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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이중구 동대문경찰서장이 장안동의 성매매업소에 대한 집중 단속을 실시해 여론의 주목을 받았을 때 나와 지인들은 영화 ‘다크나이트’에 나오는 지방 검사 하비 덴트를 떠올렸다. 하비 덴트는 배트맨과는 달리 국가의 시스템 안에서 고담시의 범죄를 소탕하려다가 좌절한 인물이다. 그런 연상작용은 이 서장의 강단 있는 조치가 실질적인 효과를 보기는 어려울 거라는 우려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당장 2000년 종암경찰서장으로 미아리 집창촌 단속을 진행한 ‘스타’였던 김강자 한남대 교수도 단속만으로는 사태를 개선시킬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는 상황이니 말이다. 유천동 성매매집결지 해체에 나선 것으로 뒤늦게 알려진 황운하 대전중부경찰서장에 비해서도 이 서장의 조치는 논란의 대상이 되는 것 같다. 같은 성매매라도 유천동의 경우 선불금 강요, 감금과 감시 등 인권의 문제가 존재하는 곳이라 강력한 처벌의 정당성을 강변하기가 훨씬 더 수월한 편이다.


하지만 일단은 이 서장의 행동에 지지를 보내고 싶다. 이 서장은 지역민의 민원을 받아들여 장안동 성매매업소에 대한 집중단속을 결심했다고 한다. 공직자가 민의를 수렴해 공공서비스를 제공하려고 하는 자세는 훌륭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설령 그 민의라는 것이 윤리적인 동기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동네의 집값을 올리려는 욕망과 결부돼 있었고, 그 민의의 수렴이 한나라당 홍준표 원내대표의 지역구 관리에 도움이 될 거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그의 행동이 지역민의 요구에 반응한 것이라면 그 요구의 동기나 그 행동의 결과가 어떻든 그 자체로 평가받을 만하다.


사실 더 흥미로운 것은 이 서장과 하비 덴트가 처한 환경의 유사함이 아니라 그 차이점이다. ‘다크나이트’의 하비 덴트는 재벌 총수 브루스 웨인(밤에는 배트맨이 되는 그 사람)이 주최한 정치자금 모금 행사의 주인공이다. 미국의 경우 대개 지방 검사가 선거를 통해 선출되고 그 검사들이 경력을 쌓아 시민들의 지지를 얻어 판사로 선출되거나 이후 정치권에 진출하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일 하비 덴트가 대중의 지지를 받는다면 그는 더욱 책임 있는 지위에 올라갈 가능성이 높다. 반면 한국의 하비 덴트들은 아무리 정의감을 뽐내도 그런 요행을 기대하기 어렵다. 시민의 요구에 귀 기울이기보다 대통령과 경찰청장의 심중을 읽고 촛불시위대를 검거하기 위해 노력하는 쪽이 훨씬 더 일신의 안위와 출세에 도움이 될 테니 말이다.


이 차이점은 한국 정치가 시민들의 총체적인 불신을 사게 된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국가 체제와 문화가 엄연히 다른 미국의 제도를 곧이곧대로 수입하자는 것은 아니지만, 한국의 경우 다른 민주주의 국가들에 비해서도 민의를 수렴하는 기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중앙정치’의 벽이 너무도 높아 사회로부터 분화된 그들을 ‘여의도 정치계급’이라 불러야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수많은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나와도 선거날이 멀다는 이유로 그들은 의연(?)했다. 태풍이 몰아쳐도 문을 꼭 닫고 차를 마시면 찻잔은 흔들리지 않는다는 식이다. 촛불이 ‘찻잔 속의 태풍’이 아니라 여의도가 ‘태풍 바깥의 찻잔’이었던 셈이다. 이렇게 중앙정치와 시민들의 요구가 일상적으로 분리되고 한편으론 중앙정치의 권한만이 강력하다는 사실이 명백했기 때문에 우리의 정치평론은 일종의 ‘중앙정치 중독증’에 빠지게 됐다. 촛불시위의 성과의 미흡함에 대한 분석은 ‘대의민주주의의 한계’ 같은 추상적인 용어가 아니라 이러한 현실의 직시로부터 시작돼야 하지 않을까. 아울러 진보진영은 이 ‘중앙정치’의 딜레마를 지역사회로부터 어떻게 돌파해나갈 수 있을지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시작해야 할 것이다.


<한윤형 | 대학생>


不勞苦

2008.10.02 13:28:18
*.143.178.204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이정환 님의 추천을 받는 분과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게 되어 영광이에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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