에 대해서 나름 '아니다' 싶었는데, 윤형님과 쟁가님의 글로 보다 명쾌한 이해를 하게 됐습니다. 달라진 '애국주의'에 대해서도 말이죠. 두 분 글에 감사드립니다.

하뉴녕

2010.07.31 23:57:06
*.70.223.142

쟁가님 글에서처럼 '월드컵 주체'라는 말의 저작권은 이택광 선생에게 있습니다. 그 점을 명기하지 못했네요. 이택광 선생의 유학시절 회고담도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다시 새기니 새롭습니다. 저는 과거 "붉은악마와 민족주의"라는 포스트를 쓸 때의 착안에 이택광의 '월드컵 주체'라는 조어, 그리고 나중에 읽은 일본 사회학자의 논의까지 엮어서 저 단락을 썼던 것이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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