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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어긋난 짝사랑’의 판타지

조회 수 1209 추천 수 0 2007.09.04 08:58:39
 

이제 막바지로 치닫는 주말 드라마 <9회말 2아웃>은 태어나면서부터 소꿉친구였던 서른살 두 남녀가 사랑을 키워가는 이야기다. 이 드라마에서 남주와 여주는 약간 시간이 어긋나서 서로 짝사랑을 했던 경험이 있다. 홍난희(수애)는 변형태(이정진)를 고등학교 때 좋아했으나 자신이 없어서 대시를 못했고, 변형태는 군대 갔을 때 난희에게 프로포즈하려 했으나 마침 난희에게 다른 남자가 생겨 뜻을 이루지 못했다.


대충 남녀 사이에 스파크가 발생하는 상황을 1) 만나자마자 스파크 2) 만나서 좀 지지고 볶다가 스파크 3) 그냥 일반적인 관계였는데 어쩌다 스파크 로 구별할 수 있다면 이 “어긋난 짝사랑의 판타지”는 3)의 상황을 설명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어쨌든 둘다 한번씩은 서로를 좋아했기 때문에 이번에는 동시에 서로 좋아하기만 하면 된다. 맺어주지는 않지만 아다치 미츠루의 만화 <H2>에서 히로와 히까리가 처한 상황도 대략 그렇다.


이런 일이 실제로 있을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객관적인 입장에서 두 사람이 그런 상황에 처해 있음을 ‘체험’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만에 하나 연애를 주관하는 신의 입장에서 그런 어긋남이 눈에 보인다 해도, 두 사람은 그런 상황을 모르고 살아갈 것이다. 두 사람이 그 사실을 알아내려면 서로 간에 (혹은 서로의 친구들에게) 굉장히 폭넓은 상황을 조사하고 말을 맞춰 봐야 하는데, 이런 어처구니없는 짓을 심심해서 할 정도가 되면 둘 다 서로에게 이성으로서의 관심은 떨어졌다고 보는 게 맞다. 옛날에 한번 좋아했다고 또 좋아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남녀관계라는 것은.


그렇다면 두 사람이 ‘어긋난 짝사랑’을 ‘체험’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다시 한번 두 사람이 사랑에 빠져서 연애를 하고 과거를 속삭이다가 그것을 발견해 내는 것일 테다. 하지만 이 때 발견해낸 것이 과연 ‘사실’일까? 사랑의 밀어를 속삭일 때 우리는 얼마나 많은 ‘거짓말’을 하는가. 거짓말까진 아니더라도 조선일보 수준의 허위, 과장, 왜곡보도가 있을 것이다. 게다가 상대방의 리액션이 없는 (그러니까 객관적인 산출물이 없는) ‘짝사랑’이란 감정은 정의하기가 무척 애매하여 도대체 어느 정도의 두근거림부터 짝사랑이라 불러야 하는지 난감하기만 하다. 베갯머리에서 훌쩍훌쩍 울어보는 정도면 충분할까? 사춘기엔 굳이 짝사랑 안 해도 울 때가 있다. 따라서 냉철한 지성의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면, 이 연인이 발견해 냈다는 ‘어긋난 짝사랑’에 대해 “믿기 힘든데.”라고 중얼거릴 수밖에 없는 거다.


그렇기는 해도 내게도 대중문화 텍스트에서 발견한 꽤 그럴듯한 ‘어긋난 짝사랑’이 있었는데, 그건 <배틀로얄>의 치구사 다카코와 스기무라 히로키였다. 영화에서 치구사 다카코는 <킬빌1>에 여고생 고고 유바리로 출연했던 쿠리야마 치아키가 연기했다. 그녀는 소설에 비추어 생각해도 이미지가 잘 어울린다.


다카코는 자신을 겁탈하려던 남자 하나를 죽이고 부상을 입은 상태에서 소마 미츠코(낫들고 설치는 여자 불량배들의 수장)에게 총을 맞아 죽는데, 죽기 직전에 히로키는 다카코를 찾아낸다. 히로키는 소꿉친구인 다카코와 자신이 좋아하지만 고백하지 못한 다른 여자 하나를 찾아서 ‘배틀로얄’의 전장을 헤매는 로맨티스트다. 죽어가는 다카코를 발견하고 임종을 함께 하지만, 좋아하는 여자를 찾아냈을 때는 겁에 질린 그녀에게 총을 맞고 죽어버리는 역할이다.


치구사 다카코가 죽어가는 순간에 대한 묘사는 (원작)소설과 만화와 영화의 묘사가 조금씩 다른데,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소설의 판본이다. 만화와 영화에서는, 다카코가 히로키를 ‘명백하게’ 좋아했다고 묘사한다. 하지만 사실 소설에서는 그렇지 않다. 다카코는 소꿉친구 히로키를 좋아했지만, 그 히로키는 다른 여자를 좋아했대더라,는 식의 단순한 문제는 아닌 것이다.



(...)장면이 또 바뀌어 중학교 2학년 때 같은 반이 되어, 그 첫날에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히로키가 물었다 .

“야, 육상부 선배 가운데 무지 멋있는 남자 선배가 있다면서?”


의외로, 그 선배를 좋아하는구나, 라는 의미가 들어있었다.


“누구한테 들었어?”


“뭐, 그냥. 잘 돼가?”


“전혀. 그 선배는 애인이 있는걸. 넌 걸프랜드 아직 없어?”


“쳇, 그만 둬.”


우리는 항상 서로 엇갈렸다. 서로 약간은 좋아했을지도 모르는데. 그건 잘못된 생각일까? 적어도 나는 약간이지만, 네가 좋았어. 그건 그 선배를 좋아했던 것과는 또 다른 이야기야. 이해해 줄 수 있겠니?


현재의 히로키의 얼굴이 떠올랐다. 울고 있었다.


“다카코, 죽지 마.”


뭐야. 너. 남자답지 못하게. 울지 마. 덩치는 커다란 녀석이 조금도 나아진 게 없네.


신의 장난이라고나 할까, 다카코는 꼭 한번 더 정신이 들었다. 멍한 눈을 떴다.


오후의 따스한 햇살 속에 스기무라 히로키가 자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기서는 사춘기의 “어긋난 짝사랑의 판타지”의 딜레마가 모두 적혀 있으면서도, 그 판타지가 실현되고 있다. 판타지는 다카코의 상상의 영역에서 내려온다. 히로키의 회상씬이 나오지는 않는다는데 꽤 매력적이다.




(...)그 자세로 있다가, 치구사 다카코는 약 2분 뒤에 숨을 거두었다. 스기무라 히로키는 생명을 잃고 온몸을 중력에 맞긴 채 축 늘어진 다카코의 몸을 끌어안고 한동안 울었다.(...)




다카코가 히로키의 품안에서 죽어가는 그 장면을 나는 매우 좋아했다. <배틀로얄> 전체에서 가장 서정적인 장면이다. 처음 봤을 때는 아마 울었던 것 같다.          


메리

2007.09.04 11:13:53
*.111.244.169

"비밀글입니다."

:

안나괭이

2007.09.05 17:57:48
*.53.218.163

흠- 이런 상황은 어때요?
사람이란 뭔가 감이 있잖아요-
상대방이 자기를 좋아하는거 같은거에요. 사실 이건 착각일 수도 있지만, 결정적으로 그 사람에게 고백을 받게 된다는 거죠.
하지만 자신은 감정이 없어서 거절했는데, 뭐 이리 감정이란건 제멋대로 인지, 거절하고 그쪽도 이제 나에게 관심없어진 상황에서 자신이 그 사람에게 빠져버리는...
어긋난 짝사랑 이라니까 생각난 일종의 과거랄까...-_-;;;

하뉴녕

2007.09.05 18:33:56
*.46.33.165

엄...;;

그건 어긋난 짝사랑이 맞구나.

이 글에서 논한 건 그러니까 '고백'까지 가지 못한, 그래서 '감'으로만 확인(?)가능한 그런 '짝사랑'이라서 말야.

으흐흐 그 상황은 정말이지 ㅎㄷㄷㄷㄷ ;;;

vv

2013.02.18 09:38:44
*.204.137.85

좀 뜬금포지만 그렇게 되는 사람은 대체로 여성일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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