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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가톨릭 대학교 교지에 실린 글. 한달쯤 지난 글이라 말미에 나온 현실인식이 현재 정세와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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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 지방선거에서 무엇을 고민할 것인가


왜 20대는 투표하지 않는가?


하나의 질문이 있다. “왜 20대는 투표하지 않는가?”라는. 이 질문은 올바른 질문일까? 올해가 지방선거이기도 하니 역대 지방선거에서 20대 투표율의 현황을 보자. 1998년의 지방선거에서 전체 투표율은 52.7%였고 20대의 투표율은 33.9%였다. 2002년의 전체 투표율은 48.9%였고 20대의 투표율은 31.2%였다. 2006년에 전체 투표율은 51.6%였고 20대 투표율은 33.8%였다. 확실히 이렇게 보면 20대의 투표율은 다른 세대와 차이가 있는 것 같다. 그런데 무언가 좀 이상하다. ‘20대 투표율’ 담론이 본격적으로 이슈화된 것은 아무래도 2007년 대선과 2008년 총선 이후이기 때문이다. 만일 ‘20대 투표율’이 일반적인 투표율보다 낮았던 것이 근 십 년 간의 변함없는 경향성이었다면, “20대의 투표율이 낮아서 정치에 뭔가 문제가 생겼다.”는 식의 상황진단에 어떻게 동의할 수 있을까?


문제의 핵심은 20대의 투표율이 줄어들었다는 것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투표율 자체가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다. 1987년 직선제가 실시되었을 때 대선 투표율은 90%에 육박했다. 이 투표율은 1997년엔 80.7%까지 떨어지더니 2002년엔 70.8%, 2007년엔 63%로 추락했다. 총선 투표율 역시 비슷하다. 1988년 76%였던 총선 투표율은 2000년엔 57.2%까지 하강했고 2004년 탄핵 정국을 맞이하여 60.6%로 상승하는 추세를 거스르는 역전현상을 보였으나 2008년에는 46%로 굴러 떨어졌다. 정치학자 최장집은 이렇게 평한다. "물론 투표율이 낮아지는 경향은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적인 문제이다. 그러나 투표율이 우리의 경우처럼 이렇게 급격하게 떨어지고 그 결과 선거의 절차적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할 지경에 이른 예는 찾아보기 힘들다."(<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최장집, 후마니타스, p20)


투표율이 계속해서 낮아진다는 것은 분명히 심각한 문제다. 그러나 그것은 “투표를 하지 않는 유권자의 의식이 문제다.”라는 도덕적 비난으로 접근해야 할 문제가 아니다. 정치학자 박상훈은 사회학적 정당이론을 대표하는 립셋·로칸(Lipset & Rokkan)의 주장을 인용하여, "정당으로 조직된 대안들이 유권자에 앞서 존재한다."고 말한다. 시쳇말로 ‘찍을 놈이 없어서 못 찍는’ 현실은 유권자에게 책임을 물릴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2007년에 열심히 투표한 사람들, 가령 참여정부가 밉다고 징벌적 투표를 한 유권자들을 ‘우매한’ 사람들이라고 비판해야 할까? 하지만 정당이론에 대한 가장 권위 있는 해석자로 인정받는 피터 마이어(Peter Mair)에 따르면, 현직 정부에 대한 평가가 유권자 투표결정을 좌우하는 '회고적 투표'의 양상은 정당 간 차이가 약해질 때 나타난다. 또한 정치철학자 샹탈 무페는 좌우의 대립이 이슈가 되지 않는 사회에서 정치인의 추문 등 도덕적 이슈가 자주 선거의 핵심으로 떠오른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요점은 정치세력 간의 ‘차이’가 잘 보이지 않는 사회에서, 좌파의 정치세력화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사회에서, 투표율은 낮아지고 사람들은 비합리적인 잣대에 의해 투표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2007년에서 2008년으로 이어지는 민주·개혁세력의 ‘패퇴’는 1) ‘그들이 어떻게 국민들에게 신망을 잃었는지’나 2) ‘그들의 노선이 어떻게 한나라당에 근접하게 되었는지’와 같은 기준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2007년의 ‘국민 책임론’과 이에 이어지는 2008년의 ‘20대 책임론’은 정치세력에 대해 요구되는 책임을 면책받기 위한 특별한 ‘희생양 의식’으로 여겨진다. 


‘국민’이나 ‘유권자’가 비판받을 수 없다는 것은 아니다. 만일 ‘국민’의 선택이 무조건 올바른 것이라고 가정한다면, 우리는 삼권분립과 같은 거추장스러운 제도를 시행할 필요가 없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거대한 여론조사 기구와, 그 여론조사의 결과를 그대로 실행하는 거대한 행정기구일 뿐일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회에선 누구도 ‘정치적 책임’이란 것을 지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국민’의 의지대로 행사된 것이며, 그 의지가 나쁜 결과를 낳았거나 변덕스럽게 바뀌었다 하여 그 의지를 그대로 따른 수족들을 처벌한다는 것은 부당한 일일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체제는 거대한 행정기구가 여론조사 기구를 왜곡하여 실질적인 독재를 행사할 가능성을 차치하더라도, 문제가 있다. 정치의 영역에도 ‘책임’이란 문제가 중요하며 누구도 ‘책임’을 질 수 없는 체제는 자폐적인 것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정치인을 선출하고 그에게 한정된 임기 동안 소신있게 국정을 운영할 기회를 주지만, 그러한 ‘위임’은 한편으론 정치인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2007년과 2008년의 선거처럼 뚜렷한 ‘보수 회귀’ 경향을 보인 선거 이후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 ‘개혁’을 말했던 사람들의 자기반성일 것이다. 그리고 이 반성은 도덕적인 차원의 것이 아니라, 서민들의 마음을 되돌릴 수 있는 방책은 무엇인지를 탐구하는 실천적인 차원의 것으로 귀결되어야 한다.


왜 20대는 보수화되었나?


투표율이 아니라 다른 것을 문제삼는 또 다른 질문도 있다. 그것은 “왜 20대는 보수화되었나?”라는 질문이다. 사실 이 질문은 논리적으로는 앞의 질문과 좀 모순인 것처럼 여겨진다. 왜냐하면 20대가 실제로 보수화 되었다면, 보수세력의 회귀를 바라지 않는 정치세력의 입장에서는 투표율이 낮은 것이 더 유리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20대 탓’을 하는 논의가 두서가 없는 것은, 이 담론(?)들이 일종의 ‘책임 전가’의 심리적 근거에서 나왔다는 사실의 반증이다. 정치세력의 책임의 문제에 관한 앞서의 논의를 상기한다면, “왜 20대는 보수화되었나?”라고 물을 때 중요한 것은 그 현상의 원인이다. 다만 지금의 논의는 이 질문에 대해서 애매하게 ‘그렇다.’는 판정이 나올 경우 그 원인을 20대의 품성으로 치환하고 그들에게 책임을 뒤집어 씌우는 올가미가 작동하고 있는 듯하다. 


그런 올가미가 정당한 일은 아니라는 것을 전제로 하고 상황을 파악해 보자. ‘올가미’를 비판하기 위해 ‘20대 보수화’라는 현상은 없다고 단언하는 것도 상황을 왜곡할 우려도 있기 때문이다. 박권일은 2007년 대선 직후에 시사in에 쓴 칼럼에서 20대의 투표성향을 다른 세대와 비교해서 분석했다. 이 분석에 따르면 2007년 대선의 ‘20대 보수화’ 경향성의 진실은 ‘정동영 비토’에 있었다. 20대는 여당 후보였던 정동영에게 20% 정도 밖에 투표하지 않았다. 이것은 당시 여당과 고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반감이 가장 극심하다는 50대나 60대 이상 연령층에 비해서도 비해서도 낮은 수치였다. 반면 30대의 투표 성향과 단순비교할 때 20대가 정동영 ‘대신’ 찍은 것은 문국현과 이회창이었다. 20대는 30대에 비해 문국현에 대해 6%가량 표를 더 밀어주었고 이회창에 대해서도 2%가량 높은 지지율을 보였다. 특히 20대의 문국현 지지율은 30대(9.9%)와 40대(4.8%)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즉 투표율 성향에서 드러난 ‘20대 보수화’의 핵심은, “비정규직·청년실업 문제로 고통받았던 지난 5년에 대해 어떤 세대보다 혹독하고 냉정하게 심판”한 것이거나 “17대 대선을 주도한 흐름”인 “지난 정권에 대한 심판”, “회고 투표”를 정확하게 보여주는 것이었다. (박권일, 시사in “피도 눈물도 없는 88만원 세대의 복수”, 2008년 1월 28일)    


그런 점에서 보면 확실히 환멸에 의한 ‘회고 투표’와 ‘낮은 투표율’은 연장선상에 있는 것 같다. 전반적으로 볼 때 20대만의 투표율이 줄어들어서 문제라는 식의 분석에는 동의할 수 없지만, 20대 내부의 세대를 분절하여 투표율을 비교해해 봐도 참여정부 시대에 관한 실망감을 추정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조성주는 <대한민국 20대, 절망의 트라이앵글을 넘어>라는 책에서 ‘20대 보수화’론을 분석하기 위해 17대 대선의 투표율과 16대 대선의 투표율을 잘게 잘라 비교했다.


17대 대선 투표율 : 19세 54.2%, 20대 전반 51.1%, 20대 후반 42.9%, 30대 전반 51.3% 

16대 대선 투표율 :                 20대 전반 57.9%, 20대 후반 55.2%, 30대 전반 64.3%


여기서 두드러지는 것은 16대 대선 때 ‘20대 전반’이었던 이들이 17대 대선 때 ‘20대 후반’이 되어 보여준 투표율 저하의 현상이다. 전반적인 투표율 하락의 추이에서도 15%의 하락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조성주는 이 하락의 원인을 ‘대학 등록금 1천만원 시대’의 개막에서 찾는다. 17대 대선 당시의 20대 후반이 다른 세대와 구별되는 삶의 문제라면 아무래도 등록금 문제가 제일 크기 때문일 것이다. 2002년에 6580억 규모였던 학자금 대출액은 2007년엔 2조 1296억으로 증가한다. 2002년에 27만 8천명 정도였던 학자금 대출자의 수도 2007년엔 61만 5천명으로 증가한다. 이런 상황 속에서 20대가 정치 자체에 대한 환멸에 빠지게 되었다면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할까. 그래도 참여정부보다는 이명박 정부가 서민의 고통을 가중시키기 때문에 정동영에게 투표하지 않아 이명박을 만든 책임을 그들이 져야 하는 걸까.

‘희생양 세대 만들기’ 게임에 동참할 생각은 없지만 굳이 그런 식으로 논점을 잡는다면 문제는 386세대의 보수화(?)에 있다. 2002년 대선 때 노무현을 지지했던 이들의 1/3 정도가 2007년 대선에서 이명박을 지지했다는 주장이 있다. 세대 간 투표현황을 보더라도 과거의 386세대인 오늘날의 40대의 이명박 지지율은 50.6%, 60% 지지율에 육박하는 그 윗세대와 비교할 바는 아니지만 40%대 초반의 지지율인 2-30대와는 편차가 크다. 이명박에 대한 지지율만 높고 본다면 40대가 20대를 나무랄 수는 없다는 뜻이다. 아마 40대들은 나름의 희망을 모아주었던 참여정부에서 실망을 느꼈을 것이고, 특히 부동산 폭등을 막지 못한 정부정책 탓에 울며겨자먹기로 부동산 시장에 진입한 후 그러한 투기적 이익을 옹호해 줄 것 같은 이명박을 지지했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그들의 행동이 정부 정책의 실패에 기인한  ‘합리적인’ 것이며 ‘도덕적 비난’의 대상이 아니라면, 20대에 대해서도 같은 설명이 가능할 것이다. 


세대문제의 정치화는 가능한가?


20대의 상황은 만만하지 않다. 조성주는 "사실 알고 보면 20대는 기권한 게 아니다. 지난 10여년, 짧게는 지난 5년간 그들의 문제를 외면했던 사회 전반에 대한 불신임에 투표한 것이다. 20대의 보수화니 탈정치화니 하는 허황된 담론보다 더 심각한 것은 그들이 사회 전체에 대해 보이는 환멸이다."(<대한민국 20대, 절망의 트라이앵글을 넘어>, 조성주, 시대의창, p151)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환멸은 개인적인 차원을 가뿐하게 넘어선다. 엄기호는 20대의 냉소주의에 대해, “이 세대는 정치를 모르는 것이 아니라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어서 정치에 냉소적인 것이 문제였다. 이들은 정치에 대해 아무런 환상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변화라는 것이 어떤 실체적 변화를 이끌어낸다는 것에 냉소했다. 진보니 보수니 싸우는 사람들은 자신이 대단히 큰 차이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말하지만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그놈이 그놈인 상황이며, 어느 놈이 되더라도 내 삶이 별로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통찰이었다.”(엄기호, ”20대는 왜 투표하지 않게 되었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18호)라고 설명한다.


특히 대학생들에게, 사회문제에 대한 ‘진보적인’ 시선을 요구하는 기존의 요구는 외려 시대에 뒤떨어진 것일 수가 있다. 북유럽을 여행한 사람들은 그 나라의 대학생들이 국가에서 등록금은 물론 생활비까지 일부 대주기 때문에 자신들이 성인이 되면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하는 모습을 많이 보았다고 전한다. 과거의 한국 대학생들은 비록 국가에서 많은 것을 받지는 못했지만 일종의 ‘예비 엘리트 집단’으로 대우받았고 그 대우에 대한 책임의식이 있었다. 반면 대학진학률이 80%가 넘는 시대에 살고 있는 오늘날의 대학생들은 개그콘서트의 명대사처럼 “국가가 내게 해준 게 뭐야?!”라고 외칠 수 있을 뿐이다. 물론 대학에 진학하지도 못한 20대의 삶에 더욱 주목해야만 한다는 견해도 있다. 가령 고등학교 졸업 후 삼성 반도체 공장에서 몇 년 일하다가 백혈병으로 숨진 스물 세 살 박지연 양의 사례는 한국에서 대학을 피하고 산다는 것이 가져올 위험의 총합을 비극적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볼 때 오늘날의 대학생들은 타인의 삶에 대한 부채의식이 아니라 자신의 삶의 문제에 천착해야할 처지에 있다.


과거와는 달리 오늘날의 대학생들은 타자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삶을 ‘서사화’할 때에 세상도 사회도 깨달을 수 있다. 사실 이 깨달음은 작은 것이 아니다. ‘나’의 생활의 문제와 정치의 관련성을 깨닫는 것이 ‘정치’의 문제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젊은이들이 정치에 관심이 없다.’는 비난의 수사는 역설적으로 다음과 같은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그럼 늙은이(?)들은 정치에 관심이 있을까?’ 택시운전석에 앉아서, 혹은 거실에 앉아서 신문을 보면서, 이명박계와 박근혜계의 알력다툼에 대해 삼국지의 군웅들의 세력싸움을 서술하듯이 ‘썰’을 푸는 아저씨들은 과연 ‘정치’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일까?


원론으로 말하자면, 모두 알다시피 민주주의 국가의 기본적인 이념은 국민이 자기 자신을 통치하는 것이다. 모든 종류의 정치제도는 조금이나마 그 이상에 근접하려는 노력의 표현이다. 따라서 올바른 종류의 정치담론은 한 사람의 시민이 자신의 삶을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라는 문제에 대해 이성적으로 고찰하고, 그 고찰의 내용을 공동체에 투영하는 것이라야 한다. 만일 그런 이상이 어느 정도 구현된 사회라면, 모든 종류의 정치논의와 선거담론은 이런 모습을 지닐 것이다. “나는 대한민국이 이러이러하게 되기를 희망한다. 그러므로 내 생각을 대변하는 그를 지지한다.” 대한민국이 이런 진술을 일종의 코미디로 만드는 사회라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생활세계의 문제와 정치적 문제들을 보다 접근시키는 것일 게다. ‘20대 세대 문제의 정치화는 가능한가?’라는 물음 역시 이러한 보편적인 기획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사실이 그렇다. 세대문제를 ‘20대’의 상황만을 대변하는 몇 개의 정책으로 정립하여 공약으로 들고 나온다고 하면, 다른 세대는 물론 20대의 지지도 얻기 힘들다. 오늘날의 20대는 특별히 동년배의 후보에 대한 호감을 가지고 있지 않다. 예전에 비해 스스로 후보로 나서는 경우도 줄어들었는데, 이미 한국의 ‘정치인’이 젊은이를 그런 방식으로 수급하는 일이 드물다는 사실을 눈치챘기 때문이다. 세대론적인 잣대로 “지금의 20대들 중 어떤 이들이 정치인이 될 것인가?”라고 질문해 봤을 때, 보수 진영은 고위 공무원이나 기업가들, 진보진영은 진보적 생각을 지닌 변호사 등의 전문직들이 정치인을 구성할 것이라고 답변할 수 있고, 게다가 그 ‘데뷔’의 시기는 적어도 40대 이후, 그러니까 대충 20년 후의 일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그 이전에 데뷔한 사람들에겐 어느 정파이든 간에 ‘정치 자영업자’의 험난한 가시밭길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오늘날의 20대들은 어렴풋이 이 사실을 깨닫고 있는 것 같다.


따라서 세대문제를 세대론을 넘어선 방식으로 정치화시키는 작업이 필요하다. 가령 오늘날의 세대문제의 현황을 주거권·교육권·노동권 등으로 나눈다고 생각해보자. 각각의 주제에 따라 구체적인 상황이 있겠지만, 문제의 핵심은 간명하다. 한국 사회가 ‘집값’은 높이고 ‘사람값’은 낮추는 체제를 운용해 왔다는 것이다. 한국의 중산층은 부동산 가격의 지속적인 상승을 통해 자산을 축적하면서, 그렇게 해서 훼손된 기업의 경쟁력을 신규 노동시장에 진입한 이들의 임금을 낮추면서 보충해왔다. 노태우 정부 이후 무분별하게 허용된 사립학교들은 이윤추구를 위해 감당이 안 될 정도로 정원을 높였고, 경쟁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한 자본축적을 위해 등록금을 높이고 있다. 그러한 추세의 결과가 그 체제를 지지해왔던 그들 중산층의 자녀조차 자신의 월급으론 독립을 꿈꾸지 못하게 된 ‘멋진 신세계’인 것이다. <88만원 세대>가 베스트셀러가 된 까닭은 이 책의 담론이 그들 중산층의 위기의식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엔 가령 ‘세대문제’와 ‘4대강문제’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세대문제는 “과연 한국 자본주의는 재생산이 가능한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건설자본과 그에 물린 가계들, 그리고 사립학교를 점유하고 있는 가문들의 이익을 보호하는 체제가 당장 몇 년은 몰라도 지금의 세대가 한국 경제의 주역으로 자리매김해야 하는 수십 년 후까지 지속가능하지는 않을 것 같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식에서 세대문제는 한국 사회의 여느 문제와 구별되어 있는 ‘별도의 문제’가 아니며 따라서 그 해법도 20대만을 위하는 ‘별도의 것’으로 구성될 수 없다. 그러므로 자신의 처지에 대한 자각에서 출발한 젊은이의 정치의식은 한국 사회에 대한 새로운 디자인이 필요하다는 정치적 욕망으로 전환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지방선거와 투표의 의미?


하지만 이와 같은 근본적인 결론을 지방선거에서 온전히 구현할 수는 없다. 이 글의 논지를 문자 그대로 따른다면 ‘88% 투표율’을 위한 청년단체들의 노력도 어른들의 잘못된 프레임에 말려들어간 결과일 것이며, 찍을 수 없는 정치세력들을 그대로 내세운 한국 정치의 현실은 기권을 권유하고 있는 것일 게다. 하지만 정치세력은 기권을 한다고 해서 새로운 정치세력을 만들어 주지 않는다. 만일 시장경제라면 물건을 사지 않는 폭넓은 층을 겨냥한 새로운 상품이 디자인될 것이다. 하지만 선거는 시장경제가 아니다. 그들은 많은 표를 얻지 않아도, 단지 반대당파보다 많은 표를 얻어도 승리자가 획득할 수 있는 모든 재화를 획득한다. ‘틈새시장’을 노려 짭짤한 수익을 올리는 중소기업은 가능하지만 특히 비례대표의 비율이 낮아 ‘사표’를 양산하는 한국의 선거제도에서 군소정당들은 하루 하루를 힘겹게 버텨낼 뿐이다. “좋은 정당을 만들어야 좋은 정치가 가능하다.”는 최장집과 박상훈 등 후마니타스 정치학자들의 말이 옳다 하더라도, ‘좋은 정당’을 강제하기 위해서라도 어떠한 열망을 보여주는 것은 필요하다.


지방선거의 구도는 참신하지 않다. 간단히 말하면 이 선거는 이명박과 박근혜와 노무현의 대결이며, 차기 대권과 남은 임기의 주도권을 둘러싼 한나라당 내부 계파의 암투와 ‘노무현 추모 열기’에 편승하여 존재가치를 인정받으려는 제 야당 세력들의 분투, 그리고 제 몸 하나 누울 자리 마련하기 위해 발버둥치는 진보세력의 암울한 몸짓이 상존하는 선거다. 지방선거의 꽃인 서울시장 선거에서의 한나라당 주자와 민주당 한명숙의 대결은, 아마 정치권에겐 이 선거 전체의 의미를 결정지을 싸움일 거다. 민주당은 이명박 정부의 남은 임기 동안 ‘견제론’을 펼칠 수 있는 최소한의 보루를 이 선거에서 얻으려고 할 테고, 한나라당은 최소 ‘15년 집권’의 플랜을 위해 이 싸움에서 이겨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노회찬과 같은 진보진영의 주자들은 선거라는 국면에서 한나라당은 물론 한명숙과도 현저히 다른 제 정체성을 홍보해야 하는 의무와 ‘반MB 진영의 승리를 위한 단일화’라는 정치적 요구 속에서 고뇌할 것이다. 총선보다 투표율이 낮은 것이 지방선거의 추세였지만, 몇 가지 흥행요소들이 결합되면 적어도 수도권에서만큼은 추세에 비해 높은 지지율이 나올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그런 일들이 그것 자체로 한국 정치에 희망을 던져주지 않음은 물론이다.


나조차도 서울시장 선거에 초미의 관심을 기울이긴 하겠지만, 지방선거는 ‘여의도 정치계급’이 관심을 가지는 ‘중앙정치’와는 다른 영역을 선출하는 선거다. 우리의 경우 그런 지방권력들도 지금껏 중앙정치에 종속되어 있었다는 것이 문제일 것이다. 물론 이런 문제는 하루아침에 시정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결국 그런 문제를 시정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정치적 문제에 대한 좀 더 많은 관심이다. 맹목적으로 투표를 한다, 안 한다, 로 결론을 내리지 말고, 자신이 행사할 권리들에 대해 모두 조사해 보자. 각각의 투표에서 내 삶의 문제를 대변하는 후보들이 있는지를 알아보자. 그렇게 한 후 투표할 수 있는 만큼만 투표하고, 투표할 수 없는 선거에 대해선 그냥 기표하지 않은 채 집어넣어도 된다. 사랑에서 상처를 입었다고 하여 사랑을 거부하는 일이 바람직한 일은 아닌 것처럼, 사랑을 해보지 않고 냉소적으로 상처를 거부하고 마음의 문을 닫는 일이 비참한 일인 것처럼, 당신의 소중한 권리를 조심스럽게 행사하는 것은 그 어떤 종류의 냉소적 진실보다 가슴 떨리는 경험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정말이지 그렇게 되기를 빈다.



랄랄라

2010.06.01 11:46:43
*.118.82.99

굉장히 공감가는 글, 잘 읽고 갑니다. =)

jk

2010.06.01 12:10:15
*.78.108.122

늘 아무 말 없이 잘 읽고 갑니다만, 교명이 잘못되었네요. '가톨릭대학교'입니다.

먼훗날언젠가

2010.06.01 13:12:35
*.95.247.6

"문제의 핵심은 간명하다. 한국 사회가 ‘집값’은 높이고 ‘사람값’은 낮추는 체제를 운용해 왔다는 것이다." 현재의 문제를 잘 짚어주는 문구라 생각됩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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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프레시안] 우석훈, 말의 덫에 빠졌다 - [기고] '88만원 세대'가 바라보는 '<88만원 세대> 논쟁' 上 [13] [2] 하뉴녕 2009-02-10 2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