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 데카르트 좌표계에서 원점(0, 0)은 좌표계 위의 한 점입니다. 다른 점들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는 하나의 특수한 점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런데 원점을 제외한 다른 모든 점들은 특수한 점이면서 동시에 ‘원점과의 관계’를 통해 위치지어지고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원점의 위치는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자기 자신과의 관계’를 통해 정해집니다. 맑스주의의 경우에 원점의 위치에 해당하는 것은, 자본가-노동자 관계입니다. 그것은 다른 모든 모순들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특수한 모순이지만, 동시에 다른 모든 모순들에 좌표를 할당한다는 점에서 특별한, 혹은 본질적인 모순입니다. 일반적인 철학 용어에서 이런 원점과 같은 기능을 하는 것을 ‘주체’라고 합니다. ‘혁명의 주체인 프롤레타리아트’라고 맑스주의자들이 말할 때, 그들은 알건 모르건 이와 같은 용법을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이 대목에서 맑스주의에 대해 자주 오해를 하게 되므로 미리 덧붙이자면, 이런 인식적 명제들로부터 현실의 운동에 있어서, 노동자만이 유일하게 중요한 세력이고, 나머지는 중요하지 않다는 식의 황당한 결론들을 끌어내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많은 사람들이(심지어 맑스주의자들조차도!) 그렇게 하고 있지만 말입니다.
- 슈리 : <언어의 애매성을 넘어서 : 푸우님께 응답하며> (지워진 글)
* 굵은 글씨 강조는 내가 했다. 



(...) 따라서 오늘날 최악의 이데올로기는 절대적 이념 같은 거북한 요소 없이,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잘 대처하기만 하면 된다는 ‘실용주의적’ 자세다. 이러한 ‘실용주의’는 딱 하나의 문제만을 제외하고는, 맑스주의라는 이론 자신까지 포함하여 대단히 유연한 접근 방법을 선호하는 맑스주의에서, 그 변하지 않는 ‘하나’를 제거한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실용주의’는 자기 자신을 은밀하게 절대화한다. 이러한 ‘실용주의’의 이면에는 일반화된 냉소주의와 회의주의가 자리 잡고 있다. 이러한 정신의 이론적 육화를, 나는 라클라우 같은 사상가에게서 발견한다. 그에게서 계급 문제는 다른 갈등들에 비하여 아무런 (존재론적-인식론적) 특권도 지니지 못하는, 그저 수많은 문제들 중의 하나일 뿐이다. 그가 그리는 정치적 공간은 온갖 다양하고 평등한 헤게모니 투쟁들이 간헐적으로 어떤 조건 하에서 발작적으로 폭발하는 것이 전부인, 단조로운 장소이다. 여기에는 그 어떤 새로움도 있을 수가 없다. (...)
- 슈리 : <문제의 글에 덧붙임> (지워진 글)



그들이 강변하다시피 이런 얘기엔 새로울 것도 없고 반박할 것도 없다. 반박할 것이 없는 이유는 내가 실용주의자이기 때문이다. (농반진반) 내 생각에 진정한 실용주의자라면 실용주의자가 아닌 갖가지 종류의 '종교인'과도 함께 일할 방책을 고민해야 한다. 그러지 못한다면 그 실용주의는 그저 '실용주의'란 이름을 가진 또 다른 종교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이를테면 실용주의는 '신념을 가진 반-형이상학자'와는 다른 것이다. 


그들은 언제나 이것이 '중심적인 논점'이라고 되돌아온다. 그러나 언제나 문제는 이 중심논점을 뒷받침하는 구체적인 내용이다. 그래서 그들이 현재의 정세를 어떻게 판단하고 있는지, 그 정세에서 어떤 실천을 요구하는지가 그 중심적인 논점을 뒷받침해야 쓸모를 논할 수 있다. 그러지 못한다면 지하철에서 "예수 믿으세요."하는 강권하는 기독교인들과 뭐가 다르랴.


슈리 님은 분명히 "이런 인식적 명제들로부터 현실의 운동에 있어서, 노동자만이 유일하게 중요한 세력이고, 나머지는 중요하지 않다는 식의 황당한 결론들을 끌어내면 안 된다."라고 말했다. 좋은 얘기다. 한편 박가분 님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더 나아가 어떤 의미에서는 여타 성적, 인종적, 생태주의적 투쟁을 구조화하는 '반자본주의적 투쟁'이 (이론을 떠나) '현실적인 차원'에서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변혁할 수 있는 핵심세력과 역량을 기르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결국 최종적으로는 '현실의' '자본주의 경제' 속에서 그러한 역할에 적합한 주체가 누구인지에 대해 판단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제대로 된 노동운동에 초점을 맞추'기 위해서는 여타 성적, 인종적, 생태주의적 투쟁들에 대해 정세 속에서 실용적으로 판단해야 한다. 
- 박가분 : 최근의 논란에 대한 최종진술 



말하자면 그들에게 '정치적 진리'의 자리가 아니라고 누차 천명해온 성적/인종적/생태주의적 투쟁도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변혁할 수 있는 핵심세력과 역량을 기르는 일"이라는 것이다. 거긴 정치적 진리의 장소가 아니긴 한데, 여튼 거기서 투쟁하는 건 나중에 자본주의를 바꾸는데 도움이 될 거라는 소리다. 남들이 투쟁하는 건 안 말린다는 얘기니 일단 되었다. 물구나무 두 번 서서 제자리로 돌아왔다는 느낌은 있지만, 단순한 게 꼭 진리라는 보장은 없으니 그것도 그렇다고 치자. 그리고 '제대로 된 노동운동'(그것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에 초점을 맞추기 위해서는 "정세 속에서 실용적으로 판단해야 한다."고 말한다. 


결국 이 모든 얘기는 빙글빙글 돌아서 슈리 님이 비판한 "따라서 오늘날 최악의 이데올로기는 절대적 이념 같은 거북한 요소 없이,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잘 대처하기만 하면 된다는 ‘실용주의적’ 자세"와 실천적으로는 별 차이도 없게 된다. 다만 이 얘기를 곧이 곧대로 받아들여 보자면 '정치적 진리'의 장소에서 우리가 뭔가 할 수 있게 되는 그날, 이 '실용주의자'들과 '변하지 않은 하나'를 간직하는 맑스주의자의 정치적 선택이 갈릴 수는 있겠다. 하지만 그 미래의 정치적 선택의 차이에 대해 그들이 더 말해주지 않기 때문에, 나는 이 구별이 유의미한 것인지 판단할 자료가 없다. 신앙이라면야 교회를 나가고 안 나가고로 구별을 하겠지만, 이건 대체 뭘 어쩌라는 얘긴지. 


결국 그들의 얘기는 대략 "다른 운동도 유의미하고 하는 건 안 말리지만 우리 좌파들은 좀 더 제대로 된 노동운동을 하자."는 것으로 귀결된다고 하겠다. (이 비슷한 얘기를 박가분 님이 했던듯 한데 정확한 구절을 못 찾겠다.) 그리고 나는 이 부분에서 황망함을 느낀다. 어떤 정세판단의 차이 때문이다. 


물론 한국 사회의 모든 부분에서 운동이 부족하다. 하지만 아마도 상대적으로 판별해 본다고 한다면, 일하는 문제와 관련된 운동에서 그나마 활성화되어 있는 부분은 그들이 '정치적 진리의 장소'라고 생각하는 생산직/임금노동자의 영역일 게다. 노동운동 문건을 보면 "핵심노동"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심지어 비정규직 운동을 할 때도 핵심노동 사업장에 중점을 둔 운동이 이루어진다는 한탄이 나온다. 현대차 비정규직 투쟁 같은 것을 생각해 보면 되겠다. 이건 노동운동하는 사람들이 충실한 맑스주의자라서가 아니라 현실적으로 볼 때 같은 공간에서 많은 사람들이 일하는 공장 노동자가 조직하기 가장 쉽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노동운동, 더 나아가 진보정당 운동이 처한 곤경은 더 이상 그런 종류의 '노동자'가 사회를 대표하지 못한다는 데에서 온다.


그러므로 가령 나같은 사람은 진보정당 운동이나 변혁운동을 위해선 '주변부노동의 조직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편인데, 이 영역은 슈가분에게는 "하는 건 안 말리지만 그게 그렇다고 노동운동은 아니지."라고 대꾸할 만한 부분인 게다. 그런데 내 판단으로는, 만약 주변부노동의 조직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한국 사회의 진보정당 운동은 물론이고 사회의 '좌경화'도 기대하기 어렵다. 모두 달라붙어도 될동 말동 할 일인데 짐짓 뒷짐지고 훈장질 하는 것이다. 이렇게 뒷목잡고 쓰러질 무시무시한 얘기하면서 자신들의 나이브함이 선량함인 줄 착각하고 눈을 껌뻑껌뻑하면서 왜 우리를 조롱하느냐고 묻는다. 그들은 세계를 조롱하고 있는데? 


"여타 성적, 인종적, 생태주의적 투쟁"이란 표현도 굉장히 문제가 많은데, 첫째로는 이렇게 발화할 경우 박가분 님이 성매매 문제에 대해 "노동의 문제는 아니고 성적인 문제"라고 이해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글쎄, 과연 그럴까? 슈리 님은 첫번째 글 서두에 본인이 성매매 문제를 (여)성적인 문제로만 이해하지는 않는다고 썼었는데. 성매매 문제는 직관적으로도 성차 이상의 영역에 걸쳐 있지 않은가? 이 경우 "자본주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여성문제의 큰 부분도 해결될 수 있다."고 말하려면 (슈리 님은 실제로 이런 식으로 말한다.) 성차 문제와 구별되는 성매매의 정치경제학적 성격에 대한 진지한 분석과 대안이 나와야 할 것인데, 슈리 님 글은 결과적으로 이 영역은 우리 패가 아니니 버리자고 한 것이나 다름이 없지 않은가. 그리고 그렇게 버렸으면 성매매 문제를 여성주의 활동가들이 전담하는 것을 방관해야 할텐데 그 여성주의 활동가들에게 맑스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고 호통을 치고 있으니 이건 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여타 성적, 인종적, 생태주의적 투쟁"이란 표현엔  계급운동과 정체성의 정치를 변별시키는 담론이 기입되어 있는 것 같다. 이게 한국 실정에 적절한 것일지? 적어도 이 변별이 한국적으로 수용되었다면, 한국 사회에서 서구 사회의 인종적 투쟁과 비슷한 위치를 점하는 지역주의 담론에 대한 비평이 있었어야 할 것 같다. 성매매 문제가 "여타 성적, 인종적, 생태주의적 투쟁"이란 표현으로 정체성의 정치를 호명하는데 적절한 사례인지 모르겠다. 내가 이 분야에 밝지 않지만 직관적으로는 전혀 그렇지 않단 생각이 든다. 재료야 어찌됐든 자신들이 보던 책에 끼워맞췄으니 잘못한 게 없단 식이다. 


내가 성매매 여성의 현실을 충분히 조사하지 않고 글을 썼다는 비판이 있었다. 인정한다. 그러나 조사했더라도 글의 내용이 얼마나 달라졌을지는 미지수다. 현실의 성매매 여성이 처한 환경은 천차만별이다. 내 글은 평균적인 성매매 여성이, 평균적인 여성 노동자가 한 달에 받는 임금보다 많은 수입을 얻는다는 전제 하에 쓰였다. 이 전제가 현실과 다르다면, 우리 사회는 이미 파멸했다고 봐도 좋다.
- 슈리 : <문제의 글에 덧붙임> (지워진 글)
* 굵은 글씨 강조는 내가 했다. 



도대체 어떻게 현실의 성매매 여성이 처한 환경이 천차만별이란 걸 알면서도 저런 대담무쌍한 일반론을 펼칠 수 있었을까. "내 글은 평균적인 성매매 여성이, 평균적인 여성 노동자가 한 달에 받는 임금보다 많은 수입을 얻는다는 전제 하에 쓰였다."란 얘기는 이 괴랄한 문장 중에서도 그나마 이해가 간다. 그 대담무쌍한 일반론의 앞에 반드시 나왔어야 하는 설명이다. 그런데 뒷 문장이 뒷목을 잡게 한다. "이 전제가 현실과 다르다면, 우리 사회는 이미 파멸했다고 봐도 좋다." 도대체 왜? 사실 나는 저 전제 자체는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어떤 영역까지를 성매매로 잡느냐, 어떤 영역까지를 노동으로 잡느냐에 따라서 결과가 천차만별로 달라질 테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저 전제가 대략적으로 옳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렇더라도 그것은 우연적인 현실이다. 이를테면 어떤 남성노동자 집단은 어떤 성매매 여성보다 높은 소득을 올리고 있을 게다. 여성노동자 일반이, 그런 위치로 올라서는 건 맑스주의자 뿐만 아니라 진보적 지향을 가지는 모든 사람들에게 환영할 만한 일이 아닌가? 추구할 만한 일이 아닌가? 그런데 슈리 님은 "이 전제가 현실과 다르다면, 우리 사회는 이미 파멸했다고 봐도 좋다."라고 얘기한다. 무슨 얘긴지 종시 모르겠다. '나만의 맑스주의'에 현실이 부합하지 않으면 도덕적 지탄의 대상이 되나? 생산직노동자만이 가치를 생산한다면서 그 사람들은 저임금에 묶여 있는게 당연한 얘긴가?  유일하게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은 thehole 님의 지적대로 "성매매는 부도덕하므로, 그 부도덕한 일을 해서 버는 돈이 일반적인 임금노동의 소득보다 더 높지 않다면, 이 사회는 파멸의 지경에 이른거다."라는 식으로 생각한다는 것인데, 이렇게 성매매에 대한 도덕적 편견에서 추출되는 문장들을 남발하면서도 '중심논지'에선 문제가 없으니 도덕주의적 편견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우긴다. 증명해야 할 것을 미리 결론으로 상정하고 그게 결론이 아니라면 나올 수가 없는 문장들을 남발하는 것이 슈리 님 글의 특징이다. 그래서 논의가 아니고 무의미하단 건데 무슨 말들이 그렇게 많은가?  


"좌파는 성매매를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당혹감을 느낀 이유도 마찬가지였다. 맥락이 없다는 거다. 예전에 다른 글에서 지적했듯, 이런 질문이 의미를 가지려면 좌파들이 성매매에 대해 어떤 단일한 대오를 구성하고 있고 다른 의견을 억누르거나, 각기 "이것이야말로 좌파적 관점에서 성매매에 접근하는 방식이다!"라는 것을 내세우고 싸움을 벌이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내가 알기로 그런 싸움은 존재하지 않고, 좌파도 지리멸렬하며 반성매매 운동도 지리멸렬하다. 슈가분 님은 이에 대해 "정세 속에서 실용적으로 판단"할 것을 요구하지만, 그런 실용주의는 이미 무기력하게 관철되고 있는 중이다. 


이 글의 출발점에 나온 그들의 신념, 혹은 믿음에 대해서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별로 없다. 그러나 그들이 그런 신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그 신념이 옳은지 그른지에 대해서 별로 할 수 있는 말이 없기 때문에, 그들이 하는 모든 말이 옳다거나 의미를 가진다고는 볼 수 없다. 그들의 신념을 표출하는 방식이 구체적인 상황과 정세 속에서 의미를 가질 때에야, 다른 사람들은 그 신념을 의미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인간을 사랑하는 유일신은 정말로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다고 기독교인 일반의 포교활동이 옳다고 말할 수는 없는 거다. 그러나 그들은 구체적인 얘기를 하지 않고 거듭 신념을 피력할 뿐이다. 


(...) 맑스의 자본주의 체제 분석은 여전히 우리가 이 분야에서 가지고 있는 최고의 진리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맑스의 이론이 무슨 심각한 학문적 반박을 받고 몰락했기 때문에 오늘날 읽히지 않는 것처럼 이야기하는데, 이는 순진하기 짝이 없는 생각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그런 일은 없었다. 주류 학계는 맑스가 발견한 진리들을 그냥 무시하는 것으로 일관해왔다. 동시에 그들은 맑스가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읽지도 않았으면서 시대에 뒤떨어졌는지는 또 어떻게 아는가?) 주류 학계의 영향권 안에 있는 경박한 일반인들은 학계의 견해를 앵무새처럼 되풀이하면서 마치 그것이 자신의 견해인 것처럼 생각한다. 그 중에서 가장 대표적이고 황당한 것은 다음과 같다. 맑스는 자본가-노동자 관계에만 너무 배타적으로 집중한 나머지, 현대 사회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새로운 갈등들, 예를 들자면, 인종, 젠더, 성소수자 같은 갈등들을 설명하지 못한다, 등등. 자본주의가 유동적이고 변화무쌍한 체제라는 것은 맑스 자신이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도대체 맑스가 왜 그 고생을 해 가면서 자본주의 사회를 가장 단순화한 형태에서 고찰하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자본주의 사회가 아무리 바뀌더라도, 그 안에는 반드시 기본이 되는 어떤 메커니즘이 있기 때문이다. 나머지 다양한 변화들, 현상들은 이 기본 틀을 바탕으로 설명되어야 할 것들이지, 결코 이 기본 틀을 반박하는 사례가 될 수는 없다. (...)
- 슈리 : <좌파는 성매매를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지워진 글)




(...) 이에 대한 나의 입장을 간략하게 말하자면, 우리가 자본주의의 구조를 분석하는 데 있어서 맑스는 여전히 가장 합리적인 도구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 분야에서 맑스의 이론을 참조하는 것은 정치적 입장과 무관하다고, 다시 말해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고 나는 판단한다. 여기서 재밌는 것은 맑스만 나오면 구시대의 유물이라느니, 사변적이라느니, 하는 사람들의 과도한 거부감이야말로 오히려 교조주의적, 근본주의적이라는 것이다. 19세기의 이론이 지금 현실을 가장 잘 설명하지 말아야 할 어떤 이유라도 있는가? 과연 세상이 본질적으로 그렇게 달라졌을까?
(...)

내 글은 현재 우리의 정치적 현실이 점점 빈곤해지고 있으며, 그러한 현상의 원인이자 결과는, 맑스주의 이론의 영향력 감소라는 진단 하에서 쓰였다. (...)
- 슈리 : <문제의 글에 덧붙임> (지워진 글) 


 

(...) 그런데 예리한 독자라면 저의 설명에 이런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습니다. ‘좋다. 그런데 그러한 현실 파악은 맑스의 개념 체계를 전제할 때만 성립하는 것 아닌가? 너는 실재가 정말로 그렇게 구조화되어 있다는 것을 어찌 아느냐?’고 말입니다. 이것은 흥미로운 철학적 물음이고, 인식론에서 ‘최종 근거짓기’의 문제라고 불리기도 하지만, 이 글에서 다룰 수는 없으므로, 아주 간략하게만 답하겠습니다. 그냥 압니다. 저는 맑스주의가 자의적으로 만들어낸 이론이 아니라 실재에 대한 올바른 개념적 파악에 근거한 서술이라고 봅니다. 이를 종교적 신념이라고 비웃을 수도 있겠지만, 우리의 모든 개념 체계가 이런 불가사의한 믿음에 근거하고 있다면 어찌하겠습니까? (...)
- 슈리 : <언어의 애매성을 넘어서 : 푸우님께 응답하며> (지워진 글) 




(...) 어떤 사람들은 맑스의 가치이론이 단지 '오래되었기 때문에' 비판하는데, 그것은 무지의 소산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아담 스미스와 리카도 역시 '오래되었다'는 이유만으로 비판받아야 한다. (...)
- 박가분 : <최근의 논란에 대한 최종진술>



누가 이 논란에서 마르크스를 비판했는가? 적어도 긴 글을 쓴 사람들 중에선 그런 사람들이 별로 없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거듭 마르크스를 믿지 않는 세태를 비판한다. 이유는 뭘까. 아마도 두 가지 중 하나일 거다. 그들이 읽는 책에 그런 구절이 많이 나오거나, 그들이 비판받는 이유는 사람들이 마르크스를 싫어 하기 때문이라고 넘겨짚었거나. 물론 어떤 기독교인들도 다른 사람들이 자신들을 싫어하는 이유는 '신앙이 없기' 때문이라고 믿는데, 그렇게 믿는 이유는 교리시간에 그렇게 가르치기 때문일 게다.  


나는 그들이 가진 신념을 존중한다. 비유하자면 나는 유신론자도 무신론자도 아닌 불가지론자다. 하지만 그 신념이 현실세계에 대해 무의미한 제스쳐를 취할 때는 그런 것은 비평이 아니라고 공박할 수밖에 없다. 이런 나에 대해 그들은 "맑스느님을 믿지 않아서"라고 반응할텐데, 하긴 교인이 아닌 모든 사람들과 말이 통하지 않는 이유를 그들의 신앙의 탓으로 돌리는 것도 어떤 신자들의 오랜 습속이었다.


미니엠

2011.06.05 22:02:23
*.224.47.51

기본적으로 실용주의라는 말에 애매성이 있어 보입니다. 과연 구체적인 지향점(가치)를 전혀 전제하지 않는 실용주의라는 것이 가능하냐의 문제도 있고, 또한 그러한 지향점이 다른 경우 동일하게 '실용주의'로 표현되어도 실은 많은 차이를 가지는 것도 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윤형 님의 현재 운동에 대한 정세판단은 물론 정확할 것으로 보이지만, 점차 사람들의 관심이 '노동자'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한 어떤 보편적인 구조보다는 다양한 인권이나 생태 문제 등으로 전환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그 과정에서 박가분 님의 지적도 어느 정도 의미는 있어 보입니다. 또 전공자인 EM님의 긍정적인 평가도 아예 무시할 부분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또한 가치이론의 경우 이미 몇 분이 문제제기를 구체적으로 했기에 충분히 대응할 수도 있었던 내용으로 생각해보기도 합니다.
사실 아직 많이 공부해보지 못한 형편이지만, 한번 남겨봅니다;;

하뉴녕

2011.06.06 15:15:16
*.171.89.97

1) 문맥상 제가 본문에서 말한 '실용주의'가 극우파의 실용주의나 정동영의 실용주의라고 이해되지는 않겠지요. 제가 얘기하는 '실용주의자'는 리처드 로티의 '아이러니스트'에 가장 흡사한데, 요즘 로티를 얘기하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그렇게 잘 쓰지 않습니다. 설명할 기회가 있을듯.


2) 이른바 '정체성의 정치'가 서구에선 68 이후 강성해졌고, 한국에선 90년대에 그에 대한 많은 모방이 있었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노동의 권리가 척박한 한국 실정에서 정체성의 정치가 노동운동을 대체하는 대세가 되진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정치에 관심을 가졌을 때 주변에서 접하는 대부분의 운동들은 '노동'과 관련된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게 '노동'과 관련되어 있음에도 '노동'문제라고 인식을 잘 하지 못하고 말을 하지 않아요. 그래서 주변부노동의 담론화와 주체화가 필요한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슈가분 님의 지적이란 건 '담론적으로는' 정체성의 정치에 대한 노동운동의 우위를 말하는 것으로 보이나, '실천적으로는' 노동의 영역을 협소화함으로써 노동담론을 억압하는 괴랄한 위치에 처하게 되는 거지요.


3) 저는 가치이론에 반대한 것이 아니라, 그 가치이론을 토대로 쓰여진 슈리 님의 글에 대해 문제삼았습니다. 가치이론에 대해 저는 찬성도 반대도 하지 않는다고 이미 글에서 지적했습니다. 그러니 그분들이 가치이론을 옹호하겠다고 띄엄띄엄 퍼오는 논의와 사례들에 대해 제가 대응할 이유가 하나도 없지요. 근데 그분들은 그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논지파악이 안 되는 거죠.

미니엠

2011.06.06 15:54:49
*.224.47.51

자세한 설명 감사합니다. 특히 두 번째 문제에 대한 답변은 분명 생각해볼만한 문제인 것 같습니다.

시만

2011.06.05 23:41:08
*.25.134.119

"다른 운동도 유의미하고 하는 건 안 말리지만 우리 좌파들은 좀 더 제대로 된 노동운동을 하자."
(파란색 처리된)
후반부의 의미는.. 저기, 그러니까 '좀 더 제대로 된 운동인' 노둥운동을...이란 뜻?

조갑제의회개

2011.06.05 23:45:37
*.149.40.96

더 읽다가는 안구건조증 걸리겠어요..

드래곤워커

2011.06.06 05:09:33
*.234.105.202

맑스주의는 정말 종교지요...

thehole

2011.06.06 12:02:34
*.9.236.157

"내 글은 평균적인 성매매 여성이, 평균적인 여성 노동자가 한 달에 받는 임금보다 많은 수입을 얻는다는 전제 하에 쓰였다. 이 전제가 현실과 다르다면, 우리 사회는 이미 파멸했다고 봐도 좋다."라고 슈리님이 말씀하셨는데, 이는 저도 처음부터 지적하고 싶었지만 성매매에 관해 잘 알지 못해 뭐라 말하기 힘들었던 부분입니다. 슈리님은 '평균'이라는 말을 좋아하시며(물론 그렇다고 평균 자체가 뭐 문제가 있겠냐만은), "평균적인 성매매 여성"이 "평균적인 여성 노동자"보다 돈을 더 많이 번다고 가정하고 있는 거 같은데요. 저는 이 가정도 잘 이해가 안 됩니다. 과연 그런지도 모르겠고요. 그리고 이 부분에서의 '평균'은 다양한 차이들을 감추는 역할을 하는, '평균'이 갖는 가장 부정적인 차원에서 역할하는 것 같구요.

자신의 전제와 현실이 부합하지 않으면 이 사회가 파멸했다고 좋다는 슈리님 판단은 슈리님 자신이 성매매에 대해 갖고 있는 '도덕적' 전제에 기초한 것 같습니다. 슈리님에 따르면 어쨌든 '성매매'는 '부도덕'한 행위인데, 그 부도덕한 행동을 했는데도 '평균적인' 여성보다 돈을 못 벌면 말이 안 된다는 거......

허망한 건, 평균, 수입, 임금과 같은 '경제학에서 쓰는 단어들'('정치경제학적 개념들'이라곤 차마 말 못하겠습니다)을 갖고 슈리님이 수행하는 작업이라곤, (여성들이 성매매 산업에 유입되는 메커니즘이나 성매매 산업의 구조에 대해 무지한 채, 그리고 그 무지함을 인정한 채) 고작해야 슈리님 자신의 도덕적 전제를 '반복'하는 일이니, 이 분(들)이 외치는 '정치경제학'을 어찌 의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저는 슈리님께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슈리님의 전제가 현실과 다르다면, 슈리님 자신이 말한 것처럼, "평범한 의식에게는 경제적 실재의 메커니즘이 완전히 전도되어 나타난" 것이 아닌지 의심해 보라고요. 물론 그 전에 현실이 자신의 전제와 일치하는지 아니면 그 전제를 배반하는지부터 (최소한의 노력이라도 들여서) 확인해봐야겠죠. 한 가지 덧붙이면, 슈리님이 좋아하는 맑스는 27살에 "사려 깊고 진리를 사랑하는 머리를 가진 사람의 유일한 과제는 이 사건의 학교선생 행세를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사건의 특유한 성격을 연구하는 데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 부분은 한국어판 [맑스/엥겔스 저작선집]의 (겨우) 1권 18쪽에 나오는 말입니다. 슈리님은 이 부분을 읽었는지 모르겠습니다. 1권 17쪽까지만 읽은 뒤 맑스주의자가 되었을 수도 있죠. 모든 것을 ‘그냥’ 아시는 분이니...저는 슈리님(과 박가분님)이 맑스주의자라는 것에 매우 강하게 반대합니다. 이들은...아무것도 아니거나 그냥 슈가분주의자입니다.

슈리님의 글은 매 문단이 짐작, 억측, 단언으로 점철되어 있어서, 잘 모르는 사람이 읽으면 '정말 그런가?' 싶게 만드는 신비한 힘을 갖고 있는데, 특히 어떤 사상가를 인용하거나 자신의 강한 믿음을 고수할 때 더 그런 것 같습니다(약점이라면 그중 하나가 무너지면 다른 모든 것들이 의심의 대상이 된다는 거). 예를 들어 슈리님은 라클라우 예를 드는데, 슈리님의 독서가 엉망인 게 어느 정도 밝혀진 지금 와 다시 읽어 보면, 이 분이 라클라우를 읽었는지도 의심스럽습니다(실제로 라클라우 책이 한국에 거의 번역되어 있지 않기도 하구요).

또 슈리님은 "실재는 구조화되어 있다"라는 멋진 말씀을 하시는데(저는 이 말 자체는 긍정합니다), 제 추측상 슈리님은 로이 바스카를 읽은 것 같습니다. 로이 바스카가 정확히 이렇게 말하고 있으니까요. 물론 바스카와 슈리님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강이 있는데, 바스카가 생애의 꽤 오랜 기간 동안 이 명제를 (과학 혹은 사회)철학적으로 '증명' 혹은 적어도 '논의'하려고 애쓴 반면, 슈리님은 '그냥 안다'는 말로 이 명제를 종교의 영역에 위치시켰다는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슈리님은 '직관'적으로 혹은 ‘그냥’ 알고 있었던 명제를 바스카는 멍청해서 그런지 꽤 오랜 시간 붙들고 있었던 셈이죠. 슈리님 만세!

하뉴녕

2011.06.06 15:17:14
*.171.89.97

덧글 감사합니다. 두번째 문단의 내용을 본문에 조금 반영했습니다.

전사

2011.06.06 11:47:33
*.145.58.89

주황색 박스안에 있는 슈가분님들의 글을 보니..

1. 한 줄로 쓰면 될 말을 저렇게 길게 늘여 쓰는 것도 재능이긴 하네요. 근데 그 글쓰기 방식때문에 자꾸 앞뒤 안맞는 말들을 주워담을 수 없는 형태로 내뱉게 되는 듯..

2. 논증없이 선언만 있는 것은 그렇다 치고.. 그 선언을 보다 멋있게 하기 위해 앞뒤로 그럴듯한 포장을 씌우는 것이 글쓰기 습관이 되버린 것이 문제. 글 한편의 구조가 (포장)선언(포장)선언(포장)선언[=그 선언들간의 논리적 충돌]..+논증은 없음..이 되버리고 있으니..

또 자기 선언의 앞뒤가 실존적 고민에서 출발하는 진정성 넘치는 수사들로 매워져 있는 것도 문제, 반론이 제기되었을 때 그 반론을 자신의 진정성에 대한 흠집내기로만 생각하게 되버리니까..

곧 논리의 문제를 감정의 문제로 오인해서 받아들이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게 글속에 논증 대신 그런 포장들이 잔뜩 입혀져 있어 더 그렇게 되는 듯.. 뭔가 좀 글쓰는 스타일을 바꿔야 하지 않을까?

3. 이 대목에서 궁금해 지는 거 하나, 글쓴이들은 자신들이 선언하는 바의 내용과 의미를 실제 현실에 비추어 제대로 알고나 있을까? 가령 노동과 자본의 관계 문제에 관심이 있다면, 그걸 19세기 서유럽 사회를 분석한 맑스의 책속에서의 정의나 그 책에 진술되는 여러 명제의 형태로서가 아닌, 우리 시대 산업 현장에서 그 둘이 대립하는 실제 양상의 일단이라도 제대로 알고 있을까? 그거 모르는 거는 그럴 수 있으니 패스..근데 글쓴이들은 그 현실을 알고 싶다는 생각이나 관심이 "정말로" 있기나 한 걸까?

글속에서 절절하게 선언하고 있는 바의 절반만큼이라도 관심이 진짜로 있었다고 하면, 반론자들의 구체적인 현실을 짚어가려는 그 노력을 그렇게 노상 회피하며 성질만 부리지는 않았을 거 같은데..논쟁을 이기고 지고의 자존심 문제로 보는 것도 아쉽고, 그때문에 자기 고민이 단단하게 여물 수 있는 계기들을 발로 뻥 차버리는 것도 아쉽고, 뭐 여러모로 아쉬운 게 많은 논의인 듯..

4. (앞의 얘기에 이어..)노동자와 자본가의 뒤틀린 관계가 자본주의 사회의 "핵심모순"이다..고 했으면, 그 이유를 실제 노동과 자본과 그들이 맺는 관계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오늘의 현실에 부합하게 설명하는 것이 제대로 된 논의의 순서가 아닐까? 맑스는 자기 시절의 사회상에 비추어 노자관계가 핵심모순이라는 결론을 내렸고, 그 결론을 위해 그 시대상에 비추어 자본과 노동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얘기했겠지만, 그때와 지금의 현실이 같을 수는 없는 거고..그러니 맑스도 오늘의 시점에서 재해석이 되어야는 건 당연한 요구..

그럼 그것을 위한 노력으로 맑스의 책만 보는 되겠는가? 딱 봐도..그럴리가 없지 않은가? 노동과 자본, 그 둘의 관계가 변화된 양상을 "오늘의 관점에서 이해하기 위한 독서와 경험, 성찰과 고민"을 하는 게 기본적인 방향이 되어야는 건데.. 그런 의미에서 맑스의 경구보다는 노동현장을 실제 규약하는 노동법 한구절의 의미를 아는 게 지금 시점에서는 더 많은 도움이 될 듯..

5. (내가 보기에)글쓴 이들의 근본 문제는 이 고전의 현대적인 재해석에 너무도 관심들이 없다는 것, 그러다 보니 논의가 계속 추상의 수준에서 맴돌고 있고, 그게 어떤 형식으로든 구체적인 현실과 연결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 그러니 추상의 수준에서 내뱉는 선언들 마저 아무런 의미가 입혀지지 못한 채(=물론 맑스가 한 말의 의미를 그들이 곡해하고 있다는 것도 큰 문제이긴 하지만..) 공허한 미학적? 말놀음에 그치게 될 뿐.. 결국 똑똑하기 그지없는 한윤형 같은 반론자들에게 무의미..라는 정곡을 찌르는 질타를 받게 되는 것이 당연한 수순..

6. 끝으로 논의가 여기까지 오게 된 더 근본 원인은, 꼬인 글 앞에서 발휘되는 한윤형의 인내심에는 끝이 없고, 꼬인 글의 맥락을 찾아내서 정리하는 실력도 현경의 수준에 이르렀다는 거..하지만 꼬인 글을 애써 풀어놓았을 때 그걸 못알아듣는 치들에 대한 인내심은 그만큼 강하지가 못하다는 게 상대편에게는 비극이 되는 거겠지..

6번은, 이 장황한 논의를 수고롭게 이끌어 온 주인장에게 논의를 지켜본 관중으로서 마땅히 표해야는 경의를 표한 것 뿐, 그닥 아첨조의 얘기는 아니라능..(조금은 그럴 수도? ㅋㅋ)

암튼 긴 논의 잘 봤습니다, 수고하셨네요..^0^

하뉴녕

2011.06.06 18:39:25
*.171.89.97

꼼꼼하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thehole

2011.06.06 11:40:22
*.9.236.157

하나 더 지적하면, 슈리님은 "맑스의 자본주의 체제 분석은 여전히 우리가 이 분야에서 가지고 있는 최고의 진리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맑스의 이론이 무슨 심각한 학문적 반박을 받고 몰락했기 때문에 오늘날 읽히지 않는 것처럼 이야기하는데, 이는 순진하기 짝이 없는 생각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그런 일은 없었다. 주류 학계는 맑스가 발견한 진리들을 그냥 무시하는 것으로 일관해왔다. 동시에 그들은 맑스가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읽지도 않았으면서 시대에 뒤떨어졌는지는 또 어떻게 아는가?) 주류 학계의 영향권 안에 있는 경박한 일반인들은 학계의 견해를 앵무새처럼 되풀이하면서 마치 그것이 자신의 견해인 것처럼 생각한다"라고 말하고 또 "우리가 자본주의의 구조를 분석하는 데 있어서 맑스는 여전히 가장 합리적인 도구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 분야에서 맑스의 이론을 참조하는 것은 정치적 입장과 무관하다고, 다시 말해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고 나는 판단한다"라고도 말합니다.

저는 슈리님 말을 빌려 한 마디만 덧붙이고 싶습니다. (맑스를, 주류 경제학을, 맑스주의 논의를) "읽지도 않았으면서 ..... 어떻게 아는가?" 물론 슈리님은 대답을 준비해 놓으셨겠죠. "그냥 압니다."

드래곤워커

2011.06.06 13:29:05
*.234.105.202

"그냥 압니다"ㅋㅋ 너무 멋있네요.
이 앞에서는 어떤 반론도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공인중립사

2011.06.06 16:08:35
*.183.15.130

오늘은 6월 6일. 모두들 슈가분님을 생각하며 묵념합시당...

김대영

2011.06.07 12:28:56
*.66.49.84

슈리님, 그래도 세상은 아직 살만합니다.

zara

2011.07.23 20:19:06
*.95.32.173

돋네여;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4 어느 '스포츠맨'의 답변 [27] 하뉴녕 2011-07-25 19451
» 인식의 문제와 실천의 문제 : 누가 마르크스를 우습게 만드나? [15] 하뉴녕 2011-06-05 4517
2 슈리/박가분 재비판 (3) - 글의 논지가 안 보이는게 내 책임인가? file [15] [1] 하뉴녕 2011-06-04 5527
1 슈리/박가분 재비판 (1) - 오류도 명백해야 의미를 가진다. [8] 하뉴녕 2011-05-24 4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