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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그냥 압니다"와 '방법적 신뢰'의 문제

조회 수 4576 추천 수 0 2011.06.06 16:57:08


(...) 그런데 예리한 독자라면 저의 설명에 이런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습니다. ‘좋다. 그런데 그러한 현실 파악은 맑스의 개념 체계를 전제할 때만 성립하는 것 아닌가? 너는 실재가 정말로 그렇게 구조화되어 있다는 것을 어찌 아느냐?’고 말입니다. 이것은 흥미로운 철학적 물음이고, 인식론에서 ‘최종 근거짓기’의 문제라고 불리기도 하지만, 이 글에서 다룰 수는 없으므로, 아주 간략하게만 답하겠습니다. 그냥 압니다. 저는 맑스주의가 자의적으로 만들어낸 이론이 아니라 실재에 대한 올바른 개념적 파악에 근거한 서술이라고 봅니다. 이를 종교적 신념이라고 비웃을 수도 있겠지만, 우리의 모든 개념 체계가 이런 불가사의한 믿음에 근거하고 있다면 어찌하겠습니까? (...)
- 슈리 : <언어의 애매성을 넘어서 : 푸우님께 응답하며> (지워진 글) 




상식인들은 이런 말을 들으면 허탈한 웃음을 터트리겠지만, 슈리 및 그 지지자들은 그렇지 않을 게다. 그들로서는 그 웃음이 그 사람들이 철학을 잘 모른다는 증표로 여겨질 것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들은 지식 명제의 근본을 파보면 결국 정당화할 수 없는 명제가 나온다는 '일반론'에 비추어 그들의 '믿음'을 옹호하려 들 것이다.


여기서 문제는 두 가지가 된다. 하나는 지식 명제들을 아래에서 지탱하는 신념이 정당화가 안 된다는 것이 그 지식 명제들에 '무지한' 것을 정당화할 근거는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슈리 님에 대한 thehole 님의 비판은 그가 "맑스주의에 무지하다."는 차원에서 이루어지는데, 이 문제에 대해 슈리 님이 '믿음'을 근거로 빠져나갈 수는 없을 것이다. (thehole 님의 슈리/박가분 비판 글 목록. 1, 2, 3, 4. 1과 2는 최초의 슈리 님 글의 맑스주의에 대한 오해에 대한 비판 및 그의 철학용어 사용에 대한 질문. 3은 슈리 님이 글을 지우지 전후 태도에 대한 서술. 4는 박가분 님이 "논쟁의 맥락"이라고 쓴 글의 내용에 대한 검증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슈리 님이 아닌 다른 어떤 사람이 맑스주의 정치경제학이 되었던 주류경제학이 되었든 그 이론들을 제대로 숙지하고 섬세하게 현실에 적용하는 활동을 벌이고 있다고 치자. 슈리 님 등은 어떤 사람이 그런 활동을 할 때, 그가 맑스주의 경제학의 근본토대(노동가치론?)이나 신고전학파의 근본토대(효용?)에 대한 '불가사의한 믿음'을 가지고 있고 그에 근거하여 그런 활동을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물론 그럴 수는 있다. 어떤 사람을 맑스주의자로 만드는 것, 혹은 신고전학파 경제학자로 만드는 것은 그러한 '믿음'일 것이다. 그리고 몇 개의 체계적이고 정합적인 이론이 있다고 했을 때, 그 중 하나를 선택하여 '주의자'가 되게 하는 것은  그 '믿음'에 대한 어떤 '결단'일 수 있다. (어디선가 지젝이 이 비슷한 소리를 한 것 같다.)


그러나 여기서 알아두어야 할 사실은, 그것이 우리가 '진리탐구'를 하는 유일한 길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각 개념체계의 근본적인 믿음을 신뢰하지 않고도 그 개념체계들을 활용하여 탐구할 수 있다. 그런 사람이라면 상황에 따라 그 상황을 설명하기 좋은 다른 지식체계를 끌어들여 그 상황을 분석할 것이다. 미안한 얘기지만 이는 '진리탐구'를 향한 '다른 길'이라기 보다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선택하는 길'에 가깝다. 체계 하나만 보고 그게 실재에 부합한다고 "그냥 믿는" 이들이 '진리탐구'란 걸 제대로 하게 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우리에게 '주의자'로 보이는 사람들도 사실은 복수의 개념체계를 활용한 탐구를 한 끝에 하나의 믿음을 온전히 수용하는 '결단'을 내린 것이지, 어려서 교리학습 4주 받은 후 세례받고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된 것은 아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지젝을 제대로 흉내내지도 못하고 있다.


하늘타리 님이 
가정(assumption)과 신념의 혼동: 맑스주의와 신자유주의 라는 글에서 말하려고 했던 것도 이와 비슷한 얘기라고 생각된다. 이 이야기의 핵심은 맑스주의자들에게 '노동가치론'을 포기하라고 권유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탐구를 할 때에는 그것을 '가정'으로 취급해야지 '신념'으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는 것인 것 같다.


그런데 실제로 그것이 내  '신념'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런 질문이 가능할 것이다. 나는 오래 전에 이 문제에 관해 고민해 본 적이 있었는데, 그때 스스로 내린 결론은 '설령 그것이 내 신념이라도 그것을 가정인 것처럼 취급해야 탐구를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것을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에 장난스럽게 대비시켜 '방법적 신뢰'라고 불렀다. 


8년 전(2003년)에 <반지의 제왕>에 대해 책 한권 분량의 글을 쓰고 출판하지 못한 적이 있다. 지금 소개하는 글은 그때 쓴 원고의 일부다. 치기어린 지적 허영이 넘실대는 이 부끄러운 글을 공개하게 된 건 전적으로 슈리 님의 담대함(?) 때문이다. 그에게 감사를 표한다. 그들은 논지가 명료한 글보다 철학자 이름이 섞인 논지가 불명료한 글을 더 쉽게 독해하는 것 같으니, 요즘의 밋밋한(?) 내 글보다는 지젝의 문체에 경도되었던 예전의 글이 더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다.


진리의 정치성

 

그러므로 탈근대 사상가들의 성취는 결코 이성을 파괴하려는 시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이성과 함께 이성을 넘어가려는 시도에서 나온다고 요약될 수 있다. 여기서 탈근대론은 일종의 ‘진리의 정치성’에 이르게 된다. 다소 무식하게 말하자면, 그들 역시 이성적 사유를 존중하지만 그게 다일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정치성은 철학-종교-예술의 대립과 투쟁, 다르게 말하면 진(眞) 선(善) 미(美)의 갈등이다. 이러한 진리의 정치성을 인식할 때만이 우리는 이성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이성 바깥을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 뭐 이런 식으로 말하려는 것이다. 물론 그것들이 갈등한다는 것은 맞는 얘기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 의미의 ‘진리의 정치성’만 존재하는 것일까? 또한 그러한 의미의 ‘진리의 정치성’이 ‘진리의 정치’를 중재할 수 있을까?

 

나는 거기에 대해서 매우 부정적이다. 왜냐하면 탈근대론이 말하는 ‘진리의 정치성’은 정치적으로 말하자면 ‘집권’의 의도를 담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예술이 중심이 된 진선미의 조화로운 통합을 추구하는 것, 그것이 (현재의) 탈근대론의 기획이다. 그러나 탈근대론이 진정으로 모더니즘을 넘어서려면 ‘집권’이 아닌 다른 무언가를 꿈꿔야 한다. 누군가의 ‘집권’이 확정된 사회는 다시(Re)-모더니즘으로 기억될 것이다. 그것은 근대의 극복이 아니다.

 

그러면 다른 방법은 없을까? 단순명쾌한 문제파악을 위해 이 지점에서 우리는 ‘진리의 정치성’에서 ‘현실사회의 정치성’으로 내려올 필요가 있다. 이 경우에 이 문제는 매우 쉽게 해소되는 것처럼 보인다. 가령 로크의 <통치론>을 보라. 그가 말하는 것은 한 당파의 득세가 아니라, 여러 당파들이 내전(內戰)의 지경에 이르지 않고도 당파싸움을 거듭하며 국가를 유지하는 방식이다. 이에 비하면 탈근대론의 정치성은 공동체를 포섭하지 못하며 오직 한 당파만을 포괄한다. 다시 정치적인 비유를 들어보자. 현실 정치에서, ‘대립’은 노동자 계급과 자본가 계급 사이에서 일어나는가? 물론 그것들이 ‘정치성’을 규정하는 대립의 요소이긴 하다. 철학-종교-예술의 대립과 투쟁이 사상사를 좌지우지하는 기본 요소이듯 말이다. 그러나 실제로 현실 정치 영역에서, 진정으로 치고 받는 ‘대립’은 좌파 정당의 (노동자-자본가) 통합전략과 우파 정당의 (자본가-노동자) 통합전략 사이에서 일어난다. 여기에서 철학으로 돌아가보자. ‘대립’은 철학-종교-예술 사이에서 발생하는가? 그렇지 않다. 그것들은 대립의 요소일 뿐이다. 진정한 대립은 철학-종교-예술에 대한 고유한 통합전략에서 발생한다. 물론 철학-종교-예술의 대립이 절대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대립은 마치 노동자 계급 전체가 일어나 자본가 계급과 적대하는 상황과 마찬가지로, 역사의 극히 제한된 사례에서만 간혹 드러날 뿐이다. 그것은 혁명적인 상황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예외를 통해 일상을 설명하는 부적절한 행위가 될 수 있다. 평소에 진짜 치고 받으며 싸우는 건 좌파 정당과 우파 정당이다. 마찬가지로 평소에 치고 받는 건 철학-종교-예술이 아니라 그것들을 통합하려는 어떤 전략이다.

 

이것이야말로 현대의 우리를 괴롭히는 ‘대립’이며 또한 ‘정치성’이 아닐까? 그런데 왜 철학자들은 이 싸움을 보지 못하는 것일까? 아마도 그들이, 중세적인 비유를 사용하자면 내전(內戰)에 직접 참여하는 귀족 계급이기 때문일 것이다. 예전의 귀족들과 달리 그들은 설령 패한다 한들 (그리고 담론의 세계에선 패했다고 자인하는 멍청이도 없거니와) 죽지도 않기 때문에, 끝없이 싸우면서도 자신이 싸우고 있다는 사실도, 그리고 보는 사람들이 괴로워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다. 자신들은 한 당파에 충성을 바치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하나의 초월론의 왕국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그 당파 바깥의, 왕국 바깥의 다른 이들이 당파들의 싸움, 왕국들의 싸움을 보며 혼란스러워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알지 못하는 한 그들이 원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천하통일(天下統一)에 지나지 않는다.

 

아이러니스트

 

이러한 의미의 정치성에 좀 더 주목한 개념을 최근의 철학에서 찾는다면 리처드 로티의 ‘아이러니스트’를 말할 수 있다. 적어도 그것은 여러 개의 초월론이 공존하는 시기에, 바로 그런 의미에서의 ‘진리의 정치성’이 문제되는 시기에, 혼란스러운 개인이 어떻게 개개의 철학을 넘어 그럭저럭 괜찮은 판단을 내릴 수 있는지에 대해 설명하려고 애쓴다. 좀 단순화시켜 말하자면 그것은 ‘메타-철학적인 행동이론’이다. 그렇다면 아이러니스트의 전략은 무엇이며, 그것은 어떻게 철학을 넘어 올바른 판단에 이르게 되는가.

 

그가 말하는 ‘아이러니스트’란 “자신의 중요 신념과 욕구의 대부분이 우연한 것임을 직시하는 사람, 즉 그러한 것들이 시간과 기회를 넘어선 무엇을 가리키고 있다는 생각을 포기해버릴 만큼 충분히 역사주의자이며 명목론자인 사람”으로서 자신이 지닌 ‘궁극적인 어휘(final vocabulary: 더 이상 다른 말에 기댈 수 없는, 논변의 끝에 있는 말)’조차도 포기할 태세가 되어 있는 사람을 말한다. 이런 사람들이 지니게 되는 태도는 로티의 말대로 우리가 더 이상 어떤 것도 섬기지 않고, 아무것도 神的인 것(quasidivinity)로 취급하지 않으며, 어느 것이든 -우리들의 언어, 양심, 공동체- 시간과 기회의 산물로 취급하는 그런 관점일 것이다.

 

특히 ‘궁극 어휘’(final vocabulary)라는 말이 눈에 띤다. 무슨 소리일까? 예를 하나 들어보자. 모든 민주국가의 헌법은 모든 이가 가지고 있다는 ‘인권’을 말하면서 시작된다. 그럼 이제 이렇게 물어보자. 왜 모든 이는 인권을 가지고 있을까? 역사적으로 고찰해보면,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천부인권”이다. 신이 모든 이에게 동등한 권리를 줬다는 것이다. ‘신’이란 말에 대해선 더 이상의 질문이 불가능하다. 더 물어봤자 누가 더 대답해주지도 않는다. 그냥 신, 신, 신… 하면서 말이 끝없이 뱅뱅 돌게 된다. ‘신’이야말로 대표적인 궁극어휘이다. 아이러니스트는 이러한 궁극어휘를 가지지 않는 사람을 말한다. 그는 “역사주의적이며 명목론자(‘유명론자’라고 번역되기도 한다.)”이기 때문에.

 

아이러니스트가 되면 뭐가 좋을까. 가령 'a'라는 궁극어휘를 가진 사람 A와, ‘b'라는 궁극어휘를 가진 사람 B가 싸우고 있다고 치자. 원인으로, 원인으로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두 사람의 생각의 전제는 애초에 차이가 난다. 그래서 두 사람은 서로 타협하기가 쉽지 않다. 여기 아이러니스트 C가 온다면? 그는 'a'와 'b'에 대해서는 판단을 유보할 것이다. 그건 그가 알 수 있는 분야가 아니기 때문에. 대신 그는 A와 B와 그리고 C 자신의 구체적인 주장들 중에서 합의점을 찾으려고 할 것이다. 그리하여 세 사람은 논쟁을 멈추고 비로소 합의에 이르게 된다. 이것이 ‘진리의 정치’를 중재하는 기술이라고 말한다면 지나친 것일까?

 

아이러니스트의 맹점

 

그러나 로티의 아이러니스트 역시 고유한 맹점을 지니고 있다. 앞서 가정했던 상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아이러니스트는 기본적으로 ‘궁극어휘를 가진 사람들의 존재’를 전제로 한다. ‘메타-철학적인 행동이론’은 ‘메타’할 ‘철학’이 있어야 비로소 존재할 수 있다. 그런데 로티는 모두가 아이러니스트가 되자고 말하는 듯 하다. 그리고 사실 모든 이가 아이러니스트가 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아이러니스트’는 일종의 틈새시장을 개척하는 전술이 될지언정 한 시대를 구성하는 행동원리는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모두가 아이러니스트라면 도대체 ‘무엇’에 대해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여기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제대로 된 이론적 싸움은 불가능해지며, 세상은 그저 순수한 힘의 논리에 의해 규정되게 된다. 그래서 로티는 이 지점을 의식하여 판단을 내리기 위해 우리가 ‘자문화 중심주의’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이러니스트는 어떠한 ‘메타-명제’도 세울 수 없다. 그리고 아이러니스트만 사는 동네에선 합의를 위해 참고할 만한 다른 ‘메타-명제’도 있을 수 없다. 이 동네에서 “나는 a란 ‘궁극 어휘’에 의해 이런 판단을 내렸어.” 라고 말했다간 무식하다고 왕따를 당할 테니까.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 동네에서 그간 하던 짓을 ‘메타-명제’로 보고 여기에 부합하는지 상황들을 판단해 보자는 것이다. 그리고 현실에 맞지 않을 때엔 이 ‘메타-명제’를 수선해보자는 것이다. 로티는 (과거의) 관습이나 문화를 어떠한 이론보다도 더 권위를 지니는 (잠정적인) ‘메타-명제’로 설정함으로써 위기를 극복하고자 한다.

 

그럴듯한 얘기다. 그러나 문제가 없지는 않다. 첫째는 물론 이 이론에 내재된 본질적인 보수주의다. 그것은 급진적인 목소리를 바람직하지 못한 것으로 본다. 그러나 역사적 경험에 따르면, ‘성급한 급진주의적인 행동’이 바람직하지 못했던 만큼 ‘급진적인 목소리가 없는 상황’ 역시 바람직하지 못했다. 친구 한 명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빨갱이랑 예수쟁이랑 없으면 노숙자는 누가 먹여살리냐?” 여기서, 초월론의 필요성은 그야말로 ‘한방에’ 증명된다. 아마 별다른 신념이 없는 우리가 그렇게 열심히 일하려 들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둘째 문제에 비하면 매우 사소한 것에 불과하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이렇다. 왜 아이러니스트만이 그러한 일들을 할 수 있는가? 그러한 일들을 위해 어째서 우리는 굳이 아이러니스트가 되어야 하는가. 궁극어휘, ‘초월론’을 가진 사람들은 그런 방식의 합의에 참여할 수 없는 것인가. 올바른 참여의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배격한다면, 아이러니스트는 또 하나의 독단이 아닌가.

 

다시 로크의 <통치론>과 비교해 볼 때 그것은 민주주의를 구성하는 원리가 아니라, 스스로 집권자의 자리에 오르기 위한 원리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것은 ‘대화’를 주창하지만 그 대화는 일개 당파의 입장에서 주장하는 대화일 뿐이다. 말하자면 아이러니스트는 모든 사람들을 아이러니스트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원래 ‘아이러니’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흐르는 것이다. 그것은 굳은 것들에 대한 유연한 대응을 의미한다. 그런데 로티는 자신의 이론을 만들어내기 위해 그 ‘유연함’에 ‘명사’를 부여한다. “궁극어휘를 가지지 않는 것.” 명사가 부여되는 순간 아이러니는 붙박히며, 새로운 당파가 탄생한다. 아이러니스트는 권력의 욕망자가 된다. 그는 집권을 갈망한다.

 

어느 책에 나온다고 누군가에게 들은 얘기인데, 어느 청년이 어느 유명한 종교인을 찾아가 가르침을 달라고 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청년은 골초였던 모양이다. 이 종교인이 신통력으로 그것을 알아보았는지 아니면 청년이 그 앞에서 담배를 피웠던 것인지 자세한 사정은 기억나지 없는데, 하여간 그 종교인은 그 청년에게 “담배를 끊은 다음 다시 오시게.”라고 말했다고 한다. 골초 청년은 고개를 푹 숙이고 돌아간다.

 

일년 후에 드디어 금연에 성공하고 다시 돌아온 청년, 종교인을 다시 찾아가 가르침을 요구한다. 그런데 이 종교인, 금연에 성공했다는 말을 듣고 담배를 한 대 건네더니 “담배 한 대 태워보시게.”라고 말하는 게 아닌가? 도대체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이 에피소드에 대한 주석자의 해설은 이랬다고 한다. 즉 그 종교인은 청년에게 처음에 ‘담배로부터의 자유’를 요구했고, 그 다음엔 ‘금연으로부터의 자유’를 요구했다는 것이다. 자유는 명사가 아니라 부유하는 것이다. 아이러니 역시 그러하다.

 

로티의 ‘아이러니스트’에게도 ‘아이러니’한 거리를 유지할 수 있어야 진정한 ‘아이러니스트’가 되는 것이 아닐까?

 

판타지의 귀환

 

아이러니의 절대화,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탈근대론자들이 궁극적으로 바라는 바일 것 같기도 하다. 여기서 거부하는 것은 모든 종류의 초월론이다. 그것은 정확히 중세와 탈근대가 갈라지는 지점이다. 만남이 헤어짐으로 바뀌는 곳이며, 양자가 원수가 되는 곳이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중세문화의 풍부한 상징체계, 바로 그것이 우리의 현실로부터 배제된다. 그리하여 드디어 우리는 이렇게 물을 수 있게 된다. 도대체 왜 판타지가 생겼는가? 물론 이 질문은 결코 올바르지 않다. 사실을 말하자면, 태초에 판타지가 있었다. 아니 그때엔 ‘판타지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때엔 ‘상상’과 ‘현실’이 결코 구분이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상상’은 ‘현실적인 것’이었고, 또한 사람들은 어느 미지의 공간에 그 ‘상상’에 대응하는 물건들이 ‘실재’할 것이라고 굳건히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익숙해진 특정한 코드들이 분절화되어 떨어져 나가면서 판타지의 영역이 차츰 잊혀진다. 그것은 어느새 ‘여분의 것’이 된다. 여분은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그것은 원래부터 있었다. 그런데 이젠 사라지기를 강요받는다.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와 라캉의 말을 빌린다면, “상징화에서 배제된 것은 증상으로 되돌아온다.” 초월론이 의심되는 허무주의의 세계에서, 상징화에서 배제된 ‘상징’들은 이제 증상으로 되돌아온다. 그러므로 <반지의 제왕>은 최초의 판타지가 아니다. 그것이 참고하고, 계승하는 그 작품들은 언제나 우리 곁에 있어왔다. 그러나 그것은 처음으로 판타지라고 불린 판타지다. 말하자면, ‘최초로 돌아온’ 판타지다. 배제된 실재, 중세의 ‘증상’으로서의 판타지의 귀환.

 

중세의 증상으로 귀환한 판타지는 근대 이후의 세상에 어떤 질문을 던지고 있는가? 하나의 초월론의 세상에서도 삶의 다양한 가치들을 말하고 지킬 수 있는가? 바로 이것이 <반지의 제왕>의 핵심 질문이다. 왜 이런 질문을 던져야 하는가? 모든 탈근대론은 중세와 근대의 ‘독단’에 대해 말하기 때문이다. 그 독단 속에서 우리는 숨막혀 왔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중세의 변호인은 “과연 중세엔 자유가 없었던가, 친구들이여?”라고 묻게 된다. 그럼 이제 이 질문에 대답해보자. 하나의 초월론의 세상에서도 그러한 것들이 가능한가? 가능하다! 프로도와 간달프에게 가능하듯이. 그리고 레골라스와 김리에게 가능하듯이. 바로 이것이 <반지의 제왕>이 의도한 대답이다. 하나의 초월론의 세상에서도 ‘틈’은 있을 수 있다. 따라서 문제는 “틈이 있느냐, 없느냐.”이지 “하나의 초월론인가, 다수의 초월론인가.”는 아니다. 바로 이 ‘틈’을 없애려 드는 것이 전체주의적인 욕망인 셈이고, 중세는 말기에 몇 개의 종교들이 경쟁하면서 그 ‘욕망’에 휘말렸던 것이다. 틈이 있는 세상이라면 삶의 다양한 가치들은 틀림없이 말해질 수도 있고, 지켜질 수도 있다. 앞서 비판적으로 언급하긴 했지만, 로티식의 아이러니스트가 일반화된 세상에서도 그러한 ‘틈’은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 그렇게 조화롭고 안정된 하나의 초월론의 세계를 꿈꾼다는 것은 일종의 불가능한 욕망이 되어버린 것 같다. <반지의 제왕>의 세계엔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다. 로티의 이론의 세계에도 역시 아무런 문제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중세의 말기가 보여준 여러 초월론 사이의 투쟁이다. 중세의 히스테리는 결코 <반지의 제왕>과 같은 하나의 초월론의 세상에서 발생하지 않았다. 오히려 여러 종교와 르네상스의 계몽주의가 경쟁하는 공간에서 발생했다. 마녀사냥을 추동시켰던 바로 그 투쟁 말이다! 그 투쟁을 하나의 초월론으로 ‘해소’하려는 시도는 국가 안의 당파 다툼이 지겨워 독재자를 옹립하는 해결책과 비교할 만하다. 그것은 철학적 전체주의다. 어머니 뱃속 안으로 돌아가려는 것이요(중세), 아버지의 규율 아래로 다시 돌아가려는 것이다(근대). 하지만 이제 성인이 된 인류는 스스로 걸어야 한다. 독재자는 언젠가 폐위될 것이다. 다툼은 언젠가 재현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내전을 진정시켜 새로운 통합이론을 제출하는 것, 정치영역에서 로크가 실현시켰던 것을 진리영역에서 실현하는 것이 오늘날의 과제가 아닐까?

 

초월의 구성, 구성된 초월

 

그런 관점에서 볼 때에, 이영도의 <드래곤 라자>가 보여주는 세계관은 매우 흥미롭다. 그것은 ‘초월론’이 구성된다는 관점을 보여준다. 그 세계의 신들 -그랑엘베르, 테페리, 오렘, 레티, 카리스누멘, 아샤스, 닐림 등- 은 다른 세계의 모든 신화와 마찬가지로 어떤 자연적 속성을 대변하기도 하지만, 어떤 특정한 종족이나 직업을 대변하기도 한다. 가령 그랑엘베르는 엘프(요정)의 신이며, 카리스누멘은 드워프(난쟁이)의 신이라는 식이다. 개별 종족들이 각기 다른 초월론을 가지고 있었으나, 세월이 지남에 따라 그것을 하나로 통합해서 구성하게 되었다고 읽을 수도 있는 부분이다. 통합은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이 신들을 포괄하는 일종의 상위 신이 두 명 있다. 이들의 이름은 ‘유피넬’과 ‘헬카네스’로, 각각 고전적인 판타지의 주제인 질서와 혼돈에 대응한다. 이들은 인격신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원리의 신으로 간주된다. 두 개의 원리로 각기 다른 초월론들을 포괄하여 구성한 것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 이 소설은 유피넬과 헬카네스의 존재마저도 의심해 버린다. 소설의 어느 부분에서인가, 일행에서 가장 지혜로우며 독설로는 두 번째인 칼 헬턴트는 갑자기 유피넬과 헬카네스의 실체를 부정한다. 가령 자신이 세 개의 돌을 던졌을 때, 그것이 ‘우연’히 삼각형의 형태를 띄게 되면 ‘질서’이며, 그렇지 않으면 ‘혼돈’이 아니겠냐는 것이다. 혼돈 위의 우연적인 질서. 완전히 카오스 이론이다. 사실 이때의 칼 헬턴트는 <드래곤 라자>의 칼 헬턴트가 아니다. 그는 제 정신을 잃고 그가 마치 <쥬라기 공원>의 아이언 말콤 박사라도 된 듯이 제멋대로 내뱉는다. 하여간 이를 통해 유피넬과 헬카네스의 이원적인 초월론 역시 우리의 구성물일 수 있음이 암시되어 버린다.

 

훌륭한 민주주의적 판타지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러나 아직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도대체 그러한 ‘통합’은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지, 혹은 그러한 ‘통합’ 없이도 서로 싸우지 않고 살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지에 대한 언급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민주주의 이론을 말하지 않는 완성된 민주주의 사회다. 진작부터 나는 로크, 로크, 로크!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럼 이제 한번 제대로 물어보자. 도대체 철학의 로크는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방법적 신뢰

 

나의 대답은 이것이다. 데카르트가 명증한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 방법적 회의라는 방법을 사용했다면, 오늘날의 우리는 명증함이 없이도 판단에 도달하기 위해 방법적 신뢰라는 방법을 사용해야 한다. 어디에서? ‘메타’로 올라가는 어느 지점에서. 메타화의 어느 지점에서 기저에 깔려있는 ‘원칙’을 인정해야 한다.

 

다시 민주주의 국가의 헌법에 대한 예시를 들어보자. 나는 앞서 모든 민주주의 국가의 헌법엔 “모든 인간은 이러이러한 권리를 가진다.”는 명제가 전제되어 있음을 말했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볼 때에 이 전제를 증명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궁극 어휘인 신(神)이라는 사실을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궁극 어휘 없이 ‘판단’에 이를 수 있는가. 반론하는 사람이 거의 없는 경우 “모든 인간은 이러이러한 권리를 가진다.”는 명제에 방법적 신뢰를 보내고, 이 명제에 의거해 판단을 내리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 이것은 메타화의 한계를 규정하자는 주장과 동일한 것이다. 철학과 학생들이 사회학과 학생들에게 욕을 먹는 이유는 그들이 모든 문제를 철학 문제로 치환시키는 데에 매우 유능하기 때문이다. 일상생활의 상식에서 아무리 자명한 문제라도 메타-메타-메타화 시켜버리면 대답하기 까다로운 철학적 문제가 되어버리곤 한다. 가령 “나는 내가 번 돈으로 음식을 살 권리가 있다.”는 매우 당연한 주장도 메타-메타-메타화에 걸리면 “공적 소유가 옳은가, 사적 소유가 옳은가.”라는 대답하기 어려운 문제로 탈바꿈할 수도 있다. (‘물타기’와 ‘깽판’에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다. 이쪽 부문에 관심있는 사람들은 새겨들을 것!) 하지만 이는 (적어도 그 맥락에서는) 쓸데없는 논쟁이다. 일상생활의 우리는 그저 대개의 사람들이 동의하는 ‘메타-전제’에서 내려와 판단을 해도 무방하다.

 

이것은 로티가 아이러니스트의 무분별한 부유를 막기 위해 제시한 자문화 중심주의를 좀 더 세련화시킨 것이라 평가할 수도 있다. 자문화 중심주의 역시 ‘자문화’에 대해 일종의 ‘방법적 신뢰’를 보낼 것을 주문하고 있는 거니까. 차이가 있다면 방법적 신뢰는 자문화 중심주의와는 달리 그것이 내부에서 어떻게 반박될 수 있는지에 대한 전망을 제시한다. 자문화 중심주의는 자문화가 실천적으로 부적절할 때에 수정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실천적이라는 말만큼 곡해가 가능한 말이 또 있단 말인가. 모든 이론은 실패를 외부 요인의 탓으로 돌릴 수 있다. 그러므로 명제는 ‘실천적’으로는 반박되기가 힘들다. 소위 포퍼식의 ‘반증주의’의 어려움을 말하는 과학철학자 라카토스의 말을 들어보자.

 

이 이야기는 혹성의 잘못된 운동에 대한 공상적인 이야기이다. 아인슈타인 이전의 시기에 살았던 한 물리학자가 뉴튼 역학과 그의 만유인력 법칙 N, 받아들여지고 있는 초기 조건 I를 근거로 하여 행한 계산에 의해 새로 발견된 작은 행성 p의 진로를 제시하였다. 그러나 그 행성은 계산해서 찾아낸 진로를 따라 움직이지 않았다. 뉴튼 이론을 따르는 이 물리학자는 뉴튼의 이론이 허용할 수 없는 행성의 일탈을 이론 N에 대한 반증으로 생각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는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행성 p'가 존재해야 하며, 이 행성이 p의 진로를 교란시켰다는 주장을 내세웠다. 그는 존재할 것으로 여겨지는 행성의 질량․궤도 등을 계산하여 실험 천문학자들에게 그의 가설에 대한 테스트를 의뢰했다. 행성 p'가 너무나 작기 때문에 그 당시에 가장 큰 망원경을 통해서도 이 행성을 관찰할 수 없었다. 실험 천문학자는 연구소가 더 큰 망원경을 만들도록 했다. 만일 이 망원경을 통해 행성 p'가 발견되었다면 이것은 뉴튼 과학의 새로운 승리로 간주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행성 p'는 발견되지 않았다. 이 과학자는 뉴튼의 이론과 교란의 원인으로 여겨진 행성에 대한 그의 생각을 포기했겠는가?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다시 우주의 어느 지역에 존재하는 자력장 때문에 인공 위성의 기구가 측정을 방해받는다는 주장을 제시했다. 새로운 인공 위성을 발사했다. 만약에 자력장이 발견된다면 뉴튼의 과학은 극적인 승리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자력장은 발견되지 않았다. 이것은 뉴튼 이론에 대한 반증으로 간주되는가? 그렇지 않다. 또다른 기발한 보조 가설이 제안되거나 그렇지 않으면…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모두 학술잡지의 한 모퉁이에 사장되어 다시는 언급되지 않을 것이다.

 

반면 방법적 신뢰가 말하는 수정은 좀더 확실한 것이다. 그것의 핵심은 더욱 메타화된 명제의 기저에 있는 전제는, 심리적으로 우리에게 더 타당한 전제라는 것이다. 가령 헌법과 법률이 대립할 때 우리는 헌법을 따르게 된다. 헌법은 보다 메타화된 명제이며, 이 명제의 기저에 있는 전제는 우리에게 더 타당하다. 그러므로 이 전제에 어긋나는 하위명제(즉, 법)은 반증된다. 헌법재판소의 명령에 법원은 복종해야 한다. 반증은 포퍼의 주장처럼 일상적으로 ‘아래’(관찰명제)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대개 ‘위’(메타명제)로부터 오게 된다. 아래로부터의 반증의 요구, 즉 실재의 침입이 일어날 시엔 우리는 대개 체계를 손상시키지 않는 한에서 적당히 손질한다. 어느 뉴튼주의자가 그랬던 것처럼. 물론 ‘아래’를 중시하는 반증주의가 전혀 무의미한 것은 아닌데, 왜냐하면 그러한 실재의 ‘침입’이 너무 자주 일어날 시엔 우리는 체계를 총체적으로 의심하고 새로운 체계를 고민하게 되기 때문이다. 뉴튼주의자들의 실패가 잦아지면 뉴튼의 이론에 대한 의심이 심화되고, 그 결과 아인슈타인이라는 이름을 필두로 한 과학혁명이 등장하듯이. 세계의 절반을 지배하던 ‘현실사회주의’ 체제가 십 여년이라는 짧은 시간만에 와르르 무너져내리듯이. 그러나 그것(말하자면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같은 것)은 역사를 통 털어 ‘몇 번’ 일어나는 일에 지나지 않고, 우리는 결코 그러한 예외상황을 기초로 일상의 판단을 내릴 수는 없다. 그래서 로티의 “세상사에 잘 대처함”과 같은 ‘실천적인’ 수정의 원리는 방법적 신뢰가 말하는 명제들의 위계에 근거한 수정의 원리보다 훨씬 더 비본질적이다.

 

따라서 올바른 사회철학은 이러한 ‘방법적 신뢰’의 내용들을 정리하고 재편하는 것이어야 한다.

 

초월의 아이러니, 아이러니의 초월

 

여기에서 무엇이 탄생하는가. 방법적 신뢰는 우리에게 무엇을 주는가. 그것은 어째서 ‘철학의 로크’를 가능하게 만드는 대답이 되는가. 일차적으로 그것은 불확실성에서 판단을 내릴 기저 명제를 제공한다. 그리고 이 기저 명제에 어긋나는 하위 명제는 반증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아이러니스트의 전법을 더욱 체계화시킨 것이다. 이것만으로는 아직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방법적 신뢰가 가져오는 반대의 효과에 주목해야 한다. 그것은 확실성을 불확실성 속에 감추는 방법을 제공한다. 무슨 의미일까.

 

아이러니스트의 전략에서 궁극어휘 ‘a’를 가진 A와 궁극어휘 ‘b'를 가진 B는 오직 아이러니스트인 C를 매개함으로써 실천적인 합의에 이를 수 있었다. 그러나 방법적 신뢰의 전략에서 A와 B는 이제 굳이 C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A와 B는 그저 서로의 주장을 한 단계씩 메타화 시키기만 하면 된다. 메타화 해 나가다가 공통적으로 다다르는 부분, 그 부분에 두 사람은 방법적 신뢰를 보냄을 동의하면 된다. 이제 서로 동의하는 ‘메타-명제’를 기반으로 두 사람은 세부적인 토론을 전개한다. 이를 통해 합의에 이른다. 이것이 의사소통의 기본이다. 따라서 세간의 오해처럼 의사소통이론의 귀결이 ‘의견들의 교집합’이 되는 것은 아니다. 가령 동성애 혐오자 A와 동성애를 인정하는 B가 만났다고 치자. ‘의견들의 교집합’을 생각하는 쪽에서는 두 사람의 합의는 불가능하며, 가능하다 하더라도 “동성애를 어쩔 땐 혐오하고, 어쩔 땐 인정한다.”로 귀결될 것이라고 조소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의 토론은 이렇게 전개된다. B가 말한다. “사람들은 누구나 다른 이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선에서 자기 취향을 실현할 권리가 있다는 사실에 동의하느냐?” 혹은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은 자기 본성의 결과로 발생한 행동에 대해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에 동의하느냐?” A는 이것들에 동의할 수도 있고,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 대개의 경우엔 위 명제들의 원칙적인 측면에는 동의하면서, 세부적인 적용의 예외성을 주장하려 들것이다. 따라서 싸움은 메타-명제의 층위에서 벌어진다. 합의도 실은 그곳에서 일어난다. B가 자신이 원한 바대로 메타-명제의 의미를 정립하는데 성공한다면, A는 ‘다른 이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선에서 자기 취향을 실현하는’ 동성애나, 혹은 ‘인간 본성의 결과로 발생한 행동’인 동성애에 대해 혐오할 어떠한 이유도 없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A가 ‘신(神)’을 끄집어낼 공간은 사라진다. 두 사람은 궁극 어휘 이전의 영역에서 타협을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들이 반드시 궁극어휘를 포기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의 요점은 이것이다. 방법적 신뢰 안에 초월론을 서식시켜라. 다르게 말하면, 신뢰하는 이들이여. 방법적 신뢰하듯이 신뢰하라. 어떻게? 대화의 기술로써. 마치 정당의 대표들이 회담할 때 자신의 생각에 확신을 가지지 못하는 것처럼 말하듯이. 여기서 초월론들은 민주주의 국가의 정당처럼 스스로의 존립을 인정받으면서도 다양성을 존중하는 방법을 배운다. 또한 정당에 소속되지 않은 ‘아이러니스트’들과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을 배운다. 방법적 신뢰, 그것은 각각의 초월론과 아이러니를 잇는 다리와도 같다.


이챠

2011.06.06 20:27:31
*.41.224.95

"비밀글입니다."

:

마르크스

2011.06.06 22:07:55
*.208.114.70

서동진이하고 조정환이가 저러는 것도 미치겠는데 무슨 이름도 모르겠는 블로거들까지 이러니 환장하겠구나.....

강병준

2011.06.06 23:08:26
*.131.43.25

소아병에 걸려 감정적이고 일방적인 선언들만 난사하면서 그게 인문학이라고 우겼던 저한테는 대화라는 것의 가능성과 필요성을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는 좋은 글이었기는 개뿔 읽느라 머리 깨지는 줄 알았네=_=(마지막 부분은 농담임다ㅎ)

mah0140

2011.06.07 01:11:45
*.38.62.67

이번글은 정말 뉴런과 시냅스를 혹사시키는군요

이챠

2011.06.07 13:59:06
*.41.224.95

이 글은 '진리의 정치'를 중재해보자는 고민에서 출발한 듯 보입니다.

탈근대론의 정치성이 가진 한계를 극복하려는 로티의 '아이러니스트'가 가진 맹점을 지적하면서, 궁극어휘를 포기하지 않고 싶은 사람이 그러지 않으면서도, 제 3의 아이러니스트를 매개하지 않고서도, 서로 주장의 메타화로 공통적으로 다다르는 부분을 찾는(그곳을 논의의 장-기저 명제의 층위로 전제해, 그 차원에서 합의와 논의를 하는) 방법적 신뢰에 관해 말하고 있네요.

아이러니스트도, 초월론자도, 급진주의자도, 근본주의 신자도, 하라는 탈근대는 안하고 여전히 당파성에 봉사하고 천하통일을 노리고 있는 철학자도, 빨갱이도, 심지어 간달프와 발록, 2NE1팬과, 소녀시대 팬도, 궁극 어휘 이전의 영역에서 논의와 타협이 가능하기에, 자신의 급진성과 혁명관, 궁극어휘를 버리지 않고도, 서로의 말을 알아먹고 키배를 뜰 수 있는, 아! 아름다운 키배 세상, 초월론과 아이러니를 잇는, 킹왕짱 훌륭한, '방법적 신뢰'를 말하는 글이네요.

========================================

헐...... 다른 분들 반응보니까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네. --;

그런데 이 글에서 인정했듯이, 화해와 소통, 공존인 동시에 존립의 통합이론인 듯 한, 이 방법적 신뢰는, 몇 번 안 되긴 하지만 때되면 오기는 올지 모르는 혁명적 상황에서는 무능하네요. 모든 상황을 혁명의 연장으로보는 듯한 어떤 혁명주의자들은 여전히 시시하게 생각하겠는데.
(슈리 박가분 말하는 거 아님)
아래로부터의 반증의 요구가 체계를 손상시키지 못할 정도라도, 그들은 혁명을 위한 실패의 축적으로 본다우.(사실이 그럴 수도 있지) 자기의 궁극어휘를 내세우지 않아도, 방법적 신뢰를 쓴다고 써도, 그들의 인식에서는, 방법적 신뢰를 통해 합의의 장으로 일단 고정시켜 보기로한 메타 명제 층위보다, 아직은 혁명적 뒤집기에 실패한 문제제기를 혁명 상황과 연계지어, 그 가정 된(하지만 반드시 오실) 혁명의 지점에서는 무능한 '방법적 신뢰'의 상위(중심)에 (혁명느님과 결합 된) (하지만 아직 혁명에 성공은 못한) (메타 층위를 방어하게 만들어 약간 수정시켰으면 더 좋음)실패한 문제제기를 놓는 역전이 일어날 수 있을 듯. 그래서 그럴 때마다 제대로 된 논의를 위해 차원을 하나씩 올려야(더 근본으로 내려가야) 하고 그것이 언제나 급진적 궁극어휘에 걸리는 논의까지 다다를 수 있게 될지도.
(그 뒤로는 똑같음) -> 결국 다른 형태로 자신의 내면우주를, 상식으로 알아먹게 도와줄 설명 없이 화려하게 전개하기에 그 우주 밖 사람은 노력해도 부분부분만 따서 이해할 수 있을 뿐, 말을 제대로 종합적으로 이해 할 수가 없고 -> 심지어 그 의식을 대충 공유하는 듯한 자기들 끼리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을 게 당연한데 자기들은 그 글을 이해하고 있다고 믿어 논의의 판은 혼란의 가속화 -> 또다른 개판게이트가 열림. -> 그 신념을 공유하는 내부는 지들도 못알아먹는 건 마찬가지 인 것 같은데 다 알아 들은 듯한 당당하고 평온한 표정... 뭔가 있긴 있다 싶은 외부사람 모두의 혼란과 방황, 하지만 논의를 시작한 사람과 그 내부의 사람 모두에게서 원래 논지에 대한 제대로 된 설명은 아무리 물어도 나오지 않음. 심지어 어떻게 실패한 것이란 말 조차 들을 수가 없음. -> (하지만 이건 모두 가정이므로 여기에서는 논의가 되던 글과 그에 대해 정당한 의문과 반론을 적은 댓글의 무시와 기만에 가까운 삭제는 없다.) -> 원 글의 의도는 도무지 제대로 알 방도가 없는 채로, 내부 사람, 외부 사람 모두 반쯤은 자기내면우주에 반쯤은 허수차원에 갇혀 추론으로 무한 떡밥 생성. (테크.)
이러면 원칙적인 측면에는 동의하면서 세부적인 건 예외성을 주장하고 그 지점에서 합의보고 그런 거 없음. 그 원칙을 일단 동의 했다고해도 그 세부는 혁명의 어머니이자 혁명이니 원칙을 씹을 수 있음. 하악하악.
애초에 혁명적 상황이 아니기에 쓴다는 말을 전제해 봤자. 그 전제를 할 때 말한 혁명(나의 궁극어휘)과 내부에서 다시 상황을 전부 뒤집으며 위쪽을 통과하는 혁명은 다르다고 생각. 그러나 다시 그 전제를 할 때 말한 혁명(나의 궁극어휘)으로 이 행위는 귀결 된다 믿음. 우리는 언제 어디에서나 혁명의 징조를 본다! 하악하악


결론 : 우리는 언제나 실천적 합의를 찾기 위해 노력하지만, 그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람에 따라 답이 없으려면 새 층위로 가 봤자 여전히 답이 없을 수 있다.
써 놓고보니 저 결말을 위해서 저렇게 많은 과정까지 안 거쳐도 될 것 같다.
짧은 과정 : 모든 게 다 혁명이지. 뭔가가 혁명과 연결도 안돼 있는데 의미까지 있을 수도 있음? 혁명이 짱이지. 혁명적 상황(=모든 상황)만 오면 무능해지는 실천적 합의 그거 뭐 먹는 건가요?
더 짧은 과정 : "우리 서로 알아들을 수 있게 얘기해 보지 않을래?" "싫어."

드래곤워커

2011.06.07 07:39:35
*.234.105.202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저도 반지의 제왕 빠돌이여서, 이런 좋은 글이 세상의 빛을 보지 못했다는 게 아쉽네요.
나중에 때가 무르익으면, 책으로 나오길 기대해 봅니다.
한국 갈 일 있으면 한윤형 님 책 사 드릴게요.

하늘타리

2011.06.07 11:49:22
*.36.173.164

종교 간 대화가 그런 점에서 보면 흥미로운 구석이 있어요. 천주교나 자유주의적 개신교나 불교 등이 서로 대화하고 같이 행사도 하고 하는 경우에 보면 서로 교리를 '메타화'해서 접점을 찾는 방식인 것 같거든요. 반면 '메타화' 자체가 교리를 위반하는 거라 보는 보수적 종교들은 아예 그게 불가능하죠. 근데 그런 보수적 종교들의 특징이 있다면, 아마 교리 텍스트(성경이든 코란이든) 자체에 진리성을 부여하는 게 아닌가 합니다.

그런 면에서 일부 맑시스트들 역시 비슷한 성향이 있다고 봅니다. "그냥 압니다"가 그런 의미가 아닐까요. 노동가치론에 대한 신념 역시 맑스 텍스트에 대한 절대성 부여의 산물이라 개인적으로 보이고요. 정작 맑스가 살아있다면 노동가치론부터 시작하지는 않았을 것 같거든요. 맑스를 역사적 차원으로 일종의 '메타화'해서 생각해 본다면 말이죠.

김대영

2011.06.07 12:23:39
*.66.49.84

한윤형씨 참 잔인하네요.ㅋ

눈팅족

2011.06.30 15:12:18
*.193.27.41

그냥 압니다라니... 주의주의의 냄새가....
첫 인용문만 보고 스크롤 길게 내렸는데 잘한걸까요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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