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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책사질의 유혹

조회 수 1862 추천 수 0 2009.02.04 02:30:28


평균적인 한국의 중년남성이 아침에 일어나 출근하기 전에 주의 깊게 신문을 보고 있다고 치자. 그의 입에서는 어떤 ‘정치평론’이 나올까? 당신이 택시에 탑승해서 저 유명한 ‘택시기사 정치평론’을 듣고 있다고 치자. 그의 비평은 어떤 종류일 것일까? 일반화의 위험이 있기는 하지만, 대체로는 ‘책사질’에 해당할 거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가령 용산참사를 두고 사태의 원인이나 책임소재를 묻기 보다는, 이명박 정부가 취했어야 하는 올바른 대응, 김석기 경찰청장의 경질이나 유임의 유불리나 그 시기의 적절한 선택, 박근혜의 코멘트가 향후 정국에 미칠 영향과 그것의 전략/전술적 타당성 등을 주의 깊게 논의할 거라는 것이다. 사안의 시시비비를 가리고 우리에게 필요한 정치의 모습은 어떠해야 할지를 묻지 않고 자신의 위치를 정확하게 삼국지의 ‘제갈공명’의 그것에 고정시키는 셈인데, 나는 이러한 종류의 ‘시민들의 정치평론’이 그 순간엔 내가 노예가 아니라 주인인 듯한 착각을 주지만 장기적으로는 자신을 주인이 아닌 노예의 신분으로 떨어뜨리는 정치평론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종류의 평론의 문제에 대해서는 쉽사리 그 문제를 지적할 수 있겠는데, 이것이 소위 정치판이나 운동진영의 영역으로 내려오면 문제가 조금 더 복잡해진다. 이 영역에도 물론 ‘책사평론’이란 것이 존재하는데, 이 경우엔 이 평론이 언제나 무의미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관전자와 플레이어의 거리가 상대적으로 가까운 ‘좁은 바닥’으로 내려오면 ‘책사질 평론’은 실질적으로 당신이 아끼고 사랑하는 어느 정치집단의 행동에 다소나마 영향력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것을 어떤 논거로 비판해야 할까? 혹은, 비판해야 하는 이유가 있을까?


물론 그런 경우라도 ‘거실에서만 제갈공명’이나 ‘운전석의 정치평론 본좌’들과 비슷한 이유로 비판할 수 있을 때가 있긴 하다. 가령 2003년에서 2004년, 노빠들의 집단수용소가 됨으로써 공익에 기여했던 서프라이즈의 전성기를 돌이켜보자. 노무현의 제갈공명, 유시민 정도의 위인이 공석에서든 사석에서든 ‘제갈공명질’을 하고 있는 것은 뭔가 실질적인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서프라이즈의 일개 유저가 노무현 대통령 / 참여정부 / 열린우리당이 채택해야 할 전략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다고 보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 사이의 사람들, 서프라이즈의 주요 논객들의 경우엔 따지기가 좀 애매하긴 하다. 서프라이즈는 적어도 여권 세력의 주변부와는 인맥을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나는 서프라이즈 책사들의 글이 영향력을 형성하고 있다고는 보지 않았는데, 기본적으로 그들의 글은 정부의 시책에 왈가왈부하는 것이었지만, 사실 그러는 척하면서 노빠들의 정서적 지지를 규합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은 저 사이트가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의 영향력이 있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는데, 그것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정치공학이 노빠들이 원하는 대로, 그러니까 서프라이즈가 말하는 대로 진행되고 있다는 느낌이 종종 들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서프라이즈가 노무현 대통령의 ‘내심’을 짚는 것이 아니라, 노무현 대통령이 서프라이즈를 방문하고 자신의 ‘내심’을 재구성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리하여 나는 위대하신 전 대통령 노무현 찡을 (정권 말기에) ‘제1 노빠’라고 칭했던 것이다.


영향이 있건 없건 책사질을 규탄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잣대는, 심판과 코치에 대한 비유다. 가령 안티조선 운동의 고전적인 논리는 조선일보에 대해 “(자신들이 지지하는) 한나라당에 대해선 심판질을 하지 않고 코치질을 한다.”는 것이었다. 심판이라면 기준에 따라 휘슬을 불거나 방관하거나 할 것이다. 하지만 코치라면 상대팀을 이기기 위해 온갖 술책들을 (룰에 어긋나지 않는 한에서, 혹은 심판에게 적발당하지 않는 한에서) 구사하려 할 것이다. 물론 정치의 영역에선 이념이랄까 지향점이랄까 하는 것들이 있고, 스포츠 경기의 비유와는 조금 다르게 정치평론의 ‘심판’들은 각각의 룰로 경기를 평가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 각각의 룰에 의거하여 경기를 평가하면서, 또한 심판들끼리 그 룰의 공통분모를 만들기 위한 소통을 하여, 우리의 게임이 좀 더 안정적인 방식으로 운영되도록 하는 것이 ‘공론’의 영역이면서 동시에 그 역할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까지는 원론적인 이야기이니 쉽사리 동의가 된다. 문제는 구체적인 적용의 문제다. 사실 현실세계에선 평론가가 원칙과 전략을 구분하기 어려운 경우가 종종 일어난다. 이를테면 정당이나 정치세력이 모종의 정치행위를 한다면, 그것은 어떤 원칙의 잣대로 비판할 수도 있지만 전략적으로 너무나 한심하기 때문에 비판될 수도 있다. 어떤 경우엔 특정한 전략 자체가 원칙의 이름으로 요구되기도 한다. 가령 한나라당의 최근 행보를 비판하는 경향신문 논설위원 이대근의 칼럼을 보라. ( 클릭 ) 한나라당에 대한 그의 조언은 전적으로 타당해 보이는데, 그 조언은 원칙과 전략이 포개지는 공간에 위치하고 있는 것 같다.


다시 한 번 시선을 돌려, 거대 정당들보다 훨씬 작은 조직을 둘러싼 비평의 현장으로 내려오면 문제는 더 복잡해진다. 그래도 거대한 세력을 향한 비평은 대개 ‘지켜져야 하는 원칙’과 ‘그 원칙을 무시하게 만드는 제반 현실’에 대해 우리가 대충 알고 있고, 후자를 십분 감안하지만 비평가의 입장에선 전자를 강조해야 한다는 식으로 얘기할 수 있다. 언제나 그것만이 옳은 것은 아니겠지만, 대개 이 도식이 통할 거라고 추측할 수 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작고 좁은 바닥에 내려오면, 도대체가 이 정치집단들을 향해 ‘좀 더 대중적인 전략’에 대해 설교를 해야 할 일이 생긴다. 그러면서도 심판과 선수의 거리는 앞서 언급했던 모든 상황에서보다도 현저하게 줄어들어,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이 미칠 영향력에 대해 고민해야 할 일이 생긴다. 이를테면 2003-4년의 진보누리 대 민주노동당, 지금의 진보신당 당게시판이나 레디앙 대 진보신당의 관계가 그러하다. 영향이 있다는 것은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과 같은 말이기도 하다. 이 좁은 바닥에서 지극히 좁은 차원의 정치행위에 대해 비평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글에 대해 어떤 식의 책임의식을 가져야 하는 걸까. 책사질 비평과 공론을 형성하는 비평은 구분될 수 있을까, 없을까. 책사질 비평은 그저 나쁘기만 한 것일까.


이런 부류의 ‘좁은 골목 담론’에서는 ‘허망한 책사’들의 세상에서보다 오히려 더 강한 정치평론 중독 증상이 나타난다. ‘거실에서만 제갈공명’이나 ‘운전석에서만 정치평론 본좌’들은 적어도 자신들의 발화가 휘발된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비록 “내 말을 경청하면 사태가 해결될 것이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긴 하겠지만 말이다. 서프라이즈의 노빠들도 자신들의 발언이 정치세력에게 전달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대충 이해한다. 비록 그들이 정체성을 개인으로서 지각하는 것이 아니고 ‘선민-노빠 집단’으로서 지각하고 그 집단은 정치세력에게 영향을 미칠 거라고 믿고 있긴 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나와 너와 우리에게 친숙한 저 ‘좁은 골목 담론’의 현장으로 내려오면, 그 알량한 영향력 혹은 영향력의 가능성을 두고 깊은 착각에 빠진 정치평론 중독자들이 생겨나게 된다. 말하자면 ‘자신이 세상을 조종하고 있다고 믿는 히키코모리’들이 탄생하는 것이다.


이 얘기는 일군의 사람들을 비평하는 듯 하지만 실은 나 자신의 얘기이기도 하다.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치지만, 도대체 우리가 하는 일, 특히 내가 하는 일이 ‘자신이 세상을 조종하고 있다고 믿는 히키코모리’질과 무슨 차이를 지닐 수 있는지 나는 종종 묻곤 한다. 앞서 말했듯 이 좁은 바닥에서 그것과 그것이 아닌 것의 구별이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고, 기준이 있다 해도 상대적인 것에 지나지 않을 듯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것을 경계하는 것이 의미가 있다고 믿고 싶은 것이다.

 

그런 경계를 위해 나는 ‘조종-히키코모리질’에서 멀어질 수 있는 팁 두 가지를 생각해 보았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하나는 전략에 대해 말할 때라도 되도록 일반론으로 가져가 비평을 하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문제이든 추상적인 문제로 전환하여, 혹은 추상적인 문제에서 시작하여 비평을 한다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이를테면 우리는 원칙에 대해 얘기할 때라도 일반적인 원칙과 구체적인 상황에 대해 적용되는 각각의 하위원칙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일반론으로 말한다는 것은 이 사건을 하나의 독특하게 구별되는 비상한 사건으로 가져가서 이것에만 해당하는 어떤 천재적인 책략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과 비슷한 사건의 다발들이 생겨났을 때는 대략 통용되는 원칙이나 전략을 얘기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한 사건에 대해 비상한 가치를 부여하고 새로운 전략을 논할 때에 나는 주로 경계하는 쪽에 서게 되겠지만, 그렇다고 그런 행위가 언제나 틀린 것은 아니다. 대개의 경우 어떤 이의 평론을 문제삼으려면 하나의 사건만을 봐서는 안 되고 긴 호흡으로 맥락을 살펴야 한다. 그가 비상한 사건에 대한 비상한 전략을 말했지만 그 후의 맥락에서 볼 때 큰 틀 안에 포섭되는 것이라면 단지 ‘조종-히키코모리질’이라고 비난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른 하나는 만약에 참신한 전략(혹은 정책) 대안을 제시했다면, 그것을 꾸준히 미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어떤 사안에 대해 어떤 참신한 전략이랍시고 누군가 얘기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것들은 될 것 같기도 하고 안 될 것 같기도 한 그런 것들이다. 그런데 그런 이가 다음에 비슷한 상황을 맞이했을 때, 혹은 그의 지난번 대안이 필요한 상황이 생겼을 때, 전혀 다른 참신한 소리를 하거나 그 상황 자체를 흘려보내는 일이 일상다반사다. 이래서야 그가 매번 아무리 써먹을 수도 있을 것 같고 아닌 것도 같은 참신한 소리를 한다 할지라도 그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기는 힘들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와 같은 기준들을 매우 손쉽게 ‘비평의 진정성’이란 단어로 설명할 수 있다고 여길 게다. 분명 그런 면이 있다. 하지만 나는 ‘진정성’이란 단어를 매우 기피하는데, 그 이유는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해줄 맥락이 없는 상황에서도 그 단어가 갑툭튀 나오곤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위에 적은 나의 약소한 기준들은 진정성이란 단어를 회피하거나 재서술하려는 것이다. 즉 그 단어가 두루뭉술하게 구술하면서 감추고 있는 기준들을 끄집어내어 조잡하게나마 제시하거나, 그런 제시를 통해 그 단어의 정의를 새롭게 하려고 한다.  


ㄹㄹㄼ

2009.02.04 05:39:22
*.35.29.98

뭐 두 가지 예외는 있겠죠.


1. 내가 국회의원들보다 스펙이 좋다.
2. 특정 분야에 전문성이 있다.

이런 경우에는 책사질 해도 됩니다만

나머지는 그저 정치 오타쿠의 오덕질일뿐. 미연시 보고 딸치는 오덕이랑 다를게 없다
능. 국회의원 나리들이 인터넷 정치 오덕후 찌그러기보다 멍청해서 저러고들 있겠어
요? 낄낄

아 이건 말씀하신 대로 어떤 일반론적인 차원의 의견제시가 아닌 말 그대로 지가 무슨 정치 컨설턴트라도 되는양 주워섬기는 책사질을 말하는 것임. 전자는 시민으로서 당연히 할수 있는거죠.

하뉴녕

2009.02.04 10:23:54
*.108.31.38

그런 의미로 쓰신 덧글이 아니라는 사실은 알고 있습니다만 그렇다고 책사질을 너무 쉽게 비웃어 버리면 관료주의에 너무 쉽게 투항해 버리는 결과를 초래할 것 같긴 합니다. 이나저나 균형을 잡아야 하는데 물론 그게 쉽지는 않습니다... 거의 '입스타' 수준이죠. ^^;;

눈팅족

2009.02.04 16:52:01
*.98.176.175

그래도 해설가와 훌리건들이 없으면 게임(?)이 재미없지 않나염 -_-;; 그리고 윤형님 강호순 얼굴 공개에 대해서는 어떤 입장인지 궁금하네염

하뉴녕

2009.02.04 22:08:32
*.108.31.38

뭐 완전히 없애자는 것도 아니고 사실 그럴 수도 없으니까요. ㅎㅎ

기본적으로 얼굴 공개는 절대 안돼!! 정도의 인권적 신념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1) 제 취향으로 그의 얼굴을 보기가 싫고 2) 이 상황에서 '공익'이나 '알 권리'가 뭘 말하는지 모르겠고 3) 조선 중앙 등이 해외에서도 그렇다면서 자신들의 행위를 강변하는 것은 마음에 안 들더군요. 누구 말로는 그곳에서는 사법제도의 맥락이 달라서 그렇다는데 거기까진 잘 모르겠고...

닷오-르

2009.02.05 14:42:02
*.229.122.69

오오 프린켑스(??)

보존협회

2009.05.20 20:12:45
*.216.114.52

진정한 책사질이란 원칙과 트릭의 화합을 도모하는 것이외다.

"난 사실 세상을 지배하는 거임"이라는 히끼꼬모리 증후군에서 벗어나기 위한 독약 처방을 알려주리다. 생활비로 주식을 하면 되오. 주식을 사면 세상이 자신의 예측대로 된 적이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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