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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 님의 세 개의 트랙백에 대한 답변

조회 수 5422 추천 수 0 2011.05.07 16:49:18

2011/04/15 - [정치/메타-비평] - 개혁, 혹은 고통의 평등주의

최원 / Wag the dog?

최원 / 신자유주의 베틀로얄 

최원 / 봉기와 정의: 한윤형씨에게 주는 마지막 글



원래 바빠서 답변을 못 하고 있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바빠서 미칠 것 같은 시국에 답을 하게 되었다. 인생이 다 그렇지 뭐....


최원 님의 비평의 문제는 1) 내가 하지 않은 얘기를 했다고 이해하는 것과 2) 내가 무슨 문제를 제기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서 나온다. (양자는 좀 다른데, 여하간 최원 님은 두 가지 문제를 다 가지고 있다.) 


먼저 최원 님은 첫번째 글에서 "좌파의 평등주의를 고통의 평등주의라는 말장난을 통해 서남표의 신자유주의적 경쟁논리와 같다고 등치시키는 것은 기껏해야 좌파에 대한 현학적 우롱에 불과하다."라고 말씀하시는데 나는 '좌파의 평등주의'에 대한 평가를 한 바가 없다. 대신 나는 이렇게 얘기했다. "좌파들이 개혁이라고 부르는 작업도 '고통의 평등주의'라는 심성에 의해 옹호되는 일이 많다면(...)" 한 정책이 어떤 근거에서 나왔는지와 그 정책이 어떤 심성에 의해 지지받는지는 다른 문제가 아닌가? 굳이 최원 님의 어법을 활용해 정리한다면, 나는 좌파들에게 '고통의 평등주의'와 구별되는 자신들의 평등주의를 설득해내지 못한다면 개혁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 사람들에게 뒷통수를 맞을 수 있다고 조언하고 있는 거다. '계급적 적대감'은 좌파정책 뿐만 아니라 신자유주의 개혁을 지지할 수도 있는 정서라고 말하고 있는 거다. 그러므로 내가 (좌파의)'평등주의'라는 전제를 흔들고 있다는 최원 님의 주장은 내가 하지 않은 얘기에 대해 단죄를 하는 꼴이 된다. 


또 이어서 최원 님은 "어쨌든 서남표식 '개혁'의 신자유주의적 본질에 대해 비판하는 평등주의는 한윤형 씨가 규정하는 바의 "고통의 평등주의"와는 별 상관이 없어 보인다."라고 말씀하시는데, 이것은 내가 무슨 문제를 제기하는지 이해하지 못한 상황에 해당한다. 나는 서남표 개혁에 대한 비판들을 예시로 들었는데, 그것들이 '평등주의'에서 나왔다고 규정한 적도 없고 그게 '고통의 평등주의'와 상관이 있다고 얘기한 적도 없다. 최원 님은 자신의 머리속에 신자유주의와 평등주의라는 대립각을 세워놓고, 서남표를 옹호하는 이는 신자유주의, 비판하는 이는 평등주의의 옹호자로 설정하며, 내가 서남표에 대한 비판이 먹히지 않는 이유를 설명했다는 이유로 평등주의라는 전제를 흐트렸다고 비판한다.  
 

그런데 내 얘기는 처음부터, 그런 도식이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고 말하는 거다. 사람들이 ‘신자유주의적 개혁’을 지지하는 이유가(사실 ‘지지’란 말은 적절하지 않다. 사람들은 그것을 적극적으로 지지한 적은 없으니까 말이다. 아마도 ‘피할 수 없는 현실의 구조로 승인하는 이유’란 표현이 더 적절할 것이다.) 어떤 종류의 ‘평등주의’에서 나온 것일 수 있다는 게 내 글의 전제가 되는 착상이다. 최원 님이 보기엔 이 착상이 별로 사실에 근접하지 않고, 사람들은 서남표의 개혁 따위 지지하지 않고 평등하게 사는 세상을 바란다고 말한다면 그건 또 그거대로 말이 된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이 착상이 ‘좌파의 평등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아니다.


만일 내 착상이 올바르다면, ‘좌파의 평등주의’를 믿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과제를 짊어지게 된다. 첫째, ‘좌파 정책’을 옹호하지 않는 ‘그 사람들의 평등주의’에 맞서 ‘좌파의 평등주의’를 어떻게 설득해낼 것인가? 둘째, 만일 ‘그 사람들의 평등주의’가 좌파 정책을 옹호하고 있을 때, 그 옹호자들에게 어떻게 또 다른 ‘좌파의 평등주의’를 설득해낼 것인가? 나는 좌파들이 첫째 과제를 인지도 못하고 있기 때문에 두 번째 과제 상황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그 결과 자신들의 정책을 지지하던 바로 그 사람들이 신자유주의 개혁 역시 지지하게 되는 그 상황에 대해 무력하다고 느낀다. 물론 내 판단이 틀린 것일 수는 있다. ‘고통의 평등주의’라는 착상과 전제가 단지 내 뇌내망상에 불과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이러한 문제제기가 ‘좌파의 평등주의’를 비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점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상 최원 님이 나와 말을 나눈다고 해도 얘기가 진전될 수는 없을 것 같다.  


나는 내 착상을 부연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설명을 덧붙였다.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어째서 "약자는 죽어도 되고 살아남은 유능한 강자가 사회를 이끌어난다."는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를 그 이데올로기가 곧이 곧대로 실행된다면 죽을 처지에 있는 약자들이 수용하게 되는가. 왜 신자유주의의 교리에 의하면 죽어 마땅한 사람들이 그 논리를 내재화하고 진보주의자들의 비평에 코방귀도 뀌지 않게 되는가? 핵심은 그 사람들 중 다수는, 진짜로 죽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가 아무리 베틀로얄의 이미지로 경쟁을 정당화한다고 해도 현실세계에서 베틀로얄이 벌어지지는 않는다. 인간 사회에서 경쟁에서의 낙오가 곧바로 물리적인 죽음으로 이어지는 일은 드물기 때문이다. 경쟁에서의 성공과 패배는 "죽일놈은 죽고 강하게 키워진 살놈만 살려서 과실을 따먹는다."는 다윈주의적(?) 슬로건으로 치장되어 있기는 하지만, 사람들은 여기서의 '죽음'이 그저 경제적 실패와 빈곤을 의미한다는 것을 다 알고 있다.실제로 약자를 모두 죽여버리는 체제라면 약자들도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또한 그 체제가 존속해서 부르주아들만 살아남게 된다면 부르주아들 역시 편할 리가 없다. 착취할 이들이 사라지면 그때부턴 자기들끼리 착취자-피착취자를 결정하는 싸움을 시작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죽음의 공포를 느끼고 살기는 하지만, 어차피 죽는 사람은 소수라는 걸 본능적으로 잘 이해하고 있다. 그래서 자신이 죽는 사람이 되지 않도록 노력하고, 그 가능성을 회피하기 위해 죽은 사람들을 도덕적으로 비난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남은 '약자'들이 '신자유주의적 개혁'을 지지하는 의식구조를 바로 '고통의 평등주의'라고 표현할 수 있다. 약자들을 모두 죽이지는 않지만, 그들의 일부를 죽이면서 내면화되는 그 가치가, 자신의 위에 있는 강자들, 특히 자신의 눈에 바로 보이는 바로 위에 있는 강자들에게도 보편적으로 실현되기를 원하는 것이다.



이것은 애초에 본문에 있었던 말은 아니지만, 최원 님의 첫 번째 글에 답글로 단 후 본문에 편집해서 삽입한 부분이다. 그런데 최원 님은 이 글을 본 후 신자유주의화가 진행된 후 자살률이 높아졌다는 통계를 가져왔다. 내 주장이 신자유주의화와 자살률의 증가가 상관이 없다는 것인가? 만일 내가 그런 입장이었다면, “왜 사람들은 서남표를 지지하거나 용인하는가?”란 질문을 던질 필요가 없었을 거다. 신자유주의와 자살률 증가가 상관없다고 믿는다면 카이스트의 자살한 학생들에 대한 서남표의 책임도 사라지는데, 뭐 하러 할 일 없이 저런 질문을 던진단 말인가? 철학자들은 제 전공분야가 아니라는 이유로, 일반인들이 사회학의 기본적인 상식에 무지할 거라는 가정을 하는 것 같다. 다행히도 그건 내 경우엔 사실이 아니다. 


한국의 자살률 중에 정말 판타스틱한 부분은 의외로 노년층 자살률인데, 75세 이상의 경우 인구 10만 명당 무려 160명이 자살한다. OECD 국가 중 해당 부문 2위가 헝가리인데, 그래봤자 36명 밖에 안 된다. 55세에서 64세 연령층의 자살률인 42.7명도 2008년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 파병되어 전쟁을 수행 중인 현역 미군 전사율과 자살율을 합한 숫자(39명 정도로 추산됨)보다도 우위다. 한국에서 노년을 난다는 것은 통계적으로 볼 때 미군이 되어 전쟁을 수행하는 것보다도 힘든 과업이다. 그러나 이렇게 상황이 악화된 경우라도 살아남은 사람들이 다수란 사실엔 변함이 없다. 그냥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독기를 품고 살아남을 게다. 그렇게 살아남은 사람들이 어째서 신자유주의 개혁을 지지하거나 용인하는지 질문을 던지고 있었던 게 아닌가?  


최원 님은 이어지는 세 번째 글에서 정치에서 ‘정의’의 차원과 ‘평등’의 차원을 구별하고, 양자가 모두 필요한 것인데 내가 전자만 강조하고 후자를 부당하게 비난하고 삭제하려 한다는 견해를 제시한다. 그는 내가 오래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justice)의 정의(definition)인 "각자가 가져야할 합당한 몫"이란 말을 쓴다는 이유로, 자신이 무리한 추정을 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진실은 훨씬 더 단순한데, 나는 애초에 아리스토텔레스의 규정을 의식하고 가져다 쓴 거다. 왜냐하면 저 규정은 구체적 답변을 회피하기에 유용한 추상적 규정이기 때문이다.


징벌적 등록금제를 폐지하자는 얘기가, 혹은 대학생들의 등록금을 낮추자는 정도의 얘기가 무슨 엄청난 ‘좌파의 평등주의’를 필요로 하는 일이라 보이지는 않는다. 수많은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 그러한 주장을 할 수 있다. 나는 징벌적 등록금제를 폐지해야 하는 그 수많은 근거들 중 하나에 동의한다기 보다는, 징벌적 등록금제를 폐지해야 한다는 사실에 대해 동의한다. 그러면서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남표를 비판하는 주장들이 대중들의 폭넓은 동의를 얻지 못하고 이렇게나 무력한 이유에 대해서 논하고 있었다. 이 사태에 ‘평등’을 들이밀지 않고 ‘정의’를 들이밀어야 한다 말한 것이 아니라, 그 모든 접근들이 무력한 이유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왜 그 국면에서 쓸데없이 ‘좌파의 평등주의’를 비판해야 한단 말인가?


이를테면 ‘각자가 가져야 할 합당한 몫’이란 추상적 규정은 구체적인 문제해결의 영역으로 들어가면 “그 합당한 몫이 얼마나 되는데?”라는 질문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문제의 핵심은 ‘평등주의’ 역시 그러한 질문을 받는다는/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도대체 뭐가 평등한 상태인데?” 부자와 빈자가 학교에서 똑같이 공짜밥을 먹는게 평등인가? 아니면 부자는 돈 많으니까 돈 내고 먹고, 빈자는 돈 없으니까 돈 안 내고 먹는 게 평등인가? 부자와 빈자가 세금을 똑같이 내는 게 평등인가? 혹은 소득별로 세금을 다르게 내는 누진세가 평등인가?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받는 게 평등인가? 아니면 모든 노동에 대해 시간별 동일임금을 받는 게 평등인가? 그것도 아니면 처자식이 많아서 쓸 일이 많은 사람이 더 가져가는 것이 평등인가? 


‘평등’에도 참으로 많은 용법이 있다. 그래서 나는 최원 님이 “그가 ‘좌파의 평등주의’를 공격했다!”고 외칠 때, “그래서 제가 ‘무슨 평등주의’를 비판했단 말인가요?”라고 되묻고 싶다. 요즘 한국에서 좌파라고 칭하는 사람들은 공짜밥의 문제에선 전자가, 세금의 문제에선 후자가 ‘평등’이라고 답할 게다. 그 뒤의 문제들에 대해선 또 생각이 제각각일 테지만. 그런데 내가 말하는 것은 이런 ‘평등’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있으며, 그러한 ‘다른 평등’관이 ‘신자유주의적 개혁’을 지지하거나 민주화 세력이나 좌파들의 개혁을 지지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한편으론 '양심적 병역거부'를 찬성하는 사람들이 남성들을 평등하게 대우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한국 사회의 보수주의를 지탱하는 그런 평등주의도 분명히 존재한다. '고통의 평등주의'란 조어는 그런 것들을 가리키는 말이 될 수 있다.) 최원 님은 첫 번째 글에서 “오히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이 있다면, '좌파는 완전히 성과주의적 논리를 피해갈 수 있는가?'하는 문제일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 말인즉슨 그가 말하는 ‘좌파의 평등주의’란 전제도 입장에 따라 다른 모습을 취할 수 있다는 말일 게다. 


나는 그 몇 가지 종류의 ‘평등주의’나 우파들도 수용할 수 있는 복지국가 논리 중 딱히 무엇을 내 것으로 선택하지는 않은 사람이다. 내가 “합당한 몫”을 얘기하는 것은 그러므로, 그 “합당한 몫”이 바로 어떤 종류의 평등일 가능성도 열어두는 행위다. 굳이 입장을 정하지 않은 사람이 좌파들의 차원을 배제하고 도려내고 있다고 외치는 것보다는 다른 일을 하는 게 더 생산성이 있을 듯 싶다.


최원 님이 내가 ‘좌파의 평등주의’를 비판한다고 믿은 주요한 근거는 내 글의 내적 논리가 아니라 내 글의 일부분이 ‘어떤 좌파들’을 비판한 것에 기인한다. 


그런 일이 힘들다고 생각될 때, 하뉴녕이 쓴 횡설수설하는 문제제기를 따라가기가 버겁다고 생각될 때, 그래도 서남표를 비난하고 좌파이고 싶은 사람들이 택할 수 있는 손쉬운 태도가 있다. 이 세계가 정상이 아니고 미쳤다고 단언하는 것이다. 단지 카이스트의 특정한 제도만이 문제가 아니라 '경쟁'에서 승리하면 삶이 나아진다고 믿는 인간들의 마음이 문제라고 단칼에 재단하는 것이다. 조국이나 진중권과 같은 방식의 현실개입은 어차피 '경쟁' 이데올로기에서 근본적으로 분리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을 모두 사이비로 재단하고 귀를 막고 '경쟁에서 승리하려는 욕망을 억누르는 사회주의자의 심성'을 갈고 닦으면 언젠가 다른 세상이 올 거라고 믿는 것이다.



이들은 내 글의 다음 절에서 '영성좌파'로 호명되는데, 사실 이들에 대한 비판은 좌파 일반에 대한 비판도 아닐뿐더러 글의 대부분에 등장하는 ‘개혁’ 노선과도 거리가 있다. 나는 김대중 노무현 정부가 실시하고 좌파들이 옹호한 어떤 개혁정책이 저 ‘고통의 평등주의’의 지지를 받아 실행되었을 거라고 추측하였다. 이를 두고 최원 님은 “좌파의 평등주의를 고통의 평등주의라는 말장난을 통해 서남표의 신자유주의적 경쟁논리와 같다고 등치시키는 것”이라 보았고 “기껏해야 좌파에 대한 현학적 우롱에 불과”하다 평했다. 등치시킨 적도 없지만 여하튼 내가 ‘고통의 평등주의’와 연관지은 것은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개혁정책이고 이에 대한 진중권의 옹호방식 등이었다. 김규항 류에 대한 비판은 이와 또 별개의 사태다. 전혀 별개의 문제를 엮어놓고 내가 좌파를 우롱하고 좌파의 평등주의를 신자유주의와 등치시켰다고 화를 내면 어떡하나? “님이 비판하는 ‘영성좌파’란게 대체 뭡니까? 일반적인 좌파들을 다 칭하는 겁니까? 그게 아니라면 어떤 사람들을 칭하는 겁니까?”라고 물어봤으면 오죽 좋았을까. 그렇게 물을 필요를 못 느꼈다면 '좌파' 딱지가 붙어 있는 사람은 어떻게 행동하든 ‘비판’하면 안 된다는 것인지. 


마지막으로 지적하고 싶은 것이 있다. 


한윤형 씨가 결론에서 대립시킨 공리주의("쾌락을 늘리고 고통을 줄여야 한다")와 니체의 경구("날 죽이지 않는 고통은 나를 강하게 만든다")는 서로 공명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평등주의에 의해 교정되지 않은 공리주의는 쾌락의 총량만을 고민하기 때문에, 희생자가 얼마나 많이 나오든 간에 극단적 경쟁은 쾌락의 총량을 최대한 증가시킬 수 있는 한 정당화될 수 있다는 입장을 취할 수 있으며, 이러한 맥락에서라면 니체가 (완전히는 아니라고 할지라도) 충분히 타협할 수 있는 여지가 생겨난다. 

다시 말해서, 니체의 말은 오직 그러한 경쟁의 고통을 견디어 살아남을 수 있는 소수의 '강한' 사람들만이 그 쾌락의 열매를 따먹을 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 해석될 수 있고, 그러한 한에서 공리주의와 손을 잡을 수 있게 된다. 니체가 (고통이든 쾌락이든) 평등주의 자체를  공격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오히려 니체는 고통의 평등주의를 '원한(ressentiment)의 정치'로 비판하지 않았던가?




인문학 담론이 한 가지 답을 가진 종류의 것은 아니니까 최원 님이 이렇게 생각할 ‘자유'를 존중하긴 하겠지만, 나는 이것이 ’일반적인‘ 관점이라고 믿기 힘들다. 니체가 ’고통의 평등주의‘를 보았다면 르상티망이라고 개탄하긴 했겠으나, 그런 식으로 따지면 니체는 공리주의에 대해서도 개탄했다. <우상의 황혼>을 보면 “인간은 행복을 얻으려고 애쓰지 않는다. 단지 영국인만이 그렇게 한다.”란 식으로 적혀 있다. 미국에서 학부생이 윤리학을 배울 때 흔히 교과서로 쓰는 레이첼스의 <도덕 철학의 기초>(James Rachels, "The Elements of Moral Philosophy")의 공리주의 파트를 보면, 바로 저 구절을 인용하면서 니체를 공리주의에 대립된 것으로 적고 있는 것으로 안다.  


니체가 이랬다 저랬다가 중요한 게 아니라 최원 님의 주장은 그 자체로도 이상하다. 우리가 편의상 공리주의에 대해 ‘쾌락의 총량’을 추구한다고 말하기는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총량은 쾌락만의 총량이 아니라 쾌락을 +로 보고 고통을 -로 보아 덧셈 뺄셈을 한 총량이다. 즉 사회 전체적으로 고통을 증대시켜 쾌락을 추구한다면, 늘어난 고통의 값에 비해 쾌락이 얼마나 증가했는지가 공리주의의 판단 기준이 된다. 이를테면 고통이 300 정도 증가했는데 쾌락이 50 밖에 증대가 안 되는 상황은 공리주의자가 볼 때 머저리 같은 상황이다. 


공리주의의 난점은 쾌락-고통 기제와 교환될 수 없는 ‘기본권’의 영역을 부정한다는 것이지, '평등주의'의 부정은 아니다. 공리주의는 인간의 평등함을 얘기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쾌락과 고통의 평등함을 얘기한다. 부자가 느끼는 쾌락과 빈자가 느끼는 쾌락을 구분하지 않는다. 쾌락과 고통을 셈하는 범위가 어디까지냐의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가장 보수적으로 봤을 때라도 사회를 구성하는 인간들은 포함하는게 보통이다. 그런데 약자의 죽음이 공리주의에서 무리없이 수긍할 일일까?


물론 약자가 고통없이 죽을 수 있다면, 그러니까 안락사에 의해 사망한다면 고려할 수도 있다. 가난한 사람이 살아봤자 고통이 쾌락보다 클 확률이 높으니 약먹고 죽어버리면 쾌락-고통 산수에서 더 이득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쾌락의 증대를 위한 극단적 경쟁’이란 걸 통해 구성원 전반에게 ‘고통’을 강요하며 쾌락을 산출한다면 그때는 얘기가 다르다. 이 과정에서 죽어나가는 약자는 무지막지하게 고통받다가 죽는 경우다. 이런 경우라면 덧셈과 뺄셈을 해보고 판단을 해야 공리주의다. 고통을 1000 증가시켰더라도 쾌락을 1100 증가시켰다면 정당화하겠지만, 쾌락이 충분히 늘어나지 않았다면 비판받을 일이다.


반면 니체는 고통의 총량에 신경쓰지 않고, 고통을 나쁜 것으로 보지도 않고, 고통이 고귀한 것을 산출해낼 수 있단 이유로 혹은 그것과 별개로 고통 그 자체를 긍정해 버리는데 이건 공리주의자들이 들으면 정신나간 얘기로 취급할 소리다. 


가령 <괴물>이 미국에서 극장 몇 개 개봉하여 ‘흑자’를 거두었고 <디 워>가 미국에서 와이드 릴리즈 개봉하여 엄청난 ‘적자’를 거두었다면, (이건 우리 세계의 ‘사실’인데) 장사꾼과 공리주의자는 <괴물>이 더 현명한 일을 했다고 말할 게다. (와이드 릴리즈를 통한 심빠들의 쾌감이 투자자들의 고통보다 더 큰 것이라는 특이한 견해는 편의상 빼고 생각하자.) 반면 한국 영화를 미국에서 와이드 릴리즈 개봉하는 것 자체가 추구할 만한 고귀한 일이란 전제조건이 깔린다면, (물론 니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 거다.) 니체 윤리학은 심형래의 행위를 긍정할 것이다. 니체가 한국 땅에 태어났다고 해서 한국 사회를 욕하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데, 어쨌든 비유라는 건 한계가 있을 수 있으니까 이 정도까지만 하자.


핵심은 공리주의와 니체주의를 대립시키는 맥락이란 것도 분명히 있다는 것이다. 적어도 공리주의는 사회 구성원 전반에게 "이 룰이 합당한가?"를 따져보도록 한다. 징벌적 등록금제가 공리주의적으로 타당한지 부당한지는 각자 생각을 해봐야 할 문제다. 공리주의라기보다 니체 윤리학을 보는 것 같다고 한탄한 건 고통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린 듯한 세태를 한탄하기 위해서다. 엄연히 있는 맥락을 부정하려는 최원 님의 태도는, ‘평등주의’를 좌파의 것으로 밀어놓고 ‘평등주의’가 아닌 너희들 우파들은 다 비슷비슷한 것들이라고 보려는 모종의 단순화의 산물인 것 같기도 하다.  앞서 말했다시피 공리주의가 '평등주의'가 부족한 사상인지도 의문이다. 여러 해석이 있을 수 있겠으나 기본적으로 공리주의는 평등주의가 아니라 기본권 보장에 취약한 이념이다.  


누차 강조하지만 내가 문제삼는 부분이 실제와 다를 수는 있다. 별로 심각한 문제로 보여지지 않는다면 지나치면 될 일이다. 하지만 비판하지 않는 것을 비판했다고 이해되는 것만은 피해야 하겠기에 이렇게 긴 글을 쓴다. 어찌됐든 내 글에 관심을 보여준 최원 님께 감사드리며, 권해주신 본인의 글은 조금 한가해지면 되도록 빨리 일독하겠다는 약속을 드린다. 아마 그 글이 내게 그렇게 큰 불편함을 주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좌파의 적대'를 견디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종류의 것을 견디지 못한다. 이 문제와 별개로 내가 언급한 '영성좌파'가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선 가까운 시일내에 따로 한 번 쓰도록 하겠다. 

음..

2011.05.08 00:32:33
*.214.245.225

제 3자로서 기다리던 답변이 올라왔군요... 언능 읽어봐야 것슴다.ㅎㅎ

notcool

2011.05.09 17:21:11
*.162.204.20

"공리주의는 인간의 평등함을 얘기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쾌락과 고통의 평등함을 얘기한다. 부자가 느끼는 쾌락과 빈자가 느끼는 쾌락을 구분하지 않는다. 쾌락과 고통을 셈하는 범위가 어디까지냐의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가장 보수적으로 봤을 때라도 사회를 구성하는 인간들은 포함하는게 보통이다. 그런데 약자의 죽음이 공리주의에서 무리없이 수긍할 일일까? "

"그러나 ‘쾌락의 증대를 위한 극단적 경쟁’이란 걸 통해 구성원 전반에게 ‘고통’을 강요하며 쾌락을 산출한다면 그때는 얘기가 다르다. 이 과정에서 죽어나가는 약자는 무지막지하게 고통받다가 죽는 경우다. 이런 경우라면 덧셈과 뺄셈을 해보고 판단을 해야 공리주의다. 고통을 1000 증가시켰더라도 쾌락을 1100 증가시켰다면 정당화하겠지만, 쾌락이 충분히 늘어나지 않았다면 비판받을 일이다."

한 가지는 공리주의에 있어서 부자가 느끼는 쾌락과 빈자가 느끼는 쾌락이 결과적으로 동등하지 않다는 겁니다. 부자/빈자의 구분이 공리주의의 절대적 구분이라는 뜻은 아니구요....이를테면 아직 여성이 선거권을 가지지 못했던 시절에는 어땠을까요? 공리주의는 선거권을 가진 사람들의 이익을 적극적으로 반영하게 됩니다. 이 말 뜻이 공리주의가 가진 자를 대변한다는 뜻과 동일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공리주의는 님이 말한 대로 계량가능한 쾌락만을 그 대상으로 한다는 것입니다. 일전에 님이 저랑 '공공성'과 '언론' 머 이런 문제 가지고, 이야기할 때 언론이 필터링의 기능을 한다고 말한 적이 있죠? 저도 동의했구요. 공리주의가 말하는 쾌락과 고통이 '계량 가능한 쾌락'을 지향한다는 뜻은 결국 이와 같은 배제, 편입의 논리를 통해 '필터링'된 주체만을 그 대상으로 삼는다는 뜻과 같고, 님이 그래서 공리주의가 기본권 개념에 취약하다고 하는 것이구요.

그렇다면, 저 징벌적 등록금 제도가 말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제가 보기에 징벌적 등록금 제도는 공리주의에 있어 쾌락의 총량 이전에 '필터링'이 선차적 문제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일화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는 겁니다. 님의 이야기와는 달리 필터링을 통해 배제된, 그러니까 징벌적 등록금제를 통해 배제된 자들의 고통은 '공리주의'적 쾌락-고통의 총량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아요. 그래서 공리주의입니다. 님은 부자/빈자, 강자/약자 라는 전혀, 공리주의적이지 않은 단어들을 통해 공리주의를 설명하려고 들고 있습니다. 배제된 자와 편입된 자, 결과적으로 몫 없는 자와 있는 자라는 공리주의적 대전제를 두드려 보지 않고는 공리주의가 설명될 리 없습니다....

님더러 사회주의자가 되라는 것은 아니구요...징벌적 등록금제가 공리주의적이라면, 무상급식도 공리주의적이에요. 징벌적 등록금제가 배제의 논리를, 무상급식이 편입의 범주를 확대했다는 차이를 가지는 것뿐입니다. 님이 일전에 뭐 공부방 아이들이 무상급식에 대해 뭐 부자들에게 밥준다고 불만이라더라...뭐 이런 이야기를 하던데.... 학교에 안다니는 이들은 그 편입의 대상이 못되잖아요? 님이 말하는 고통의 평등주의(?)라는 지점도 제가 보기엔 그냥 공리주의가 어디까지를 배제의 대상으로 삼느냐, 그 범주의 문제에 대한 것일 뿐아라는 거죠. 좀 아주 전에 제도적 복지 / 사후적 복지 문제에 대해 제가 님의 '안티조선운동사 리뷰'에 대해 썼던 것 기억하시나요? 제도적/ 사후적 복지가 보여주듯이, 공리주의의 범주를 어디까지 가져 가느냐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징벌적 등록금제에 대해 이 사회가 보여주는 무능은 저 제도적/사후적 복지의 차이, 공리주의의 범주가 왜 중요하냐, 에 대한 문제의식의 부재와 거의 같은 맥락에서 설명가능하다고 봅니다.

덧붙이면, 쾌락의 평등주의라는 용어나, 고통의 평등주의라는 용어는 저 '공리주의적 대전제' 안에서'만' 유효한 말인데, 평등주의라는 말만으로 머 좌파적 편향의 문제(?)을 불러내기에는 좀 무리인 것은 맞습니다. 일전에 최장집 아저씨/ 이상이 아저씨 이야기를 다룰 때 복지 문제에 난데없이 노동조합 문제를 이야기하는 건 복지 문제를 넘어서는 문제제기라는 말씀을 드렸듯이, 같은 말을 님에게...그렇습니다.

하뉴녕

2011.05.09 17:35:16
*.171.69.149

요즘 공리주의는 동물의 고통권 어쩌구 하는 얘기까지 하고 있는데....

당파성 논리(?)에 따라서 공리주의를 극단적으로 협소한 사상으로 만들어서 얻는게 뭔지 모르겠네요.

"너희 부르주아 논리는 보편성을 따를 수 없어!!! 왜냐하면 보편성이란게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지!!!!"

라고 말하는 것도 아니고...

자꾸 그런 식으로 말하면 최원 님이나 님이나 부르주아들에게 약자들의 죽음 따위 좌시해도 된다는 교훈을 주는 것과 뭐가 다른지 모르겠네요...저는 공리주의의 원래 논리에 비추어 봐도 이게 말이 안 될 수 있다는 아주 하나마나한 소리를 하고 있는 건데....

그게 심오한(?) 부르주아적 논변에 의하면 어찌나 당연하다는걸 애써 논증해야 할 이유는 또 뭔가요?

하뉴녕

2011.05.09 17:37:10
*.171.69.149

아니 공리주의가 이름이 사리주의가 아니라 공리주의고 그래서 기본적으로 한 집단을 대상으로 한다는데 거기다 대고 "그럴리가 없어!!! 사회주의 없이는 그렇게 되지 않아!!!" 라고 외치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답니까?!

공리주의가 기본권 개념에 취약하다고 말하는 건 그 문제와는 전혀 다른 겁니다. 개인이 자신의 기본권 침해에 동의하고 더 큰 쾌락(혹은 경제적 이익)을 누린다면, 그게 공리주의에서 정당화될 수 있기 때문에 나오는 말이라구요....쩝....;;;;

notcool

2011.05.09 19:04:26
*.162.204.20

기본권에 관한 이야기는 머 제 오해였네요. 아니 그런데 그럼 님이 말하는 공리주의가 코스모폴리탄이고, 우주적 휴머니즘과 뭐가 다른지 전 모르겠네요. '그..그거슨 진리!' 라고 외치고 있는 건 제가 아니라, 님입니다. 당파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는 건 제가 아니고 님이구요. 사회주의 없이는 그렇게 되지 않아, 라는 식의 말은 저는 위에 거의 전혀 한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공리주의적 지향이 무엇인지, 동의하지 않는다는 게 아니라, 그 대전제가 무엇인지 확인하는 게 중요하다, 는 정도로 이해하면 되지 않을까요? 제가 공리주의의 대전제를 굳이 한번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은, 저 징벌적 등록금제가 공리주의적 폐해를 드러내는 것이지, 공리주의적 지향을 배반하는 게 아니라는 거에요. 그래서, 범주의 문제가 중요하다는 거구요......정치꿘에서 무상급식이 좌파, 빨갱이 정책 떠드는 게 왜 말도 안되는 소린가요? ...비도 오고 저는 떡볶이에 튀김 먹으러 갑니다.

하뉴녕

2011.05.09 20:25:39
*.171.69.149

아니 님을 보면 답답한게 제가 한편의 글에 모든 맥락을 다 설명하도록 강제하고 있잖아요. 그런건 좀 직접 찾아보고 생각하세요. '당파성'의 옹호자는 보편성의 옹호자보다 훨씬 구체적이라야 합니다. 보편성을 옹호할 때야 그냥 자기 공리 말해놓고 그게 언제 어느 때든 통한다고 우길 수 있지만, 당파성은 그게 아니잖아요. 말로는 당파성 어쩌구 하면서 구체적인 권력관계의 변동에 무지하면 어떡합니까? 한국이 지금 부자들에게만 투표권 주는 사회에요? 여자들 투표권 안 줘요? 아니면 카이스트 대학생들이 미등록 이주노동자에요? 대체 뭔 소리를 하고 싶은 겁니까?!!


저는 공리주의 문제에 있어서, "쾌락-고통 산수를 셈하는 범위가 어디까지인가?"라는 문제를 물론 의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글에선 굳이 얘기하지 않았어요. 왜일까요? 징벌적 등록금제를 논함에 있어, 카이스트 학생들이 시민권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기 때문이지요. 심지어 그들은 "우리는 용산 사람들을 시민으로 대우하지 않았다."라고 '비유적'으로 말하는 경우에서처럼, '실제로는 시민권이 있지만 취약계층에 속하는' 사람들도 아닙니다! 가장 보수적으로 보아도, 그러니까 공리주의란 모델이 부르주아 정치철학자들에 의하여 고안되었을 때부터 '셈'에 들어가는 사람들의 사례였단 말이죠! 그 사람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데 제가 "어떤 사람들은 셈하지 않는 공리주의 모델의 한계"를 말하겠어요? 이건 사람들이 공리주의적으로도 생각을 안 하고 있다고 말해야죠! '공리주의에 대한 망각'인 것이죠! 아닌가요?


대전제를 구체적으로 확인하시라구요. 왜 당파성을 말하는 사람들이 도대체 구체적인 차원에서 그렇게 무능하며, 맨날 사실관계 확인도 안하고 얘기를 늘어놓았다가, 이 지점에서 성립할 얘기가 아니라고 하면 '당파성의 일반론, 대전제를 얘기했다!!"라고 도망가냐구요. 그게 얼마나 무능한 보편성 담론의 자세인가요?


어떤 상황에서라면 '징벌적 등록금제'가 공리주의적 폐해를 드러낼 수도 있어요! 왜냐하면 공리주의는 기본권을 존중하지 않고, 그 자체로는 '죽음'에 대한 별도의 패널티를 부여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카이스트 재학생들이 겪고 있는 고통보다 그 개혁이 가져올 성과가 크다고 모두 믿는다면, 그건 공리주의적 인식의 폐해를 드러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딱히 그렇게 말하지도 않습니다. 적어도 제가 얘기한 지점에서는,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더 큰 선을 산출시킬 거라는 확신에 대해 얘기한 것이 아니라 "걔들만 힘드냐?"라고 얘기했습니다. 그게 제 글의 전제가 아니었던가요?


본문에서 줄곧 얘기하듯, 그 전제는 뇌내망상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경우라도 제가 "이 사안은 공리주의로 설명되지 않는다."라고 말한 맥락은 명백하다는 거에요. 비판을 하려면 제 전제나 착상이 현실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해야지 공리주의 해석에 시비를 거는 건 자신들의 무지나 보여줄 따름지요. 근데 그 뻔한 무지를 '당파성'이란 마법의 단어를 섞어서 대충 커버칠 수 있다고 믿으니 짜증이 치미는 거지요. 제가 본문에서 말씀드렸잖아요. 공리주의만 해도 나름 사회에 대한 총체적인 인식이고 그 원칙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사회제도의 타당성에 대해 판단하도록 한다구요. 그런데 지금 우리는 그런 일을 거부한다구요. 그게 신자유주의가 가져온 파편화겠죠. 근데 그게 공리주의의 폐해를 보여주나요? 후우....


이게 "공리주의적 세계관이 범람한 세계에서 나타나는 공리주의에 대한 이탈"이란 식으로 비평하는 것도 물론 가능하겠지요! 그러나 그런 경우에도 '공리주의에 대한 이탈'이란 건 확실한 겁니다. 도대체 왜 ABC 얘기를 하는데 우기는지 모르겠어요...



P.S 무상급식 문제는 별도의 문제이므로 이 덧글에선 얘기하지 않습니다.

notcool

2011.05.09 22:34:51
*.162.204.20

이건 님과 제가 배틀넷에서 풀어야 할 문제가 아닌가, 싶네요...농담이고...

'계량 가능한 쾌락의 총량' 이게 공리주의적 대전제라구요....시민권, 이주노동자 이야기가 뭔 맥락인지 모르겠네요.

번번히 대화를 나눌 때마다, 폭발적으로(?) 대응을 하시니 난감하네요.

앞으로는 걍 가끔 눈팅이나 할께요.

하뉴녕

2011.05.09 22:56:23
*.171.69.149

필터링에서 배제되었다고 보여지는 이들에게 터진 사태가 아닌데 필터링을 논하는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말이었죠....'계량 가능한 쾌락의 총량'이란 건 맞는데 본문에서 말했듯 정확하게 말하면 '쾌락-고통의 총량'입니다...;;;

notcool

2011.05.12 00:49:27
*.162.204.20

1. (계량 가능한) 쾌락의 총량을 늘리자, 는 것이 제가 이해하는 공리주의입니다. 저는 저 (계량 가능한)이라는 말이 은폐되어 왔던 것이 공리주의라고 생각하는 한편, 최근 들어 공리주의는 저 '계량 가능한'이라는 말을 더 이상 은페하지 않고 노골화한다고 생각합니다. 근데 제가 생각하기에 공리주의가 다른 관점들과 가장 첨예하게 차이가 나는 부분은 '쾌락의 총량'이 아니라 바로 이 '계량 가능'이라는 은폐되고, 노골화된 부분이라는 것입니다.

2. 공리주의의 약점은 쾌락이나 행복이 계량가능하다고 믿는 경제주의 일원론이라는 데 있습니다. 아주 아주 손쉽게 한미 FTA의 예를 들어 봅시다. 자동차 수출 시장을 살리기 위해 농산물 시장을 거의 절멸시켜도 된다는 계산은 공리주의의 계량가능한 비용편익분석의 틀로 언제든지 합리적으로 보일 수 있는 판단입니다. 그러나 굳이 맑스가 이야기하지 않아도, 경제주의는 정치적 맥락을 고려하지 않는 이상 이데올로기입니다. 공리주의는 완전히 평균화되고 서열화된 인간, 더 쉽게 물화된 주체만을 대상으로 할 때에만 효율적으로 작동하는 것이죠. 때문에 공리주의는 주체에게 '물화에 대한 욕망'을 강제합니다. 공리주의의 틀 안에서 척도가 될 수 있는 인간은 '이미 호환가능한 주체'이구요, 또 '완전히 호환 가능한 주체'를 욕망하게 만듭니다. 수많은 자기계발서들이 가리키는 지점이 이곳일 것이고, 제가 필터링 어쩌구를 굳이 말한 것도 이 지점입니다.

3. 님이 말하는 고통의 평등주의는 '내가 고통스러우니까 니들도 고통스러워 보아라'라고 하는데, 먼저 '쾌락의 평등주의'의 틀로 해석해 봅시다. 징벌적 등록금을 내게 되는 학생들한테 '쾌락의 평등주의'에 휩싸인 주체들이 가지는 생각은 '너희들에게는 쾌락이 없으니, 우리는 너희를 더 이상 욕망하지 않겠다'고 하는 일종의 냉소일 겁니다. 이것이 더 적확한 표현일 겁니다. '쾌락의 평등주의'는 제가 이해하기로 너희들의 즐거움을 나도 누리겠다, 라는 뜻에 가깝지, 내가 즐거우니 너희도 즐겨라의 뜻과는 조금 거리가 먼 것이 아닌가요? 그러니까 님이 '고통의 평등주의'를 말하려면 '너희가 고통스러우니, 나도 고통하겠다'는 전복적 형태가 되어야지 내가 고통스러우니 너도 고통스러워봐, 라는 형태는 다른 명명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오류가 어디서 발생한 것일까요? 저는 님이 쾌락-고통의 산수를 말하면서도 그것이 ‘계량화된 척도’라는 기준을 일관되게 적용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니 공리주의에서 쾌락의 반대말은 손실 혹은 비용이지, 고통이 아닙니다. 님은 공리주의의 ‘쾌락-고통의 총량’이라는 모호한 기준을 통해 공리주의의 ‘계량가능한’이라는 전제에 무관심하거나, 무의식적으로 은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거에요. 근데 제가 말하는 이 ‘계량가능’이라는 전제는 제가 공리주의에 대해 아주 당파적이고 편향된 시각으로 만들어낸, 편협한 해석이 아니라, 거의 일반론 수준의 이야기 아닌가요?

4. 님은 징벌적 등록금제가 공리주의적 기준으로도 충족이 안되는 지점이 있다고 말하지만, 그냥 이건 공리주의가 정책에 개입할 때 생기는 아주 일반적인 현상이 아닐까요? 공리주의는 경제주의 일원론 아니, 환원론이지만, 또 그래서 아주 아주 빈번하게 정책과 정치와 법에 개입해온 것이 사실입니다. ‘정의’가 공동체적 가치 판단의 지위를 잃고 ‘쾌락-고통’이 아니라 ‘쾌락-비용’ 분석으로 대체되는 경우가 어디 한두 번인가요? 님이 말하는 고통의 평등주의야말로 이와 같은 현상의 가장 적절한 예가 아닐까요? 그렇다면, 징벌적 등록금제가 노골적인 공리주의라는 제 판단이 더 적확한 것이 아닐까요?

5. 모르겠습니다. 저는 정치평론이 구체적 정치 공학을 다뤄야 한다는 것이 훌륭한 직업 윤리라는 데 동의합니다. 거기까지 가지 않아도 글쓰기에 근본주의가 있다면, 아마도 무조건 구체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저는 정치평론이 설사 그곳에 가닿지 못하더라도 철학이 정치에 개입하고, 정치가 철학을 의심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앞으로는 그냥 성실한 독자로써 눈팅만 하렵니다. 님 말대로 저는 아직 스타1 밖에 못하는 올드스쿨에다가, 맨날 구체적 현실보다 그곳에 개입한 대전제만 두들기는 낡은 교양인이긴 합니다….

하뉴녕

2011.05.12 14:51:30
*.171.69.149

쾌락의 총량을 늘린다고 말하는 건 요약본일 뿐 쾌락과 고통을 셈해야 한다는 걸 몇번이나 말씀드렸을텐데요. 곧리주의의 한계에 대해 제 앞에서 설명해봐야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모든 입장에는 나름의 한계가 있어요. 여기서 핵심은, 저는 징벌적 등록금제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그 한계가 많은 공리주의로도 설명되기 어려운 현상이라고 판단한다는 것입니다. 그 판단에 이견이 있을 수 있겠으나 그런 판단도 내릴 수 있다고 인정한다면 이렇게 에너지 낭비를 하실 필요가 없는 거에요.


1) 공리주의는 까야 한다.
2) 모든 나쁜 상황은 공리주의를 어긴 것이 아니라 공리주의가 원래 그런 거다.
3) 그러므로 '공리주의의 위배'라는 판단은 성립할 수 없다.


뭐 이 수준의 논변 아닙니까 지금 하시는 말씀이...

너님저격당했쓰요

2011.05.13 12:21:03
*.233.39.105

http://heloo.egloos.com/4041285

조리돌림 당하고 계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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