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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미유키 1-12>, 아다치 미츠루, 대원씨아이





그럼......
어쨌거나, 16년을 살아왔다-.
그만큼 산만큼 여러 에피소드가 있다-.
나가시마의 은퇴시합을 보지 못한 일......
어머니를 두 명이나 먼저 보낸 일......
아버지의 성적표를 발견하곤, 자신의 한계를 알게 된 일......
그리고......
주제에 남자라고-
여자애를 좋아하게 된 일......



이 아저씨 만화 은근히 오래됐다. 한국에서 그를 유명하게 만든 대표작 <H2>의 경우 90년대 말까지 연재가 진행중이었지만, 그의 출세작 <Touch>에서 고등학교 3학년인 우에스기 타츠야가 갑자원으로 진출하기 위한 마지막 경기에서 닛타 아키오에게 스트라이크를 꽂아넣는 순간은 (작품 속 시간으로) 아마도 1986년 혹은 87년의 여름-. 20년도 더 된 일이다. 그리고 나름대로 널리 알려진 <Rough>의 경우 이 두 작품의 사이에 있고, 심지어 저 <Touch>보다도 더 오래된 작품이 바로 이 <미유키>다. 일본에서는 1984년에 마지막 12권이 출판되었으니, <Touch>가 탄생하기 직전의 작품인 셈.



16세 소년의 독백으로 시작하는 이 작품은 지극히 아다치 미츠루적이면서도 그렇지 않다. 사실 이 만화에서 우리는 <Touch>의 맹아를 엿볼 수 있다. 두 번이나 진급을 못 해 퇴학당할 처지에 놓인 주인공의 친구 류이치가 진급시험에 합격하기 위해 머리 싸매고 필사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할 때 - 그가 퇴학당하지 않으려는 이유는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주인공의 ‘여동생 미유키’와 동급생인 상황을 유지하기 위해서다.- 주인공인 마사토는 이렇게 생각한다. “난 미유키를 위해서 저렇게 열심히 뭔가를 한적이 있었을까......” 그러나 곧 다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뭔가 틀려!!! 잘 생각해보니...... 저렇게 몰릴 때까지 아무것도 안 한 저 녀석이 나쁜 거야!!” 이 대사에서 우리는 <Touch>의 헤로인 아사쿠라 미나미가 주인공 우에스기 타츠야에 대해 내린 양면적인 평가를 떠올릴 수 있지 않은가? “괜찮아요. 궁지에 몰릴수록 힘을 내는 타입이니까요. (또 볼을 던지자) 궁지에 몰리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안 하는 타입이기도......” 한편 ‘여동생 미유키’가 불량배에게 맞고 쓰러진 마사토가 걱정되어 달려왔다가, ‘여자친구 미유키’를 먼저 생각하는 정신잃은 마사토의 중얼거림에 삐쳐서 ‘여자친구 미유키’의 손바닥을 손바닥으로 내려치면서 퇴장하는 장면은 이어달리기의 ‘바통 터치’를 의도한 것인데 이 장면이야말로 사실 <Touch>의 백미이면서 상징이기도 하다. 쌍둥이 형제가 역할을 바통 터치한다는게 <Touch>의 설정이고, 바로 1권에서 우에스기 타츠야는 우에스기 카즈야와 같은 방식으로 손바닥을 내려치는 장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지만 <Touch>와 포개지는 부분을 살펴보면 바로 이 부분이 <Touch>와 <미유키>의 차이점을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Touch>는 궁지에 몰린 재능은 있는 류이치가 미칠듯이 맹진하는 이야기이지만, <미유키>에서 그 에피소드는 주변부일 뿐이다. 사실 아다치 미츠루는 찌질한 소년을 밉살스럽지 않게 그려내는데 재능이 있는 작가다. 그의 소년만화에선 결코 강백호나 서태웅, 정대만과 같이 완결된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는 쿨가이들이 등장하지 않는다. 소년은 언제나 소녀의 눈치를 본다. 심지어 가장 소년만화의 스타에 가까운 <H2>의 히로와 히데오마저도, 히카리 문제만 나오면 초조해지는 것이다.



내가 월간 <판타스틱> 8월호에 SF 소설 <마일즈의 전쟁> 리뷰를 쓰면서 말한 바와 같이, 소년 로망의 도식은 소년이 소녀를 위해 무언가에 도전하고, 거기서 새로운 맥락을 경험하며 성장해나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도식은 필연적으로 모순에 빠지게 되는데, 왜냐하면 소년이 새로운 맥락을 구축해 나가면 나갈수록 그는 소녀의 영향력에서 멀어지기 때문이다. <슬램덩크>에서 시간이 지날수록 강백호는 채소연에게서 덜 구속받는다. 마지막 순간에 소연은 문자 너머에 (편지를 보내는 사람으로) 존재하지만, 라이벌인 서태웅은 바로 그의 눈앞에서 국가대표 티셔츠를 까발리며 그를 놀려댄다. 하지만 아다치 미츠루는 그렇게 멋진 남자를 만들어주려는 생각이 없고, 적절한 선에서 소녀에게 구속되는 소년들의 찌질함을 긍정한다. <H2>가 비교적 슬램덩크에 가깝다면, <Touch>는 훨씬 더 찌질한 평범한 소년의 이야기이고, <Rough>의 경우 그 사이에 해당한다. <Touch>의 타츠야의 경우 출발선의 찌질함에 비해 나중에 도달하는 경지가 꽤 높기 때문에 묘한 쾌감을 선사하게 된다.



<미유키>는 다른 방식으로 극단적이다. 말하자면, ‘이것은 소년만화가 아니다.’ 주인공 마사토는 피가 섞이지 않은 여동생 미유키와 여자친구 미유키 사이에서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이것은 근친물이라기보다는 양다리물인데, 왜냐하면 마사토와 여동생 미유키는 6년만에 재회했을 때 서로를 몰라보고 데이트 약속을 했을 정도로 호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오빠 동생 관계에 자신들을 편입시키고 몇 년을 살아왔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선입관(!)을 가지고 살펴보면 세 사람 사이는 애초에 삼각관계였고, 다만 마사토와 여동생 미유키가 그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고등학교를 대충 대충 다니고, 삼류대에 원서를 넣었다가 떨어져서 일년을 재수하고, 다시 그 삼류대에 합격해서 대학생이 될 동안 말이다. 작가는 만화 중간중간에 스포츠 소년들의 에피소드를 삽입하면서 “이것은 열혈 소년물입니다.”라고 농담한다. <미유키>는 본질적으로 소년만화의 패러디로, 가장 평범한 어떤 얼빠진 소년을 보여준다. 말하자면 이 만화는 <슬램덩크>의 대극에 놓여 있다.








여기서 우리는 바로 이 지점이 아다치 미츠루의 출발점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이 평범하고 얼빠진 마사토로부터 출발해서 다시 한번 소년 로망의 맥락을 구성하고 싶었던 것이고, 바로 그 결과물들이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스포츠 만화들인 것이다. 한편 <미유키>는 아다치 미츠루의 만화 중에서도 가장 구성의 짜임새에 신경쓰지 않은 만화라고 볼 수 있는데, 그 점이 또 하나의 장점이다. 가령 아다치 만화 중 가장 짜임새가 좋은 <Rough>의 경우는 바로 그렇기 때문에 더 짜증이 나는 구석이 있다. 찌질한 소년의 성장담을 이렇게 고전적인 구도로 바라보고 싶지는 않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물론 아다치를 충분히 좋아하는 상태에서 본다면 그것 역시 독특한 맛으로 즐길 수는 있지만) 그래도 <H2> 후반부의 히카리 어머니의 죽음과 같은 결말을 위한 장치로 <미유키>에서도 ‘여동생 미유키’를 좋아하는 소꿉친구 축구선수가 등장하긴 하는데, 이 순간까지도 우리의 마사토는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다. 그가 결단을 내리는 것은 단 하나, 프로포즈 뿐이다. 



그렇다고 마사토가 나쁜 아이인 것은 아니다. 그는 배배 꼬인 구석이 없다. 영화를 보다가 그의 트라우마인 어머니가 죽는 장면을 나오면, 그저 극장에서 펑펑 울어버린다. 해외에 계신 아버지가 비행기 사고가 났다고 오인했을 때, 그는 여동생 미유키를 껴안고 내가 어떻게든 일해서 대학에 보내줄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말한다. 나는 노력을 해본 적이 없잖아, 자문하지만, 굳이 죽어라 노력을 해야 할 상황이 오지 않기 때문에 그냥 넘어가 버리는 것뿐이다. 마사토의 세계는 평범하고 얼빠진 그가 미녀의 사랑을 받고도 각성할 필요가 별로 없는, 평화롭고 행복한 세계다. 일본 만화에서 청소년들이 취직걱정을 하는 일은 본 적이 없다. <상남2인조>의 양아치들은 고삐리 때 실수로 애를 낳을 지경이 되어도 “아, 이런, 내 청춘이 끝났군. 이젠 여자와 아이를 책임져야 하는 어른이니 열심히 일해서 잘 살아야겠어.”라고 생각하지 절망하지는 않는다. 그러니 어쨌든 대학은 갈 수 있을 정도인 마사토가 그렇게까지 긴장해야 할 필요는 없는 것일 테다.



저 인기있는 여성들이 마사토만을 좋아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작가 자신이 몇 가지 안배를 해놓긴 했다. 아다치의 세계에서 남자들은 예쁜 여자 하나만 쳐다보고 살지만, 여자들은 각각의 이상형을 가지고 있다. (나는 경제적 조건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현실 세계에서도 남자와 여자가 그렇게 될 거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그러니까 로또 맞은 행운처럼 예쁜 여자가 멍청한 자신을 좋아하게 될 수도 있는 거다. (아, 그러고보니 <사조영웅전>의 곽정-황용이 있었군!) 게다가 그의 세계에서 여성은 언제나 어릴 때 친하게 지냈던 남성의 미래 모습을 이상형으로 무의식의 구조에 박아버린다는 규칙을 준수하고 있으니, 얘기는 더욱 쉬워진다. 외모와 성적 모두 나무랄데 없는 켄지가 ‘여자친구 미유키’에게 접근했다가 성과를 못 얻는 에피소드는 꽤나 흥미롭다. 열등감을 느끼던 마사토는 깨달음을 얻고 평소처럼 자신감 있게 행동하여 상대방을 커트해 내면서 이렇게 중얼거린다. “비교하는 건 내가 아냐......” 



말하자면 <미유키>의 마사토는 ‘정상적인 사회’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정상적인 인간’이다. 이런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통해 아다치 미츠루의 소년만화는 탄생했다. <미유키>는 그 기원을 보여준다는 의미도 있지만, 한편으론 우리와 전혀 다른 현실적 조건에서 탄생한 로망이라는 점에서 씁쓸함을 준다. 맹하고 얼빠진 인간들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사회가 좋은 사회일 테지만,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은 사적인 영역에선 지극히 영악해야 한다. 슈퍼맨과 알파걸을 요구하는 사회에서 <미유키>의 로망을 마음편히 즐길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이것이 없이는 그의 만화가 성립하지 않음을 통찰했다 하더라도, 여전히 내가 가장 사랑하는 아다치 미츠루의 명작은 우에스기 타츠야의 <Touch>인 것.
 


samma

2008.01.04 09:30:40
*.72.108.238

동감입니다. 아다치의 여러 작품들 중 최고봉은 역시 Touch 죠!
좋은 글 잘 보았습니다.

엠의세계

2008.01.04 11:03:06
*.50.202.198

한결같은 그림체.....어째보면 구닥다리지만 지금봐도 나쁘지 않다는 느낌입니다.^^

tetris

2008.01.04 11:09:55
*.254.22.33

좋은 그 잘 봤습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라서 글 보면서도 즐거웠네요^^

Mr.Met

2008.01.04 11:42:00
*.190.32.66

그렇게 유명한 작가인데 전 아직도 이분 작품 제대로 본게 없네요.
h2를 꼭 봐야지 봐야지 하면서도 아직..

서쪽하늘

2008.01.04 14:45:34
*.200.67.93

여고 교사이자 동시에 오타쿠인 한 선배형은 '미유키'가 아다치 미츠루의 최고 작품이라 평하더군요.

이안

2008.01.04 16:32:17
*.104.151.2

제가 너무 좋아하는 작가에 관한 글이라 신나게 읽었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하뉴녕

2008.01.04 16:51:20
*.176.49.134

헛... 제가 군대갔을 땐 이미 84년생 이하들은 아다치 미츠루가 누구인지 모르던데....ㅡ.,ㅡ;;
반응을 해주시는 분들이 많으니 반갑군요. ㅋㅋㅋ

서쪽하늘

2008.01.04 18:20:56
*.200.67.93

아니... 요즘 대학생들은 아다치 미츠루를 모른단 말입니까??? 그들은 대체 무엇으로 심성을 달랜단 말입니까...^^

17茶

2008.01.04 18:58:30
*.121.47.48

저도 아다치 작품 중 제일 좋아하는 것이 터치입니다. 두번째가 러프. H2가 개인적인 순위권에선 좀 낮아요. *^^*

홍선생

2008.01.04 19:41:08
*.254.38.90

아다치 미츠루 만화, 너무 구하기 어려워서 못본 것들이 꽤 있어요. 미유키도 그 중 하나...-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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