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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진정한 비관주의

조회 수 1880 추천 수 0 2009.03.30 23:20:45

이택광, "장기판 좌파" http://wallflower.egloos.com/1888057


재무설계사를 하는 친한 형과 "이 위기가 어떻게 될 것인가?"라는 주제로 잠깐 얘기를 한 적이 있었다. 그 형의 얘기는 간단했다.


"만일 네가 여유돈이 5억쯤 있다고 쳐보자. 주식을 살 거야, 안 살거야?"


거기에서 얘기는 끝나버렸다. 물론 우리가 진짜로 자본주의의 종막을 보고 있는 것일 수도 있고, 5억이라는 여유돈을 지닌 가상세계의 한윤형씨는 그 돈을 홀랑 날려먹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아무래도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렇다면 그는 어느 쪽을 택하겠는가? 재무설계사께서 친절하게 덧붙이시길, "자본주의는 어차피 또 거품을 만들어 내게 되어 있어." 비록 이번 위기가 기존의 공황과는 다른, 지금의 신자유주의를 고수할 수도 이전의 케인즈주의로 돌아갈 수도 없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요구하는 그런 위기라는 사실을 인지하더라도 여전히 그렇다.


그후 다른 자리에서 또 다른 아는 형을 만났는데, 그가 칼 폴라니 얘기를 하면서 뭔가 근본적인 변혁이 오지 않겠느냐는 얘기를 하기에, 나는 저 재무설계사의 얘기를 인용했다. "만일 여유돈 5억이 있다면...주식 안 사시려구? 우훗." (나는 칼 폴라니에 대해 전혀 모르기 때문에 그의 논의를 비판할 능력도 의도도 없다. 내가 의아해하는 것은 칼 폴라니를 갑자기 끄집어 내며 디스토피아-유토피아 소설을 쓰려는 좌파들의 설레발이다.)


우파들은 부자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주고, 좌파들은 이 세계의 룰이 완전히 역전될 거라는 식의 '희망'을 준다. 하지만 현실을 꿈이 아니라 현실로서 대면하는, 그리하여 다음의 것을 대비하는 인식의 기반이 되기를 '희망'하는 비관주의는, 그런 손쉬운 희망은 어느 쪽의 것이든 거부한다.


어떤 분이 내게 이렇게 얘기한 적이 있었다.


"저는 비관주의자입니다. 이대로 가다간 지구가 곧 망할 것 같아요."


나는 거기에 대고 이렇게 대꾸했다.


"저는 더 비관적이에요. 아무래도 제가 살아 있는 동안엔 지구가 안 망할 것 같거든요."


이재현

2009.03.31 00:39:00
*.33.31.150

<당비생각> 2호에 함께 글을 실었던 이재현입니다.
가끔 들어와서 글 읽고 가곤 합니다.
오늘 글은 넘 재미있어서 댓글을 안남길 수 없네여.
앞으로도 건필 기원합니다.

하뉴녕

2009.03.31 01:13:09
*.139.194.22

감사하고 반갑습니다. :)


제가 인터넷이나 교양도서 수준에서 노는 위인인지라 선생님 글을 많이 읽진 못했는데, 혹시 십년 전 쯤에 김성기 님이 주간으로 있던 현대사상인가 하는 잡지에서 특집으로 나왔던 "지식인 게릴라"에 한꼭지 쓰시지 않으셨던가요?


이번 책에서 이름을 발견하고 묘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저 잡지를 봤을 당시에 저는 고등학생이었거든요. -_-;;;;


P.S 하긴, 다시 생각해보니, 그 특집호엔 서동진 주간님도 글을 썼었던듯. ㄷㄷㄷ

마루나

2009.03.31 01:31:01
*.223.200.99

`저는 낙관주의자 입니다. 비관주의자들의 그것들이 저에게는 항상 새로운 희망의 영감이 되거든요. 아무래도 당신들 생각 덕분에 지구가 망하더라도 망하기 직전까지는 최대한 절망하지 않고, 최소한 행복하는 마음이 막 들때까지만 살아도 좋을것 같습니다.'라고 말하고 싶은 1人^^

kritiker

2009.03.31 02:02:06
*.200.145.121

왜 지구가 아직도 안 망하는거지-_-...

고양이

2009.03.31 02:16:03
*.140.136.168

흠...5억이 있다면 주식 안 살겁니다. 걍 쓰고 살지.

하뉴녕

2009.03.31 10:21:28
*.46.4.30

ㅎㅎㅎ 자세히 안 적었는데 아마 저 이야기의 전제가 "5년 정도 묻어놓아도 내 삶에 (소비하는데) 별 지장이 없는 여유돈"이라는 얘기였지요. 단타매매 대박신화 노리겠다는 게 아니라 은행 넣어두는 거보단 주식 사두는게 이율이 좋다는 것을 믿느냐는 뭐 그런 얘기였음... 쓰는 건 써야죠. ㅋㅋㅋ

수하이

2009.04.01 13:20:48
*.130.158.130

'5년 정도 묻어놓아도 내 삶에 (소비하는데) 별 지장이 없는 여유돈'이라도 걍 묻어두고 살것같은데요. 천만원 이상이라면 그것만 있어도 마음이 든든해서 이자생각은 나지 않을듯^^ 천만원이하라도 주식투자할 생각은 없을것 같네요. 루저의 삶이라 그런가?

이상한 모자

2009.03.31 09:26:36
*.34.184.105

난 칼 폴라니 얘기 안 했음.

zeno

2009.03.31 09:50:54
*.229.55.151

방황하다 폴라니에게서 좀 안식을 얻을까 기대하고 있는 전.. OTL 이군요 ㅠㅠ
저 역시 평소에 비관주의, 에서 쉬이 벗어나지 못하는 터이기에 어느 정도 동의합니다만은 희망의 싹까지 도려내버리는 것 아닐까 초큼 걱정되네요. ;ㅁ;

하뉴녕

2009.03.31 10:22:00
*.46.4.30

희망의 싹을 도려낸다라...ㅎㅎ 근데 자본주의 망할 거라는 걸 희망이라고 말하기도 좀 뭣하지 않겠어요? 아이러니하네요. ^^;;;

zeno

2009.03.31 16:23:19
*.229.55.151

흠.. 제가 한국에서 떨어져 있어서 깜이 떨어져서 그러는지는 모르겠는데, 요즘 한국에서 부는 폴라니 열풍은 '자본주의' 자체보다는 '신자유주의'의 몰락에 초점을 맞춘 거 아닌가요?
아, 근데 저나 윤형 님이나 폴라니 좀 읽고 얘기해야 할듯.. (저도 안 읽었거든요 ㄱ- 그렇다고 윤형 님의 이 글 전체가 무의미하다는 건 절대로 아닙니다 ;ㅁ; 하지만 아무래도 나중에 '읽고 나서 까라'는 식의 비판을 들으실 것 같아서요. ㅎ)

하뉴녕

2009.03.31 16:35:59
*.139.194.22

ㅎㅎㅎ 뭐 근데 폴라니를 깐 것도 아니고 이번 말고 더 할 생각도 없어서...ㅋㅋㅋ

zeno

2009.03.31 17:06:43
*.229.55.151

아, 다시 보니 폴라니를 깐 건 아니네요. 제가 '오독'했습니다. 죄송. ㅠ

장쯔이

2009.03.31 12:38:16
*.172.27.30

저는 여윳돈 5억으로 땅을 좀 사겠습니다. 계곡 하나 사두고 놀러가야지..

하뉴녕

2009.03.31 16:36:18
*.139.194.22

비추입니다. 말아먹기 십상입니다.

Svinna

2009.03.31 16:27:18
*.53.65.161

저는 납득이 안되네요. 왜 칼 폴라니 얘기하면 좌파들의 설레발이에요?
분명 한 시대가 파국에 처한 건 사실이고 뭔가 달라져야 하는 것도 사실이라면 새로운 시대를 상상할 필요도 있는 건데...

당장 자기가 처한 삶의 환경에서 다른 나은 세상과 삶을 모색하는게 왜 "장기판 좌파"라는 조롱까지 들어야 할 지 모르겠고 한겨례21의 그 기사에 어디가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소설을 쓰려고 했다는 건지도 이해가 안되는군요. 그 좌담에 참여한 사람들도 다 평소에 나름대로 열심히 자기가 처한 환경에서 실천해 온 사람들인데. 그 사람들이 다 좌파인지도 확실하지 않은데 말이에요.

하뉴녕

2009.04.01 08:03:53
*.139.194.22

논리의 문제라기보다는 태도의 문제가 아닌가 합니다. "난 그런 태도 반댈세..."라는 거죠. 그리고 규정은 원래 반대자들이 해주는 것이 적절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장기판 좌파'를 이택광이 비하어로 사용했다 하더라도, 자신의 작업을 하려는 이들이라면 그것을 긍정적으로 수용 (뭐 용어는 바꿀 수 있겠죠.) 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키보드워리어라는 단어에 대한 저의 수용이 그랬듯이요.) 가령 이택광은 장기를 둬서는 안 되고 장기판을 엎는게 좌파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은데, "뭘 엎으라는 거야?" 라거나 "뭘 어떻게 엎을 건데?"라고 반문할 수 있겠죠.

이러나 저러나 논란이 있는 건 좋은 일인데, 한국 사회가 대개 그렇듯 자기 할 얘기들만 하고 서로 부딪히지 않고 지나갈 것 같아서, 저런 식의 상호규정은 또 힘을 받지 못할 것 같군요. 하지만 '텍스트를 읽고 컨텍스트를 해석하는 나'만 보지 말고 같은 일을 하는 다른 사람들과 푸닥거리를 해야 무언가가 나올 거라고 저는 생각하는 편이에요.

어쩌나 저쩌나 이미 공지했듯 저는 칼 폴라니를 '안 읽고' 하는 소리이기 때문에, 기분 나쁘시면 그냥 스킵하셔도 되겠습니다. ^^;;

leopord

2009.03.31 23:08:36
*.197.199.36

이택광 님은 폴라니 얘기가 설레발로 보였나 보군요. 오히려 너무 부정적으로 말해서 전 그렇게 세게 들리진 않고... 이번호 <한겨레21>에서 폴라니 얘길 한 건 올해 잡지 방향('아름다운 동행', 대안)에도 부합하고, 탈자본주의의 이론적 자원으로서 가능성이 있겠다 싶어 모험 절반, 가능성 절반에 시도한 거라 생각합니다.

폴라니는 자본주의의 유일하고 진정한 대안은 될 수 없어도(요즘 들어 '유일한', '진정한' 대안을 논하는 분들이 종종 보이더군요. 스켑티컬레프트라던가...), 몇 년 내에 그의 사상을 모르고서 포스트 신자유주의 경제를 말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우선 <거대한 변형>이 5월 출간이라니(이전 번역보다 나을 듯 합니다.) <사람의 살림살이>부터 천천히 읽어보는 것도 좋겠더군요.

...

2009.04.01 18:50:35
*.36.106.59

글쎄, 폴라니의 이론은 이미 아리기나 월러스틴 등에 의해 충분히 발전되고 있는것 같아서... 한겨례21을 읽고 거기 나온 사람들의 다른 글들을 읽어봤지만 도저히 무슨말을 하고싶은건지를 찾을수가 없는것 같네요.
폴라니가 대안이면, 이미 많이 논의되던 월러스틴,아리기와 다른건가? 그 다른게 생협 등이면 그건 리프킨의 주장과는 또 얼마나 다른건가?
게다가 포스트 신자유주의라는것도 너무 과장된건 아닌지. 적어도 지금까지 알려진건 1929년 터진 대공황과 비슷하지만 더 큰 "수요충격" 아닙니까. 거기에 부동산 버블이 겹쳐진것 정도? 충분히 중앙은행이 관리해왔던 위기가 좀 크게 터진것에 불과한게 지금까지 밝혀진 전모 같습니다만.
거기에 폴라니가 기여하는건 상품으로 볼수 없는 영역이 있다는 것인데, 그것들이 실제적으로 어떻게 작용하는지에 대해선 이미 위에서 언급한 세계체제론자들이 잘 분석한만큼 어떤 대안이 되긴 힘들다고 생각해요. 세계체제론이 그정도로 발전한것도 아니거니와, 이제와서 모스나 폴라니를 통해 경제인류학을 구성하는건 좀(...;;)

fjkd

2009.04.02 00:16:21
*.234.43.145

29년과 비슷하다는 것까지도 잘 실감이 안나요. 난 백수라 그런지 별 생활에 차이가 없고, 또 벌써 경기가 회복되고 있다는 얘기도 있고. 지난 여름부터 거리에서 싸우고 했던게 경제위기를 미리 예견한 건 아니겠죠?

후...

2009.04.02 02:12:20
*.90.49.67

아무래도 택광님의 글을 오독하신 것 같네요. 더군다나 칼 폴라니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서 글을 쓰신 것인지 궁금합니다.

1. 칼 폴라니는 근본적으로 탈자본주의의 이론적 자원으로서의 가능성이 없습니다. 그는 자신의 전 저작에서 단 한번도 자본주의라는 체제를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대안을 제시하지도 않았고요. 그저 시장이란 사회와 무관하게 자생되는 개체가 아니라 사회속에 배태(embeddedness)되어 있는 하나의 도구라고 생각한 사람이었을 따름입니다. 그리고 그가 거대한 변환이라는 책을 슨 것은, 대공황이 끝나고 난 후에 복지정책의 확충이 대세를 장식했던 1957년 이었습니다. 전반적으로 그는 책에서 사회라는 모호한 개념을 들어가며 사실상 정부가 시장에 강력하게 개입할 것을 촉구하였고, 이는 케인즈주의와 기본적인 골격에서 전혀 다를 바가 없습니다. 다만 그의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부분이 있다면, 자본주의적 시장체제를 오로지 유일한 경제체제로 보지 않고 그 밖에 상호호혜적 시장이나 자급자족과 같은 다른 경제체제도 역사상에 얼마든지 존재했다고 언급한 부분일 것입니다.

2. 포스트 신자유주의라는 단어는 처음 듣는군요. 자유주의의 포스트 버전이 신자유주의이고, 이것의 포스트를 언급하신 것이라면 신자유주의 이후의 이념적 지향 혹은 신자유주의 이후의 경제관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 적합합니다. 님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자면 포스트 포스트 자유주의라는 이상한 단어가 생성됩니다. 그리고 언급하신 폴라니의 책은 거대한 변형이 아니라 거대한 '변환'입니다. 이미 민음사에서 오래전에 번역하여 출시한 책이 국내에 판매된 바 있고, 절판되었다가 이번에 새롭게 오, 탈자를 고치고 번역 자체를 다시한 원고가 다른 출판사 통해서 나오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3. 택광님이 장기판에 빗대서 현 상황을 설명하신 이유는 간단합니다. 본래 좌파란 무엇이었습니까? 모두가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던 자본주의라는 체제, 사유재산이라는 제도에 대해서 거칠게 의문을 제기하고 그러한 체제가 강요하는 룰 자체를 뒤집으려는 혁명적인 발상의 전환에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었던가요? 물론 이러한 생각 자체가 옳고 무조건 타당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판 자체를 뒤엎겠다는 생각은 혁명이라는 과격한 방법을 이끌어 낼 소지가 있고, 이는 악용될 위험이 다분한 발상이니까요. 하지만 처음부터 판을 뒤엎는 건 불가능해, 하고 체념하며 그저 지금 돌아가는 판이나 유지하고 잘못된 부분이나 수리해야지, 하고 체념하며 버리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순간, 정말로 판을 뒤엎을 가능성은 사라져버립니다. 이런 사회는 자생적이고 창의적인 대안을 도출할 동력 그 자체를 잃어버릴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현실과 타협하려는 사람들이 자칭 진보, 자칭 좌파라는 세력 속에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좌파가 출발하면서 던졌던 본질적인 의문들은 해결되지 못한 채, 그저 그런 개량주의로 타락할 가능성이 매우 높아진다는 점을 택광님께서는 지적하고 싶었던 겁니다.

다시 한 번 강조드리지만, 폴라니 류의 국가개입에 의한 시장 조정은 케인즈부터 비롯해서 수차례 여러 학자가 얘기한 내용이었고, 자본주의의 병폐 극복의 근본적인 대안은 될 수 없습니다. 단지 과거에 시행되었던 복지라는 형태의 정부 개입을 또 한번 추상화시킨 개념에 불과할 따름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개념에 대해서, 혹은 폴라니의 저작에 대해서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도 않은 국내의 몇몇 좌파들이 눈쌀이 찌푸려질 정도로 마치 그것이 대단한 발견이고 대안인 양, 부풀려서 얘기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한숨이 나올 뿐입니다. 특히나 전공자의 입장에서는, 몹시 보고 있기 언짢습니다. 폴라니가 하지도 않은 말, 제시하지도 않은 대안을 대안이랍시고 억지로 힘겹게 끌어내는 것은 어떤 핑계를 대더라도 매우 부당하다고 봅니다.

끝으로, 다소 무례한 언사로 들릴 수 있겠습니다만, 덧글을 다실 때에는 최소한 원문글을 쓰신 분(이 경우라면 택광님)의 중심논지와 견해, 주장에 뒷받침되는 근거를 정확히 이해하고 또한 인용되고 있는 폴라니에 대해서도 최소한의 지식은 갖춘 상태에서 논의를 이끌어나가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글쎄요

2009.04.02 09:46:41
*.248.192.169

후.../ 진짜 폴라니 전공자 맞으신가요? 저는 폴라니 전공자도 아니고 폴라니 책은 '거대한 변환'과 홍기빈씨 책을 읽어본 정도지만 제가 폴라니를 이해한 바로는 후...님처럼 단언할 바는 아니라고 보여지는데요.

1. 폴라니가 자본주의를 부정한 적이 없고, 그의 이론이 자본주의에 대한 근본적 대안이 되기는 어렵다는 데에는 저도 동의하지만, 폴라니를 케인즈주의의 아류 내지 국가개입에 의한 시장조정을 주창한 사람으로 보기는 어려울 것 같은데요. 폴라니가 강조하는 건 호혜적 공동체이고, 이건 케인즈주의적 국가개입과는 맥락이 다르지 않나요?

자본주의적 시장 및 그에 대한 국가의 조정(케인즈주의)이 아니라 비자본주의적이고 비국가적인 경제제도가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 폴라니 이론의 핵심이고, 이는 최소한 탈자본주의의 이론적 '자원'은 될 수 있다는 생각인데요 ('대안'이 아니라 '자원'입니다. 가령 토마스 모어나 오웬이 탈자본주의의 대안은 될 수 없지만, 탈자본주의에 어떤 '영감'을 준 것은 부정할 수 없듯이 폴라니 이론도 자본주의 자체를 뒤엎을 대안으로서는 너무나 부족하지만 자본주의 내에서 비자본주의적 제도가 어떻게 착근될 수 있는가에 대한 시사점은 주고 있지 않나요?)

물론 폴라니가 살던 시대의 특성상, 폴라니 또한 케인즈나 현실사회주의 식의 국가개입을 옹호한 글들이 제법 있는 건 저도 알지만(홍기빈씨 책에도 소개되어있구요), 지금 사람들이 폴라니를 언급하는 맥락은 그게 아니라 비자본주의적이면서도 비국가적인 호혜적 공동체의 구축가능성 때문이지요. 님이 정말 폴라니 전공자라면 오히려 폴라니가 당시의 시대적인 맥락 하에서 발언했던 이런저런 내용들(시장에 대한 국가개입에의 옹호)을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적어도 그의 핵심적 사상이나 현재 그가 언급되는 맥락을 무시한 채 폴라니를 케인즈 아류라고 단정하는 것은 좀 아니다 싶은데요.

2. 중요한 건 아니지만, '포스트 신자유주의'를 꼭 이상한 어법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 같은데요. 가령 포스트 탈구조주의라는 용어도 있는 판에 (이거야말로 포스트 포스트 구조주의지요), 포스트 네오리버럴리즘이 그렇게 이상한 어법인가요? 그리고 이번에 홍기빈씨가 새로 번역하는 폴라니의 주저는 '거대한 변형'이라는 이름으로 출판되는 걸로 압니다. 물론 예전 민음사 번역본은 '거대한 변환'이었지만 Transformation을 변형으로 번역할 수도 있다고 생각되는데요.

3. 말씀드렸듯이 저 역시 폴라니가 자본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대안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이택광씨 지적에 굳이 반대할 마음은 없지만, 현재 폴라니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님이 말했듯이 그것이 '대단한 대안인 양 부풀려서 얘기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은데요 (한겨레21의 설레발이야 언론 특유의 선정성일 뿐이고). 가령 우석훈씨 같은 경우에도 데니스 메도우(도넬라 메도우의 남편)나 로자 룩셈부르크의 자본축적론에 대한 그의 언급이나 '괴물의 탄생' 등에서의 주장을 살펴보건대, 그의 실제 생각은 오히려 윤형님보다 훨씬 심각한 비관론에 가깝다고 보여집니다 (전지구적인 자본주의의 전일화와 그로 인한 블록화와 전쟁, 치명적인 생태계의 파괴 등등). 다만 어떻게든 그런 비관적인 경로를 억제하려는 차원에서 호혜적 공동체 내지 사회적 경제라는 폴라니적 발상의 확산을 꾀하고 있다고 판단되는데요. 그리고 정태인씨 역시 그의 '세박자 경제론'을 보면 폴라니류의 사회적 경제는 전체 경제시스템의 일부일 따름입니다 (10~15% 정도를 차지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지요). 즉, 결코 폴라니류의 시스템이 현 자본주의를 전면적으로 대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지요.

제가 보기에는 우석훈씨나 정태인씨의 주장은 폴라니나 사회적 경제가 자본주의에 대한 전면적인 대안이라고 주장한다기보다는, 현재와 같은 방식으로 가서는 결국에는 붕괴를 피할 수 없는 상태에서 그와 다른 가능성들을 모색하는 데 폴라니 내지 사회적 경제의 아이디어가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판단됩니다. 시장/자본주의나 국가/사회주의가 아닌 비국가적 비자본주의적 영역이 지금보다 훨씬 더 확산되어야 한다는 차원의 주장으로 생각되는 바, 이는 충분히 타당한 주장 아닐까요?

그리고 제가 보기엔, 폴라니 자체가 자본주의의 근본적 대안은 아닐지라도 '판을 뒤엎고' 만들어지는 새로운 체제의 운용에도 영감을 줄 수 있다고 생각되는데요. 현실사회주의의 국가 중심적이고 초관료적인 시스템과 그것에 따른 모순 및 붕괴을 생각해본다면, 자본주의를 뒤엎고 만들어지는 새로운 사회체제(결국 일종의 사회주의겠지요) 하에선 비국가적이고 호혜적인 영역들을 적극 활용할 필요가 있으니까요.

PS. 윤형님은 제가 누군지 대충 짐작하실 듯 :-)

하뉴녕

2009.04.02 12:46:01
*.46.33.164

짐작이 문제가 아니라 저는 아이피가 보입니다요. ㅎㅎ

고양이

2009.04.01 00:45:21
*.140.136.168

그러고보니 1999년이 그냥 싱겁게 지나가서 실망한 사람들도 좀 있었죠;;;

하뉴녕

2009.04.01 08:04:45
*.139.194.22

노스트라다무스...아니 고도우 벤에게 사기를 당한 이후로 저는 종말론을 믿지 않게 되었습니다.

아아, 그랜드크로스!!! 일본 침몰!!!!

이 사기꾼 나라 쉐키들...확 너희들만 침몰해버렷!!!!


P.S AV 배우들과 맥주 제조공들은 한국으로 보내고.

질문!!

2009.04.02 01:32:21
*.154.102.184

님 책 언제나오나요?? 저는 3월 출시로 알고 있었는데...

어?!

2009.04.02 01:49:26
*.154.102.184

'나왔네?!' '이삼일전인가 교보 혹은 알라딘에서 검색할 때 안나왔는데...잘못 검색했나?' 우쨌든 무지 반갑습니다. 책가격도 맘에들고^^*

사실 좀 걱정했습니다. 갑자기 경기도 안좋아지고 해서..근데 이렇게 약속(?)처럼 3월 출시가 되어서 기분 급 좋아졌습니다.ㅎㅎ

음..

2009.04.02 01:48:42
*.154.102.184

교보에선 아직 검색이 안되는 듯.. 표지는 개인적으론 '이정도면 마음에 든다.'란 느낌이네요. 좀 아쉬운건 알라딘에서조차 목록은 고사하고 저자약력도 나와있지 않다는 거.. '이런건 돈을 좀 먹여야 되나?'...아직 출판된지 얼마안돼서 그렇겠죠??..
이번주나 다음주 즘엔, 한겨레에서 소개가 될 책일테니.. 그럼 좀 달라지겠죠, 뭐..(북섹션코너가 축소된게 좀 아쉽긴하다만..)

근데, 조선에서도 님 책을 소개할지 한다면 어떻게 할지 궁금하네요..ㅎㅎ

아?! 그리고 이런!!

2009.04.02 01:55:16
*.154.102.184

저자 약력이 있긴 있군요.. 갠적으론 없어도 상관없지만...

근데, 지금 주문해도 4월14일은 돼야 받을 수 있다라는 말에 급,까진 아니더라도 좀 당황..뭥미...우쨌든 무사히(?) 출판된건 맞지요?

마지막으로 감히 부탁한마디만..

2009.04.02 02:37:43
*.154.102.184

"진정한 비관주의"를 여러번 봤습니다. 그런데, 난독증인지 길지도 않은 글을 제대로 끝까지 읽기는 이번이 처음인 거 같습니다.(사실 정상인 범위에서는 제가 좀 난독증인거 같습니다^^*..독서량 부족이 가장 큰 원인인 듯) 그런데, 이해하고나니 어려운 내용은 아니더라구요. 좋은 글 같고, (감히 제가 그런 걸 판단할 수 있다면) 올바른 시각으로 여겨졌습니다.

다만, 저같은 난독증환자들도 좀 감안을 해주셔서 더 쉽게 글을 써 주실 수는 없을런지.. 비유 등은 무척 마음에 듭니다. 어려운 용어를 사용치 말아 달란 얘기도 아니구요(사실 윗글의 의도를 이해하는데 방해 될 어려운 용어는 없죠) 제가 부탁드리고 싶은 말씀은, 뭐랄까...되도록 단문형태의 글? 혹은 조사? 뭐 그런거에 좀 더 신경을 써주셨으면...그런 바람인지도 정확히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윗글을 이해하고나니(이해한거 맞겠죠^^*), 위에서 든 좋은 비유를 그대로 살리고도 님이라면 좀 더 쉽게 글을 쓸 수 있지 않았을까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갑작스레, 제 생각이 좀 정리가 된 듯 합니다ㅎㅎ.. 저같은 사람도 문장이 좀더 매끄럽게 읽혔으면 좋겠단 생각이, 바로 제가 부탁드리고 싶은 부분인 거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님 글에 감히 태클 걸 목적으로 이 댓글남기는 건 절대 아닙니다. 그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고싶어하는, 그러나 크게 노력(공부)할 생각은 없는(그러면서도 감히 부탁을 드리는 점 죄송합니다^^*),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바꾸는데 일조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투표권이 있다는...^^*) 또 하고싶은 저같은 사람들의 시각을 높여주시는데도 조금은 더 여유를 내주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P.S. 개인적으로, 제가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의 글은..,
예전에 진중권씨가 영어몰입교육을 비판하는 칼럼을 쓴적이 있죠? 그정도를 넘지않는 문법수준의 글이 제 한계인거 같습니다.

하뉴녕

2009.04.02 06:39:38
*.139.194.22

덧글들에서 많이 배우네요. 읽고보니 저는 택광쌤 글을 링크하지 않았다면 더 좋을 뻔 했습니다. 택광쌤 글은 1) 새롭지 않은 것을 새롭다고 말하는 설레발이 지겹다는 글이었다면, 저는 2) 나는 그냥 설레발이 싫소. 정도.


뭐 하긴 언론이 다뤄줘야 우리가 인지하는 것이기는 하니, 그게 개인 잘못은 아닌지도. 저도 꽤 많은 사람들이 1-2년전부터 '논객'된 줄 알아요. 지금은 블로그에서만 끄적이는데 뭐가 논객이냐는 생각도 들고. ㅎㅎㅎ


그리고 윗분에게는 죄송한 것이, 이 글은 굳이 그렇게 열심히 이해하려고 애쓰실만한 글이 아니었습니다. 좀 더 많은 이에게 읽히려고 결심했을 때엔, 저도 그에 상응하는 공을 들여서 잘 읽히게 쓰려고 노력하는 편이죠. 그렇게 노력한다고 해서 진중권의 글만큼 가독성이 좋아지는 것은 아니지만요.


책은 일단 인쇄는 되었는데, 서점과는 계약 중이라 아직 서점에 배포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알라딘에 뜬 것은 저도 방금 확인했는데 약간 당황스럽네요. ;; 근데 지금 주문해봤자 '4월 11일' 수령이라 적혀 있으니 블로그에선 약간 여유를 두고 홍보해도 될듯. 이벤트 당첨자들에게는 곧 소포 발송할 예정이빈다...

아니요!!

2009.04.02 21:55:49
*.154.102.197

저는 님께 많은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 바 당연히! 진중권씨 이상의 글장이(?)가 되실거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님이라면 좀 더 현실적인 비관주의자가 되실 수 있다 믿기 때문입니다.

근데, 4월 중순에나 받아 볼 수 있는 건 좀 그렇죠?... 2,3일안에 받아 볼 수 있다면 알라딘에서 주문하겠지만, 어차피 한참 남았으니 부산 큰 서점에 깔리면 거기가서 구매하려합니다. 우쨌거나 기다리는 건 정말 젬병인데..

후...

2009.04.03 23:32:43
*.90.49.67

글쎄요 님께//팝업차단이 되어있어서인지 덧덧글 달기 기능이 되지 않아 여기에 덧글 답니다. 다시 반복합니다만, 거대한 변환을 제대로 읽으신 것인지에 대해 강하게 의문을 제기하고 싶네요. 칼 폴라니는 자기 저작에서 한 번도 상호 호혜적 경제관계 혹은 비국가적인 호혜적 공동체에 대하여 강조하거나 그것을 대안삼아 이야기 한 바 없습니다. 본문을 한 번 살펴보시죠.

...폭넓게 말하자면 다음과 같은 명제가 성립한다. 즉, 서유럽에서 봉건제가 종언을 고하기까지 이미 알려진 모든 경제체계는 호혜, 재분배, 가정(집안살림-자급자족) 내지는 그 2,3 가지 원리의 다양한 조합에 기초하여 조직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중략) 16 세기 이후 시장은 숫적으로 증대했으며 중요성을 더해 갔다. 중상주의 시스템 아래서 시장은 사실상 정부의 중요 관심사로 되었다. 그러나 머지않아 나타날 시장에 의한 인간사회지배의 징후는 아직 없었다. 그 정반대였다. 통제와 관리는 이전보다 강화되었다. 자기조정적 시장의 관념도 그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p.76 제 2 부 시장경제의 흥망 : 1. 악마의 맷돌 제 4 장 사회와 경제체계

-이 부분에서 폴라니는 상호호혜적 경제관계가 지금의 수요와 공급에 의해 가격이 결정되는 시장체계가 들어서기 전, 그것도 중세 이전에 있었던 하나의 경제 체제였다고 분명히 선언하고 있으며 대안이란 말 따위 혹은 강조를 한 부분이 전혀 없습니다. 이는 책 전체적으로도 반복되는 부분입니다. 폴라니가 보기에 지금까지 지속되어 온 경제체제는 크게 상호호혜적 무역관계, 재분배, 자급자족, 그리고 수요와 공급에 의해 가격이 형성되는 자기조정적 시장의 4 가지 모델이라고 생각했는데, 현실 사회에서는 이러한 4 가지의 모델이 순수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부분적으로 섞인 상태로 존재하며, 최소한 상호 호혜적 무역 관계는 서구 사회에서 중세시대 이전에 주로 통용되던 것이라고 저자는 주장합니다.

명백히 합시다. 폴라니는 ~~라고 말했는데, '나'는 상호호혜적 관계가 대안이라고 생각한다(혹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라는 표현과, 폴라니는 상호호혜적 경제관계를 강조했다. 라는 표현은 의미가 달라도 한참 다른 표현입니다.

...수정 구빈법의 열렬한 주창자인 헤리엇 마티노가 묘사한 광경은 수전정 구빈법에 반대하는 절규에 앞장서고 있었던 차티스트 운동가들이 묘사했던 광경과 일치하고 있다...(중략)확실히 기계에 의해, 또 인간이 그 기계에 봉사하도록 저주받은 환경에 의해 야기된 사회적 혼란은 회피할 수 없는 여러 가지 결과를 초래하고 있었다. p.125 제 2 부 시장경제의 흥망 : 1. 악마의 맷돌 제 8 장 스피남랜드법 이전과 이후

시장 메커니즘은 스스로를 주장하고 있었고 그 완성을 위해 절규하고 있다-인간의 노동은 상품화되어야만 한다고. 반동적인 온정주의는 이러한 요구에 공허하게 저항하려고 햇다. 사람들은 스피남랜드법의 공포로부터 탈출하여 유토피아적인 시장경제의 비호 아래로 맹목적으로 뛰어들었다. p.130 제 2 부 시장경제의 흥망 : 1. 악마의 맷돌 제 8 장 스피남랜드법 이전과 이후

-이 두 부분에서 엿볼 수 있듯이, 폴라니는 시장 경제를 피할 수 없는 하나의 흐름으로 보고 있습니다. 당대의 지식인들이 계속해서 시장논리의 확산을 막아보고자 다양한 부분에서 비자본주의적인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모두 실패했다는 점을 명백하게 하고 있고, 앞으로도 실패할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습니다. 폴라니가 내세우는 대안이란 자본주의에 대한 비자본주의적 노력이 아니라 사회의 자기 보호라는 애매한 개념입니다. 즉, 시장의 기능은 그대로 두되 그것을 사회 안으로 포섭하는 작전이라는 겁니다.다소 논란이 있긴 하지만, 이것은 곧잘 복지와 비슷한 것으로 사회학계에서 해석되어지곤 합니다. 더군다나 이 챕터의 뒷부분에서 폴라니는 자본주의를 극복하겠다며 나온 맑시즘 혹은 대안적인 이데올로기의 투쟁들이 오히려 자본주의 내부의 모순을 심화시키고 부정적인 방법으로 폭발시켰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도 이를 자본주의에 대한 비 자본주의적인 대안 창출의 영감을 주었다고 주장하실 셈입니까? 적어도 폴라니 자신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잘 읽지도 않고 폴라니 운운하는 몇몇 분들이 텍스트 중 특정한 부분만 가져다가 과도하게 강조를 하는 과정에서 그가 대안적인 형태를 강조했다느니 어쩧다느니 하는 이상한 말들이 발전한 것이지요.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폴라니가 한 주장 혹은 책 안의 중심 요지에 기초하여 내세운 대안과, 그가 책에서 조그마한 예로 들어놓았으며, 그마저도 지나간 유형으로 보았던 것들을 쏙 뽑아 마치 폴라니 자신이 강조한 주장인 양 부풀리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로버트 오웬만큼 깊이 산업사회의 영역을 통찰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사회와 국가의 차이를 깊이 인식하고 있었으며 고드윈과 달리 반국가적인 편견을 간직하지 않았지만, 단순히 국가에서 실행가능한 것, 즉 사회로부터 악을 제거하기 위해 계획된 유용한 간섭만을 기대했을 뿐 결코 사회의 조직화를 기대하지 않았다. (중략) 그러나 인간이 새롭게 획득한 힘의 도움으로 사회를 전환시킬 때 비로소 이 자유의 한계는 명백해질 것이며 또, 그렇게 되면 인간은 유치한 불평을 하지 않는 성숙한 정신 속에서 이 영역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라고 오웬은 생각했다. p.161~162 제 2 부 시장경제의 흥망 : 1. 악마의 멧돌 제 10 장 사회의 발전과 정치경제학

-폴라니는 오히려 로버트 오웬이라는 학자에 대해 자주 언급하면서, 시장에 대한 사회의 개입을 주장하였습니다. 폴라니가 사회를 개인의 합 이상의 것이자 자생하는 어떤 추상적인 실체로 본 점에 대하여 논란이 많이 따르기는 하지만, 폴라니가 내세운 시장과 대척되는 개념으로서의 사회에 국가라는 단어를 덧씌운다면 케인즈주의와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는 하나의 모델이 상정되어집니다. 이 장 전체와 그 다음장을 통틀어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으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2. 거대한 변형으로 책 제목이 바뀐 줄은 몰랐군요. 이건 정정하겠습니다. 그리고 학계 기준으로 보자면 포스트 네오리버럴리즘이란 말은 그리 흔히 쓰이지 않습니다. 또한, 탈 구조주의는 포스트 구조주의의 사조 중에 하나이지 그것이 등가식으로 표현되어 탈 구조주의=포스트 구조주의라고 하지 않습니다. 개념을 명확히 하시기 바랍니다. 포스트 구조주의란 말 그대로 구조주의 이후에 나온 지적 흐름의 전반적인 조류 전체를 통틀어서 말하는 것이지, 탈 구조주의만 콕 찝어서 말하는 게 아니랍니다. 마찬가지의 주장이 신자유주의에 대해서도 적용되어질 수 있습니다.

3. 우석훈 씨 주장이 비관론이 아니라고 이야기 한 바 없습니다. 저는 그 양반으로부터 한 학기동안 수업을 들었고, 그 양반이 쓴 대안경제시리즈(88만원세대, 샌드위치 위기론, 괴물의 탄생, 촌놈들의 제국주의) 전부를 다 읽고 서평까지 써서 냈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런 비관주의 그 자체가 나쁘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다만 좌파가 가져야 하는 근원적 이념의 지향에 대해서 견을 달리하는 것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우석훈씨가 지금까지 내내 주장한 것은 칼 폴라니가 '대안'으로서 상호호혜적 경제를 내세웠다는 내용이었습니다(그냥 한 두 번 이런 말을 언급한 것이 아닙니다. 수업 내용을 그대로 녹음한 파일이 있으니 정확한 날짜와 시간까지 얼마든지 제시 가능합니다). 저는 이에 엄청나게 분개하였고요. 우석훈씨의 주장 자체가 틀렸거나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내용적인 측면에서는 공감이 많이 갑니다. 문제는 그가 칼 폴라니의 주장을 왜곡하여 이해할 소지가 모호한 쪽으로 제멋대로 해석해서 언급했다는 데에 있습니다. 말씀드렸죠? 칼 폴라니는 상호호혜적 경제체제를 자기조정적 시장에 의해 재화가 교환되는 시장이 등장하기 이전에 존재했던 경제 유형의 하나로 보았을 뿐, 결코 '대안'으로 제시하거나 그 중요성을 강조한 적은 없었다고요. 그렇다면 우석훈씨의 표현은 '칼 폴라니는 상호호혜적 경제라는 체제가 지금의 시장경제 체제가 나타나기 이전에 있었다고 주장했고, 그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지는 않았으나, 우리는 이를 다시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정도로 표현을 고쳐야만 합니다.

이래서 '카더라'가 무섭다는 겁니다. 왜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냐, 별거 아닌거 가지고...이렇게 생각하실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저서에서 폴라니가 실제로 중요하다고 강조한 내용을 '근거'로 삼아 대안을 제시하는 것과 그가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을 뿐더러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언급한 적도 없었던 것을 가져다가 마치 그 부분이 전 저작의 중심 논지인 양 부풀려서 떠들어대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봅니다. 이는 대안 경제 운동에 전혀 도움도 되지 않을 뿐더러 부정확한 정보를 유포하여 칼 폴라니에 대한 왜곡된 이해를 낳게 하는 것밖엔, 되지 않습니다.

실제로 칼 폴라니는 자신의 저서, 거대한 변환에서 심지어 파시즘마저도 사회의 자기보호 실현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나올 수 밖에 없는 비극이었다, 라고 묘사한 바 있습니다. 지금도 칼 폴라니를 오독하는 사람들은 폴라니가 간단히 언급한 이 주장 하나만을 가지고 그것이 마치 중심 견지인 양 부풀려서 칼 폴라니는 파시즘을 옹호하고 있었다! 라는 말도 안되는 해석을 내놓기도 합니다. 근본적으로 우석훈씨가 보인 태도와 이것의 차이가 무엇인지 저는 모르겠네요. 최소한 그가 우석훈 '박사'라는 타이틀을 걸고 제대로 된 대안경제 운동을 하고자 하는 것이라면, 폴라니라는 원 저자에 대한 예의를 지키고, 폴라니가 그의 저서에서 내세웠던 중심 논지와 그냥 경제체제 중 한 유형이며 지나간 것으로 보았던 모델에 대한 구분을 명확하게 하면서 인용을 했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설레발'이란 표현을 한 거고요.

제 부족한 머리로는 이해가 안되는데, 칼 폴라니가 어떻게 '판을 뒤엎자'는 주장을 한 건지, '거대한 변환' 혹은 폴라니가 쓴 구체적인 텍스트를 근거로 해서 지적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는 오히려 사회라고 불리우는, 혹은 국가라고도 해석해 볼 수 있는 공동체에 의한 통합을 강화하고 국가에 의한 시장 간섭을 더욱 늘려가야 한다고 본 학자입니다. 이는 기존의 체제를 유지하되 사회 안에 질서있게 포섭할 수 있도록 작동 방식을 바꾸자는 논리이지 절대로 판을 뒤엎자는 주장은 될 수 없습니다.

글쎄요

2009.04.04 09:06:19
*.248.192.169

후.../ 거대한 변환의 전체적인 결론은 자기조정적 시장사회 즉 자본주의는 전체 인류의 역사에서 예외적인 경제체제라는 것입니다. 님은 호혜, 재분배, 자급자족 등의 원리가 중세 이전에만 적용되는 경제원리일 뿐 그것이 특별히 강조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시는데, 제가 보기엔 그렇지 않습니다. 호혜, 재분배, 자급자족, 시장 등의 원리가 다양하게 결합하여 전체적인 인간의 살림살이를 이루는 것이고 이런 살림살이들이 모여서 사회를 구성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현대에 와서 자기조정적 시장경제가 전면화되면서 호혜나 재분배 등 다른 원리가 파괴되면서 인간의 살림살이에 치명적인 폐해를 불러왔다는 겁니다.

즉 호혜나 재분배 등은 폴라니 입장에서는 인간의 살림살이를 위해 공동체 내지 사회 일반에 적용되어야 할 기본원리 중 하나입니다. 단순히 중세에 있었던 경제원리이고 이제는 필요없는 것이 아니라고 이해되는데요? (폴라니가 호혜나 재분배는 이제는 필요없는 것이라고 주장한 적이 있나요?) 폴라니가 명시적으로 이를 대안이라고 표현한 적은 없을지라도, 시장에 대한 사회의 자기방어라는 것 자체가 자기조정적 시장원리만이 전일적으로 관철되는 사회가 아니라 호혜와 재분배, 자급자족, 시장 등의 원리가 함께 작용하면서 인간의 전체적인 살림살이를 구성하는 사회가 정상적인 사회임을 의미하는 차원에서 이야기된 것 아닌가요? 저는 그렇게 이해하는데요.

님은 8장을 인용하면서 폴라니가 시장논리의 확산을 막으려는 비자본주의적인 노력이 앞으로도 실패할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주장하시는데, 죄송하지만 제가 이해하기로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8장은 시장논리가 확산되어가는 과정을 설명한 것이고 책 전체에서는 전반부일 따름입니다. 책의 후반부는 이런 시장논리의 전일화가 가져온 잘못된 결과와 자기조정적 시장원리의 모순 및 파탄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폴라니는 비자본주의적인 노력이 앞으로도 실패할 것이라고 생각하기는커녕 (폴라니가 어디서 그런 말을 했는지 제시해 주시지요. 제가 이해하기로는 그 반대입니다) 자본주의의 전일적인 시장원리가 이미 실패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사회의 자기방어가 시장의 기능을 그대로 두되 복지 등을 통해 그것을 사회 안으로 포섭하자는 주장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죄송하지만 그런 해석은 님의 해석이지 일반적인 해석이 아니지 않나요? (홍기빈씨도 박현수씨도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고 있지 않지요)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제가 이해하기로는 사회의 자기방어는 시장원리만이 전일적으로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호혜나 재분배, 자급자족, 시장 등 다양한 원리가 함께 작동되면서 과도한 시장원리를 제어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자본주의를 그대로 인정하고 복지 등을 통해 그 모순을 완화하자(이것이 케인즈주의지요)가 아니라 자본주의적 시장원리 자체가 전체 경제원리의 일부분일 따름이며 시장을 사회 속으로 되돌려야(re-embed) 한다는 것이 폴라니의 주장입니다. 시장원리가 기본적으로 타당하지만 그것의 불확실성으로 인해 유효수요의 문제 등 각종 문제점들이 발생하므로 정부가 나서서 그것을 조정해야 한다는 케인즈의 주장과 시장원리가 호혜나 재분배 등 다른 원리와 함께 경제를 구성하는 다양한 원리 중 하나일 따름이라고 생각하는 폴라니의 주장을 비슷한 것으로 보는 것은 님의 독특한 해석이라 생각되는데요.

제가 알기로 일반적인 해석은, 케인즈는 수정자본주의인 반면에 폴라니는 수정사회주의로 이해되는 것으로 압니다 (홍기빈씨도 박현수씨도 이런 관점을 취하고 있지요). 즉 맑시즘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지만 (게다가 폴라니가 맑시즘에 대해 비판적인 것은 님이 생각하듯이 자본주의가 불가피하다고 생각해서가 아닙니다. 폴라니가 보기엔 맑시즘도 자본주의처럼 사회에 대한 경제의 우위를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오히려 구체적인 프로그램에서는 소련이나 현실사회주의에 상당히 우호적이었습니다. 이 부분은 홍기빈씨 책에 나오지요) 시장원리는 전체 사회제도 중 일부분에 지나지 않으며 사회에 의해 시장원리의 폐단이 방어되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기본적으로는 비자본주의 내지 사회주의적인 것으로 이해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로버트 오웬은 이른바 공상적 사회주의자입니다. 즉 기본적으로 사회주의 전통의 흐름 안에 있지요). 단지 시장원리나 자본주의를 전적으로 부정하지 않고 그것을 경제를 구성하는 다양한 원리 중 하나로 받아들이는 것일 뿐이지요.

결론적으로, 폴라니가 주장한 내용을 케인즈가 주장한 내용과 비슷하다고 해석하는 것은 제가 보기엔 타당하지 않습니다. 님께서는 폴라니가 주장한 사회의 자기방어가 곧 국가의 경제개입이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은데 그렇게 보이지도 않거니와, 가장 중요한 것은 자본주의적 시장이 기본이며 그 불확실성을 국가가 나서서 조정하면 된다는 케인즈의 주장과 자본주의적 시장사회는 예외적일 뿐이며 호혜나 재분배 등 다양한 원리가 시장과 함께 사회 속에 묻혀(embeded) 있어야 한다는 폴라니의 주장은 출발점 자체가 다르다고 보여집니다만.

글쎄요

2009.04.04 09:41:01
*.248.192.169

간단히 요약하자면 이런 겁니다. 후...님은 시장자유주의/케인즈&폴라니/맑시즘 등 좌파의 구도로 이해하시는데 제가 보기엔 시장자유주의/케인즈/폴라니/맑시즘으로 이해하는 것이 맞다는 겁니다. 시장경제에 기반하되 국가가 적절하게 개입하여 불확실성만 제거하면 시장이 잘 돌아갈 수 있다는 케인즈주의의 입장과 시장경제만으로는 파국적인 폐해를 초래하며 시장에 대한 사회의 통제가 필요하다는 폴라니의 입장이 본질적으로 비슷한 것이라는 후...님의 주장에 대한 근거가 무엇인지요? (죄송하지만 제가 폴라니를 이해한 바로는 그에 대한 근거는 전혀 없습니다.) 이것이 후...님이 핵심적으로 증명해야 할 바인데 답변에 그에 대한 이야기는 별로 없네요.

폴라니가 말하는 시장에 대한 사회의 통제는 단순한 국가개입 정도가 아닙니다. 이는 홍기빈씨 책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명백히 사회적 계획 등 사회주의적 프로그램을 옹호하고 있습니다. 케인즈와는 전혀 다르지요.

위에서도 말했지만 폴라니가 맑시즘을 비판하는 것은 맑시즘도 사회에 대한 경제의 우위성을 주장하는 일종의 경제주의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맑시즘은 자본주의 경제의 본질적인 특성상 노동자계급만이 자본주의를 뒤엎고 사회주의를 건설할 수 있다고 봅니다. 반면 폴라니는 이런 노동자계급의 우위성이 아니라 보편적인 인간으로 구성된 사회가 경제에 대해 우위성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노동자계급만이 아니라 다양한 사회계급들을 포괄한 사회 내지 공동체 일반에 의한 경제의 통제(사회 내지 공동체의 이해를 반영하는 지역적 계획)가 맞다고 주장하지요. 거대한 변환의 결론도 비슷하구요 (문화적 자유와 경제적 통제).

즉 폴라니는 노동자계급만이 아니라 사회 일반의 이해를 중시한 일종의 인민주의 내지 공동체주의자이지만 넓은 의미에선 사회주의자의 범주에 포함되지, 결코 케인즈주의의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계획을 옹호하고 사회가 경제를 통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을 케인즈 아류라고 볼 수 있을까요?

후...

2009.04.08 02:42:32
*.90.51.124

글쎄요 님께// 죄송하지만 좀 많이 웃었습니다. 님의 문제점은 폴라니가 지금까지 있어왔던 경제체제를 <상호호혜적 무역관계, 재분배, 자급자족(살림살이), 시장경제> 의 4 가지 타입으로 나눈 것과, 그가 제시한 시장의 두 가지 속성, 즉 실재론적 의미의 경제(substantive economy : 재화와 용역을 제공하기 위한 모든 활동, 일명 먹고 살기 위해 취할 수 있는 모든 활동으로서의 인간 삶의 영역에 포섭되는 경제)와 형식론적 의미의 경제(formal economy : 최소한의 비용을 들여 최대의 효용을 얻고자 하는, 오늘날 경제학에서 지칭하고 있는 합리적 소비자로서 인간이 취하고자 하는 경제 원리와 그것으로부터 기반하는 모둔 행동)를 혼용하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폴라니는 현대 사회에서 실재론적 경제에 기반한 행동들이 거의 무시되고 형식론적 경제에 기반한 행동들이 경제체제의 대부분을 차지하여 발생하는 문제점들에 대하여 저작을 통해서 지적하고자 하였습니다. 정말 슬프게도, 님이 이야기하신 4 가지 유형의 시장들은 그 과정에서 오로지 경제학적 의미로서의 시장만이 이 세상의 유일한 경제체제가 아니라는 점을 증명해 보이기 위하여 여러 원시 부족 및 유럽 사회의 시장을 분석하는 과정을 통해 도출되어진, 말 그대로의 분류체계에 불과할 따름입니다. 이것들은 주로 중세 이전에 있었지만, 각각 독립된 개체로서 시대별로 뚜렷히 나누어져 등장한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형태로 경제 체제 속에 조금씩 섞여 있었다는 주장이 분명히 나옵니다(이 부분에 대해서는 제 앞선 덧글에서도 짧게나마 설명하고 있는 걸로 압니다만, 부언이 부족했던 모양이군요). 그러나 산업혁명 이후 이러한 방식의 경제체제들은 거의 사라지거나 제국주의적 침략에 의하여 파괴되었고, 오로지 시장체제만이 전 세계의 지배적인 경제형태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에 대하여 폴라니는 몇몇 지식인들이(앞서 언급한 해리엇 마티노와 같은) 자급자족 혹은 상호호혜적 관계의 경제체제를 당시의 시장 체제의 팽창을 막는 도구로 사용하거나 그 체제 안에 조금이라도 덧붙여보려는 노력을 끊임 없이 기울였으나 모두 실패했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책이 씌여진 시점에서 볼 때에 상당히 현대에 가까운 시기에 이루어졌던 반 시장주의적인 노력들조차도 결국은 실패했다며 상당히 비관적인 논조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 증거로서 폴라니는 파시즘과 대공황, 세계대전을 내세웠습니다.

위와 같은 상황에서 폴라니가 궁극적으로 내세우고자 했던 대안은 형식론적 의미의 경제와 실재론적 의미의 경제가 공존하도록 인간 행위자의 생각 혹은 도덕률 자체를 바꾸는 것이었습니다. 상호호혜적 무역이라든가 살림살이 같이, 시장경제 시스템에 의해 파괴된 구체적인 체제들의 부활 혹은 일부 적용이 아니고요. 그가 생각하기에 이제 와서 경제학적 의미의 시장을 없앤다는 것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시장 이전에 등장했던 논리들을 지금 가져다가 끼워 맞추는 것 역시 상당한 한계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장을 내버려두되, 그것을 적절히 '통제'할 방법을 발견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인간 행위자들의 규범 및 의식이 바뀌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폴라니는 생각했습니다. 그가 이러한 목적을 달성해줄 가장 중요한 주체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점이 학자들로 하여금 모호한 해석을 내놓게 만들고 있고요. 저는 그것을 국가라는 하나의 실체에 대입해서 이야기하고 있고, 님은 여전히 사회라는 표현을 견지하고 계시고 말이지요. 이에 대해서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지요.

님은 제 주장이 무슨 독특한 해석인 양 이야기를 하셨는데, 가까운 도서관이나 사회학 DB 등을 통해서 칼 폴라니 혹은 스카치폴로 관련된 저서 혹은 논문을 검색해보시고 다시 이야기를 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미국 역사사회학계의 유명한 학자 중 한 명인 스카치폴은 당대 여러 학자들의 논문을 정리하여 펴낸 <역사사회학의 방법과 전망>이라는 저서에서 폴라니와 맑스의 차이점을 폴라니는 맑스에 비해 변동의 경제적 조건을 지적하기보다 인간의 도덕적 의지에 많이 기대어 설명하고자 했다는 측면에서 정리하여 분석하고 있습니다. 이때 인간의 의지를 바꾸어 줄 수 있는 주체 및 시장을 사회 안에 포섭하여 님 말 맞다나 재배태(re-embedded)할 수 있는 행위자가 바로 국가라고 본 것입니다(추후 이러한 사상은 그녀의 국가중심주의적 사회정책이론이나 역사분석의 방법론 등에도 일부 반영되게 됩니다). 폴라니는 이러한 국가를 당시 시장의 파괴적 속성에 대응하여 왜곡적인 형태의 사회보호의 일환으로 나타난 파시즘적 국가와 차별화 하기 위하여, 새롭게 나타날 국가는 파시즘과는 다르게 문화적 그리고 개인적 영역의 자유를 수호하면서도 강력한 제제를 발휘할 수 있는 하나의 발현적 실체가 되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즉, 폴라니는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고자 하는 인간 의식 그 자체를 변화시키는 방법을 위한 사회의 각성이라는, 매우 규범적인 측면의 문제를 강조하였지, 대안경제의 추구와 같은 구체적인 해법을 논한 적이 없다는 겁니다.

그리고...도대체 폴라니를 어떻게 읽으셨길레 폴라니가 맑시즘을 사회에 대한 경제의 우위성을 주장하는 일종의 경제주의라고 보기 때문에 비판했다는 의견을 내세우신건지 궁금하군요. 궁극적으로 맑시즘의 목표는 경제적인 평등의 달성이 아니라 사회적인 측면에서의 무국가, 무계급사회의 도래에 맞춰져 있습니다. 폴라니의 비판 지점은 당대의 맑시즘이 그러한 무계급사회의 달성이라는 맥락에서의 '공산주의'를 목표로 하여 투쟁했던 것이 아니라, 성급한 제도적 철폐 및 시장 내의 계급 모순을 도리어 키워내 엉뚱한 분열을 조장시킬 위험이 있는 '사회주의'에 맞춰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제 3 부 변환의 진행과 관련되어 20 장, 21 장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폴라니는 전 저작을 통하여 사회라는 실체를 하나의 신성화된 대상으로 상정하고 그 안에 인간과 인간이 만든 제도적 부속물로서의 시장을 강하게 통합시켜야 한다고 본 학자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그의 생각이 판을 뒤엎자는 논의에 있어서도 유용하게 적용되어질 수 있다니, 저는 이에 대하여 아직 자세한 설명을 듣지 못한 것 같습니다만. 폴라니 입장에서 볼 때에 판을 뒤엎는다는 것, 즉 사회를 뒤엎고 이미 지배적인 체제가 되어버린 시장 자체를 파괴하여 새로운 경제적 수단을 마련한다는 것은 폴라니가 그토록 신성하게 여긴 사회 그 자체를 혼란의 도가니 속으로 몰아넣고 근본부터 짓밟겠다는 말과 다를 바 없는 것이 됩니다. 이렇게되면, 앞뒤가 안 맞지 않나요? 따라서 폴라니는 판을 뒤엎어 시장논리 그 자체를 재조직화 하고자 시도하는 대신 앞서 말씀드린 형식론적 의미의 경제와 함께 실재론적 의미의 경제가 융합되는 형태의 절충안을 채택하였던 것입니다. 그것도 형식론적 의미의 경제가 가진 불가피성을 어느 정도 인정하면서 말이지요. 불가피성을 인정하되 내버려 둘 경우 심각한 피해를 끼치므로, 시장에 대응하여 개개인의 의식적 측면을 각성하는 정도 쯤으로 논의를 마무리짓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태도에서 엿볼 수 있듯이, 폴라니는 공상적 사회주의자가 아니었습니다. 계획을 옹호하고 사회가 경제를 통제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맞습니다만, 그 사회의 주체는 개별적 실체로서의 인간들이며 그것의 집합체인 국가이지 결코 맑시즘이나 사회주의류가 요구하는 무계급 사회 내지는 아예 계급과 국가가 해체된 형태의 추상체로서의 사회가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제 발언을 왜곡하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저는 폴라니의 의견이 케인즈와 상당 부분 유사한 측면이 있다고 주장했지, 케인즈의 아류라는 표현은 쓴 바 없습니다. 케인즈가 국가를 경제통제의 주체로 보았다면 폴라니는 사회를 경제통제의 주체로 보았고, 이를 위해서는 지금 행해지고 있는 경제적 통제도 필요하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의미로서 사회를 지배하는 의식적 수준의 규범과 가치 그 자체를 띁어 고쳐야 한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여기서 사회라는 단어를 국가로 교차시킨다면 제법 비슷한 의견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이 학계와 저의 지론입니다. 다만, 한 쪽은 경제학자이고 한 쪽은 인류학자인 만큼, 폴라니 쪽이 좀 더 규범과 도덕 같은 보다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측면에 치우쳐져 있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인정합니다. 이에 비해 케인즈는 의식적 측면보다는 실질적 측면, 폴라니 식으로 말하자면 형식론적 경제 내부에 존재하는 문제들을 수정하는데 더 많은 주안점을 두었습니다. 수많은 DB 검색자료들과 폴라니에 대한 해석 자료들이 이를 입증하는 근거가 되어줄 것입니다. 국가가 개입하되 의식적 측면의 변화에 주안점을 두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실질 경제의 문제를 해결하는 측면에 주안점을 두어야 할 것인가. 굳이 말하자면 이 점이 폴라니와 케인즈의 가장 큰 차이일 것입니다.

하뉴녕

2009.04.06 09:37:26
*.109.154.60

으흐흐 주인장 입장에서는 날로 먹는 느낌이네요. (실제로 날로 먹고 있는...ㄷㄷㄷ)

감사드립니다. :)

ring

2009.04.06 14:51:19
*.233.150.39

관전하고 있는 저로서도 날로 공부한다는.... 덧글 논쟁의 두분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폴라니 이해에 엄청난 공부가 되고 있습니다.

글쎄요

2009.04.07 02:01:31
*.248.192.169

후.../ 제가 다른 할 일이 몇 가지 있어서 바로 답변드리지 못함을 양해해주시길 (모레쯤 정식으로 답변드리겠습니다). 죄송하지만, 그동안 님께서는 '거대한 변환'의 13장과 21장 및 홍기빈씨 책의 제3장과 제4장을 다시 읽어보셨으면 합니다. 거기 서술된 폴라니의 입장은 아마도 님의 견해보다는 제 견해에 훨씬 가까울 겁니다.

폴라니가 이야기하는 사회는 결코 국가가 아닙니다. 폴라니가 말하는 사회의 실체가 국가로 대입될 수 있다는 주장은 (아마 사회학 전공자이신 것 같은데) 스코치폴이나 님 등 사회학계에선 일반적인 주장인지 몰라도(과연 그런지도 의심스럽습니다만), 경제학 쪽에서는 일반적으로는 그렇게 보지 않는 것으로 압니다. 홍기빈, 우석훈, 박현수씨 등이 모두 그런 입장을 취하고 있고, 이른바 '사회적 경제'를 이야기하는 유럽이나 미국의 비주류 경제학자들이나 '반공리주의 사회시스템'을 주창하는 사람들도 비슷한 입장인 것으로 압니다.

폴라니가 이야기하는 사회는 '인격적인 관계의 공동체'이고, 그런 인격적인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 님이 말씀하신 규범이나 도덕률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였지만 보다 중요한 강조점은 공동체의 회복에 놓여있습니다. 폴라니가 계급이 아니라 개별적 실체로서의 인간을 강조한 것은 맞지만 그 집합체로서 상정한 것은 국가가 아니라 다양한 공동체입니다. 도대체 폴라니가 말한 사회가 곧 국가라는 주장이 학계의 일반적인 지론이라고 자신있게 말씀하시는 근거가 뭔지요? 혹시 사회학계 일부를 전체 학계라고 보시는 건지요?

그외, 실재론적 의미와 형식론적 의미의 구분 문제나 반시장적 노력의 실패 문제(저야말로 폴라니를 도대체 어떻게 읽으셨길래 대공황이나 세계대전 및 파시즘을 반시장적 노력이 실패한 예로 드는 지 모르겠군요. 이건 폴라니가 시장사회가 초래한 잘못된 결과의 예로 든 것이지 반시장적 노력이 실패한 예로써 든 게 전혀 아닙니다. 거대한 변환의 후반부를 전혀 반대로 해석하고 계시는군요), 폴라니가 맑시즘을 비판하는 이유, '판을 뒤엎자'와 관련된 제 주장에 대한 님의 오독 등등 반론할 부분이 많습니다만 시간관계상(지금 다른 글을 써야 합니다) 모레쯤 올릴 글에서 반론하도록 하겠습니다.

후...

2009.04.08 15:53:59
*.173.145.198

글쎄요 님께//

1.이번에도 저를 슬프게 하시는군요. 애석하게도 제 입장은 사회학계의 전반적인 태도 정도에서 도출되어져 나온게 아닙니다만. 다음은 국내/외 메타 학술 DB(인문학, 사회과학 통합)를 통해 제가 이야기한 방식의 폴라니적 국가관을 지지하는 논문들의 목록을 대표적으로 뽑아본 것입니다.

1)칼 폴라니의 경제인류학 방법에 관한 고찰
김영진(Kim Young Jin) 저
한국국제정치학회, 국제정치논총 國際政治論叢 제44집 4호, 2004. 12, pp. 47 ~ 68 (22pages)
법학·행정

2)사회와 경제체제의 정치경제적 시원
이호근 저
진보평론, 진보평론 2002년 봄 (제11호), 2002. 2, pp. 371 ~ 389 (19pages)
사회

3)칼 폴라니의 제도경제학과 시장사회 비판 : 60주년에 다시 읽는 『대전환』
이병천(Lee Byeong Cheon) 저
한국사회경제학회, 사회경제평론 제23호, 2004. 10, pp. 159 ~ 188 (30pages)
경제·경영

4)유로자본주의의 형성에 대한 조절이론적 설명
구춘권(Koo Choon-Kweon) 저
한국국제정치학회, 국제정치논총 國際政治論叢 제48집 4호, 2008. 12, pp. 141 ~ 164 (24pages)
법학·행정

5)러시아 금융개혁의 정치경제
김태환(Kim Taehwan) 저
한국국제정치학회, 국제정치논총 國際政治論叢 제43집 1호, 2003. 4, pp. 501 ~ 525 (25pages)
법학·행정

6)The Economic Thought of Karl Polanyi: Lives and Livelihood (Book).Preview By: Stanfield, J. Ron; Neale, Walter C.; Sievers, Allen M.; Fusfeld, Daniel R.. Journal of Economic Issues, Mar88, Vol. 22 Issue 1, p253, 16p; (AN 4682409)

7)Karl Polanyi's and Karl William Kapp's Substantive Economics: Important Insights from the Kapp-Polanyi Correspondence.Preview By: Berger, Sebastian. Review of Social Economy, Sep2008, Vol. 66 Issue 3, p381-396, 16p; DOI: 10.1080/00346760801932783; (AN 34212513)

8)Contesting the hegemony of market ideology: Gramsci's 'good sense' and Polanyi's 'double movement'Preview By: Birchfield, Vicki. Review of International Political Economy, Feb99, Vol. 6 Issue 1, p27-54, 28p; DOI: 10.1080/096922999347335; (AN 3960379)

9)Justifying Public Intervention without Market Externalities: Karl Polanyi's Theory of Planning in Capitalism.Preview By: Sternberg, Ernest. Public Administration Review, Mar/Apr93, Vol. 53 Issue 2, p100-109, 10p; (AN 9302250017)

10)Issues for a Neo-Polanyian Research Agenda in Economic Sociology.Preview By: Randles, Sally. International Review of Sociology, Jul2003, Vol. 13 Issue 2, p409-434, 26p; DOI: 10.1080/0390670032000117353; (AN 10626235)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요? 사회학계 뿐만 아니라 경제학, 정치학, 경영학, 행정학, 사회복지학 전반에서 이런 경향이 발견됩니다만. 너무 많아서 추린게 이정도입니다.

정확하게 님이 하신 말을 돌려드리지요. 도대체 폴라니가 말한 사회가 국가라고 이야기하지 않는 님의 자신있는 태도에 대한 근거가 무엇인지요? 적어도 학계에서 '주류'로서 통용되어지는 쪽에 가까운 해석을 내놓은 것은 저이지, 님이 아닙니다.

혹시나 오해하실까봐 덧붙입니다만, 학계에서 주류를 차지하고 있는 해석이 아니라고 해서 그것이 '틀린' 내지는 '잘못된'해석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님이 주장하고 있는 입장 같은 경우는, 엄밀히 말하자면 폴라니가 제시한 원문에 기초한 해석이라기보다 홍기빈씨나 우석훈씨 같은 경제학자들이 폴라니의 텍스트를 기반으로 하여 '새롭게 변형시킨' 또 다른 이론에 불과할 따름입니다. 그래서 제가 덧글을 통하여 폴라니의 텍스트(거대한 변환)를 구체적으로 인용하여 이를 반박하거나 증명해 달라고 처음부터 논의가 이루어질 범위의 한계선을 분명히 설정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근거 없이 이런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석훈씨에 의하면 자신의 해석이 칼 폴라니의 원전에서 상당히 벗어나는 것은 사실이나, 원전을 뛰어넘어 이제는 더욱 창조적인 대안을 만들 필요가 있다며 자신의 견해에 대한 폴라니의 원전(이 경우에는 거대한 변환)에 의거한 직접적인 반박에 대해서 대답을 회피하였습니다(연세대학교 문화인류학과 학부수업, 경제 인류학 수업 강의 내용중 일부에서 직접 언급).계속 반복합니다만, 원전으로부터의 인용에 의거한 해석과 원전과는 전혀 다른 의견의 개진은 명확히 분리되어야 합니다.

또 다른 근거를 대볼까요. 현재 우석훈씨와 함께 칼 폴라니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는 연세대학교 사회학과 박찬웅 교수 역시도 칼 폴라니의 주장은 국가가 의식적인 측면에서 개인의 규범과 행동의 지침을 바꾸어 그들로 하여금 자발적으로 시장을 국가라는 틀 안에 재배태시키는 쪽에 가까운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직접 면담을 신청한 끝에 들은 내용입니다.

이로써 제가 제시한 근거는 최소한 다섯 가지가 되었습니다(우석훈 자신의 시인, 박찬웅교수와의 면담 결과, 거대한 변환이라는 텍스트 자체의 내용, DB 검색결과, 스카치폴의 저작) 님이 만약 제가 제시하는 의견에 대하여 제대로 된 반박을 하고 싶었다면, 님이 해석하는 사회란 과연 무엇인지에 대한 정확한 정의 + 논지를 뒷받침해줄 근거들이 필요합니다. 폴라니의 '원문'과 그것을 기반으로 진행된 연구들을 중심으로 말이지요. 아무런 확인도 해보지 않고, '그것은 님의 해석이다', '그것은 사회학계에서나 통용되는 것이다' 라고 단정지어버리면 몹시 곤란합니다.

2. 폴라니는 기본적으로 경제 '인류학자'였지, 경제학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인류학적 상상력을 발휘하여 문제의 해결책을 우석훈씨나 홍기빈씨가 제시하는 방식의 '구체적이고 시장 간섭적인 대안'의 형태가 아니라 인간의 의식적, 규범적 측면의 변화가 국가라는 하나의 공동체에 의하여 추동되는 과정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덧붙이자면 님이 제시하신 경제학에서조차 일부 제도주의자들의 경우 우석훈이나 홍기빈씨의 의견에 대하여 비판적으로 바라봅니다. 그들은 폴라니가 이야기 한 '제도로서의 국가'에 주목하여 폴라니의 텍스트를 해석하고 경제학적인 의미를 찾아내려 합니다. 본래 경제학이란 정교한 수식과 이론을 통해 표현되어지는 하나의 추상화된 경제논리 혹은 체제(operating systems or logics)입니다만, 인류학은 그렇지 않죠. 그렇기 때문에 폴라니는 구체적인 이론을 들어 현상을 설명하기보다 원시부족에 대한 문화 기술지적인 예를 들어가면서 대안 또한 의식적인 측면에서의 근본적인 변화라는, 매우 철학적인 측면에서 풀어 나가고자 한 것입니다.

3. 반시장적 노력의 실패라는 부분에 대해서, 저는 앞서 덧글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이에 대하여 폴라니는 몇몇 지식인들이(앞서 언급한 해리엇 마티노와 같은) 자급자족 혹은 상호호혜적 관계의 경제체제를 당시의 시장 체제의 팽창을 막는 도구로 사용하거나 그 체제 안에 조금이라도 덧붙여보려는 노력을 끊임 없이 기울였으나 모두 실패했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책이 씌여진 시점에서 볼 때에 상당히 현대에 가까운 시기에 이루어졌던 반 시장주의적인 노력들조차도 결국은 실패했다며 상당히 비관적인 논조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 증거로서 폴라니는 파시즘과 대공황, 세계대전을 내세웠습니다.

...폴라니는 이러한 국가를 당시 시장의 파괴적 속성에 대응하여 왜곡적인 형태의 사회보호의 일환으로 나타난 파시즘적 국가와 차별화 하기 위하여, 새롭게 나타날 국가는 파시즘과는 다르게 문화적 그리고 개인적 영역의 자유를 수호하면서도 강력한 제제를 발휘할 수 있는 하나의 발현적 실체가 되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즉, 폴라니는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고자 하는 인간 의식 그 자체를 변화시키는 방법을 위한 사회의 각성이라는, 매우 규범적인 측면의 문제를 강조하였지, 대안경제의 추구와 같은 구체적인 해법을 논한 적이 없다는 겁니다.

바로 이러한 부분이 폴라니의 생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입니다. 실질적이고 경제학적인 부분에서 아무리 자기조정적 시장을 막으려고 노력을 해도, 심지어 상호호혜적 무역의 부활이나 자급자족을 경제체제 내에 인스톨하려는 시도가 빈번하게 이루어진다고 해도, 사회와 경제에 대한 인간의 구체적인 관념과 이에 따르는 규범의식, 그 자체가 변화하지 않으면 어떤 노력을 해도 자기파괴적인 시장의 본질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이 칼 폴라니의 의견이었습니다. 그는 이런 주장을 하면서도 그 주체가 국가가 되어야 하고, 섣불리 사회를 파괴하거나 자본주의 논리 그 자체를 재조직화 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보았기 때문에 그토록 칼 맑스에 대하여 비판적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인하여 저는 위의 부분에 대한 해석을 실질적, 행동적, 경제학적 측면에서의 반시장적 노력의 실패의 예로 들고 있고, 이에 대해서는 앞서 제시한 논문의 저자들도 대체적으로 동의하고 있습니다.

3. 님은 앞서 덧글에서 이렇게 주장하였습니다.

...폴라니가 계급이 아니라 개별적 실체로서의 인간을 강조한 것은 맞지만 그 집합체로서 상정한 것은 국가가 아니라 다양한 공동체입니다.

개별적 실체로서의 개인이 궁극적으로 국가에 통합된다고 해서 다양한 공동체에 통합되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혹시 제가 이야기하는 폴라니 방식의 국가를 무슨 국가만이 최고의 공동선이며 국가 이외의 나머지 공동체에 대해서는 허용하지 않고, 오로지 국가라는 안에 모든 인간이 통합되어야만 사회적으로 행복해지는 그런 모델로 생각하고 계신 거였나요? 님 논리대로 따지면 모든 개인이 궁극적으로 국가에 통합된다는 것은 그 국가 내에 존재하는 다양한 공동체는 다 사라져도 무방하다는 의미로도 해석되어질 수 있는데, 이거야말로 파시즘의 전형적인 한 형태이지요. 폴라니가 제시하는 국가는 님이 생각하는 그런 모델이 아니라 개별적 실체로서의 인간과 그들이 이루는 공동체 모두를 아우르며 시장에 대한 자기보호적 행동을 개시하는 하나의 고유한 행위자(agent)입니다.

또한, 이택광님의 글을 기반으로 논의가 출발하였으므로, '판을 뒤엎는다'는 표현은 기존의 자본주의적 시장 체제와 질서 그 자체를 전복하고 해체하는 획기적인 아이디어의 전환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님은 이에 대해 폴라니의 원전 텍스트를 바탕으로 심지어 이런 판 뒤엎기 논의도 가능하다면서 이야기를 하셨고, 저는 폴라니의 주장은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면서 운을 뗀 것이 이 논의의 시발점이었음을 간과하지 말아 주셨으면 좋겠는데요. 따라서 이 논쟁에 있어 님이 디펜스 해야 할 부분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데

1)폴라니가 사회가 시장에 간섭해야 한다고 주장한 부분에 대하여 오히려 공상적 사회주의자에 가깝다고 이야기 한 점(즉 폴라니는 노동자계급만이 아니라 사회 일반의 이해를 중시한 일종의 인민주의 내지 공동체주의자이지만 넓은 의미에선 사회주의자의 범주에 포함되지, 결코 케인즈주의의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생각됩니다-이 주장에서의 근거). 해당 주장의 타당성이 성립된다면, 시장 통제의 주체로서 사회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정의 제시 필요.

2)님이 얘기하는 폴라니가 판을 뒤엎는다는(여기에서의 판을 뒤엎다는 표현은 택광님의 의도대로 자본주의의 핵심적인 경제 시스템 그 자체를 뒤엎는 것) 측면에서 영감을 줄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원전에 의거한 근거제시 및 자세한 설명

입니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되돌아 보았을 때, 저는 님이 이 두 가지의 의제에 대하여 성실히 답변하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계속해서 몇몇 같은 학자들의 이름, 그마저도 출처가 불분명하고 논점을 명확하게 뒷받침하지 못하는 근거들이 제시되고 있다고 느껴집니다.

그러나 저는 님이 제 의견에 대한 대답 내지는 변론을 성실이 이행해야 한다고 강제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제 견해를 반드시 반박해야 한다는 의무감은 가지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토론은 이기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 한 주제를 바라보는 관점을 넓혀 나가기 위해 필요한 지적 여정에 가까운 것일 테니까요. 굳이 바쁘다는 분을 더 바쁘게 만들 생각은 없습니다.

글쎄요

2009.04.09 15:43:44
*.248.192.169

후.../

1. 조금 어처구니가 없군요. 제시하신 논문들 내용이나 확인하셨는지? 제시하신 논문들 중 한글논문들을 다 확인해보았습니다. 그런데 5개의 논문 중 어느 것에도 님이 이야기하신 방식의 폴라니적 국가관을 지지하는 내용은 전혀 없던데요? 오히려 1),2),3)번 논문은 명시적으로 저의 견해를 지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4),5)는 폴라니의 국가관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내용이구요. 혹시 그냥 학술DB에서 폴라니, 국가 정도를 집어넣어 나온 결과를 내용도 확인하지 않고 그대로 올리신 것 아닌가요? (댓글 내용으로 판단하건대 연대 사회학과 대학원생 정도 되시는 것 같은데, 학교도서관에서 접속하면 해당 논문들 다 공짜로 다운받을 수 있습니다. 저처럼 돈내가면서 다운받을 필요도 없는데 그정도 시간을 투자 못하시나요? 공부하시는 분이라면 최소한의 내용확인은 기본이라고 생각합니다만)

관전자 분들을 위해 해당논문 중 1),2),3)번을 올려드립니다. 특히 3)의 이병천 교수 논문은 폴라니 사상에 대해 잘 요약정리했다고 보입니다. 윤형님 이하 관전자 분들도 이런 단편적인 댓글 논쟁을 통해 '날로 먹으려' 하지 마시고 (폴라니에 대해 잘못된 이해를 할 위험성이 큽니다) 책을 읽기가 어려우시다면 완결된 논문 정도라도 찾아보시는 수고는 하시길 권유드립니다. 3)과 2)정도만 읽어보아도 폴라니 사상의 대강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추가로 더 알고 싶으시다면 학술DB에서 폴라니로 검색해서 찾아보시면 됩니다 (이미 말했듯이 학교도서관에서 학술DB에 접속하면 무료로 다운받아 볼 수 있습니다). 게시판에만 너무 의존하지 마시길.

1)과 3)논문은 아래 게시물에 올려두었습니다. http://newjinbo.org/board/view.php?id=free&page=779&no=32526
2)는 아예 웹상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아래 링크를 참조하십시오.
http://jbreview.jinbo.net/maynews/readview.php?table=organ&item=0&no=256

4),5)도 원하신다면 올려드릴 수 있습니다만, 폴라니의 아이디어를 일부 사용했다 뿐이지 폴라니의 사상이나 국가관을 다룬 논문이 아니므로 일단 제외했습니다. 필요하시다면 요청하시면 올려드리겠습니다.

이제 각 논문들의 내용을 잠깐 봅시다. 과연 후...님의 견해와 제 견해 중 어느 쪽을 지지하고 있는 것인지 판단해보시지요.

1)의 p49~50을 보면 폴라니에 대한 접근에 있어서 시장에 대한 비판과 시장이 아닌 대안을 강조하는 접근(저의 이해)과 대안이 아니라 시장에 대한 보완의 의미만을 강조하는 접근(후...님의 이해)을 이야기하면서 후자의 입장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즉 후...님 식의 접근을 비판하는 내용임에도 이걸 님의 입장을 지지하는 논문으로 제시하시다니요?

2)의 5장을 보시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그의 사회적 규제와 제도는 국가와 정치적 해법보다는 국가와 시장 사이에 놓인 영역 즉, 시민사회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폴라니에게 사회란 시장, 경쟁, 이윤추구로부터 독립되어 개인들간의 다양한 관계망이 유지되며, 그 속에서 개인의 유일성에 입각한 자유가 펼쳐지는 공동체적 공간인 것이다. 그러한 (시민)사회의 발견이 폴라니가 시장통제를 가능케하는 대안으로 상정하는 것이라 하겠다' 즉 폴라니에게 있어서 시장을 통제하는 주체는 국가가 아니라 사회공동체라는 저의 견해를 지지하고 있습니다.

3)의 p165의 민주적 사회주의에 대한 언급, p175~176에 나오는 내용들(특히 '공동체 내부의 내발적 내생적인 분업경제를 통한 인간의 자유'를 언급한 부분과 '시장과 국가를 넘어선 경제학 비판'이라는 언급), p182의 '자유를 구현하는 가운데 허구적 상품(폴라니는 노동,토지,화폐를 허구적 상품이라고 보았음)을 폐기한 비시장사회적인, 실체적 제도경제로서의 산업문명을 구축하는 것이 그의 대안적 비전'이라고 한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그리고 이때 실체적 제도경제란 호혜, 재분배, 교환을 모두 포함하는 개념입니다(p164 참조). 즉 폴라니는 시장을 넘어서서 호혜, 재분배, 교환이 함께 경제의 원리로 작동하는 사회를 꿈꾼 것이며, 위에서 제가 제기한 견해와 동일합니다.

결국 후...님이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는 근거로 제출한 논문들 중 어느 것도 후...님의 견해를 지지하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후...님의 견해가 후...님만의 독특한 견해는 아닌 것 같군요. 1)의 p50의 8번 각주와 관련된 내용을 보면 후...님과 비슷한 견해를 가진 분들도 일부 있는 것 같으니까요 (박찬웅 교수나 스카치폴도 비슷한 입장인 듯 하구요. 그런데 스카치폴이라면 '국가와 사회혁명'의 저자지요? 읽은지 오래되었지만 그 책을 읽은 소감은 혁명을 지나치게 국가 내지 정치제도의 관점에서 접근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국가를 중시하는 그녀의 관점이 폴라니 해석도 그런 방향으로 하게했겠지요). 하지만 p49의 7번 각주를 보면 후...님의 견해를 반박하는 쪽이 훨씬 많은 것으로 보입니다. 위의 세 논문들도 그렇고 박현수,홍기빈,우석훈씨 등이 모두 그런 관점을 취하고 있지요.

님의 논거 5개 중 우석훈의 시인은 우석훈씨 생각 중 일부가 폴라니 생각과 다르다는 것을 시인한 것으로 보이므로 사회=국가라는 님의 주장의 근거가 되지 못합니다. 그리고 거대한변환이라는 텍스트 어디에도 사회=국가라는 내용은 나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국가는 시장원리를 일반화하는 데 개입했다고 나오지요(자유방임은 국가개입의 결과라는 거대한 변환 12장의 유명한 명제). 반면 시장원리에 대항해서 사회를 보호하기 위한 각종 행동들은 국가와 관계없이 자발적으로 이루어졌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사회=국가라고 생각하기는커녕 그 반대로 국가의 개입에도 불구하고 사회는 스스로 자기를 방어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DB검색 결과는 위에서 말한대로 님의 견해가 아니라 제 견해를 지지하고 있습니다. 결국 님의 논거 5개 중 실제 논거는 2개뿐입니다. 박찬웅 교수와 스코치폴의 입장이지요. 즉 님식의 폴라니 이해는 사회학계를 중심으로 한 학계 일부의 주장일 따름입니다. 학계 일부의 주장을 부정할 수 없는 일반적 견해인 양 강변하지 마시길.

글쎄요

2009.04.09 15:53:04
*.248.192.169

2. 실재론적 의미의 경제(실체적 경제)와 형식론적 의미의 경제(형식적 경제)의 구분은 거대한 변환에는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인간의 살림살이에 나오는 개념이지요. 님은 여기서도 약간의 반칙을 하셨는데, 마치 폴라니가 실체적 경제/형식적 경제의 개념과 호혜,재분배,시장원리 등을 서로 구분해서 사용했음에도 제가 일부러 혼용한 것처럼 주장하셨는데, 폴라니가 인간의 살림살이에서 실체적 경제라고 한 것의 내용 자체가 호혜,재분배,시장원리 등 다양한 원리들이 함께 인간의 구체적인 살림살이를 구성하는 경제원리로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내용으로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인 것으로 압니다. 님이 친절하게 찾아주신 이병천교수 논문에도 그런 식으로 이해하고 있거니와 (이병천 논문 p164 참조), 제가 두번째 댓글에서 말한 내용도 바로 그러하지요.

반시장적 노력의 실패와 관련해서는 다시 말씀드리지만 거대한 변환의 전반부와 후반부를 구분해서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거대한 변환의 전반부(악마의 맷돌 부분)는 시장원리가 전면화되는 과정에서 그를 저지하려는 다양한 반시장적 노력이 실패했다는 것을 기술한 부분입니다. 그래서 님이 제시하신 각종 예들이 언급된 것이지요. 반면 거대한 변환의 후반부(사회의 자기방어 부분)는 이런 과정을 통해 전면화된 시장원리가 사회(인간,자연,생산조직)를 파괴함으로써 파탄에 이르게 되는 과정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즉 시장원리의 전면화와 그에 대한 사회의 방어라는 이중적 운동의 모순이 격화됨에 따라 파시즘이나 대공황, 세계대전이 발생한 것이지요.

도대체 스스로 '대안은 민주적인 사회주의'라고 주장하고 초기 맑스를 적극 지지했던 사람을 (홍기빈씨 책 p95~96 및 p83~85 참조) 비시장적 노력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본 비관주의자로 해석하시다니오. 폴라니의 생각 - 사회주의적인 경제의 통제와 문화적 자유, 정치적 민주주의가 공존해야 한다는 생각 - 은 지나치게 이상주의적이고 낙관적이라고 비판받는 게 오히려 일반적이지 (이병천 논문 p180 참조), 시장 이외의 대안은 없다고 주장하는 비관주의자라는 해석은 이미 말씀드렸듯이 일부의 해석일 뿐입니다.

그리고 폴라니가 맑시즘을 비판하는 이유에 대해서도 전혀 일반적이지 않은 해석을 하시는군요. 님은 '주체가 국가가 되어야 하고, 섣불리 사회를 파괴하거나 자본주의 논리 그 자체를 재조직화 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보았기 때문에 그토록 칼 맑스에 대하여 비판적이었다'고 말씀하시는데, 폴라니가 그런 식으로 말한 적은 (적어도 제가 알기로는) 전혀 없습니다. 폴라니가 맑시즘을 비판하는 대표적인 부분이 거대한 변환의 13장입니다. 거기서 폴라니는 계급이론이라는 것 자체가 경제적 이익을 최우선으로 보는 관점을 시장자유주의자들과 공유하고 있다고 비판합니다 (민음사 번역본 p189~192 참조). 폴라니는 특정한 계급의 이익이 아니라 다양한 인간들로 구성된 사회 일반의 이익이 더 중요하다고 보았고 경제적 이해만이 아니라 사회적 욕구나 문화적 풍요도 중요하다고 보았기에 '경제주의적 편견'(폴라니는 명시적으로 '경제주의'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민음사 번역본 p199~202 참조)을 지닌 맑시즘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지요 (이에 대해선 이병천 논문에도 서두에서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병천 논문 p160 참조).

게다가 폴라니는 경제학철학수고 등 초기 맑스의 저작이 소개된 이후, 초기 맑스의 입장을 매우 높게 평가합니다 (홍기빈씨 책 제3장 참조). 이런 사람을 '자본주의 원리를 재조직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한 사람으로 보시다니오. 홍기빈씨 책 제3장과 4장, 5장을 읽어보면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홍기빈씨 책은 홍기빈씨의 주장이나 해석이 아니라 폴라니가 직접 쓴 글을 번역한 책입니다. 거기서 폴라니는 명시적으로 사회주의를 옹호하고 있지요. 다만 경제결정론이나 전면적인 관치경제에 반대하고 있을 뿐입니다. 말씀하신대로 의식적, 규범적 변화('내적 조망'이라고 표현하고 있지요. 제4장 참조)도 중요하다고 보기 때문에 관치경제를 비판하지요.

하지만 님의 주장대로 의식적, 규범적 변화만이 중요하다고 본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의식적, 규범적 변화를 위해서라도 현재의 시장원리에서 벗어나 인간적인 공동체를 보장해줄 최소 조건의 형식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홍기빈씨 책 p96 참조). 또 그에 이어서 '대중이 변화한다면 사회구조를 깨지 않고도 세상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관점(님이 폴라니의 주된 생각이라고 말하신 내용)을 명시적으로 반박하고 있습니다. '천사들이 떼로 몰려온다 해도 인간적 정의와 공동체를 실현하도록 자본주의를 관리할 수는 없다'(홍기빈씨 책 p96~97 참조)라고 말하고 있지요. 즉 폴라니는 님 식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습니다. 본인 스스로 반박하고 있는 내용을 폴라니 사상의 핵심이라고 주장하시면 곤란하지요.

글쎄요

2009.04.09 15:56:09
*.248.192.169

3. '판을 뒤엎는 것'과 관련해서는 제 첫 댓글을 잘 읽어보십시오. 저 역시 폴라니가 구체적인 경제대안을 제시하지 않았다는 데에는 동감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맑스도 자본주의에 대한 '구체적인' 경제대안을 제시하지는 않았지요). 게다가 폴라니가 말한 사회란 것이 비계급적이고 추상적인 인간 (개인의) 공동체라는 관점에 근거하고 있기에, 자본에 대한 구체적인 비판이나 해방의 주체로서의 계급이라는 관점이 사상되어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병천 교수도 논문의 끝부분에서 이와 비슷한 비판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이병천 논문은 폴라니 사상의 한계까지도 적절히 언급한 좋은 논문입니다). 윤형님은 아시겠지만, 저는 개인적으로는 폴라니보다는 맑스에 훨씬 가깝습니다.

하지만, 폴라니의 관점은 이상주의적이긴 하지만 현실사회주의가 놓쳤던 부분에 대한 성찰을 제공해준다고 생각합니다. '판을 뒤엎는 것' 그 자체로는 폴라니보다는 맑시즘의 관점이 훨씬 유효하겠지만, 판을 뒤엎고 만들어지는 새로운 사회(사회주의) 체제가 경직된 관료 중심의 관치경제로 빠지지 않으려면 정치적인 민주주의와 문화적 자유, 다양한 인간 공동체의 회복을 사회주의적인 경제통제와 더불어 중시하는 그의 관점이 유효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른바 '민주적 사회주의'지요. 이에 대해선 이미 말씀드렸듯이 홍기빈씨 책의 제3장과 4장을 참조하시면 됩니다. 거대한 변환에도 관련된 언급이 나오구요 (민음사 번역본 p284와 p307~309 참조).

가령 홍기빈씨 책의 제3장을 살펴보면, 폴라니는 사회주의를 옹호하면서 사회주의는 '인간들이 공동체를 만들 수 있는 제도를 갖춘 사회'이며 '인간 공동체를 최대한 실현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폴라니에게 있어서 경제통제의 주체는 사회주의적 통제에 바탕한 (단, 정치적 민주주의와 문화적 자유를 같이 보장하는) 인간공동체이지요. 이와 관련해서는 거대한 변환의 (민음사 번역본) p201도 참조할 수 있습니다. 폴라니는 존 콜리어를 '도덕적 천재'라고 칭송하면서 (폴라니 입장에서 도덕적 천재라는 말은 최상급의 칭찬입니다) '다시 소생한 공동체'를 '사회의 회복'이며 '기적'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폴라니에게 있어서 인간공동체(인격적인 관계의 공동체)야말로 사회를 이루는 핵심입니다. 물론 폴라니는 산업사회 전체를 거부하고 단지 공동체만을 강조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는 산업화나 시장원리 자체를 전면적으로 부정하지는 않았으며 이는 제 첫 댓글에서 이미 밝힌 바 있습니다. 하지만 시장원리만이 지배하는 시장사회가 아니라 인간과 인간공동체를 구성하는 다양한 사회적,문화적,경제적 원리(호혜와 재분배를 포함한)가 함께 어우러지는 사회를 꿈꾼 '민주적 사회주의자'임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님은 그를 케인즈 아류(그렇게 표현하지 않았다고 말씀하시는데 님의 첫 댓글은 아류라는 용어를 쓰지 않았다 뿐이지 그렇게 읽힙니다. '폴라니 류의 국가개입에 의한 시장 조정은 케인즈부터 비롯해서 수차례 여러 학자가 얘기한 내용'이라고 하시지 않았나요?) 쯤으로 말씀하시는데 이미 말했듯이 이는 일반적인 해석이 아닙니다.

후...

2009.04.10 15:23:54
*.132.96.217

글쎄요 님께//기다리던 덧글이 왔군요. 반갑습니다. 우선, 논의에 들어가기에 앞서 몇 가지 간단한 언급을 하고 들어갈까 합니다.

1)님, 제 주장에 대한 근거에 대한 강변과 저라는 사람의 퍼스널리티에 대한 님의 가치판단을 섞지 마십시오. 여기서 자기 돈을 들여 DB를 다운받았다느니, 자신과 토론하는 상대에 대하여 토론 이외의 부분을 언급하는 듯한 행동들은 부당하다고 봅니다. 님은 저에 대하여 구체적인 직업과 학문 필드 + 공부하는 사람이라는 전제를 제멋대로 깔아놓고 당위적인 훈계까지 하고 계십니다. 보기 정말 눈살이 찌푸려 지는군요.

내용을 이해하고 있느냐/특정 논문을 읽어본 게 맞느냐와 같이 어느 정도 이 토론과 연계되어 있는 지점에서 이루어지는 비판과 질문에는 저역시 동의하고 성실히 답변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됩니다만, 그 이외의 부분을 들고 나오시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해집니다. 처음부터 누군지 짐작이 간다느니, 그건 당신만의 주장이라느니, 사회학계만의 주장이라느니 하는 식으로 저를 몰아가시고, 이에 대해 반박하기 시작하니 이제는 신상에 대한 것까지 모독하실 생각입니까. 최소한 저는 님이 책을 읽지 않고 이야기 하는 것은 아닐까 의심해 본 적은 있어도, 님의 신상정보를 추측하여 공격하거나, 제가 자료를 조사하는데 들인 시간과 비용을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한 축으로 활용하고자 하는 행위는 하지 않습니다. 덧붙여 말씀드리자면 애석하게도 저는 님이 예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대학원생이 아닐 뿐더러 공부를 업으로 삼고 있는 처지 역시 해당되지 않습니다.

2)이번 디펜스에 앞서 다시 한 번 강조드리고 싶은 것은, 바로 이 덧글에 앞서 님이 행해주신 디펜스는 근본적으로 제가 제시한 주장의 근거들에 대한 반박일 뿐이지(그것조차도 제가 이 덧글의 뒷부분에서 상세하게 다룰 테지만), 제가 제시한 핵심 논점에 대한 비판들, 이를테면 칼 폴라니의 원문글에서 직접 인용된 구절을 통한 강변과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 '님이 생각하는 사회에 대한 구체적인 정의'는 찾아보기 힘들어 아쉽다는 점입니다. 제가 이렇게 계속되는 요청을 드리는 이유는, 님이 정의하는 사회의 의미와 제가 정의하는 사회의 의미가 다를 경우 발생할 수 있는 문제점, 님이 인용하는 폴라니의 책과 제가 인용하는 폴라니의 책의 버전이나 내용이 다를 경우 발생할 수 있는 문제점에 대하여 상당한 우려가 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님 주장이 맞다고 쳐도, 님이 사회를 무엇이라고 셋업하는가에 따라서 폴라니에 대한 분류는 도리어 제 쪽에 맞게 설정되어질 수도 있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 왜 별다른 대답이 없는 것인지 안타깝습니다.

후...

2009.04.11 02:15:01
*.173.145.198

1)1번 김영진의 논문에 대하여

49p ~ 50p 그런데 방법론적 측면에서 폴라니는 상당히 다르게 해석되고 있다. 가장 기본적인 쟁점은 그의 논의에 대해서 자유주의 시장에 대한 비판적 측면에 초점을 둘 것인가, 아니면 경제에 대한 제도로적 접근에 둘 것인가에 관한 것이다. (중략) ...이 글에서는 제도론적 접근의 중요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시장 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에 초점을 두고자 한다.

님은 이 부분을 읽고 비판하시는 것 같은데, 저는 '제도주의자' 가 아니라 규범적 측면에서(흔히들 도덕과학이라는 표현을 씁니다만) 칼 폴라니가 제도주의와 자유주의 모두를 비판한 것에 대해서 지속적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만.

정말 죄송한데, 폴라니 이론에 대한 접근방식 중 제도주의적 해석/ 구조주의적 해석/ 도덕과학 혹은 도덕철학적 해석/ 국가중심주의적 해석에 대해 정확한 개념 구별은 하실 줄 아시는 건지...제가 계속해서 들고 있는 입장은 도덕철학적 해석에 국가중심주의적 해석을 가미한 형탭니다.

52p ...그런데 폴라니에 의하면 목적이나 수단의 선택은 단순히 경제적으로 합리적인 것에 그치지 않고 도덕적이고 실천적인 요구에 대한 동기나 평가를 내포한다. (중략) ...시장 편향적 사고에는 정치적인 측면에 대한 고려가 결여되어 있다. 수요-공급에 의한 가격형성 메커니즘과 같은 순수 이론적인 기제만이 주목될 뿐, 경제의 다른 제도적인 배경은 충분히 고려되지 않는다.

56p 좀더 구체적으로 폴라니의 관심사는 인간의 역사에서 나타나는 각종 경제형태에서 노동, 토지 등 주요 재화나 서비스의 생산 및 거래가 넓은 의미의 사회조직이나 문화와 어떻게 제도적으로 결합되어 있는지 규명하는 일이었다.

57p 경제가 사회적 관계에 묻혀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가 시장체제에 묻혀있다. 사회의 존재에 대한 경제적 요소가 갖는 결정적인 중요성으로 인해 다른 결과란 있을 수 없다. (중략)...시장경제는 시장사회에서만 기능할 수 있다는 잘 알려진 주장은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이다. (중략) ..그렇지만 근대 이후의 경험은 경제가 묻혀있던 사회적 관계들을 파악해내기 위해 필요한 어떤 개념적 틀도 제공하지 않고 있다.

58p 결국 인간의 경제행위는 사회조직의 다른 측면들과 연관시켜서만 설명될 수 있다. (중략) 이처럼 개인이 아니라 사회제도에서 출발한다는 의미에서 한 사회의 제도적 구조가 개인의 행위에 큰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 폴라니가 이해하는 사회이론의 기초이다.

이 부분에서 '사회적 관계'를 움직이는 것이 바로 규범과 규제와 같은 도덕적인 측면이고, 사회의 제도적 구조를 대변하는 실체가 국가라고 해석하는 것이 제가 견지하는 입장입니다. 님, 사회적 행위는 사회와 동의어가 아닙니다. 개념 구분을 명확히 하시기 바랍니다.

64p 결론파트-여기서 비시장사회와 시장사회의 구분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는데, 그것은 사회에서의 경제의 위치와 관련된다. (중략) 물론 폴라니의 많은 논의는 현실을 지나치게 단순화시킨 측면이 없지 않다. 이를테면 경제통합 유형과 관련하여 폴라니는 중국과 같은 동양사회에서 재분배의 통합유형이 지배적이었다고 보고 있다. 좀더 자세한 설명이 없는 한에서는 사회 전체의 재화배분이 중앙정부의 관할사항인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중략) 특히 폴라니 스스로도 결코 양보할 수 없었던 인간의 보편적인 가치인 자유와 민주주의는 시장경제와 역사적으로 함께 발전해 왔다.

-이 부분이 폴라니의 원전에 언급된 생각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예입니다. 즉, 폴라니는 민주제 사회를 고수하는 방식으로 사회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려고 하였고, 이 과정에서 국가가 중요한 행위자로 떠오른 것은 그의 한계였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적어도 본문, 제가 줄기차게 주장하고 있는 폴라니의 원저작의 한도 내에서는 이 점에 대해서 제가 주장한 국가=사회로 치환될 수 있는 해석의 여지가 분명해 존재할 뿐만 아니라, 학자들도 이에 대해서 대체적으로 동의하고 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위의 논문은 저의 입장을 지지합니다.

2) 2번 송호근의 논문에 대하여

372p 같은 시기 경제적 자유주의의 맹신자였던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와 같은 이가 정치와 케인즈주의적 개입주의적 국가의 역할을 예속의 길로 표현하며 급진적인 경제적 자유주의를 표방하고 있을 때, 폴라니는 오히려 자기조정적 시장의 환상을 바로 그 현재적 위기의 본질로 진단한다는 측면에서, 자유의 실현을 두고 두 가지 정반대 되는 해석과 접근이 대비된다고 하겠다.

375p 다시 말해, 이 책은 국제체제의 본질과, 자기조정적 시장경제, 그리고 사회의 대응 속에 전개되는 대전환과정과 궁극적으로 자유의 추구라는 상호 모슨된 추구를 역사적 관점을 따라 흥미롭게 조망하며 분석하고 있다.

377p 그러면서도, 폴라니의 시장 분석은 정치경제적으로 어떤 법칙론적이며 단계적으로 잘 완성된 경제학적 이론의 틀을 갖고 있지는 않다. (중략)...즉, 폴라니의 시장경제 분석에서는 역사를 추동하는 특정한 주체가 등장하지 아니한다. 때문에, 노동계급과 부르주아지와 같은 사회계급이 자본주의 내 대립적 갈등의 두 축을 형성하고 있다는 것과 같은 엄격히 정의된 사회계급론적 시각은 찾아볼 수 없다.

379 ~380p 이렇게 볼 때 폴라니는 인간사회의 기본적인 교환관계와 그 활동의 장으로서 시장의 기능을 부인하지 않으면서도, 대신에 그것이 어떤 시장이냐를 묻고 있는 것이다. (중략)...동시에 폴라니는 시장자체가 제도화이자 제도화 과정이라고 본다. (중략)...그래서 그의 메시지는 바르게 기능하는 인간사회, 공동체적 미덕이 보존될 수 있는 방향으로 시장이 작동하도록 시장이 통제되어야 하는 사회이다. 그러나 시장의 기능과 존재를 인정하는 한, 과도한 시장의 통제는 다시 생산과 교환의 효율성을 저해하며 시장의 반발을 초래하게 된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폴라니는 '반시장주의자'라기보다는 결국 '시장조절론자'였다고 할 수 있다. 2차 세계대전 후 냉전기에 중앙집중화된 현실 사회주의의 분배체계와 권력의 집중이 오히려 인간의 자유를 억압한 결과를 초래한 반면, 폴라니의 시장경제와 사회의 변증법을 통해 제시된 조절된 시장경제는 전후 복지자본주의의 발전에로 이끄는 길을 열어 놓은 셈이다.

위 부분에서 바르게 작동하는 인간사회, 공동체적 미덕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규범과 도덕입니다. 그리고 시장을 교환관계의 장(님, 계속 혼동하시는 것 같은데 시장과 시장'체계'는 다른 개념입니다)이라는 측면에서 보았을 때, 폴라니는 시장을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송호근은 폴라니를 일종의 케인즈주의적 입장을 가진 인물이라고 보았습니다. 이 부분은 그러한 그의 생각을 단적으로 드러내 줍니다. 혹시 논문의 앞부분만 읽으신 것은 아닌지요.

386p. 임금 격차가 존재하되 노동의 비금전적 측면이 무시되지 않는 경제, 토지와 자연자원의 가격이 시장외부적 요인들과 함께 고려되면서 결정되는 경제, 화폐에 대한 통제권이 시장에서 제거된 경제

다음은 송호근이 폴라니를 인용한 예입니다. 이 모델은 결정적으로 케인즈주의가 이야기하는 시장간섭과 상당 부분 닮아있다고 여겨집니다.

3) 3번 이병천의 논문

163p 폴라니의 시장사회 비판은 깊숙한 제도 경제론의 기초를 가지고 있다. 그는 경제 또는 경제적이 가진 의미를 형식적 의미와 실체적 의미로 엄격히 구분하고 실체적 의미를 중심으로 제도 경제학을 제창했다. (중략)...이 정의에서 매우 중요한 것은 욕구를 식량이나 주거와 같이 육체적으로 필요한 것으로 한정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164p~165p 그리하여 폴라니에서 제도론은 인간사회가 경제적 기능을 제도화하는, 즉 경제행위에 의미와 안정성, 통합성을 부여하는 관습적 행위와 제도적 배열 방식을 비교 연구하는 것이다. 시장사회에 대한 폴라니의 이같은 비판은 착근된, 실체적 제도경제론에 기반한 그의 독특한 인본적, 민주적 사회주의의 대안으로 이어진다. 그에 따르면 사회주의는 사회로부터 이탈된 자기조절적 시장을 민주적 사회에 종속시킴으로서 이를 뛰어 넘으려고 하는 산업 문명에 내재되어 있는 경향으로 파악한다.

님은 아마 이 구절에 사회적 민주주의가 나온다는 이유만으로 시장 통제의 주체를 사회로 파악하신 것 같은데, 이 사회적 민주주의서조차 국가는 의회의 대표들로 구성된 경제통제의 주체이자 독립된 행위자랍니다. 사회적, 이라는 말이 들어갔다고 해서 추상적인 존재인 사회가 시장통제의 주체가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폴라니는 그러한 사회주의와 자기 견해를 구별하기 위하여 사회적 민주주의라는 단어를 사용한 겁니다.

171p 폴라니에 따르면 자기조절적 시장사회의 파괴적 작용에서 사회를 방어하려는 운동은 세 방향에서 전개되었다. 노동에서 사회입법의 실시, 곡물관세, 화폐영역의 중앙은행에 의한 통화정책이 그것이다.

-세 가지 모두가 케인즈주의자들이 실시했던 것과 일치합니다. 이것 역시 주체는 국가였고 말입니다. 하지만 논문에서는 계속해서 케인즈의 메인 아이디어와는 비슷하면서도 특유한 폴라니의 주장에 대한 부연 설명이 나오는데...

175p 그는 당대의 형태로서, 파시즘과 함께 뉴딜과 국가 사회주의를 들고 있다. 그러나 폴라니가 자신이 추구한 것은 시장을 사회에 착근시키면서 인간의 자유를 보장하는 민주적, 윤리적 사회주의다.

여기서 민주적, 윤리적이라는 것이 제가 말한 도덕과학의 영역에서 사람들의 근본적인 가치와 규범을 변화시키는 것에 해당합니다.

179p 우리가 보건데 폴라니에서는 사회 또는 사회의 실체라는 개념이 미분화되어 있으며 반성적 주체성과 그 제도형태로서의 시민사회론이 빈곤한 유기적 통합의 관념으로 경도되어 있다.

여기서 유기적 통합을 이야기 한 사람은 사회학자 에밀 뒤르케임입니다. 폴라니는 이러한 에밀 뒤르케임의 영향을 받았으며, 이 유기적 통합의 주체는 일반적으로 국가라고 해석되어집니다.

182p 제도경제학의 역사속에서 새롭게 발전된 매개 개념들과 이론적 확장의 뒷받침 없이는 그의 기능사회주의도 난망이다. 그러므로 거시 역사적 안목에서 시장 문명을 비판하고 기능사회주의를 제창한 폴라니의 제도경제학은 자본주의 발전 양식론과 자본주의 다영성론을 개척하고 있는 오늘날의 제도주의 정치경제학의 새로운 흐름과 접속되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폴라니가 경제적 현대성의 의미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좀 더 살펴 볼 필요가 있다. 그는 시장사회를 오도된 발전으로 비판하지만 결코 현대성 전체를 싸잡아 거부하지는 않는다. 결코 오해해서는 안되는데 그의 견해는 산업사회 자체를 거부하고 단지 소규모 지역 공동체만을 주장하는, 흔히 보는 무정부-공동체주의 경향의 생태주의자들의 논지와는 다르다. 폴라니는 산업사회와 산업문명, 그리고 시장경제 또한 받아들이고 있다. 국가의 불가결성에 대해서도 냉철한 인식을 보이고 있다. 자유를 구현하는 가운데 허구적 상품을 폐기한 비시장사회적인, 실체적 제도경제로서 산업문명을 새롭게 구축하는 것이 그의 대안적 비전이다.

-아시겠나요? 이 논문에 따르면 칼 폴라니는 국가를 부정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님이 이야기하신 공동체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습니다. 국가는 필요악이며 그렇기 때문에 시장으로부터 사회보호를 하는 기능을 충실히 수행하는 통합의 장의 역할을 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4) 나머지 두 논문, 러시아 금융개혁의 정치경제 + 유로자본주의의 형성에 대한 조절이론적 설명에 대하여

-두 개의 논문에서는 기본적으로 폴라니가 내세운 자기조정적 시장 조절의 주체 및 허구적 상품에 대한 통제의 주체가 국가라고 보고 각각 러시아의 금융개혁과정 및 유로자본주의 형성과정에서 국가라는 주체가 어떤 방식으로 '시장의 자기보호적 기능'을 수행하는 행위자가 되었는지를 상세히 분석하고 있습니다. 영어로 된 논문들과 이 두 논문들에 대해서도 중심 논지가 궁금하시다면 따로 설명드릴 의향이 있습니다.

이걸로 제 논지에 대해서는 설명이 된 것 같고, 이제 님이 이야기 하실 차례입니다. 그래서 님이 생각하는 사회란 무엇입니까? 폴라니가 공상적 사회주의자와 비슷하다는 주장에 대한 근거는? 대전환(=거대한 변환)에서 이러한 구절들이 제시된 사례 및 이를 주장하고 있는 논문들은? 홍기빈씨의 주장은 충분히 이해하겠습니다만, 님이 저와 제 주장을 학계의 일반적인 것이 아니라고 말하기 위해서는 보다 광범위한 자료가 필요하다고 여겨집니다.

글쎄요

2009.04.12 03:26:54
*.248.192.169

일단 님의 신상을 추측한 것에 대해서 기분이 나쁘셨다면 사과드립니다. 저는 단지 님이 과연 그 논문들을 다 읽었는지 의심스러웠을 따름입니다만 님 말씀대로 기분나쁘게 받아들일 수 있는 표현들이 좀 있었네요. 하지만 저로서도 할 말은 있습니다. 저는 평소에는 논쟁할 때 상대의 신상에 대해선 거의 신경을 안쓰는 편인데, 님이 맨 처음 댓글에서 '전공자'라면서 본인의 신상과 관련된 발언을 하셨거니와 그 뒤의 댓글에선 제가 거대한 변환이라는 책도 안 읽은 것처럼 말씀하시기에 (폴라니의 책도 안 읽은 채로 제가 논쟁에 뛰어들었다고 생각하시나요?) 도대체 어떤 분이기에 저렇게 자신있게 말씀하시는가 싶었습니다만.

그리고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한가지 확실히 할 게 있습니다. 제가 계속 언급한 홍기빈씨 책은 '전세계적 자본주의인가 지역적 계획경제인가'입니다 (폴라니 전공자이시니까 홍기빈씨 책이라고 하면 무슨 책인지 당연히 아실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은 것 같군요). 이 책은 홍기빈씨 주장을 담은 게 아니라 폴라니의 원 텍스트를 번역한 책입니다. 님은 제가 홍기빈씨 책을 계속 언급하면서 홍기빈씨 주장을 소개하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은데, 홍기빈씨 주장을 소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폴라니의 원 텍스트를 소개하고 있는 겁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이 책의 3,4,5장에 나오는 폴라니의 글들은 님 식의 해석을 폴라니 스스로가 반박했음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지금 님과 저의 핵심논점은 크게 두가지입니다. 첫째는 님은 폴라니가 경제통제의 주체로 상정한 사회가 과연 무엇인가라는 것입니다. 님은 사회가 사실상 국가를 뜻한다고 주장하고 있고 저는 사회가 국가와 구별되는 다양한 사회공동체를 뜻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다양한 사회공동체가 도대체 어떤 것들인가에 대해선 아래에 다시 설명드리겠습니다). 둘째는 님은 폴라니가 시장사회 내지 자본주의는 불가피한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주장하고 있고 나는 폴라니가 시장을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사회주의적 지향을 가진 사람(이게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도 다시 설명드리겠습니다)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두가지 핵심논점과 관련해서 위의 세 논문들은 님의 주장보다는 저의 주장을 지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우선, 님이 재반론으로 인용하신 구절들 중 어디에도 사회가 곧 국가를 뜻한다는 언급은 없습니다. 이런저런 내용이 결국은 국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겠느냐는 님의 '해석'만이 있을 뿐이지요. 반면 송호근 논문의 경우 '그의 사회적 규제와 제도는 국가나 정치적 해법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사회=국가라는 님의 해석을 명시적으로 반대하고 있습니다. 김영진 논문에서도 사회의 제도적 구조에 대한 강조는 있으나 그 제도적 구조가 국가라는 이야기는 전혀 없습니다. 다양한 사회적 공동체 또한 사회의 제도적 구조이거니와 폴라니의 원 생각은 이쪽이었다고 볼 근거가 있습니다(역시 아래에서 구체적으로 언급하겠습니다). 이병천 논문에도 '시장과 국가를 넘어선 경제학 비판'이라고 말하면서 폴라니가 국가 중심적으로 사고하지 않았음을 명시적으로 지적하고 있습니다. 즉 언급된 세 논문 모두 사회=국가라는 님의 주장을 전혀 지지하고 있지 않습니다.

폴라니의 원 텍스트에 근거했을 때에도 사회=국가라는 님의 주장은 별로 타당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폴라니는 국가에 대해 그리 긍정적이지 않았다고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말씀드렸듯이, 거대한 변환 12장에서 폴라니는 자유방임 내지 경제적 자유주의가 실제로는 국가가 강력하게 개입하여 자생적인 사회의 자기방어 움직임을 억제한 결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폴라니는 사회주의적인 경제통제를 옹호하면서도 현실사회주의 식의 국가주도적 계획경제에 대해서는 '관치경제'라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홍기빈씨 책 4장 참조). 즉 폴라니는 경제통제를 말할 때조차, 공동체에 의한 '내적 조망'이 없는 국가의 일방적인 통제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국가에 대해서 비판적인데도, 폴라니가 말한 사회가 곧 국가라고 볼 수 있을까요?

두번째 논점과 관련해서는 우선 제 입장을 확실히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계속 말씀드리지만 저는 폴라니가 시장이나 자본주의를 전면적으로 부정하지 않았다는 것을 첫 댓글에서부터 동의했습니다. 4월 9일자 댓글의 3에서도 다시 한 번 이야기했구요. 즉 님은 송호근 논문이나 이병천 논문을 인용하면서 폴라니가 시장이나 국가를 부인하지 않았다는 것을 제 주장에 대한 반박이라고 말씀하시지만 이건 일종의 허수아비 때리기이고 저는 처음부터 그런 식의 주장을 한 적이 없습니다. 게다가 이병천 논문은 폴라니가 공동체'만'을 주장하지 않았다는 것일 뿐, 공동체 자체에 비판적이었다는 게 전혀 아닙니다 (폴라니는 당연히 공동체만을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대해서도 아래에 다시 말씀드리지요).

하지만 폴라니가 시장이나 국가를 전면적으로 부인하지 않았다는 것이 시장이나 국가를 중심으로 생각했다는 뜻은 전혀 아닙니다. 그런 식으로 해석해버리면 거대한 변환이나 기타 폴라니의 모든 저작에 나타나는 시장사회에 대한 철저한 비판이나 위에서 말씀드린 국가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스스로를 사회주의자라고 말하고 있으며 '천사들이 떼로 몰려온다 해도 인간적 정의와 공동체를 실현하도록 자본주의를 관리할 수는 없다'(홍기빈씨 책 3장 참조)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사람을 그런 식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대단히 비상식적인 해석 아닐까요?

글쎄요

2009.04.12 03:10:04
*.248.192.169

이제 제가 생각하는 폴라니의 사회개념에 대해 말씀드리지요. 님과 제가 의견이 일치하는 부분이 있는데, 그건 폴라니가 인간의 의식적, 규범적 노력이나 도덕률을 강조했다는 것입니다 (폴라니는 기독교 사회주의의 입장이었으니까 당연하지요). 그런데 그런 의식이나 도덕률이 중요한 이유로서, 폴라니는 경제를 민주적으로 통제하기 위해서는 (폴라니는 스스로를 민주적 사회주의자라고 명백히 밝히고 있다고 이미 말씀드렸지요) 스스로에 대한 '내적 조망'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내적 조망'을 위한 장치들로서 노동조합, 산업결사체, 협동조합, 사회주의적 지방자치단체 등 다양한 사회공동체를 들고 있습니다. 가령 폴라니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관치경제 이론가들(국가 중심적인 계획경제론자들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폴라니는 이들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이미 말씀드렸듯이, 이것만 보아도 폴라니가 말하는 사회가 곧 국가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은 노동조합, 산업결사체, 협동조합, 사회주의적 지방자치단체들이 사회주의 경제에 기여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간과하고 있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이러한 장치들은 경제에 대한 내적 조망의 기관들로서 사회주의의 발전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홍기빈씨 책 p110. 그리고 폴라니는 그 이후의 글에서 이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한 폴라니는 이른바 길드사회주의에 대해 매우 긍정적이었다고 합니다. 길드사회주의에 대한 세미나도 주재했으며 그에 대한 글도 썼습니다 (Archiv für Sozialgesellschaft und Sozialpolitik Vol.52 참조 - 단, 저는 이 글은 직접 읽어보지 못했습니다). 길드란 일종의 생산자 협동조합이며 이 또한 사회적 공동체 중 하나지요.

결국 폴라니가 말하는 사회는 이러한 다양한 사회공동체들(노동자, 생산자, 소비자 등등의 협동조합이나 자치단체들)을 뜻하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이런 공동체들을 통해 인간의 의식이나 도덕이 향상되는 한편, 사회주의적 경제통제가 관치경제로 빠지지 않도록 내적인 조망을 수행하는 (달리 말하면 다양한 사회공동체 구성원의 생각을 민주적으로 반영하는) 민주적 사회주의가 그의 이상이었다고 보여집니다.

그리고 이는 실체적 경제를 구성하는 다양한 원리들이 함께 경제의 작동원리를 구성해야 한다는 그의 입장과도 들어맞습니다. 교환원리에 따른 시장과 재분배원리에 따른 국가(재분배는 정치권력을 필요로 하기에 국가가 수행할 수밖에 없지요. 단, 그것은 케인즈주의적인 국가라기보다는 사회주의적인 국가라고 판단됩니다만 어쨌건 재분배는 국가의 역할일 수밖에 없고 그래서 폴라니는 국가를 전면적으로 부정하지 않은 것입니다)와 함께 호혜의 원리에 따른 다양한 사회공동체가 함께 인간의 전체적인 경제를 구성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 폴라니의 전체적인 입장이라고 생각됩니다. 즉 시장과 국가를 인정하는 일종의 시장사회주의이되 그가 근본적으로 중시한 것은 다양한 사회공동체=사회에 의해 이들(시장과 국가)이 통제되고 공동체가 스스로의 의식적 역량과 내적 조망의 힘을 키우는 것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한편 이렇게 협동조합 등의 공동체를 강조하고 사람들의 도덕적, 인격적 측면을 중시한 것은 로버트 오웬 등 공상적 사회주의자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거대한 변환의 제14장을 보면 오웬주의에 대해 자세히 나옵니다). 그래서 제가 폴라니의 입장이 공상적 사회주의와 일맥상통한다고 말씀드린 겁니다.

자, 이제 님의 요구사항을 만족시켜 드렸으니 님도 저 위의 4월 9일자 제 댓글 중 2와 3에서 제기한 내용에 대해 답변해 주시지요. 논쟁을 하면서 상대방에게만 자꾸 뭘 제시하라고 요구하고 본인이 해명해야 할 부분은 답변을 안하시면 좀 곤란하지 않을까요?

후...

2009.04.13 11:57:15
*.132.96.210

글쎄요 님께//여러가지로 생각해 볼만한 좋은 근거들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제가 답변할 차례이겠지요. 제가 님에 대하여 첫 덧글부터 책 읽은거 맞냐고 운을 뗀 것이나 전공자라고 밝히고 들어간 것 때문에 님께서는 기분이 나쁘셨던 것 같은데, 그건 요즘 논쟁을 하는데 있어서 원체 책을 제대로 읽지도 않고 다이제스트 하나만 깔짝대고 보고서는 자기가 '다 안다'는 듯이 설레발치는 친구들이 많고, 그들에게 데여본 경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굳이 전공자라는 것을 밝힌 까닭은 자랑이나 대단한 허세를 부리려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 나는 책을 읽었고 그 책에 대한 내용을 전공하여 지식을 갖춘 상태로 토론에 임하고 있다, 라는 스테이터스를 나타내기 위한 방편이었을 따름이고요. 물론 그렇다고 해서 경험을 방패삼아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시키려는 것은 아닙니다. 논쟁을 하면서 오해는 풀렸지만 적어도 님의 첫 덧글만 보고 판단했을 때에는 이 사람이 혹시 책을 읽지 않고 저런 소리를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을 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논의가 차차 진행되는 과정에서 오해의 소지가 풀렸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해서는 제대로 사과드리지 못했군요.

자, 그럼 님이 주장한 부분들에 대한 반박 및 저의 의견에 대한 보충입니다.

1)님은 여기서도 약간의 반칙을 하셨는데, 마치 폴라니가 실체적 경제/형식적 경제의 개념과 호혜,재분배,시장원리 등을 서로 구분해서 사용했음에도 제가 일부러 혼용한 것처럼 주장하셨는데, 폴라니가 인간의 살림살이에서 실체적 경제라고 한 것의 내용 자체가 호혜,재분배,시장원리 등 다양한 원리들이 함께 인간의 구체적인 살림살이를 구성하는 경제원리로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내용으로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인 것으로 압니다. 님이 친절하게 찾아주신 이병천교수 논문에도 그런 식으로 이해하고 있거니와 (이병천 논문 p164 참조), 제가 두번째 댓글에서 말한 내용도 바로 그러하지요.

->이 경우는 거대한 변환 서문과 결론 및 각주 뒤에 나오는 폴라니의 덧붙인 말에 실체적 경제와 형식적 경제에 대한 이야기가 분명히 나옵니다. 제가 지금 책을 두고와서 자세한 페이지를 적어드리지 못하는게 아쉬운데, 민음사 번역본에 분명히 실려 있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였습니다. 그 논지를 보다 구체적으로 확대한 논문이 인간의 살림살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님이 그 두 개의 유형과 시장경제 이외의 경제체제에 대해서 혼동한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 것입니다.

2)도대체 스스로 '대안은 민주적인 사회주의'라고 주장하고 초기 맑스를 적극 지지했던 사람을 (홍기빈씨 책 p95~96 및 p83~85 참조) 비시장적 노력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본 비관주의자로 해석하시다니오. 폴라니의 생각 - 사회주의적인 경제의 통제와 문화적 자유, 정치적 민주주의가 공존해야 한다는 생각 - 은 지나치게 이상주의적이고 낙관적이라고 비판받는 게 오히려 일반적이지 (이병천 논문 p180 참조), 시장 이외의 대안은 없다고 주장하는 비관주의자라는 해석은 이미 말씀드렸듯이 일부의 해석일 뿐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이해하시는 데 오해가 있었던 것 같은데, 폴라니는 당대 지식인들의 '파편화된' 비 시장적 노력들이 실패로 돌아갔고, 심지어 정부 차원에서의 경제적인 개입들도 실패로 돌아갔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 까닭은 제가 말했다시피 암만 현실 세계에서 죽어라고 정책을 바꿔도 의식적, 도덕적 측면에서 근본적인 변화가 생기지 않으면, 그래서 인간의 사회적 상호작용의 형태 그 자체가 변해서 인간의 본성이 이윤추구의 시장적인 방식으로 움직여지는 것이 아니라 타인을 배려하고 공동체 안에서 소비를 추구하는 형식으로 바뀌지 않으면, 어차피 노력을 해봤자 그건 한시적일 뿐이고 근본적인 자본주의체제(혹은 자기규제적 시장체제)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서의 해답은 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봤기 때문입니다.

동일한 맥락에서 '천사들이 떼로 몰려온다 해도 인간적 정의와 공동체를 실현하도록 자본주의를 관리할 수는 없다'는 인용 구절 역시도 근본적인 인간 속성과 제도의 변화 없이 그저 착한 사람들, 당대의 지식인들이나 자본주의 체제에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따위를 모아놓는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될 리는 없다고 강변한 것으로 저는 이해하고 있습니다.

3)님은 '주체가 국가가 되어야 하고, 섣불리 사회를 파괴하거나 자본주의 논리 그 자체를 재조직화 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보았기 때문에 그토록 칼 맑스에 대하여 비판적이었다'고 말씀하시는데, 폴라니가 그런 식으로 말한 적은 (적어도 제가 알기로는) 전혀 없습니다. 폴라니가 맑시즘을 비판하는 대표적인 부분이 거대한 변환의 13장입니다. 거기서 폴라니는 계급이론이라는 것 자체가 경제적 이익을 최우선으로 보는 관점을 시장자유주의자들과 공유하고 있다고 비판합니다 (민음사 번역본 p189~192 참조). 폴라니는 특정한 계급의 이익이 아니라 다양한 인간들로 구성된 사회 일반의 이익이 더 중요하다고 보았고 경제적 이해만이 아니라 사회적 욕구나 문화적 풍요도 중요하다고 보았기에 '경제주의적 편견'(폴라니는 명시적으로 '경제주의'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민음사 번역본 p199~202 참조)을 지닌 맑시즘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지요 (이에 대해선 이병천 논문에도 서두에서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병천 논문 p160 참조).

게다가 폴라니는 경제학철학수고 등 초기 맑스의 저작이 소개된 이후, 초기 맑스의 입장을 매우 높게 평가합니다 (홍기빈씨 책 제3장 참조). 이런 사람을 '자본주의 원리를 재조직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한 사람으로 보시다니오. 홍기빈씨 책 제3장과 4장, 5장을 읽어보면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홍기빈씨 책은 홍기빈씨의 주장이나 해석이 아니라 폴라니가 직접 쓴 글을 번역한 책입니다. 거기서 폴라니는 명시적으로 사회주의를 옹호하고 있지요. 다만 경제결정론이나 전면적인 관치경제에 반대하고 있을 뿐입니다. 말씀하신대로 의식적, 규범적 변화('내적 조망'이라고 표현하고 있지요. 제4장 참조)도 중요하다고 보기 때문에 관치경제를 비판하지요.

->여기서는 국가에 대한 개념 정의가 서로 달라서 발생하는 문제인 것 같습니다. 저는 국가를 앞서 덧글에서

개별적 실체로서의 개인이 궁극적으로 국가에 통합된다고 해서 다양한 공동체에 통합되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혹시 제가 이야기하는 폴라니 방식의 국가를 무슨 국가만이 최고의 공동선이며 국가 이외의 나머지 공동체에 대해서는 허용하지 않고, 오로지 국가라는 안에 모든 인간이 통합되어야만 사회적으로 행복해지는 그런 모델로 생각하고 계신 거였나요? 님 논리대로 따지면 모든 개인이 궁극적으로 국가에 통합된다는 것은 그 국가 내에 존재하는 다양한 공동체는 다 사라져도 무방하다는 의미로도 해석되어질 수 있는데, 이거야말로 파시즘의 전형적인 한 형태이지요. 폴라니가 제시하는 국가는 님이 생각하는 그런 모델이 아니라 개별적 실체로서의 인간과 그들이 이루는 공동체 모두를 아우르며 시장에 대한 자기보호적 행동을 개시하는 하나의 고유한 행위자(agent)입니다.

이렇게 표현한 바 있습니다. 즉, 국가는 자신만의 고유한 이익 관계를 가지며, 통치의 궁극적인 형태 혹은 구조적 제약의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조정자'의 역할을 하면서 공동체들을 결속시켜주고, 국가 내부의 공동체나 경제 시스템 등 하위영역에서 문제가 발생할 경우, 간섭하여 수정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4)하지만, 폴라니의 관점은 이상주의적이긴 하지만 현실사회주의가 놓쳤던 부분에 대한 성찰을 제공해준다고 생각합니다. '판을 뒤엎는 것' 그 자체로는 폴라니보다는 맑시즘의 관점이 훨씬 유효하겠지만, 판을 뒤엎고 만들어지는 새로운 사회(사회주의) 체제가 경직된 관료 중심의 관치경제로 빠지지 않으려면 정치적인 민주주의와 문화적 자유, 다양한 인간 공동체의 회복을 사회주의적인 경제통제와 더불어 중시하는 그의 관점이 유효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른바 '민주적 사회주의'지요. 이에 대해선 이미 말씀드렸듯이 홍기빈씨 책의 제3장과 4장을 참조하시면 됩니다. 거대한 변환에도 관련된 언급이 나오구요 (민음사 번역본 p284와 p307~309 참조).

가령 홍기빈씨 책의 제3장을 살펴보면, 폴라니는 사회주의를 옹호하면서 사회주의는 '인간들이 공동체를 만들 수 있는 제도를 갖춘 사회'이며 '인간 공동체를 최대한 실현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폴라니에게 있어서 경제통제의 주체는 사회주의적 통제에 바탕한 (단, 정치적 민주주의와 문화적 자유를 같이 보장하는) 인간공동체이지요. 이와 관련해서는 거대한 변환의 (민음사 번역본) p201도 참조할 수 있습니다. 폴라니는 존 콜리어를 '도덕적 천재'라고 칭송하면서 (폴라니 입장에서 도덕적 천재라는 말은 최상급의 칭찬입니다) '다시 소생한 공동체'를 '사회의 회복'이며 '기적'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경우에도 사회주의라고 해서 국가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제 정의대로 공동체 내의 분쟁을 조절하고 통합의 구심점 역할을 하는 존재로서 국가는 여전히 존속하게 됩니다. 이는 유기적 통합이라고도 불리우는 사회 유기체적 관점과도 연계되는 부분입니다. 폴라니는 사상적으로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요, 이는 님이 언급한 부분들에서도 단적으로 드러납니다.

바로

'관치경제 이론가들(국가 중심적인 계획경제론자들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폴라니는 이들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이미 말씀드렸듯이, 이것만 보아도 폴라니가 말하는 사회가 곧 국가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은 노동조합, 산업결사체, 협동조합, 사회주의적 지방자치단체들이 사회주의 경제에 기여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간과하고 있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이러한 장치들은 경제에 대한 내적 조망의 기관들로서 사회주의의 발전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홍기빈씨 책 p110. 그리고 폴라니는 그 이후의 글에서 이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한 폴라니는 이른바 길드사회주의에 대해 매우 긍정적이었다고 합니다. 길드사회주의에 대한 세미나도 주재했으며 그에 대한 글도 썼습니다 (Archiv für Sozialgesellschaft und Sozialpolitik Vol.52 참조 - 단, 저는 이 글은 직접 읽어보지 못했습니다). 길드란 일종의 생산자 협동조합이며 이 또한 사회적 공동체 중 하나지요.

결국 폴라니가 말하는 사회는 이러한 다양한 사회공동체들(노동자, 생산자, 소비자 등등의 협동조합이나 자치단체들)을 뜻하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이런 공동체들을 통해 인간의 의식이나 도덕이 향상되는 한편, 사회주의적 경제통제가 관치경제로 빠지지 않도록 내적인 조망을 수행하는 (달리 말하면 다양한 사회공동체 구성원의 생각을 민주적으로 반영하는) 민주적 사회주의가 그의 이상이었다고 보여집니다.

이 부분인데요, 갑자기 여기서 에밀 뒤르켐이 왜 나오냐면요, 뒤르켐이야말로 길드 조직에서 영감을 얻어 자발적 결사체 형태의 직업집단을 만들고, 그것을 사회 통합의 기초로 삼았던 학자거든요. 폴라니도 이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동의하고, 그의 사상을 물려받아 발전시키고자 하였습니다(그래서 사회학자들이 폴라니에게 관심을 가지는 겁니다. 뒤르켐은 사회학이라는 학문 분과 자체를 성립한 학자 가운데 하나였거든요. 그런데 이런 뒤르켐과 관심사 내지는 지지하는 사항이 일치한다는 것은 분명 폴라니가 사회학적으로도 의미를 갖는다는 명백한 증거일 뿐만 아니라 그가 이야기하는 도덕적 공동체 자체가 뒤르켐이 이야기하는 사회화의 과정과도 비슷하니까요). 이때 에밀 뒤르켐은 한 가지 문제점에 대해서 더 지적을 했는데, 바로 이러한 자발적 결사체들을 내버려 둘 경우 이익집단화 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분쟁의 조정자 역할을 하기 위해서라도 국가는 반드시 필요하다고 보았던 것이죠. 저는 여기서 '국가'를 조정자로, 분쟁에 대한 중재를 '시장에 대한 간섭'으로 놓고 보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케인즈주의와 일맥 상통한다는 주장이 이끌어져 나왔던 것이고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폴라니가 님이 얘기하신대로 관치주의를 완전히 옹호했다는 발언을 하거나 폴라니가 케인즈의 아류라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식의 관치주의가 무섭게 변질되면 어떤 비극을 초래할 수 있는지, 폴라니가 자기 책에서 파시즘에 대해서 얘기하면서 충분히 비판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제가 말한 케인즈와 폴라니의 공통점이 도대체 뭔가, 에 대한 문제가 남겠지요. 저는 앞서 덧글에서 이렇게 밝힌 바 있습니다.

- 케인즈가 국가를 경제통제의 주체로 보았다면 폴라니는 사회를 경제통제의 주체로 보았고, 이를 위해서는 지금 행해지고 있는 경제적 통제도 필요하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의미로서 사회를 지배하는 의식적 수준의 규범과 가치 그 자체를 띁어 고쳐야 한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여기서 사회라는 단어를 국가로 교차시킨다면 제법 비슷한 의견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이 학계와 저의 지론입니다. 다만, 한 쪽은 경제학자이고 한 쪽은 인류학자인 만큼, 폴라니 쪽이 좀 더 규범과 도덕 같은 보다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측면에 치우쳐져 있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인정합니다. 이에 비해 케인즈는 의식적 측면보다는 실질적 측면, 폴라니 식으로 말하자면 형식론적 경제 내부에 존재하는 문제들을 수정하는데 더 많은 주안점을 두었습니다.

아마 첫 덧글에서 상당히 확신적인 어조로 케인즈와 폴라니는 근본적으로 같다라는 주장을 관철하였기 때문에 님에게 혼란을 준 것 같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시인하고 정정하겠습니다.

5)이제 제가 생각하는 폴라니의 사회개념에 대해 말씀드리지요. 님과 제가 의견이 일치하는 부분이 있는데, 그건 폴라니가 인간의 의식적, 규범적 노력이나 도덕률을 강조했다는 것입니다 (폴라니는 기독교 사회주의의 입장이었으니까 당연하지요). 그런데 그런 의식이나 도덕률이 중요한 이유로서, 폴라니는 경제를 민주적으로 통제하기 위해서는 (폴라니는 스스로를 민주적 사회주의자라고 명백히 밝히고 있다고 이미 말씀드렸지요) 스스로에 대한 '내적 조망'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내적 조망'을 위한 장치들로서 노동조합, 산업결사체, 협동조합, 사회주의적 지방자치단체 등 다양한 사회공동체를 들고 있습니다. 가령 폴라니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이 주장에 대한 것인데요, 님의 주장에 대해서 저는 모두 수긍합니다. 다만 결정적인 차이점이 존재하는데, 저는 사회주의가 사실상 말만 민주적 사회주의이지 결국은 공동체성을 회복하고 도덕적 규제를 실천하기 위한 주체이자 자유를 보호해주기 위한 중재자로서 국가가 있어야 하기 때문에 여전히 국가중심적이라고 생각한 것이고, 님의 경우는 이때의 사회를 국가와는 다른 어떤 특성을 가진 독특한 존재로서 사회라는 말로 남겨둔 차이라고 여겨집니다. 노동조합, 산업결사체, 협동조합 등에 대해서 저는 케인즈도 기본적으로 친 자본주의적 성격이 훨씬 강할 뿐이지 비슷한 식의 공동체에 대해 인정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국가 정책적으로 이것들을 용납하고 노동조합 탄압 등과 관련된 규제를 풀어주는 정책을 실시하였기 때문에 비슷하다고 생각하고 있고요. 이건 아마 케인즈를 경제학자의 관점이 아닌 사회정책입안자의 관점으로 파악하고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일지도 모릅니다.

부족하나마 논의가 보충이 되었을지 모르겠군요. 한꺼번에 많은 내용을 정리하려다보니 오락가락하고 있는 측면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핵심 주장은 전했다고 생각되네요. 매우 유익한 논쟁이 되었습니다. 더 덧붙일 것이나 반박할 부분이 있다면 제시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이 반박이나 덧글에서 분명히 와닿지 않는 것이나 추가로 질문해줄 것이 있으시면 그것도 언급해 주시길.

글쎄요

2009.04.13 16:21:52
*.248.192.169

후.../ 답변 잘 읽었습니다. 마지막 답변의 내용은 저도 충분히 수긍할만 하네요. 말씀하신대로, 폴라니가 국가나 시장 그 자체를 부정한 것이 아닌 이상 님처럼 해석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생각됩니다. 어차피 폴라니는 케인즈와 맑스 중간쯤에 포지셔닝될 테니까요.

님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첫 댓글에서 지나치게 단정적으로 이야기를 했거니와 그 뒤에 서로 책을 읽었니 안 읽었니하는 식의 언급들이 나오면서 논의가 좀 감정적으로 되었던 것 같습니다. 다시 한 번 사과드리구요 ^^;; 저 역시 님의 논의를 통해 제가 충분히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을 되새겨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공방을 통해 파악해보건대, 실제 입장 차이는 그렇게 크지도 않은 것 같군요. 이것으로 논의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

래디컬

2009.05.13 13:29:53
*.152.85.145

한겨레21에 나와서 칼 폴라니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좌파라니.
동의하기 어렵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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