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자유의 의지 자기계발의 의지 - 8점
서동진 지음/돌베개

흥미로운 책. 지겹다는 사람도 있는데, 이 책의 성격 자체가 빠르게 발췌독한 후, 나중에 어느 부분인가를 자료로 쓰고 싶을 때 그 부분을 찾아내서 인용해야 하는 그런 책인 탓이 크다. 그냥 빠르게 빠르게 통독해 버리면 지겨울 일도 없을 듯.


서동진의 논의는 간단히 말하면 신자유주의 경제체제가 어떻게 '자기계발하는 주체'라는 것을 형성하는지 계보학적으로 보여주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은 그것을 보여주기 위한 충분한 자료를 담고 있다. 그의 논의에 대해선 당연히 옳다고 생각하고, 그럼 그 다음으로 넘어가보자. 그런 '현상'에 대해 우리는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


서동진은 이에 대해 프레시안 인터뷰에서, 이 책은 '자기계발하는 주체'를 규명한 것이지만 '투쟁하는 주체'가 어떻게 생겨날 수 있느냐의 문제에 대해서는 따로 생각해 봐야 할 거라고 답했다. 박권일은 이에 대해 '투쟁하는 주체'와 '자기계발하는 주체'를 구별하는 것은 사실상 (90년대의 자유주의를 부정하는 듯한 최근 서동진의 행보와 관련하여) 80년대 회귀일 수 있다고 비판했다. 박권일의 비판 혹은 우려는 옳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는 서동진의 정리된 논의에서 그 다음의 논의를 이어갈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이렇게 깔끔하게 여러 영역을 가로지르는 자료로 정리된 '자기계발 담론'에 관한 논의는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내게는 '투쟁하는 주체'가 필요하다는 서동진의 주장도  좀 느닷없이 들린다. 그 주장에는 필히 있어야 하는 중간단계가 생략된 것 같다.  생략된 중간단계의 고리는 자기계발의 시대에 좌파는 "도대체 무엇에 관해 투쟁하자고 말할 수 있을까?"라는 것이다. 자기계발 담론을 시대의 조건으로 정의했다면, 그 변화된 시대에 어떤 투쟁방법이 있는지를 고민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순서 아닌가? 사실 자기계발 담론은 투쟁에 대해 위협적이다. 기존의 좌파 담론을 투박하게 정리하자면, 노동자와 자본가의 갈등축을 기본으로 하고 '노동해방'을 말하면서 자본가의 양보를 얻어내는 방식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런 방책은 '자기계발하는 주체'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기계발 담론'은 경영담론이며, 자기 자신을 경영하는 주체로 인지하는 동시에 상품으로 대상화하여 시장에 내어놓는 담론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투쟁의 여지가 없다. 투쟁은 제 물건이 안 팔린다고 시장에 징징거리는 찌질한 행위로 여겨진다. '신자유주의자'의 입장에서 투박하게 말하자면 '지식기반경제'에는 '생산수단'이랄 게 없다. 내 생산수단은 농담삼아 말하자면 친구로부터 중고매입한 40만원 짜리 노트북이다. 많은 서비스 업종들은 딱히 생산수단이랄 게 없고 굳이 회사라는 틀 안에 종속되어야 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실제로 회사는 사원을 자꾸 줄이고 모든 사람들은 '자기 경영자'가 된다. 서비스 업종에서 이른바 '노동 유연화'가 관철되는 방식이다. (경제학자들은 '노동 유연화'라는 것이 한국 보수주의자들의 진술과는 달리 고용인력을 탄력적으로 늘였다 줄이는 '수량적 유연화'에만 국한되지 않는 훨씬 더 복잡한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한국 사회의 '노동 유연화' 담론이 - '수량적 유연화'로서 - 어떻게 수용되었는지에 대해서만 나온다.)  


생산직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을 잠깐 잊고 이들에게만 집중하자면, 이들의 '노동 유연화'는 사실상 관념적인 차원에선 '노동 해방'이라는 점에서 좌파 담론을 심각하게 교란한다. 이런 측면에서 신자유주의는 물구나무선 마르크스주의이며, 전도된 노동 해방 담론이다. '자기계발 담론'이 단순한 허위의식이 아닌 이유는 그래서다. 그것은 마치 노동이 해방된 (아무도 당신을 종신고용하지 않는) 세상에서 당신이 가져야 할 자질, 아마도 지녀야 할 윤리, 어쩌면 갖추어야 할 존엄을 요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국의 자기계발 도서들이 그 정도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가능성은 충분하다. 푸코적 계보학으로 '자기계발 주체'를 탐구하겠다는 이 책에 인용된 자기계발 에세이스트 구본형은 '푸코'를 인용하며 자기 할 얘기를 한다. 그의 푸코 인용이 딱히 '틀렸다'는 느낌도 들지 않는다. 보고 있으면 숨이 턱 막힌다.


한편 젊어서 무슨 일을 하든 나중에 살 수 있으니 겁내지 말라는 박원순, '십 년을 또라이질 하면 인정받는다'는 격언(?)을 설파하는 진중권, 20대 문화컨텐츠 생산자들이 필요하다는 우석훈을 생각해 보라. 청년들을 향한 이들의 요구는 서비스 업종에서 관철되는 '관념적 노동해방 담론'과 얼마나 다른가? (엄기호의 표현으로) '노동해방'이 아니라 '노동시장 편입'을 갈구할 수밖에 없는 오늘날의 청년들이 공무원과 대기업 정규직을 지망하고, 이에 대해서 좌파지식인들이 젊은이들이 어째서 그렇게 사느냐고 한탄할 때, 도대체 어느 쪽이 '신자유주의자'인 것인가?


물론 나는 여기서 박원순, 진중권, 우석훈의 요구가 신자유주의적이라거나, 자기계발 담론 비판에 아무 의미도 없다는 얘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자기계발 담론에 대한 첫번째 투쟁의 지점은 물론 자기계발 담론이 은폐하는 어떤 지점에 있을 것이다. 비정규직 생산직 노동자가 비정규직이란 이유로 공장에서 고용관계를 형성하지 않는다고 볼 수는 없다. '지식기반경제'를 실천하는 대기업 노동자가 몇 년 동안 아이디어를 쥐어짜내고 퇴사를 할 때 그가 자본-노동 관계를 벗어나 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니까 '모두가 경영자인 시대'라는 환상의 커튼을 걷어 버리고 '자기계발 담론의 물질성'을 폭로하는 것을 투쟁의 첫번째 지점이라 정식화해 보자. 아마도 이 지점에서는 고졸-대졸 임금격차 문제와 비정규직 문제 등을 쟁점으로 삼을 수 있을 거다.


하지만 또 다른 차원도 있다. 자기계발 담론 자체 내부의 계층문제라는 것도 있는 것이다. 서동진은 '지식기반경제'를 '환상'이라 칭했다. 물론 그가 '환상'이란 단어를 쓸 때는 '지식기반경제'라는게 온전한 허구며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는 의미는 아니었을 거다. 여하튼 생산노동을 위해서든 서비스업을 위해서든 노동생산성 재고를 위한 재교육이 종종 필요한 세상에서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런 실정에서 '자기계발'의 비용이 온전히 개인에게 전가되어 있는 것은 '자기계발 담론' 내부에서도 모순적인 것이 아닌가? 형편이 좋은 이들은 '자기계발'을 할 수 있겠지만, 형편이 안 좋은 이들은 자기계발을 할 래야 할 수도 없는 이런 현실을 지적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아마도 '자기계발적 주체'가 자발적으로 사회에 불만을 터트리게 되는 고유한 순간일 것이다. 부르주아와 평등한 자기계발의 기회를 요구하는 이들의 욕망은 이택광이 '쾌락의 평등주의'라고 부른 바로 그것일 게다. 그런데 좌파 담론이 자기계발 담론 자체를 그저 해소되어야 할 것으로 취급한다면, 이들의 욕망을 셈할 방법이 없다. 이들을 부정하고 고졸 비정규직 노동자만 쳐다보면서 '투쟁'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하위주체는 말할 수 없는 법인데 말이다. 촛불시위에 흘러나온, 기존의 진보진영과 거리감을 지녔던 거리의 주체들은 아마 이런 욕망을 지닌 사람들이었을 거다. 이런 이들과 이야기를 하려면 우리는 자기계발 담론의 내적 논리 자체를 잘 이해해야 한다. (가령) 자기계발 담론에 무지하고 그것을 경멸하면서도 (가령) 그 현상의 발현인 촛불시위를 무비판적으로  찬양하는 방식으로는 좌파 담론이 대중에게 다가서는 것이 불가능하다. 우리는 '평등한 자기계발의 기회를 요구'하는 목소리에서 어떻게 진보적 가치를 담지하는 정책적 접근이 가능할 것인지를 깊이 고민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필요한 차원은 자기계발의 영역 그 자체에서 필요한 담론투쟁이다. 자기계발 담론은 자본주의의 것, 혹은 신자유주의의 것이라(고만) 치부한다다고 생각해 보라. 그러므로 그것을 거부해야 한다는 극단적인 관점을 취한다면, 좌파는 자기계발을 해서는 안 된다는 우스운 결론이 나온다. 하지만 자기계발이란 건 본시 윤리적 문제와 긴밀하게 얽혀 있었고, 그런 의미에서 인문적이었다. <국가>나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자기계발 도서라고 보지 못할 것은 뭐란 말인가? 현행 자기계발 담론의 (은폐된) 물질성을 폭로하는 것을 넘어, 좌파들의 구조적 분석의 틀 속에서 상대적으로 도외시했던 개인의 삶의 문제에 대한 적극적인 접근이 필요하지 않을까? 박원순의, 진중권의, 우석훈의 주장은 그런 의미에서 가치를 지닐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다만 그들이 자신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정확히 알고 있다는 가정 하에 말이다.


서동진의 성실한 분석은 주로 자기계발 담론의 이데올로기적인 측면을 파해치면서 아마도 첫번째 차원의 문제를 제기하는데 열심인 것 같다. 거기에 대해선 비판도 우려도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이 책의 논의가 두번째 차원이나 세번째 차원의 논의로 이어지지 말아야 할 이유는 없다. 이 책의 성실한 작업을 토대로 우리는 그 다음 얘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애초에 그런 의도로 쓰여지지 않았을까? 사실 서동진을 비판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서동진의 논의를 이어받는 것이다. 이 책은 그렇게 취급될 만한 가치가 있다.




unknom

2010.01.31 18:39:01
*.60.18.72

물구나무선 마르크스주의와 신자유주의에 대한 표현이 인상적이네요.

하뉴녕

2010.01.31 21:42:08
*.49.65.16

감사합니다.

Carrot

2010.01.31 18:45:33
*.128.181.44

그래서 지금 책을 읽으면서 박권일의 비판에 동의하지 못하는 것이기도 하구요. 오히려 그 부분에 관해서는 서동진 선생은 그저 유보해놓으려고 하는 것 같으니까……. 결국 후속 논의가 이어지고 풍부하게 논의가 쌓여갔으면 좋겠습니다. 요컨대 보충이라기보단 진전이 필요하다는 것이죠.

특히 세번째 문제에 관해서는 자기계발 담론 하위로서의 자기계발과 그렇지 않은 자기계발-오히려 이건 다른 언표로서 불릴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딱히 생각나지는 않습니다-을 살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물론 이건 <자유의 의지 자기계발의 의지>와 한 카테고리 안에 묶일 수 있는 내용은 아니고 좀 다른 영역인 것 같기는 합니다만…….

하뉴녕

2010.01.31 21:43:12
*.49.65.16

두 번째 문단에 동의합니다. 제가 좀 투박하게 같이 엮은 면이 있지요. 하지만 자기계발 담론을 그저 비판만 하는 것이 '목욕물을 버리려다가 애까지 버리는 오류'를 범할 수 있음을 말하려고 했습니다.

쟁가

2010.01.31 21:54:59
*.254.120.132

나중에 기회가 되면 재론하겠지만, '자기계발'이라는 개념을 너무 헐겁게 정의할 경우 "자기계발은 어쨌든 좌파건 우파건 다 필요한 거 아닌가"라는 식의 하나마나한 얘기로 빠지게 됩니다. 자기를 상품화하기 위한 목적의 자기계발과 랑시에르가 <프롤레타리아의 밤>에서 말한 자기해방(최하층의 노동자들이 낮에 뼈빠지게 일하고도 밤에 눈을 비벼가며 모여서 무시무시한 지적,예술적 수련을 했던 믿어지지 않는 '팩트'들)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사차원의 벽이 있어요. 투쟁하는 주체가 무엇을 두고 투쟁하느냐도 여기서 자동적으로 도출됩니다. 상품화한 자기자신을 가지고 투쟁하는 게 아니라, 합목적성(자신의 상품성이나 능력, 자신이 자본주의사회에 기여한 정도 따위를 계산하는 등의) 따위 없이도 얼마든지 사회의 1/n의 몫을 주장하며 싸울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실은 정치가 가능한 유일한 조건이 바로 그것, 만인은 닥치고 평등하다는 것이구요. 신자유주의적 자기계발하는 주체는 투쟁하는 주체를 경유해(다시말해서 자신이 시장합리성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 투쟁하는 주체이기도 하다는 것을 깨달은 어느날 '밤' 이후에) 비로소 자기해방의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서동진은 그 투쟁하는 주체의 문제를 따로 분리하거나 최소한 유보하려고 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내가 비판적으로 코멘트를 한 것이구요.

서동진의 논의를 이어받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다름아닌 서동진을 비판적으로 읽는 것입니다.

하뉴녕

2010.01.31 22:03:46
*.49.65.16

흠 매우 중요한 이야기를 해주신 것 같습니다. 전반적인 논지에는 동의합니다. 그런데 여전히 '서동진을 비판적으로 읽는 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프레시안 서동진 인터뷰를 비판적으로 읽는다 하더라도, 그 인터뷰에 나온 서동진의 관점이 <자유의 의지, 자기계발의 의지>라는 책의 논지나 의미를 규정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투쟁하는 주체'를 서동진이 따로 말한 것이 " '자기계발하는 주체'와 '투쟁하는 자체'가 다른 사람이다."라고 콕 집어 애기한 것이 아니라면, 쟁가 님의 견해와 얼마나 큰 거리가 있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쟁가

2010.01.31 22:27:22
*.254.120.132

서동진이앞으로 진전된 이야기를 분명히 할테니까 그때가서 좀더 정밀하게 논해볼 수 있겠지요.

제가 읽기에, 그리고 느끼기에, 서동진은 자기계발하는 주체, 신자유주의에 훈육된 주체가 어느순간 말도안되게 각성해서 투쟁하는 주체가 되는, 그런 말도 안되는 일은 벌어지지않을 거라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또한 자기계발하는 주체가 실은 '이미 투쟁하는 주체'이기도 하다는 것을 그리 인정하고싶어하지 않는 것 같기도 하구요. 칸트식으로 말하자면 아무리 자기가 능동적인 자기계발에 매진하는 자율적인 개인이라고 하더라도 결국 그것은 신자유주의가 강제하는 틀에 적응하는 것이니까 '진정한 능동성'이라 할 수 없죠. 그리고 이 지점이 서동진의 논의가 한국사회에서 어떤 비판성을 획득하는 결정적 지점이기도 하구요. 그래서 서동진은 투쟁하는 주체를 따로 호출해야했던 거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나는 그런 관점이 일종의 국개론 비슷한 것 아닌가하고 의심하는 것입니다. 국민들 수준이 이모양이니까 탁월한 지도자가, 선지자가 광야에서 나타나야한다... 외부의 어떤 혁명주체를 요구하는 그런 태도야말로 전형적으로 구좌파적인 것 아닌가, 하고 생각했던 겁니다.

저도 아직 논점을 명확히 하기엔 좀 근거들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저도 좀더 꼼꼼하게 텍스트를 읽어봐야겠습니다.

하뉴녕

2010.01.31 22:25:44
*.49.65.16

예. 만일 그런 논의가 나온다면 그 지점에서 비판할 수는 있겠지요. 흐흠 그렇게까지 얘기할까 싶기는 한데, 차후 논의를 보면 될 것 같습니다.

하뉴녕

2010.01.31 23:15:48
*.49.65.16

흠 그리고 다시 한번 보다가 떠올랐는데, '자기계발'이란 개념을 너무 헐겁게 정의하는 것만큼이나 '투쟁'이란 개념을 너무 세밀하게 정의하는 것도 문제를 가져올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말하자면 용산의 망루 위에 올라선 세입자들이 랑시에르가 말한 '밤'을 거친 이들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런 경험없이도 그들이 망루에 올라설 수 있을 거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을 듯 합니다. 하지만 용산의 세입자들을 '투쟁하는 주체'라 부를 수 없는 담론이 '투쟁'을 위해 유의미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제가 두번째 논점에서 하려던 말도 '쾌락의 평등주의'에서 나오는 투쟁의 문제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이냐, 해석할 것이냐, 라는 것과 관련이 있었죠. 쟁가 님의 논의를 미세조정한다면 이를테면 '탈(혹은 비)정치적 투쟁'과 '정치적 투쟁'으로 분류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만, 여기에도 고민거리는 생기지요. 우리 사회에 존재한 적이 없었던 서구 전통을 끌여와 "한국 사회엔 정치가(혹은 다른 것이) 없다."고 말하는 태도가 무엇을 가져다줄 수 있는지에 대해서 좀 회의적이기 때문이지요...여하튼 저도 명확한 답이나 관점은 없는데 고민거리가 많은 부분입니다.

쟁가

2010.02.01 04:59:50
*.254.120.132

실제로 대부분의 경우 자기해방의 기획이 없는 상태에서(그리고 인지조차 하지 못한 상태에서) 투쟁하는 주체가 되지요. 전설적 혁명가들, 노동자들조차 자기해방이란 측면에서는 낡은 생각을 가진 경우가 많았던 게 사실이기도 하구요. 인간해방의 기획, 그 대의를 위해 끝없이 자기를 희생하고,(자기를 철저히 도구화하고) 욕망을 유보하고 억압하는 것이 진정한 삶이라고들 생각해왔으니...그러나 투쟁을 하는 과정에서 어느 순간 자기해방의 필요를 깨닫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투쟁하는 주체들은 결국 자기계발, 자기해방의 '밤'을 나름의 방식으로 거치지 않으면 해방의 운동을 지속시킬 수가 없다고 생각해요. 저는 흔히들 얘기하는 '지속가능한 운동'도 결국 비슷한 지점을 좀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하는 거라고도 봅니다.

'프롤레타리아의 밤'이 단지 서구전통일 뿐 아니냐고 하시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노동자 단병호가 감옥에서 자본론을 독파하고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을 스스로 공부한 것과 같은 훌륭한 '자기계발'의 한국적 전통을 우리는 이미 갖고 있습니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와 비슷한, 빛나는 서사들은 정말 무수히 많지요. '발굴'되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 서사를 발굴하는 행위 자체가 이미 하나의 자기해방의 실천임은 물론입니다. 저는 대학에서 청소,경비 비정규직으로 일하시는 아줌마, 아저씨들이 용역회사와 학교당국과 투쟁하는 동안 과거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책을 읽고 토론을 하는 등 눈부신 자기계발(혹은 자기계몽)을 실제로 해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제 모교의 어느 청소용역 비정규직 아주머니께서는 학교당국과 투쟁하는 과정에서 노동자로서 뿐 아니라 한 사람의 여성으로서 자기해방하는 경험을 하기도 했습니다. 스스로 내면에 있는 가부장성을 투쟁의 과정에서 발견하게된 거죠. 즐거워한다는 게 옆에서도 느껴질 정도로 어떤 고양감을 느끼면서 말이지요.

자기해방의 '밤'을 거치지않고 긴박하게, 즉자적인 투쟁에 돌입하는 경우느 물론 무수히 많습니다. 제가 하는 이야기는 그런 투쟁이 진정한 투쟁이 아니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 그런 투쟁이 우리 해방 기획의 전부일 수도, 전부여서도 안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결국 필요한 건 자기계발하는 주체가 자기소외라는 역설적 상황에 빠지지지 않고 어떻게 자기해방하는 주체가 될 수 있는가, 겠죠.

하뉴녕

2010.02.01 10:48:16
*.49.65.16

'지속가능한 운동'에 대한 진술에는 동의합니다만 저는 아마도 '계기'라는 측면에 좀 더 방점을 찍고 있었던 거겠죠. 말씀을 섞다 보면 외려 쟁가 님이 서동진 님과 비슷한 진술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그게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또 '프롤레타리아의 밤'이 서구전통이란 의미는 아니었구요. 말씀하신 부분이 하나의 차원인데 그렇게 말하는 건 어폐겠죠. 가령 '합리적 사유'를 서구전통이라 말해버리는 것이 의미가 없는 것처럼... 말한 부분은 그게 '정치가 없다.'는 진술로 가는 뭐 그런 부분에 대한 경계였습니다. 전태일(청계노조)과 단병호(민주노총 초기 활동가들)의 사례가 그렇다는 것엔 동의합니다만 사실 그것이 수용이 안 된 상태에서 정치가 진행되어 온 것은 사실이니까요. 또 제가 말씀드리려고 했던 것도 배합의 문제였는데요. 영화 "외박"에서 보여지듯 어떤 종류의 투쟁에서도 그런 자기해방의 순간은 섞여 있지요. 심지어 학생운동권이 그저 시위현장을 따라다닐 때에도 그런 경험을 할텐데요. 그런 점에서 자기해방과 자기계발이 '질적으로 다른 요소'라고는 (대부분의 경우) 하나 같이 따라다닌다는 데에 주목하지 않으면 말씀하신 변혁의 전망이 나오지 않겠지요. 이 점은 애초의 쟁가 님의 논점과 비슷하지 않았던가라고 느끼고 있습니다.


서사화 자체가 자기해방의 실천이란 말은 특히 와닿는 부분입니다. 그런데 찾아보면 가슴이 부푸는 그런 사례의 당사자들이 삶의 전 기간 동안 온전히 '멋있게' (물질적인 것을 의미하는 건 아닙니다.) 사는 경우가 흔치 않다는 점이 이 경우의 고민일 듯 합니다. (대개는) 서사화가 삶의 어느 순간에 끊겨 버려요. 이소선처럼 경외의 대상이 될 만큼 끝까지 사는 경우나 (근데 이 경우엔 바라보는 사람들과의 거리감이 생기죠.) 제정구처럼 어느 순간 죽어버리는 경우를 제외하면 답이 안 나옵니다. 그렇다고 일찍 죽는 것이 답은 아닐 테구요. (이건 뭐 갑자기 "다크나이트"로군요...) 그것과 이전의 서사방식의 신화적 성격이 겹쳐져서... 아마 그만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게 된 것이 아닐까, 라는 느낌도 있습니다. 물론 그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놀이네트

2010.02.02 09:31:52
*.241.118.90

처세술에서 자기계발로 이어지는 흐름이 뭔가를 암시하는 것도 같네요

처절한기타맨

2010.02.02 13:02:45
*.231.53.11

여튼 칼라 블로거관련 고민을 좀더 진행해보자구요.올린글도 글치만 댓글이 볼만하다능 이걸...어떻게 칼라로 뽀려올수 있을려낭? ㅎㅎㅎ

하뉴녕

2010.02.02 18:41:25
*.49.65.16

덧글이 더 잼있다는데 공감함다...칼라 블로그가 하나의 플랫폼이 될 수 있으면 좋을텐데...어떤 방법이 있을지...-0-;;;

김강

2010.02.02 13:36:32
*.44.200.120

성실한 서평이네요. 잘 읽었습니다.

하뉴녕

2010.02.02 18:41:33
*.49.65.16

감사함다 :)

elliott

2010.02.03 03:40:05
*.171.24.180

가끔 블로그에 몰래 들렀다 갔는데 댓글은 처음이네요^^'
일일이 답글을 달아주셔서 몹시 부담스럽...
글도 재미있고 덧글도 흥미로워서,
제가 관여(?)하고 있는 네이버 오픈캐스트에 살짝 담아갈게요;
구독자가 거의 없는지라 읽는 사람들이 많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생각거리를 좀 던질까 해서요^^

opencast.naver.com/DD993 입니다. 문제가 되면 꼭 연락주세요^^ prettymaryk@hanmail.net

하뉴녕

2010.02.03 13:13:18
*.49.65.16

ㅎㅎㅎ 감사합니다~.

그나저나 일일이 답글을 단다는 건 덧글이 별로 없다는 건데 그런다고 덧글을 안 다시면...훌쩍 ㅠㅠ

버러지

2010.02.21 21:10:33
*.160.120.234

"비밀글입니다."

:

하뉴녕

2010.02.24 04:09:09
*.49.65.16

에구 덧글을 늦게 정독했습니다. 감사합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28 [기획회의]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되기를 - 키워드로 살펴보는 저자 "20대 멘토" 편 [126] [1] 하뉴녕 2011-08-19 30853
27 [프레시안books] 더 울퉁불퉁하게 기록하고, 더 섬세하게 요구했으면... [5] 하뉴녕 2011-07-09 22487
26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는 방법 in 진보지식인 버전 (+청년좌파 확장팩) [48] 하뉴녕 2011-01-05 11881
25 '세대론' 관련 글 정리 [9] 하뉴녕 2010-11-08 5239
24 [문화과학] 월드컵 주체와 촛불시위 사이, 불안의 세대를 말한다 [13] [1] 하뉴녕 2010-07-30 6998
23 [레디앙] 누구를 위한 진보정당 운동인가 [35] [1] 하뉴녕 2010-06-16 7810
22 [펌] 노회찬 서울시장후보 장외토론회 [6] 하뉴녕 2010-05-28 3506
21 "방 있어요?" 행사 포스터 file [9] 하뉴녕 2010-04-30 4689
» 하지만 자기계발의 영역에서도 담론투쟁이 필요하지 않을까? [20] [3] 하뉴녕 2010-01-31 4500
19 강준만 한겨레 칼럼 “이명박 비판을 넘어서”에 부쳐 [21] [1] 하뉴녕 2010-01-18 4180
18 엄기호 [12] [2] 하뉴녕 2009-10-30 1253
17 [프레시안] 20대의 자기인식이 시작 되다 - 연세대학교 개청춘 상영회 후기 [10] 하뉴녕 2009-10-05 3013
16 [미디어스] 촛불시위와 세대론 - 왜 세대론이 우리를 괴롭히는가? [13] 하뉴녕 2009-05-03 4000
15 소위 ‘20대의 목소리’란 것에 대해 [29] [4] 하뉴녕 2009-02-21 2014
14 386 이후 세대의 정치인을 육성하기 위해선? [6] 하뉴녕 2009-02-15 910
13 [프레시안] "변희재, 진중권이 아니라 '<조선> 386'과 싸워라" - [기고]'88만원 세대'가 바라보는 '<88만원 세대> 논쟁'(下) [21] [1] 하뉴녕 2009-02-11 3246
12 [프레시안] 우석훈, 말의 덫에 빠졌다 - [기고] '88만원 세대'가 바라보는 '<88만원 세대> 논쟁' 上 [13] [2] 하뉴녕 2009-02-10 2219
11 국가주의는 파시즘으로 통하는 지름길? [23] [2] 하뉴녕 2009-01-27 3213
10 이명박과 폭력시위, 그리고 주민소환제 [13] 하뉴녕 2008-06-08 1579
9 북한 문제와 중국 문제 [9] 하뉴녕 2008-03-29 10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